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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국이민 갈 사람 다 모여라! 원문보기 글쓴이: T.B.M
간만에 글 한번 올려 봅니다
잠시동안만 올릴 것입니다
가볍게 읽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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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이민오게 되면서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될 신분제도가
성골도 아니요
진골도 아니며
양반도 아니고
쌍놈도 또한 아니다
그러나 분명 확실한 신분을 취득해야만 되었다
[영주권]
뭐가 뭔지는 모르지만 대단한 신분제도로서
이것을 취득하기 위해선 엄청난 자금과 각고의 인내가 필요했다
지금부터 지나간 세월동안 이루어졌던 나의 영주권 취득 과정을 반추해 본다
보통 사람들이 취하는 보편적인 코스를 밟았다
[관광 -> 유학 -> 취업이민 신청 -> 영주권 취득]
이것이 나에게는 최단기간에 미국 살면서 정착하는 방법이었다
이민을 염두에 둔 중년의 가장들이 많이들 전철을 밟는 케이스라고 생각된다
이름하야 [영주권 에필로그]
양념으로 내가 왜 오게 되었고 뭣하던 넘인지 맛빼기만 보여 주겠다
나는 서울 잠실 살다가 온 촌놈이다
2001년 2월 중순께 내가 다니던 회사가 파산으로 문을 닫았다
조그만 구멍가게가 아니라 큰 기업이었다
내가 몸 담았던 회사는 건설회사였다
총각때 입사하여 옛날에는 3대 미항이라고 하던 리비아 Tripoli 에도 갔었고,
사막 한가운데 세워진 도시, 사우디 리야드에도 근무했었다
서울 본사 근무도 하고 국내에서는 남한 팔도를 다 다녀본것 같다
이 회사 다니면서 결혼도 하고 집도 사고 아이들도 낳고 교육시키고 행복했었다
그리고 노가다가 친직인줄 알고 재미있게 살았다
지금도 내가 이루어 놓은 업적이 (거창한가?) 한국에 남아 있으며
나의 회사에서 건설해 놓은 기간산업과 시설을 한국 계신분들은 지금 이용하고 있다
각종 고속도로며 지하철, 종합운동장, 오피스 빌딩, 아파트등등 건설하는데 직접 참여도 했으며
구리토평지구 현장을 마지막으로 16년을 넘게 종사했던 건설현장을 떠나야만 되었다
2년전에 한국 방문시 옛추억을 되지퍼가며 마지막 근무처 구리토평을 찾았더니 신도시로 확 변해 버렸다
우리 회사에서 짖은 수많은 아파트에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공공시설물에서 문화생활도 즐기고 있을 것이다
어느 누군가는 KTX라는 고속전철을 타고선 내달리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다 열거하자면 남들이 욕할것 같다
'그것을 니가 다 만들었냐?' 하고 되받아칠것 같아서 이만해서 줄이고 본론으로 들어간다
2001년 2월 회사 Door Closed [Bankruptcy : 파산]
2001년 3월 15일 미국행 출발 : 최대한 여행객을 가장하여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워싱턴으로 갈려고
샌프란시스코에서 경유했는데 잘못 굴린 통박 때문에 그곳에서 입국절차 받으면서 1개월짜리 도장 꽝 받음
[나쁜 놈! 첫발자국부터 꼬이기 시작]
2001년 3월 31일 Back to the Korea : 체류기간이 너무 짧아서 할수 없이 되돌아감
[변호사 강추 : 한달짜리 갖고선 아무것도 할수 없다.
불체자 되지 않을려만 당장 비행기 올라타라하고 불호령이 떨어졌다.
본전 생각에다가 쫑파티까지 하고 왔기 때문에 많이 망설였음]
2001년 4월 짐정리해서 선박편으로 미국으로 보냄
[백수로서 할일 없어서 해외이삿짐센터 불러서 짐이나 싸서 보내고 남들 눈에 뛸까 은둔생활에 들어감]
2001년 5월 2일 할일없이 한국에서 빌빌 거리는게 지겨워서 미국으로 출발하여 Washington Dulles 입국시도함
입국과정에서 이민국 직원하고 10분이상 실랑이를 했음.
'너! 미국 왔다 간지 한달도 안되었는데, 왜 또 왔냐?' 하고 시비를 붙이는 바람에 뿔따구가 나서 안그래도 열 받는데
개새끼, 새새끼 하면서 백인 대머리 까진넘한테 못 알아 듣는 한국 욕설 마구 퍼 부었음
그 당시는 911사태 전이어서 가능했다고 생각됨
나의 기세에 눌려서 입국심사관 도장 광 찍었는데 6개월짜리였음 (그넘의 실수라고 짐작됨)
2001년 5월부터 인맥 형성을 위해 쌩판 근처도 안지나치던 교회 방문함
[평소에는 십자가 발견 순간 우회해서 다녔더랬는데 ]
얼떨떨결에 도착 이틀만에 산상 수련회에 참석함
"뜨레디아스' LPTD 라고 하는데 뭐가 뭔지 잘 모르겠음
사람을 많이 만날수 있다는 기대속에 희망에 차서 갔음
목적은 영주권 스폰서 찾기 위해서 .................
그 집단 모임에 빠져들면 모두가 형제고 자매며
언재 봤다고 붙들고 껴안고 울고 불고 피붙이 보다도 더 진한 일체감에 휩 싸인다
이래서 종교의 힘이 무서운것 같다
처음 접하는 집단체제에 이절감을 많이 느꼈다
언재나 마음은 태양이 아닌 나는 마음은 콩밭에 가서 있는 관계로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선
'나 영주권 스폰서 좀 알아 봐주세요' 하고는 밑천 다 까발렸다
지금 생각하면 쪽 팔리는 줄도 모르고 동네방네 나팔 불고 다니며
정말이지 된장 냄새 팍팍 풍기면서 있는 촌티 없는 촌티 다 뿌리고 다녔다
매주 일요일이 기다려지며,
중간에는 수요 예배에도 참석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속에 목장에도 갔다
소 잡어라 간게 아니라 나의 분명한 목적을 달성키 위해서 사람 잡어러 다녔다.
목장이라고 해서 Texas Cowboy 들이 있고, 말이며 소들이 득실되는 곳이 아니다
집집이 몰려 다니면서 계모임하는것 처럼 간단한 다과며 예배보는 것을 목장이라고 한다
원~별!~' 미국와서 듣도 보도 못한것을 초반부터 접하게 되었다
제사보다도 젯밥에 눈이 어두웠다
당장 코 앞에 닥친 신분제도 개선하는게 가장으로서 막중한 임무이며
책임감이므로 최선을 다해서 뛰어 다녔다
Mission Impossible 보다도 더 열심히 드라마틱하게 휘집고 다녔다
낯선 땅에 와서 뿌리 내리고 살려니 쉬운게 어디 있겠는가?
신분제도 개선하랴,
먹고 살 궁리해야 되랴
미국에 발만 디디면 척척 풀리고 누군가가 서로 와서 인도해 줄것처럼 믿었는데 ........
미국만 가면 다들 잘 살고
지나가는 금발의 미녀에게 윙크만 살짝 지어도 브라우스 단추 풀고 미니스커트 살짝 걷어 올릴줄 알았는데....
동양의 신비에 매료되어 수많은 금발의 미녀들이 껄떡거릴 것이라는 기대심도 가져건만 ......
왠걸 .......지금 생각하면 Sexual Abuse 로 깜빵 갈 짖거리였다
참으로 한심한 발상이었다
도체 뭘 믿는단 말인가
뭣했다고 누가 순순히 인도해 줄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래도 그 당시에는 그것도 모르고 어쨌던 짐 싸들고 왔으니 되돌아 갈수는 없지 않겠는가?
만나는 사람마다 얘기하고 다니는것도 시간이 지날수록 쪽 팔리고
못난 자신을 한인사회에 까발리고 다니는것 같아서 한심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2001년 6월14일 후발주자들,
아내와 아이들이 Washington Dulles Airport로 보무도 당당히 6개월짜리 Stamp 쉽게 받고선 입국했다
씨! 나만 쐬빠지게 힘들게 들어왔다
처음에는 하는일도 없이 그냥 비지니스 찾어러 다니고
영주권 스폰서 찾어러 다니는게 나의 일과였다
2001년 7월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내가 미국 왔다고
한국에 있는 친척이며 친구가족들이 놀러왔다
2달동안 우리집에 기거를 하다가들 갔다
씨앗도 뿌리기도 전에 손님 접대부터 치루는 미국생활이 시작되었다
해마다 손님 치루는게 연례행사이다
작년 2006년도에는 5월달부터 줄줄이 사탕으로 밀려와서 2007년 2월까지 연속적으로 10개월 동안 손님을 치렀다.
참! 돈 수억 깨지는 소리가 났다
한국사는 사람들이야 비행기 표만 끊어 오면 다 되는줄 알고 오는데
미국서는 먹고 재우고 일할 시간 빼먹어 가면서 여행 보내 줘야지 같이 동행 못할시에는
관광회사에 맡기든지 아니면 가이드 부쳐야지 귀국할때는 선물이라도 사서 보내야지
그들이 투자한 비행기 삯은 그들에게는 큰 돈일지 모르지만 우리가 쓰는 비용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퓨 ~~~
올 여름에도 벌써 세팀이 온다고 통보가 왔다
울고 싶어라
세팀에서 더 이상만 안 늘었으면 좋겠다
그들이 하는 말
그래, 직장은 잡았냐?
영주권은 어떻게 되어가냐?
온지 몇일 된사람보고 영주권이 어떻고 직업이 어떻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곧 될것처럼 여겨졌고 되리라고 믿었다
한국에서 온 손님들이 가고선 직업을 찾아 나섰다
몇푼되지도 않는 곶감 빼먹다가는 비지니스 자금이란 종잣돈 다 쓰게 될것 같았다
2001년 8월 중순부터 DC 흑인촌에 있는 Deli에 Helper로 취업해서 쓰레기 치우고 설겆이 하고
상머슴으로서 할수 있는 힘쓰는 일을 내가 그집것 도맡아서 했다
한여름 푹푹 찔떼, 에어콘 시설에 시원찮은 가게라서 땀 억수로 흘렸다
그때 흘린 땀이 Potomac 강을 이루어서 지금도 유유히 흐르고 있다
그사이에도 계속 비지니스는 찾어러 다녔다
처음 Job은 오래 못했다 [비지니스 Deal 관계로 Quit 했는데, Deal 이 깨졌음]
다음에는 목수 Helper를 하러 다녔다
그것도 3개월인가 했다가 교통사고를 치는 바람에 나의 애마(Pick-up Truck)가 폐차되었다
상대방 차도 아작이 났다
경찰차에... 소방차에... 앰블란서에 .... 완전 영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결국 그 Job도 짤리고 말았다
우리 동네에서는 천리마가 없으면 곧 실업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2001년 8월 말경에 집사람을 앞세워서 1차 신분제도 변경작업에 착수했다
가장인 나는 가정 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관계로 학업을 포기하고
평생을 백조 생활하던 마눌이 머리에 기름치러 다니기로 했다
우리 집사람은 F1
우리 격가지들은 F2
학생비자는 접수후 한달정도 걸려서 9월말쯤에 나온것 같다
관광으로 입국해서 3개월 정도 되어서 학생비자로 변경하고
스폰서 찾아서 취업이민 수속 밟는 가장 보편적인 코스를 택했다
내가 미국에 정착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이것 밖에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혹시 나중에 영주권 서류심사시에 학교 다닌 기간을 증명해서 오라고 하니 서류 잘들 보관하셔야 된다]
멋모르는 시절
새벽별 보고 저녁별 보기 운동해서 주에 400~450불 벌수 있었다
한명이 벌어서 4명을 부양해야하는 당나귀 같은 어깨를 지녀야만 했다
들어오는 물은 개여울인데 나가는 물은 바닷 썰물 같아서 6개월만에 곶감 10만불어치 사먹어야만 되었다
그넘의 미국 곶감은 더럽게도 비싸다
2~3년 실업자 생활하면 거지된다고 하더니 거짓말이 아닌것 같다
천신만고 끝에 영주권 스폰서를 찾을수 있었다
4개월간에 걸친 지고지순 노력의 댓가라고나 할까
초지일관 뚜렷한 목표의식의 산물이라고 생각된다
2001년 8월 20일 경이라고 생각되는데 이민의 첫 단추를 낄수가 있었다
어떻게 영주권 스폰서를 구했는지 궁금하다구요?
미국은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나라
우리는 미국에 살려고 온 사람 Alien이고
믿음만으로서는 영주권 스폰서를 찾을수가 없었다
짤랑!! ~~ 짤랑 !!~~~~(짤짤이하는 소리가 아니다)
쩐 흔들리는 소리에는 숨었던 스폰서도 나타났다
911사태가 터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당시에는 3년이면 영주권을 취득할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2만5천불인가에 이민의 첫발자국을 밟을수가 있었다
그 당시에 대체케이스는 4만5천불에서 5만불을 불렀다
사태가 이리저리 꼬일줄 알았으면 5만을 주고라서도 대체케이스로 진행했을것이다
처음부터 시작하는 절차는 세금까지 따지면 근 10만불 가까운 돈이 들었기에
대체케이스 5만불 플러스 1년간 세금해봐야 6만불이면 떨어지고
학교 몇년간 다닌 등록금 +돈 못 벌어들이는 기회비용까지 합치면
대체케이스가 훨씬 경제적이었다는 것을 돈 왕창 갖다 붓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이래서 미국생활은 얻어 터지고 피를 봐야 아픈줄을 안다
어쨌던 집사람 학생비자 받고[2001.9월말경]
노동 접수증 받고 [2001년 10월]
그 다음해에는 알도 듣도 못하던 Petition (i-140)을 신청하는 과정에서 서류가 계속 빠꾸 맞았다
한번 빠꾸 맞을때마다 3개월 이상씩 세월이 흘러갔다
3번인가 빠꾸를 맞았다
계속해서 보충서류를 넣고 했다
[2003년 9월 3일 Petition 승인]
나는 스폰서의 얼굴을 대면한적도 없다
그져 변호사 사무실에서 스폰서와 연락을 해서 서류작성하고 보내곤 했는데
빠꾸 맞는 서류는 변호사 사무실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통보가 오니 알수가 있었다
최초 접수후 1년반인간 지나서야 L/C (노동허가서 : 구인해도 좋다는 서류)가 Approved 되었다
그것을 가지고 영주권 i-485 와 Work Permit i-765 신청에 들어갔다
영주권 신청에 들어가고 몇개월후에 접수증이 날아왔다
너의 서류는 2003년 4월 1일부로 접수 되었으니
영주권 승인까지는 365일에서 540일까지 걸릴것이다
지금하고 있는 현업에 충실히 하고 있으라는 편지가 날아왔다
[2004년 1월 27일 Work Permit (i-7650 ) 승인]
우리 집사람은 열심히 학교를 다녔다
나이 먹고서는 NOVA (Nothern Virginia Community Collage) 다닌다고 고생 무척했다
젊은 영계들 사이에서 안 쳐질려고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
집에 돌아 올때는 졸음을 쫓을려고 살을 꼬집고 울면서 오곤했다
어쨌던 ESL "E" Level 까지 마쳤다
영주권 접수증만 받으면 학교 안다녀도 된다고 하는데
그래도 확실하게 가고져 Work Permit 이 나오고 나서야 학교를 그만 두었다
그때 만학의 꿈을 이루어서 실전에 배치 시켰더니 꽤나 미국넘들과 잘 떠들어된다
우리집에서 가장 뒤쳐진 사람은 나다
처음에는 내가 제일 영어를 잘 했는데
지금은 얘들한테는 아예 께임도 안되고 마눌한테도 뒤져 제일 저학년이 되고 말았다
큰놈은 올해 대학을 가는데 Pratt Institute에서 장학금 준다고 오라고 연락왔고,
Parsons와 RISD는 지금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Pratt, RISD, Parsons : Art, Design, 의상, 예술대학)
그렇다고 아주 영어 못하는 것은 아니다
전화도 잘 받고 귀는 밝아 가지고 말귀는 잘 알아 듣는데
분명히 터진 입인데 의도되로 잘 말이 안 나올 뿐이다
그리고 해마다 Work Permit 갱신을 해야 되었다
곧 나올것 같던 영주권은 언재나 나올려는지 감감 무소식이었다
Work Permit 이 생기고 나서 처음 한일은 이것을 가지고 Social Office에 가서 Social Number를 신청했다
2주정도 지났을때 시퍼런 종이 쪼가리 하나가 날아왔다
미국 호적에 입적이 되었다는 소리다
그 다음에는 어깨 딱 피고 뻣뻣한 목아지 좌우로 흔들어 가면서 은행 문 확 제끼고 Credit Card를 신청했다.
처음에 은행 갔을때 SSN 없다고 Card도 안 만들어 주고 그냥 Debit Card 나 만들었때 존나 쪽 팔렸다.
Work Permit 이 좋기는 좋은것 같았다
처음 Work Permit을 손에 쥐었을때 그 기분은 사법고시 당첨된 사람 못지 않게 흥분이 휩싸인다
W/P을 손에 잡았으니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될까?
당연히 스폰서를 찾아 뵙고 일을 하러 왔습니다
자리가 있으면 내어 주시던지 아니면 기다리고 있을테니 연락 주세요하고 해야 되지 않습니까?
일식집으로 취업이민이 신청 들어갔기 때문에 집사람은 Specialty Cook 으로서
다깡을 쓸던 우동을 삶던 덴뿌라를 튀기던가네
하다 안되면 생선 토막내는 일이라고 해야 되지 않겠는가?
따르릉 ~~~~
여보세요. 사장님 좀 부탁드립니다
저 W/P이 나와서 일도 해야되고 세금작업을 해야 되는데 찾아 뵙겠습니다
뭐라구요 ~~
나! 당신같은 사람 모릅니다
내가 언제 당신한테 스폰서 섰습니까?
뭐라구요 ???? [화달짝 놀라서 뇌진탕 했음]
당신이 말하는 이xx씨는 일년전에 이 가게 나한테 팔았습니다
한두명도 아니고
당신같은 사람이 7명이나 스폰서라고 전화왔습니다
나하고는 별 볼일없으니 딴데가서 알아 보시요
정말이지 사람 미치고 확 돌아버린다
2004년 1월에 그 어렵다는 W/P을 3년 가까이 인고의 세월을 겪으면서 받았는데
영주권도 아닌 Work Permit 인데
난 당신의 영주권 스폰서가 아니니 딴데 가서 알아 보라니.........이런 빌어먹을...덴장 !!
잠이 오겠는가?
밥을 먹으면 맛을 느끼겠는가?
정말이지 돌아버릴 지경이며
분노의 기개세가 하늘을 찌르고
울분의 질풍노도는 바다를 뒤엎을것 같았다
그 가게를 처음으로 주소보고선는 찾아갔다
미국와서 술 먹을 기회도 없었는데
그집에 가서 팔팔 끓는 사케를 시키고 회도 푸짐하게 시켜서 먹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칼잡이 주인 스시맨의 눈에 조금이라도 들려고 마구시켰다
안 먹든 술도 먹으니 취했다
사장님!
나 누누누구요
제 집사람이 이집으로 영주권 스폰서가 들어가 있습니다
저 좀 도와 주세요
저번 주인 찾아가서 돈 다 되돌려 받아서 사장님 갔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잔금도 지금 모두 드리겠습니다
일생을 살아 오면서 나름되로 콧대 높다고 자부심 대단했고
아쉬운 소리할 줄 모르는 내입에서 이렇게 비굴하고 쩔쩔매는 아부가 있었다니... 나 스스로도 놀랐다
그넘의 신분해결이란 숙제 때문에 없는 자존심마져 다 받치면서 읍소를 했다
어차피 자존심이야 내팽겨친지 오래지만
궁하니까 나에게도 이런 아부 근성이 잠재하고 있었다니 하고 자못 놀랐다
단호한 스시집 사장은 씨알이도 안먹혔다
저번 사장은 이 가게를 팔고선 2마일도 체 안되는 곳에다가 다시 일식집을 열었다고 한다
계약상으로는 5마일 밖에서만 새로운 가게를 열기로 되어 있는데
2마일도 체 되지 않으니 아마 새로운 사장으로서는 열이 뻐친것이다
일식이라는게 주인따라서 손님도 이동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새로운 사장은 같은 칼잡이 출신으로서 미국만 아니었어면 아마 인간회를 떴을 것이란다
매매 과정에서 생긴 불화로 인하여 저번 사장이 서준 스폰서를 인정할 수가 없단다
아휴! 빌어먹을................ 쳐 죽일놈 ................. !!!!
다시 애걸복걸 .......................
사장님! 저 좀 살려 주세요
돈 많이 드릴께요
저도 지금 사업하고 있어요
제가 사장님 아시는 분이나 친척분 있으시면 영주권 스폰서 서 드릴께요
돈 하나도 안 받고 그냥 영주권 스폰서 티오 하나 드릴께요
저는 사장님에게 돈 많이 드리구요........(참으로 남자로서 나약함을 보였던 때)
정말이지 비굴하게 짝이 없을 정도로 빌었다
그 사장의 대답은 일관되게................ No!...... No!............. oh! ....No.....
아! 정말이지 술이 확 깬다
뱃속에 오물들이 확 다 오바이트가 나올것 같았다
변호사에게 자치지중을 보고를 했다
어떻게 하오리까
님은 목석처럼 꿈쩍도 안는데
Work Permit 은 나왔으니
일은 해야되고
세금 떼는 작업도 해야 되는데
스폰서는 안된다고 하고
칼잡이 스시맨은 나몰라라 냉소만 짖는데
이몸은 어찌하오리까
변호사 왈
새로운 스폰서를 찾아야 할것 같습니다
노력해 봅시다
그동안 내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부지런히 세금 많이 떼라고 한다
곧 인터뷰 연락이 올수도 있으니 세금 뗀 근거자료가 중요하니
새로운 스폰서 찾을때까지라도 내 가게에서 세금 왕창 왕창 떼라고 한다
곧 되겠지.... 곧 되겠지 ....... 하면서 세금 떼다보니
3년 동안 33% 세율을 적용해 가면서 엄청나게도 세금 많이 냈다
참고로 나도 2001년 11월 Thanksgiving Day 지나고 나의 비지니스를 시작했다
미국온지 6개월여만에 비지니스를 시작했다 [구라 아니냐구? 어떻게 6개월만에 비지니스를 했냐고]
신분제도상 나의 명의로는 불가능하여서 나의 동생 명의로 하고
Work Permit 이 나온 2004년에 나의 이름으로 명의 이전을 했다
나의 가게도 꽤 규모가 되는 업체였다
처음 인수시 직원이 28명이었다
이 Washington 지역 미국사람들 사이에서는 아주 잘 알려진 업체이다
2007년 1월 28일자 Washington Post지 Sunday 판에 소개될 정도로 유명한 업체다
지역 신문에도 가끔 소개가 될 정도이다
그 다음에 하나 찾은 스폰서는 Subway로서
직종과 일치가 하지 않아서 세금작업 몇번하다가 그만 두었다
내가 거래하는 CPA도 자기가 관리하는 업체마다 연락해서 스폰서를 서 달라고 백방 수소문하고 부탁했다
2004년도 2월부터 6월까지 5개월여 동안 Washington 지역이 나의 스폰서 찾는것 때문에 연일 시끄러웠다
이 시절이 미국와서 가장 정신적인 고통을 겪은 때인것 같다
이때의 기분은 당사자가 아닌 이상은 그 심정 이해 못하리라
어찌 어찌 '연락+연줄'이 닿아서 새로운 스폰서를 찾을 수 있었다
아마 워싱턴지역에서는 제일 큰 일식 업체일것이다
여러개의 가게를 갖고 있으며 상당한 규모의 건실한 업체였다
나의 처참한 신세를 전해 듣고는 그집 여사장님이 흔쾌히 Sponser를 서 줬다
그 어렵다는 스폰서도 인고의 시간이 해결해 주었다
첫번째 가게는 년매상 23만불 Tax 보고를 하면서 7명의 스폰서를 서서 영주권 장사를 한 사람이다
그러니 서류 보충하는데 1년반이나 걸렸지....................
자격도 안되는 사람이 왕창 스폰서만 서고선 돈만 챙겼다
정말이지 좋지 않은 사람이다
어쨌던 그곳을 통해서 Work Permit 까지는 받았기에 지불한 선수금을 회수치는 않았다
곧 있을듯한 영주권 인터뷰는 감감 무소식이고 해마다 Work Permit 은 갱신해야 되었다
W/P 카드만 해도 3장이나 되었다
지문도 2번인가 찍고 마지막으로 Biometrics라고 해서 3번인가 지문을 찍었다
Work Permit 떨어지고 세금 낸것만 따져도 몇만불은 된다
그러니 스폰서 Fee + 변호사비용 + 3회에 걸친 W/P 갱신 4인가족 + A/P (여행허가서 4인) 등등을
따지면 카드 손에 쥐기까지는 근 10만불에 가까운 자금이 투입되었다
사람의 앞일은 모르는 것이기에 정석코스를 택한게 엄청 먼길이 되었다
911 사태가 영주권 취득하는데 많은 지연 작업을 했다
이런 결과를 알았더라면 틀림없이 대체케이스로 진행했을 것이다
올해부터는 대체케이스도 폐지된다고 한다
참으로 멀고도 험난한 과정을 거쳐서
2006년 12월 1일 영주권이 승인났다고 편지가 왔다
그것도 No Interview 였다
그동안 내심 걱정을 많이 했다
중간에 스폰서가 바뀌서 불안 초조했는데
이 모든것을 보상이라도 해 줄려는지 No Interview 로 승인이 되었다
마지막 영주권카드 발급 전에 이민국에서 지나간 시절의 서류를 다 보내라고 했다
신분변경 과정중에 매순간마다 진행되었던 서류들이 매우 중요했다
학교 다닌 기간, 언재까지 학교 다녔는지 재학증명서를 NOVA에서 발급 받아서 보내야만 되었다
2006년 12월 중순
우리 둘째넘것은 Mail로 영주권 카드가 날아왔다
그런데 우리는 연락이 없었다
또 기다림의 시간은 계속 되었다
2007년 1월 중순
Boimetrics라고 또 지문 찍어라고 연락이 왔다
몇번째 손가락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지문하나 찍고선 왔다
지문 찍어러 총 3번이나 Port Belvoir 근처에 있는 Alexandria 이민국 사무실에 갔었다
그로부터 2주도 채 안되어서 2007년 1월 말경에 우리 나머지 3식구 카드를 잡을수 있었다
긴 악몽에서 깨어난듯 깊은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졌다
너무나도 허망하고 긴 세월이었다
그넘의 영주권이 뭐 큰 벼슬이라고
그넘의 영주권이 뭐 대단한 국가고시 자격증이라고
그넘의 영주권이 나의 장래를 보장하는것도 아닐진데
어쨌던 영주권에 목말라하던 갈증을 해소는 시켜 주었지만
영주권을 취득했다고
매일 뜨는 해가 안 뜨는것도 아니고
매일 먹는 식사를 안 먹어도 배부른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내는 세금 깍아 주는것도 아니다
그냥 어제의 연속적인 삶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영주권 있다고 어느누가 보자는 사람도 없다
아마 한국 나갔다 되돌아 올때 영주권자는 입국심사시 Alien과 같이 심사를 받지 않고
구석진 Lane을 통해 조금 쉽게 따로 받을수 있다는게 어찌면 처음 누릴수 있는 혜택이 아닐까 한다
그게 무슨 큰 혜택이라고 줄 길게 늘어섰다고 입국 못하는것도 아니고 차이나봐야 30분 안팍인데....
이것을 취득하는데
2001년 8 월 20일경에 시작해서
2007년 1월 말일경에 손에 쥐었으니 5년하구도 5개월이 걸렸다
먹고 살기도 힘들다는 미국생활에서 잘 버틴 우리 가족도 대견스럽다
영주권을 취득하므로서 가장 큰 변화가 하나 생겼다
매일같이 5년을 넘게 Mail Box 이잡듯이 뒤지는게 일이었다
빈통이었을땐 혹시나 우편 배달부가 남의 집에 잘못 배달은 한게 아닐까하고 조바심도 났다
Capenters 처럼 "Please Mr. Postman! " 하고 우체부를 연모하면서 살았다
메일박스 녹슬었다고 Home Depot 에서 새것으로 사다가 바꾸는 정성까지 드리곤 했다
혹시라도 다른 물건에 묻어서 없어질까 염려스러워
꺼진 불도 다시 보듯이 Junk Mail도 함부로 버리지 못하고 읽고 또 읽어면서 확인후에 버렸다
이제는 Mail Box에 별 관심이 없다
Mail이 오는것이 귀찮다
Mail 이래봐야 대부분이 Junk Mail 아니면 돈내라는 Bill Bill 이다
이것이 나의 영주권을 위한 기나긴 여행 이야기이다
................................. 끝 .........................................................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목요연하게 정열이 안된 글이라 뒤숭숭할 수도 있고
어법이나 맞춤법이 틀린것이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애교로 넘어가 주시고)
어느분에게는 타산지석이 될수도 있을 것이고
어느분에게는 역겨운 반감을 가질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냥 웃고 넘어가는 에피소드 정도로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첫댓글 님의글 잘읽었습니다. 님의 글을 읽고 가슴이 뭉클해지는군요 감동입니다 본인 또한 2002년 관광으로 입국 2개월비자받고 무작정 뿌리를 내리려하다가 마음을 바꾸어 리턴. 오늘현재 내셔널비자센터에서 핏켓3 기다리고 있는중이고요. 컷오프일자는2001년5월 오픈 워싱턴 덜러스공항으로렌딩 Jop위치는 Bethesda MD입니다. 본인의 전공은 자동차 정비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현지에서 ?아뵙겠습니다. 건강하세요!!!!!!!!!!!!!!!!!!!!!!!!!!!!!!!!!!!!!!!!!!!!!!!!!!!!!!!!!!!!! koyw7@yahoo.co.kr(82-18-232-6044)
남일 같지않군요. 잘보았습니다.
화이팅 가장입니다. 여기도 달라스근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