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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치성(posinality)과 의식수준(level of consciousness), 끌개장(attractor field)
위치성
꼬리표붙임에 의한 위치성으로부터 거리두기는 고요함, 자유 그리고 안전함으로 이어진다. 위치성이 없다면, 삶은 고요하고 흥미롭게 경험된다. 위치성의 내맡김은 모든 상황에서 평화를 불러온다.
의식수준
개인의 의식수준은 자신이 믿고있는 신념에 의해서 결정된다. 바다의 코르크 마개처럼, 각각의 영은 어떤 외부의 힘이나 호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에 따라 의식의 바다에서 자신의 수준에 맞게 올라가거나 떨어진다.
'영적으로 진화한 모든 사람들이 알아낸 매우 가치있는 통찰력은 개인의 의식수준이 삶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을 확정하는 결정적인 영향임을 아는 것이다'
꽃피는 봄처럼, 인간의 신에 대한 이해의 새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약속이 출현하고 있다. 이제 인류의 의식 수준은 죄책감과 미움의 신(god)을 숭배하는 대신 신(God)의 진리에 대한 사랑을 알수 있을만큼 충분히 높다.
끌개장
각 의식수준은 그것과 정렬하는 끌개장의 결과로 나오는 지배 에너지 장을 나타낸다. 이때 끌개장은 자석이나 중력장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에너지 장은 진보적 힘과 지배력을 갖고 있으며 양극성을 나타낸다. 우리가 이루어내는 모든 것은 하나의 선택지(option)이자 의지의 한 측면으로서 선택(choice)이다. 긍정적인 선택은 추가적인 긍정적 선택의 가능성을 높인다. 긍정적인 선택은 사람을 더 높은 의식의 끌개장으로 가까이 다가가게 한다.
작은 나는 약한 끌개패턴과 정렬된다. 참나는 높은 에너지 끌개장과 정렬된다. 우리가 그것으로 인해 고양되는지 파멸하는지 여부는 성공자체에 달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공이 우리의 성격속으로 어떻게 통합되느냐에 달려있다. 우리가 자부심을 갖는지 아니면 겸손한지, 자만한지, 아니면 감사하는지, 자신의 재능으로 인해 자신을 남보다 낫다고 여기는지 아니면 자신의 재능을 감사한 선물로 간주하는지 여부, 바로 이것이 결정요인이다.
의식척도에서 임계적 반응점은 200수준으로 측정되는데 그것은 온전성 및 용기와 결합된 수준이다. 200이하의 모든 태도, 생각, 느낌, 단체, 실체, 역사적 인물은 사람을 약하게 한다. 200 이상으로 측정되는 것은 피험자를 강하게 한다. 200 수준은 약한 끌개장과 강한 끌개장,부정적 영향력과 긍정적 영향력 사이의 평형점이다. 200이하의 수준들에서는 개인의 생존이 일차적 추진력이지만 희망없음과 우울의 지대인 의식척도 맨 밑바닥에는 그러한 동기조차 결핍되어 있다. 사람이 200(용기) 수준으로 진입하면서 타인의 안녕이 점점 더 중요해지게 된다. 500수준까지는 타인의 행복이 본질적 동기부여 요인으로 출현한다. 500대 후반의 특징은 자신과 타인 모두를 위한 영적 앎에 대한 관심이고, 600대는 인류이익과 깨달음의 추구가 일차적 목표다. 700에서 1,000까지 삶은 전 인류의 구원에 봉헌된다.
각 개체는 개별적으로 강력한 자석과 같은 장을 따르고 있고, 이 장은 차례로 그 다음의 높은 끌개장에 종속되며, 이런 식으로
신성에 까지 이른다.
의식이라고 불리는 어디에나 퍼져 있는 보편적 에너지 장은 무한한 힘과 시간 너머의 차원을 가지며 구성상으로 비선형적이다. 의식은 ‘세계의 빛’인데, 그것은 의식이 나타나지 않은 것(Unmanifest)으로부터 나타난 것(Manifest)을 향해 비선형적인 무한한 잠재성으로부터 창조의 펼쳐짐으로서의 그것의 선형적 표현 (테두리를 갖는, 지각된 물리적 영역)을 향해 방사되기 때문이다. 의식의 무한한 장이 지닌 힘과 그것의 무한한 잠재성은 물질로 나타난다.
나중에 의식의 장으로서 신성의 빛이 물질과 만나는 접점은 결국 생명이 지닌 독특한 성질과 에너지 자체의 출현으로 귀착된다. 비록 물질은 막대한 잠재성을 지니고 있지만, ‘생명’이라 명명된 존재의 장으로 진화해 나갈 타고난 성질이나 힘은 결여되어 있다.
물질 더하기 진화는 ‘시간’ 차원을 낳는다. 그 다음에 물질 더하기 시간은 ‘공간’으로 표현되고, 그 뒤에 시간, 공간, 물질의 존재는 생명으로 표현된 신성의 한 측면인 지성을 통해 식별할 수 있다. 생명이 오직 신성의 귀결로서 방사된다는 것은 절대의 수준인 의식 수준 1,000에서 확인할 수 있다. 1,000은 인간계에서 가능한 최상의 에너지 장으로 전 역사에 걸쳐 불과 소수만이 여기에 도달했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위대한 화신 Great Avatar(예수 그리스도, 붓다, 조로아스터, 크리슈나와 같은 세계 대종교의 창시자들)으로 지칭되었고, 선형적이고 제한된 보통의 인간 정신을 비선형적 실상(Reality)으로 대체한 신성한 현존(Divine Presence)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내재로서의 신성의 현존을 가리키는 참나는 고전적 문헌에서는 때로 우주심(Universal Mind)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2. 에고(ego), 작은 나(self), 참나(Self), 성격(personality), 페르소나(persona)
에고
에고는 사람이 물려받은 생물학적 유산이며 에고가 없었다면 누구도 살아서 그것의 한계에 대해 한탄하지 못할 것이다. 에고의 기원과 그것이 생존에 대해 갖는 본질적 중요성을 이해함을 통해 에고는 대단히 이롭지만 다스리기 힘들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과 또한 그것이 해체, 초월되지 않는다면 감정적, 심리적, 영적 문제를 야기하기 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부터 나타난 것을 향해 의식 에너지 자체가 물질과 상호작용했으며 신성의 한 표현으로서 그러한 상호작용을 통해 생명이 생겨났다. 그 최초의 형태에서 생명의 동물적 표현은 원시적이었고 타고난 내적 에너지원이 없었다. 따라서 생존은 외부에서 에너지를 획득하는데 달려 있었다. 이것이 식물계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동물은 주변환경에서 필요한 것을 얻어내야 했는데 이러한 원리가 그 후 에고의 주요 핵심을 성립시켰다. 에고는 여전히 생존을 위해 자기이익, 획득, 정복, 다른 유기체와의 경쟁에 주로 관여한다. 하지만 에고는 또한 호기심과 탐색 그리하여 학습이라는 특성을 갖추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진화가 진행됨에 따라 생존 메커니즘은 지성의 성질로서 보다 정교해지게 되었는데 정보는 지성을 통해 획득, 저장, 처리, 비교, 통합, 상호관련, 계층화된다.
에고의 목표는 일차적으로 실행하고(do), 행동하고(act), 획득하거나 수행하는(perform) 것이지만, 관상의 의도는 '되는 것(become)'이다. 에고는 가치, 믿음체계 및 프로그램들의 정교한 연결망을 통해 스스로를 영속시킨다. 따라서, 에고는 장식되고 정교해짐에 따라 더 많은 에너지를 얻고, 때로는 고착화되면서 요구(needs)가 발생한다. 에고는 카르마의 위치와 저장소이다. 에고와 카르마는 같은 것임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에고는 항상 욕망이 성취되는 미래의 '언제'에 완성과 만족을 기대한다.
에고의 나르시시즘
육체적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동물적 본능과 에고 자체와 사랑에 빠져있는 에고의 나르시시즘에서 비롯된다. 죽음은 경험의 종말을 의미하고, 경험은 생명과 동일시된다. 이처럼, 에고는 선형적이고 친숙한 것에 집착한다.
에고는 고통과 자만심, 분노, 욕망, 죄책감, 수치심 및 슬픔의 모든 부정직한 수준으로부터 암울한 쾌락과 만족감을 얻는다. 고통의 은밀한 쾌락은 중독성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에 평생을 바치고, 다른 사람들도 이를 따르도록 격려한다. 이러한 메카니즘을 멈추기 위해서는 보상의 쾌락을 확인하고, 기꺼이 신에게 내맡겨야 한다.
영적에고
신의 사랑을 위한 완벽한 통로가 되는 것은 전적으로 내맡기는 것과 영적 에고의 목표추구를 제거하는 것이다. 영적 에고의 발달은 영적 진보가 개인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신의 은총의 결과라는 사실을 각성함으로써 피할 수 있다. 만약 우리의 영적 추구의 중요한 동력이 영적인 야망(어딘가에 도달하려는)이 아니라, 사랑의 장애물에 대한 점진적인 포기라면, 흔히 '영적 에고'라고 하는 것도 나중에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영적 에고의 발달을 막을 수 있나요? 각각의 성공은 영적 에고에 먹이를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행위나 행동을 하는 행위자로서 어떤 독립체는 없다는 것을 각성하세요. 비난하고 책임을 물을 행위자/작은 나는 없습니다. 진보는 영적 의지의 동의에 의해 활성화되는 의식의 특성의 결과입니다. 영적 영감은 작동하는 에너지가 되고 그것은 에고/작은 나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작은 나
작은 나(The self)는 행위의 행위자, 생각의 생각하는 자, 결정의 결정하는 자처럼, 내면에 주요 인과요인(primary causal agent)이 있다고 가정한다. 참나(the Self)가 맥락이고, 반대로 작은 나(the self)는 내용'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이미 큰 도약이다. 우리는 오직 참나에게 참회와 고백을 빚지고 있다. 우리는 참나에게 '죄와 죄책감'을 본래 상태로 되돌려야 하는 빚을 지고 있다. 우리는 참나에게 자신의 방식을 바꿔야 하는 의무를 빚지고 있다. 우리는 참나에게 자신의 위치성을 포기해야 하는 빚을 지고 있다. 고통은 오직 에고에게만 제공된다.
참나
참나인 나는 앎으로서의 신성의 표현이며, 따라서 시간과 형상너머에 있지요. 이러한 정체에 대한 진실은 지각에 의해 창조된 이원성으로 가려져 있고, 모든 위치성을 포기할 때 사라집니다.
참나는 조건적이지 않다. 참나에는 아무런 성질이 없으며 참나는 의존적이지 않고 설명할 수도 없다. 참나에는 기간도 시작이나 끝도 장소도 형상도 한계도 없다. 존재에 빛을 비추는 것은 참나의 광휘인데, 그것이 없다면 앎은 없을 것이다. 참나에 대한 모든 묘사는 부적절하며 그것을 적용할 수 없다.
깨달음은 얻어야 하는 하나의 조건이 아니다. 참나는 이미 실상이기 때문에 그것은 단지 내맡김되어야 하는 확실성이다. 우리를 영적 정보로 이끄는 것이 바로 참나다. 참나는 비옷을 챙기거나 임대료내는 것을 잊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주는 내면의 할머니와 같다. 참나로서의 신성의 현존은 힘들이지 않고 수월하다. 신의 종이 된다는 것은 신성의 안내에 정렬한다는 것이고, 이는 작은 나 또는 세상에 영합하기보다는 참나를 찾는 길로 인도한다. 세상과 삶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전적으로 내면의 믿음과 위치성의 결과다. 신에 대한 사랑과 존경에서 이러한 모든 편견을 내맡기려는 자발성이 생겨나고, 뒤따르는 겸손함은 참나의 드러남인 실상의 광휘로 가는 문을 열어준다. 영적 진보와 발견은 기쁨을 수반하며, 이것은 참나의 광휘이고, 빠르게 내맡겨진 에고의 위치성을 대체한다. 작은 나(the self)가 세상이나 에고를 찾는 것을 멈출 때, 영적영감은 그 과정에서 매 단계마다 강도가 증가한다. 그리고 그것의 근원이 줄곳 참나(the Self)였음을 발견한다.
성격, 페르소나
내면의 관찰을 통해, 우리는 개인의 성격이 학습된 반응 체계이며, 페르소나는 그 뒤에 숨어있고 초월한 진짜 '나'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성격의 목격자이며, 그 성격과 동일시해야만 하는 이유는 전혀 없다.
깨달은 사람은 성격을 계속 보유합니까?
그것은 설명하기가 다소 까다롭습니다. 남아있는 성격은 사실 사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격은 계속되는 인간사에 표면적으로 평범하게 참여할 수 있는 상호작용하는 페르소나(타인에게 비치는 외적 성격)지요. 페르소나는 참나의 유용한 도구이거나 수단입니다. 육체와 마찬가지로 성격에는 실제적 중요성이 없습니다. 그것은 영화를 보러 가는 것과 비슷하게 일시적이고 자발적이며 부분적인 활동이지요. 육체와 마찬가지로 성격 또한 자기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성격은 사실상 유용한 그것이지요. 성격의 참여를 허락하기 위해서는 또한, 세상이 어떤 식으로 일들을 바라보는지 기억해내고 적절해 보이도록 세상의 관점에 대해 적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3. 힘(force), 파워(power), 선형성(linear), 이원성(duality) vs 비선형성(non-linear), 비이원성(non-duality)
힘과 파워
파워는 우리가 숭고하다고 일컫는 인간 본성의 일부에 호소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힘은 우리가 우둔하다고 일컫는 것에 호소한다. 파워는 향상시키고 품위를 부여하고 숭고하게 만드는 것에 호소한다. 힘은 언제나 정당화되어야 하는 반면 파워는 정당화를 요구하지 않는다. 힘은 부분적인 것과 결합되고, 파워는 전체적인 것과 결합된다. 힘은 자동적으로 저항력을 창조하기 때문에 힘의 효과는 항상 정의상으로 한계를 갖는다. 힘은 항상 무언가를 거슬러 움직이는 반면 파워는 절대로 무언가를 거슬러 움직이지 않는다. 힘은 불완전하며 따라서 항상적으로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한다. 파워는 스스로 전체적이고 완전하며 외부에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힘은 꺼질 줄 모르는 식욕을 갖고 있으므로 쉼없이 소비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파워는 에너지를 불어넣고 공급하고 지지한다. 파워는 생명과 에너지를 주지만 힘은 그것을 빼앗아 간다. 힘은 항상 저항력을 창조한다. 그것의 효과는 통일시키기 보다는 이분화한다. 이분화는 항상 갈등을 암시하며 따라서 늘 비용이 많이 든다. 힘은 이분화를 부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승/패의 양분을 낳는다. 그리고 누군가는 항상 패배하기 때문에 적이 생겨난다.
에고는 힘에 의존하고, 인간 영은 파워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힘은 일시적인 목표를 가지고, 그 목표에 도달할 때 무의미한 공허함만이 남는다. 반면에 파워는 우리에게 끝없이 동기를 부여한다. 파워는 온전성과 자신의 행동, 선택 및 결단의 귀결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수용하는데서 나온다. 영적으로 진화하기 위한 노력은 우리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실제로 파워 자체의 본성때문에, 내면으로부터 모든 인류는 고양된다. 파워는 방출하고 공유된다. 반면에 힘은 제한적이고 자기패배적이며 덧없다.
우리가 의식수준을 따라 상승 이동하는 동안 파워의 증가율은 엄청나다. 인간 의식의 다양한 수준들이 그 자체를 표현하는 방식은 심원하고도 광범위하다. 200이하의 모든 의식수준은 개인과 사회 전반에 걸쳐 생명에 파괴적이고, 200이상의 모든 수준은 파워의 건설적 표현들이다.
선형성과 이원성 vs 비선형성과 비이원성
비이원성의 실상에서는 특권도, 이득도, 손실도, 지위도 없다. 위치성 내맡김의 귀결로서 인식의 이원성이 중단되기 때문에, 사랑으로써 신의 현존은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래서 사랑은 선형과 비선형 영역사이의 출입구다. 그것은 신을 발견하는 웅대한 길이다. 의식의 본성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비이원성의 근본적인 순수한 상태(prinstine state)로 의식이 회귀한 결과로 구원이 일어난다고 한다. 구원은 의지의 이원성과 신의 진리의 비이원성에 대한 에고의 계획를 내맡기려는 '순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에고의 이원성에서 영의 비이원성으로의 복귀는 너무도 어렵고 가능성이 거의 없어서 오직 신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지지, 영감, 그리고 에고의 아픔과 고통으로부터 구조해줄 구원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구원자가 필요하다.
영적/종교적 진실의 모든 정신적(선형적) 묘사는 비타당성(invalidation), 논쟁, 말다툼의 대상이다. 반면에 의식 자체(비선형)는 개념이나 묘사를 초월해있기 때문에 회의, 의심, 불신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진실 vs 거짓
거짓이 내맡겨질 때, 진리는 승리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커다란 봉헌, 용기, 신념이 필요하고, 그것은 내맡김에 대한 응답으로 신성의 영감에 의해서 제공된다. 그 방아쇠는 바로 신성 의지의 허락이다.
인간으로써 타고난 한계
의식진화, 영적진보, 영적작업,
영적 진화는 장애물을 제거한 결과로 발생하는 것이지 새로운 것을 얻는 것이 아니다. 헌신은 마음의 허영심과 들러붙어있는 환상의 내맡김을 가능하게 하고, 그래서 마음은 점진적으로 더 자유로워지고 진리의 빛에 문을 연다.
영적 작업과 봉헌의 기본적인 목적은 에고의 타고난 진화적 한계를 초월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에고/자기의 모든 한계를 우회하는 의식자체의 초기 역할에 접속하고 개발하는 것이다. 그러면 진리는 신성의 은총 덕분에 저절로 나타난다. 신성은 때가 오면(God's time) 신을 청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드러낸다. 영적 진화의 속도는 느리게 보일수도 있지만, 영적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 (영적) 진보는 매우 갑작스럽고 차원과 영향력(dimension and impact)측면에서 가장 중대한 것이 된다.
영적의지(840)
1-2. 호불호 이분법
관찰을 통해, 호/불호의 이분법은 단지 검증되지 않은 추정에 기반한 전체적인 맥락의 반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깊은 겸손함이 있을 때, 우리는 도움이 안되고, 마음이 정말로 권한이 없고, 도구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그리고 그러한 판단의 분별이 가능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좋은지, 누구에게 나쁜지, 단지 묻기 시작함으로써 이러한 발견에 이를 수 있다.
이것은 결국 과도기적 학습경험으로서 인간 생명자체의 중요성과 의미에 대한 전반적인 맥락화를 검토하게 한다.
의식 지도는
영적 발전이나 깨달음,
자기 계발을 구하여
초월해야 하는
진화상의 의식 수준들을 이해하기 위한
매우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길잡이다.
그것은 또한
최적의 의식 수준을 성취하기 위해
극복해야 하는 장애에 대한
실용적 지도를 제공해 준다.
측정치는
진실을 성립시키지 않으며
그저 진실을 확증하고
보강해 줄 뿐이다.
2. 내용 vs 맥락
참나(the Self)가 맥락이고, 반대로 작은 나(the self)는 내용'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이미 큰 도약이다. 순진한 (영적) 추구자는 단지 내용을 계속 편집할 뿐이다.
2-1. 무의식, 집단 무의식, 카르마
공덕, 악업
천재성
운명
매순간 우리는 정말로 천국 또는 지속사이에서 선택을 한다. 이 모든 선택이 합해진 효과가 의식수준과 카르마 그리고 영적 운명을 결정한다.
에고는 카르마의 위치와 저장소입니다. 에고와 카르마는 하나이며 같은 것임을 각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의 조건은 기본적으로 '부여된' 카르마다. 그것은 비난과 같은 것없이 연민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따라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인류는 감정적 본능과 영적 깨어남(spiritual awaking)의 균형을 이루는 힘(즉, 동물/천사 갈등)사이의 긴장영역에서 살고 있다.
2-2. 집착
금욕, 절연
내맡김
'신에 내맡긴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에고의 위치성에 대한 통제와 비밀스러운 만족감을 내맡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생명과 기쁨의 근원인 사랑과 신에게로 향하세요. 이 선택은 모든 순간에 이용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선택하기만 하면, 그 보상은 위대합니다. 초청에 의해 영적 자각은 길을 밝혀줍니다. 핵심 열쇠는 기꺼이 그렇게 하려는 마음(자발성)입니다.
3. 실상, 형상
실상은 승낙이 필요하지 않다. 실상은 획득의 세계가 아니며, 대신에 이원적 에고의 위치성이 내맡겨질 때의 순전히 자발적이고 주관적 각성이다.
실상에는 사건도 없고, 시작이나 끝도 없다. 배경은 조용하고 고요하며, (각색한) 영화(movie)에 방해받지 않는다. 실상은 맥락이지 내용이 아니다. 삶의 단일성(oneness)은 무수히 많은 인식으로 나타난다. 세상의 모습을 실제처럼 만드는 것은 참나의 광휘의 투사다. 영화 자체는 인식으로써의 내재적 실상이 아니다. 진짜임(sense of realness)의 실제 장소는 완전하게 주관성으로써의 의식 내에 있다. 비록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실상으로써 어떤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오직 우리의 내적인 주관성 때문에 알 수 있다.
경험적 실상
영적 진보는 단계적으로 일어난다. 처음에 우리는 영적 실상에 대해 배우고 그것을 탐구한다. 그 다음에는 삶의 모든 면에서 가르침을 실천하고 적용하게 되고, 결국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이 된다. 헌신, 몰두, 실천을 통해 영적 개념은 경험적 실상이 된다.
의식이 없다면, 형상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없다.형상 자체-독립적인 존재가 없는 인식의 산물-는 일시적이고 제한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반면, 의식은 모든 것을 포괄하고 무제한 적이다. 덧없고 일시적인 것(시작과 끝이 분명함)이 어떻게 형상없는 것(모든 것을 포괄하고 무제한적인)을 창조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만약 우리가 한계자체의 관념이 단지 본질적인 실상이 아닌 인식의 산물임을 알면 수수께끼는 저절로 해결된다. 즉 형상은 형상없는 것의 나타난 것이 된다.
지금 이 순간만이 경험되는 유일한 실상이다. 다른 모든 것은 추상적 관념이며 하나의 정신적 구조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는 실제로 70년을 살 수 없다. 정확하게는 눈깜짝할 순간만이 가능하다.
궁극적 실상(Ultimate Reality)
나타난 것, 나타나지 않은 것
천국 vs 세상
세상은 사실상 오락게임이다. 놀이처럼, 세상은 헐렁하게 걸치도록 정해져 있다. 천국은 내면에 있고 자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세상은 단지 하나의 겉모습일뿐이다. 세상의 멜로드라마는 하나의 왜곡된 인식의 계략이다. 왜곡된 인식의 계략은 세상이 크고 강력하며 영원한 반면에 참나는 작고 연약하며 일시적이라는 생각으로 이끈다. 정확히 말하면 그 반대가 진실이다.
세상의 매력
매력은 세상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투사된 가치와 보상에 대한 기대, 에고 만족을 반영합니다. 사실상 기쁨은 내면으로부터 나오고 외부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쾌락은 가치있고 존중받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투사된 가치의 대부분은 상상에서 나오고, 가치는 욕망을 반영합니다. 실상의 세계에서는 영적 성취보다 가치있는 다른 어떤 것은 없습니다.
3-1.
깨달음의 수준
600 평화, 빛비춤
850 공, nothingness
1000 깨달음
생각하는 것을 내맡긴다는 것은 신이 우리를 '무(nothing)'로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그 반대다. 그것은 우리가 모든 것이라는 발견으로 이어진다.
깨달음은 얻어야 하는 하나의 조건이 아니다. 참나는 이미 실상이기 때문에 그것은 단지 내맡김되어야 하는 확실성이다. 우리를 영적 정보로 이끄는 것이 바로 참나다.
전통적으로 에고 프로그램의 포기는 매우 힘들면서 어렵고, 성취하기 위해서는 많은 생(lifetimes)이 필요하다고 묘사되어 왔다. 반대로, 깊은 겸손함과 모든 것을 신에게 아주 깊이 내맡기려는 자발성은 찰나의 순간에 전환이 일어나게 할 수 있다. 따라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하나의 느린 과정이거나 갑작스러운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진리는 지각된다. 진리는 그 자체를 드러내기 위한 제시를 허용하기 위해 준비되어온 자각의 장에 나타난다. 진리와 깨달음은 획득하거나 달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조건이 적절할 때 스스로 나타나는 상태나 조건이다.
3-1. 신(God)
신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직 사랑 자체의 본성을 알 필요가 있다. 진정으로 사랑을 안다는 것은 신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고, 신을 안다는 것은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다.
신의 은총
신의 은총은 영역과 가능성으로서 나타난 모든 것에서 전체 우주의 카르마적 일관성의 절대적 확실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은총은 구원과 절대적 자유를 위한 모든 수단을 사용할 수 있도록 의식의 영역내에서 제공되는 것이다. 선택에 의해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된다.
신의 정의
신성한 신성(Divine Divinity)
Divine guidance
Divine love
신성의 타고난 특성은 자비와 연민이다.
현존, 전능, 편재
물속의 코르크 마개나 공중의 풍선처럼, 각각의 영은 의식 에너지 장의 무한한 영역내에서 자신의 부력수준으로 올라간다.
외부 판단 또는 신성의 강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각각의 존재는 그 본질을 발산하고 그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다. 이것이 신성의 완벽한 정의(justice)다. 선택에 따라서, 각각의 영은 선택해온 것이 되어왔다. (우주의) 모든 영역내에는, 항상 현존하는 절대적 실상에 대한 순간순간의 선택이 존재하는데, 이 실상에 대한 절대적 선택은 곧 해방으로 이어진다.
모든 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헌신이 될 때, 신성은 스스로를 드러난다.
3-2. 영적 진리, 주관성 vs 객관성
진리나 깨달음은 발견하거나 추구하거나 획득하거나 얻거나 또는 소유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무한한 현존은 항상 존재하며, 그것의 각성은 그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제거될 때 저절로 생긴다. 그래서 진리를 탐구할 필요는 없고, 단지 틀린 것을 놓아버리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구름을 치워서 태양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동안 가려져 있었던 것이 드러나는 것 뿐이다. 다시 말해서 영적 작업은 그 일을 한 사람들은 그 노력이 결국에는 더 많은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주로 알려지지 않은 것을 위해 추정컨대 알려진 것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3-3. 관찰자 vs 경험자
존재
존재를 가진 그것은 이미 전체적이고 완전하고 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존재는 다른 조건에의 의존이 필요하지 않다. 따라서, 조건적인 존재는 에고/마음의 환상이며, 에고/마음은 자기 외부의 어떤 것에 의존하는 것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존재는 스스로 완전하고 무조건적이다. 존재는 오직 신의 은총, 신성의 법도에 의한 것이다.
3-4. 가슴의 길(구원의 길) vs 마음의 길(에고해체의 길)
우리는 사랑, 헌신 및 이타적인 봉사로 자신의 삶과 노력을 신성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선물로 만든다. 그것이 신에게로 가는 가슴의 길(way of the heart)이다.
구원과 구원자
의식의 본성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비이원성의 근본적인 순수한 상태(prinstine state)로 의식이 회귀한 결과로 구원이 일어난다고 한다. 구원은 의지의 이원성과 신의 진리의 비이원성에 대한 에고의 계획를 내맡기려는 '순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에고의 이원성에서 영의 비이원성으로의 복귀는 너무도 어렵고 가능성이 거의 없어서 오직 신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지지, 영감, 그리고 에고의 아픔과 고통으로부터 구조해줄 구원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구원자가 필요하다.
선형적 세계의 영역은 고통을 수반한다. 따라서 인류역사 속에서 최고의 스승들은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해답으로 구원(가슴의 길)이나 깨달음의 길(마음의 길)을 가르쳤다.
관상 명상 기도
관상은 일상활동을 방해하지 않는 비집착을 의미합니다.
에고/마음의 목표는 일차적으로 실행하고(to do), 행동하고(act), 획득하거나 수행하는(perform) 것이지만, 관상의 의도는 '되는 것(to become)'이다. 지성은 '~에 대하여(about)' 알고 싶어하는 반면 관상은 앎 자체와 독립적인 지혜(autonomous wisdom)를 추구한다. 합리적 사고는 시간과 관련되어 있고 순차적이며 선형적이다.
반면에 관상은 순차적 시간 외부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비선형적이고 근원의 이해와 관련되어 있다. 헌신적 관상은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이나 양식이고 이로써 우리의 삶은 하나의 기도가 된다.
어떤 기도가 도움이 되나요?
주님의 종, 신성한 사랑의 매개체, 신의 의지의 통로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세요. 길안내와 신성의 도움을 구하고 헌신을 통해 모든 개인을 내맡기세요. 신을 섬기는 일에 자신의 삶을 바치세요. 다른 모든 선택에 앞서 사랑과 평화를 선택하세요. 드러난 모든 것에서 모든 생명을 위해 무조건적인 사랑과 연민의 목표에 헌신하고, 모든 판단을 신에게 내맡기세요.
4. 지각, 인식
환상
통증 vs 고통
투사, 정신화
5. 내면조사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영적추구자
영적수행자
영적헌신자
우리는 우리가 한 말이나 행동이 아니라, 우리가 된 것의 귀결로 세상을 바꾼다. 따라서, 모든 영적 수행자는 세상을 섬기는 것이다.
깨달은 자
몰두, 봉헌, 헌신
영적 몰두는 진리, 사랑, 연민, 지혜, 편파적이지 않은 신성의 속성과 함께하는 영적의지의 정렬에 의해 에너지를 받는다.
헌신은 우리의 생명을 우선시하고 생명에 도움이 되는 것을 끌어당긴다. 신의 종이 된다는 것은 결국 봉헌인데, 이로서 목표는 다른 모든 위치성, 매력 또는 오락활동보다 우선한다.
헌신은 두려움, 의심, 망설임을 용해시킨다. 그리고 불확실성을 분명히 한다. 신을 신뢰하는 것 만큼, 의도 또한 더욱 강해진다. 그런 다음 자신을 완전히 신에게 내던지겠다는 내적 결단이 일어난다.
6. 의식과 자각
사랑은 자각으로 이끄는 거대한 촉매제다. 결국 신념은 확신으로 바뀌고, 그러므로 신은 신을 찾는 사람에 의해 발견된다고 한다.
의식의 주요 한계는 그것의 천진무구함이다. 의식은 잘 속는다. 그래서 듣는 모든 것을 그대로 믿는다. 의식은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넣는대로 재생하는 하드웨어와 같다. 우리는 자신의 의식의 천진무구함을 결코 잃지 않는다. 의식은 쉽게 외부에 영향을 받는 아이처럼 순진함과 신뢰를 유지한다 의식의 유일한 보호자는 들어오는 프로그램을 면밀히 조사하는 분별력있는 자각(awareness)이다.
나타난 것과 그 다음에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오직 자각덕분에 알수 있는데, 이것은 지식, 경험 그리고 우리가 존재(exist)하거나 있다(is)는 자각을 허용하는 의식의 특성이다.
7. 생각, 개인적 마음
객관적으로 볼 때, 생각은 실제로 세상의 의식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개인의 마음은 단지 새로운 조합과 가정으로 생각을 처리할 뿐이다.
본원적 생각(original thoughts)
진정 본원적 생각(original thoughts)으로 보이는 것은 오직 천재성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만 나타나고, 언제나 생각의 저자는 스스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발견하거나 주어진 선물이라고 느낀다. 관찰해보면, 이미지와 단어 자체 아래에 추진 에너지가 있고, 생각하고 싶은 욕구, 마음이 공백(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어떤 입력으로 바쁘게 지내려는 욕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비개인적인 '생각함(thinkness)'에 대한 충동을 발견할 수 있다. 잘 관찰해보면, 생각을 생각하는 '나'는 없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나'는 거의 개입하지 않는다.
내맡겨야 하는 첫번째 환상은 '마음'과 같은 것이 있다는 믿음이다. 경험적으로 볼때, 생각, 느낌, 이미지 및 기억이 끝없이 진행하면서 자신의 자각안으로 들어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음이라는 단어는 에고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개념일 뿐이다.
8. 감정 vs 생각
감정은 위치성과 조건을 반영하고 결정하기 때문에 진리의 지표가 아니다.
9. 판단 vs 이해
우리가 삶의 미션이 판단보다는 이해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가질때, 도덕적 딜레마는 자동적으로 해결된다.
심판관
심판주의(매사에 판단하는 마음)은 모든 에고의 가장 큰 허영심이다. 성경은 '판단하지 마라, 심판관이 되지 않게하라'라고 말한다. 또한 심판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다. 붓다는 '인식은 오직 환상만 볼 수 있기 때문에 판단할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인식은 항상 부분적이며 임의적인 맥락에 의해 제한된다. 진실의 세계에서는, 어떤 심판도 가능하지 않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개인적 표준, 도덕, 행동강령 및 현실의 해석을 채택하고, 그에 따라 생활해야 한다고 믿는 것은 비현실적일뿐만 아니라 결국 해롭다. 투사된 도덕주의는 항상 '해야한다'로 표현되며, 종종 분노, 증오, 원한 심지어는 보복적 복수 그리고 결국 전쟁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선택을 통해 습관적인 심판주의에 대한 유혹을 거부할 수 있다. 그 결과는 위대한 내면의 평화다.
10. 부모, 아이, 어른 - 교류분석
11. 멜로 드라마, 영화
Along the path to enlightenment
궁극의 행복(깨달음)의 길을 따라서
제자 : 영적 경험과 헌신의 전체 삶을 요약하는 진술은 무엇입니까?
스승 : 저 높은 곳에 하나님께 영광!
서문
궁극의 행복, 깨달음의 길을 따라서의 매일의 단계는 그것의 본질이 드러날 때 흥미롭고 보상적입니다. 맥락에서 벗어나면, 어떤 비판적 통찰력은 당혹스러울 수도 있지만 흥미롭게 보일 수 있습니다. 각각의 영적 추구자에게는 그 길을 밝히고 성공을 촉진하는 중요한 핵심적 이해(key understanding)가 있습니다. 이 글은 큰 도약을 위한 지렛대의 역할을 하는 그런 진실들의 모음입니다. 천국으로 가는 출입구는 많을지라도, 모든 영적 추구자는 각자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깊은 이해는 복잡해 보이는 것의 본질적인 진리를 밝힙니다. 신에게로 가는 1만가지의 길이 있다고 하지만, 그 모든 성공적인 길에서는 공통적인 '특정한 중요요소(certain critical element)'로 모두 축약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제공한 인용 문구는 큰 가치가 있음이 입증되었습니다.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데이비드 호킨스
1월 1일
질문 : 영적 진리탐구와 깨달음이라 불리는 자아각성(self-realization)을 위한 탐구는 어디서 시작해야 합니까?
답 : 그것은 간단합니다. 당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인지에서 출발하세요. 모든 진리는 내면에서 발견됩니다. 증명된 가르침을 가이드로 삼으세요.
1월 2일
에고의 세계는 거울 속의 집과 같아서 에고는 그 이미지를 차례로 쫒으면서 방황하고 길을 잃고 혼란스러워한다. 우리의 삶은 그런 미로를 탈출하기 위한 끝없는 시행착오가 특징이다. 흔히, 거울 속 세계의 많은 사람들<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점점 더 나빠지는 공포의 집이 된다. 쳇바퀴 도는 것과 같은 방황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영적 진리(spiritual truth)를 추구하는 것이다.
1월 3일
모든 삶은 밀물과 썰물처럼 오간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서 고통받고 죽는다. 행복과 슬픔이 있으며, 파국과 성공, 상승과 하강이 있다. 주식시장은 오르고 내린다. 질병과 사고 역시 오고 간다. 우주의 카르마 극장(karmic theater)에서 삶의 카르마적 춤은 펼쳐진다.
1월 4일
‘조금 더 의식한다고 하는 것’은 누구든 이 세상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게다가, 파급 효과로 그 선물은 다시 근원으로 돌아온다.
1월 5일
의식의 무한한 장은 모든 현존(All Present), 전능(All Powerful)이며, 존재의 모든 것(All of Existence)을 포함한다. 따라서, 어떤 것도 그 무한한 영역의 바깥에서는 발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의식은 모든 존재의 근원(Source of Existence)이기 때문이다.
이 무한한 파워의 장 안에는, 감소하는 에너지 장의 수준들(levels)이 있다. 그것들이 점진적으로 <선형성> 형태로 드러나면서, 그 상대적인 파워는 개인에 이르면서 감소한다. 그 거대한 장은 커다란 정전기장에 비교될 수 있는데, 에너지 장의 무한한 파워때문에 그 안에서의 개인은 자신의 책임에 따라 그 장 내에서 자동적으로 정렬되는 하전입자와 같다. 카르마 영체(karmic spiritual body)의 책임은 의도, 결단력, 그리고 의도에 따른 정렬에 의해 정해진다.
그래서 인간의 지성에 의해 설명할 수 없는 것이 그냥 ‘우연일 뿐’이라는 것은 순진한 인식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그 사건이 예측 불가능할 때 더욱 그렇다. 의식의 무한한 장이 한계가 없는 차원인 한, 그 밖에서는 어떤 것도 발생할 수 없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의식의 장 영향속에 있기 때문에, 실제 그 어떤 것도 '우연'은 없다.
1월 6일
일반적으로 사회의 목표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다. 반면에 깨달음(enlightenment)의 목표는 그것을 넘어 초월하는데 있다.
1월 7일
내면의 겸손함과 지혜가 있을 때, 진리를 찾는 사람은 ‘인간 정신자체가 가진 타고난 한계(inherent limitation)’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유일한 진리의 결정권자로서, 더 이상 쉽게 영향을 받는 개인적 에고에는 의지하지 않게 된다.
1월 8일
영적 성장(spiritual development)은 성취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 영적 성장은 나름의 보상을 가져다주는 지향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동기(motives)의 방향이다.
1월 9일
단지 위대한 가르침을 듣는 것만도 그 자체로 영적 공덕(spiritual merit)의 귀결이다. 그 가르침에 따라 행하는 것은 훨씬 큰 혜택이다.
1월 10일
문 : 이 세상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답 : 언제 어디서든 모든 상황에서 스스로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사려 깊고, 용서하고, 연민으로서 당신의 삶을 선물로 만들고, 모든 인류를 들어 올리세요. 그것이 누구나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입니다.
1월 11일
영적 학습(spiritual learning)은 논리와 같은 선형적 진보(linear progression)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영적 원리와 영적 규율에 대한 친숙함이 자각과 자아-각성의 문을 연다. 새로 배울 것은 없고, 대신에 내면에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이 그 자체로 명백하게 드러날 뿐이다.
1월 12일
모든 영적 진리는 각각의 영적 개념 안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실상의 각성(realization of the Real)을 위해서는, 모두를 알기 위해 단 하나의 개념을 완전히 그리고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1월 13일
모든 질문의 길(avenues)은 동일한 결정적인 해답을 이끌어낸다. 감춰진 것은 없고, 진실은 모든 곳에서 드러난다는 발견이야말로 가장 단순하면서 실질적인 일이자 인류의 운명에 대한 깨달음의 열쇠다. 매일 삶을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모든 두려움이 거짓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 거짓을 진실로 대체하는 것이야말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두를 치유하는 본질이다.
1월 14일
전통적으로 영적 작업을 위한 진지한 준비상태를 '무르익음(ripeness)'이라 하고, 이 시기에는 말 한마디, 구절 하나, 이름만 들어도 갑작스러운 결단과 진리에 대한 몰두가 시작될 수 있다. 따라서 영적 봉헌의 시작은 미묘하며, 느리고 점진적일 수 있고, 그 다음에 갑작스럽게 큰 도약이 일어날 수 있다. 어떤 경로로든, 준비된 땅에 씨앗이 떨어지면, 본격적으로 (깨달음의) 여정은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전환점은 예상치 못한 통찰의 순간에 시작될 수 있고, 그 시점부터 인생은 변화한다.
1월 15일
모든 것을 포함한, 무조건적인 연민에서 모든 인류의 치유는 시작된다.
1월 16일
'사랑은 사랑을 끌어당기고', '같은 깃털의 새들이 함께 나는' 우주에서, 우리는 우리가 발산하는 우리 자신에게 끌린다.
1월 17일
의지는 헌신에 의해서 활성화되고 힘을 얻는다. 그리고 의지는 영적 영감에 반응하여 (신의) 은총에 의한 빛비춤(깨달음 600수준)으로 인도한다. 개인의 의지는 신성의 의지(Divine Will)로 용해되고, 영적 탐구와 연구로 이어지는 불꽃은 신성의 선물이 된다.
1월 18일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우리의 모든 활동이나 결단은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생명을 지지한다. 우리가 일으킨 물결은 결국 우리에게 돌아온다.
1월 19일
우주의 모든 것은 특정 주파수의 식별가능한 에너지 패턴을 지속적으로 방출하는데, 그것은 영원히 남아있고, 방법을 아는 사람들은 그것을 읽어낼 수 있다. 우리의 모든 말, 행위 및 의도는 영원한 기록을 남기고, 모든 생각은 알려지고 영원히 기록된다. 그 어떤 비밀도 없다. 어떤 것도 숨지 못하고 또한 숨어서 존재할 수도 없다. 모든 사람은 그 공공의 영역에서 살아간다. 우리의 영(sprits)은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적시에 벌거벗고 서 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의 삶은 결국 우주에 책임이 있다.
1월 20일
문 : 영적 노력의 전체적인 맥락은 어떠해야 합니까?
답 : 모든 생명과 창조물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사심없는 봉사에서 출발하세요.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신과 동료 인간을 섬기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타고난 아름다움을 의식하고, 호흡을 맞추세요. 늙고 낡아빠지고 추하다고 여기는 것에서도 매력과 운치(고상하고 우아한 멋)를 보세요.
1월 21일
진리(truth)와 실상(reality)은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 둘이 같다는 타당성은 객관적이고 비개인적이며, 관찰자의 의견에 독립되어 있는, 진실수준의 수치화된 척도에 의해 검증될 수 있다. 진리라고 주장하는 진술은 맥락의 구체화(specification of context)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1월 22일
단 하나의 기본원칙이 사회적 시장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파워를 갖는다. 추정된 원인을 추적하는 대신에 해결책을 찾아라.
1월 23일
인간임(Humanity)은 우리 모두가 짊어지고 있는 하나의 고통이다. 우리는 태어나게 해달라고 요구한 기억이 없고, 또한 우리의 타고난 마음은 너무나 제한적이어서, 죽음으로 이끄는 것과 삶을 향상시키는 것을 구별하기 어렵다. 우리 삶의 몸부림은 이러한 근시안을 초월하는데 있다.
1월 24일
인간을 위한 신의 사랑과 의지(God’s love and will)의 살아있는 증거는 당신 자신의 존재라는 선물이다.
1월 25일
생명 자체는 의견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있다. 생명은 타고난 반응이나 저항없이 쉽게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빠르게 전환된다. 생명은 형태의 변화에 대한 반응을 등록조차 하지 않는다. 빛과 같이, 생명은 형태가 없고 선호, 저항 또는 반응 너머에 있다.
1월 26일
인간세계는 암울함에서 존귀함으로, 범죄에서 고결함으로, 두려움에서 용기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탐욕에서 자애로의 기회와 선택의 연옥같은 범위를 대표한다. 따라서 만약 인간 경험의 목적이 진화하는 것이라면, 이 세상은 있는 그대로 완벽하다.
1월 27일
삶은 저절로 펼쳐지고 어떠한 논평도 필요하지 않다. 목격한 모든 것에 대하여 의견을 내는 습관은 자발적으로 신에게 내맡길 필요가 있다.
1월 28일
비록 인간의 마음은 그것이 '당연히' 진리에 봉헌된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할지라도, 실제로 찾는 것은 이미 믿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일 뿐이다. 에고는 선천적으로 교만해서, 그 믿음의 대부분이 단지 인식의 환상이 드러난 것뿐이라는 사실을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1월 29일
진리자체에 대해 몰두(dedication)하는 것이 진리를 발견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1월 30일
성숙한 영적 수행자(spiritual aspirant)는 에고의 선택지들과 거짓된 행복의 약속들을 거쳐온 사람이다.
1월 31일
거룩함, 공덕, 선함, 공로, 순결함 등과 관련해서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라. 이러한 것들은 모두 인간의 관념이며, 신은 인간의 관념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다.
2월 1일
사실, 우리가 존재하고 생존하는 것은 에고 덕분이 아니라 에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다.
2월 2일
질문 : 영원한 진리의 실상은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나요?
답 : '모든 진리는 주관적이다'라는 매우 중요한 진술을 받아들임으로부터 시작하세요. 객관적인 진리를 찾으러 인생을 낭비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그러한 진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설사 그것이 있더라도, 순전히 주관적인 경험에 의하지 않고서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모든 지식과 지혜는 주관적입니다. 만약 주관적으로 경험할 수 없다면 어떤 것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2월 3일
이 세상에 가장 도움이 되는 길은 세상에 기여하기보다는 깨달음을 추구하고 환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2월 4일
진실을 지각하는 능력은 인간 의식 안에 있는 잠재력이고, 모든 인류 의식의 합해진 의도(combined intention)는 그 방향으로 전체 장(overall field)을 강화한다. 약간의 직관만 있어도, 모든 사람은 '진실이 생명을 지지하고 거짓은 죽음으로 이끈다'는 것을 안다.
2월 5일
인간 진보는 진화적이기 때문에, 실수와 오류는 불가피하다. 유일한 진짜 비극은 나이가 들어도 지혜로워지지 않는 것이다.
2월 6일
받아들임(acceptance)은 다툼, 갈등 그리고 분노의 위대한 치유자다. 받아들임은 또한 인식의 주요 불균형을 바로잡고 부정적인 감정에 지배당하는 것을 막아준다. 모든 것은 목적에 부합한다. 겸손함은 '우리가 모든 사건이나 일을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님'을 의미한다. 받아들임은 수동성이 아니라 비위치성이다.
2월 7일
단지 깨달음에 대하여 듣는 것만으로도 이미 가장 희귀한 선물이다. 이미 깨달음에 대해서 들은 사람은 그 밖의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2월 8일
자신의 결점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의 이로움은 저항이 크게 줄어들면서, 내면의 자기-정직감, 안전감 그리고 높은-자아존중감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자기-정직감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의해 상처받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정직한 통찰력은 실질적일뿐만 아니라, 잠재적인 감정적 고통 감소에 즉각적인 혜택이 있다.
2월 9일
신을 심판관으로 묘사하는 것은 어린 시절 처벌과 관련된 죄책감의 투사에서 오는, 에고의 망상이라는 것을 각성하라. 신은 부모가 아니라는 것을 각성하라.
2월 10일
'최고의 선에 봉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관찰자의 지배적인(prevailing) 의식수준을 따른다. 모든 사람에게 맞는 단 하나의 정답은 없다.
2월 11일
영적 진보는 이익을 추구하는 거래의 관점보다는 좀 더 크게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으로 주로 선한 의지(goodwill), 용서(forgiveness), 사랑임(lovingness)을 선택함으로써 자동적으로 뒤따른다.
2월 12일
영적 진화는 내용보다는 맥락이라는 패러다임의 일반적인 관점에서 마음<마음의 나쁜 성향>을 관찰한 자동적인 귀결이다. 변화를 강제하는 대신에, 모든 지배, 저항, 득과 실의 환상을 깊이 항복하여 신성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인식의) 환상을 파괴하거나 공격할 필요는 없고, 단지 그것들이 서서히 사라지도록 허용하기만 하면 된다.
2월 13일
세상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내적 겸손함의 결과인 연민과 받아들임이 필요하고, 이로써 세상은 성장한 마음의 평화와 함께 신에게 내맡겨진다.
2월 14일
세상이 하나의 함정이 아니고, 세상에 대한 우리의 집착과 진실 탐구를 흐리게 하는 우리의 논평이 함정이다.
2월 15일
집착은 에고의 매우 기이한 특성이다. 모든 에고에 구석구석 스며있는 다양한 형태의 집착은 신념이나, 실제라는 가치에 대한 믿음을 단순히 놓아버리는 것만으로도 완벽하게 떨쳐낼 수 있다. 작은 나(self, me, I)에 대한 집착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함정이다. 우리는 에고의 공상적 가치(fantasy value)를 찾아낼 수 있는데, '작은 나'는 가치있는 것에 집착하게 된다. 집착은 에너지와 의도가 필요하고, 그것에 의해 유지된다는 점에 주목하라. 마음은 생존의 도구로서 집착 그 자체의 과정에 집착한다. 에고를 놓아버린다는 것은 신을 대신하여 에고의 집착을 내맡기려는 자발성에 기반을 둔다.
2월 16일
에고가 온 힘을 다해서 들어 올릴 수 없는 것도 신의 은총에게는 깃털처럼 가볍다.
2월 17일
가장 좋은 태도는 거짓에 대해 논쟁적인 것보다는 진리에 헌신하는 것이다. 열린 마음의 호기심은 기존에 알 수 없었던 정보의 진보적 발견으로 이끄는데, 처음에 이것은 당연히 대립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2월 18일
외관(appearance)은 본질이 아니고, 인식은 실상이 아니고, 책 표지가 책은 아니다. 고려하고 받아들이기에는 불유쾌한 사실인 오류는 종종 설득력이 있다. 모든 사람은 '세상에 대한 그 자신의 개인적 관점이 실제이고, 사실이며, 참이라고 은밀하게 믿는다.
2월 19일
영적 진보는 자유의지와 선택의 문제로서 받아들임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래서 모든 사람은 오직 자신이 선택한 세상만을 경험한다. 이 우주에는 전혀 희생자들이 있을 수 없고, 모든 결과는 내면의 선택과 결정들의 펼쳐짐인 것이다.
2월 20일
원하는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자유의 경험은 더욱 커진다.
2월 21일
가치와 매력은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려있으며 세상 자체의 특성이 아님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저 바깥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 실제로는 '여기(내면)'에서 유래된다. 소중하게 여겨지는 위치성과 마음 끌리는 추정에도 같은 원리가 그대로 적용된다. '저 밖'에는 유혹이 없고, 그들의 매력은 간단한 거절과 금욕에 의해 감소한다.
2월 22일
'신의 두려움'이라는 개념이 무지임을 받아들여라. 신은 평화와 사랑일 뿐 그 어떤 것도 아니다.
2월 23일
전통적으로 신에 이르는 길은 가슴의 길(사랑, 헌신, 사심없는 봉사, 내맡김, 예배, 경배) 또는 마음의 길(아드바이타 또는 비이원성의 길)을 통해왔다. 각각의 길을 가는 중에 어떤 단계에서는 가슴의 길이, 다른 단계에서는 마음의 길이 좀 더 편하게 느껴질 수가 있다. 또는 단계별로 어느 한쪽이 더 중요시될 수도 있다. 가슴의 길이나 마음의 길을 택할 때, 애쓰거나 찾고 있거나, 깨달음을 얻게 될 개인적인 자아 또는 '나' 또는 에고가 있다고 고려하는 것은 하나의 방해물이다. 어떤 것을 추구하는 에고 또는 '나' 정체성같은 것은 없다고 각성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 대신에 그것을 탐색하고 추구하는 것은 의식의 비개인적인 측면(impersonal aspect)이다.
2월 24일
신에 대하여 알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 오염되지 않은 궁극의 열망이다.
2월 25일
유용한 접근법은 구도자의 계획을 신에 대한 사랑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추구하려는 모든 욕망을 우리는 버릴 수 있고, 신 이외에 어떤 것이 있다는 생각은 근거없는 허영심이라는 것을 각성할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경험, 생각 그리고 행위의 저작권을 주장하는 그런 허영심이다. 돌이켜보면, 몸과 마음은 이 우주의 수많은 조건의 결과물로 볼 수 있으며, 우리는 기껏해야 그중 일부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신을 향한 제한없는 사랑에서, 신을 온전하게 섬기는 것 이외의 모든 동기를 내맡기려는 자발성이 생긴다. 깨달음보다는 신의 종이 된다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된다. 신의 사랑을 위한 완벽한 통로가 되는 방법은 전적으로 내맡기는 것과 영적 에고의 목표 추구를 제거하는 것이다. 기쁨 그 자체는 더 나아가 영적 작업의 출발점이 된다.
2월 26일
우리는 분노 감정을 부정적인 기억에 의해 '강요'해서는 안되고, 미래에 대한 두려운 생각에 사로잡혀서도 안된다. 이것은 오직 선택지일 뿐이다. 마음은 다양한 채널에 선택할 수 있는 TV와 같아서, 어떤 특정한 생각의 유혹을 따를 필요가 없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한탄하거나, 화내거나 걱정하는 감정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이러한 모든 선택지들의 은밀한 매력은 내면의 보상이나 은밀한 만족을 제공하는데, 이것이 마음의 생각을 끌어당기는 원천이다.
2월 27일
한계가 있는 속세의 세상에서는, 우리는 '우리가 된 것의 반향'을 경험하는 경향이 있다.
2월 28일
기쁨의 근원은 항상 존재하고, 항상 이용가능하며, 특정 상황에 의존하지 않는다. 오직 두가지 장애물이 있다. 1) 그것이 항상 이용가능하고 존재한다는 것을 무시함 그리고 2) 에고 보상의 은밀한 쾌락때문에 다른 어떤 것이 평화와 기쁨보다 더 중요하다고 가치 평가하는 것.
2월 29일
영적 작업의 날카로움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일에 직면할 때 생긴다. 의식 수준의 도약을 위해 필요한 것은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3월 1일
신의 현존의 경험은 언제나 이용가능하고 내면에 있지만, (그것은)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한 선택은 오직 신에 대한 평화와 사랑 이외의 모든 것을 내맡길 때 이루어진다. 그 대가로, 참나의 신성은 언제나 현존하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것은 무시되거나 잊혀졌거나 또는 다른 선택을 했기 때문에 경험하지 못했을 뿐이다.
3월 2일
문 : 어떤 특성이 이해와 변형을 촉진하나요?
답 : 봉헌, 헌신, 신념, 기도, 내맡김 그리고 (영적) 영감입니다. 그 장벽을 포기할 때, 진리는 저절로 그 자체를 드러냅니다.
3월 3일
예상치 못한 삶의 혼란은 중요한 의사결정이 필요할 수 있는 강요된 재조정 과정에서 흔히 불안을 창조한다. 영적 연구에 따르면 모든 고뇌와 감정적 고통이 저항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의 치료법은 고통을 덜어주는 내맡김(surrender)과 받아들임(acceptance)을 통해 이루어진다.
3월 4일
에고 너머에 기쁨과 행복의 원천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하나의 중요한 단계다. 그러면 영적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가 생겨난다. 믿음(belief)도 생겨나고, 신념(faith)에 의해, 그리고 결국에는 경험에 의해서 강화된다. 그 다음에는 가르침, 정보의 획득과 배워왔던 것의 실행이 뒤따른다. 요청에 의해, 봉헌과 모든 장애물들을 내맡기려는 자발성을 뒤따르고 영적 에너지는 증가한다. 자신의 삶을 신에게 돌리기로 한 결정조차도 기쁨을 가져다주고, 삶에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희망을 주고, 더 큰 맥락은 삶에 더 많은 의미와 보상을 준다. 마침내 우리는 안팎으로, 부정성을 지지하는 것은 꺼리게 된다. 부정성을 지지하는 것이 잘못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헛될 뿐이기 때문이다. 신을 향한 여정이 실패와 의심으로 시작되더라도, 결국에는 확신이 된다. 그 방법은 정말로 간단하다.
3월 5일
인생에서 승리한다는 의미는 '누구의 잘못인가'라는 강박관념을 버리는 것이다. 친절함은 호전성보다 훨씬 더 강하다. 이기는 것보다는 성공하는 것이 더 낫다.
3월 6일
인간의 본성상, 신에게 가는 길은 쉽지 않다. 그 길은 상당한 용기, 불굴의 의지, 자발성, 인내가 필요하다. 그것은 겸손함과 온화한 양심에 의해 강해진다.
3월 7일
영적으로 진화한 모든 사람들이 알아낸 매우 가치있는 통찰력은 개인의 의식수준이 삶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을 확정하는 결정적인 영향임을 아는 것이다.
3월 8일
목표를 마음에 두는 것은 영감을 주고 실제로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마음에 둔 것은 실현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해서 죄책감에 빠져 자신을 공격하는 것은 실수다. 내면을 조사해보면, 실제로 원하는 것은 목표가 아니라, 단지 그것과 관련된 만족감이라는 것을 흔히 발견하게 될 것이다.
3월 9일
효과적인 영적 노력은 간헐적인(fits and starts) 열정이기보다는 꾸준함과 끈기의 결과다.
3월 10일
내면의 만족감이 속세의 이익이나, 다른 사람을 통제 또는 영향을 미치려는 욕망보다 더 중요해진다. 매력은 진보로 대체된다. 마침내 저항은 세속적인 삶 및 인식된 가치와는 더 이상 관련성을 잃는다. 대신에 내면의 의도는 순수함과 사심없음(selflessness)이 된다. 그래서 영적 진화는 '추구함'이나 획득보다는 과정 자체의 귀결이 된다.
3월 11일
의심과 두려움이 있는 한, 영적인 길을 가다 보면 방해와 유혹이 나타난다. 고전적으로, 그것은 지배권 포기를 싫어하는 에고에서 나오는 '시험'이라고 했다. 이것은 목표와 몰두의 재확인뿐만 아니라 봉헌, 끈기, 꾸준함, 용기, 확신, 그리고 의도와 같은 균형잡힌 원리를 강화함으로써 극복된다. 도전이 크면 클수록 내면의 강인함, 결단력, 결정 능력은 더 발달한다. 끈기있게 훈련을 지속하면, 유혹은 비난이나 부정을 부르는 충동이 아니라 단지 거부하는 하나의 선택임을 알 수 있다.
3월 12일
집착은 환상이다. 환상은 신을 향한 사랑에서 내맡겨질 수 있는데, 그것은 편하고 친숙한 것을 놓아버리려는 자발성에 영감을 준다.
3월 13일
개인적으로, 영적 진보 과정에서 필요한 모든 것은 '인내, 기도, 과정에 대한 신념 그리고 저항의 내맡김'이다. 혼란은 급변하는 날씨처럼 과도기적 상태이며, 그것은 인내와 다음 단계의 출현과 함께 깨끗이 제거되고, 결국 혼란스러운 상태는 초월된다.
3월 14일
앞으로 전진하는 것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기쁜 일이다. 대신에 우리는 단순히 장애물을 제거하여 앞으로 나아가도록 허용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과거에 의해 밀려나가기 보다는 미래에 이끌리게 된다.
3월 15일
영적 성숙과 함께, 우리는 이번 생(lifetime)이 귀중하고, 우월하다는 생각이나 에고를 부풀리는 자만심가득한 환상에 시간을 낭비하기에는 너무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된다.
3월 16일
화(anger)의 발달을 막는 최선의 방어는 다른 사람들을 동등하게 보고, 기대를 낮추고, 겸손함을 통해 자신의 욕구 충족을 신에게 내맡기는 것이다. 에고의 요구와 기대를 조금씩 멀리하고 포기하면, 화는 줄어든다.
3월 17일
우리는 성공을 시기하고 비방함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을 제한함으로써 성공한다. 그래서 자주 화를 내는 사람은 돌아가서(go back) 자신의 교육과 발달에서 놓친 것을 만회해야 한다.
3월 18일
사랑이 없는 예술은 없다. 예술은 항상 영혼이 만드는 것이고 인간의 손길이 만들어낸 기교다. 그 손길이 물질적인 것이든 마음과 영의 손길이든 상관없이 네안데르탈인 시대부터 그래왔고,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다.
3월 19일
진정한 금욕주의는 단순히 노력의 실속 문제다. 중요한 것은 소유물 자체가 아니라 중요하다고 가정되거나, 중요하다고 그것에 투사된 가치다. 그러므로 '세상의 옷을 헐렁하게 걸쳐라'라는 영적 금언이 권고된다.
3월 20일
좌절은 욕망의 중요성이 과장됨으로써 발생한다.
3월 21일
전체적이고 고요한 맥락장에 대한 자각은 관상적 생활방식에 의해 촉진되는데, 그것은 세부 사항에서 '큰 그림'으로 관심을 전환하는 것에 비할 수 있다. 관상적 생활방식은 구체적인 것으로 들어가지 않고 전체적인 분위기를 얻는 것이고, 그렇기때문에 생각하거나 분석하기보다는 보편성(generalities)을 직관하게 된다. 에고/마음의 저항은 세상의 매력과 유혹에 관련된 무엇인가를 '놓칠'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는 곧 형상의 내용의 세부 사항을 처리하는 것에 중독된 것과 같다. '세상과 절연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에너지를 거두고, '특정한 것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활동들을 거부'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작은 나의 즐거움보다는 참나 안에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3월 22일
우리는 명백한 경험의 과정을 목격하고 관찰하고 기록한다. 그러나 자각 그 자체에서도, 실제로 어떤 일도 실제로 발생하지 않는다. 자각은 단지 경험하고 있는 것을 기록할 뿐이다. 어떤 것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자각은 생명 자체와 동일한, 무한한 파워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끌개 장(attractor field)이다. 그리고 더 높은 수준의 자각에서는 그것이 실수가 아니라고 믿는 마음이 없다.
3월 23일
창의성과 천재성의 과정은 인간의 의식에 내재되어 있다. 모든 인간은 동일한 의식의 본질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기때문에, 천재적 잠재력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이 스스로 발현하기 위한 적절한 상황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3월 24일
분노의 처리에는 내면의 정직성과 온전성의 결여 및 본질적으로 실행 불가능한 것을 내맡기려는 자발성이 필요하고, 그것을 자신감으로 대체하면 된다. 분노보다 훨씬 더 강력한 보상적인 태도는 봉헌, 이성, 겸손함, 감사, 인내심, 관용이다.
3월 25일
모든 사람은 이미 어떤 특정 의식수준에서 그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면 에고는 개념의 세부 사항에 왈가왈부하지만, 참나는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다. 모든 거짓 식별은 모든 정신화(mentalization)를 신에게 내맡기려는 자발성으로 즉시 제거할 수 있다.
3월 26일
마음은 욕망과 혐오사이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 둘은 서로 얽혀있다. 혐오는 또한 선천적으로 조건적인 인식에 대한 하나의 집착이고, 받아들임에 의해서 흩어진다.
3월 27일
모든 마음의 진술은 기껏해야 잠정적이고, 그 한계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지혜의 본질적 특성이다. 지혜는 겸손함뿐만 아니라 유연함의 정도를 나타낸다.
3월 28일
모든 것은 존재로서의 신성의 표현에 의해 스스로 창조된다. 그러므로 각각의 '사물(thing)'은 온 우주의 전체성 때문에 있는 그대로일 수 있다. 또한 지혜는 상세한 정보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의 보수적이고 신중한 태도를 의미한다. 따라서, 지혜는 모든 지식이 의미뿐만 아니라 중요성과 가치에 있어서도, 일시적이고 변경될 수 있다고 고려하는 것이다.
3월 29일
이원론적 마음은 표면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과 사건, 일어난 일 또는 사물을 보고, '변화'라는 또 다른 개념의 가설을 세운다. 마음은 설명을 구하고, 마음의 구조, 동기 및 한계에 대해서는 순진무구하다. 언어의 세계에서는 '나' 또는 '그것'이 '저것'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이것은 주어가 동사를 통해 대상에 작용하는 문장구조에 내재된 것과 비슷하다. 작은 나(The self)는 행위의 행위자, 생각의 생각하는 자, 결정의 결정하는 자처럼, 내면에 주요 인과요인(primary causal agent)이 있다고 가정한다. 이러한 이원론적 설명이 없으면, 선형적 마음은 현상의 나타남을 설명할 방법을 잃어버린다.
3월 30일
영적 작업은 내용에 대한 집착 또는 동일시를 철회하고, 그 다음에 자신의 실상이 맥락이라는 것을 점진적으로 깨닫는 것을 포함한다. 가장 간결한 서술은 '작은 나(the self)는 내용이고 참나(the Self)는 맥락이다'라는 것이다.
3월 31일
영(spirit)의 운명은 자신이 내리는 선택과 결정들에 의해서 좋아지거나 나빠질 것이다.
4월 1일
의식 수준은 영적 의지에 의한 선택에 의해 결정되고, 따라서 의식 수준은 카르마의 귀결이자 결정요인이다. 자유롭게 진화하기 위해서는 영적 사다리를 오르거나 내릴 수 있는, 위대한 기회를 제공하는 하나의 세계가 필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세상은 하나의 이상적인 세계이며, 사회는 다양한 경험적 선택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April 2
자신 안에 내재된 천재성을 인정할때까지, 우리는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천재성을 알아내는데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우리는 내면에서 깨우친 만큼만 그 천재성을 인정할 수 있다.
April 3
선택의 범위는 일반적으로 오직 자신의 시야에 의해서 제한된다.
April 4
자유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본질이라 할 수 있는 타고난 영적 진리를 배울 수 있는 기회다. 공덕 또는 악업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진짜(real)'라고 여겨지는 믿음과 경험의 상태에서 선택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심지어 환상조차도 영적 성장을 보조하는데,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그것이 진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April 5
지속적으로 사랑, 평화 또는 용서를 선택하는 것이 우리를 거울의 집에서 나오게 한다.
April 6.
인간의 삶은 영(the sprit)을 보조한다. 만약 세상이 구원을 얻고, 자신의 삶을 통해 서로를 섬기는 궁극적인 학교라는 것에 감사한다면, 우리는 세상을 덜 고통스럽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April 7
자각(awareness)은 무엇인가를 해야한다는 것에 의해 지장을 받지 않는 의식자체의 특성이다. 자각은 단지 '있다'와 그것의 타고난 능력덕분에 직접적으로 본질을 파악한다. 참나로서의 신성의 현존은 힘들이지 않고 수월하다.
April 8
행위는 맥락, 장, 의도를 통합한 자동적인 귀결이다. 모든 행위는 실제로 자발적이며, 호의적 표현이거나 그렇지 않아도 되는 카르마적 성향이나 국소 조건들을 반영한다. 행위를 비인격화하려면 단지 '나 I' 또는 '나 me'라는 따로 떨어진, 독립적인 원인 요소가 있다는 믿음을 버리면 된다.
April 9
실현(actualization)은 하나의 선택지(option)이자 의지의 한 측면으로서의 선택(choice)이다. 매번의 긍정적인 선택은 추가적인 긍정적 선택의 가능성과 개연성을 높인다. 매번의 긍정적인 선택은 사람을 더 높은 의식의 끌개장으로 가까이 다가가게 한다.
April 10
문 : 영적 작업을 어떻게 마음속에 그려야 하나요?
답 : 그 과정은 하나의 발견이고 따라서 내면으로 향합니다. 그것은 영적 노력이 삶의 목표로 선택되는 참나의 영향에 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 작업은 주로 결단입니다.
April 11
에고 인식의 지배가 약해지면, 세상의 모습과 마음의 해석도 약해진다. 결정은 투사한 인식을 기반으로 한다. 그래서 마음은 판단에 기초한, 분별을 포함하는 끝없는 환상을 인식하는 것이다. '좋은' 선택지들이라고 해석된 것들은 선택과 동의에 이끌린다. 따라서 모든 인식은 내용을 반영한다.
April 12
몰두는 진리자체의 핵심이고, 개종 또는 비밀엄수에 의한 유혹으로부터 자유롭다. 꼭 필요한 것은 호기심과 완전하고 전체적이고 자족하는 진리에 대한 이끌림 뿐이다.
April 13
객관적으로 볼 때, 생각은 실제로 세상의 의식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개인의 마음은 단지 새로운 조합과 가정으로 생각을 처리할 뿐이다. 진정 본원적 생각(original thoughts)으로 보이는 것은 오직 천재성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만 나타나고, 언제나 생각의 저자는 스스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발견하거나 주어진 선물이라고 느낀다. 두 눈송이가 같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 유일무이(unique)할지도 모른다. . .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눈송이일 뿐이다.
April 14
생각 뒤에 내적인 생각하는 자가 없고, 행위 뒤에 '행하는 자'가 없으며,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도 없다. (영적) 추구는 때가 되면 저절로 일어나며, 그것은 주의집중(focus of attention)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의식의 모든 측면과 특성은 스스로 작동하고, 의지의 보편적인 안내에 따라 서로에게 에너지를 제공한다.
April 15
실상에서는, 모든 것이 외부 원인없이 저절로 일어난다. 모든 사물과 사건은 모든 것이 있음(All That is)의 전체성의 나타남이며, 단지 그것은 주어진 순간에 있을 뿐이다. 일단 전체성으로 보면 모든 것은 항상 완벽하고,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바꾸기 위한 외부 원인이 필요하지 않다. 에고의 위치성과 제한된 범위의 관점에서 보면, 세상은 끝없는 수정과 교정이 필요해 보인다. 이런 환상은 허영심처럼 허물어진다.
April 16
우주의 어떤 것도 우연이나 사고에 의해서 발생하지 않는다. 우주는 무한한 수의 에너지 패턴에 수반되는 수많은 조건의 일관성있는 동시성과 상호작용이다. 자각의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분명해서 명확하게 보이고,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자각수준 밖에서는, 자신의 위치를 자동적으로 합치거나 밀어내는 무수한 보이지 않는 자기장에 비할 수 있으며, 그것은 위치와 상대적인 힘 및 극성에 따라 상호작용한다.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며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April 17
자신이 완전한 우주이고, 영원히 끝이 없는 모든 것이 있음(All That Is)과 하나라는 것을 각성할 때, 더 이상 고통은 가능하지 않다.
April 18
관찰해보면, 이미지와 단어 자체 아래에는 추진 에너지(driving energy)가 있고, 생각하고 싶은 욕구, 마음이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어떤 입력으로 바쁘게 지내려는 욕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비개인적인 '생각함(thinkingness)'에 대한 충동을 발견할 수 있다. 잘 관찰해보면, 생각을 생각하는 '나'는 없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상 '나'는 거의 개입하지 않는다.
April 19
더 높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개인적인 '나'가 아니라, 영감, 헌신, 봉헌, 끈기로 표현되는 의식 자체의 한 측면이며, 이 모든 것이 영적 의지의 한 측면이다. 그러므로, 참나를 찾는 근원은 은총에 의해 촉진되는 참나 자신의 특성 덕분에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April 20
꽃피는 봄처럼, 인간의 신에 대한 이해의 새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약속이 출현하고 있다. 이제 인류의 의식 수준은 죄책감과 미움의 신(god)을 숭배하는 대신 신(God)의 진리에 대한 사랑을 알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높다.
April 21
모든 문제는 단지 정신처리의 산물일 뿐이며,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April 22
실상의 세계에서, 모든 것은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그 본질의 타고난 운명이고, 그렇게 되기 위해 외부의 어떤 도움도 필요하지 않다. 겸손함과 함께, 우리는 에고가 스스로 맡은 세상의 구세주로서의 역할을 포기하고 신에게 직접 내맡길 수 있다. 에고의 상이라는 세계는 자신의 환상과 독단적인 위치성의 투사다. 그런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April 23.
문 : 오늘날의 세계에서 관상적 삶이 가능한가요?
답 : 강한 의도가 있으면 일상의 삶은 순응합니다. 관상은 일상활동을 방해하지 않는 비집착을 의미합니다.
April 24
진정한 행복은 항상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있다. 에고는 항상 욕망이 충족되는 미래의 '언제(when)'에 완성과 만족을 기대한다.
April 25
인간 지식의 모든 분야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고, 역사의 보고조차도 새로운 발견과 방법론에 따라 수정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모든 믿음과 정보는 사실이 변하지 않더라도, 그것의 중요성이나 의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에서 잠정적이다.
April 26
적절한 자기-존중감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을 미워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April 27
물속의 코르크 마개나 대기의 풍선처럼, 각각의 영은 의식 에너지 장의 무한한 영역내에서 자신의 부력수준으로 올라간다. 외부 판단 또는 신성의 강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각각의 존재는 그 본질을 발산하고 그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다. 이것이 신성의 완벽한 정의(justice)다. 선택에 의해서, 각각의 영(spirit)은 선택해온 것이 된다. 모든 영역 내에는, 항상 현존하는 절대적 실상에 대한 순간순간의 선택이 존재하는데, 이 실상에 대한 절대적 선택은 곧 해방(liberation)을 야기한다.
April 28
상호 연결된 우주에서, 사적인 세상에서 우리가 이룬 모든 진보는, 모두를 위해 이 세상을 전체적으로 향상시킨다. 우리 모두는 인류의 집단적인 의식수준 위에 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추가한 아무리 작은 성장이라도 결국 우리 모두의 이익이 된다. 우리 모두는 생명에 도움이 되는 노력에 의해서 공공의 부력을 보태는 것이다. 우리가 생명에 봉사하기 위해서 하는 모든 일은 자동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혜택으로 돌아온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생명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명이다. '당신에게 좋은 것이 나에게도 좋다는 것'은 과학적 진실이다.
April 29
만약 해답의 가능성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질문도 청할 수 없다.
April 30
의식의 주요 한계는 그것의 천진무구함이다. 의식은 잘 속는다. 그래서 듣는 모든 것을 그대로 믿는다. 의식은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넣는대로 재생하는 하드웨어와 같다. 우리는 자신의 의식의 천진무구함을 절대로 잃지 않는다. 의식은 쉽게 외부에 영향을 받는 아이처럼 순진함과 신뢰를 유지한다. 의식의 유일한 보호자는 들어오는 프로그램을 면밀히 조사하는 분별력있는 자각(discerning awareness)이다.
May 1
내용과 무관하게, 되고(to be), 알고(to know), 존재하고(to exist), 자각할 수 있는(to be aware) 능력은 의식으로 표현되는 생명의 선험적 기질이다. 존재하는 것과 존재를 의식하는 것은 모든 논리, 이성 또는 증거를 대체한다. 자각은 안다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신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존재하는 의미를 알고 충분히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
May 2.
의식의 본성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구원(redemption)은 비이원성의 근본적인 순수한 상태(prinstine state)로 의식이 회귀한 결과로 일어난다고 한다. 구원은 의지의 이원성과 에고의 계획을, 진리로써 신의 비이원성에 내맡기려는 '순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에고의 이원성에서 영의 비이원성으로의 복귀는 가능성이 거의 없을 만큼 너무 어렵기 때문에 오직 신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지지, 영감, 그리고 에고의 아픔과 고통으로부터 구조해줄 구원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구원자가 필요하다.
May 3
문 : '신에 내맡긴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요?
답 : 그것은 에고의 위치성에 대한 통제와 에고의 은밀한 만족감을 내맡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생명과 기쁨의 근원인 사랑과 신에게로 향하세요. 이 선택은 모든 순간에 이용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선택하기만 하면, 그 보상은 위대합니다. 초청에 의해, 영적 자각은 (깨달음의) 길을 밝혀줍니다. 핵심 열쇠는 기꺼이 그렇게 하려는 마음(자발성)입니다.
May 4
생각하는 것을 내맡긴다는 것은 신이 우리를 '무(nothing)'로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그 반대다. 그것은 우리가 모든 것이라는 발견으로 이어진다.
May 5
분노는 그 자체로 실제로 세상에서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는 주관적 감정일 뿐이다. 마치 이성과 억제의 사용이 무용지물인 것처럼 말이다. 분노는 에고에 의해 흔히 사용되는 용기의 대체물인데, 용기를 위해 실제로 필요한 것은 단호함, 결단력, 몰두뿐이다.
May 6
에고/마음의 목표는 일차적으로 실행하고(do), 행동하고(act), 획득하거나 수행하는(perform) 것이지만, 관상의 의도는 '되는 것(become)'이다. 지성은 '~에 대하여(about)' 알기를 원하는 반면, 관상은 앎 자체(knowingness itself)와 자율적 지혜(autonomous wisdom)를 추구한다. 합리적 사고는 시간 연관적이고 순차적이며 선형적이다. 반면에 관상은 순차적 시간의 외부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비선형적이고 근원의 이해와 관련되어 있다. 헌신적 관상은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이나 양식이고, 이로써 우리의 삶은 기도가 된다.
May 7
영적 진보는 단계적으로 일어난다. 처음에 우리는 영적 실상에 대해 배우고 그것을 탐구한다. 그 다음에는 삶의 모든 면에서 가르침의 실천과 적용에 이르고, 결국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이 된다. 헌신, 몰두, 실천을 통해 영적 개념은 경험적 실상이 된다.
May 8
나타난 것과 그 다음에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오직 자각 덕분에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지식, 경험 그리고 우리가 존재(exist)하거나 있다(is)는 자각을 허용하는 의식의 특성이다. 있다는 것(to be)과 당신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다른 문제다.
May 9
진지한 내면의 영적 작업이 <에고에게는> 지루하고 힘들게 들릴 수 있지만, 집으로 돌아가기를 열망하는 영에게는 흥미진진하다. 의식은 본성적으로 그것의 근원을 추구한다.
May 10
의식 수준의 향상을 촉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발성의 태도이며, 자발성은 새로운 가설의 타당성에 대한 새로운 평가 수단을 통해 그 마음을 연다. 비록 변화를 향한 동기는 수많은 인간 조건의 측면만큼 다양하지만, 그것은 어려움이나 역설에 직면하여 마음이 도전받을 때 흔히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사실 (선 수행과 같은) 특정 훈련은 자각의 도약을 순조롭게 하기위해 고의로 그러한 교착상태를 만든다.
May 11
다른 사람의 안녕과 행복에 기여하는 것은 흐뭇한 일이며, 관대함은 그 자체로 보상이라는 발견으로 이끈다.
May 12
영적/종교적 진실의 모든 정신적<선형적> 묘사는 비타당성(invalidation), 논쟁, 말다툼의 대상이 된다. 반면에 의식 자체(비선형)는 개념이나 묘사를 초월해있기 때문에 회의, 의심, 불신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May 13
영적 자각이 발전함에 따라, 영적 에너지의 흐름은 증가하고, 전에는 겉으로 보기에 극복할 수 없을 것같은 장애물을 초월할 수 있게 된다. 세상에 대한 매력과 감정이 줄어들수록, 사물이나 외견상의 이득보다는 아름다움, 사랑스러움 그리고 평화와 같은 특성에 점진적인 끌림이 생긴다. 용서는 습관적인 태도가 되고, 모든 창조물의 타고난 순수함이 빛을 발한다. 위대한 성인과 스승의 가르침은 내면에서 자기 것이 된다.
May 14
영적 몰두는 진리, 사랑, 연민, 지혜, 편파적이지 않은 신성의 속성과 함께하는 영적 의지와의 정렬에 의해 에너지를 얻는다. 헌신은 우리의 생명을 우선시하고, 생명에 도움이 되는 것을 끌어당긴다. 신의 종이 된다는 것은 결국 봉헌인데, 이로써 목표는 다른 모든 위치성, 매력 또는 오락활동보다 우선하게 된다.
May 15
의식이 없다면, 형상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독립적인 존재가 없는 인식의 산물로서 형상 자체는 일시적이고 제한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반면, 의식은 모든 것을 포괄하고 제한이 없다. 덧없고 일시적인 것(시작과 끝이 분명한)이 어떻게 형상없는 것(모든 것을 포괄하고 무제한적인)을 창조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만약 우리가 한계 자체의 관념이 단지 본질적인 실상이 아닌 인식의 산물임을 안다면 수수께끼는 저절로 해결된다. 즉 형상은 형상없는 것의 표출이 된다.
May 16
우리는 우리가 말하거나 가진 것보다는, 우리가 된 것에 의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May 17
에고의 기능으로 보면, 의견은 그것이 나의 의견이기 때문에 자기-중요성이 더해진 견해라기 보다는, 그 자체로 아무것도 아님을 드러낸다. 의견은 자기-중요성의 매력을 획득한 하나의 견해이고, 그래서 이성, 논리 또는 사실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
May 18
비록 의식자체에 내재되어 있을지라도, 맥락은 일반적으로 언급, 식별 또는 정의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전에는 진리자체의 실질적 과학이 없었고, 검증이나 확인의 수단은 더욱 없었다. 그래서 인류는 우왕좌왕하고 반복적으로 끝없는 재앙<같은 실수를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바라는 것과 같은>속으로 빠져드는 것이 불가피했다.
May 19
신의 은총은 영역과 가능성으로서 나타난 모든 것에서 전체 우주의 카르마적 일관성의 절대적 확실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은총은 구원과 절대적 자유를 위한 모든 수단을 사용할 수 있도록 의식의 영역 내에서 제공되는 것이다. 선택에 의해서, 자신의 운명은 결정된다. 고려해야 할 임의적인 측면은 없다.
May 20
생명이라는 선물에 대한 감사로, 우리는 신의 모든 생명이라는 창조물에 대한 이타적인 봉사를 통해, 우리가 선물받은 삶을 다시 신에게 선물로 바친다.
May 21
존재하는 것은 이미 전체적이고 완전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존재는 다른 조건에의 의존이 필요하지 않다. 따라서, 조건적인 존재는 에고/마음의 환상이며, 에고/마음은 자기 외부의 어떤 것에 의존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존재는 스스로 완전하고 무조건적이다. 존재는 오직 신의 은총, 신성의 법도에 의한 것이다.
May 22
만약 영적 추구의 중요한 동력이 영적인 야망<어딘가에 도달하려는>이 아니라, 사랑의 장애물에 대한 점진적인 내맡김이라면, 흔히 '영적 에고'라고 하는 것도 나중에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May 23
문 : 어떻게 해야 영적 에고의 발달을 막을 수 있나요? 각각의 성공은 영적 에고에 먹이를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답 : 행위나 행동을 하는 행위자로서 어떤 독립체는 없다는 것을 각성하세요. 비난하고 책임을 물을 행위자/자기(self)는 없습니다. 진보는 영적 의지의 동의에 의해 활성화되는 의식의 특성의 결과입니다. 영적 영감은 작동하는 에너지가 되어 줍니다. 그것은 에고/자기(self)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May 24
감정은 진리의 지표가 아니다. 그것은 모두 위치성과 조건을 반영하고 결정할 뿐이다.
May 25
문 : 영적 제자/헌신자/추구자에게 가장 실용적인 추정적 세계관은 무엇입니까?
답 : 세상의 실제 '목적'은 완전하고 오직 신만이 다 알고 있다고 가정하세요. 세상은 전체적으로 중립적이지만, 영적 성장과 의식의 진화를 위한 최적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혜택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세요. 세상은 깨달음과 신성의 드러냄을 위한 학교이며, 이로써 의식/자각은 그 근원을 다시 일깨웁니다. 따라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세상과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May 26
진정한 관대함은 무조건적인 것이기 때문에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May 27
내면이 정직한 사람은 쉽게 상처를 받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불평하지 않는다. 정직한 통찰력은 실질적인 고통뿐 아니라 잠재적인 감정적 고통의 감소에 즉각적인 이득을 준다. 사람은 '자기-자각과 자기-수용의 정도'와 정확히 비례하여 정서적 고통을 받는다.
May 28
고통없는 성장의 열쇠는 겸손함이며, 이는 단순히 교만함과 겉치레를 버리고, 불완전함을 자신과 타인의 정상적인 인간적 특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May 29
삶의 기본지침으로 나타난 모든 것에서, 모든 생명에 대한 친절과 선의를 갖겠다는 결정을 선택하는 것은 매우 가치있는 일이다.
May 30
진리나 깨달음은 발견하거나 추구하거나 획득하거나 얻거나 또는 소유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무한한 현존이란 늘 현재이며, 현존의 각성은 그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제거될 때 스스로 생겨난다. 그래서 진리를 탐구할 필요는 없고, 단지 틀린 것을 놓아버리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구름을 치워서 태양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동안 가려져 있었던 것이 드러나는 것 뿐이다. 다시 말해서, 영적 작업은 주로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추정적 앎을 놓아버리는 것인데, 그것은 그 노력이 결국에는 좀더 나은 보상을 얻게 된다는 이미 해본 사람들의 약속과 함께 하는 것이다.
May 31
최고의 기능으로 살기 위한 기초적인 영적 금언의 선택이 바로 인식을 바꾸는 태도(a set of attitudes)가 된다. 그것은 선형적 믿음 체계라기보다는 자신을 위치시키고 삶과 관련된 하나의 방식이다. 그러면, 태도는 한정하는 인식보다는 분별력으로써 일반화되는 경향이 있다.
June 1
'모든 생명에게 친절'하거나,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신성함을 존중하기로 한 결정은 연민의 미덕, 용서하려는 자발성, 판단하기보다는 이해하려는 노력과 함께 영적 진화에서 매우 강력한 태도다. 끊임없이 내맡김으로써, 인식은 본질의 분별력(discernment of essence)으로 용해된다.
June 2
심판주의(매사에 판단하는 마음)은 모든 에고의 가장 큰 허영심이다. 성경은 '판단하지 마라, 심판관이 되지 않게 하라'라고 말한다. 또한 심판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다. 예수는 용서하라고 말했다. 붓다는 '인식은 오직 환상만 볼 수 있기 때문에 판단할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인식은 항상 부분적이며 임의적인 맥락에 의해 제한된다. 진리의 세계에서는, 어떤 심판도 가능하지 않다.
June 3.
문 : 심판의 날은 어떻습니까?
답 : 인간은 에고의 특성을 기반으로 신에 대해 추론하고, 그 다음에 신을 두려워합니다. 심판의 날은 매일입니다. 그것은 이미 여기에 있으며 끝이 없이 계속됩니다.
June 4
세상에는 인간의 삶과 행복에 해로운 많은 요소와 세력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미워하거나 악마화할 필요는 없으며 단지 적당히 허용하고 피하면 된다.
June 5
관찰을 통해, 호/불호의 이분법은 단지 검증되지 않은 추정에 기반한 전체적인 맥락의 반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깊은 겸손함이 있을 때, 도움없이는 마음은 정말로 권한이 없고, 도구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그리고 그러한 심판의 분별이 가능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좋은지, 누구에게 나쁜지, 단지 묻기 시작함으로써 이러한 발견에 이를 수 있다. 이것은 결국 과도기적 학습경험으로써 인간 삶 자체의 중요성과 의미에 대한 전반적인 맥락화를 검토하게 한다.
June 6
자신의 개인적 표준, 도덕, 행동강령 및 현실의 해석을 타인들이 채택하고, 그에 따라 생활해야 한다고 믿는 것은 비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해롭다. 투사된 도덕주의는 항상 '해야한다'로 표현되며, 종종 분노, 증오, 원한 심지어는 보복적 복수 그리고 결국 전쟁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다른 모든 국가는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순진한 미국인의 관점) 우리는 선택을 통해 습관적인 심판주의에 대한 유혹을 거부할 수 있다. 그 결과는 위대한 내면의 평화다.
June 7
자각의 상태에서 우리가 이루어낸 모든 진전은 보이지 않는 다수에게 혜택을 주고, 다른 사람들이 따라야 할 다음 단계를 튼튼하게 해준다. 모든 친절한 행동은 온 우주가 알고 영원히 보존한다.
June 8
자신과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단순한 친절이야 말로 가장 강력한 탈바꿈의 힘이다. 그것은 반발을 일으키지 않고, 단점이 없으며, 상실이나 절망으로 이끌지도 않는다. 그것은 아무런 댓가없이 자신의 진정한 파워를 증가시킨다. 그러나 최대의 파워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러한 친절은 예외를 허용해서는 안 되며, 또한 어떤 이기적인 보상을 기대하면서 실행해서도 안 된다. 그럴 때, 그것의 효과는 미묘할 만큼 광범위하다.
June 9
겸손함은 에고의 심판주의, 위치성, 도덕적인 척하기(moralizing)의 토대를 제거한다.
June 10
특히 꼬리표 달기에 의한 위치성으로부터 거리두기는 고요함, 자유 그리고 안전함으로 이어진다. 큰 고요함은 주로 상호작용하는, 에고의 게임판인 내용보다는 삶의 맥락과 관련하여 발생한다. 삶과 연관된 이 넓은 방식은 세상의 영향에서 머무는 것으로부터 더 큰 연민과 해방으로 이끈다.
June 11
모든 제한적인 에고의 위치와 마찬가지로, 포기를 요구하는 것은 위치 자체가 아니라 에고의 감정적 보상 또는 에너지다.
June 12
지금 이 순간만이 경험되는 유일한 실상이고, 다른 모든 것은 추상적 관념이며 하나의 정신적 구조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는 실제로 70년을 살 수 없고, 정확하게는 눈 깜짝할 순간만 가능하다.
June 13
개인적인 판단이라는 것은 믿음과 이전 프로그램에 의해 강화된 인식에 기반하며, 이 모든 것은 에고의 부정적인 에너지의 보상에 의해 고정된다. 에고는 단지 '잘못된' 고통을 '사랑'하고, 순교자가 되고, 오해를 받으며, 인생 부침의 끝없는 희생자가 된다. 결과적으로, 에고는 위치성 자체뿐만 아니라 동정, 자기-연민, 자격, 중요성, 또는 작은 나(self)가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인 '무대의 중심'에 서는 것으로부터 엄청난 대가를 치른다.
June 14
세상은 사실상 오락물이다. 놀이처럼, 세상은 헐렁하게 걸치도록 정해져 있다. 천국은 자신의 내면에 있고, 자각에 의해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세상은 단지 하나의 겉모습일 뿐이다. 세상의 멜로 드라마는 왜곡된 인식의 계략이다. 그것(인식의 계략)은 세상이 크고 강력하며 영원한 반면, 참나는 작고 연약하며 일시적이라는 생각으로 이끈다. 정확히 말하면 그 반대가 진실이다.
June 15
진리, 평화, 기쁨을 위한 선택지는 항상 가능하다. 비록 생각의 습관으로써, 다른 선택지를 선택하는 결과로 생기는 무지와 비-자각(non-awareness) 뒤에 숨어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말이다. 신에 내맡김에 의해 다른 모든 선택지가 거부될 때, 내면의 진리는 스스로 드러난다.
June 16
내면의 관찰을 통해, 우리는 개인의 성격이 학습된 반응 체계이며, 그 뒤에 숨어있는 페르소나는 초월한 ‘진짜 나(real I)'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성격의 목격자이며, 그 성격과 동일시해야만 하는 이유는 전혀 없다.
June 17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거만하게 행동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라,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위치를 모두의 최대이익을 위한 영향력에 대한 책임을 가진 관리자 직분으로 본다.
June 18
영적 정화는 처음에는 어려워 보이지만, 결국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지속적으로 사랑, 평화 또는 용서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를 거울의 집에서 나오게 한다. 신의 기쁨은 너무도 정교하기 때문에, 어떠한 희생을 치러서라도 노력과 고통을 겪을 가치가 있다.
June 19
평화는 피할 수 없는 삶을 내맡긴(surrender) 귀결일 수 있다. 종교적/영적 회의론자도 내면을 들여다보고, 내면의 근본적이고 환원활 수 없는 삶의 특성이 자각, 의식의 능력이자 주관적 기질임(substrate of subjectivity)을 관찰할 수 있다. 의식이 없으면, 우리는 알 수도 없고 또는 심지어 아는지 모르는지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의식은 그 존재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확인할 수 있는 존재의 자각이다. 따라서 의식 자체는 <부처가 언급한 대로> 고심없이 신성임(being Divine)의 명백한 실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있다'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며, 우리가 명백하게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더 초월적인 특성을 필요로 한다.
June 20
목표를 내맡긴다는 것이 자동적으로 목표 상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종종 탐욕을 통해 환상에 빠지는 것이 더 높은 의식수준의 진화로 쉽게 구체화되기도 한다.
June 21
판단과 비평을 버릴 때 평화로운 안도감이 있다. 왜냐하면 판단과 비평은 끊임없는 무의식적 죄책감뿐만 아니라 보복의 두려움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June 22
우리는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신을 위해 이것을 포기할 가치가 있는가?' 이렇게, 에고 위치성은 대가를 치르게 되며, 그것은 자발성으로 처리해야 하는 지점이다. 각각의 위치성은 그 성취가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가정에 기초를 둔다. 따라서 성취가 행복을 가져올 것이라는 환상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실제 가치가 없다.
June 23
인식에 의해 정의된 그것의 나타남(appearance)에 대한 믿음이 없어지면, 우리가 실제라고 생각했던 세상은 사라진다. 우리가 내면에 상존하는 기쁨, 평화의 잠재력과 하나되기를 선택할 때, 세상은 유머스러운 놀이동산으로 변하고, 모든 드라마는 단지 드라마로 보인다.
June 24
존재는 그 자체로 보상이다. 결과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잠재력을 발현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만족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탁월함 그 자체를 위해 수행의 탁월함(excellence of performance)과 정렬하게 된다.
June 25
온당한 겸손함(Rational humility)이야말로, 그것을 통해 마음이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배움의 기본이다. 그러면 마음은 검증가능한 참된 지식을 흡수, 통합할 수 있고 그것과 하나될 수 있다. 성공의 열쇠는 경쟁적인 시기, 질투, 또는 적대감을 통해 저항하거나 공격하기보다는 진실한 권위를 탐구하고 모방하는(imitate) 것이다.
June 26
의식수준이 높을수록, 마음에 품은 것이 실현될 가능성은 더 커진다. 따라서 '최고의 목표(goal)에 공헌'하는 해법을 찾는 것이 단순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욕망과 이익의 성취를 계획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June 27
부분적이고 제한된 위치성은 '문제(problems)'라고 하는 환상을 만든다. 실상에서는, 문제라고 하는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다. 단지 우리가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이 있을 뿐이다. 인간의 고통은 저항때문이다.
June 28
우리는 오직 참나에게 참회와 고백을 빚지고 있다. 우리는 참나에게 '죄와 죄책감'을 원상태로 되돌리는(undoing) 빚을 지고 있다. 우리는 참나에게 자신의 방식을 바꿔야 하는 의무를 빚지고 있다. 우리는 참나에게 위치성을 포기해야 하는 빚을 지고 있다. 고통은 오직 에고에게만 제공된다. 필요나 감정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신에게, 그리고 인간의 고뇌때문에 전혀 기쁘지 않은 신에게 무엇이 소용있겠는가?
June 29
고통스러운 감정을 처리하는 동안 도움이 되는 힘의 원천은 모든 인류와 하나되는 것이고, 고통은 보편적이고, 인간임(being human)과 에고의 진화의 타고난 현상임를 아는 것이다.
June 30
어떤 위험에서든 성공이란 그저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고,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최선을 생활방식으로 삼는 것의 자동적 귀결이다.
July 1
선형적 세계의 영역은 고통을 수반한다. 따라서 인류역사 속에서 최고의 스승들은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해답으로 구원(가슴의 길)이나 깨달음의 길(마음의 길)을 가르쳤다.
July 2
지각이 있는 모든 존재(sentient being)는 신념으로 산다는 것을 받아들여라. 그 반대라고 순진하고 허세부리는 주장을 하지만, 모든 사람은 순전히 신념체계로 살아간다. 오직 무엇에 대한 신념의 문제일 뿐이다. 신념은 환상, 지성, 이성, 과학, 진보, 정치 및 세속의 권력, 에고 만족, 쾌락, 부, 또는 희망(내일에 대한)에 대한 것일 수 있다.
July 3
봉헌은 열정보다 좀 더 중요한 온전성의 지표다. 가는 길(마음의 길 또는 가슴의 길)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의심이 실제적인지 아니면 단순한 저항의 형태인지를 확인하기 위해는 의심을 치울 필요가 있다. 영적 추구자는 내적 확실성의 안전함과 지지가 있어야 하고, 연구, 개인적인 탐구 및 조사의 결과로 생기는 강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가는 길은 발견과 내적경험에 의해 내재적으로 재확인되어야 한다. 옳은 길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며 펼쳐지고, 경험적으로 재확인해야 하는 대상이다.
July 4
간단히 말해서, 온전성은 강하고, 작동하고, 건설적이면서 성공적이다. 반면에 온전하지 않은 것은 실패한다. 따라서 온전성은 실질적이고, 그것의 부재는 약함과 붕괴로 이어진다.
July 5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사랑과 사랑임(lovingness)에 의해 우리가 둘러싸여 있음을 발견한다. 우리가 이익을 기대하지 않고 생명을 전적으로 지지할 때, 생명은 그 보답으로 우리를 지지한다. 우리가 동인으로써 이득을 포기할 때마다, 생명은 기대하지 않은 관대함으로 반응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인식할 때, 모든 몰두하는 영적 수행자의 삶에 기적적인 일은 나타난다.
July 6
좀 더 학식있는 영적 추구자는 '저 바깥'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데, 그 이유는 내면 조사가 항상 '저 바깥'의 인식과 근원이 실제로는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July 7
신의 전체성(Allness), 사랑(Love), 완전성(Totality)에 반하는 것은 없다. 우리가 신을 위해 온 삶과 죽음까지도 전적으로 내맡기겠다는 의도가 아닌 한, 깨달음(enlightenment)보다는 영적 정화(spiritual purification)가 우리 노력의 목표여야 한다.
July 8
문제들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현재 낮은) 단계의 의식 수준으로는 해결되지 않으며, 오직 다음 단계의 높은 의식 수준으로 상승할 때 해결할 수 있다.
July 9
개인의 의식 수준은 자신이 헌신하는 신조(principles)에 따라 결정된다. 의식의 진보를 유지하려면 신조는 흔들리지 않아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개인이 더 낮은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다.
July 10
진실로, 용서받는 사람이 아니라 용서하는 사람이 가장 큰 혜택을 본다.
July 11
에고의 자기애적 가치는 '옳음(right)'이 지혜를 따르는 것을 의미하든 또는 그것을 근거없는 것으로 거부하든 오직 '옳음'에만 정렬한다. 겸손함을 가진 진지한 탐구자(searcher)는 교육에도 불구하고, 마음만으로는 주관적 경험뿐만 아니라 객관적이고 입증가능한 기준에 의해 확인이 필요할 수 있는 진리를 알아내고 입증하는 방법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July 12
문 : 세상의 매력은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 가는 것이 정말로 안전합니까? 가끔 저는 단지 벗어나고 싶은데요.
답 : 매력은 세상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투사된 가치와 보상에 대한 기대, 에고 만족을 반영합니다. 사실상 기쁨은 내면으로부터 나오고 외부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쾌락은 가치있고 존중받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투사된 가치의 대부분은 상상에서 나오고, 가치는 욕망을 반영합니다. 실제로, 영적 성취보다 더 가치있는 다른 어떤 것은 없습니다.
July 13
우리가 용서로 미워하는 가해자를 기꺼이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줄 때, 곤경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July 14
정당화된 분노와 원한의 단물을 포기하고 용서를 선택하는 것은 그것과 관련된 모든 생각과 불만, 많은 합리화와 기억들을 차단한다.
July 15
에고는 영리하다. 에고는 개인적 자만심을 영적 자만심으로 대체한다. 그것은 흔들림없이 진행된다. 에고는 이해 능력 자체가 신으로부터의 영적 선물임을 각성하기보다는 영적 이해에 대한 개인적인 공로라고 생각한다.
July 16
문 : 어떤 기도가 도움이 되나요?
답 : 주님의 종, 신성한 사랑의 매개체, 신의 의지의 통로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세요. 길 안내와 신성의 도움을 구하고, 헌신을 통해 모든 개인의 의지를 내맡기세요. 신을 섬기는 일에 자신의 삶을 바치세요. 다른 모든 선택에 앞서 사랑과 평화를 선택하세요. 드러난 모든 것에서, 모든 생명을 위해 무조건적인 사랑과 연민의 목표에 헌신하고, 모든 판단을 신에게 내맡기세요.
July 17
신성에 대한 간청와 기도는 겸손함에 깊고도 깊은 내맡김에 의해 촉진된다. 겸손함은 에고/마음이 그것의 구조와 설계때문에, 내재적으로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즉 나타남으로부터 본질을 구별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July 18
용기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삶의 우여곡절을 처리하는 자발성을 의미한다. 이 자율의 수준에서, 우리는 삶의 기회를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처리할 수 있다. . . (용기의 수준에서는) 두려움이나 성격 결함에 직면하는 능력과 그것들에도 불구하고 성장시키는 능력이 있고, 진화의 낮은 단계에서 그런 것처럼 근심, 걱정이 자신의 노력을 허사로 만들지 못한다.
July 19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려는 자발성을 의미한다. 이것을 달성할 때 숨겨진 힘과 굴하지 않는 능력이 드러난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비개인적인 다른 많은 조건과 요인에 의존하는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의도와 노력으로 책임지는 것임을 각성함으로써 감소한다.
July 20
매 순간 우리는 정말로 천국 또는 지옥사이에서 선택을 한다. 이 모든 선택이 합해진 효과가 의식 수준과 카르마 그리고 영적 운명을 결정한다.
July 21
문 : 에고가 카르마의 근원인가요?
답 : 에고는 카르마의 위치와 저장소입니다. 에고와 카르마는 하나이며 같은 것임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July 22
용서 능력은 인간의 조건 그 자체에 내재된 한계를 정직한 겸손함으로 받아들이는데서 비롯된다. 그것은 결국 의식진화의 학습곡선에 불과하다.
July 23
연민은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모든 사람이 실제로 자신만의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음을 앎으로써 발생한다. 집착이 없으면, 세상이나 다른 사람의 관점을 바꾸려고 하거나, 관점의 불일치로 인해 그들이 틀렸다는 것으로 만들려는 압력이 더 이상 없다.
July 24
닫힌 마음의 어려움은 그것이 선천적으로 교만하다는 것이다.
July 25
만약 방해받지 않는다면, 인간의 정신은 창의적이고 독창적이다. 각 의식 수준에는 고유한 타고난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그에 따른 해결책도 있다. 과거를 취소하려는 욕망은 이해할 수 있지만 헛된 것이고, 현재의 기회를 보지 못하게 한다.
July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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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마음은 그것이 진화하고 있다는 것과 성장, 발전이 그 자체로 만족스럽고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안다. 성숙한다고 하는 것은 불확실성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왔고, 불확실성을 적당한 (삶의) 구성요소로 포함시켜 왔음을 의미한다. 불확실성은 발견으로 이끄는 반면, 회의론은 우리를 바보로 만든다.
July 27
자부심의 단점은 오만함과 거부다. 이러한 특성은 성장을 방해한다.
July 28
(영적) 진화라는 것은 우리의 삶을 기도/관상/명상/간청과 내맡김으로 바꾸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기도가 되고, 기도는 관상이 된다.
July 29
모든 친절, 배려, 용서 또는 사랑의 행위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July 30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보는 여행자와 유사하다. 그러나 여행자 앞에서 풍경이 펼쳐진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비유적 표현일 뿐이다. 펼쳐지는 것은 없고, 실제로 나타난 것도 없다. 단지 자각의 진행(progression of awareness)이 있을 뿐이다.
July 31
에고/마음은 삶의 경험에 대한 인식과 해석이 실제로 있는 것(real thing)이며, 따라서 사실이라고 추정하고 확신한다. 에고/마음은 다른 사람들이 같은 방식으로 보고 생각하고 느낀다고 투사함으로써 믿는다. 그리고 만약 타인들이 자신의 방식으로 하지 않으면 그들은 실수한 것이고 따라서 틀린 것이 되어 버린다. 이와같이, 인식은 구체화와 추정을 통해 에고/마음의 지배력을 강화한다.
August 1
문 : 우리는 어떻게 해야 세상과 가장 잘 관계하며 사는 것인가요?
답 : 그것 '안'에 있지만 '그것의'가 아니도록 존재하세요. 세상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님을 기억하세요. 집착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내면의 에고 위치성에 수반하는 습관적인 방식과 태도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August 2
의미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삶이 의미를 잃을 때, 흔히 자살이 뒤따른다. 삶이 의미를 잃을 때, 우리는 먼저 우울증에 빠지게 되고, 삶이 완전히 무의미해질 때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버린다. 힘(force)은 일시적인 목표를 가지고, 그 목표에 도달할 때 무의미한 공허함만이 남는다. 반면에 파워는 우리에게 끝없이 동기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우리의 삶을 만나는 모든 사람의 행복을 향상시키는데 바친다면, 우리의 삶은 결코 의미를 잃지 않을 수 있다.
August 3
세상이 전통적으로 '악'이라고 부르는 것의 많은 부분을 조사해보고 나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그것은 하나의 추상적 관념, 묘사, 꼬리표일 뿐, 악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에, 우리는 원시적, 유아적, 자기중심적이라고 묘사할 수 있는, 증오를 정당화하기 위한 부인, 투사, 피해망상이라는 심리적 기제에 의해 복잡하게 얽힌 행위를 보게 된다.
August 4
생각, 개념, 의견의 허영이라는 형태의 자만심이 바로 모든 무지의 기초다. 해결책은 근본적인 겸손함인데, 이 겸손함은 인식에 의한 지배를 무너뜨린다. 당신이 이미 알고 있다고 추정하기 보다는 진실이 드러나게 해달라고 요청하라.
August 5
진정한 성장과 (의식의) 진화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자질은 겸손함의 실천과 원칙이다. 자발적으로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무능함의 결과로 스스로에게 강요되는 것보다 훨씬 덜 고통스럽다. 우리 사회의 일부 지역에서 공적,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겸손함은 전문성, 지혜, 성숙함의 지표다. 진리는 겸손함의 기초가 되는 기반이자 궁극적인 실상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취약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겸손함은 마음이 오직 '무엇에 대해서만 알 수 있고', 나타난 것과 본질을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August 6
에고는 힘에 의존하고, 인간 영은 파워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자각은 당신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당신이 누구이고 당신이 된 것이 장기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August 7
정말로 나 자신은, 어떤 것도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기껏해야 마음은 오직 인상과 추정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삶은 오롯이 돌이켜보면 '이해가 된다.
August 8
유머는 삶의 사건에 거리를 두거나 재맥락화는 수단이다. 그것은 마음이 가벼워지고, '세상을 헐렁한 옷처럼 걸치는' 방법이다. 유머는 인간 삶 전체를 연민으로 이끌고, 전쟁터와 같은 삶에서 벗어나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선택지를 드러낸다.
August 9
유머는 성숙 과정에 중요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을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조소하는 법을 배우고, 그 결과 (에고의) 자기애적 방어력을 감소시킨다. '감정이 쉽게 상처받는 경향'은 에고의 자기중심성 때문이고, 그것은 사회적 피해망상의 한 형태다. 우리가 자신의 단점을 인정하고 웃는 법을 배울 때, 우리는 더 이상 경멸과 모욕에 취약하지 않게 된다.
August 10.
악의는 말 그대로 우리를 아프게 하고, 우리는 항상 자신의 보복의 희생자가 된다. (무의식적으로 하는) 은밀한 적대적 생각조차도 자신의 몸을 공격하고 질병을 일으킨다.
August 11
영적 가르침이 통합되기 위해서는 받아들임이 필요하다. 저항은 겸손함 결여와 자부심으로 인하여 '틀린' 것에 분노하는 에고로부터 나온다. 틀린 관점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대신에 더 나은 관점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좋다.
August 12
지혜로운 사람은 지성의 한계가 있음을 알고, 더 나아가 신념과 믿음이 반드시 지식을 대체해야만 한다는 것을 안다.
August 13
진전된 상태를 위해, 필요한 영적 정보는 가능하면 일찍 배워두고 그것이 필요할 때를 위해 저장해둬야 한다. 진전된 정보를 일찍 듣는 것의 가능한 단점은 그것을 알고 있다는 오만한 지성의 추정이다. 정보는 들은 그대로 보유하는 것이 더 좋다.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그것으로 존재한다'는 것인데, 그 시점에서 우리는 알지 못하고, 대신에 존재한다.
August 14
대체로 인간은 사랑이 하나의 감정으로, 당신이 얻는 어떤 것이고, 받을 자격이 있어야만 하며, 많이 줄수록 덜 가질 것이라고 믿는다. 진실은 그 정확히 그 반대다. 사랑임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의 태도다. 우리는 교만해지는 대신에 가진 것에 감사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그들이 우리의 삶과 편의에 기여하는 바를 인정한다. 사랑은 하나의 감정이 아니라, 존재하고 세상과 관계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August 15
사랑은 하나의 감정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다. 실제로 사랑은 자각의 상태,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 자신과 타인을 보는 하나의 방식이다. 신이나 자연, 심지어 다른 애완동물에 대한 사랑은 영적 영감의 문을 열어준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려는 마음은 이기심이 생기는 것을 막아준다. 우리가 사랑을 더 많이 줄수록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더 커진다. 하루종일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이 잘 지내기를 바라는 것은 좋은 연습의 시작이다. 사랑은 사랑임으로 성장하며, 그것은 점점 더 강렬해지고 비선택적이며 즐거워진다.
August 16
우리는 '어떤 것을 안다'는 마음의 환상을 통해 보아야 한다. 이것을 '겸손함'이라 하고 각성, 계시(revelation), 그리고 직관적 앎의 문을 여는 가치가 있다.
August 17
이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영적) 영감과 함께하는 강한 의도와 봉헌은 놀랍게도 성공을 가져올 수 있다. 이것은 자기-존중감과 자신감을 크게 증가시키는 용맹함과 불굴의 용기을 위한 내면의 능력을 드러낸다. 인생 고난의 대부분은 '화이트 너클링(공포의 순간)'에 의해서만 넘어설 수 있고, 그것은 자신감을 키운다.
August 18
자만심의 해독제는 '중요성이나 옳음, 앙갚음, 비난 탐닉, 또는 감탄 추구와 같은 위치성 대신에 겸손함과 온전성을 선택하는 것이다. 성취에 대한 모든 공로는 에고 대신에 내면의 신성의 현존인 신에게 주어진다. 그 결과, 성취는 취약한 자만심보다는 감사와 기쁨을 가져온다.
August 19
용기는 몰두와 지지의 온전성(integrity of alignment), 봉헌에서 나온다. 봉헌의 가치있는 특성은 궁극적으로 조용하지만, 지속적인 내면의 열정으로 힘을 얻는 더할나위 없는 행복이다. 주의깊은 목도(관찰)의 가치는 단지 에고 결점의 자각만으로도 그것을 해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내맡김과 신앙심깊은 요청에 의해, 신성의 의지는 작은 것에서 위대한 것으로 전환을 촉진한다. 왜냐하면 참나는 아주 쉽게 의도를 지지하고 강화하기 때문이다. 참나는 자기적 매력과 같은데, 그것에 의해서 개인의 의지는 점차적으로 내맡겨지고 저항은 약화된다. 따라서 (영적) 경로자체는 자기-충족적이고 만족스럽고 점진적인 보상을 드러낸다. 아무리 작은 것처럼 보여도, 각각의 단계는 똑같이 가치가 있다.
August 20
사랑은 실상(reality)의 가장자리이고 영(sprit)의 일체성(oneness)이자 본질이다. 사랑을 부인하는 것은 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August 21
사랑임은 세상과 관계맺는 하나의 방식이다. 사랑임은 겉보기에는 약하지만 실제로는 강력한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는 하나의 너그러운 태도다. 사랑임은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고, 그들의 하루를 밝혀주고 그들의 짐을 가볍게 해주는 하나의 소망이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단지 친절하고 칭찬의 말을 하는 것이 사랑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August 22
모든 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헌신이 될 때, 신성(Divinity)은 스스로를 드러낸다.
August 23
연민의 마음이 있을 때, 비난하기보다는 이해하려는 마음이 생겨난다.
August 24
후회와 상실의 근원은 자신과 타인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다. 형상의 세계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결국 모든 것은 신의 의지에 맡겨져야 한다. 내맡김의 성공을 위해서는, 신의 의지가 개인의 소망에 맞게 개별화되어 있지 않음을 알 필요가 있다. 신의 의지는 실제로 전체 우주의 카르마적 설계다. 신의 의지에 내맡기는 것은 궁극적 실상(Ultimate Reality)외에는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진리에 항복하는 것이다. 형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사라진다. 상실은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기회다.
August 25
원함이나 애착이 거의없는 영적으로 진화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슬픔에 면역이 되어 있는데, 그것은 행복의 근원에 대한 경험이 내부에서 시작되고 외부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행복의 원천이 에고기제를 통해 획득된 것이면, 그것은 상실에 대해 안전한 절대적 실상 자체보다는 이미지, 믿음체계, 투사된 가치에 기반을 둔 것이다. 대상, 특성 또는 관계는 집착기제와 그에 따른 가치의 투사때문에 과대 평가된다.
August 26
자신이 주님의 종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치고, 신의 의지가 무엇이지 묻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해답은 만들어내야 할 필요없이 스스로 드러낸다.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은 단순히 의도를 의미한다.
August 27
우리는 사랑과 평화가 '무의식 안에 숨겨진 확고한 위치성에 의지하여 스스로를 방어하는 에고'에게 가장 큰 위협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August 28
사랑은 개인의 의지를 신에게 내맡기고, 선물인 인간 삶의 전체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재평가할 기회다.
Autust 29.
겸손함은 단순한 태도가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하나의 실상이다. 내적 정직함과 함께, 헌신자는 단지 인간임(being human)의 타고난 한계를 알 필요가 있다.
August 30
영적 순수함은 진정한 헌신의 결과인 자기-정직성의 귀결이다. 신의 종이 된다는 것은 신성의 안내에 맞춰 (자신의 삶을) 조정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작은 나 또는 세상에 영합하기보다는 참나를 찾는 길로 인도한다.
August 31
헌신 덕분에, 비협조적인 에고의 일시적인 감정적 보상의 유혹을 초월하는데 필요한, 자기-정직성과 확신을 야기하는 내적 온전성에 정렬한다.
September 1
헌신은 가슴(심장)에서 나온다. 왜냐하면 때때로 가슴의 파워와 신성의 사랑을 통해서만 장애물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
September 2
세상 사람들이 참으로 바라는 것은 가장 높은 수준에서 자기가 진정 누구인가를 알고, 저마다 동일한 참나가 모든 사람의 내면에 비춰내는 것을 보고, 분리된 느낌을 치유하고 평화 감정을 불러오는 것이다.
September 3
평화라는 용어가 비록 우리 사회에서 인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용어에 대한 각종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평화는 절대적으로 하나의 선택이자 결단이다. 삶에서 겉으로 보기에 불평등해 보이는 것에 일일이 반응하는 대신에, 너그럽게 눈감아 주겠다는 결단은 분명 하나의 선택이다.
September 4
기쁨과 행복의 진정한 원천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존재를 각성하는 것이다. 기쁨의 원천은 그것이 비록 어떤 외부사건 또는 획득에 의해 발생되더라도 항상 내면에서 나온다. 어느 한순간에도 문제와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불행은 지금의 현실을 건너뛰어 과거나 먼 미래의 이야기를 창조하는데서 생긴다. 그것은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에 실상이 아니다.
September 5
기쁨은 어떤 외부 근원에서가 아니라 존재의 매 순간 내면에서 발생한다.
September 6
내면의 평화는 매력이나 혐오를 내맡김으로부터 나온다. 가치있다고 인식하는 것는 기본적으로 원함과 원하지 않음의 투사다. 원하는 것이 적을수록, 삶의 상황(case)과 만족도는 높아진다.
September 7
실제로 두려움 자체는 신의 현존의 자각을 방해한다. 오직 두려움을 버릴 때, 저항하는 에고의 깊은 내맡김은 이해를 넘어선 평화를 드러낸다.
September 8
파워는 온전성과 자신의 행동, 선택 및 결단의 귀결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수용하는데서 나온다. 모든 선택은 고유한 위험이 있으며, 그렇지 않은 척하는 것은 온전성이 결여된 것이다. 사실 그것은 이득을 위한 게임 행위다.
September 9
에고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한가지 기제는 고통스러운 정보는 멀리하고, 그것을 세상과 다른 사람들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September 10
내면의 정직성에 몰두해보면, 에고 반응의 토대가 바로 에고로부터 파생되는 쾌락이라는 것이 명백해질 것이다. 자기연민, 분노, 폭력, 증오, 교만, 죄책감, 두려움 등의 보상인 내적 만족이 있다. 병적인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이러한 내적 쾌락은 모든 감정에 활력을 불어넣고 전파한다. 이러한 에고의 영향력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앞으로 나아가고, 미심쩍은 내적 은밀한 쾌락을 신에게 내맡기고, 오직 기쁨과 행복을 위해 신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September 11
세상의 사건들에 대한 입장을 확인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내면의 훈련과 내맡기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September 12
세상의 사건들은 우리의 인식에 기초하여 반응을 촉발한다. 세상은 인식의 표현, 환상, 위치성의 투사를 초대하는 하나의 거대한 극장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텔레비전을 꺼버리고 그것을 피하거나 또는 그것을 가르침의 중요한 도구로 대할 수 있다.
September 13
사회에 의해 프로그램되는 것에 대한 안전장치는 다음과 같다
1) 감정과 거리두기 : 그럼으로써 모든 정보는 잠정적인 것으로 간주됨.
2) 자각 : 일반적인 정신화로는 본질로부터 인식을 구별할 수 없다는 자각
3) 알기 : 늑대는 종종 양의 탈을 쓰고 숨어있다는 것을 아는 것
이러한 믿음의 보류는 '세상을 헐렁한 옷처럼 입어라'라는 기본 금언을 실제로 적용한 것이다. '이 세계에 있지만 그 세계에 속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주의 방식(mode of attention)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에서 자발적인 상호작용과 기능을 여전히 허용한다.
September 14
개인적으로 자기-비판적이거나, 현재보다 더 먼 길을 가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적 진화는 불규칙적이어서, 때로는 산발적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고, 어떤 때는 정지된 것처럼 보인다. 죄책감은 자기애적 방종임을 각성하라.
September 15
용서는 겸손하려는 자발성과 인간의 불완전성 및 실수를 범하기 쉽다는 것의 받아들임이 결합될 때, 특히 중요한 도구다. 이기적 선택의 포기는 희생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영적 의도를 가지고 다시 재맥락화할 때, 그것은 숨겨진 선물임이 드러난다.
September 16
일단 사랑을 주고자 하면, 우리는 사랑에 둘러싸여 있고, 단지 그것에 접근하는 방법을 몰랐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랑은 실제로 어디에나 존재하며, 사랑의 현존은 오직 각성될 필요가 있을 뿐이다.
September 17
세상과 삶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전적으로 내면의 믿음과 위치성의 결과다. 신에 대한 사랑과 존경에서 이러한 모든 편견을 내맡기려는 자발성이 생겨나고, 뒤따르는 겸손함은 참나의 드러남인 실상의 광휘로 가는 문을 열어준다. 사랑은 자각으로 이끄는 거대한 촉매제다. 결국 신념은 확신으로 바뀌고, 그러므로 신(God)은 신을 찾는 사람에 의해만 발견된다고 한다.
September 18
의식 연구는 죽음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다. 생명 자체는 분리할 수 없는 의식의 영원한 근원에 의해 지지된다. 선형적이고, 공간 한정적이며, 시간 제한적인 것은 영원하면서 비선형적인 것 덕분에 존재하게 된다.
September 19
모든 두려움의 기저에는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래서 가능한 빨리 영적 작업에서 이러한 두려움을 비활성화함으로써 많은 내면의 작업을 건너뛸 수 있다. 육체적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동물적 본능과 에고 자체와 사랑에 빠져있는 에고의 나르시시즘에서 비롯된다. 죽음은 경험의 종말을 의미하고, 경험은 생명과 동일시된다. 이처럼, 에고는 선형적이고 친숙한 것에 집착한다.
September 20
위치성 내맡김의 귀결로서 인식의 이원성이 중단되기 때문에, 사랑으로써 신의 현존은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래서 사랑은 선형과 비선형 영역사이의 출입구다. 그것은 신을 발견하는 웅대한 길이다.
September 21
행복의 느낌을 자세히 보면, 그것이 사실상 내면에 있음이 분명해진다. 비록 (행복의) 방아쇠는 자신의 외부에서 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감각은 완전히 내면의 기쁜 감정이다. 행복의 근원은 내면에 있으며, 마음이 원하는 결과를 경험하는 우호적인 상황하에서 행복은 방출된다. 내면 조사를 통해, 사건은 단지 타고난 능력을 촉발시키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행복의 근원이 실제로 자신의 내면에 있기 때문에 잃어버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은 감소한다.
September 22
신을 위해 사랑을 선택하는 것은 기도와 예배에 의해 신의 사랑을 활성화한다.
September 23
세상이 잡초처럼 무시하는 것도 꽃과 같이 아름다운 것이다. 모든 자연의 살아있는 조각 설계는 동등하며, 분류가 없고, 모든 것은 비슷한 장점 또는 가치가 있음을 각성한다. 모든 것은 창조로서 신성의 표현이고, 모든 것은 똑같이 신성하고 거룩하다.
September 24
욕망과 집착은 영적 수행자의 진보를 가로막는다. 그리고 욕망과 집착이 생길 때, 그것이 상징하는 것은 신에게 내맡겨질 수 있다.
September 25
욕망과 갈망으로 이끄는 모든 환상은 부풀려진 가치와 매력을 야기하는, 욕망의 대상이 과장된 중요성, 의미와 함께 부풀려진다. 일단 욕망의 대상이 획득되면, 마법의 오라는 잃어버리고 그 매혹적인 이미지는 이제 욕망의 다음 대상에 투사된다.
September 26
신의 현존의 발견은 두려움때문이 아니라 두려움에 의해 촉발된 내맡김 덕분이다.
September 27
집착은 집착이 무엇인지 또는 무엇에 관한 것인지와 관계없이, 그것에 의해 상실의 고통이 발생하는 과정이다. 그 집착은 내부 또는 외부에 관한 것인지, 대상, 관계, 사회적 특성 또는 물리적 생명의 측면에 관한 것인지와도 관계없다. 에고는 가치, 믿음체계 및 프로그램들의 정교한 연결망을 통해 스스로를 영속시킨다. 따라서, 에고는 장식되고 정교해짐에 따라 더 많은 에너지를 얻고, 때로는 고착화되면서 요구(needs)가 발생한다. 고통의 근원은 믿음체계 자체가 아니라 고통에 대한 집착과 가상적 가치의 팽창이다. 집착의 내적 처리과정은 의지의 훈련(exercise of the will)에 의존하며, 의지의 훈련은 홀로 내맡김의 과정에 의해 집착 기제를 해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실제로 하나의 분리(liberation)일지라도, 주관적으로 경험되거나 희생으로써 맥락화될 수도 있다. 상실의 감정적 고통은 잃어버린 '무엇'으로부터가 아니라 집착 그 자체에서 생겨난다.
September 28
세상과 그 안의 모든 것은 덧없고 일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에 집착하는 것은 고통을 불러온다.
September 29
유혹, 구애, 호감 및 매혹은 모두 나타난 것과 추정(appearance and presumptions)과 관련된 투사다. 이런 것들은 이득의 프로그램된 공상(fantasies)과 연관되어 있다. 투사되면서 과장된 가치의 만족이 환상의 세계를 구성한다.
September 30
의미는 맥락에 의해 정의되며, 맥락이 동기를 결정하고 동기야말로 영적 가치를 확고하게 한다. 자신의 모든 행위를 삶에 대한 사랑의 봉사로 바치는 것은 행위를 성스럽게 하고, 이기적 동기를 이타적 선물로 바꾸는 일이다. 우리는 탁월함을 '가장 높은 기준을 향한 헌신'으로 정의한다. 그러면 모든 행위는 깨끗하고 순수한 노력으로 신을 찬미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모든 육체적 일과 노동은 우리가 세상에 공헌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가장 작은 일일지라도 공공선에 봉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러한 관점으로 본다면 노동은 고상한 일이 된다.
October 1
갈등은 관찰되는 그것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마음에 존재하는 것이다.
October 2
삶이 어떻게 맥락화되는지에 따라 기쁨이나 분노가 생길 수 있고, 인색함은 관대함으로 대체될 수 있다. 자신의 노력으로 다른 사람들이 혜택을 본다면, 그야말로 좋은 것이다.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함으로써 조화와 아름다움에 기여할 기회를 얻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 영(human sprit)을 지원한다. 삶에 아무댓가 없이 주어지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되돌아 오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그 생명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물위의 잔물결처럼 모든 선물은 주는 사람(the giver)에게 되돌아 온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긍정하는 것은 실제로 우리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다.
October 3
맹세는 오직 신, 신과의 관계, 순수함과 성스러움으로 인한 것임을 기억하라. 어떤 조직도 신의 특별한 총애를 받지 않으며, 모든 조직은 에고 전제와 환상과 같은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October 4
다시 한번 강조하는데, 진실로 신성한 것과 신만이 평화와 사랑을 가져온다.
October 5
만약 사랑과 신에 대한 모든 장애물을 내맡기려는 마음이 생긴다면, 신은 이미 자발성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헌신에 이를 때, 에고를 해체하고 길을 밝혀주는 상당히 진보된 현존(advanced presence)이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영적 진보와 발견은 기쁨을 수반하며, 이것은 참나의 광휘이고, 빠르게 내맡겨진 에고의 위치성을 대체한다. 작은 나(the self)가 세상이나 에고를 찾는 것을 멈출 때, 영적 영감은 그 과정에서 매 단계마다 강도가 증가한다. 그리고 그것의 근원이 줄곳 참나(the Self)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October 6
사랑의 한계는 개인의 인식을 거친 특성과 차이(qualities and differences)로부터 비롯된다. 내면의 자기-정직성과 조사를 통해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남아있는 판단 또는 이전 경험의 충격때문에 이러한 한계지점이 드러난다. 사랑을 무조건적으로 만드는 핵심 열쇠는 과거의 의구심이나 경험, 그리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보는 것을 취소하기 위한 용서하려는 자발성(willingness of forgiveness)이다.
October 7
영적 노력에 대한 저항의 근원은 에고 자체의 자기애적 신념(narcissistic core)이며, 에고는 자신의 존재, 결정 및 행동에 대한 통치권과 저작권을 은밀하게 주장한다. 따라서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익이나 통제에 대한 의도와 욕망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분출된다. 이러한 패턴은 단지 에고가 허영심, 탐욕, 증오, 교만, 분노, 부러움 등을 나타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감소될 수 있다. 이것들은 오랜 세월 에고의 진화적 발달과정에서 에고에게 학습된 부착물이다. 따라서, 이러한 원시적 감정은, 단지 작은 나의 흥미에서 참나의 흥미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흥미를 잃고 폐기하는 것만이 필요하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October 8
내맡길 필요가 있는 것은 욕망의 대상들이 아니라, 욕망의 특성 및 가치의 마법같은 팽창과 함께 대상들에 스며드는 것이다.
October 9
세상에의 헌신(world to devotion)에서 신과 영에 대한 헌신(devotion to God and the spirit)으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October 10
물질과 에너지처럼, 생명은 파괴될 수도 없고 다만 형태만 바꿀 수 있다. 따라서 죽음은 사실 그저 육체를 떠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정체성이라는 감각(sense of identity)은 중단되지 않는다. '나'(작은 나)의 상태는 변함없어서 육체적 종결로써 분리된 후에도 지속된다. 그 말은, 천국 또는 다른 영역으로 옮겨가거나 환생하기를 선택하는 '누군가(who)'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October 11
마치 돈 문제들이 수입보다 더 빨리 지출함으로써 생기는 것처럼, 과도한 욕망은 결핍의 환상을 창조한다.
October 10
영적노력을 위한 필수적 기본원칙은 헌신, 겸손함, 불굴의 용기, 내맡기려는 자발성, 신에 대한 신념과 신뢰같은 유서깊은 것이다. 이것들은 봉헌, 기도, 그리고 영적 의지와 같은 것을 실행함에 의한 신의 은총의 간청과 기원에 의해 강화된다. . . 또한 이것들은 의도에 의해 힘이 생기고, 이는 정렬과 통합을 야기하고 그에 따라 기본적인 원리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헌신은 (영적) 의지에 의한 승인의 귀결이다. 신에 대한 완전하고 전체적인 내맡김은 그 길의 어느 지점에서든 그 과정을 필요없게 만들 수 있다.
October 13
영적 의도에 자신의 삶을 정렬시키는 것은 영적 의도의 의미와 중요성을 확장하는 것이다. 에고/몸/마음의 수명은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반면, 영의 생명은 영원하다. 그리고 그것의 중요성은 에고 만족의 일시적인 이득을 퇴색하게 한다. 그 다음에 작은 것은 정렬, 몰두 및 동의에 의해 더 큰 것에 내맡겨진다. 이것은 강요하기보다는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저항이 줄어든다.
October 14
우리가 에고 고집의 근원에 대한 발견에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홀딱 빠져있다는 놀랍고 결정적인 발견을 하게 된다.
October 15
에고는 에고의 위치성과 밀접하게 연결된 감정에 집착한다. 에고는 '다른 선택은 없다'고 생각하는 경항이 있다. '신에게 내맡긴다'는 의미는 위안과 스릴을 위한 에고찾기를 멈추고, 평화의 끝없고 고요한 기쁨을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마음 자체의 근본적이면서 영원히 존재하는 빛 비춤(illumination)의 근원을 찾는 것이다.
October 16
진정한 행복의 근원은 내면으로부터 나오기때문에, 욕망은 충족될 수 없다. 욕망은 외부에 대한 끊임없는 특별함의 투사이며, 따라서 환상을 추구하는 것이다. 하나의 욕망이 성취되고 만족되면, 그 초점은 줄줄이 연결되어 끝없는 행진을 하며 욕망의 다음 대상으로 이동한다.
October 17
대부분 두려움의 공통적인 요소는 행복이 외부에 의존하고 있어서 취약하다는 환상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취약함의 환상을 극복하는 것은 큰 안도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것에 대한 교정을 가져온다. 인생은 끊임없는 조심성 대신에, 만족스러움과 느긋하면서 자신감있는 태도로 가득차게 된다.
October 18
수치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자만심에 기초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된다. 지위의 상실로 인한 고통은 에고가 자기-존중감에 대한 버팀목으로 자만심에 의존하는 정도에 비례한다. 자기애적 자만심이 없다면, 실수나 부정적인 피드백은 단지 후회로만 경험될 것이고, 인간의 나약함과 오류를 범하기 쉬운 특성으로 간주될 것이다. 실수는 겸손함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October 19
상실의 모든 형태는 에고와 에고의 생존 기제에게는 하나의 대립물(confrontation)이다. 인간 삶의 모든 측면은 일시적이므로, 어떤 측면에 집착하는 것은 결국 비탄과 상실을 가져온다. 그러나, 각각의 사건은 영원히 존재하고 불변하는 생명의 근원을 위한 내면 찾기의 기회이며, 시간의 손실이나 파괴의 대상이 아니다.
October 20
죄책감의 해소와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더 큰 연민은, 개인이 의지적으로 에고의 구조를 창조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에고 또한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각성함으로써 일어난다. 인간의 조건은 기본적으로 '부여된' 카르마다. 그것은 비난같은 것없이 연민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따라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인류는 감정적 본능과 영적 깨어남(spiritual awaking)의 균형을 이루는 힘(즉, 동물/천사 갈등)사이의 긴장영역에서 살고 있다.
October 21
더 높은 진리의 근원에서는 신이 죄책감에 의해 영향을 받거나 누그러진다는 조짐이 없다. 역사의 위대한 현인들은 죄책감을 말하지 않고 대신에 '죄'는 무지로 인한 것뿐이라고 말한다.
October 22
비이원성의 실상에서는 특권도, 이득도, 손실도, 지위도 없다. 바다의 코르크 마개처럼, 각각의 영은 어떤 외부의 힘이나 호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에 따라 의식의 바다에서 자신의 수준에 맞게 올라가거나 떨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빛에 이끌리고 어떤 사람들은 어둠을 추구하지만, 그것은 모두 신성한 자유와 평등 덕분에 그 자체로 존재한다.
October 23
평범한 인간의 경험에서는 신의 사랑을 경험하는 기쁨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그 현존을 각성하기 위해 큰 희생도, 너무 많은 노력도 필요없다.
October 24
신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직 사랑 자체의 본성을 알 필요가 있다. 진정으로 사랑을 안다는 것은 신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고, 신을 안다는 것은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다.
October 25
참나(the Self)가 맥락이고, 반대로 작은 나(the self)는 내용'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이미 큰 도약이다. 순진한 (영적) 추구자는 단지 내용을 계속 편집할 뿐이다.
October 26
참나는 비옷을 챙기거나 임대료내는 것을 잊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주는 내면의 할머니와 같다. 신은 불길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다. 두려움은 단지 상상에서 나올 뿐이다.
October 27.
신성의 타고난 특성은 자비와 연민이다. 찾아야 하는 은혜(favors)는 없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주어진 것으로 단지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October 28
우리는 사랑, 헌신 및 이타적인 봉사로 자신의 삶과 노력을 신성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선물로 만든다. 그것이 신에게로 가는 가슴의 길(way of the heart)이다. 그렇게 하면, 가정의 삶(domestic life)은 하나의 예배가 되고 모든 사람에게 기쁨의 근원이 된다. 우리가 타인을 고양시키려 할 때, 그 과정에서 모든 사람은 고양된다. 그러므로 선물하는 것은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보상적인 것이다. 모든 친절한 생각이나 미소는 그래서 영적인 것이며,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세상에 유익하다.
October 29
영적 헌신은 끊임없는 주의깊은 자각을 통합하는 지속적인 내면의 생활방식이다. 외적인 사건은 일시적인 반면, 의식의 내적 특성은 영원하다. 내면 작업은 끊임없는 학습과정이고, 그것에 의한 통찰력의 발견과 펼쳐짐속에서 기쁨과 만족감이 있다.
October 30
두려움의 종식은 행복의 근원이 내면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결과다. 행복의 원천은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지속되는 자기 존재의 기쁨임을 인정하는데서 나온다. 이것은 자기 자신, 세상 및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기대와 요구를 포기한 결과다. 내가 이기거나 원하는 것을 얻을 때에만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걱정, 불안, 불행을 보증하는 것이다.
October 31
두려움은 인간조건에 내재된 특성을 기품있게 받아들임으로써 제거되며, 이는 자신의 불편함을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공유한다는 위안을 주는 자각을 가져다준다. 그 자각은 모든 생명에 대한 치유적 연민(healing compassion)을 야기한다. 사랑이 되는 것은 사랑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 종지부를 찍게 하는데, 왜냐하면 사랑임은 그것이 어디를 가든지 사랑을 낳기 때문이다.
November 1
진정으로 신의 모든 것은 평화, 조화 및 사랑을 가져오고, 어떤 형태의 부정성도 없다. 영적으로 자각한 사람은 자신이 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하는데, 왜냐하면 내적 진리가 바로 스승이기 때문이다.
November 2
신성은 자신을 알고 있으므로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곧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고서도 기쁨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내면의) 저항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November 3
깨달음은 얻어야 하는 하나의 조건이 아니다. 참나는 이미 자신의 실상이기 때문에 그것은 단지 내맡김되어야 하는 확실성이다. 우리를 영적 정보로 이끄는 것이 바로 참나다.
November 4
실상에는 사건도 없고, 시작이나 끝도 없다. 배경은 조용하고 고요하며, (스스로 각색한) 영화(movie)에 방해받지 않는다. 실상은 맥락이지 내용이 아니다. 삶의 일체성(oneness)은 수많은 인식으로 나타난다. 세상의 모습을 실제처럼 만드는 것은 참나 광휘의 투사다. 영화 자체는 인식으로써의 내재적 실상이 아니다. 진짜임 감각(sense of realness)의 실제 장소는 완전하게 주관성으로써 의식 내에 있다. 비록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실상으로써 어떤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오직 우리의 내적인 주관성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다.
November 5
근본적인 실상(radical Reality)은 어떤 것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신을 아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November 6
신에게 완전히 내맡기면 진리가 베일을 벗고, 어떤 것도 숨지 못한다. 오직 에고만이 눈이 멀고, 실상은 마음 너머에 있다. 의식은 무(Nothing)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는 그것이 전부라는 유일한 실상을 부정하는데, 무한하고 영원한 전부는 존재 자체에서 발생한다.
November 7
각성(Realization)은 '이익'이나 성취가 아니며, 선함(being good)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어떤 것도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어린 시절의 개념이다. 신은 불변이며, 호의를 베푼다고 조종되거나 흥정이나 칭찬에 의해 유혹될 수 없다. 예배는 몰두와 영감을 강화함으로써 예배자에게 유익하다. 신은 고요하고 침묵하며 움직임이 없다.
November 8
만약 당신이 어떤 것(something)이라면, 그것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각성하라. 실상은 단순성의 궁극이다.
November 9
영적 에고의 발달은 영적 진보가 개개인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신의 은총의 결과라는 사실을 각성함으로써 피할 수 있다.
November 10
에고는 종종 조금씩 시도하는 것(piecemeal fashion)만으로도 무너진다. 일단 에고가 '진정한 나'라는 믿음이 약화되면, 에고의 해체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충성과 맹세가 에고에서 궁극적인 신의 실상으로 옮겨질 때, 틈은 만들어진다. 신성한 영(Holy Spirit)으로 대표되는 신의 은총은 그 문틈으로 흘러들어온다.
November 11
에고/마음은 세상을 경험하지 않고, 오직 세상에 대한 자신의 인식일뿐이라는 것을 항상 마음에 새겨두는 것이 좋다.
November 12
에고는 고통과 자만심, 분노, 욕망, 죄책감, 수치심 및 슬픔의 모든 부정직한 수준으로부터 암울한 쾌락과 만족감을 얻는다. 고통의 은밀한 쾌락은 중독성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평생을 바치고, 다른 사람들도 이를 따르도록 격려한다. 이러한 메카니즘을 멈추기 위해서는 보상의 쾌락을 확인하고, 기꺼이 신에게 내맡겨야 한다. 수치심 수준에서, 에고는 특히 '희생자' 게임의 비밀인 에고 계략에 대한 의식적인 자각을 차단한다.
November 13
우리는 우리가 한 말이나 행동이 아니라, 우리가 된 것의 귀결로 세상을 바꾼다. 따라서, 모든 영적 추구자는 세상을 섬기는 것이다.
November 14
갈등에서 벗어나는 길은 부정적인 것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대신에 긍정적인 것을 선택하고 채택하는 것이다. 우리 삶의 미션이 판단보다는 이해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가질 때, 도덕적 딜레마는 자동적으로 해결된다.
November 15
모든 사람은 자연이라는 삶에 노출될 뿐만 아니라 사회라고 부르는 인간 상호작용에 노출된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비개인적이며, 삶의 우여곡절은 불가피하고 피할 수 없다. 이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관점에 따라서 도전이 될 수도 있고, 암울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위치성이 없다면, 삶은 고요하고 흥미롭게 경험된다. 이러한 관점은 자기연민이나 비통함보다는 성장과 <바라건대> 지혜를 촉진한다.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선택한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우리가 행복할지 또는 실망할지를 결정하지 않는다. 의도성/위치성의 내맡김은 모든 상황에서 평화를 불러온다.
November 16
영적으로 진화하기 위한 노력은 우리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실제로 파워 자체의 본성때문에, 내면으로부터 모든 인류는 고양된다. 파워는 방출하고 공유된다. 반면에 힘은 제한적이고 자기패배적이며 덧없다. 모든 집단은 매번의 친절과 사랑스러운 생각, 말, 행위에 의해 잠재의식적으로 미묘하게 영향을 받는다. 모든 용서는 모든 사람에게 유익하다. 우주는 모든 행동을 기록, 저장하고 동일하게 돌려준다. 카르마는 실제로 우주 자체의 타고난 구조와 기능때문에 바로 우주의 본성이다. 우주에서 시간은 영겁으로 측정된다.
November 17
장애물을 뚫고 통과하는 영성의 과정은 때때로 고통스러워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단지 과도기적 과정일 뿐이다. 실수는 다시 나타나고 더 높은 이해로 재맥락화된다. 만약 습관적인 반응이 진정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인류가 물려받은 유산의 본질이라는 것을 안다면 이 과정은 단축되고 덜 고통스럽다.
November 18
영적 노력의 기쁨의 원천은 일 자체에서 비롯되며 결과나 목표의 달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내면의 큰 기쁨이 있다. 예를 들어, 진보에 수반되는 내면의 쾌락이 있는 것이다. 분노를 평화로운 수용으로 대체하는 것은 그 자체로 보상이다. 자신과 타인에 대한 관점에서 진보적인 변화가 있다. 이런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 삶의 이야기는 좀 더 연민적인 이해로 재해석될 수 있다.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모든 친절함은 영원하다.
November 19
평균적인 사람의 정신은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는 프로그램된 신념체계의 막에 의해 둘러쌓여 있다. 순진함과 인과관계의 원리에 대한 믿음에서는, 추정된 원인과 그 해결책을 밖에서 찾게 된다. 영성의 성숙함과 지혜가 있으면, 탐구는 직접적으로 내면으로 향하게 되고, 결국 근원과 해결책이 있는 장소가 발견된다.
November 20
우리가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오직 자신의 동기만 바꾸면 된다. 자신의 실제 동기를 지속적으로 살펴보면 위치성과 이익대 봉사 또는 사랑대 탐욕과 같은 상반되는 쌍을 불러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그것들이 가시화되고 영적 작업에 사용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그것들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November 21
영적 실상은 세상이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기쁨과 만족의 원천이다. 그것은 무한하고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항상 사용할 수 있다. 우리는 파도의 뒷면(과거) 또는 파도의 앞면(미래) 대신에, 현재 순간의 물마루에 사는 법을 배우기 때문에 실제로 더 흥미진진하다. 과거의 포로가 되거나 미래의 기대를 갖는 것보다는, 이 순간의 흥미진진한 칼날에 사는 것이 더 큰 자유가 있는 삶이다.
November 22
만약 삶의 목표가 존재의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면, 영적 작업을 통해, 우리는 이미 고통의 주요 원인에서 벗어난 것이다. 근원적인 현재의 정지 프레임에서는, 반응하거나 편집할 삶의 이야기가 없다. '마음 집중(one-pointedness)'과 함께하면, 모든 것은 논평이나 묘사없이 단지 '있는 그대로 일뿐'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November 23
신에게로 가는 시간표나 정해진 길은 없다. 비록 각 개인의 길이 고유하더라도, 덮혀진 지형은 모두에게 비교적 일반적이다. (신에게로 가는) 작업은 인간 에고의 구조에 내재된 인류의 공통된 결점을 극복하고 초월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 개인적이고, 반면에 에고 자체는 비개인적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에고는 인간임(human being)과 함께 유전되었다. 자세한 것은 과거 카르마에 따라 다르다.
November 24
마음이 말을 멈출 때, 우리는 자신이 곧 생명임을 자각하게 된다. 우리는 겉에 있기보다는 생명 안에 담겨져 있다고 이야기한다. 역설적으로, 이것은 완전한 참여를 가능하게 한다. 에고 중심성이 감소할 때, 자유의 기쁨과 생명의 순수한 흐름(sheer flow)이 우리를 완전한 내맡김으로 밀어 넣는다. 그러면 우리는 삶에 대한 반응을 멈추고, 고요함과 함께 즐길 수 있게 된다.
November 25
우리는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을 공경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자신과 타인의 인간성을 공경하며, 결국에는 신성 의지를 받아들임으로써 드러난 모든 것에서 모든 생명을 존중하게 된다. 에고의 내맡김과 함께, 영(sprit)은 존재의 신성함을 자각하게 된다.
November 26
영적 진화는 장애물을 제거한 결과로 발생하는 것이지 새로운 것을 얻는 것이 아니다. 헌신은 마음의 허영심과 들러 붙어있는 환상의 내맡김을 가능하게 하고, 그래서 마음은 점진적으로 더 자유로워지고 진리의 빛에 문을 연다.
November 27
매우 높은 상태에서는 한 순간이 삶의 방향뿐만 아니라 개인의 목표와 가치도 완전히 바꿀 수도 있다. 과거의 개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그 경험을 통해 새로운 사람이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헌신적인 영적 여정에서 힘들게 얻은 진보를 통하는 이것이 바로 영적 진화의 메커니즘이다.
November 28
경험적으로 볼 때, 죄책감은 에고의 받침대가 제거될때까지는 작동하는 하나의 실상이다. 영적 추구자는 때때로 새롭게 발견한 영적 위치에서 과거의 행동을 비판적으로 뒤돌아 본다. 모든 자기-조사(영적 재고조사)는 과거의 오류가 다른 맥락에서 발생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연민과 함께 행해져야 한다. 죄책감의 가장 좋은 해결책은 자신을 신과 동료 인간에게 재봉헌하고, 작은 나(self)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다.
November 29
죄책감에 빠지는 것은 에고에게 먹이를 주는 것이며 하나의 방종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내맡기려는 자발성이 있어야 한다.
November 30
(영적) 진화가 단계적으로 그 자체를 표현하는 만큼,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멀리 갈 것이다. 우리가 이런 단순한 사실을 볼 때, 용서와 연민은 분노, 두려움, 미움 또는 비난을 대체한다. 다른 사람을 기꺼이 용서하려는 자발성은 자기-용서와 받아들임에 대한 우리 자신의 능력을 반영한다.
December 1
문 : 실행가능한 목표는 무엇인가요?
답 : 영적 진리를 단순히 따르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확인하고, 그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더 큰 행복과 두려움, 죄책감, 다른 부정적인 감정의 감소를 야기하는 발견이 펼쳐지는 과정입니다. 그 동기는 외부세계와 무관한 내면 발견, 영적 진화, 잠재력의 실현입니다. 삶은 단순히 반복되기보다는 진보합니다. 모든 경험은 동등한 가치를 가지며 타고난 즐거움이므로, 인생은 즐거움과 불유쾌함의 끝없는 반복을 멈춥니다. 내면 진보와 함께 맥락은 확장되고, 중요성과 의미의 큰 자각이 생기고, 그 결과 진화의 잠재력은 충족됩니다.
December 2
인간의 삶은 영적 진화를 위한 최대한의 기회를 제공한다. (에고의) 인식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적/정치적/이상적 갈등을 평화와 행복의 장애물로 본다. 반면에 영적 참나는 바로 그 세계에서 완전함을 본다.
December 3
에고의 보상이 거부되고 내맡겨짐에 따라 에고의 정신학습 장악력과 영적 경험은 진보하고, 그에 따라 의심의 잔여물은 점진적으로 포기된다. 결과적으로 믿음은 경험적 지식으로 대체된다. 헌신의 깊이와 강도가 증가하고 결국 다른 모든 세속적 활동과 흥미를 대신하고 퇴색될 것이다.
December 4
영적 작업과 봉헌의 기본적인 목적은 에고의 타고난 진화적 한계를 초월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에고/자기의 모든 한계를 우회하는 의식 자체의 원초적 능력(nascent capacity)에 접속하고 개발하는 것이다. 그러면 진리는 신성의 은총 덕분에 저절로 나타난다. 신성은 때가 오면(God's time) 신을 청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드러낸다. 영적 진화의 속도는 느리게 보일 수도 있지만, 영적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게 된다. 영적 진보는 매우 갑작스럽고, 차원과 영향력(dimension and impact)측면에서 매우 중대한 것이 된다.
December 5
영적 진화는 평생의 몰두이자 삶의 방식이다. 그것에 의해서 세상과 모든 경험이 영적 의도를 보조한다.신의 종이 되는 것을 선택하는 것보다 더 큰 소명(calling)은 없다. 영적 진보와 함께, 각각의 성장은 동등하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벽 전체가 무너지는 것은 하나의 벽돌을 제거해야만 가능한 것과 유사하게, 불가능해보이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December 6
자신을 포함하여 예외없이 모든 생명과 나타난 모든 것에 대해 느긋함, 상냥함, 용서, 연민, 무조건적인 사랑을 선택하라. 비이기적인 봉사와 모든 창조물에 대한 사랑, 배려, 존경에 초점을 맞춰라.
December 7
에고의 관점에서 가치는 감정화된 정신화이며, 실상은 정신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겸손함과 함께, 우리는 모든 것이 투사된 가치와 무관하게 단지 '있는 그대로' 일뿐이라고 정직하게 진술하고 목격할 수 있다. 실상의 본질적인 '가치'는 그것이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존재는 그 자체로 완전하고 '특별함'으로 투사된 명사화는 필요하지 않다. 모든 창조물의 신성한 본질이 장애물없이 빛날 때, 비로소 에고/마음은 경외심 속에서 침묵한다.
December 8
실상은 승낙이 필요하지 않다. 실상은 획득의 세계가 아니며, 대신에 이원적 에고의 위치성이 내맡겨질 때의 순전히 자발적이고 주관적 각성이다.
December 9
앞으로 나아가는 모든 단계가 모든 사람에게 유익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라. 우리의 영적 봉헌과 작업은 삶에 대한 선물이자 인류의 사랑이다.
December 10
진정한 영적 노력에서는 실제적인 희생이 필요하거나 기대되지 않는다. 일반적인 용어로 희생은 상실 또는 심지어 고통스러운 상실을 의미한다. 진정한 희생은 정말로 더 큰 것을 위해 더 작은 것을 놓아버리는 것을 의미하며, 손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보상적이다.
December 11
헌신은 두려움, 의심, 망설임을 해체한다. 그리고 불확실성을 명확하게 한다. 신을 신뢰하는 것만큼, 의도 또한 더욱 강해진다. 그 다음에 자신을 완전히 신에게 내던지겠다는 내적 결단이 일어난다.
December 12
거짓이 내맡겨질 때, 진리는 승리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커다란 봉헌, 용기, 신념이 필요하고, 그것은 내맡김에 대한 응답으로 신성의 영감에 의해서 제공된다. 그 방아쇠는 바로 신성 의지의 허락이다.
December 13
의식 수준의 큰 도약은 항상 '나는 안다'라는 환상의 내맡김에 선행한다.
December 14
내맡겨야 하는 첫 번째 환상은 '마음'과 같은 것이 있다는 믿음이다. 경험적으로 볼 때, 생각, 느낌, 이미지 및 기억이 끝없이 진행하면서 자신의 자각 안으로 들어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음이라는 단어는 에고와 마찬가지로 개념일 뿐이다.
December 15
사랑, 자비, 무한한 지혜 그리고 신성의 연민을 신뢰하라. 그것은 인간의 실수, 한계, 연약함을 꿰뚫어본다. 모든 것을 용서하는 신의 사랑에 믿음과 신뢰를 두고, 단죄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은 에고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이해하라. 하늘의 태양처럼, 신의 사랑은 모두를 공평하게 비춘다. 의인화된 투사로서 신에 대한 모든 부정적인 묘사(질투하는, 화난, 파괴적인, 부분적인, 호의적인, 복수심에 불타는, 자신없는, 연약한, 계약된 등)을 피하라.
December 16.
전통적으로 에고 프로그램의 포기는 매우 힘들면서 어렵고, 성취하기 위해서는 많은 생(lifetimes)이 필요하다고 묘사되어 왔다. 반면에, 깊은 겸손함과 모든 것을 신에게 아주 깊이 내맡기려는 자발성은 찰나의 순간에 전환이 일어나게 할 수 있다. 따라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하나의 느린 과정이거나, 갑작스러운 과정으로 볼 수 있다.
December 17
의식적으로 신성과 진리와의 정렬을 선택하는 것은 권한을 재부여하고, 작은 나에서 참나로 전환하여(shift), 자기-비하 또는 자기-부정보다는 자신감, 용기 및 개인 존엄성(personal dignity)을 증가시킨다. 완전한 내맡김은 평화를 가져오고, 부분적이고 조건적인 내맡김은 지속적인 의심을 불러온다.
December 18.
개인적 의지를 신(또는 섭리 또는 높은 파워)의 의지(지혜)에 내맡기는 것은 통제의 포기를 의미한다. 우리는 에고가 그렇게 하는 것에 저항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고, 에고는 환상의 통제를 유지하기 위해 변명, 반론, 많은 두려움을 날조해 낸다. 에고의 위치는 자만심뿐만 아니라 특정 결과에 대한 욕망에 의해 강화된다. 따라서, 에고에게는 한걸음 물러서서 신성의 개입을 초대하는 것이 마치 손실처럼 보인다. 반면, 영에게 그것은 확실한 승리다.
December 19
진리는 지각된다. 진리는 그 자체를 드러내기 위한 제시를 허용하기 위해 준비되어온 자각의 장(field of awareness)에 나타난다. 진리와 깨달음은 획득하거나 달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조건이 적절할 때 스스로 나타나는 상태 또는 조건이다.
December 20
불완전함은 오직 마음의 생각 속에 존재한다. 12월(지금 이순간)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불완전함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December 21.
무지는 공격에 쉽게 굴복하지 않지만, 빛 속에서 그것은 쉽게 흩어진다. 그리고 진리를 드러내는 단순한 행위보다 부정직함을 더 빨리 용해시키는 것은 없다. 세상에서 자신의 파워를 향상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온전성, 이해심, 연민의 능력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December 22.
드러난 진리의 절대적 주관성은 오직 에고에서 비롯된 모든 고려사항 또는 불확실성들을 배제한다. 에고가 무너질 때, 모든 다툼은 멈추고 고요해진다. 의심이 바로 에고다.
December 23.
항상 그래왔듯이, 주된 결함은 인간 마음(human mind)의 설계가 본질적으로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타고난 결함의 단순하고, 가장 결정적인 것이 바로 인간의 고통과 재앙의 밑바탕에 있다.
December 24
내면의 평화를 찾은 사람은 더 이상 위협을 받거나, 통제받거나, 조종되거나, 프로그램되지 않을 수 있다. 이 상태에서, 우리는 세상의 위협에 취약하지 않으며, 따라서 삶을 지배해간다.
December 25.
사랑의 에너지 장은 본질적으로 그 자체의 특성으로 만족스럽다. 사랑은 어디에서나 이용할 수 있으며, 그 사랑임은 사랑의 보답을 야기한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비록 사랑은 조건적으로 출발할지라도, 영적 의도와 함께 그것은 삶의 방식이 되며, 모든 나타난 것에서 삶과 관련되는 방식이 된다.
December 26
문 : 우리는 어떻게 영적 진보를 촉진할 수 있나요?
답 : 그것은 자연스러운 호기심입니다. 선택은 주의집중의 습관적인 사고방식(mind-sets)이 되는 성향을 낳습니다. 매 순간에는 (영적) 각성에 필요한 모든 요소가 있습니다. 단지 나타난 것보다는 본질을 추구하세요. 모든 것은 실상 그대로 보면 완벽합니다. 모든 것은 그것이 반짝이는 새것이든지 또는 녹슨 먼지이든지 상관없이 정확히 '원래의 의도 그 자체'여야 합니다. 형용사를 피하세요.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투사된, 정신화된 자격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당신은 동사와 부사마저 버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어떤 것도 '행하는' 어떤 것이 아니고 단지 원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환은 연속적인 사건을 동사로 보는 관찰자 내부로부터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만약 1만분의 1초도 안되는 시간에서 보면, 모든 것은 정지된 것처럼 보입니다.
December 27
삶에 대한 모든 반응은 주관적이다. 끔찍하거나, 흥미롭거나, 슬프거나, 선하거나, 나쁜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재앙이 '발생해서는 안된다'거나, 순진한 사람은 자격이 없다거나 또는 끔찍하지 않거나 또는 누군가의 잘못임에 틀림없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넓은 시야에서 보면, 우리는 삶의 내용이나 맥락에 의해서 동요되지 않고 머무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판단, 기대 또는 민감성의 포기가 필요하다.
December 28
영적 진리와 사랑에 대한 지속적인 헌신은 저항의 해체를 허용해준다.
December 29
내맡김은 순간에 저항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대신에 지속적으로 신에게 맡기는 끊임없는 과정이다. 따라서 주의집중은 맡겨지는 '무엇'이라는 내용이 아니라 놓아버림의 과정에 집중된다.
December 30
영(sprit)과 가슴(heart)은 하나다.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은 마음이 아니라 가슴이다. 자신의 가슴을 발견하는 것이 곧 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December 31
배운 진리가 효과적이려면 매일 실천해야 하고 그 진리는 언어의 표현을 넘어 존재한다. 만약 이것이 행해지면, 변화는 일어난다. (영적) 정보의 목적은 친숙해짐과 함께 흡수되기 위한 것이며 그러면 이해로 성숙된다.
용어해설
이 용어해설집은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작업에서 편집된 발췌문을 합성한 것이다.
의식(Consciousness)
의식은 알거나 경험하고, 인식하거나 목격하는 인간의 능력의 환원할 수 없는 기질이고, 그것은 자각 능력(awareness itself) 그 자체의 본질이다. 의식은 무한한 차원과 가능성의 형태가 없고, 보이지 않는 에너지 장, 그리고 모든 존재의 기초다. 그것은 시간, 공간 또는 위치에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모든 것을 포함하고 모든 것에 존재한다.
의식은 무한하고 편재하는 우주적 에너지 장이자 반송파(carrier wave)이며, 이 우주에서 이용가능한 모든 정보의 저장고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의식은 알거나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의 바로 그 본질이자 기질이라는 것이다. 좀 더 근원적으로 말하면, 의식은 모든 존재의 환원할 수 없는 일차적 특성이다. 의식은 자각으로 표현되는 비개인적인 신성의 특성이며 비이원적이며 비선형적이다. 의식은 자각과 신성한 본질의 특성을 가능케 하는 무한한 공간과 같다.
맥락(Context)
맥락은 하나의 관점에 근거한 관찰의 전체 장(total field)이다. 맥락은 진술이나 사건의 의미를 규정하는 어떤 중요한 사실을 포함한다. 만약 그것의 맥락을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데이터는 무의미하다. '맥락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의미추론에 자격을 부여하는 기여 보조조건을 감별하지 못함으로써 진술의 중요성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원성(Duality)
형상의 세계는 '이것/저것', "여기/거기", "그때/지금" 또는 "네 것/내 것"과 같은 개념적 이분법이 반영되어 그 대상이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한계의 인식은 그 감각(senses)에 의해 생성되는데, 고정된 관점에 내재된 한계때문이다.
에고, 작은 나(ego, self)
에고는 생각과 행동의 배후에 있는 가상적인 행위자(imaginary doer)다. 에고의 존재는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하고 필수적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것은 에고의 일차적 특성인 인식(perception)때문인데, 이처럼 에고는 추정된 인과관계의 패러다임에 의해 제한된다.
에고는 통합적, 실행적, 전략적인, 또한 조직하고, 대응하고, 저장하고, 검색하는 전술적 초점을 가진 중앙처리 및 계획센터라고 부를 수 있다. 그것은 인간 의식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 장에 의해 동반된 결과로 확립된, 일련의 사고 습관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사고 습관은 반복과 사회적 합의에 의해 강화된다. 추가적 강화는 언어 자체에서 나오고, 언어로 생각하는 것은 자기-프로그래밍의 한 형태다. 접두사 '나'를 주어로 사용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행위의 원인이 '나'라는 것을 의미하게 되고, 이것은 가장 심각한 오류이며, 자동적으로 주체와 객체의 이원성을 창조한다.
다시 말해, 에고는 생각이 과거 경험, 세뇌 및 사회적 힘에 의해 다양하게 가중치가 부여되는 특정 의사결정나무(certain decision trees)를 따르는 일련의 프로그램인데, 이는 이성이 복잡한 다층 알고리즘을 통해 작동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러므로 에고는 스스로 창조한 상태가 아니다. 본능적 충동은 그 프로그램에 결합되고, 이로써 (우리 몸의) 생리학적 과정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깨달음(Enlightenment)
깨달음은 평범한 의식을 대체하는 흔하지 않은 자각의 상태로 작은 나(self)는 참나(Self)로 대체된다. 그 상태는 시간이나 공간을 초월하고, 침묵하며, 드러남으로써 현존 그 자체다. 깨달음의 상태에서는 에고의 해체가 뒤따른다.
카르마(Karma)
본질적으로, 개인의 카르마는 의식의 비물리적인 영역 안에 존재하는 정보 꾸러미(컴퓨터 칩과 유사함)다. 카르마는 영체(spritual body)나 영혼(soul)의 일부이면서, 내재적으로 저장된 정보의 코드를 포함한다. 그 핵심은 생각과 감정의 관련된 뉘앙스(미묘한 차이점)와 함께 모든 과거 경험의 응축을 대표한다.
영체는 선택의 자유를 가지지만, 선택의 범위는 이미 패턴으로 정해져 있다. 카르마는 선형적이며 영혼을 통해 전파되고, 의지에 의한 중요한 행위들의 귀결로 유전된다. 카르마는 실제로 책임을 의미하며, 이전의 영적 연구에서 언급했듯이, 모든 존재는 우주에 대해 책임이 있다.
요약하자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카르마(영적 운명)는 개인 의지 결정들의 귀결이며, 육체적 죽음(천상계, 지옥, 연옥 또는 흔히 말하는 내부 아스트랄계[바르도]) 이후의 영적 운명을 결정한다. 인간의 육체적 영역에서 환생도 선택의 대상에 포함되는데, 의식 측정 연구에 의하면, 환생은 개인 의지의 동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자신의) 동의에 의해서 이 길을 선택해 왔다.
또한 의식 연구에 의하면 외현(appearance)이 무엇이 될것인가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영적 진화에 가장 적합한 조건에서 태어난다고 한다.
선형적(Linear)
뉴턴 물리학 방법에서는 논리적 진행을 따르므로 미분 방정식을 사용하여 전통적인 수학을 풀 수 있다.
비이원성(Nonduality)
인식의 고정된 지점의 한계를 초월할 때, 더 이상 분리의 환상도, 우리가 알고 있는 시공간의 환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비이원성의 수준에서는, 관찰은 있지만 주체와 대상은 하나이기 때문에 관찰자는 없다. 당신과 나는 신성으로서 모든 것을 경험하는 하나의 참나가 된다. 비이원성에서, 의식은 자신을 나타난 것과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경험하지만 경험하는 자는 없다. 이러한 실상에서는,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은 인식 그 자체의 행위뿐이다.
위치성(Positionality)
위치성은 전체 사고 메커니즘을 작동시키고, 그 내용을 활성화하는 구조물이다. 위치성은 프로그램일 뿐이지 참나가 아니다. 세상은 하나의 끝없는 입장(positions)의 배열인데, 이는 자의적 추정이며 완전히 잘못이다.
원초적 위치성은 다음과 같다. (1) 견해(ideas)는 의미와 중요성을 갖는다. (2) 반대되는 것 사이에는 경계선이 있다. (3) 저작권은 가치가 있고, 생각은 '내것'이기 때문에 귀중하다. (4) 생각은 통제를 위해 필요하고, 생존은 통제에 달려있다.
모든 위치성은 자의적이다.
참나(The Self)
참나(The Self)는 타고났지만 모든 형상을 초월한다. 그것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으며, 시작이나 끝이 없고, 불변하고, 영원하며 불멸이다. 참나에서 자각, 의식 그리고 '집에 있음(home-ness)'의 무한한 상태가 발생한다. 그것은 궁극적 주관성인데, 참나로부터 모든 사람의 '나' 감각이 발생한다.
무한한 실상은 '나'로서 그 자체를 알지도 못하지만, 그러한 진술을 할 수 있는 능력의 바로 그 기질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고 모두가 현존한다. 참나는 실제의 실상이며, 정체성(Identity)의 하나임과 전부임이다. 참나는 나타나지 않은 것의 나타남으로써 의식 그 자체의 궁극적인 '나임(I-ness)'이다. 따라서, 단지 형언할 수 없는 것만이 묘사될 수 있다.
주관성(Subjectivity)
삶은 오로지 경험의 수준에서 사는 것이며,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모든 경험은 주관적이고 비선형적이다. 따라서 '실상'의 선형적이고, 인식적이며 순차적인 묘사조차도 주관성없이는 경험할 수 없다. 모든 진리는 주관적인 결론이다. 모든 생명은 본질적으로 비선형적이며, 측정할 수 없고, 정의할 수 없다. 그것은 순전히 주관적이다.
진리(Truth)
진리는 상대적이고, 주어진 맥락 내에서 오직 '참'이다. 모든 진리는 특정 의식수준 내에서만 그렇다. 예를 들어, 용서하는 것은 칭찬받을 만하지만, 다음 단계에서 우리는 실제로 용서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용서받을 '다른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의 에고는 자신을 포함하여 동일하게 실제가 아니다(unreal).
인식은 실상이 아니다. 진리는 주관성에서 나오고 명백하며, 스스로를 드러낸다. 진리는 근본적인 주관성이다. 분리된 '작은 나'의 추정된 '실상'을 포함하여, 이원성의 환상의 붕괴와 함께, 참나로서 나타나지 않은 것의 나타난 것인 무한한 '나'의 상태만이 남게 된다.
진실은 거짓이나 '꺼짐(off-ness)'같은 반대가 없다. 의식의 장에서는 어떤 것도 숨지 못한다. 궁극적 진리는 '있음(is-ness), 존재함(beingness), 또는 어떤 자동사를 초월한다. '나는 나다("I Am That I Am)' 또는 '나는 있다(I Am)'와 같은 참나를 정의하려는 어떤 시도조차도 불필요하다. 궁극적인 실상은 모든 이름을 초월한다. "나"는 각성 상태의 근본적인 주관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 실상의 완전한 진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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