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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정권에서 도와주지 말라!!!
(제적당한 명진스님이 재야인사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한 말)
명진스님
취재 /전현자
기자: 스님들은 뭐 하는 분들이십니까?
스님: 참 막연한 질문이기도 하고, 우문현답이 될지 현문우답이 될지는 잘 모르겠는데 일단 뭐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고, 부처님 말씀에 의지해서 공부하고 수행하고 또 수행한 바탕으로 많은 사람들한테 고타마 싯타르타의 가르침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통칭 일러서 스님이라 하지요.
기자: 스님께서 생각하시기에 한국의 스님들께서 스님께서 설명 해주신 대로 애쓰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스님: 대부분의 스님들은 자기 수행과 포교, 내지는 사찰도량 관리를 하는 데 힘을 다해서 성심성의껏 하지만, 한 150명 가량 되는 종단의 권승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총무원장을 비롯해서 종회의원 81명, 본사주지, 이렇게 연결되어있는 150~200명 가량은 돈으로 그 자리를 사고파는데 익숙해져있는 사람들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스님들도 몇 있겠지만, 대부분의 종단의 권력 주변에 있는 스님들은 대체적으로, 기자님이 물으시는 그런 올바른 승려들의 삶과는 거리가 있다고 봐야겠죠.
기자: 현 총무원의 행정을 맡거나 권력을 갖고 있는 분들은 주로 스님답지 못하다는 견해를 갖고 계신지요?
스님: 물론 현재만이 아니라 예전에도, 카톨릭도, 개신교도 마찬가지고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 종교인들한테는 이성의 문제겠죠. 카톨릭도 예부터 있어왔고, 불교도 옛날에 은처승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왜 없었겠어요. 다 있었어요. 암암리에 다 알고도 있었고. 스님들이 돈을, 스님답지 않게 많이 모으는 사람들도 있고. 그러나 그런 것들은 전부 다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암암리에 이루어졌던 것들이에요. 그런데 지금 자승 총무원장이 들어서고 난 뒤부터는 그런 은처 문제가 공공연하게 드러났어도, 거기에 대해서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것이 되 버린 거죠. 거의 조직 같이 돼버렸어요. 은처, 조직. 돈 많은 중들끼리의 조직이 형성되었다고 봐집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뻔뻔해 진거죠. 잘못이 있거나 허물이 있을 때, 일반적인 사람들은 부끄러워합니다. 창피해하고. 잘못은 누구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깥으로 드러났을 때, 얼마만큼 부끄러워하고 얼마만큼 창피스러워 하는냐가 중요하지요. 매우 안타깝지만 창피해서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런데 지금 현재 조계종의 권승들은 부끄러움이 없는 거 에요. 부끄러움이 없는 것을 보통 우리가 얘기할 때 짐승 같다고 얘기합니다. 짐승이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짐승은 부끄러운 것은 잘 모르지요. 그렇다고 무조건 짐승이 나쁜 짓 하는 건 아니지만 비유로써 그런 표현을 많이 써왔지요. 그런 관점에서 조계종의 권승들은 현재 부끄러움을 모르는 짐승같은 놈들이 모여있다 라는 표현을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겁니다.
기자: 돈을 말씀 하시니까, 매우 한국적인 상황이라고 해석을 해도 되겠네요?
스님: 일본 불교는 대처제도가 허용이 되고, 또 일본 스님들은 주지가 대학 교수도하고 요정도 운영하고 큰 사업체도 운영하기도 합니다. 일본불교의 특징이라고 설명되는데, 남방불교에서는 거의 모든 스님들이 돈을 직접 관리하지 않으니 큰 차이가 있겠지만 그쪽에서도 비리는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기자: 태국의 약 30만명의 스님들 중에 몇 분, 더우기 미얀마에서는 세계적으로 알려질 정도의 사건에 연루된 스님은 아직 한 분도 안 계신 것으로 압니다. 돈을 스님들께서 직접 관리 하시는 한국의 문제가 아닐까요?
스님: 그렇게 봐야 되겠네요. 그게 한국 사찰이 갖고 있는 특성 같은 것. 어쨌든 미얀마나 태국 같은 데는 그래도 남방이니까 옛날 부처님 당시에 수행방법이나 전통 같은 것들에 대해서 나름대로 유지하려고 애쓰는 흐름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국불교는 중국을 거쳐서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사찰이 재산을 소유하게 되고, 스님들이 재산을 갖게 되고 하면서 생기는 부작용 같은 것들이, 일부의 부작용이 아니라 부작용이 실체가 돼서 한국불교를 움직이는 힘이 돼버린 거예요. 돈의 힘 같은 것. 사찰이 차지하고 있는 좋은 자리에 대한 힘. 그런 것들이 결국은 한국불교가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상관이 없이 타락하는 길로 급속도로 빠져 들어가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고 봐야 되겠죠.
기자: 그런 분들이 살고 계시는 총무원은 도대체 뭐하는 곳입니까?
스님: 총무원에서 지금 제가 제적을 당했어요. 승적을 제적 했는데, 제적이 된 이유가, 이런 비판. 언론매체에 나와서 지금 너희들이 타락한 집단이다. 너희들은 왜 부인을 데리고 사는 놈들이 본사 주지를 하느냐. 돈 많은 중놈들이 왜 이렇게 많으냐. 이런 말들을 과격하게 표현을 했다고 해서 그걸로 저를 총무원에서 제적을 시켰습니다. 한마디로 얘기해서 총무원은 아주 타락했는데 사회적으로나, 도덕기준으로 따져도 정도가 심할 정도로 조폭 집단화 돼버렸다고 봐야 돼요. 왜 그러냐면, 지금 문제되고 있는 적광스님의 폭력사건, 2013년에 일어났던 사건인데 제가 지금 본격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있거든요. 자비를 표방하고 생명존중을 원칙으로 하는 부처님의 사상에 입각해서 부처님의 제자라고 말하는, 즉 총무원이라고 하는 곳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승려들이 모인 데잖아요. 그런데 거기에서, 그 건물에서 어린 사미를 붙잡고 끌고 들어가서 거의 죽을 지경으로 폭력행사를 했다는 것. 이것은 문제가 굉장히 심각해요. 하여, 법적 조치를 취하려고 합니다. 여기에 대표적인 경우가 총무원 청사에서 자승 원장의 묵인방조 내지는 교사로 폭행사건이 일어나서 그 스님이 4년이 지난 지금도 정신병원에 입원해있다는 사실은 일반 사람들이 알면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놀라운 불법행위이고, 동영상까지 있습니다. 그게 조계종에서 일어났던 현실입니다. 이 문제를 앞으로 사회적 문제로 제기를 해서 현 총무원장을 사법처리하는 데까지 이어 갈 작정입니다.
기자: 조계종의 종헌 종법상에 의하면 스님을 총무원에서 제적을 하게 한 그 내용에는 제적까지 당할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적당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를 하시고 계시는지요?
스님: 저는 일단 비구계 자체가 현실적인 삶속에서 지키기 어려운 부분이 너무 많거든요. 부처님 당시 때, 그것도 2500년 전의 율장이기 때문에, 지금은 근본적인 계율정신은 반드시 지켜야겠지만, 세세한 부분의 현실하고 잘 안 맞는 부분은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함에 가장 중요항 관점은 부처님 제자로써 수행하는 수행자의 양심에 맡겨야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으로 치면 저는 조금도 비구계율에 어긋났다고 하는 것으로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기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예훼손이라는 제목 하에 스님의 승적을 박탈을 했는데, 스님께서는 어찌 하실 것인지요?
스님: 지금 그것은 변호사단이 34명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변호사단을 통해서 제적에 대한 것들이 너무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유로 소송을 제기해서 세속 법적으로 처리를 하려고 하지요.
기자: 아 그렇군요. 부처님 당시에도 제자들이 있고, 승단이 있었습니다. 한국불교의 특별한 상황에 만들어진 총무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스님께서 원하는 총무원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스님: 승단을 구분을 할 때 옛날에는 사부대중으로 구분을 했는데, 지금은 저는 그렇게 봐요. 스님들을 구분하자면, 수행자 집단과 또 수행자 집단을 외호하는. 그러니까 이판사판으로 가르는 거죠. 불교는 어차피 수행이 근본이 되어야 합니다. 설사 전법을 안하고 사찰관리를 안하더라도 개인적인 수행이던지, 집단적으로 모여서 하는 수행이던지, 수행이 근본이 안 되면 그것은 부처님의 제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수행을 하려면 옛날같이 단순한 농경사회가 아니고, 산업자본사회 같은 복잡한 세상으로 가다 보니까 수행하는 스님들이 있으면 그 수행하는 스님들을 외호하는 대중이 필요하다고 봐요. 그런데 그것을 스님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판으로 불려요. 그런데 사판들이, 사실 수행하는 이판 스님들이 주인이고, 사판스님들은 수행하는 스님들을 봉양하고 모시고 수행을 외호하는 심부름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것이 전도되어서 사판으로 하는 스님들이 돈이라던가 사찰의 물질적 토대를 다 갖고 있게 되고, 그리고 수행하는 스님들은 떠돌아다니는 운수납자가 되다 보니까, 재물을 갖고 있고, 주지 소임을 갖고 있는 사람들 눈치를 보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바뀐 겁니다. 수행하는 스님들이 주인이 되어야 되는데, 수행하는 스님들을 외호해야 될 스님들이 주인이 되고, 정말 주인이 되어야 할 수행하는 스님들은 절을 소유한 스님들 눈치를 보는, 하부구조로 바뀌어 버린 거예요. 이것은 스님들이 돈을 만지면서부터 오는 부작용으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봉은사 주지를 2007년부터 2010년까지 했을 때도 재정의 투명성 확보가 중요하다 생각해서 신도들에게 공개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사찰의 재정 운영을 신도들에게 완전히 다 맡길 수 없는 정도로 재정분리가 준비되어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사찰재정운영은 재가자들에게 맡기고, 스님들은 오직 수행만 하면 된다. 그럼 돈을 만질 일이 없기 때문에 신도들로부터 의혹의 눈초리를 받을 일도 없고, 또 수행 잘하는 스님들은 존경을 받는 그런 풍토가 되어야 되는데, 그 시도를 봉은사에서 했던 거예요. 일단 신도들이 사찰 재정운영에 참가를 하도록 하자. 돈이 어디에 사용되고 결산은 어떻게 되는지 신도들이 참여하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그게 총무원과 일부 조계종 스님들에게는 대단히 불편했던 겁니다. 마음대로 쓰고 마음대로 가지고 쓸 수 있었던 돈을,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절인 봉은사에서 저렇게 투명하게 운영하면, 그 영향이 자기들한테까지 미친다라고 판단을 해서 결국에는 봉은사에서 제가 나오게 되는 원인이 되었죠.
기자: 총무원 운영을 만약에 스님께서 직접 하시거나 다른 스님이 하시더라도, 총무원은 수행하시는 스님들과 사부대중을 잘 보호해야 된다는 뜻을 갖고 계시네요.
스님: 총무원의 역할은, 총무원이라던가 주지라던가 이런 사판의 역할은 수행하는 스님들이 수행 잘 할 수 있도록 외호하는 역할로 규정을 지으면 됩니다.
스님: 스님들의 복지를 말하기 전에 과연 스님들이 사회적 복지에 대해서 말을 해봤는가를 나는 되묻죠. 용산참사라던가, 아니면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이 발생해서 권력으로부터 무참하게 탄압을 받을 때 과연 스님들은 뭘 했는가? 승가라는 집단에 묻는 겁니다. 승려복지를 말하기 전에 말이예요. 수좌스님들께는 복지제도가 어느정도 틀이 잡혔어요. 왜냐면 수좌회에서 선방에 다니는 스님들은 주지를 안 하니까 아프면 사실은 굉장히 곤란합니다. 그래서 수좌들이 여기저기서 돈도 모으고, 또 특히 인천 용화사 송담스님께서 큰 도움을 주셨어요. 그래서 아마 수좌들은 일정한 부분 병원에 갈 수 있는, 어느 절에 살면서 입승스님, 주지스님 서명만 하면 큰 병도 병원에 가서 수술도 받고 치료를 할 수 있는 복지 틀이 잡힌 겁니다. 수좌들이 2~3천명 가량 되는데, 나머지 강원스님들은 소속되어 있는 곳에서 병원비는 일정한 부분 보조를 해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은사가 있고, 문중이 있고 해서 도와도 주고 하기 때문에 복지시설 자체가 전무하다고 볼 수는 없어요. 공식적인 틀에서 완전히 갖춰지지 않았다고 해도 일정한 부분은 되어 있는 거죠. 물론 아주 외롭고 사형사제들도 없고 이런 스님들도 있겠죠. 나이가 들었는데 올데갈데없는 스님들도 있고. 그러나 대체적으로 절집 안에서 안 떠나고 오래 살았던 분들은 그 절에서 아프면 병원비를 댄다던가. 아니면 수좌들은 수좌회에서 일정한 부분 치료비를 대준다던가 하는, 전체적인 틀은 안 잡혀 있지만, 복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으로 보면 종단이 종단적으로 전체 승려들에 대한 복지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해야 되는데, 그러기에는 사실 돈이 필요하죠. 복지를 하려면. 일단 병원도 보내야 되고, 또 나이든 스님들이 오갈 데 없을 때, 모셔야 될 집도 있어야 되고. 또 만약에 무슨 파킨슨 병이라던가 치매가 왔을 때 누가 붙어서 병간호를 해야지 될 것 아닙니까. 전부 돈하고 연결이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천주교는 개인 신부들은 전부 가난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부자에요. 그런데 반대로 절은 가난하고 스님들은 부자인 거예요. 소위 사판승이라고 하는, 주지 자리를 바라는 스님들은 돈이 있으니까 서로 주지를 서로 맡으려고 하는 거예요. 조계종에 소속되어 있는 3천개 정도의 사찰 주지 말고는 나머지는 전부 다 사실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봐야지 되겠죠. 그러니까 조그만한 절이라도 주지를 맡고 있으면, 의식주라던가 병 문제라던가 이런 큰 걱정을 안 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앞으로는 쌀되박을 이고 불공하던 나이든 보살님들 다 돌아가시면 젊은 사람들은 이제 지방사찰 조그만 절에는 안갑니다. 그런 절에는 지금부터 경제적인 어려움이 다가오고 있어요. 관광입장료 받는 큰 절, 팔공산 갓바위라던가, 남해 보리암이라던가 아니면 강화 보문사라는 곳들은 기도객들이 많이 오니까 사찰의 재정적 어려움이 없지만, 시골에 별로 이름없는 사찰에는 굉장히 어렵다라고 아우성입니다.
기자: 숫자적인 면으로라도 1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의 인구 분포상 종교인 중에 불자가 좀 더 많았던 것이 기독교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변화한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스님: 일단은 불교보다 한국사회의 주류종교가 된 개신교, 카톨릭의 숫자가 훨씬 많습니다. 기독교가 지금은 불교를 넘어섰어요. 그 전에는 두 군데가 합쳐야지 불교하고 비슷했는데 지금은 개신교가 불교 숫자보다 더 많고, 또 카톨릭하고 합치면 불교는 제 3의 종교로 전락을 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불교의 숫자가 줄어든 것을 걱정할 것인가. 저는 그것은 별로 걱정을 안 합니다. 다만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이 남아 있느냐? 안남아 있느냐? 하는 거죠. 썩어서 고여 있는 저수지 물이 아무리 많이 고여 있다고 하더라도 저수지 물은 살아있는 물은 아니거든요. 산에서 졸졸 흐르는 옹달샘같이 흐르는 맑은 물만 있다면 나는 저수지에 고여 있는 물을 부러워할 게 하나도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한국불교는 과연 숫자는 줄어들었지만 부처님의 사상과 정신이 산골에서 흐르는 샘물같이 흐르고 있냐는 것들에 대해서 반성을 해야 된다는 것이죠.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굉장히 위험하다 라고 보는 거예요. 불교인 숫자가 300만 줄어들었다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근본적인 가르침이 과연 한국불교에 남아있는가에 대한 문제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아무리 숫자가 많으면 뭐합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이 잘못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기복신앙이라던가 내지는 무슨 외형적으로 화려한 문화재를 보유한 사찰에 머물고 있다면요. 외형적 비대함이라던가, 그런 것들은 불교가 아니거든요. 부처님 가르침이 거기에 있나요? 화려한 조각과 탑과 오래 묵은 불상의 문화재적 가치 속에서 불교를 찾을 수는 없잖아요. 물론 그것이 불교를 보조해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조해주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문화재가 될 수는 있습니다만, 핵심적인 부처님의 가르침은 아니라는 거죠. 그러면 지금 한국사회에서 안고 있는 부처님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뭐라고 봐야 할 것인가. 그러다 보니까 남방에서 들어온 위빠사나 얘기도 나오게 되고, 관법도 있게 되고, 염불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럼 그동안 한국사회의 주류를 이루었던 선불교라고 불렸던 것이 과연 선불교로서의 제대로 된 역할을 하면서 조계종을 선종이라고 볼 수 있는가. 난 여기로부터 회의를 갖고 시작해야 된다고 봐요. 그런 반성과 회의가 없이 그냥 무조건 한국불교는 간화선이다, 선종이다고 해서는 안 되는 거죠. 간화선, 간화선 하는데 정말 간화선의 핵심이 뭐냐? 선종의 핵심이 뭐냐? 물으면 거기에 대해서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냐는 거예요. 막연하게 간화선이 최고다 하는 정도죠. 과연 선이라고 불리는 한국불교의 수행방법이 지금 옳은가에 대해서도 회의를 갖고 있는 사람이에요.
민주화운동 당시
기자: 스님께서는 수행이 사회적 관점에서도 실천되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으시군요. 혹 민주노총의 한상균 위원장님을 도와주시는지요?
스님: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같은 경우는 아주 진실한 사람이에요. 저하고는 서로 애정을 갖고 있고, 왜냐하면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파업하고 할 때 제 나름대로는 마음의 진심을 담아서 도와도 줬고 했던 오래된 관계가 있습니다. 덧 부쳐 알려드리면 어제저녁에도 쌍용차 노동자들하고 용산참사 유가족들하고 김미화 씨하고 신경민 의원하고, 예전에 청와대에서 민간인 불법사찰 한번 한 적 있었던, 총리실의 장진수라는 행정관이 내부에서 증언을 했는데, 즉 “민간인사찰 할 때 내가 이런 역할을 했었다”라고 내부고발자가 된 거죠. 엄청나게 고통도 받다가, 어제 만났는데 그 모임 이름이 ‘명쫓사’라는 모임이고 풀이하면, “이명박 정권에서 쫓겨난 사람들” 그래서 그런 모임에서도 쌍차 얘기가 나오고, 그 당시에 용산참사에서 돌아가신 분들을 질식사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경찰들이 때려 죽였다는 의혹이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그것도 진실규명을 해야된다라고 봅니다.
기자: 확실해야 하고 급한 일이기도 하네요. 왜냐하면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잘못 알려졌다는 면에서 마음이 많이 아프고 힘들텐데요.
스님: 사회적 약자로써 국가권력이라던가 아니면 그런 거대한 자본의 힘에 의해서 탄압받고 고통 받고 착취당하고 했던 분들이 어려울 때, 과연 그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주고 힘이 돼 주고, 눈물을 닦아주고 했냐는 거예요. 조계종이. 그러면서 신도가 300만 떨어졌다고 호들갑을 떨고 무슨 일이나 난 양 갑자기 그러는 것 자체가 나는 너무 우스운 거죠. 사회적인 역할은 제대로 하지도 못한 대신 제대로 된 수행자로서의 과거 성철스님이나 법정스님이나 송담스님 같이 열심히 했냐는 거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저렇게 열심히 수행을 하시다니” 하는 스님들이 얼마나 있느냐는 거죠. 대부분 아닌 거죠. 그리고 몇몇 스님들은 열심히 살지만 그러면서 존경받고 싶어 하면서 신도들한테 시주나 하라 그럽니다. 그러니까 불교 신도는 자꾸 떨어지게 되고 그렇게 되니까 또 걱정을 태산같이 해요. 나는 이런 것들이 전부 다 모순이라고 보는 거죠.
기자: 수행이 되어 지혜가 함께 할 때에 진정으로 도울 수 있다는 관점에서 수행이 우선시 되는 면이 중요하다면, 스님께서는 그런 어려운 사람들을 직접 어루만져 주시는 것을 통하여 체득하시는 것을 수행적 관점에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스님: 수행은 왜 하느냐는 물음으로 출발해야 되겠죠? 우리는 왜 수행을 할까? 과연 부처님이 가르치는 ‘구도’ 법을 구한다는 것은 어떤 뜻을 가지고 있을까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부터 출발해야 되겠죠. 그러면 부처님은 왜 출가를 하셨을까 부터 출발해야 되고요. 부처님은 왜 출가를 했을까? 결국은 생로병사, 고통, 태어나고 병들고 늙고 죽어가는 우리의 인생이란 과연 무엇일까라는 이런 물음으로부터 출발했다고 봅니다. 불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물음으로 시작해서 물음으로 끝난다고 보거든요. 기독교는 믿음으로 출발해서 믿음으로 끝납니다. 믿음과 물음의 차이를 보는 거예요. 부처님은 끝없이 물었습니다. 왜, 어떻게, 무엇 때문에 우리는 살고 있을까. 삶의 정체는 무얼까. 간화선에서 얘기하는 ‘나는 누구일까’ ‘조주는 왜 무라고 했을까’ 이런 게 바로 화두입니다. 그런데 그 물음의 답은 뭘까, 그 물음의 답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기자: 사는 게 뭐냐구요? ‘살아 있어요’
스님: 죽었다 살았다고 하는 것도 관념에 불과한 것이에요. 생각의 차이에요.
기자: 살아있습니다.
스님: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도 대단히 주관적인 생각입니다.
기자: 그렇게 해석을 하시려면 하실 수 있겠죠. 주관적이라고 하는 것을 객관적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죽었지 않고, 살아 있습니다.
스님: 그러니까 우리가 수행을 하는 목적은 대단히 주관적으로, 주관적이라는 것은 내 업으로 사물을 보고 있는 것이죠. 나는 남자다, 중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다, 나이가 예순아홉이다라는 생각 속에서 세상을 보고 살아갑니다. 이런 전체적인 교육과 환경과 시대, 공간에 의해서 세상을 보는 관점 즉, 에고가 생긴 것이잖아요. 다른 사람의 에고와는 다르지 않습니까. 공통분모가 있지만 세밀한 부분에서는 다 차별이 있다는 거예요. 그것을 저는 불교식으로 얘기하면 업으로 봅니다. 업력의 소산으로, 업견으로 보는 것이에요. 업의 견해로 사물을 보고 있다는 거예요. 부처님은 업의 견해를 넘어선 분입니다. 완전히. 그것은 완전히 객관적으로 사물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분으로 봐야 한다는 거죠. 조금도 주관이 섞이지 않았다는 거예요. 내가 부처라는 주관도 나중에는 버려버리신 거예요. “나는 깨달은 사람이다” 이것도 주관이다. 버려라.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겁니다. 그래서 그런 주관적 견해로 사물을 보는 것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을 ‘해탈인’이라고 봐요.
비유를 해서 얘기를 하자면 허공은 텅 비어있죠. 허공은 완전히 비어있다는 말이에요. 허공은 실체가 없어요. 허공 가운데에서 봄도 오고 여름, 가을, 겨울도 오고, 비도 내리고 눈도 내리고 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허공은 무한이에요. 인간의 공간의 개념으로는 측량이 불가하죠. 부처님도 <금강경>에 보면 수보리에게 묻죠. ‘너는 남방허공을 사량할 수 있느냐?’, 수보리가 ‘불가합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사방허공은 사량할 수 있느냐?’, 그러니까 ‘그건 더더욱 더 사고가 미치지 않습니다’라고 답합니다. 부처님과 수보리가 주고받는 대화입니다. 그런데 부처님도 ‘그와 똑같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표현하시기를, 이 <금강경>에 있는 사구게 등을 수지독송하고 위타인설하면, 즉 <금강경>을 잘 받아들여서 그 사상과 뜻을 전달하면 사방 허공을 칠보로 장엄한 것보다 공덕이 더 수승하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것은 무슨 뜻이냐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허공에 대한, 공간에 대한 물음을 던진 겁니다. 시간과 공간은 인간의 지혜라던가, 과학적 지식이라던가, 소견으로 감히 상상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어디서 출발해서 어디로 가는지, 또 공간은 얼마만큼 넓게 벌어져 있는 것이고, 언제 생긴 건지 측량이, 사유가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불가사량’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부처님 말씀에도 보면 ‘불가사량’이라는 말이 대단한 의미를 갖고 있는 거예요. 그것은 깨달음보다 더 큰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는 거예요.
기자: 수행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스님: 불교의 수행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겁니다. 알고 있는 모든 것들. 내 지적 소견, 환경, 교육, 태어난 곳, 공간, 시대, 이런 것으로부터 받아들여졌던 모든 정보, 즉 우리는 이것을 ‘앎’이라고 표현해요. 이 ‘앎’으로부터 해방되는 거예요. 내가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지금 속박돼서 바라보는 거라고 생각하고, 인간이라는 틀 안에서 보는 것임을 인정하자는 거죠. ‘진실’이나 ‘실체’가 아니라 인간의 관점에서 해석된 것일 뿐이라는 겁니다. 수행에 대한 기본적 입장이 정확하게 서야 돼요. 그래야 간화선이나 선에 대한 입장, 위빠사나에 대한 입장도 내가 가질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일단 모든 것을 모른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내가 아는 것은 전부 거짓이다, 잘못된 견해다, 전도된 것이다라는 걸 인정하자는 거죠.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에 나오듯이 ‘전도몽상’이다. 내가 알고 있는 세계관은 잘못되어있는 것이다. 가령, 지금 시간을 물으면 언제인지 아나요? 2017년 6월 몇 일로 얘기하잖아요. 이게 맞나요? 불기도 있고 단기도 있는데 왜 지금이 서기 2017년입니까? 지구 나이를 볼 때도 잘못된 거죠. 지금이 언제냐고 물어보면 모른다라고 대답해야 됩니다. 지금이 2017년이라고 하는 건 가설로 정해놓은 거예요. 우리가 필요에 의해 그렇게 규정하고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나 다른 짐승들도 시간에 대한 개념이 있습니다. 우리와 다를 뿐이죠. 시간에 대한 개념만 살펴봐도 우리가 인식하는 기본적인 것들이 대부분 무의식중에 길들여져 있다는 거예요. 그 길들여져 있는 것이 잘못되어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길들여진 대로 그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불교는 공부할 필요가 없다라고 봅니다.
기자: 한국불교의 부족한 면을 말씀하시다가 수행부터 제대로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스님: 어디가 잘못되었느냐 라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려니까 한국불교는 선종을 표방하잖아요. 더군다나 간화선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요. 간화선이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방법으로 규정을 지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간화선은 뭘까? 무엇을 보고 간화라고 부를 것인가? 간화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묻는 거거든요. ‘조주가 왜 <무>라고 했는가’ 왜 ‘뜰 앞에 잣나무’라고 했는가. 단순하게 얘기하면 ‘나는 누구일까’ 라는 것도 화두로 들어갑니다. ‘나는 누구일까’ 안 묻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그런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간화선을 한 사람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서양의 모든 철학자들은 다 간화선을 한 사람들인 거예요. 물은 거예요. 우리 삶의 근본, 물질의 근본에 대해서 말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라던가 디오게네스라던가 모든 철학하는 사람들 혹은 모든 문학하는 사람들은 다 그랬죠. 뿐만 아니라 우리도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 앞에서‘도대체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육신은 여기 있는데 육신을 끌고 다니던 영혼이라던가 마음이랄까 그것은 도대체 어디 가 있을까’, 이런 물음을 절실하게 안 물어본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나는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간화선자다. 간화선을 하는 사람들이다라고 봅니다. 특히 서양의 철학가들이 차라리 어떻게 보면 더 절실한 간화선자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조계종의 간화선은 간화선이라는 틀에 갇혀서 실제적 간화선을 안 한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그 물음의 끝은 어디일까. 그 물음의 끝은 소크라테스가 제일 답변을 잘 해 놓았어요. ‘내가 너희들에게 오랫동안 많은 얘기를 했지만, 지금 내가 깨달았는데, 내가 아는 것이 있다면 딱 하나 내가 나를 모른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것입니다.
기자: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셨다”라고 초기경전(빠띠삼비다막가 1권 3과 2권 158, PTS)에 나옵니다.
스님: 안 그래요.
기자: 마지막 질문입니다. 스님은 누구십니까?
스님: 금방 얘기했잖아요, 모른다고.
인터뷰 일시: 2017년 6월 20일
장소 :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지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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