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으로 보는 평신도] 이명래(李明來, 요한, 1890~1952)
- 1946년 10월 13일 자 『경향신문』에 실린 이명래 고약 광고로 “고약계의 거성”이라고 적혀 있다.
[고약계의 거성(巨星) 이명래 고약] 애호하여 주시는 여러분의 건강을 축원하오며 본인이 서울시 중림동 24번지에서 20여 년간 종기 치료에 종사하던 중 지방으로 이전하였다가 해방 후 다시 상경하여 서울시 서대문구 의주통 1정목 20번지(서대문경찰서 앞)에서 개업하였사오니 전보다 더 들러주시기를 바라나이다. - 이명래 고약 본점 주인 이명래.1)
당시 잘 낫지 않는 종기에도 효과가 탁월하여 ‘고약(膏藥)계의 거성(巨星)’이라 불리던 “이명래 고약”의 광고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흑갈색 고약을 불에 녹여 노란 기름종이에 얇게 펴서 종기에 붙여놓으면 고름이 빠져나오고 상처를 아물게 해주던 국민 상비약, ‘이명래 고약’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부럼’을 깨물며 ‘부스럼’을 다스리다
이명래 고약이 개발되기 전 우리 선조들은 정월 대보름 이른 아침에 날밤, 호두, 땅콩 등의 ‘부럼’을 자기 나이 수대로 깨물면서 그 해 ‘부스럼’이 나지 않기를 빌었다.2) 실제로 전라도나 충청남도에서는 ‘부스럼’의 방언으로 ‘부럼’을 쓰기도 한다. 예전에는 위생, 보건 여건이 좋지 않아 종기를 비롯한 각종 피부병 환자가 많았다. 왕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1800년 여름 정조가 병에 걸려 온 나라에서 이름난 의원이 모두 올라와 진찰하였다. 한 의원은 “신의 생각에는 이미 푹 곪았으니 곪은 살을 제거하고 새 살이 돋게 하는 약제를 써야 할 것이라 봅니다. 붙이는 약제로는 거악산(去惡散)을 나미반과 함께 쓰고 탕제로는 호심산(護心散)을 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 하였고, 다른 의원은 “아직 푹 곪지는 않았는데 곪은 살을 제거하는 약제를 쓰는 것은 너무 이른 듯합니다. 충화고(沖和膏)에 유향(乳香)을 첨가하여 붙인 다음 탁리소독산(托裏消毒散)을 복용하시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라고 하였다.3) 거악산, 호심산, 충화고, 유향, 탁리소독산 등의 약재들은 우리나라에서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 사용된 한약재들이다. 하지만 이 한약재들이 신통치 않았던 모양이다. 정조의 종기는 아물지 않고, 오히려 더 커져 등골뼈 아래쪽부터 목 뒤까지 여기저기 부어올랐으며, 그로부터 며칠 후 훙거(薨去) 한다.
개항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1886년 제중원 의사 알렌(H.N. Allen, 1858~1932)은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1885.4.~1886.3.)』에서 제중원을 찾은 환자의 병명 중 1위는 학질, 2위는 소화기 질환, 3위가 각종 피부병이라 했다. 외래에서 치료를 받은 환자 1만 460명 가운데 394명이 수술을 받았는데, 그중 200명이 종기를 절개하여 고름을 빼내는 수술을 받았다. 이는 수술 환자의 50.7%에 달하는 숫자였다.4)
또한 1902년 분쉬 박사가 콜레라 방역을 위해 독일 영사관에 제출한 제안서를 보면 3항에 “도로에 대소변을 버리는 행위를 금지할 것. 청소한 뒤 나온 하수구 오물을 길에 버리게 하지 말고 수거해갈 것. 현재로서 가장 바람직한 조치는 하수구 오물을 청소하지 않고 그냥 두는 것”이라고 적혀 있어 당시 조선의 위생 상태를 엿볼 수 있다.5) 당시 보건, 위생 환경은 세균성 피부질환의 발생과 확산을 불러일으키기 쉬웠으며, 항생제가 보편화되기 전인 1980년대까지도 우리에게 부스럼은 흔한 질병이었다.
- 충정로에 있던 명래 한의원에서 제조한 이명래 고약과 고약을 담는 봉지(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종기 치료제의 대명사, ‘이명래 고약’
충남 아산 공세리성지성당 박물관에는 이명래 고약이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 고약이 ‘성일론 고약’이라 불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이명래 고약은 원래 ‘성일론 고약’에서 출발한다. 성일론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에밀 드비즈(E.P. Devise, 成一論, 1871~1933)의 한국 이름이다. 그는 1894년 사제품을 받고 그해 10월 한국에 입국하여 1895년 5월 충남 아산 공세리 성당의 초대 주임 신부로 부임하였다. 1년을 잠시 명동의 당가(경리담당) 신부로 활동하다가 1897년 6월 공세리 본당 신부로 재부임하여 1930년까지 34년간 공세리 본당의 터전을 닦아 놓았다. 드비즈 신부는 조선시대 조세를 보관하던 공세창(貢稅倉)을 성당부지로 매입하여 성당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공사장 인부들과 인근 주민들이 다양한 피부질환으로 고통받는 것을 보았다. 이에 고약의 비법이 적힌 한방 의서를 가지고 있었던 드비즈 신부는 고약을 제조하여 무료로 나누어 주었다. 이 고약이 종기 치료에 효과가 좋다는 소문이 났고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붙여 ‘성일론 고약’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아산에 자리한 공세리 성당에서 개발된 ‘성일론 고약’이 어떻게 ‘이명래 고약’이 되었을까? 이명래는 서울 남산동에서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가난한 집의 사정을 알고 있던 명동본당 주임 프와넬(V.L. Poisnel, 朴道行, 1855~1925) 신부의 주선으로 공세리로 이주한다. 아산 공세리는 1478년(성종 9)부터 아산만이 내려다보이는 산에 충청도 40개 지역에서 조세미를 거두어 보관하던 공세창(貢稅倉)이 설치되어 있던 곳이다. 거두어들인 곡물은 조운선에 실어 아산만으로 나갔으며, 바닷길을 거슬러 올라가 한강에 다다르면 강을 따라 올라 한양으로 운송되었다. 하지만 조운선은 항해 도중 풍랑을 만나 침몰하는 사고가 자주 발생하였다. 이명래 가족은 성당의 소작논 한 마지기라도 받아 농사를 지어보겠다고 과거 조운선이 다녔던 길을 역으로 거슬러 공세리로 향한다. 그러나 조운선처럼 풍랑을 만나 서울에서 정리한 전 재산이 든 엽전 궤짝을 바다에 빠뜨리고 무일푼으로 공세리에 도착한다. 딱한 사정을 들은 드비즈 신부는 이명래 요한에게 잔심부름을 시키고 고약 제조법을 알려 주었다.6)
드비즈 신부로부터 배운 치료법을 토대로 종기를 치료하는 고약을 만들기 시작한 이명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상치료를 베풀며 고약의 효능을 실험하였고, 갈수록 그가 만든 고약의 치료 효과에 대한 소문이 퍼져 사방에서 그의 고약을 구하러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충청도에서 명성을 얻은 이명래는 1921년 자신의 고약 비방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청파동을 거쳐 중림동 성당 언덕에 자리를 잡고 고약의 더 좋은 효능 실험에 주력하였다. 또한 애긍의 마음으로 많은 환자를 치료했는데 매일 300~400명의 환자들이 새벽부터 몰려들어 찾아온 순서대로 번호표를 나누어주고 집안팎에 앉아 있게 한 뒤 번호를 불러 진찰을 하고 고약을 팔았다.7)
- 이명래 아내의 회갑연 기념사진. 이명래와 그의 아내가 앉아 있고 뒷줄에 가족들이 서 있다(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너 항상 주모께 의지하여라
1944년 일본이 실시한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이명래는 친척이 있는 경기도 평택 서정리로 이주한다. 광복과 함께 서울로 돌아온 이명래는 1946년 서대문경찰서 앞에 점포를 내고 앞서 살펴본 광고도 신문에 게재하였다. 최고의 명성을 떨치던 1950년 6월 20일 회갑을 맞은 이명래는 성대한 회갑연을 치른다. 그러나 5일 후 발발한 전쟁으로 사위를 제외한 둘째 딸 식구를 모두 잃었고, 인민군이 후퇴하며 고약 점포에 불을 질러 모든 것이 불에 타버리는 불행을 겪게 된다. 이후 가족을 잃은 아픔 속에서 다시 평택 서정리로 피난을 갔다가 52년 1월 6일 뇌출혈로 숨을 거둔다.
이명래 사후 ‘이명래 고약’은 ‘명래한의원’과 ‘(주)명래제약’으로 나뉜다. 충정로에 자리한 ‘명래한의원’은 이명래의 둘째 사위 이광진(李光眞)에 의해 유지되었고, 고약의 대중화를 원했던 막내딸 이용재(李容載)에 의해 종로구 관철동에 ‘명래제약’이 설립된다.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소아과 의사로 활동하던 이용재는 1955년 명래제약을 설립하여 대량 생산 체제를 구축하고 번창하였으나 2002년 경영난으로 인하여 폐업하였다. 현재는 ‘천우신약’이 판권을 인수해 고약 생산에 필요한 현대적 자동화 설비 라인을 구축하여 맥을 잇고 있다. 현재도 대형 약국에 가서 구매할 수 있는 이명래 고약은 환경이 열악했던 시대에 많은 이들의 고통을 씻어준 만병통치약이었다. 항생제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고름만을 쏙쏙 뽑아내어 주는 안전한 치료제인 이명래 고약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아픈 이들의 고통을 돌보았던 이명래의 삶의 모습을 닮았다.
- 현재 천우신약에서 생산되고 있는 이명래 고약이다.
이명래는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겪으면서도 하느님 안에서 참된 평화를 구하려 했던 우리가 본받아야 할 평신도이다. 그가 한국 전쟁 발발로 가족을 모두 잃은 둘째 사위 이광진에게 보낸 편지 속에는 시련 속에서도 주님께 의지한 그의 굳은 신앙을 읽을 수 있다. 편지의 일부를 나누고자 한다.
너 항상 주모께 의지하고 주의하여라. 이 세상은 헛것이니 그리 알고 무슨 생각 헛되이 말고, 유감에 빠지지 말고, 항상 성모께 의지하고 무슨 일이든지 하여라. … 성당 신부께 가서 『준주성범』8)을 얻어다 두고 보아라.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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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膏藥界의 巨星 李明來膏藥!」, 『경향신문』, 1946년 10월 13일 자 2면 광고.
2) ‘부스럼’은 피부에 나는 종기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3) 『일성록』, 1800년(정조24) 6월 22일.
4) 이영남, 「한국 ‘근대 전통의약품’인 <이명래고약>의 역사」, 『약학회지』 60, 2016, 277쪽.
5) 리하르트 분쉬 저, 김종대 역, 『대한제국을 사랑한 독일인 의사 분쉬』, 코람데오, 2014, 80쪽.
6) 천주교 대전교구 공세리교회, 『공세리본당 100년사』, 1998, 137쪽 참조.
7) 안종주, 「고약, 서민들의 만병통치약」,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 한겨레신문사, 1990, 223~228쪽.
8) 『준주성범』은 15세기 저술된 신심서로, 영적 생활을 돕는 훈계와 내적 위안을 얻는 법을 담고 있다.
9) 윤선자, 「이명래 고약의 창제자, 이명래」, 『교회와 역사』 191호, 1991, 26쪽.
[평신도, 2022년 Vol. 73, 남소라 모니카(한국교회사연구소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