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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행함으로 완성되어 진다 롬10:9-13 빌2:12 약2:14-22
최근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이 취임하면서 '건국절'에 대한 논란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이 논란은 광복회 이종찬 회장이 광복회의 상임부회장인 김구 선생의 장손인 김진씨를 독립기념관장으로 밀다가 틀어지면서 이번 사태의 근본 이유라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독립기념관장 인선을 둘러싼 기싸움이 엄청난 사태로 번진 가운데, 79주년 8·15 광복절은 대통령과 정부요인들과 초청인사들을 중심으로 세종회관에서 기념행사를 가졌는데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광복회는 효창공원 내 백범김구기념관에서 민주당 지도부와 조국혁신당이 참석한 가운데 이종찬 광복회장은 기념사에서 “진실에 대한 왜곡과 친일사관에 물든 저열한 역사인식이 판치며 우리사회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며 “망령처럼 되살아나는 친일사관을 뿌리 뽑아야한다”고 하면서 말미에는 윤대통령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십시오”라고 말에 행사장에 약 500명에 달하는 청중은 “타도 윤석열”을 외치며 호응했다는 이야기이다.
오늘 이런 건국절 논란을 제공한 자는 문재인이었는데 그는 대통령 취임하자마자 대한민국의 건국을 1919년 4월22일 상해임시정부부터 시작한다고 공포 했다. 우리나라 해방과 건국에 대해서는 1945년8월15일부터 1948년8월15일까지 건국과정을 근거로 따져야 하는데 이념에 치우치다보니 건국한지 76년이 지난 지금 건국절이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우리나라는 해방후 미군정이(45.9.9-48.8.15) 끝나면서 정국의 혼란중에도 대한민국이 탄생하기 위해 1948년5월10일 단군이래 5000년 만에 역사적인 총선을 통해 국민들이 국회의원들을 선거하였고 5월 31일에 처음으로 열린 국회를 〈제헌의회〉의 첫 순서인 임시의장을 선출하는 순서에서 이승만 박사가 선출되었고 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 박사는 단상에 오르자 역사적인 발언이 대한민국관보 1호 1면에 다음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만년 길고 유구한 우리 역사에 처음으로 민주주의 시대를 개막하고 국회를 열게 된 것은 사람의 힘과 사람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고 우리 민족을 사랑하사 대한민국을 탄생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탄생케 하신 근본이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이 대한민국을 탄생케 하였다고 의원들 앞에서 공포했다. 1948년 5월 31일 국회의원 간접선거로 선출된 대통령 이승만은 국회의원들에게 인사말로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고 대통령취임인사를 했다. 당시 2차 대전 후 수많은 나라들이 독립하였지만 우리나라처럼 대통령과 국회가 먼저 하나님께 일어나 기도하면서 국가운영을 시작하였다는 것은 세계 어디서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실제 있었다고 국회속기록에는 기록물로 남아 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국회의원 총선거와 의원들의 간접선거로 이승만 대통령이 선출되고 국회에서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하고 드디어 해방된 날인 1948년 8월 15일을 기해 대한민국의 건국을 국내외에 알리게 되었으므로 8월15일은 해방된 날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의 건국기념일인데 주사파인 문재인은 이 나라의 정체성을 무너뜨리고자 대통령이 되자마자 상해 임시정부수립일인 1919년 4월 22일을 건국일로 발표하며 올해가 건국102주년이라고 미치광이소리를 하니 건국을 하려면 땅과 국민과 주권이 있어야 국가를 건국하는 것인데 임시정부 때 주권은 일본이 갖고 있는데 어떻게 1919년도에 나라를 건국하였다는 문재인과 그를 지지하는 광복회야말로 왜 이런문제로 나라를 시끄럽게 하는 것인가? 매년 맞이하는 8월15일은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아울러 건국을 포함하는 우리만이 갖는 고유한 광복절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어떻게 8.15가 해방과 독립을 어우르는 광복절이 되었는지 잘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독립기념일이란 다른 나라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 해방된 날이 독립기념일인데 우리나라의 경우 1945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이지만 우리나라는 해방과 동시 미소신탁통치가 끝난 후 국민총선거로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국회의원들이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뽑고 국회의원들이 법을 제정한 후 해방일인 8.15기념일을 통하여 대한민국의 건국을 아우른 것이다. 그러므로 매년 맞이하는 8월15일은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아울러 건국을 포함하는 우리만이 갖는 고유한 광복절이다. 그러므로 확실한 것은 1948년 이전인 1946년과 1947년의8.15 행사의 공식명칭이 "해방기념식"이었던 것을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듬해인 1949년 8.15기념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 건설 제1회 기념일인 오늘을 우리는 제4회 해방일과 같이 경축하게 된 것입니다"라고 한 표현은 아주 정확한 표현이었다. 여기서 대한민국 건설 기념일이란 대한민국 건국 기념일이란 말이다. 따라서 이때부터 8.15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는 과정에서 국회에 제출된 초안의 명칭이 "독립 기념일"에서 "광복절"로 수정 통과된 것은 해방과 건국을 아우른 절기로서의 "빛(光)을 되찾(復)"는 광복절을 제정한 것이었다. 이후 역대정부는 광복절에 대한 논란은 있어본 적이 없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집권 후 맞이한 첫 광복절이었던 1998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대한민국 건국 50년사는 영광과 오욕이 함께 했던 파란의 시기"라며 "제2의 건국에 동참하자"고 역설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우리는 58년 전 일본제국주의의 압제에서 해방되고 3년 후에는 민주공화국을 세웠다"며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건설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임기 마지막해인 2007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62년 전 오늘 우리 민족은 일본제국주의의 압제에서 해방됐고, 3년 뒤 이날 나라를 건설했다"고 연설해 '1948년 8월 15일 건국'이라는 인식이 뚜렷했음을 알 수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가 되레 윤석열 대통령의 올해 광복절 경축사보다 '1948년 8월 15일 건국 인식'이 더 선명하다는 관측까지 나온다. 이후 유엔은 1948년 12월 12일 유엔총회 결의안 제195호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는 한반도 지역에 대한 유효한 지배권과 관할권을 가진 합법 정부이고 유일한 정부"라는 점을 선언했다. 그리고 건국에 대한 법적근거로는 헌법재판소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이 2014년 12월 19일 '2013헌다1' 결정문에서 "해방 이후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과 더불어 채택한 헌법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질서는 보편적 가치로서 산업화·민주화의 밑바탕이 돼 오늘날의 자유와 국가적 번영을 가져다줬다"고 판시했다.
1948년 8월15일은 대한민국을 건국한 건국절임이 이렇게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건국절에 대한 논란이 다시금 문제시 되는 것은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대통령이 세운 자유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흔들어대는 이념전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신앙생활도 지금 이 나라에서 논란이 되는 건국절과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 믿으면 죄사함을 받아 천국에서 영생하는 것인데 로마서에는 마으으로 예수님을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받는 다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을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주여 주여 부르짖는 자라도 주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나는 도무지 너를 모른다고 하였으니 정말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 것이 참된 신앙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는데 베드로 사도는 믿음의 결말은 영혼의 구원이라고 전하고 있다(벧전1:9). 예수님을 믿는 결과는 세상에서 구원받아 천국에서 영생하는 것인데 그길은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말로만 하는 것에서는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말씀으로 오셨던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전파하는 곳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나의 죄값에 대한 죽으심이며 그분의 부활은 내가 부활된다는 것을 보장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 기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말을 다르게 말한다면 예수님 믿으면 천국이고 믿지 않는다면 지옥이라는 것인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는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지옥을 만들 수 있냐고 비아냥하는 여호와의 증인같은 자들도 있다. 여호와의 증인을 창설한 찰스 럿셀은 젊을 때 지옥에 대한 공포심을 갖고 있던 중 지옥이 없다는 말을 듣고 감명(?)을 받게 되었으며, 여호와증인들의 교리에는 지옥을 부인합니다. 영원한 고통 형벌을 받는 게헨나라는 지옥은 하나님의 성품에 맞지 않는다고 부인하는 이런 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사랑의 하나님은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 이신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한 손에는 사랑을 베풀어 주시면서도 또 한 손에는 공의를 갖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공의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잠언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자가 어찌 알지 못하겠느냐(잠24:12).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는 하나님은 곧 행위대로 보응하시는 공의의 하나님 이십니다. 이처럼 사람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고 합니다.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때로는 주의 일꾼들이 탄식할 때도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악한자의 길이 형통하며 핍박한 자가 안락함은 무슨 연고이니이까'(렘12:1)라고 했고 하박국 선지자도 '왜 의인이 고난을 받으며 공의가 굽게 되었나이까'(합1:2-4)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얕은 인간의 생각일 뿐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라(부러워하지말라). 저희는 풀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요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라'(시37:1-2)고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심판이 즉각적이라고 한다면 도둑질하면 손이 잘려지고 욕하면 입이 돌아간다면 사람들이 죄짓지 아니할 것인데,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공포의 두려움속에 살아가는 기계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느 나라임금이 술로 인한 방탕을 막기 위해 술먹는 자의 눈 두개를 뽑겠다고 명령한 왕은 자신의 왕자가 술에 취했을 때 많은 백성 앞에서 왕자의 눈 하나와 자신의 눈 하나를 뽑아서 아버지의 사랑과 법을 지키는 공의를 행하였으니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라고 생각할 때에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함께 집행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공의의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하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을 잘 믿고 구원받는 것이다
(1) 십자가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죄인으로 태어난 우리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선 우리 죄값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죄인이 예수님안에서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나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 최우선이며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알고 실천하는 것이다.
(마6:33) 오직 너희는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하고자 하는 것은 이 땅에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이며 하늘나라에 가려면 주님을 믿어서져 의로와져야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의롭게 된다면 그 이상 믿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은 나를 위한 죽으심이므로 나도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한다. 나도 세상에 대해 죽었다면 세상에 대해 욕심이나 즐거워하지 않을 것이다. 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지상명령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주며 20 무엇이든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의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하시니라, 아멘.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다면 그분의 사랑을 이웃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며 죄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불평과 원망은 사탄이 사용하는 최고의 무기를 과감히 물리치고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만을 전해야 합니다. 오 주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들으려 하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왜 의인이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라는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에 '이 묵시도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3-4) 하셨으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그분의 자취를 따라가는 것이기에 예수님을 믿는 그 길은 고난의 길이며 좁은 길이라고 하지 아니하셨던가? 특별히 남을 위하여 희생된 고귀한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이다.
여기 2차 대전 때 대니얼 폴링이라는 군목이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께 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제가 도체스터군함을 타고 전장에 나갑니다. 살아서 돌아오기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의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미국의 젊은 군목 대니얼 폴링은 전장에 나가면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1943년 그가 탔던 도체스터함은 대서양에서 독일잠수함에서 발사한 어뢰를 맞고 침몰했을 때 승선인원 904명 중 678명이 순직했다. 배가 기울어져 갈 때 폴링을 비롯한 군목들은 구명대를 다른 사람들에게 주고 어깨동무를 한 채 찬양하며 바다에 가라앉았을 때 그들의 얼굴은 마치 천사와 같았다. 구명보트를 남에게 주고 죽음을 앞두고 하는 기도와 찬양은 우리가 원하는 바를 얻는 쉬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되는 유일한 길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들에게는 정녕 의의 면류관이 안겨지리라는 말씀이 그들을 통해 이루어 질 것이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는 약속이 그들을 통해 이루어 질 것이다.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가득 차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영혼의 결말은 구원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는 인류가 구원받지 못하도록 오직 거짓과 궤휼(간사스럽고 교모함)로 사람들을 속이고 죄짓게 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까지는 마귀가 세상의 임금이므로 예수님에게도 하나님말씀을 가지고 시험했는데 마지막 때에도 마귀가 하나님 말씀을 갖고 우리를 넘어지게 한다면 거기에서 벗어 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까? 그렇다면 마귀가 어떤 말씀을 갖고 사람들을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것인가? 로마서에는 네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는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는다는 것을 이렇게 간략하게 기록한 성경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구원받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정말 믿는다는 것은 단순하지만 주님가신 길은 좁은 길이며 우리들도 그 십자가의 길을 가야한다고 합니다. 주를 따르는 자들은 주와 함께 십자가를 향해 가는 길인데 위에서 말한 대니얼 폴링이 구명보트를 남에게 주고 찬송을 부르면서 목숨을 희생하는 길은 아무나 할 수 일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나와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 간다고 믿고 있는 것은 맞는 말인데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정말 무엇일까? 그의 이름을 믿는 다는 것은 그분의 인격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가신 길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렇게 믿어야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믿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마치 사사시대에 사람들이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로 행했던 사람들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오늘날도 자기 생각으로는 열심히 믿는 것 같은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사실 믿음이란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다.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역사의 종점 가까이 와있는 이 세상은 적그리스도가 오기 전 지금 세계는 거짓에 익숙해지면서 거짓말에 침몰되어 가는 중인데 우리들이 거짓의 아비인 마귀를 이길 힘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마귀의 권세인 사망을 깨뜨리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2) 예수님을 믿는 것은 구원의 시작이다
요한복음 8장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며 내가 내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에 대하여 증언하시니라고 하니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네가 누구냐?’ 이 때 예수님은 ‘나를 믿으라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내 제자가 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죄와 마귀의 종에서 자유케 하리라’. 그렇게 말씀하셨어도 그들이 믿지 않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마귀는 거짓의 아비라는 것인데 그분을 믿지 않는 너희는 마귀 자식들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들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마귀가 하와를 미혹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거짓의 아비 마귀에 게 미혹되어서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는 장면이 나옵니다. 에덴동산 안에 각종 실과나무들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과일은 다 먹을수 있으나 단 선악과를 먹지 말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명하셨는데 마귀는 하와를 미혹하여 “아무 것도 먹지 말라 하시더냐? 괜찮다. 눈이 밝아지면 하나님처럼 된다라는 이 말속에는 거짓 선동과 부추김 그리고 의심 간교함이 들어 있어서 선악과를 먹고 죄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사실 마귀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반역하도록 죄를 짓게하는 데는 최고의 전략가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지 않으면 백이면 백 다 속아 넘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사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셨고 그분의 말씀인 성경을 주어 누구든지 말씀을 온전히 믿으면 마귀의 유혹에서 벗어 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류역사를 뒤돌아보면 개인이건 국가이건 자신이 속고 때로는 남을 속이는 것들을 누누이 보아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을 속이며 그들을 실족하게 하는 최고의 사기극이 무엇일까? 대부분은 돈에 대해 사기를 당했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나 이런 물질적인 사기보다도 더 큰 사기가 있는데 바로 영혼을 속여서 지옥가게 하였다면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무지막지한 사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기로 돈을 잃었던지 사기로 건강을 잃었다면 거기에 따른 고통은 오겠지만 그렇다고 영혼이 멸망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혼을 상대로 사기를 당했다면 살았을 때 고통받는 정도가 아니라 죽은 후 지옥에 빠졌다면 이는 지상 최고의 사기극이라는 말이다. 이런 종류의 사기는 종교를 다루는 곳에서 발생하는데 예를 들면 신천지교회들은 교인들을 추수한다고 하면서 우리 교회 오면 144000안에 추수된다는 말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미혹당하여 그리로 갔던가? 만약 그리로 갔던 자들이 지옥 갔다면 이것이야말로 영혼들이 사기를 당했다는 것이다. 이런 거짓정보는 이단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그와같은 사기극에 대해서 교회에서도 그런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한번 복습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읽겠습니다.
(롬10:9-10,13) 9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교회다녔다면 몇 번씩 들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입으로 시인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인데 많은 교인들은 이 말씀을 통해 구원은 이미 받았다고 하는데 정말 이 말씀들이 구원을 보장한다는 것이 사실인가? 바울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한 말은 또 무슨 소리인가? 이 말씀에 대해 의심을 갖게 하는 말씀이 마태복음에 있다.
(마7:21) 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오직 아버지의 뜻을 행하여야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그러면 교회에서 주님 주님 이렇게 주의 이름을 불렀는데 구원을 못받았다는 것인가?
분명히 예수님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였다고 그들이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니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인가 아니면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이 문제인가?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를 11장까지 보자.
롬10:13에서 바울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였으니 이 문제의 답을 얻기 위해 롬11장 21-22절을 참고하자.
(롬11:21-22) 21 하나님께서 본래의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을진대 그분께서 또한 너를 아끼지 아니하실까 조심하라.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엄하심을 보라. 넘어진 자들에게는 엄하심이 있으나 네가 그분의 선하심에 거하면 너를 향하여서는 선하심이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잘려 나가리라.
유대인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잘려버리시는데 하물며 접붙임을 받은 너희들도 잘려 나간다는 경고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엄하심을 보라는 것인데 이 말씀은 지금 예수님 믿는 우리들에게 이야기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원가지인 이스라엘도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잘라버렸듯이 너희들도 예수님 믿어서 구원받았으니 더 이상 구원에 대해선 걱정 안해도 된다는 것은 하나님 뜻을 왜곡한다는 것이다. 인간들 나부랭이가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칼빈이 어떻고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어 구원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 믿고 구원을 완성해 가는 길에서 잘못 하면 떨어진다는 것을 이렇게 말했다. 벧후2:22 개나 돼지들이 토한 것을 먹거나 진흙창에 뒹군다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게 된다는 것은 지금 성도들이 예수님 믿어서 구원받았는데 나중에 세상의 쾌락들 육신과 안목의 자랑들로 인해 믿음을 잃어버리면 나중 형편이 더 심하게 된다는 말을 비유한 것이다. 실제로 바울은 그런 예화를 디모데후서에 기록해 놓았다.
(딤후 4:10) 데마는 현재 이 세상을 사랑해서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떠났고 그레스겐은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으며.
여기 나오는 데마와 그레스겐과 디도는 사도바울의 조력자로 왼팔이고 오른팔로 볼 수 있는데 그들이 세상을 사랑하면서 믿음이 파선되어 지옥에 갈 정도로 변질되었는데 하물며 우리도 세상이 주는 부귀영화나 육신의 쾌락에 의해 믿음이 변질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데마는 사도바울과 사역을 함께 했던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나중에는 세상을 사랑해서 데살로니가로 갔다는 것은 우리들도 한순간에 변질되어 지옥에 떨어질 가능성이 있으니 구원에 대해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영혼을 팔고 사는 사기극 중에는 한번 구원받았으면 영원한 구원이라고 구원파들이 주장한다면 이러한 사악한 사기극에서 반드시 벗어나야한다. 우리들의 신앙의 기준은 세상끝날 즉 죽음 직전 신앙에서 인정받으면 된다.
인생은 마라톤을 경주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마라톤경주는 참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가하여 면류관을 쓰는 것이 목적이다. 출발할 때 앞섰다고 아니면 반환점을 제일 먼저 돌았다고 면류관 쓰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골인점을 제일 먼저 통과하면 면류관을 쓰듯이 우리 신앙생활도 지난 세월에 내가 어떻게 주님을 믿었는지 따지지 말고 지금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잘 믿으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눈은 오직 현재만을 보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과거에 아무리 믿음이 좋았더라도 죽음 직전 세상을 사랑한다면 천국과는 거리가 멀다. 구원은 한번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죽는 그 시간까지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하셨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하셨다.
(마11:12) 침례 요한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하늘의 왕국은 폭력을 당하며 폭력배들이 강제로 그것을 빼앗느니라. '침노'하는 단어를 보면 '강탈자', '난폭한 자'들 부정적인 이미지로 보이는데 이는 목적한 바를 쟁취하기 위해 결사적으로 노력하는 강하고 용기 있는 자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13:24)라고 되어 있다. 이런 말씀은 믿음은 능동적으로 하나님나라의 일을 하라는 말씀이다. 마음으로 믿는다고 조용하게 교회에 나와 예배만을 드린다고 구원이 보장된다는 말씀은 전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보다 우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더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 구원을 약속받았다는 뜻이고 구원은 이 땅에서 진리를 영접함으로 이루어집니다. 생명의 진리 안에 끝까지 머물러 우리 이름이 생명책에서 흐려지지 않도록 할 뿐 아니라 우리 이름이 더욱 빛날 수 있도록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하는데 힘써야 하겠습니다.
(눅13:3)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회개치 않으면 다 그와 같이 멸망하리라 하신 것 같이 주님께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 같은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만일 너희도 회개치 않으면 구원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도 구원의 길을 가다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인데 가롯유다가 그렇지 않았는가요? 우리들이라고 특별 케이스로 한번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사기에 속지말기 바랍니다. 제자들이 지옥갈 가능성이 있다면 우리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을 한번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였다고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말은 인류역사상 가장 극악한 사기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롬10장에서 바울이 말한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한다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로마서가 쓰여질 때 시대상황을 알아보자.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한다면 죽게 되거나 재산을 다 뺏기게 된다는 그런 상황에서 주라고 시인하였다가 잡히면 옥에 갇히는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자유롭게 사는 이 시대에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과 그 당시와 비교하면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변했다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무엇인가?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들에게 아무에게도 악으로 갚지 말고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는데 롬10장 9절에서 바울은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로마서 전체를 보면 어떤 단어로 요약되는가하면 그 단어는 어디서든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삶의 열매가 되어야 한다. 여러분이 예수믿는 열매를 입증하지 못하면 여러분은 구원을 아직 시작도 못했다는 것이다.
2. 구원은 선한행위로 완성된다 (약2:14-22)
어떤 교회에서 성경공부시간에 토론이 벌어졌는데 토론의 주제가“믿음이 제일인가, 행함이 제일인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편에서는“믿음이 제일이다.”하고 한편에서는“행함이 제일이다.”하면서 여러 가지 말을 동원한 말잔치가 벌어졌다는 것인데 이것처럼 어리석은 토론이 없다는 것이다. 믿음과 행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행함도 있는 것이고, 믿음이 없으면 행함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는 말씀에 대해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믿음이 있으면 보여줄 수 있는 행함도 있어야 한다
(약2:14) 내 형제들아 사람이 자기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행위가 없으면 그것이 무슨 유익을 주느냐?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 이 말씀은 믿음이 있는 사람은 행함으로 그 믿음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약2:18).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이유는 아브라함은 믿음대로 행함을 보여 주었다. 하나님께서 독자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 그는 이삭을 번제물로 바쳤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행함은 따르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스위치를 올리면 전등불이 켜지고, 꽃이 피면 열매가 맺히는 것과 같이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행함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행함도 없어 죽은 것입니다.
(2)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약2:15-17)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가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떠나가라, 너희는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하라 하고는 몸에 필요한 그것들을 너희가 주지 아니하면 그것이 무슨 유익을 주느냐? 17 이와 같이 믿음도 행위가 없으면 그것만으로는 죽은 것이니라.
믿음은 주 안에서 말한 대로 생각한 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먹을 것이 필요하구나 생각했으면 먹을 것을 주는 것이고 입을 것이 필요하구나 생각했으면 입을 것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헐벗은 자나 굶주린 자를 다 책임질 수는 없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나누어 줄 수는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줄이면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그 하나님의 명령이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잠시 생각 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다는 사람이 우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을 때는 예까지 들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그에게 왼 뺨도 돌려대며 또 어떤 사람이 너를 법에 고소하여 네 덧옷을 빼앗으려 하거든 네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고 또 누구둔지 너로 하여금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와 함께 십 리를 가며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고 네게 빌리고자 하는 자를 너는 물리치지 말라(마5:39-42).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믿음은 죽은 믿음으로 구원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3) 믿음은 행함으로 완성되어진다
믿음은 보여 줄 수 없는 추상적인 것인데 보여 달라고 합니다.
(약2:18) 참으로 어떤 사람은 이르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위가 있으니 네 행위가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내 행위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대로 순종하여 고아와 과부들, 궁핍한 자, 환란당한 자를 돌아보면 사람들이 우리의 행함을 보고 저 사람은 저들을 사랑하는구나 하고 내가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나의 행함으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약1:27).
하나님도 자신의 사랑을 그렇게 확증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이웃을 사랑하는 행함도 있어야 합니다. 이 선한 행함이 여러분의 믿음을 온전케 하고 당신의 믿음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다면 행함으로 믿음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 옳다고 인정하면서도 선한 행위를 한다고 하여 구원을 받는 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구원받기 위해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은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았기 때문에 선한 행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교회에서 믿음은 강조하면서도 정작 선한 행위는 구원과 상관없다는 엄청난 오류를 행하고 있다는 데 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 이웃 사랑 즉 선한 행위를 강조하셨다. 예수님은 이 선행을 구원의 조건으로 말씀하시지는 않는지요?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다. 마침 제자장과 레위사람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으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상처를 치유해주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으며 주막집 주인에게 돌보아 주기를 부탁하고 그 비용까지 대주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었다(눅10:30-36). 강도 만난 사람은 아무런 댓가없이 생면부지의 사마리아 사람을 통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당시 하나님의 율법을 가장 많이 알았고 유대인들에게 존경받았던 그래서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제일먼저 긍휼을 베풀 것 같았던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했지만 유대사람에게 멸시를 받던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의 모든 수고와 노력을 다 기울여 치료해주는 최고의 선행을 아무 대가 없이 베풀었다. 사마리아 인에게 긍휼함을 입은 강도 만난 사람처럼 우리들도 예수님께 아무런 대가 없는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믿는다면 예수님은 강도만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처럼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웃사랑에 대한 또 다른 말씀을 봅니다.
예수님 양과 염소에 대한 말씀은 최후의 심판 때에 이렇게 할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인데 심판의 기준은 선한 행위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이다. 믿음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선한 행위를 했느냐 안했느냐가 그날의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믿으면 즉각적으로 얻는 구원만을 생각하는데 구원은 시간적으로 이중성을 띤다. 하나는 예수님을 영접할 때에 이루어지는 즉각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난 후에 이루어지는 점진적인 것이다. 후자의 예는, 구원을 진행형으로 말하고 있다.
(빌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대로,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라.
만일 구원이 한 번에 즉각적으로만 이루어진다면, 바울이 이렇게 구원을 진행형으로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같이 구원의 시간적 이중성은 마치 대학에 입학한 것과 대학생활을 실제로 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대학은 합격만 하면 즉시 그 대학생이 되지만 대학에 입학했다고 해서 모두가 졸업하는 것은 아니다. 대학 4년 동안 대학에서 요구하는 학점을 취득하지 못하면 졸업 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단번에 이루어져서 믿으면 죄사함받지만 그 체험은 항상 현재로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기에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는 늘 자백해야 (요일1:9)하는 것도 바울이 말하는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따라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여 단번에 용서를 받았기에, 우리 미래의 죄까지 용서받았다고 하면서, 더 이상 죄를 자백하지 않거나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며 신앙을 사기치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의 자범죄에 대해 늘 용서를 구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 세상에서 죄 안짓고 살겠다는 것은 숨 안쉬고 살겠다는 말과 같다. 또 계명을 지키는 것은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바울을 통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끝을 맺으려 한다고 질타하면서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의 욕망을 거스르는 적대관계이다(갈5:17).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들을 짐작해본다면,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짐짓 죄를 진다면 그 곁을 떠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주로 영접한 과거의 사실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지금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만 한다. 그런데 만일 어떤 이가 믿노라고 하면서도 악한 행동을 지속적으로 하게 되면 그는 다시 죄아래 있게 되고, 결국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 바울의 에베소교회에 대한 경고이다.
(엡5:5) 음행을 일삼는 자나 부정한 자나, 그리고 탐욕을 부리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결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왕국에서 상속유업도 받지 못하느니라. 사단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 아니 우리보다 예수님에 대해서 더 잘 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단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보는 근거는 다름 아닌 행위에 있다. 즉 사단은 처음부터 선한 행위를 할 수 없는 것이고 언제나 악을 창출하고 거짓을 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사단을 가리켜 ‘거짓의 아비’라고 하고 있지 않는가? 따라서 믿음에는 반드시 선한 행위가 뒤따라야만 한다. 선한 행위가 없는 믿음은 파선된 믿음일 따름이다. 그러믈로 선한 행위는 믿음을 완전하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3.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구원에 관하여 중요한 것은 어떤 교리가 아니라 말씀안에서 찾아보면 된다. 예수님은 산상설교 중에서 “나무는 그 열매를 통하여 알게 될 것이며(마7:20) 나에 대하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간다.”(마7:21)라고 말씀하셨다. 또 바울 역시 성령의 열매 대신 육의 열매를 맺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경고하였다.
(고전6:9-10)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할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속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자나 간음하는 자나 여성화된 남자나 남자와 더불어 자신을 욕되게 하는 남자나 10 도둑질하는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욕하는 자나 착취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더욱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라.”(빌2:12)고 권고하고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의 행위는 항상 구원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물론 예수님과 바울의 가르침 속에 나타난 ‘행위’에는 이미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믿음은 항상 행위에 의해 점검되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행위’가 ‘믿음’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그 어느 하나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긴장의 문제이다. 이 긴장관계는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답게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믿음과 행함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 때는 그것은 굴러가지 못하고 멈추어버리는 성질이 있다. 결국 은혜가 뿌리라면 믿음은 줄기이며, 행위(선행)는 꽃이다. 또 은혜가 나무라면 믿음은 가지이고, 행위는 열매이다. 지금까지 믿음과 행위에 고찰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점과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행위는 서로 상호 역동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또 시간적인 순서에 의하면 은혜가 가장 먼저이고 다음이 믿음이며, 그 마지막은 행위(선행)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믿음과 행함을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믿음은 하나님과 관계이므로 수직선으로 표현된다면, 행함은 인간과 관련되기에 수평선으로 표현할 수 있다. 여기서 구원은 좌표평면상에 점선으로 표시한 이유는, 구원자체는 인간이 명쾌하게 판단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구원을 이야기할 때 믿음만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만 있으면 일단 구원 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마7:21)고 경고하셨다. 예수님이 경고한 이러한 위선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가라지’로 명명하셨다. 바울은 이러한 가라지 교인들을 두고, “모든 불의한 속임을 당하고, 거짓을 믿어서 멸망 받을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이들을 믿음이 파선된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선한 양심을 버리고, 그 신앙생활에 파선을 당하였습니다. 그렇게 된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이 바로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입니다(딤전1:19-20).” 심지어 그는 “친척을 돌보지 않으면 믿음을 저버린 사람이자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딤전5:8)”이라고 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의 소유자들이다. 따라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거나 감정적으로 믿어지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면서도, 행함(선행)에 대해 여전히 무감각한 사람들은 구원받았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정말로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으면 확실한 것은 생명책에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계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한번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됨을 부인 할 수 없다. 그 믿음은 주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후 3:2)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이 주신 그 믿음은 모든 사람들의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성령이 증거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그 믿음 자체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면 이 믿음을 받는 대상들도 하나님이 창세전에 택하신 사람들이구요. 그러므로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다 주관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며 하나님이 거저 다 마련해 놓으신 것을 손 내밀어 받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를 진실로 영접하면 구원은 하나님이 준비하여 놓은 선물로 얻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10:22,24:13) 즉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마치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교훈인지요! 많은 사람들이 시작은 하지만 마치지는 못합니다. 성경에는 믿음으로 시작하지만 마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들로 가득합니다.
(고후13:5)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한국교회가 가장 잘못알고 있는 구원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여기서 행위는 율법이라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지 선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혼의 구원(거듭남, 죄사함)은 나의 행위로 된 것이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로 된 것으로 자랑 할 것이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므로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예수님의 은혜이며 십자가의 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여러분의 앞에는 길이 많아 보일 지라도 참되고 복된 길은 오직 십자가의 길 하나입니다. 그 길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길이 아닌 좁은 길입니다. 끝가지 십자가의 길에서 주님만나는 그날까지 승리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