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16. 묵상글 들 ( 연중 33주 월요일 - 착각과 망각. 등 )
----------------------------------------------------
201116.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33주 월요일 - 착각과 망각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저를 성찰하게 되는 것은
제가 오늘 복음의 맹인처럼 주님께 자비를 구하기보다는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저의 육신의 형제들에게 자주 바라고 얘기하는 것은
아무리 부모라 할지라도 이제는 자식에게 뭘 해주려 들지 말고,
자식이 해주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왜냐면 이제는 해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 해주는 것을 받아야만 되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이번 행정진 선출에서 저희 관구는
이제 저에게 양성을 받았던 형제들이 모든 책임을 맡게 되었고,
그래서 이제는 저도 그 형제들이 인사 명령을 내리는 대로 가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저를 점점 의탁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저보다 나이가 더 많은 저의 형제들은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지금까지 하던 가락 때문인지
저는 계속 남에게 베푸는 사람이려고 합니다.
헌데 제가 베풀 수 있고 또 사랑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나쁘다 할 수 없고
베풀어야겠지만 제 사랑에 불순물이 있어서 베풀려는 거라면 고쳐야겠지요.
불순물이란 앞서 봤듯이 베풂을 받기보다는 베푸는 사람,
다시 말해서 시혜자이고 싶은 교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베풀 수 있고, 베푸는 사람인 것은 분명 좋은 것입니다.
그렇지요. 베풀 것이 아무것도 없고, 베풀 마음 곧 사랑이 전혀 없는 것보다
베풀 것과 베풀 마음이 있는 것은 분명 좋고, 너무도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베풀 것과 베풀 마음이 있다는 것이 없는 것보다 좋은 일이지만
그것 조금 있다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할까요?
그것이 나를 구원하고 세상을 구원하기라도 할까요?
나는 구원자가 아니고 하느님이 구원자시고,
나도 구원을 받아야 할 존재이잖습니까?
그런데 사랑을 베풀었다는 작은 만족에 취하고 착각을 하여
구원이 필요한 나라는 것까지 망각해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錯覺과 妄覺.
착각과 망각.
이것이 저의 삶을 많이 그르치게 하는 것이고,
특히 신앙의 삶을 많이 그르치게 하는 거지요.
이런 면에서 오늘 맹인은 저에게 당연히 모범이고,
그래서 한 10여 년 전부터는 오늘 맹인을 본받아
'주님,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화살기도를 주문 외우듯이 하고,
미사 때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부분을 할 때도 마음을 담아 하곤 합니다.
사실 이 부분은 옛날에 제가 거부감을 많이 느끼던 부분이었는데
그래도 이제는 거부감이 없을 뿐 아니라 이 부분을 기도할 때 공손히
머리숙여지고 두손 모아지곤 하니 겸손 면에서 많이 나아진 셈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맹인에게서 더 본받아야 하고,
더 나아가야 할 것은 자비를 받고 난 뒤의 그가 한 행위입니다.
하느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따라 나선 것과
다른 사람도 하느님을 찬양케 한 것 말입니다.
그는 자비를 받고 입 싹 닦은 사람이 아니고 찬양과 추종으로 보답합니다.
병을 치유받은 이스라엘의 아홉 나병 환자는 병을 치유받고는
입을 싹 닦고 하느님 감사와 찬양을 하지 않아 주님의 노여움을 샀는데
오늘 맹인은 하느님 찬양에 이어 주님 추종까지 하니 그 모범이 완전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자비를 입은 사람이라면
하느님 찬양과 주님 따름이 그 결과로 나타나야 함을,
만일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 찬양과 주님 따름이 없다면 우리는
하느님 자비를 받지 않은 사람처럼 사는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
201116.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눈먼 이가 예수님께 청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루카 복음의 이 장면은 유일하게 예수님을 직접 다윗의 자손으로 표현합니다. 메시아를 나타내는 이 표현에는 임금의 모습으로 다스리시러 오시는 구원자의 표상이 담겨 있습니다. 이 호칭을 통하여 우리는 오늘 복음의 내용이 단순히 눈을 뜨게 하는 치유가 아니라 믿음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눈먼 이의 모습에서도 믿음을 드러내는 행동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주위의 만류, 아니 좀 더 강하게 말한다면 주위의 방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 큰 소리로 외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시어, 눈먼 이는 다시 보게 됩니다. 다시 보게 된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고, 사람들도 그 모습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때로는 절실하게 필요한 것을 위하여 예수님께 청하고 부르짖습니다. 또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런 과정을 지나며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의 삶을 충실하게 따르는 우리의 모습을 통하여 다른 이들도 하느님을 경험하고 그분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시 보게 된 눈먼 이의 이야기는 우리를 위한 믿음의 이야기가 됩니다.
- 허규 베네딕토 신부 -
----------------------------------------------------
201116.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8,35-43: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눈먼 사람을 고쳐주셨는데, 그는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보는 눈이 있었다. 그래서 끈질기게 애원하였다. 그는 인간의 힘으로는 시력을 회복할 수 없고 하느님의 거룩한 능력과 권능으로서만이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나아가듯 예수님께 나아간다.
누가 지나가느냐고 눈먼 사람이 묻자, 사람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37절)고 알려주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부르짖었다(38절). 그러자 사람들이 그를 말렸다. 그들은 눈먼 거지가 시끄럽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동시에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주시면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과 마찬가지로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을 다시 믿게 하시려고 빛이신 분이 이 세상에 오셨다. 매일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도움을 구걸하던 그 사람이 이제 하느님의 선물을 받게 된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 이렇게 청하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그가 믿음이 구원을 주었고, 그다음에 시력을 되찾았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41절) 예수님께서는 최고의 권위로 말씀하셨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42절) 이 말씀은 인간의 권한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권위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그 누가 이런 권위 있는 말씀을 한 적이 있는가? 주님은 하느님께 기적의 능력을 청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능력으로 그의 시력을 되찾아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무슨 일이든 하셨다. “다시 보아라!” 이 한마디가 눈먼 이에게는 그대로 빛이었다. 참 빛이신 분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보게 된 그 사람은 어떻게 했는가?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43절) 한다. 그는 이중으로 눈먼 상태에서 벗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육신의 눈먼 상태뿐 아니라, 마음의 눈먼 상태에서도 벗어난 것이다.
그에게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았다면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에 군중도 모두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고 한 것을 보면, 그는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찬양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 것이다. 오늘 복음의 눈먼 이가 그토록 부르짖어 눈을 뜨게 되는 은총을 받았다면 우리의 눈은 어떠한가? 사물을 쳐다보는 눈은 볼 수 있다 해도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은 얼마나 밝은가? 그러기에 우리도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는 간절한 기도를 자주 바쳐야 할 것이다. 우리의 눈이 이제 주님의 참모습을 볼 수 있고, 그 신비를 깨달아 알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삶이 되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
201116. 한상우 신부님.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 18, 41)
거짓 자아는
거짓 허상에
묶여있다.
거짓 자아를
깨뜨리는 것이
치유이다.
자비의
주님께서는
다시 보게
하여 주신다.
제대로 보아야
제대로 주님께
돌아갈 수 있다.
우리에게서
치유가 필요한
부분이
어디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치유는 아픔에서
시작되고 믿음은
아픔으로 더욱
깊어진다.
아픔을
개방하는 것이
다시 보게되는
첫걸음이다.
제대로 보지
못하기에
소중한
이 순간을
놓치며 사는
것이다.
소중한 삶에
눈 먼 이는
그 누구도 아닌
우리자신이다.
삶과 믿음
치유와 구원은
분리될 수 없다.
믿음을
향하는 것이
치유의 시작이다.
건강한
믿음은
제대로 보는
것이다.
삶은 제대로
보는 믿음을
배우는 것이다.
제대로 보아야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삶을 제대로
볼 수 있다면
제대로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제대로
사랑하는 것이
제대로
보는 것이다.
주님, 저가
제대로
보게 하여
주십시오.
(한상우 바오로 신부)
----------------------------------------------------
201116. 이영근 신부님. (연중33주월).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루카 18,41)
오늘 <복음>은 예리고의 눈먼 거지(바르티메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눈 먼 이가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길을 걸어가지 못하고, 그냥 “길가에 앉아”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른 이들의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쓰듯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39)
그는 그분이 지닌 메시아의 권능을 믿고 부르짖었습니다.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는 <이사야>(11,1) 예언서의 말씀을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가 가까이 오자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루카 18,41)
예수님께서는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그의 믿음을 유도하고 고백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물으십니다. 곧 당신께 대한 믿음을 묻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청원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곧 첫째는 믿음으로 청하는 일이요, 둘째는 자신이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청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진정 청해야 할 바를 청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는 말합니다.
‘진정 원해야 한 바가 무엇인지를 아는 이는 이미 성인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는지 빤히 아시지만, 우리 자신이 그것을 알도록 우리의 진정한 원의를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께 대한 믿음을 보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당신께 대한 진정한 믿음으로 청하기를 원하십니다. 당신께 대한 신뢰와 의탁을 원하십니다.
거지 장님은 신뢰와 의탁으로 청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 18,41)
그런데 대체 무엇을 보아야, ‘다시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보다’(anablefo)라는 단어는 ‘위를 쳐다보다’, ‘새로운 것을 보다’, ‘다시 보다’, ‘시력을 회복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이 눈을 뜨기 위해서는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쳐다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그분의 사랑을 알게 될 때, 비로소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결국, 그분의 ‘사랑을 보는 눈’이 다시 보는 눈이요 새로운 눈이요 영적인 눈인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눈을 치유 받는 것을 넘어서, 영혼의 눈을 뜨는 일입니다.
사실, 보지 못하는 것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눈을 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있는 것은 보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보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어둠 속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믿음’이 ‘다시 보게 하고 구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8,42)
그러니 이제는 보려고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태어나면서 물질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이제는 ‘믿음’을 통해서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떠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는 일이요, 지금 우리의 길을 동행하고 계시는 그분을 보는 일입니다. 이처럼, “다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빛의 세계로 나아감을 말해줍니다. 이제 그는 “길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동행하시는 주님을 “따라” 따라나서게 됩니다. 육적인 축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축복을 입어 온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루카 18,41)
주님! 제가 보지 못함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눈을 감고 있고 있는 까닭입니다.
눈을 뜨지 않으려는 완고한 마음 때문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듯, 제 눈의 가림 막을 걷어 내소서!
완고함의 겉옷을 벗기시고, 깊이 새겨진 당신의 영혼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선사된 당신 사랑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벌어진 당신 구원을 보게 하소서.
제가 바라고 싶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해주고 싶은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아멘.
----------------------------------------------------
201116.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연중 제33주간 월요일.
한국에서 신부님이 한분 오셨습니다. 2월 달에 오셔야 하는데 코로나19의 영향으로 10월에 왔습니다. 앞으로 몇 년간 한인 성당에서 사목하셔야 합니다. 신부님을 보니 작년의 제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적응하는데 3달 정도 걸렸습니다. 먼저 거주자 등록증을 받아야 하고, 운전면허증을 취득해야 하고, 각종 보험을 들어야 합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말처럼 뉴욕에 오면 뉴욕의 방식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한국에서의 생활과 사목을 고수하려하면 답답할 것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을 것입니다. 한국보다는 느리지만 기다리면 거주자 등록증도, 운전면허증도 받을 수 있고, 각종 보험도 가입할 수 있습니다. 어두운 극장이 조금 있으면 눈에 익숙해지듯이 낯선 곳에서의 생활도 시간이 지나면 재미와 보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뉴욕의 가을을 만끽 할 수 있고, 센트럴 파크를 산책할 수 있고, 박물관을 방문하고, 뮤지컬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벗어나면 아름다운 공원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정을 나눌 수 있습니다. 신부님께서 건강한 모습으로 기쁘게 지내시기를 기대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기준에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무엇일까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같은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기도와 실천을 함께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리고의 소경은 예수님께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앞서가던 사람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고 외쳤습니다. 그의 간절함을 예수님께서는 받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보아라.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소경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소경은 기도했고, 실천했습니다. 그의 신분과 능력을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기도했고, 실천했기에 구원받았습니다.
예전에 엘리베이터의 게시판에서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는 소나무와 전나무가 더욱 푸르다.’ 모든 것이 푸르른 여름에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시련의 때, 고난의 때에는 유독 그 푸르름이 돋보이는 나무가 있는 것처럼 주변을 보면 그렇게 자신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흐름에 따라서 흘러가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갈 줄 아는 용기와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흘러가는 삶은 살아지는 것이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편안하게 살아도 결국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주님은 소경의 간절함을 보시고, 보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보아야 하는 것들은 빠르고 편하고, 쉬운 길만은 아닐 것입니다. 비록 느리고,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굳이 당신의 힘과 능력을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당신께서 세우신 질서와 법에 따라야 한다고 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선택과 결정을 전적으로 본인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201116. 새벽을 열며.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빠다킹 신부님.
어느 의사 선생님께서 환자에게 검사를 통해서 암이 발견되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자신에게 암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환자는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놀랐습니다. 이렇게 커다란 병에 걸렸다는 사실에 절망감도 생겼습니다. 이 모습에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암에 쓰러질 건지, 아니면 이 암을 쓰러뜨릴 건지 생각할 시간은 딱 15초입니다. 딱 15초뿐이에요. ‘이럴 수가, 이럴 순 없어. 억울해.’라는 생각이 든다면, 흥분되고 화가 나고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며 ‘왜 나야?’라고 중얼거린다면, 이 암의 피해자가 한 사람 더 늘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환자분이 걸린 이 병에 대응해 뭔가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삶에서 가장 큰 도전일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조금이라도 떠오르게 된다면 이 병을 이겨낼 기회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딱 15초의 생각할 시간에 집중해 보시길 바랍니다.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미래가 결정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둘 다 가능성이 있다면, 긍정적인 생각으로 병을 이겨야 할 것입니다. 이런 긍정적인 생각이 최악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은 믿음을 불러옵니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주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는 곧바로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어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어떤 순간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굳은 믿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끈질기게 애원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치면서,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의 결과는 정말로 놀라운 경험을 가져다줍니다. 참된 빛이신 분께 즉시 시력을 받는 엄청난 인생 역전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보여 주는 그의 모습에 우리는 집중해야 합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주님을 따릅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함께 하느님께 감사 찬양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주님 제자의 삶을 따라야 합니다. 내 삶에서 가장 잘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인생 역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
작은 기쁨일수록 거대한 것에 뿌리내리고 있다. 작은 마음들이 알고 보면 거대한 마음으로부터 온다(정지우).
---------------------
걱정, 고민
요즘을 사는 청년들의 걱정이 참 많습니다. 취업문제, 경제문제, 결혼문제…. 얼마 전에 만났던 청년 역시 결혼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합니다.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가 있는데 결혼하자고 했답니다. 그러나 결혼과 동시에 걱정되는 것은 자녀를 낳게 되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고, 아이가 다 크고 나서 다시 취업하려면 경력단절로 인해 힘든 상황에 놓일 것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오르기만 하는 집값에 내 집 마련도 힘들 것 같고, 자녀의 교육비 역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짐으로 보인답니다.
고민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시부모님 문제, 사랑하는 사람의 성격이 결혼 후 이상하게 변할 것 같다는 두려움까지 이야기합니다. 직장에서의 많은 야근으로 결혼 생활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걱정합니다.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끊임없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걱정 고민이 많은 사람에게는 어떤 말을 해줘도 소용이 없더군요. 누구의 말도 들으려고 하는 여유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내려놓을 수 있을 때, 스스로 직접 부딪혀서 고민과 맞댈 때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 수 있게 됩니다.
걱정과 고민을 채울수록 다른 어떤 감정도 들어오기 힘듭니다. 직접 부딪혀서 헤쳐나가는 것, 그래서 걱정 고민을 조금이라도 덜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
201116. 성녀 제르투르다(1256-1302) 동정 기념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개안開眼의 여정
- 주님과의 끊임없는 만남 -
오늘은 한평생 불꽃같이 치열한 삶을 살았던 13세기 독일 출신의 분도회 수녀로 가장 위대한 신비가이자 ‘예수성심의 신학자’인, 또 서울분도수녀원의 주보 성녀인 성녀 제르투르다 기념일입니다. 성녀의 일화중 늘 잊지 못하는 것은 임종전 신랑이신 주님을 만났을 때 눈이 활짝 열려 환호중에 외친 임종어입니다.
헬프타 수도원에서 오랫동안 중병으로 고통받던 성녀 제르트루다는 1302년 11월 16일 “아! 신랑이 오신다. 신랑을 맞으러 나자자!”(마태25,6)라고 외치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45세였습니다. 성녀 제르트루다는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올려지지 않았지만, 1606년 교황청으로부터 공식 전례의 기도와 독서, 찬가에서 그녀를 공경할 수 있다는 공인을 받았습니다. 이후 그녀의 축일은 전 세계 가톨릭교회로 확대되었고, 1738년 교황 클레멘스 12세(Clemens XII)는 다른 제르트루다 성녀와 구별하고 그녀의 영적인 깊이를 재평가하면서 ‘위대한’(the Great)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예리코에서 눈먼이를 고치신 복음은 늘 읽어도 새롭습니다. 주저 없이 ‘개안의 여정’으로 강론 제목을 택했고, 이 복음을 대할 때 마다 언제나 똑같은 제목입니다. 흔히 오늘 복음을 ‘작은 복음서mini-gospel’라 불릴 정도로 영적 상징들로 가득합니다. 흡사 미사장면을 연상케도 합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눈먼 이’
그대로 주님을 찾는 가난한 무지의 눈먼 보편적 인간을 상징합니다. 길위에서 길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눈은 멀었어도 내면은 주님을 뵙고 싶은 갈망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그 유명한 시편 63장 2절이 생각납니다.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 이 몸은 당신이 그립나이다.”
육신의 눈은 멀었어도 내면의 눈은 주님을 향해 활짝 열려있는 맹인입니다. 참으로 양상과 정도만 다를 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먼 상태로 지내는지요. 편견, 선입견, 탐욕, 무지, 교만, 허영, 질투, 분노 등 눈이 멀어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직시 못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육신의 시력과는 별개로 영혼의 시력이 형편없는 소위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눈 뜬 소경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문득 어제 받은 카톡 메시지가 재미 있어 인용합니다. 제가 했던 강론 중 떠도는 메시지 일부가 저에게 도착한 것입니다. 수십년전 강론에 인용했던 ‘팬티끈과 팬티천’의 비유인데 지금도 공감이 갑니다.
“팬티끈이 영혼이라면 팬티천은 육신이다. 팬티끈이 튼튼하면 팬티천이 어떻든 끝까지 입을 수 있지만, 팬티끈이 약해지면 아무리 천이 곱고 튼튼해도 팬티를 입지 못한다. 팬티끈이 영혼이라면 팬티천은 육신이며, 바로 영혼과 육신의 관계가 이러하다.”
새삼 개안의 여정을 통해 영혼의 시력을 회복함이 얼마나 중요한 영적 수행인지 깨닫습니다. 영혼은 생래적으로 주님을 갈망합니다. 영혼의 영혼이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눈은 주님을 뵙고 싶어하고 귀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하고 두 손은 합장하여 주님께 기도드리고 싶어하며 두 발은 주님을 따르려 합니다. 주님 향한 청정욕淸淨慾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개안의 여정에 주님과의 끊임없는 만남이 얼마나 결정적이고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하여 평생 날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성전에서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 기도를 바치는 우리들입니다. 주님과 끊임없는 만남으로 육안의 시력은 약해져도 영혼의 시력은 날로 좋아지는 우리들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자 소경의 반응이 전광석화 참으로 신속합니다. 내적으로 주님을 열망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 측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거푸 자비송을 바칩니다. 흡사 미사전 간절한 마음으로 자비송을 바치는 우리를 연상케 합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혼신의 힘을 다한 영혼의 부르짖음입니다. 아마 이렇게 주님을 찾지 않았더라면 주님은 그대로 지나쳐 가셨을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간절히 항구히 찾을 때 주님을 만납니다. 참으로 간절한 소원을 지닐 때 물음도 답도 짧고 순수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과 눈먼이의 주고 받는 문답이 너무나 공감이 갑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예수님의 단도직입적 질문은 주님을 찾는 우리 모두를 향한 보편적 본질적 질문입니다. 과연 무엇이라 대답하겠는지요? 답은 단 하나 눈먼 소경이 알려 줍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부연 설명하자면 오매불망 자나깨나 그리워하던 주님이신 당신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보라 있는 눈이요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 있는 귀요, 주님을 따르라 있는 발입니다. 다음 주님 말씀은 눈먼 소경은 물론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구원의 복음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지금 여기 현존하신 주님의 구원의 복음 말씀입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말씀과 즉시 맹인은 눈이 열려 다시 보게 되었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으며, 군중도 모두 화답하여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지요! 이래서 소복음서라 하는 오늘의 복음입니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의 사도 요한은 주님을 만나 경책 말씀을 들으면서 역시 영혼의 눈이 활짝 열려 초발심의 열정과 자세를 회복했음이 분명합니다. 저 역시 얼마전 수도원에 부임하던 해 1988년, 32년전 40세 때, 써놨던 나무판의 한자 ‘침묵沈默’이란 글씨에 정신이 번쩍든, 순간 눈이 활짝 열린듯한 체험이 생생합니다. 다음 사도 요한을 향한 주님 말씀 역시 우리 모두를 향합니다.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주님을 만나 눈이 열림으로 초발심의 열정과 자세를 회복한 사도 요한입니다. 한두번의 개안이, 회개가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과정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개안의 여정은 회개의 여정과 일치합니다. 오늘도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의 눈을 활짝 열어 주시어 당신을 뵙게 합니다. 개안의 여정, 회개의 여정에 매일 미사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아멘.
----------------------------------------------------
201116.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오늘 주님은 "다시"라는 말씀으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38)
예리코의 눈먼이가 예수님께 청합니다. 주님 앞에 서기까지 그는 적잖은 난관을 겪은 터입니다.
그는 먼저,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무언가 "들었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물었고", 예수님이 오신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그는 큰 소리로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칩니다". 군중의 꾸짖음에도 아랑곳않고 더 크게 예수님을 부릅니다. 그리고 지금 바로 그 예수님 앞입니다. 구원을 위한 그의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에너지가 그를 여기까지 끌고왔습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 18,41)
그가 예수님께 자신의 진정한 바람을 아룁니다. "다시"! 그는 본래 볼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태생 소경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는 "봄"의 의미를 아는 사람, "봄"의 체험과 추억을 간직한 사람, 그래서 "다시 봄"의 기쁨과 환희를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8,42)
볼 수는 없지만 지금 이 길을 걸어가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신 메시아임을 굳게 믿은 그에게 예수님께서 믿음의 보상을 허락하십니다. 이에 그는 "즉시"(루카 18,43) 다시 보게 되지요.
제1독서에서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에페소 교회에 내리시는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나는 네가 한 일과 너의 노고와 인내를 ... 안다."(묵시 2,1)
우리의 드러나지 않는 헌신과 노고와 인내가 주님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뭇사람과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숨은 희생을 그분이 기억하시니, 누가 보든 안 보든 온 존재를 바쳐 주님을 섬기는 이에게 이만한 위안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묵시 2,4-5)
우리의 성공과 실패, 어느 것 하나 주님께 감추어진 것은 없습니다. 세례, 견진, 회개, 혼인, 서원, 서품 등등 은총의 출발점에 서서 열성에 불타올라 결심하고 다짐했던 그 뜨거웠던 사랑을 주님은 기억하고 또 그리워하십니다. 그때 우리 마음에 불을 지르신 분이 바로 주님이시고, 우리 마음 안에 타올랐던 불이 곧 그분이시니까요.
세파에 시달리며 먼길을 오는 동안 희석되고 약화되어 온도와 열기를 잃어버린 그 지점을 찾아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두 주도 채 남지 않은 올해가 가기 전에 우리 "다시" 시작해 보자고 초대장을 보내시는 겁니다.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우리 각자는 압니다. 그분과 나누었던 처음 사랑, 처음 고백, 처음 청원, 처음 두려움, 처음 실패, 처음 통회, 처음 용서... 믿음이 무뎌진 걸 수도 있고, 의탁에 불순물이 끼었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우상을 기웃댄 것일 수도 있고, 남 모르게 하던 선행에 지쳤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 것들이 더 재미나고 영혼 상태는 멈춰버린 듯 답답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 각자의 현주소는 우리의 개인 소명만큼 다양할 겁니다.
"다시"
주님께서 다시 하라고 하십니다. 그간 길을 잃었거나 엇나갔거나 주저앉아 쉬었다면, 그 지점이 어디라도 좋으니 "다시" 해보자고 독려하십니다. 너의 그 처음 사랑이 참 좋았다고, 다시 너와 일치하고 사랑하고 싶다고 부르십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우리, 주님께 마음을 돌이켜 이렇게 청합시다. 주님을 다시 볼 수 있도록, 주님을 다시 알 수 있도록, 주님을 다시 더 깊이 열렬히 사랑할 수 있도록 청합시다. 우리 바람이 뜨거운 만큼 주님께서 즉시 다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18,43)
예리코의 눈먼이는 바람이 이루어지자 곧바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육신의 "봄"을 회복한 즉시, 영혼의 "봄"에로 몸을 던진 것이지요. 그의 역동적이고 적극적이던 갈망이 같은 모드로 흘러갑니다. 예수님 곁에서 엮을 그의 미래도 그렇게 꾸려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얼마 남지 않은 한 해를 마무리하며, 각자 주님과 나의 사랑은 무사한지 점검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처음 사랑을 애타게 그리워하고 계시니, "다시" 볼 수 있기를 청하며 그분께로 힘껏 방향을 돌립시다.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따르는 제 길을 되찾아 활짝 피어날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
201116.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18,41)
'다시 시작합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인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어떤 눈먼 이가 예수님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칩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는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는 요한 묵시록의 말씀인데,
'묵시록의 말씀'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는 계시로써, 감추어져 있는 천상 예루살렘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희망의 말씀'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에페소 교회의 잘못된 모습을 지적하십니다.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묵시2,4-5)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에 키워드는 '다시'(Re)입니다.
다시 보고,
다시 생각하고,
다시 말하고,
다시 행동하는 것!
다시 믿고,
다시 희망하고,
다시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결정적인 구원 행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구원 행위들이 이루어지는 '회개의 기적'이 날마다, 아니 매순간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다시 보게 된 눈먼 이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
다시 시작하는 기쁨은 매우 큽니다.
다시 믿고, 다시 희망하고, 다시 사랑하는 기쁨은 매우 큽니다.
다시 보고,
다시 생각하고,
다시 말하고,
다시 행동하는 기쁨은 매우 큽니다.
믿는 이들의 신앙 여정은 주님 안에서
'늘 다시 시작하는 회개의 여정'입니다.
오늘도 주님 안에서
다시 시작하고,
다시 기뻐하도록 합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201116.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참혹하다. 사는 게 너무나 참혹해
매일 와 닿던 육체적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던지, 어떤 분은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너무 염세주의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자신이 체험한 세상살이의 고달픈 실상을 솔직히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참혹하다. 사는 게 너무나 참혹해.
영혼이란 것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우리가 육신을 버리고 후생에서 영혼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인가?”
충분히 이해가 가는 표현이지요.
때로 하루를 산다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길 수 있겠지만, 어떤 사람에게 있어 그 하루를 살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루를 견뎌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상처와 굴욕, 좌절과 눈물이 요구되는지 모릅니다.
인간이 하늘이기에 인간은 이 세상 피조물 가운데 가장 소중하다.
인간은 생명이 붙어 있는 한 그 자체로 가장 존귀하며 사랑받아야 한다는 진리를 잘 알고 있지만, 현실이 어디 그런가요?
끝도 없는 지루한 일상과 맞서야 하고, ‘나’와 철저하게도 다른 ‘너’란 존재를 견뎌내야 합니다.
나란 존재의 비참함도 참아내야 합니다.
때로 가식과 위선, 모순과 폭력으로 둘러싸인 구조 안에서 그저 바보처럼 웃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리코의 소경이 그러했습니다.
한 평생을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온 예리고의 소경이었습니다.
아직 미흡한 점이 많지만, 요즘은 장애우들에 대한 의식전환이 조금씩이나마 이루어지고 있지요.
아직 갈 길이 요원하지만, 장애우들을 위한 공동체적, 사회적 배려가 미비하나마 조금씩 눈에 띄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 장애우들을 위한 그런 마인드나 배려를 전혀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리고의 소경, 그는 자신이 지닌 시각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아무런 노력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그 답답함을 견디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이가 점점 들어갔지만, 우선 목구멍이 포도청인 관계로 결혼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유일한 의지가지였던 부모마저 세상을 떠나고 나니,
가족 친지, 친구들마저도 등을 돌렸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이 제대로 가동도 안 되던 시절, 예리고의 소경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구걸’뿐이었습니다.
시각장애로 인한 불편함은 그런대로 습관이 되어 견딜 만 했습니다.
걸을 때는 발에 의지하고 걸었습니다.
물건을 잡을 때는 손에 의지했습니다.
소리가 날 때는 귀에 의지해 소리를 듣고 세상을 보았습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은 몸이 피로한 것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물건의 모양과 빛깔은 꿈으로 보았습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때운다고 그는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불편함을 참고 그럭저럭 살았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로 부터 ‘무가치한 존재’로 인식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늘 남들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왔으니,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뭔가 세상에 기여를 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본능적인 욕구 못지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나는 별 의미 없는 존재라고 여겨질 때, 그것처럼 견디기 힘든 일도 없습니다.
예리고의 소경 역시 비록 장애를 지녔지만 뭔가 좋은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내 코가 석자인데, 내 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데, 도대체 무얼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저 구걸해서 하루를 연명하는 일, 도움의 손을 펼치는 일,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이런 삶의 역사와 배경을 지니고 살아왔던 예리고의 소경이기에 예수님을 만나는 데 있어 각오는 남달랐습니다.
잠시 후 있게 될 예수님과의 만남을 자신에게 찾아온 마지막 기회로 여겼습니다.
지금까지의 삶을 일단락 짓는 기회, 자신의 삶을 180도 완전히 반전시킬 유일한 기회로 삼았습니다.
나름대로의 각본도 짰습니다.
이렇게 나오면 이렇게 대응한다는 마음의 준비도 했을 것입니다.
이런 예리고의 소경의 철저한 준비, 절박한 상황, 간절한 심정, 지난 아픈 과거를 예수님께서 놓칠 리가 없습니다.
젖 먹던 힘까지 보탠 그 간절한 외침, 자신 안에 남아있던 모든 에너지를 다 바쳐서 외치는 그 절박한 목소리를 예수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드디어 꿈이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눈여겨보십니다.
그를 당신 가까이 부르십니다.
가난과 서러움, 눈물과 상처뿐인 그의 인생을 굽어보십니다.
마침내 그에게 새 삶을 부여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자비 앞에 예리고의 소경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너무나 감사했던 그는 치유 받은 즉시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예수님의 공동체에 편입됩니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우리 역시 절박한 심정으로, 그 옛날 예리고의 소경의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길 바랍니다.
영적인 눈을 한번 눈을 떠보십시오.
지금까지의 삶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입니다.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가치관과 행동양식,
새로운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우리에게 부여될 것입니다.
그 삶이 곧 영적인 눈을 뜨는 삶입니다.
그 삶은 바로 회개의 삶이요, 주님 안에서의 삶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201116.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세상을 거스르고 있어야 믿음이다
오늘 복음은 예르코에서 한 소경이 예수님께 치유를 받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왜 이 복음이 느닷없이 등장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복음 바로 앞에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세 번째 예고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인과 이방인에게 배척받고 조롱받고 채찍질과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결론은 이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 가운데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 말씀의 뜻이 그들에게 감추어져 있어서, 말씀하신 것을 알아듣지 못하였던 것이다.”(루카 18,34)
왜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의 예고를 세 번씩이나 하셨는데도 그들은 알아들을 능력이 없었을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믿음으로 세상을 거슬러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세상을 거슬러 세상으로부터 죽게 만들고 그 죽음으로 참 행복으로 부활하게 합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겨보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도 알아들을 능력을 갖지 못합니다.
아는 것만이 보이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약 4년 전에, 저의 일반 대학 친구 중에 12살 딸이 갑자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겠다는 선언을 했다고 어쩌면 좋냐고 물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친구의 모든 월급은 딸의 학비를 위해 소진되어야 할 판이었습니다.
저는 유학은 대학에 들어가서 가도 되는 것 아니냐고 말했지만 결국 부모는 딸의 뜻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 고등학생이 되어 쓴 『엄마, 우리 이제 떠나자』를 읽고 나니 보통 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어머니와 34개의 나라와 61개의 도시를 여행했던 기억을 책으로 낸 것입니다.
그리고 왜 유학을 떠날 결심을 했는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정예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아이는 매우 어릴 때부터 영재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머리도 좋았고 어머니의 교육열도 한몫하였습니다.
교육열이 꽤 높은 곳 중의 하나인 목동에서 자란 예원이는 두 살부터 놀이학교를 시작으로, 다섯 살까지 어린이집을, 여섯 살에는 영어유치원을 다녔고 그것도 모자라 원어민으로부터 따로 영어 과외수업을 하였습니다.
영재 테스트를 받아 영재교육원에 다니며 수학, 바이올린, 미술, 체육 등 각종 사교육으로 바쁜 유치원 시기를 지내야 했습니다.
초등학교는 더 치열하게 살아야 했는데 겨우 8살이란 나이에 학교, 학원, 교회에서 모두 ‘잘하는 아이’, ‘칭찬받는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숨이 막히기 시작하였고 모두에게 사랑받아야 하는 ‘모범생’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과 강박감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모두를 경쟁자로 여겨야 하는 환경은 예원이를 지치게 하였습니다.
일정을 매일매일 짜주는 엄마는 더는 엄마로 보이지 않고 자신의 매니저로 보였습니다.
예원이가 힘겨워할 무렵, 어떤 이유에서인지 엄마도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이건 아닌데 ...’라는 말을 자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마 딸을 힘들게 만들어 자신의 만족스럽지 못한 면을 채우려는 모습을 스스로 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딸에게 그런 엄마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영재엄마라는 타이틀을 버리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엄마는 예원이를 ‘대안학교’로 옮겼고 모든 사교육을 그만 받아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초등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그리고 엄마는 ‘시간적 여유’가 생겼으니 함께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을 하였습니다.
티격태격하는 두 달 동안의 여행이었지만 둘은 그때 다시 엄마와 딸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딸이 엄마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엄마가 세상을 이긴 것과 마찬가지로 딸도 부모를 이겼습니다.
두 달 동안의 여행을 하고 나니 어떤 자신감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중학생이 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지금 당장 유학을 떠나고 싶다는 말을 꺼냅니다.
부모는 당황합니다.
예원이는 왜 유학을 하려고 하느냐는 부모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학교생활이 행복하지만 행복하지 않아!”
어쩌면 이것이 우리나라 영재의 비애일 수 있겠습니다.
누구보다 앞서 칭찬만 받지만 벗어날 수 없는 현실.
그러나 예원이는 엄마처럼 세상을 거스를 줄 알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남의 나라 땅에서 혼자 외로움을 견디며 3년을 지내고 난 후, 예원이는 지금까지 자신이 선택한 것 중 경쟁의 압박감을 벗어나기 위해 유학을 떠난 것이
가장 잘한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눈먼 이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자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습니다.
앞서가던 사람들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예수님께서 그제야 돌아보시며 그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수난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는
아직은 세상을 거스르고 싸울만한 믿음의 삶을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작게나마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전기도 안 들어오는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3시간씩이나 통학하고 정신과 약까지 먹으며 버텨서 성적이 많이 추락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서울 소재 대학에 들어간 것만도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을 느끼고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오던 길을 돌아설 때 가족은 물론이요, 친구와 세상 사람들로부터 바보라는 눈초리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도 지금까지 제가 한 모든 결정 중 사제가 되기로 한 결정이 제일 잘했다는 것을 압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세상을 이기셨고 그렇게 부활하셨습니다.
저도 이 결정으로 작게나마 세상을 이겼고 참 행복을 찾았습니다.
믿음이 구원에 이를 정도가 되려면 이렇듯 세상을 이기는 십자가의 수난을 거쳐 부활의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행복을 막는 세상을 거스를 정도의 믿음을 가지도록 합시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세상을 이기는 수난을 거쳐야만 부활의 행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201116. 연중33주월.<영혼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시력이 6.0인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는 아주 멀리 있는 것도 잘 봅니다. 그렇다고 그가 늘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기도 하지만 볼 것, 안 볼 것 다 보면 오히려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잘 보지만 혹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면 그는 불행합니다. 육신의 눈이 중요하지만, 내면의 세계를 보는 마음의 눈은 더 소중하고 내세의 세계를 보는 영혼의 눈은 더욱 더 고귀합니다. 우리는 감겨 진 영혼의 눈을 떠야 합니다.
어떤 눈먼 이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18,38).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습니다. ‘이웃사촌’이라 했는데 아무래도 눈먼 소경은 이웃을 잘못 만난 것 같습니다. 유다인들의 표현으로 자비라는 것은 애간장, 애타는 심정을 말합니다. 호세아서에서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마음을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11.19)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애간장이 녹는 안타까움! 이것이 바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이며 사랑입니다. 눈먼이는 바로 그 자비를 간구했습니다.
절박한 부르짖음을 외면한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눈을 가졌다 할지라도 마음의 눈은 뜨지 못했으니 정작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외쳐야 할 사람은 눈먼 소경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웃의 마음을 읽고 그의 부족함을 채워야 할진대 시끄럽다고 야단을 치고 있었으니 그들이 소경입니다. 자비는 적선이 아닙니다. 함께하면 손해 볼 것 같아도 주님의 마음으로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그의 필요를 절박함으로 함께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는 이들에게 이웃이 되어줄 수 있을 때 그들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눈먼 이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는 심정으로 발버둥치듯이 그렇게 절박하고 간절하게 매달렸습니다. '잠자코 있으라'는 꾸짖음에 굴하지 않고 믿음을 가지고 외쳤습니다.“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믿음은 군중이라는 장벽을 넘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믿음은 군중의 손가락질도 마다하는 예수님께 대한 일편단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눈먼 이는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따랐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인 눈만 뜬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도 눈을 떠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뜨면 세상이 달라 보이고 이웃의 요구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영혼의 눈이 뜨여 내가 변하면 세상이 아름답습니다.‘잠자코 있으라’고 꾸짖기 전에 그의 처지와 절박한 마음을 공감하게 되고, 오히려 주님을 불러 세우고 주님께로 인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하고 부르짖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시력을 키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01116.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33주간 월요일(루카 18,35-43)<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치시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루카 18,35-39).”
예리코의 눈먼 거지의 이름은 ‘바르티매오’입니다(마르 10,46).
앞을 못 보는 몸으로 구걸을 하면서 살아가는 바르티매오의 모습은,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지 모르는 채로,
허덕이면서 방황하는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사실은 인류 전체가 그렇게 살고 있었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사람들 중에는 인생을 잘 알고 있다고, 또 잘 살고 있다고
잘난 체 하는 사람들도 있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빛으로 오신 분입니다.
인생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려 주시고,
그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시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시는 분입니다.
알려 주실 뿐만 아니라, 앞장서 가시면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 목적지는 하느님 나라이고,
그곳에 가려면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바로 그것을 믿고,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기를
희망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바르티매오는 먹고살기 위해서 구걸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가 바라는 인생이
결코 아니었고, 그는 새로운 인생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간절하게 기도하고, 또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게 되었을 것이고,
예수님을 만나기를 희망하면서 그 만남을 애타게 기다렸을 것입니다.
(소문만 듣고서도 예수님을 믿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어디로, 어떻게 가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까?
앞을 못 보는 그의 처지는
그저 기도하면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처지를 상징합니다.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시던 예수님과 예리코에서 구걸을 하면서 살고 있던
눈먼 바르티매오가 만난 일은 겉으로만 보면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 일이고,
바르티매오의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진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우연’이란 없습니다.
그리고 이야기 속의 상황만 보면,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부르는 상황이지만,
영적으로는 예수님께서 바르티매오를 부르신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향해서 부르짖은 일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바르티매오가 응답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서도
바르티매오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즉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냥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면서 살다가 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이야기에서, 잠자코 있으라고 바르티매오를 꾸짖은 사람들은,
예수님과 바르티매오의 만남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바르티매오는 몸의 눈이 먼 상태이지만, 그 사람들은 마음의 눈이 먼 상태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있고,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되었든지 간에 누군가가 예수님을 간절하게 찾는다면
즉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연결해 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알려 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선교활동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루카 18,40-43).”
마르코복음에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바르티매오의 모습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마르 10,50).”
바르티매오가 겉옷을 벗어 던졌다는 것은
구걸을 하면서 살았던 ‘과거의 삶’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인생에 대한 그의 간절한 희망을 나타냅니다.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을 못 보는 사람이 어떻게 곧장 예수님을 향해서 갈 수 있었을까?
그것도 역시 그의 간절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과 바르티매오의 대화에서 신품성사 때의 서약이 연상됩니다.
신품성사 때의 서약 예식을 보면,
“......을 원합니까?” 라는 질문과 “원합니다.” 라는 답변이 여러 번 반복됩니다.
(예수님과 바르티매오의 대화를 신품성사 예식처럼 바꾸면,
“너는 새로운 인생을 원하느냐?” “원합니다.”
“너는 나를 따르기를 원하느냐?” “원합니다.”가 될 것입니다.)
바르티매오가 다시 보기를 원한 것은,
단순히 ‘눈의 치유’만을 원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원한 것입니다.
그가 바라는 ‘새로운 인생’은 남들처럼 잘 먹고 잘 사는 인생이 아니라,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신앙인의 인생’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그가 다시 보게 되자마자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 수난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입니다.
----------------------------------------------------
201116.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이기우 신부님.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오늘 독서인 요한묵시록은 에페소를 비롯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교우들이
처한 박해의 상황과 무신론적 세태 속에서 신앙을 잃지 않도록 격려하기 위해서
요한 사도가 파트모스섬에서 유배당하는 중에 썼습니다.
오늘 대목은 에페소의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요한 당시의 에페소는 소아시아의 남부 해안에 위치하여 동방에서
로마로 가는 물류 수송의 중심지였던 까닭에 번창하는 도시였고,
그 당시 로마 제국은 군사력으로만 앞섰지 문화적으로는 그리스에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동방 지역에 비해 열악했으므로 여러 가지 여건상
로마보다 유리하고 편리했던 에페소에 로마보다 더 로마적인 도시를 건설했었습니다.
이런 에페소의 선교적 필요성과 가능성을 동시에 내다본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에 복음을 선포하며 교회를 개척했고, 그가 로마에서 순교한 후에는
사도 요한이 물려받아 에페소 교회를 위해 봉사하면서 인근 여섯 교회도 함께 관여했습니다.
당시에도 로마 제국의 박해는 간헐적으로 가해졌고,
사도 요한 또한 박해를 받아 파트모스섬에 유배당한 처지여서 당국의
검열을 피하려고 묵시문학의 형식을 빌어 암호 같은 표현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여기서 ‘에페소 교회의 천사’는 그 교회의 주교를 뜻하고,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고 일곱 황금
등잔대 사이를 거니는 이’란 별이나 황금 등잔으로 비유되는 영적인 존재들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그 이하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보시는 관점에서 에페소 교회를
심판하는 사목적 권고입니다. 일곱 교회 중에 가장 큰 맏형뻘 교회로서 나머지 여섯 교회를
도와주면서 인내하며 벌인 에페소 교회의 노고를 요한 사도도 잘 알고 있으며, 우상 숭배에
물든 악인들을 물리친 데 대해서도 치하하지만,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데 대해서는
나무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라”는 권고였습니다.
이 일들이란 사도 바오로 시절부터 에페소 교회가 맞닥뜨렸던 우상숭배적 풍조에
물들어버린 교회 내 신앙을 쇄신시키는 일을 뜻하겠지요.
이쯤해서 우리 한국천주교회가 처음에 하던 일들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이것은 현재의 사회적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 가운데 시대의
징표를 읽는 일이나 민족의 미래를 향해 제시해야 할 전망하고도 다릅니다.
이는 애초에 이 땅에 천주교를 들여와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자 했던
목표를 되찾는 역사의식이요 또한 역사적 안목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천주교를 들여온 선각자들이 이를 통해 꿈꾸었던 바는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받아 치명해야 했던 이유에서 잘 드러납니다.
조선 사회는 사상과 신앙, 양심의 자유가 인정되지 않았던 암흑사회였고,
비인간적인 신분차별이 공동선의 진리를 가로막았던 철벽감옥이었습니다.
그런 반면에 자신들만의 세상으로 조선을 만들어 버린 양반 출신 벼슬아치들은
사회의 최고선 가치들에는 물론 공동선에도 관심없이 그저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에 자신들의 권력을 썼기에 나라는 엉망이 되어 버렸고,
급기야 쇠약해진 국력 탓에 외세에 주권을 빼앗겨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조선 사회 최대의 사회악은 공동선을 짓밝고 사리사욕을
앞세운 공복(公僕)들의 직무유기였고, 이를 방조한 배후의 절대악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공리공론을 일삼았던 우상숭배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천주교가 신봉하던 진리를 구현하고자 심산유곡에 세운 교우촌은
당시 조선 사회와는 대조적인 사회였고 치명순교를 불사하며 진리를 구현하고자 했던
교회였던 겁니다. 이것이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이 ‘처음에 하던 일’이었습니다,
천주 공경으로 최고선의 진리를 세우고, 인간 사랑으로 공동선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는 예리코에서 어느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루카는 그 눈먼 이가 매우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청원했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그분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모양이고,
그분께서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시리라는 믿음도 간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문만 듣고도,
보이지도 않는 예수님을 향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이 호칭을 보면 그가 이미 그분을 메시아로 믿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그의 그런 부르짖음은 주변 사람들의 구박만 받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외치며 예수님의 걸음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결국 그가 평생 바라던 바 눈을 뜰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자비를 이끌어낸 그의 절박한 열성이었습니다.
루카는 이런 일화를 소개하면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예수님의
말씀 바로 다음에 배치함으로써,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과 군중의 본보기로 제시했습니다.
즉, 하느님 나라를 원하면 이를 위한 자기희생으로서의 십자가를
각오해야 할 뿐만 아니라 부활의 진리에 대한 신앙의 눈도 떠야 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소경의 절박한 청원 기도를 미사의 첫 부분인 참회예절에 도입했습니다.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은 그 소경을 본받고자,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를
세 번씩이나 되풀이하여 기도하지요. 문제는 그의 절박한 심정까지도 본받고 있는지
하는 것입니다. 또한 개별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천주교회 전체가
‘처음에 하던 일’ 즉 이 땅에 사는 겨레에게 천주를 공경하게 하고,
더불어 사회의 공동선을 살려서 인간화된 사회를 건설하려던 초심을
그 절박한 청원에 담고 있는지 하는 것이겠습니다.
----------------------------------------------------
2020년 11월 16일 월요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매일미사
_김현준 율리오 신부 집전
https://youtu.be/SWuTBpx9P14 (37:53)
•2020. 11. 16.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김현준 율리오 신부 (춘천교구 원로사목자) 집전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35-43
*** 신부님 강론 11:20부터 21:25까지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