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홍 시집, 『코르크 왕국』, 파란, 2020.
시인의 말
자본주의는 사각형이다
사각의 집에서 일어나 사각 전철을 타고
사각의 건물로 출근하는 지구인들
뇌 속에 사각의 생각들이 자란다
프랑켄슈타인이 돌아오고 있다
종말이 시작될 것이다
발칙한 플라스틱 외3편
정연홍
플라스틱을 먹는다
플라스틸 나물 플라식탁 밥 플라식틱 국 플라슻틱 고기 플라소틱 김치 플라수틱 물고기
플라스틱 밥상
플라숙틱 집
팔라속틱 베개
플라순틱 이불
평생 나만 사랑해 주기로 약속한
플라술틱 애인
플라서틱 자동차를 타고
플라사틱 도시를 지나
플라ㅅ틱 사출 공장 공원인
나
플라스틱 풀라스틱 푸라스틱 뿌라스틱
플라스 인생
플라스틱 인간
플라ㅅㅌ이 지구를 지배한다
플라스틱 우주
플라선틱 비행기가 날아간다
고래 배 속에서 드론이 발견되었다
펭귄 잡는 법
펭귄을 잡으려면
두 가지를 알고 남극으로 가야한다
펭귄의 천적은 물개와 고래
사람을 본 적이 없으므로 착한 이웃으로 생각한다
가까이 가면 멀뚱히 쳐다본다
맨손으로 잡으려고 하다간 부리에 물려 피를 본다
날개를 잡으려고 하다간 싸대기를 맞아
훈장을 받는다
그냥 고깔모자 하나를 벗어 씌워주면 된다
펭귄이 모자를 쪼다가 스스로 갇히게 된다
고깔모자는 펭귄을 잡을 때 쓰라고 만든 모자다
펭귄의 몸통을 들어 올리면 로켓포를 맞게 된다
냄새와 더러움을 남기는 화학탄이다
육십 메가 파스칼의 압력은 피멍을 남긴다
사람은 칠 킬로 파스칼의 화학탄을 가지고 있다
펭귄은 두 달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다
펭귄은 영하 오십 도에서 살아간다
펭귄은 날지 않고도 살아남는다
펭귄을 잡기 전 미안해, 말해보라
펭귄은 두 눈을 또르륵 굴릴 것이다
코르크 왕국
차창 밖으로 코르크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빨간 하초가 드러날 때까지 사람들이 껍질을 벗긴다
놀란 눈의 나무들 유리창 너머 나를 보고 있다
리스본의 골목길에 파두 가락이 뒹군다
길을 묻는 내게 소년이 이스쿠두를 보여 준다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이 한때
세계를 주름잡던 포르투갈의 후손들이라니
지금은 코르크 마개를 만들며 생을 보내고 있다니
붉게 짓이겨진 상처도 언젠간 다시 아문다
새살이 돋고 딱지도 떨어져 나가겠지만
기억이 아물 때쯤 사람들이 다시 낫을 들고 올 것이다
이베리아반도에 해가 지고
닻을 내린 선원들이 왁자지껄 골목으로 들어선다
낯선 거리에 서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망설인다
작은 창이 있는 카페에서
이국적인 여인을 만날 상상을 한다
뒷골목의 게스트하우스에 들어선다
내일은 비가 그칠 것 같다
공구들 1
공구라는 이름의 사물이 있다
몽키스패너파이프렌치와이어스트리퍼
볼트를 조이거나 풀거나
파이프를 풀거나 조이거나
전선 피복을 벗기거나 자르거나
인간이라는 고등 동물이 있다
정연홍홍연정연홍정홍정연
가족을 꾸려 지구에서 살아간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는 공구
지구에서 대량 생산되는 인간
들은 목적이 다르다
아마존 원주민에겐 그들의 방식이 있다
숲이 있어 그들은 일부가 되어 살아간다
아침이면 대로엔 차들이 빵빵거리고
철로의 지하철이 철컥거린다
색색의 사람들이 종종거리며 간다
빌딩으로 거리로
일찍 세상을 버리는 사람이 있다
망가져 못쓰게 되는 공구는 폐기되어
고물상으로 팔려간다
무덤에 묻히는 인간도 곧 잊혀진다
새로운 공구가 만들어지고
백 년 전의 인간들이 다시 태어난다
티벳에는 환생자의 물건을 찾는 행위가 아직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