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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추성부」를 읽으며 간절해진다
비판과 동감
고형렬
상강이 지났으니 깊은 가을이다. 배추벌레가 이 무렵에 사라진다. 아내가 허리 아프게 배추벌레를 잡지 않아도 된다. 이제 결구가 드는 배추를 묶어준다. 벌써 배추 속은 한아름의 아름다운 꽃송이같이 벙글어 속이 꽉 찼다. 가을이 너무 깊어가면 흰 갈색의 프리즘으로 세계는 초겨울 정서의 속내를 내비친다. 겨울로 접어들기 전, 무언가 말하고 또 남기고 기억하고 확인하고 싶어진다. 늘 나는 늦가을을 해마다 생의 마지막 앞에 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보내곤 했다. 나는 쉰 번 정도를 이 세상의 가을과 함께 떠났고, 사철의 변화 속에 일심을 가진 자연의 내부와 함께 이미 영면했다. 이 무렵 나는 두 발로 종이제기를 차며 걸어가던 남자와 휘파람을 불며 행방을 감춘 남자를 기억한다. 그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허사에 해당하기도 쉽지 않은 이런 것에 내 마음은 궁금하다.
이 무렵이면 송현리 책상 밑은 차갑다. 작년의 솜방석을 꺼낼 때가 되어간다. 늘 혼자 지내다보니 주변은 온통 침묵과 외로운 것들로 가득하다. 모든 것이 떠나는 것을 예전보다 절실하게 폐부 깊숙이 느낀다. 고적 속에 와 있으면서 죽어 있고 막혀 있던 감각의 구멍들이 되살아나는 것이 한켠으론 즐겁기도 하다. 적멸위락의 사행시의 히말라야가 있지 않은가. 고적(孤寂)을 가장 가까이서 벗하며 즐기는 것이 지인과 현자들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것의 곁에 가만히 다가가고 그 먼지의 냄새들을 어렵게 맡아보려 코를 큼큼거려본다.
서울에서도 이 무렵이면 한번 꺼내 쌓인 먼지를 털고 읽곤 하던 만고의 명문이라 할 구양수의「추성부(秋聲賦)」가 생각난다. 철학자들은 현대를 형이상학이 죽은 시대라고 하고 비평가들은 이미 작가는 죽었다고 자기 철학과 비평의 논리를 펼치면서 혁명보다 무서운 해체주의의 영토를 확장하고 있지만, 역시 옛글에서 가장 깊은 곳에까지 가닿은 인간의 마음의 글을 뒤적여 찾고 조용히 차양 뒤에서 혼자 읽게 된다.
이즈음 내가 다시 읽은 「추성부」는 송나라의 황견(黃堅)이 편찬한 『고문진보(古文眞寶)』안의 산문류에 들어 있다. 아마도 겨울 한가운데까지 이 글이 내 책상 한쪽엔 있을 듯 싶다. 그 글이 사라질 무렵이면 다시 먼 북쪽의 남산자락이 발그래져 오는 대한(大寒) 쯤일 것이다. 아마도 절기가 살해된 도시문명의 일상엔 이 신(神)과 그 뜻들이 없어진 지 오래되었을 것이다. 구양자가 어느 깊은 밤중에 책을 읽고 있는데, 서남쪽으로부터 이상한 소리가 올라오고 있었다. 놀란 듯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보니, 이상하여라 처음에는 낙엽 지는 바람소리 슬픈 듯 쓸쓸하더니 문득 날치며 퍼져 드날려 마치 물결이 밤에 놀란 듯 갑자기 비바람 치는 듯하였다. (중략) 동자(童子)에게 이 무슨 소리냐 하고 나가보아라 하니 동자가 나가보고 들어와선 별은 빛나고 달은 밝은데 맑은 은하수〔明河〕가 하늘에 있어서 아무데도 사람 소리는 없고 나무 사이에 그 소리 있더이다 하였다. 그대로 말하면 산천적요(山川寂寥)다.
이때 나는 잠시간, 구양수의 다음 문장으로 훌쩍 건너가기보다 문장 밖에 있는 야무진 동자의 전달 능력에 놀라게 된다. 여기서 구양수가 동자가 전해주는 말을 잘 듣고서 더함 없이 기록한 점에도 물론 나는 감탄한다. 이 글 속의 유일한 인물인 동자가 나중에 글을 쓰는 문인이 될지 아니면 과거의 자신의 모습의 반영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나는 구양수보다 이 동자에게 관심이 쏠린다. 은하수를 본 아이는 일차 경험자요 구양수는 전달 받은 자이다. 몸소 밖을 나가 밤에 불어오는 낯선 가을바람을 맞아보았어야 했거늘 붓 끝에 흘러나오는 먹물의 생각을 따라 잡느라 구양수는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속도 넘치는 글을 내려쓰진 못했겠지만 짐작컨대 상과 문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속필로 써내려서갔을 터이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붓도 먹도 종이도 없는 이 동자의 메신저의 기쁨이 더 크다. 구양수의 「추성부」는 이 동자에 의해 빛난다. 동자와 추성이 그 심중에서 갈등했을 것이다. 이미 여기서부터 문장은 선택임을 강요하고 또 증좌하게 된다. 그는 후자 쪽을 지향해 갔지만 동자를 잊지 못했을 것이다. 그 아이의 이름은 없지만 가슴에 담아두거나 또 곧 격무로 잊게 될 것이며 그것이 일상의 법칙으로 맞는 일이다. 말은 쉬 잊히고 사라지지만 글은 종이와 먹으로서 그곳에 존재한다. 글의 위력이고 문사들의 자랑이다. 문장가의 동자는 찬바람을 보고 들어와서 너무나도 문학적으로 자신이 본 것을 구양수에게 전달했다. 이 동자의 무심히 던진, 문장의 욕심이 없는 말 한마디가 나는 이 글을 들여다볼 때마다 미소 짓게 하고 동자를 궁금해하게 하는 요인이다. 더구나 그가 대문을 열고 한참을 밖으로 나가 이 소리가 대체 무슨 소리인가 하고 들었을 것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전율 같은 것이 스쳐지나간다. 문장과 문사는 동자의 마음과 귀와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는 딱히 소리를 잘 들은 안회를 기억하기 위함은 아니다.
특히 동자의 주위를 살펴보아도 아무데도 사람 소리 없다(四無人聲) 같은 말은 절차탁마의 표현이 아닌 한 동자의 말이기에 훨씬 문학적 향기가 물씬 풍겨준다. 현장감과 구체성을 얻어낸 문학적 발아의 의사이다. 이 발아가 너무 치장을 하거나 성숙해버리면 재미가 없어진다. 이것은 어설픈 듯한, 불구 같은, 완벽하지 않은, 운명에 순종하고 마는 그래서 슬픈 즉 불가피한 조건의 인물과 문장에서 매력을 느꼈던 것과 같은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앞의 구절에서 구양수는 호령 소리는 들리지 않고 다만 인마(人馬)의 소리만 들린다는 것은 문인이면 얼마든지 쓸 수 있는 인위적 표현이다. 그에 비해 거친 듯하지만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그대로 말해버린 동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 말은 동자의 생생한 가을 바람에 대한 마음의 반응으로 어른들의 영원한 그리움으로 유년 시절의 추억이며 문장의 싹이다. 나는 동자가 때묻지 않은 영혼으로 가을을 맞고 있다고 생각해준다. 더불어 구양수는 귀로 무엇인가를 듣긴 들었으되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가을 하늘에 별이 빛나며 한 계절이 지나가는 동경적인 어수선한 밤 풍경 속에 아이는 몸을 움츠렸을 것이다. 너무나 바람이 이미 차갑기 때문이다. 바람이 지나가는 나목의 뒹굴러가는 낙엽들, 물소리의 검은 골짜기, 멀리 선 어둠 산, 본능적으로 소년의 심장을 열어 들여다본 가을 바람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대목은 사래 긴 밭을 언제 다 갈려 하느냐고 오히려 아이에게 투정을 부리는 듯한 한 남자의 시조 속의 동자와 비슷한 동양의 부지런한 상을 보여준다. 표현에 있어서 덧칠하거나 거짓보고하거나 꾸미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현상 그대로를, 나에게 지나가고 있는 것을 내 가슴에 일어난 감흥을 신명나게, 혹은 우울하게 생생하게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일차 감정을 묘사한 것이 문학의 동일성의 근원에 접근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 동자의 말이 없었다면 「추성부」는 명문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문장을 너무 꾸미거나 사유를 지나치게 화장을 하지 않고 그대로 보는 것이 동자의 교훈이 아닌가 한다. 리얼리즘이 환상보다 더 환상적이란 혹자의 말, 혹은 작품이 현실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말 그래서 독자들은 소설을 읽지 않는다는 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시대는 자연과의 합일된 깨끗한 직정(直情)이 내 식으로 말하면 ‘숫정서’가 글이 양산되고 세월이 흐르고 때가 타면서 이미 낡아버린 것이 아닐까. 소년이 늙듯이. 신성성이 독보성이 전능성이 통찰력이 전문성이 상실된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 그래서 문학보다는 르뽀가 한때 풍미했고 앞으로도 문단과 독자는 창작이아닌 실재의 에세이나 참신한 신예의 르뽀의 명작을 고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역으로 말해서 어떤 창작이란 것이 결국은 만들어졌다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작가 내부에서 한계를 회피하거나 재도전에 좌초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 구심이 든다. 물론 시는 예외이며 또 동류에 속하긴 하지만 미디어 사회에서 작가의 계속되는 비슷한 창작의 반복이 독자에게 흥미를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도 작용하는 것 같다.
한 권의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자신의 일정한 시간과 육체의 소모를 겪어야 하는데 작가들의 경쟁심과 조급성이 장애가 되고 있는 것 같다. 일 년 전에 나온 소설이 시장에서 무시되고 흔적 없이 사라지는 공허감 속에서 상이한 단시간의 재도전과 출간은 공허의 가중을 주며 결국 선물로 받을 것은 문의 익사일 뿐이다. 문사의 문체와 인품엔 작품의 양과는 관련이 없다. 모든 문인들이 대동소이하지만 평생에 150여권의 글을 남긴 구양수와 수천 편을 남긴 백낙천 같은 문장가도 결국 남기는 글은 몇 편에 불과하며 특히 남는 것은 긴 것이 아니라 짧고 꿈같은 인생처럼 아이러니하게도 짧은 시편들이다. 이 의미는 문사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대작이 남는 것아 아니라 오히려 여(餘)의 순간의 짧은 ‘몰록’이 남겨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글이 내 마음대로 써지지 않으니 또 후대에 기억되지도 않으니 또 지금은 팔리지 않으니 글이란 어려운 것이다. 오죽하면 시의 신이 있었겠는가.
「추성부」가 공무에 바뿐 사람의 언어 즉 군사적(창창쟁쟁, 金鐵, 재갈 등의 언어) 묘사들이 거슬리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이것은 그가 진보주의자였고 창 등의 살상무기를 접하고 병사들을 자주 보곤 하여 일말의 칼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이 표출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경계심 혹은 권위의식은 들에서 풍광과 풍설로 평생을 사는 범부의 정서만은 못하다. 그러니 이 작품 속에 그려져 있지 않은 바깥의 동자의 옷섶과 곡시간 못하게 된다. 공자가 제자들과 들을 지나다가 괜한 한 노인으로부터 욕을 먹는 것과 같다. 왜 그런 무기적 언어가 등장하는 것인가. 쓸 수 있는 말도 참 많았을 텐데 하고 감상적으로 나도 생각해보는 것이다.
다시 이 글을 읽으며 역시 마음에 걸리는 것은 또 동자에 대한 구양수의 관심 부분이다. 물론 부(賦)의 문학이라 그렇다 하더라도 또 개혁을 꿈꾸던 진보주의자로서 나중에 다시 한번 동자가 등장되긴 하지만 왜 필자는 동자를 더 보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순진무구한 동자의 말이 훨씬 생생한 현장감을 주는 문학이란 생각이 든다. 마치 찬바람 속에 자라며 뛰고 웃고 우는 소년의 발랄 천진한 말과 생기의 옷자락이 들리고 느껴지는 듯하여 지금도 처마 아래 마당 앞에 서 있는 동자의 남루한 모습이 잡히는 듯하다. 거기서 구양수는 문득 어머니와 자신의 소년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그는 갑자기 어둠속으로 떨어져 사라지는 낙엽처럼 망연한 상실의 세계로 진입하면서 무상의 감상으로 침잠한 것이 아닌가. 소연한 그 침잠이 동자와 함께했다면 다른 문체가 문득 자신의 글 안에 등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무언가 늘 새로운 문장과 형식을 갈망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구양수가 이렇게 동자를 잠깐 아쉽게 등장시킴으로써 나의 눈과 어리석은 비판을 유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니 또 남의 글을 감상하고 시비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자연 자체의 아름다운 ‘서남래자(南西來者)’의 추성을 듣는 것이 좋았지만 구양수가 아니라 구양수의 손이 동자의 돌같이 단단한 머리라도 쓰다듬어주었다면 이 글은 추성 자체를 넘어 더 큰 감상에 떨어진다하더라도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고립의 다정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다른 시간 속에서 같은 시간의 손을 잡아본다는 것을 구양수는 몰랐을지 모른다. 이렇게 짐작하면서 핵심적인 주제보다는 그 주제와 주변의 희미한 것을 보려는 마음을 나는 내보이고 만다. 즉 한 가지에 초점을 맞추면 다른 것들이 소외되며 중심은 소용돌이 치는 것이 싫다는 것을 나는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구양수가 집 주변의 추성을 들으려 한 것처럼 자기 중심에서 나와 자기 주변의 동자를 바로 보지 못한 것이다.
구양수가 그 부분에 대해선 말하고 있지 않지만 내심 놀라지 않았을까 싶다. 아 저놈 보게, 저런 말을 하고. 모른 척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것이야 알 수 없는 일이며 나로서는 「추성부」의 이 부분이 제일의 절구로 들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구양수가 고적하여도 그 동자만 못했다고 말해야 논리가 서며 문학이 들어설 자리가 있겠기 때문이다. 그렇게 됐을 리 없었으나 이 부분이 없다면 「추성부」는 나에게 그리 흥미롭지 못하다.
사실 이 글이 더 아름다워지려면 그 동자의 손을 잡아주는 장면이 있었을 법한데 거기서 이야기를 좀 다른 곳으로 끌고 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다. 더욱더 문사답고 가을 정취답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구양수도 문자에 휩쓸려 가버린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그럴 것이 동자가 심부름꾼일데다가 그 아이가 한데서 더 먼저 저 날카로운 바람소리를 귀로 손으로 또 그 마음으로 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추워지는 겨울을 미리 준비하는 문장의 마음도 부족하다. 구양수가 허허, 추어지지? 하고 달빛 찬 마당에 나와 동자를 앞세우고 동구를 걸었을 법하며 그리고 돌아와 불 켜져 있는 빈방의 자신의 서재를 뜰에서 바라보고 또 더 깊은 가을 속에 들어가지 않았겠는가. 그렇게 말한다고 추성이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외각에서 주제를 더 강화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연암의 「열하일기」를 떠올리지만 말이다. 운문적인 이 부(賦)가 좀 한눈을 팔아야 하는데 너무 증산식의 추살(秋殺)의 주제로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한다. 더 알 수 없는 것은 이들이 비록 「추성부」 안에 있기는 하지만 다 죽은 자들이 아닌가.
그러나 구양수는 어허, 이것이 가을소리로구나, 하였다. 여기서 한 어른으로서의 문인에게 동화한다. 자연과 하나가 되는 구양수의 얼굴을 엿보게 되며 그 얼굴이 도(道, 머리 흔들고 쉬엄쉬엄 갈착辶자)를 감춘 문장이 된다. 모든 것은 가고 없고 구양수의 이 말, ‘어허’와 ‘가을이로구나’ 만 남아야 하는 것이 문학의 위의라 할 것이다. 이 남자의 ‘어허’는 아주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시청각 속에 기억되곤 했을 것이 분명하다. 나무나 달빛이, 바람과 나뭇가지들이 가을밤 속에 흩어져 있는 것을 지금 나는 느낀다. 가을이구나 하는 것이 여기서 온 것이 아닌가.
송현리 가을은 이렇게 오고 있다. 마치 바닷물이 우리집을 지나가는 것 같다. 철썩, 철썩거리며 파도의 물보라가 지붕에 쏴아 떨어진다. 비록 저 살풍(殺風)이 허풍이라 하더라도 모든 벌레를 죽이고 나무의 잎사귀들을 떨구고 있다. 깊은 눈으로 보면 두려운 것이다. 죽은 자들을 기억한다면 모든 인간은 저 추풍의 낙엽만 못하다 할 것이다. 아무리 첨단 문명 속에 살아가고 있다 해도 저 추풍에 비하면 여전이 아무것도 못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며 그래서 나의 태고의 유전자는 나를 통해 이번에도 가만히 숨죽이고 방에서 저 소리에 귀기울여보게 된다. 낙엽 한 장이 무겁게 끌려가고 있는 소리가 들리고 나뭇가지에 발가벗고 떨고 있는 단풍이 보인다. 나의 동일성의 존재들이다. 미래며 과거며 현재다.
구양수가 밤에 찾아오는 가을의 스산한 기척을 들은 최초의 사람이 아니었을까. 저 가을 바람에 인간이 어찌 한단 말인가. 이 대목에서 구양수는 무엇을 생각한 것인가. 인륜이나 군주를 생각하지 않았다. 대자연의 가을 서남래자는 그 빛이 참담하여 연기는 나부끼고 구름은 걷히고 얼굴은 청명하여 하늘은 높고 해는 빛나며, 그 가을은 무섭고 차서 사람의 살과 뼈를 찌르고 그 뜻은 소조(蕭條)하여 산과 내가 고요한 것이다. 또 꽃다운 풀이나 서로 즐기던 아름다운 나무도 이것에 부딪치면 빛이 변하고 이것을 만나면 잎이 지는 것이다. 추상(秋霜)이다. 이 추상의 가을 앞에 옷깃을 여미지 않는 사람은 영장이 아니다.
추상(秋霜) 속에 모든 것이 쓰러지고 있다. 여기서 가을이 인간에게 한 엄격한 자연교사로 나타나며 모든 생명의 감각이 일원론적 자연관에 집중하고 있는 듯하다. 작가가 세계에서 자연을 절대 우위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곳이 구양수가 궁구하는 문장의 깊이와 진가가 어둠처럼 빛처럼 양행하는 부분이다. 이때의 구양자의 정신은 자연의 중심에 들어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홀로 자연 속에 서 있는 고독자로서 존재한다. 이것을 무리하게 말하자면 현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저 어두운 과거의 구양수의 실존적 자아의 발견이다. 저 풀대들이 그 어떤 존재의 지도나 도움이 없이 사라져가는 것을 보고 무심할 수는 없다. 그 소리는 애절하고 쓸쓸하며 분한 듯 소리쳐서 듣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이것이 문과 시의 종결인지 모른다.
여기서 자연의 대법칙을 깨닫고 구양수는 가을을 형관(刑官)이라 부른다. 때는 음이고 또 병상(兵象)이오 오행(五行)으로는 금(金)이라 이른바 천지의 의기(義氣)라 했다. 이 숙살(肅殺, 말려 죽임)로써 마음을 삼는다 하여, 숙명론의 근거와 생의 경계로 삼게 됨을 입증한다. 여기시 구양수는 더 나아가 인간 존재의 아니 만물의 상생(相生)과 상살(相殺)의 슬픔을 얻는다. 이것은 생명과 시간과 자연의 절대조건에 대한 물화와 생멸의 발견이다.
고전으로서 이 슬픔을 얻지 못하면 명문이 될 수가 없다. 악(樂)에 있어서 상성(商聲)에 해당하니 이것은 서방(西方)의 음(音)으로 상(商)은 상(傷)인즉 만물이 늙어 슬프다. 초목은 정이 없지만 때론 나부껴 떨어진다. 사람은 동물로서 만물의 영(靈)인지라 백 가지 걱정이 그 마음을 느끼게 하고 만사가 몸을 괴롭혀 그 안의 움직임이 정신을 흔들리게 하니, 자연의 어쩔 수 없음을 생각하고 인간의 지혜로 길이 없음을 걱정하지 않겠는가. 마땅히 홍안(紅顔)은 마른 나무가 될 것이요, 그 검은 것은 흰털이 되리. 그러니 어찌 본질이 금석이 아님에 초목과 더불어 영화를 다투려 하는가. 이것이 누구의 해침이기에 새삼스레 가을 소리를 서러워하는가. 동자는 아무 대답이 없이 머리를 떨구고 졸고 있는데, 다만 들리는 것은 사벽에 즉즉, 벌레 우는 소리 끊이지 않아 내 탄식을 돕는 듯하다.
여기까지 구양수는 아직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다. 이 뒤척임을 해결해주는 것은 문장뿐이다. 그러나 한 잔의 술이 있지 않았을까. 나는 구양수가 벽에서 술을 꺼내 한잔의 정기의 위로를 받지 않고 그리 밤을 새워 무얼 할 것인가 하고 생각해본다. 모든 것은 가을바람 속에 사라져가는데 혼자 남아 있는 것이 문사의 마음은 아닌 것쯤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 가을 속에 기실은 구양수의 마음도 함께 떠났으며 이미 추살(秋殺)을 인정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 삶이며 그 안에서 내 집과 몸과 마음을 다스리고 단속하게 된다. 이것이 「추성부」의 숨은 한 문장가의 진정한 추상(推想)일 것이다.
나의 송현리의 가을밤을 가끔 자작(自酌)으로 넘긴다. 벗은 멀리 있고 나는 멀리 도시를 도망치듯 시골로 나왔으니 가을바람 속에 사라질 것인가, 여기 이곳에 잠들 것인가도 한낱 인간의 값진 감상일 뿐이지만 알길 없는 무명과 무기(無己)의 무엇이 이 안에 흘러가고 사라져간다. 그것은 저 추풍보다 더 골 깊은 아픔일 것이다. 추풍은 더 날카로워질 것이며, 한 문사의 마을은 깊은 가을밤의 어둠속에 파묻혀갔을 것이다. 인간이 살아선 다가갈 수 없는 추성의 한데를 문장이 대신하여 구양수의 마음을 전해주었다. 몸으로 갈 수 없는 곳을 문장만이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구양수는 북송 때의 시인이며 정치가다. 당의 한유의 작품을 읽고 고문체에 감명을 받아 평생 신풍을 일삼았지만 조절하게 된다. 간결한 문체로 전환하며 복잡한 은유를 개조한다는 것은 혁명이며 반정일 수 있다. 말법을 바꾼다는 것은 사유와 삶과 양식의 근저를 흔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양수는 3살 때 아버지를 잃고 숙부집에서 어머니와 붙어 살았다. 가난하여 갈대로 모래 위에 글을 쓰며 독학했다는 그에게 소년 시절의 기억이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소년 때 임 한 사람의 사상과 모습은 이미 결정된다고 해서 숙명론을 욕되게 하는것이 아니다.
보르헤스가 평생을 도서관에서 살면서 새로운 문학을 꿈꾼 것처럼 구양수도 황실도서관 사서직을 맡다보았으니 수많은 문장과 사유를 비교하고 경험했을 것이다. 꿈은 행동으로 실천하게 되거나 문으로 다지게 된다. 글은 사유로서 대립하게 된다. 조정의 내부에 정책대립이 생기면서 그도 휩쓸려 강등되고 좌천된 바 있었다. 마치 백난천이 그리하여 「비파행」을 집필한 것처럼 그도 여기서 대상에 대한 간결하고도 심오한 곳을 건드는 문장 수련을 뼈아프게 쳐내며 붙이면서 다듬어나갔을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강진의 다산처럼 구양수도 후난성(湖南省)에서 천년 정치사를 그린 「오대사기(五代史記)」를 저술한다. 엄격한 객관적 사관에 입각하여 순교자, 반역자까지도 기록하였다.
구양수는 붕당에 대한 입장을 밝혀 오히려 문사와 사대부들에게 그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였으며 황실은 세력을 분산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붕당이 오히려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황실에서 일하게 되었지만 그는 여자 관계가 복잡했던 것 같다. 조카딸과 혹은 며느리와의 불륜 문제가 불거져 탄핵을 받고 재판을 받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근대적인 면모가 있는 염문이 있는 문인이었던 셈이다. 이런 계기로 구양수는 자신을 취옹(醉翁)이라 부르며 부정(不正)을 버리고 한 경지를 넘어서버린다. 이때 구양수는 중국 최고의 글을 남기는 데 그것이「추옹정기(醉翁亭記)」이다.
명성과 도덕을 잃고 명작을 남긴 구양수. 그는 왕안석, 소식, 소철 등의 인물을 배출했으며 과거 시험을 주로 고문체로 출제함으로써 그 반대파들로부터 폭행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니 구양수는 은근한 괴짜였다. 인생부침이 심한 구양수에게 공무를 보면서 언제 시간이 나서 글을 쓰느냐고 태학(太學)에 있는 학생들이 어느날 질문을 던졌다. 그가 말한 것은 구양수의 삼다(三多) 외 이런 말을 남겼다.
난 공무가 많고 바빠 글을 쓸 시간이 따로 없다. 나는 시간을 짜낸다. 나는 글 쓰는 시간을 따로 짜낸다. 이 짜내니 시간은 틈새 시간이며 중심시간이 버리는 짜투리시간이며 만들어지는 나만의 시간이다. 그냥 두면 지나가고 마는 시간, 공의 시간이다. 말 타고 가는 동안, 아무것도 할 일이 없지 않은가. 그때의 시간이 구양수의 진짜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이 묘한 시간을 만들지 못하고 그냥 허비하고 말지만, 구양수는 그 시간을 짜 만들어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명문을 짜냈다. 그러니까 그 진짜 시간은 오히려 공무에 전념할 때보다 더 빛나는 촌음(寸陰)인 셈이다. 허드렛시간이 황금이 되고 명구가 되는 순간들을 구양수는 짜릿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 공의 시간은 진정한 헛시간이 아니며 특별한 의미가 없는 일상의 시간이 오히려 거짓 시간이 된다. 그런 시간이 실로 덧없는 시간들이다. 아무도 쓰지 않는 버려진 시간을 주워 구양수는 심상(心想)에 남는 글을 후대에까지 남겼다.
그 시간 있는 곳은 마상이며 두번째는 침실의 베개 위며 세번째는 변소다. 상상해본다, 구양수의 마상을. 마상에 올라가 있는 구양수를. 가장 즐거운 시간일 것이다. 공무를 벗어난 시간은 그때뿐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훌쩍 떠나 있는 지척의 마상. 세상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말발굽소리, 통쾌 후련한 심장의 소리. 그런 때까지 공무를 볼 순 없는 노릇이다. 어쩌면 구양수만이 자리하고 있는 그 누구도 관섭할 수 없는 대자유의 절대시간과 구상의 공간이다. 이 시간이 여(餘)다, 바쁨이 없는. 아무리 바쁜 시간 속에서도 햇살이 놀듯이, 또 햇살의 탄소동화작용만 해도 무량수일 테니까 말이다. 끄떡끄떡 말의 궁둥이와 허리 놀림에 허리와 어깨와 머리와 흔들이며 산을 보고 사람들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가는 구양수를 본다. 나는 가끔 그런 구양수를 보곤 글 쓸 시간이 없어 하는 따위의 핑계를 대지 말아야 한다고 반성한다.
신경림 시인이 언젠가 누가 시인에게 시 쓰라고 시간과 바을 내주던가란 말을 기억한다. 또 고은 시인은 나태는 죄에 해당한다는 말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들만이 할 수 있는 뼈아픈 말이다. 시간 깍쟁이 기질의 그리고 엉뚱한 구석이 있는(그러나 너무나 당연한) 몽상가, 자유인, 아웃사이더, 진보주의자(였으나 나중에 보수주의자가 되긴 하지만)인 구양수가 의외의 간결체 문장을 구사함으로써 구태에서 진보하고 남들과는 다른 개성으로 빛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옛날에 한 시인이 어렸을 때, 난 철학자도 권력자도 판관도 싫어요, 나는 시인이 좋아요, 나는 실재의 사랑보다 더 달콤한 당신의 말을 좋아해요, 계속 당신의 말만을 들려주세요, 지금 나에게 해줘요, 나중 사랑이란 지금 나에겐 필요없어요, 우린 그것을 몸으로 알아요, 나는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요, 그러나 당신이 그 말들을 하지 못하게 되면, 그 예능을 잃게 되면, 그 달콤한 새로운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을 떠날 거예요, 당신은 늘 새로운 말을 해주어야 해요, 하고 한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한 여자를 본 적이 있다. 지금도 한 여자가 사랑하고 싶어하는 말을 듣고 싶어하는 매력 있는 시인이 있을까. 물론 그런 여자가 지금도 있느냐고 먼저 물어보아야 하겠지만.
시인들이 조심해야 할 부분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여자는 곧 떠날 수 있다. 더 달콤한 사랑과 말을 찾아서. 즉 말에 끌려다니는 것이 언어의 사랑이다. 그런 시인이 되어야 좋을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아름다운 여자는 옛 추억과 옛 말을 가지고 늙은 디오니소스의 곁에 서서 그의 거친 피부를 매만질 수 있도 있을 것이다. 또 문사들 중에는 이런 것을 거부하는 건조하기 짝이 없는 무색무취의 색다른 문체를 사용하는 작가도 있다. 프란츠 카프카 이전에 프란츠 카프카의 문체가 없었듯이 아직도 문학 속에 구현되지 않은 심리와 가상의 문체는 인물처럼 얼마든지 남아 있으며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베개를 베고 누워 천장을 쳐다보는 있는 구양수, 변소에서 일을 보고 있는 죽은 구양수, 나는 가을 바람 소리를 들으며 「추성부」를 읽으며 잠깐 멈춰 문득 상처투성이의 구양수를 생각한다. 시혼이 있는 자는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몸과 눈과 정신이 열려 있는 자들이다. 동자는 구양수 한쪽에서 잠들었는가, 아니면 동자는 구양수인가. 알 수 없다. 왜 문장들은 그렇게만 흘러간 것일까. 이것도 난감한 가을 탓이라고 넋두리를 해본다. 그러면서 나는 좋은 글이란 또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정형도 그 근본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정해진 것은 처음부터 그리고 장래에도 없다. 구양수도 어쩌면 그 한 주류를 거부한 방외자 같은 자일 것이다.
어쩌면 나는 구양수를 빌려 이렇게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올바른 문학이란 없다. 문학이 어찌 그것뿐이겠는가. 백낙천이 일상어를 상용하여 쉽고 천한 문장이라고 비난 받았지만 당대의 대가인 것처럼 한 개성의 문체를 얻는다는 것은 한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의 언어와 노니는 것과 같다. 그러니 문사라 하면 천하를 얻는 것보다 글을 얻으려 하지 않았던가. 그들이 이미 죽은 현대적 의미의 작가라 하더라도. 왜냐 하면 권력은 벗어던져야 하는, 자신의 토양과 옷이 아니고 글은 자신의 사상과 정서를 담는 가장 오래된 인간의 정신적 장르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구양수가 동자와 들었던 저 가을 바람은 바로 문장 퇴고의 자연의 섭리며 추살이며 잠듦이다. 깊어지고 홀로 서 있는 대문 앞의 한 그루 벚나무를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나는 또 그 벚나무의 화려한 꿈도 잊지 않고 있음을 입이 간지러운 듯 말하고 싶어지는 선행 심리를 다스린다. 하나를 마치고 강설의 겨울로 아주 건너가는 것이 ‘추성부’였다.
다시 가을 바람의 아쉬움 속에서 “별은 빛나고 달은 밝은데 맑은 은하수〔明河〕가 하늘에 있어서 아무데도 사람 소리는 없고 나무 사이에 그 소리 있더이다” 한 동자의 목소리를 기억하고자 한다. -끝
* 시우주낭송회 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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