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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을 요구하는 세대의 악함에 대하여 말씀하심(1)
- 요나보다 더 크신 예수 그리스도 -
마태복음 12:38-42절(눅 11:29-32)
38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41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2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바리새인들 및 서기관들과 예수님 간에 바알세불 논쟁이 있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예수님에게서 흩어 놓으려는 말에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악함이 그들이 악한 마음에 있는 까닭임을 말씀하셨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어떤 날 하루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중에서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은 예수님에게 이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들이 요구하는 이적은“하늘에서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라고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참조. 마 16:1; 막 8:11). 마태복음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이처럼 이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일은 이번 것(마 12:38-42; 눅 11:29-32) 외에도 또 한 번 있으며 그 기록을 마태복음 16장 1-14절과 그 병행 구절인 마가복음 8장 11-13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이적 요구는 모두 두 번 있었습니다. 이 두 곳은 그 내용의 전개에서 해 주시고 있는 것이 같은 동일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만 이 둘은 예수께서 이것을 말씀하시게 된 배경이 서로 다른 전혀 다른 것입니다. 본문은 그 중에서 첫 번째의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이적을 요구하는 이러한 태도는 예수께서 이미 많은 이적으로 하늘에서 주시는 자기 계시의 표적이 되게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힐난(비난)하여 시험하는 의도로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참조. 막 8:11). 이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을 통해서 그 소문을 들어 잘 알고 있으며, 또한 한쪽 손 마른 사람(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신 일이나(마 12:9-14), 귀신을 내쫓으신 일(마 12:22)은 자신들의 눈 앞에서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일입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이 이적은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하여 말씀하신 여호와의 종을 통하여 하실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성취하신 일로써 되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주셨기 때문에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는 그들로써는 이적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역을 행하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명백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마 12:15-21). 그런데도 이들이 보인 행태는 예수님을 힐난하면서 시험하여 떠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말입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리스도의 능력을 분명하고도 충분하게 보면서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도무지 믿지 않는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보인 앞서의 행동을 보면,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단지 사람의 능력으로 평가했습니다. 가령 병자를 고치는 일은 당시 예수님만이 행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알세불 논쟁에서 예수님께서“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마 12:27)라고 말씀하셨듯이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이나 동료들 중에는 귀신을 쫓아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마술, 마력을 사용하거나 어떤 규정된 의식들을 행함으로써 자기들이 귀신을 쫓을 수 있거나 귀신 들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이 하늘로부터 오는 것임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사람의 능력으로 평가절하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리스도가 아님을 증명해 보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였습니다. 이 말은“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면서 왜 그리스도라고 하면서 다니느냐? 만일 당신이 정말 하늘에서 내려 온 그리스도일 것 같으면 역시 하늘에서 그 사실을 실증해 주는 표적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하늘에서 내려 온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 당신은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일 능력을 가지고 있을 터이니 우리에게 그 표적을 보여 주어서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 온 그리스도이심을 실증해 보이라! 만일 그렇지 못하면 예수 당신은 가짜 그리스도의 노릇을 한 것이다!”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이렇게 새삼 표적을 요구한 것은 하늘에서 오는 표적을 보고 그리스도이심을 확인하면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여 믿는 자가 되겠다는 의도에서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주로 영접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에서 그것들이 증거하는 예수님의 자기 계시를 악한 마음으로 부인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처음부터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을 마음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런 그들이기에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에서 그리스도가 행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을 단지 선지자와 같은 한 사람이 행한 것으로 밖에는 보지를 않았습니다. 이렇게 악한 마음에 있었기에 그 마음에 의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꼬투리를 잡아 트집하기 위한 시험의 의도로 표적을 요구했을 뿐입니다. 사실 이들은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서 설사 새로운 표적을 행하여 보여줄지라도 자기들이 본 표적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을 마음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마음을 잘 알고 계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이 말씀은“악하고 믿음이 없는 세대일수록 더욱더 이적[표적/증거]를 요구한다. 하지만 예언자 요나에게 일어났던 이적밖에는 내가 너희에게 보여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늘에서 오는 이적을 요구하고 있을 때에서는“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가!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아무런 표적도 보여주지 않겠다. 내가 너희에게 표적을 얼마나 더 많이 행해야만 너희가 그것을 보고 믿겠느냐?”(막 8:12) 라고 하시면서 그들의 요구에 대해 예수님은 몇 가지 예를 들어 이적[표적]을 구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악함을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악하고 믿음이 없는 세대일수록 더욱더 이적을 증거로 요구한다면서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믿으려 하지 않는 불신앙 속에 있는 그들에게는 하늘로서 오는 표적으로서는‘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구약성경 중에서 12소선지서에 속해 있는 요나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나서는 주전 780년경에 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선지자 아밋대의 아들 요나가 기록하였습니다.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당시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에 있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이 니느웨에 주시는 말씀인 그들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까지 쌓여져 있기 때문에 그들을 멸망시킬 것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이를 탐닥치 않게 여겨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도망하여 지중해의 해안으로 가서 욥바라는 항구에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가 하나님에 의해 풍랑이 일어 배가 전복되고 침몰되는 위기를 맞았을 때 이 일이 하나님에 의해서 있는 일임을 요나는 알고 이 위기로부터 벗어나려면 자신을 바다에 던질 것을 말함으로 선원은 요나를 바다에 던져 풍랑에서 위기를 모면했을 때 요나는 바다에 삼켜졌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해 준비해 놓은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게 하여 바다로부터 그를 구원하여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을 있게 함으로 그의 생명을 보전하셨다가 삼일 만에 그를 해변에 토해내게 한 후 그에게 다시 두 번째의 지시를 내려 니느웨에 가서 그에게 일러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심으로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니느웨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에 있었던 요나가 큰 물고기에 삼켜져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간 있다가 토해져 나온 것은 장차 일을 일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즉, 예언적인 표적으로 주어졌습니다.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간 있다가 뭍으로 토해져 나온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삼일 간 있다가 무덤을 여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실 것을 보여 알려주는 일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나의 표적은 장차 하나님께서 있게 하실 하늘로부터 주어질 일을 말해주는 표적이 되었습니다. 악하고 믿음이 없는 세대일수록 표적을 구하는데, 그런 그들에게 보여줄 표적으로는 요나의 표적 밖에 없다고 말씀하신 것에서 요나의 표적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미리 보여주어 알게 해주는 최종의 표적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요나의 표적이 하늘의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인 만큼 이 표적은 하늘로서 온 표적으로 말해지며, 또한 이 표적에 의해서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밤낮 사흘을 지냈듯이 예수님도 땅 속에서 사흘을 지내고 나오실 것을 예표하고 있음으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하늘로서 오는 표적의 실체가 됩니다.
따라서 요나의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 그림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요나의 표적이 그림자의 역할을 통해 보여 온 실체를 드러내신 것이 됩니다. 즉, 그림자와 실체의 관계성에 있는 것이 요나의 표적에 따라 그대로 있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요나의 표적을 자신과의 관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간 있다가 토해져 나온 요나는 예수님이 죄 아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그들을 대신하여 죽은 자가 되심으로써 죽은 자의 한 사람이 되어 땅 속에서 삼일 간 있을 것이나 삼일 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실 것을 보여 온 표적으로 있는 것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말해온 증거로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증거대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에서 요나의 표적과의 관계에서 예수님은 요나보다 더 큰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을 통해서 이렇게 요나의 표적보다 더 큰 분이 지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요구하는 증거로 그들 앞에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요나의 표적을 보여 달라고 구하고 있는데 그 요나의 표적보다 더 큰 분이 지금 너희들 앞에 있는데도 너희는 단지 그분을 보여주고 설명해주는 일을 하고 있는 작은 것을 보게 해 달라고 구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행동이 얼마나 큰 악인지를 그들이 구하는 요나의 표적을 가지고 말씀해 주십니다. 심판날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그들을 정죄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가 전한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는 그들의 죄악이 하나님에까지 닿아져 있어 하나님이이러한 니느웨 사람들을 심판하여 멸망시킬 것임을 들었을 때 자기들의 모든 악한 길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기 때문에, 이러한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보다 더 큰 분인 예수님을 대하며 예수께서 전하시는 하나님 나라복음을 통하여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듣지만 이를 거부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악을 정죄하는 증거가 됩니다.
요나서는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와 그런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다루시는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대하는 하나님의 본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는데 있습니다. 요나는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에 있는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 땅에 도착하여 그곳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주어진 회개의 복음을 전하였으나 니느웨가 멸망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용서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요나는 성 밖을 나가 동쪽으로 가서 나뭇잎으로 초막을 만들고 그 그늘 맡에 앉아서 니느웨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에 대하여 눈여겨 보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뜨거운 햇빛이 내리쬠으로 자신이 만든 초막의 나뭇잎들이 모두 시들어 말라 버림으로 뜨거운 햇빛에 노출된 요나는 괴로워하고 짜증나게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박덩쿨을 자라게 하여 요나의 머리 위를 덮어 그늘을 만들어 주심으로 뜨거운 햇빛을 피하게 된 요나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해가 뜰 때에 벌레가 그 박넝쿨을 갉아 먹음으로 박넝쿨이 시들어 죽어 다시 뜨거운 햇빛에 노출되게 됐는데, 거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뜨거운 동풍이 불어오게 하여 뜨거운 햇빛에다가 뜨거운 바람마저 요나를 괴롭히므로 요나는 기력을 잃고 더 견디지 못하고“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라고 불평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야, 너는 박 넝쿨이 죽었다고 크게 화를 내는데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박넝쿨 하나에 대해서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고 이것이 시들어 죽자 실망하여 그렇게 슬퍼하고 있지 않느냐? 네가 이 박넝쿨 하나를 가지고도 그렇다면 하물며 앞뒤를 분별할 줄 모르고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욘 4:5-11)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니느웨 사람들도 이렇게 아낀다면 하물며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은 더욱더 아끼지 않겠느냐?”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선지자를 보내셔서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선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방인인 니느웨 사람들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그들을 용서하고 멸망시킬 것에서 돌이켜 그들의 생명을 보전하신다고 하면 하물며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 어찌 기뻐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니느웨 사람들이 선지자 요나를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지 않고 귀담아 들어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멸망시키실 것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시고 멸망시키지 않으심으로 앞뒤 분별력이 없고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십 이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멸망으로 구원을 받아 생명의 보전에 있었으며, 이들로 인해서 수없이 많은 짐승들도 죽임을 면했는데 이보다 더 많은 이스라엘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에게서 니느웨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악함을 고발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조상들과 동일한 악에 있습니다. 이들의 악함은 조상들에게서 보는 악함보다 더욱 악하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나보다 더 큰 분이 오셨으며, 그분이 지금 그들과 함께 있는데 그분을 믿으려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그들을“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표현하여 규정하였습니다. 여기의“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악하다’는 타락한 본성에서 나오는 부패한 마음과 생각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악한 마음과 악한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음란하다’는 이들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태도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상태에 있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곧 하나님께 불신앙하는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이러한‘세대’는「악하고 믿음이 없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요나의 표적은 하나님께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의 악함을 지적하시며 책망하시는 것이었으며, 그러한 그들에게는 니느웨에 선포하였던 멸망이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주어질 것에서 하나님께 믿음이 없다는 것이 그들 자신들에게는 하나님의 저주에 있는 불행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그것처럼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에 있게 됩니다.
이러한 처지는 말이죠. 바알세불 논쟁에서의“…그렇다면 나중 형편이 어찌 되겠느냐? 이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무슨 죄를 짓든지, 무슨 신성 모독적인 말을 하든지, 그들은 용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또 누구든지 인자를 거역하여 말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역하여 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마 12:25-32) 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고 본문 이후의 내용인“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을 것이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할 것이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말하기를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비어 있었다. 그래서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었다.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될 것이다”(마 12:39-45) 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악하고 음란한 이들을 심판 날에 정죄 할 것인데, 이들이 죄 값으로 받는 저주는 이전의 세대가 처했던 저주보다 더 비참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가 주어지는 것에서 말씀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전혀 알지도 믿지도 않는 이방인들에게 하시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불러 찾는 유대인들의 지도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하시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지적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예수님을 불신앙하고 배척하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입니다. 예수님을 불신앙하고 배척하는 자인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합니다. 예수님이 전한 천국 복음을 듣고 행한 표적을 통해서 진실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는 이미 표적에서 보여주신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여 그분의 능력 속에서 구원을 누리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또 다른 표적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럴 까닭이 없기 때문에 그럴 마음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시대이건 간에 타락한 인간에게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의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부르며 찾는 자들에게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표적을 구합니다. 예수님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비롯하여서 사두개인들과 장로들과 제사장들이, 그리고 이들을 따르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능력을 행하시는 것을 사람의 능력으로 또는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능력으로 평가하며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고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는 것에서 그 빌미를 찾고자 노력했다고 하면, 오늘날에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게서 교회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그리스도로서의 능력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땅의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을 이용하고자 노력을 합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사실을 온 세상이 다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사단은 전략적 수정을 한 것입니다. 가장 인간적인 욕망을 그리스도의 신앙에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좇아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앙을 이용해 육체의 욕망을 좇게 미혹하는 일을 합니다. 그에 따라 그 미혹 속에 있는 자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땅에 속한 표적을 구하는 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자신들의 육이 갖는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의 능력을 빙자한 갖가지 표적이 횡행합니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표적을 조작하여 성도들을 속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모두에는 기도가 표적을 행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등장합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신앙 외에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는 지혜를 구하는 헬라적 신앙의 위험성을 지적합니다(고전 1:22). 철학이라는 지혜를 가지고 신에 대한 이해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모두에는 예수님이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속죄의 피를 흘리신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며, 또한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다시 살려 모든 믿는 자들의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예수님을 보면 생각하는 것이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 갖는 의미여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죄인을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있게 하신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의존하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표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믿음에 있는 성도들을 보며, 함께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주님의 큰 위로입니다.“믿음을 보겠느냐?” 라는 이 세상에서 믿음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입고 있으니 하는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