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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읽을거리
7. 해방신학(解放神學/Liberation Theology)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주교님 1,2 / 로메로 주교님 1,2
중남미에서 혁명의 불씨를 지핀 카스트로(Fidel Castro)와 체 게바라(Che Guevara)를 쓰면서 그와 같은 선상(線上)에 있는 남미의 해방신학(解放神學/Liberation theology)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해방신학(解放神學/Liberation theology)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와 콜롬비아 메데인(Medellin)에서 열린 제2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메데인 회의/1968년) 이후 중․남미 대륙에서 시작된 진보적인 가톨릭 신학운동으로, 민중(民衆)이 지주(地主)들과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착취와 억압을 받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운동이다.
이 운동의 뿌리는 페루(Peru) 출신의 신학자이며 가톨릭 사제였던 구스타보 구티에레스(Gustavo Gutiérrez)가 쓴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1917)’이라는 책인데, 구티에레스는 이후 ‘해방신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다.
1960년대 말, 중남미(中南美) 등 제3세계를 중심으로 일어난 민중 해방운동에 바탕을 둔 가톨릭 해방신학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경제적 착취, 정치적 탄압, 제국주의의 횡포 등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어긋나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가톨릭의 임무라고 믿는 신학이다.
라틴아메리카를 중심으로 일부 혁신적인 신학자들과 가톨릭 사제들이 ‘하느님은 민중의 편에 서시는 민중의 하느님’이라는 슬로건으로 해방신학을 표방하자 로마 가톨릭은 전통적인 교의(敎義)의 유지를 주장하는 보수(保守) 입장에서 해방신학을 마르크시즘(Marxism)과 유사한 것으로 간주하여 엄격히 단속하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회정치적으로 이해하는 해방신학은 전통적인 교리를 위협하는 반기독교적 사상으로 여겨 탄압하였던 것이다.
1978년 교황으로 선출된 고(故)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 현장에서 사목하는 진보성향의 사제들을 대폭 보수적인 사제로 교체하였고, 브라질에서는 1980년 진보성향의 엘데르 카마라 대주교를 강제 은퇴시키고 보수적인 대주교로 교체했다. 새로 임명받은 대주교는 성직자 교육기관 폐쇄, 해방신학 성격의 신학교 교수 해고 등으로 해방신학을 탄압하였다.
해방신학을 언급하며 또 한 분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엘살바도르(El Salvador)의 오스카 로메로(Óscar Arnulfo Romero/ 1917~1980) 주교님이시다. 남미 해방신학의 상징적 인물로 추앙받는 로메로 주교님은 1980년 엘살바도르 우익 군사정권에 맞서 저항하다가 성당에서 미사 도중 총을 맞고 사망한다.
1993년, 할리우드의 존 듀이건 감독은 이 총격사건을 영화로 만드는데 제목이 ‘로메로’로, 이 사건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근래 암살된 로메로 주교는 로마교황청에서 복자(福者)로 결정하여 곧 시복식(諡福式)이 있을 예정이라고 한다.
중남미 나라들은 200여 년간 스페인 및 포르투갈의 가혹한 식민정치를 겪었고, 20세기 들어 대부분 독립을 쟁취하지만, 미국을 등에 업은 자본주의의 팽배로 우익정권이 들어서면서 식민시대보다 더 가혹한 경제적 착취와 억압에 시달리게 된다.
해방신학은 권력을 가진 자들의 횡포와 착취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순수한 출발이었지만 유럽의 식민정책, 식민지배로부터의 해방 이후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 충돌, 미국을 필두로 한 자본주의의 득세로 더욱 심해진 경제적 착취 등으로 끊임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민중들 속으로 파고든다.
이 자본주의 횡포에서 벗어나고자 혁명의 선봉에 섰던 대표적인 이가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인데 결국 중남미 반미(反美) 공산정권 수립의 빌미가 되어 중남미 대부분 나라들이 공산화로 기울게 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이상(理想)과는 달리 독재정권을 낳았고, 극심한 경제적 궁핍을 가져와 오늘날까지도 중남미의 나라들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
1980년, 엘살바도르에서 로메로 주교님이 미사 도중 총격으로 사망한 그해, 우리나라에서는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으니 세계사는 동서를 막론하고 유사한 흐름이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天主敎正義具現全國司祭團/Catholic Priests' Association for Justice, CPAJ)은 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들로 구성된 가톨릭 사회운동 단체로 언뜻 해방신학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되지만 전연 별개이다. 이는 한국 로마 가톨릭의 사조직(私組織)으로 천주교의 공식 입장은 아니다. 이 단체는 1974년, 천주교 원주교구의 교구장이었던 지학순 주교가 군사정권에 항거하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민청학련사건/民靑學聯事件)에 연루되어 구속되자 이를 계기로 결성된 단체이다. 이 정의구현사제단(CPAJ)은 유신헌법 반대운동, 긴급조치 무효화 운동, 민주헌정 회복요구, 광주 민주화운동 지지 등 반 군사독재운동을 벌였고, 가난한 이들의 생존권 확보운동 등 사회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1987년 6월, 서울대학교 학생이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폭로하여 6월 항쟁의 계기가 되기도 했는데 종교인들이 사회문제에 너무 깊숙이 관여한다는, 또 지나친 좌경 색채를 드러낸다는 우려를 받기도 한다. 이들의 공과(功過)는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8.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의 비극
지난 8월 15일, 이슬람 원리주의 집단 탈레반(Taleban)은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이던 아슈라프 가니(Ashraf Ghani)가 한마디 말도 없이 몰래 국외로 도주하자, 물라 모하마드 하산 아쿤드(Mulla Mohammad Hassan Akhund)을 앞세워 곧바로 정권을 쟁취하는데 성공한다.
아프가니스탄 지도 / 도주한 대통령 가니 / 탈레반 군사들
아프가니스탄은 서쪽으로 이란(Iran)과 투르크메니스탄(Turkmenistan), 북쪽은 타지키스탄(Tajikistan), 우즈베키스탄(Uzbekistan), 남쪽과 동쪽은 파키스탄(Pakistan)으로 둘러싸인 중동(中東)국가로 인구는 3천 8백만 명, 면적은 65만 ㎢, 수도(首都)는 카불(Kabul)이고, 우리나라보다 거의 7배나 되는 넓이이다.
(한반도 전체 넓이의 3배) *스탄(stan)은 ‘땅’이라는 의미
<1>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의 약사(略史)
아프가니스탄은 동양(東洋)과 서양(西洋)의 문화, 기독교와 이슬람의 문화가 만나는 서남아시아의 요충으로 BC 6세기에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BC 4세기에는 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 3세, 일명 알렉산더 대왕의 지배를 받게 된다. BC 2세기에 들어서는 중국민족의 후예인 쿠샨왕조(Kushan dynasty)에 정복되었다가 이어 이란(Iran)의 사산왕조(Sasanian dynasty)를 거치면서 힌두교(Hinduism), AD 9세기 사파르(Saffar)왕조가 들어서면서 이슬람(Islam) 문화가 뿌리내리게 되는 등 혼란의 땅이었다.
AD 13세기 칭기즈칸에 정복되었다가 이후 작은 제후국(諸侯國)들로 분리되면서 인도 무굴(Mughul)제국과 페르시아(Persia)의 영향을 받는다. AD 18세기 들어 아흐마드 샤 두라니(Ahmad Shah Durrani)에 의하여 독립국가형태를 갖추게 되나 각 지역 제후(諸侯)들과 주변 강대국(영국, 러시아 등)들의 극심한 간섭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지켜냈다.
이후 정당정치가 붕괴(崩壞)된 후 좌익(左翼)이 들어서는데 1973년 소련의 지원을 받은 좌익정당 파르캄(Parcham:깃발이라는 뜻)이 정권을 거머쥐며 공화국으로 바뀐다. 그러나 정파(政派) 간 분쟁이 일어나고 농촌을 중심으로 큰 반란이 일어나자 기존정권 수호라는 명분 아래 1979년에 소련의 침공을 받는다.
이후 10년간 내란(內亂)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인명 피해는 물론, 해외로 도피한 사람도 엄청 많았는데 1988년 소련군이 퇴각하고 혼란을 겪은 후 1992년 마침내 소련 공산정권을 무너뜨리고 14년간의 전쟁 끝에 독립을 되찾게 된다. 이 전쟁으로 200만 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했고 해외(주로 이란, 파키스탄)로 탈출한 난민들은 500만 명이 넘었다고 하니 가슴 아픈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이다.
<2> 정국 혼란과 탈레반(Taleban)의 출현
소련이 물러간 후 라바니(Rabbani)가 정권을 잡게 되지만 라바니는 오직 이슬람교도에게만 정부 일을 맡겼고 비(非) 이슬람 기구는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았으며 모든 방송도 오로지 이슬람 율법에 따라 행하도록 하자 반발을 사게 되어 또다시 엄청난 정쟁(政爭)에 휘말리게 된다.
1994년 1월에는 반군이 카불을 공격하여 인구 200만 중 150만이 카불을 떠나 다른 곳으로 탈출했다고 하며, 라바니는 1994년 6월에 임기가 끝났는데 다시 6개월 연장하는 횡포를 저지르고....
이때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파키스탄 서부에서 이슬람 율법을 공부하던 학생들이 들고 일어서 독재 타도를 부르짖으며 단체를 결성한 것이 바로 탈레반(Taleban)이다.
탈레반은 무장투쟁 2년 만인 1996년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라바니 대통령을 축출해 집권에 성공한다. 그러나 탈레반 정권은 극단적인 근본주의를 바탕으로 여성 인권의 극단적인 제한, 비이슬람 문화에 대한 배격과 문화유물과 유적의 파괴 등으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는다. 특히 2001년 3월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바미얀(Bamiyaan)동굴 석불(石佛)을 파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3> 미 9.11 테러의 비극
화염에 휩싸인 뉴욕 쌍둥이 빌딩 /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 / 미 국방부(Pentagon)의 피해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시에 있는 세계무역센터(쌍둥이 빌딩)건물과 워싱턴에 있는 미국방부(Pentagon) 건물은 이슬람 과격분자들이 민간비행기를 납치, 충돌시켜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어이없는 테러를 당하자 미국은 우사마 이븐 라딘(Usāmah ibn Lādin:일명 오사마 빈 라덴)을 테러의 배후 조종자로 지명, 그가 은신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그를 인도할 것을 요구했으나 탈레반이 거부하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공습, 전쟁에 돌입한다.
미 뉴욕의 9.11 테러의 피해를 살펴보면, 경제적인 손실은 접어두고, 인명 피해를 보면 사망자만 쌍둥이 빌딩 2,600명, 미국방부 125명, 항공기 탑승객 256명, 뉴욕 소방관 343명, 뉴욕 경찰 84명, 뉴욕 항만국(港灣局) 직원 23명으로 총 3,130명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미국 본토가 최초로 공격당한 것이고 세계 2차 대전 당시 일본에 의한 하와이 진주만(珍珠灣) 공습 때 사망한 2,330명보다 800명이나 더 많았다고 하니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씻을 수 없는 모욕이었겠다. 미국 주도(主導)로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에 대한 공격은 일부 서방국가와 아프가니스탄의 반(反) 탈레반 세력인 북부 동맹까지 이 전쟁에 합세한 끝에 탈레반 주권은 결국 붕괴되어 수도 카불(Kabul)에서 도주하고, 2001년 11월에 독일에서 개최된 국제회의에서 하미드 카르자이(Hamid Karzai)를 수반으로 하는 아프가니스탄 과도정부 내각을 구성한다.
아프가니스탄 정국은 주변국에 난민들이 흩어져 주변국들의 정치개입문제, 이곳에서 생산되는 엄청난 양의 마약 거래로 인한 각국의 미묘한 이해(利害)문제, 비록 전쟁에서 밀려났지만, 그 잔당(殘黨)들인 탈레반 세력의 호시탐탐 복귀를 엿보고 있는 문제 등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미국은 9.11 테러 주범인 우사마 이븐 라딘(Usāmah ibn Lādin)을 수개월에 걸친 은밀한 작전을 펼쳐서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의 외곽 아보타바드(Abbottabad)에 은신해 있던 라딘을 만 10년 만에 드디어 찾아내어 2011년 5월 1일, 미군 특수부대와 총격전 끝에 마침내 사살하는데 성공한다.
그 이후, 2014년 아슈라프 가니(Ashraf Ghani) 대통령이 집권하여 정권이 안정되자 미군은 철군한다.
<4> 휴전협정
아프가니스탄은 이슬람 각 종파 간의 끊임없는 분쟁으로 무고한 국민들에 대한 무자비한 살육이 이어지자 미국이 끼어들어 분쟁의 종식을 위해 힘써 보지만 너무나 많은 희생자가 속출하자 2020년 2월, 미국 바이든(Joe Biden) 대통령의 결단으로 이슬람과의 줄다리기를 끝마치기로 마음을 굳히고 탈레반과 휴전협정을 맺는다. 그런데 바이든 대통령의 결단이 과연 올바른 것이었는지.....
2021년 미군의 철수 계획 발표한 후, 아프가니스탄 전역에 대한 경비는 강화했으나 8월 15일 탈레반의 카불 입성이 임박하자 아프가니스탄 정부 아슈라프 가니(Ashraf Ghani) 대통령은 평화로운 정권 이양을 하겠다고 밝혔으나 목숨의 위협을 느껴 카불을 탈출하였고, 탈레반의 횡포에 질린 카불시민들은 탈출을 위해 공항으로 몰려드는데 미군과 군속(軍屬) 및 외교관들도 미처 대피하지 못해 대혼란에 빠지고....
결국, 8월 30일 미군이 철수를 완료하면서 탈레반이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했다. 바로 엊그제 우리가 TV 화면으로 생생하게 보았던 장면들이다.
이후, 가지가지 소문이 떠돌았는데 가니(Ashraf Ghani) 대통령이 현금 2천억 들고 아랍에미리트(UAE)로 도주했다는 설, 현금을 자동차 4대에 꽉 차게 싣고 도주했다는 설 등인데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그의 딸 마리암 가니(Mariam Ghani)는 뉴욕 맨해튼(Manhattan)의 브루클린(Brooklyn)에서 호화생활을 하고 있는데 현재 예술가이자 영화 제작자라고 한다.
<탈레반이 파괴한 바미안 석불>
파괴 전 모습 / 로켓포 공격 중 / 파괴된 후
아프가니스탄 바미안 주 힌두쿠시산맥의 절벽에 세워져 있던 바미안 대불(大佛)은 AD 6세기경, 인도 쿠샨왕조 때 그리스 조형 미술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Gandhara) 양식으로 조각되었는데 신라의 승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도 언급되었던 불상이다. 그런데 2001년 3월, 탈레반 집권 후 로켓포를 쏘아 파괴하였다.
마호메트를 신봉하는 이슬람에서는 불교 유적인 부처님 불상(佛像)이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높이 53m로 세계 최대를 자랑하던 세계문화유산 바미안 대불은 현재 유네스코에서 복원 중이라고 한다.
주변에 있는 동굴들도 모두 불상이 있거나 천정화와 벽화가 그려져 있는 귀중한 불교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