|
|
<한문수필 ‘견돈설(犬䐁說)’ 어찌 오랑캐와 짐승에게 절을 하리오.> 고영화(高永和)
이번 지면에 소개하는 고전 한문수필 <견돈설(犬䐁說)>은 일제강점기 거제도 유림을 대표했던 유학자 명계(明溪) 김계윤(金季潤 1875~1951) 선생의 작품이다. 선생의 자(字)는 사범(士範), 본관은 의성(義城), 호(號)는 명계(明溪) 또는 명동(溟東)이고 한문학 문집을 남긴 문사(文士)이다. 그리고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문하록(門下錄)에 제자로 기록되어 있는 거제도 출신으로는 유일한 분이며, 거제도 성리학의 정통(正統)을 계승한 마지막 한학자(漢學者)이자 덕망 높은 처사(處士)로써, 청빈하고 고상한 스승이었다.
작품 <견돈설(犬䐁說)>은 구한말 외세의 침략을 막으려는 반외세 자주 운동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창작된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글 내용 속에서 반외세 운동의 이념적 바탕이 된 위정척사(衛正斥邪)가 그 저변에 깔려있다. 귀한 사람이 천한 개돼지에게 절을 할 수 없듯이, 아무리 강한 오랑캐라 할지라도 두려워 굴종해서는 안 된다고 강설한 내용이다. 하지만 상대의 학문과 문화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고루한 성인의 학문을 추구하고 지나치게 전통 사회체제를 고수하고 말았다. 이에 끝내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지는 답답한 결말로 마무리했다.
저자 명계 선생은 전통을 고수한 유학자인지라, 일제강점기 집안 종손(從孫)이 진주부 사범학교에 가게 되자, 서양의 학문을 배워 조상의 뜻을 거스른다면서,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비록 그가 시대의 큰 물결을 읽지 못한 점에선 아쉽긴 하나, 성리학적 질서를 수호하고자 하는 그의 애틋한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 아시다시피 조선시대는 유교를 국가 통치의 근본 원리로 삼았다. 유교는 중국 춘추 시대의 공자(孔子)가 만든 사상으로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오행(五行)의 덕목을 강조했고 삼국시대에 우리나라로 전해졌다. 이어 유교적 윤리도덕과 명분론적 질서의 보편성을 교설한 주자(朱子)의 성리학은 고려말기 원나라를 통해 들어와 조선시대 내내 학문·사상의 지배적 조류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누렸다.
유교가 들어온 이후로 우리나라는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는 중화사상(中華思想)을 신봉하였다. 이후 17세기 명나라가 청나라에 의해 멸망한 이후부터 우리나라가 중화사상을 계승한 유일한 국가라고 자부하며, 하늘의 도(道)를 받들며 문명과 예의가 가위 천하제일이라고 자위하기에 이르렀다. 19세기에 들어와서 이런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은 서양의 제국주의 침략에 대응하여, 개항에 반대하는 척사론의 논리로 발전했는데, 화이적인 세계관과 유교적인 군신의 명분을 가지고 금수(禽獸)지역인 양이(攘夷)를 물리치고 중화를 고수하자는 사명을 갖게 된다.
그런데다가 조선말기에 이르러, 서양의 사상은 조선의 유교 윤리를 타락하게 하고 일본의 행태는 조선의 경제적 몰락을, 청국의 국정 관여는 조선의 국력을 약화시키게 만들었다. 이로부터 외세는 삿된 것(邪)이라고 하면서 배척 대상으로 삼고 외세를 배척하는 마음을 강렬하게 표출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로 인해 강한 존화의식(尊華意識)이 그 바탕에 깔리게 된 것이다.
○ 게다가 중국 한민족(漢民族)은 예로부터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며 모든 것이 중국을 중심으로 하여 전세계에 퍼져 나간다고 믿는 중화사상(中華思想)을 통해 자기 민족의 우월성을 자랑해왔다. 중화사상은 그 배후에 이민족을 천시하는 관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화이사상(華夷思想)이라고도 한다. 중화(中華)가 중심에 있고, 그 바깥에 오랑캐(夷狄)가, 또 그 바깥에 짐승(禽獸)이 있다고 믿으면서 중국 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해왔다.
한편 조선시대 우리나라는 중국의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중국의 사대주의와 신분제 사회의 공고한 틀 속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또한 아무 쓰잘데기 없는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을, 실체도 없이 수백 년 동안 공리공담(空理空談)이나 늘어놓고, 관념적 사변(思辨)놀이로 인해 시대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결국 민생은 도탄에 빠져, 나라마저 잃게 된 불행한 역사를 만들고 말았다.
그런고로 더욱 이러한 배경에서 창작된 작품 <견돈설(犬䐁說)>을 이번 기회를 통해 한번 더 돌이켜 살펴보고, 현대에 사는 우리는 이를 타산지석을 삼아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와 다른 문화를 인정하지 못하는 편협한 사고와 고리타분한 확정편향성을 깨고 나와서, 미래를 위한 변화에도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어야 하겠다.
● 다음 한문수필 <견돈설(犬䐁說)>은 구한말기 명계(明溪) 선생이 선선한 가을밤에, 거제시 연초면 명동리에서 11명의 학동들을 가르치면서 문답(問答)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그 당시 선생은 거주지 명동리에 살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강학을 했다. 성현의 가르침을 깨닫고 기쁘게 따라가 즐길 수 있는 군자가 되기 위함이었다. 선생은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경(敬)과 예(禮), 의(義)에 바탕을 두고, 가문과 지역사회와의 소통을 유지했다. 그는 거제도의 마지막 성리학자로서, 끝까지 도학(道學)의 정통을 지키면서 만년에 이르기까지 이를 성심껏 후인들에게 전수하는 데 힘썼고 마지막 유종(儒宗)의 구실을 했다.
○ 작품 내용에서 선생이 이르길, 옛날 당나라의 문인이자 사상가였던 한문공(韓文公) 한유(韓愈, 768~824)가, “중화민족은 오랑캐와 짐승의 주인이니 오랑캐와 짐승(개돼지)에게 절을 한다면 주인 된 도리를 얻지 못한 것이다.”라며, 중화가 오랑캐에게 굴종하니 “부끄럽고, 감정이 치솟아 통곡하고 한탄한다.”고 했고, 또한 금나라에 굴하지 않고 항거한 호담암(胡澹菴, 胡銓, 1102~1180)이, “삼척동자가 지극히 무지하다.”라며 ‘지금 금나라는 더러운 오랑캐 개돼지와 같은데 어찌 무릎 꿇어서야 되겠느냐’고 주장했던 역사를 상기 시켰다.
이에 명계 선생은 제자들에게 지금 세상도 양이(攘夷)로 인해 세상이 변하였으니 어찌하겠는가? 라며 거제도 유학(儒學)의 마지막 종장(宗長)답게 ‘존화양이의식(尊華攘夷意識)’을 강설하였다.
또한 “우리 동방(東邦)이 비록 궁벽한 바다 모퉁이에 있지만 단군(檀君)으로부터 기자(箕子)를 지나서 중화의 문화로써 오랑캐의 풍속(風俗)을 변화시킨 지 4천여백 년에 이르렀고 문명과 예의가 가위 천하제일이다.”면서 하늘의 도(道)를 받들며 유문(儒門)과 예의의 중화사상을 이어온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서방세계와 우호관계를 맺거나 짐승에게 굴종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덧붙였다. 고로 이러한 유교의 사상을 ‘그 의(義)로써 아름다움을 삼아야(因嘉其義)’ 할 것이라면서 마지막으로 당세(當世)의 준걸(俊傑)들에게 엄히 알려야 한다며 끝맺음했다.
<견돈설[犬䐁說] 개돼지에게 절한 이야기> 명계(明溪) 김계윤(金季潤 1875~1951)
9월19일 저녁 11명의 동자(童子)가 줄지어 앉아 공부하고 있길래 내가 묻기를, “사람들이 혹여 그 개돼지에게 모두 절을 하니까, 그로인해 다른 사람들도 따라 절을 한다면 마음이 어찌 부끄럽지 않겠느냐?”고 하니, 크고 작은 9명의 아동이 모두 말하길, “세상 사람들이 모두 절을 한다면, 나 또한 절을 할 것입니다. 혐오할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 가운데 옥봉수(玉奉銖) 신인선(辛仁銑), 두 아동이 말이 없길래 내가 묻기를, “너희는 어찌 말이 없느냐?”하니
봉수(奉銖)가 말하길, “사람이 귀하다는 것은 짐승은 천하다는 것이고 그러니 개와 돼지 같은 가축은 지극히 천하다는 것이지요. 어찌 지극히 귀한 사람이 지극히 천한 짐승에게 절을 하리까? 사람 모두가 절을 하더라도 나는 당연히 그러지 않겠습니다.”
인선(仁銑)이가 말하길, “사람이 개에게 절을 하는 것은 필시 개가 사람을 해하고자 하는 생각 때문에 그 강함에 두려워 절을 하는 것일 겁니다. 먼저 몽둥이로 쳐 죽여서 사람이 굴복하지 않는 것이 도리(道理)일 겁니다.“하였다.
내가 다시 말하길, ”먼저 쳐 죽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네가 말한 것은 이치가 있다.“하니 인선(仁銑)이 가만있기에, 내가 너는 ”참으로 아름답구나.(美矣哉)“고 하고 봉수(奉銖)에게도 똑 같이 칭찬했다.
한문공(韓文公)이 말하길, “사람(중화민족)은 오랑캐와 짐승의 주인이다. 사람이 짐승에게 절을 했다면 주인 된 도리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곧 사람이 짐승이라면 짐승 아래에서 다시 나온 것일 거고 저 오랑캐라는 것도 개돼지와 일체(一體)인 것이다. 중화가 오랑캐에게 굴종하니 한유(漢儒, 한나라 유학자들)가 “발이 위에 있듯이 사물(事物)이 거꾸로 되어 부끄럽고, 감정이 치솟아 통곡하니 눈물이 흐르도록 한탄한다.”고 했는데 하물며 지금은 그것으로 인해 세상이 변하였으니 어찌하겠는가?
금나라에 굴하지 않고 항거한 호담암(胡澹菴, 胡銓, 1102〜1180)이 봉사(封事)한 글에서 “삼척동자가 지극히 무지하다.”하였다. 지금 금나라는 더러운 오랑캐인데 바로 개와 돼지와 같으니 무릎 꿇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당당한 제국(帝國)으로 서로를 이끌고도 개돼지에게 절을 하니 일찍이 어린아이도 수치스러워 했다. 또한 당연히 엄히 주벌에 처하고 간악한 죄를 물어야 할 것이다.
봉수(奉銖) 그 역시 오늘날 우리나라를 보면서 말하길, “우리 동방(東邦)이 비록 궁벽한 바다 모퉁이에 있지만 단군(檀君)으로부터 기자(箕子)를 지나서 중화의 문화로써 오랑캐의 풍속(風俗)을 변화시킨 지 4천여백 년에 이르렀고 문명과 예의가 가위 천하제일이었다. 저기 바다의 다른 문명을 보면 천할 뿐만 아니라, 하늘의 도를 바꾸려고 한다. 이른 바, 모든 것에 통달(通達)하고 지혜가 밝고 재주와 지혜를 스스로 배워 짐승을 다시 개와 양 아래로 반출하도록 해야 하니 굴종하는 것은 불가하다.
또한 몸과 부귀를 제도(濟度, 교화)하고 유문(儒門, 유학의 도)에 종사(從事)하여 그 자식과 손자에게 혼탁하여 차츰차츰 물들어 가는 것을 빼어 일으켜 세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혹 저 서방세계와 우호관계를 맺거나 혹은 저들의 권세를 믿는다면 고로 어찌 되겠는가? 아! 지금 우리는 저들로부터 마음대로 생과 사가 오로지 달려 있어, 오직 명하는 대로 쫓아야할 운명인데 어찌 오직 조아려야만 하겠는가?” 이미 개돼지가 되었더냐. 또한 봉수(奉銖)의 부끄러움이리라. 그 의(義)를 아름다움으로 삼고(因嘉其義) 그 말을 기록하여 당세(當世)의 준걸(俊傑)들에게 알려 엄히 물리쳐야 할 것이다.
[九月十九日夕十一童子列坐余問曰有犬䐁於此人或拜其犬䐁因使爾拜之爾等亦拜之而心不羞怪乎大小九童皆曰世人皆拜之我亦拜之何嫌其中玉奉銖辛仁銑兩童無言余曰爾何無言奉銖曰人爲貴獸爲賤而犬䐁獸之至賤也豈可以至貴之人拜至賤之獸乎人雖盡拜我當不然仁銑曰以人拜犬者必是犬將害人故畏其强而拜也豫先椎殺則人無拜屈之理矣更問爾言亦有理然未能豫先椎殺則柰何仁銑莫對余曰美矣哉奉銖之言也韓文公曰人者夷狄禽獸之主人也人而拜獸何但不得其爲主之道而已哉卽以人爲獸而反出於禽獸之下也夫夷狄者犬䐁之一體也華之屈於夷漢儒猶謂足反居上之可羞而發慟哭流涕之歎況今變而爲之者乎胡澹菴封事曰三尺童子至無知也指犬䐁而使之拜則怫然怒今醜虜犬䐁也堂堂帝國相率而犬拜䐁曾童孺之所羞又當嚴誅魁奸之罪矣奉銖其亦觀今日吾東而言歟夫我東邦雖僻在海隅自檀君歷箕聖而變夷華之以至于四千餘百年文明禮義可謂天下第一而視彼異類不啻大羊之賤矣天道變耶所謂通明才智者自學爲獸反出犬羊之下者不可指屈又聞身兼富貴而從事儒門者擧使其子其孫渾作浸染或結誼於彼酋或挾權於彼所此謂何如哉噫今我之生殺操縱一在於彼惟令所從則何但拜之而已卽犬䐁之犬䐁而亦奉銖之所羞也因嘉其義而記其言以嚴斥當世之通俊者]
[주1] 한문공(韓文公)은 당나라의 문인이자 사상가였던 한유(韓愈, 768~824)이며, 자(字)는 퇴지(退之), 호는 창려(昌黎)이며 시호는 문공(文公)이다. 중국과 일본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후대 성리학(性理學)의 원조이다. 또한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세인들의 숭앙을 받았으며, 사후에 그의 고향과 관리로 재직하였던 지방에 그를 기리는 사당이 세워졌는데 조주의 한문공 사당은 그중 대표적인 사당이라고 할 수 있다. 조주는 한유가 헌종(憲宗)이 불골(佛骨)을 모신 일에 대하여 〈간불골표(諫佛骨表)〉를 올려 부당함을 간언하였다가 좌천되어 자사(刺史)를 지낸 곳이다. 사당 안에는 36개의 비석이 있는데, 그중 한유를 존경하던 송나라의 소동파(蘇東坡)가 쓴 〈조주창려백한문공묘비(潮州昌黎伯韓文公廟碑)〉와 명나라의 서모(徐瑁)가 쓴 〈조주창려묘비(潮州昌黎廟碑)〉가 가장 뛰어나다.
[주2] 호담암(胡澹菴) 호전(胡銓, 1102~1180)은 중국 宋(송)나라 때 강직한 신하의 표상이었다. 그는 강서성(江西省) 길주(吉州) 여릉(廬陵) 사람이다. 자는 방형(邦衡), 호는 담암(澹庵),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1128년 벼슬길에 나섰을 때는 나라가 수도를 임안(臨安)으로 옮긴 지 겨우 1년밖에 안 되었을 때였다. 고종 때 추밀원 편수관으로 당시 진회(秦檜)가 금나라와 화의를 주장하여 금나라 사신이 강남지방을 조유한다는 명분으로 임안에 이르자 호전이 글을 올려 진회와 손근(孫近) 및 금나라 사신 왕륜(王倫) 3사람의 목을 베야한다고 상소했다가 진회의 노여움을 사 길양군에서 귀양살이 했다. 그 후 진회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여 그를 다시 봉의랑에 복위 시키고 이어 소대하였다.
● 참고로 이번 작품과 같은 한문학 문체(文體)인 《설(說)》에 대해 살펴보겠다. 예전의 ‘설(說)’은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의견을 서술하면서 이치를 설명하는 교훈적인 ‘한문 수필’이라 정의할 수 있다. 고려 시대 등장한 교술 갈래에 속하며,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교훈을 주기 위한 설득적인 수필로서 설득적 논설문에 가깝다. 주제는 대개 삶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과 통찰력이며, 유추와 예시가 두드러진다.
○ 왕조시대 우리 선인들이 남긴 문집에는 여러 가지 문체(文體)의 글이 있다. 현대 우리들이 사용하는 문학 장르를 시(詩), 소설(小說), 수필(隨筆), 논문(論文) 등으로 분간하듯이, 옛날 한문학에도 다양한 형식의 문체가 있어서 글에 담고자 하는 내용에 따라 문체 형식을 달리 하였다. 이에 논(論), 서(書), 시(詩), 기(記), 표(表), 송(頌), 찬(贊), 게(偈), 명(銘), 소(疏), 장(狀), 책(策), 차(箚), 잠(箴), 계(啓), 록(錄), 설(說) 등등 참으로 다양했다. 특히 설(說)의 매력은 창의(創意), 창작성(創作性)에 있다 보니 이미 있는 사실의 범주에 매이지 않아, 자유를 느끼게 만든다.
○ 이러한 형식의 설(說)을 한자어로 번역하면 ‘이야기’라 할 수 있지만 현대의 《수필》에 해당하는 문학의 한 장르다. 마치 역사 속의 유명하신 어른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처럼 《설(說)》을 통해서 수백 년 전의 그 희로애락을 공감할 수도 있다는 것은 큰 공부이자 즐거움이다. 이에 설(說)은 우리나라 옛 선인들이 수백 년 전에 실제로 생활에서 겪은 것이거나, 가상해서 만든 이야기로 글쓴이의 애환이 묻어나게 마련이다. 글을 쓰신 분들이 대개, 학문이 높은 학자(學者)나, 지위 높은 관작(官爵)의 어른들이라 엄격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어려워할 만도 하지만, 글을 읽다 보면 뜻밖에 자상하게 다가온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