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집현의 김태수 작 이상희 연출의 운현궁에 노을지다를 보고
공연명 운현궁에 노을 지다.
공연단체 극단 집현
작가 김태수
연출 이상희
공연기간 2014년 4월 4일~6월 1일
공연장소 알과핵 소극장
관람일시 5월 11일 오후 3시
알과핵 소극장에서 인천소재극단 집현의 김태수 작, 이상희 연출의 <운현궁에 노을 지다>를 관람했다.
이 연극은 구한말 고종의 부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집권과 은퇴에 관한 이야기다.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 1820~1898) 이하응(李昰應)은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 시호 헌의(獻懿)로. 영조의 5대손(五代孫)이며 고종의 아버지이다. 1843년(헌종 9)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지고, 1846년 수릉천장도감(緩陵遷葬都監)의 대존관(代尊官)이 된 후 종친부유사당상(宗親府有司堂上)·도총관(都摠管) 등 한직(閑職)을 지내면서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勢道政治) 밑에서 불우한 생활을 하였다. 왕족에 대한 안동김씨의 감시가 심하니, 보신책(保身策)으로 불량배와 어울려, 파락호(破落戶)로서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칭(卑稱)으로까지 불리며 안동김씨의 감시를 피하는 한편, 철종이 후사(後嗣)가 없이 병약해지자 조대비(趙大妃)에 접근하여 둘째 아들 명복(命福:고종의 兒名)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허락받았다.
1863년(철종 14) 철종이 죽고 조대비(趙大妃)에 의해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봉해지고 어린 고종의 섭정이 되었다. 대권을 잡자 안동김씨의 주류(主流)를 숙청하고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부패관리를 적발하여 파직시켰다. 47개 서원(書院)을 제외한 전국의 모든 서원을 철폐하고, 국가재정의 낭비와 당쟁의 요인을 없앴으며, 《육전조례(六典條例)》 《대전회통(大典會通)》 등을 간행하여 법률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중앙집권적인 정치 기강을 수립하였다.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의정부(議政府)와 삼군부(三軍府)를 두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분리시켰으며, 관복(官服)과 서민들의 의복제도를 개량하고 사치와 낭비를 억제하는 한편, 세제(稅制)를 개혁하여 귀족과 상민(常民)의 차별 없이 세금을 징수했으며, 조세(租稅)의 운반과정에서 조작되는 지방관들의 부정을 뿌리뽑기 위해 사창(社倉)을 세움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국민들의 생활이 다소 안정되고 국고(國庫)도 충실해졌다.
반면, 경복궁(景福宮)을 중건(重建)하면서 원납전(願納錢)을 발행하여 백성의 생활고가 가중되었으며, 1866년(고종 3) 병인양요에 이어 1871년 신미양요를 일으키고 천주교도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를 가하는 등 쇄국정치를 고집함으로써, 국제관계가 악화되고 외래문명의 흡수가 늦어지게 되었다. 또한, 섭정 10년 동안 반대세력이 형성되어, 며느리인 명성황후가 반대파를 포섭하고 고종이 친정(親政)을 계획하게 되자, 1873년 그의 실정(失政)에 대한 최익현(崔益鉉)의 탄핵을 받았다. 이에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자 운현궁(雲峴宮)으로 은퇴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다시 정권을 잡고 난의 뒷수습에 힘썼으나, 명성황후의 책동으로 청(淸)나라 군사가 출동하고 톈진[天津]에 연행되어 바오딩부[保定府]에 4년간 유폐되었다. 1885년 귀국하여 운현궁에 칩거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리던 중 1887년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결탁하여 고종을 폐위시키고 장남 재면(載冕)을 옹립하여 재집권하려다가 실패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일어나자 일본에 의해 영립되어 친청파(親淸派)인 사대당(事大黨)을 축출하고 갑오개혁이 시작되었으나, 집정(執政)이 어렵게 되자 청나라와 통모(通謀)하다가 쫓겨났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세력이 강성해졌으나, 3국(독일·프랑스·러시아)의 간섭으로 친러파가 등장하여 민씨 일파가 득세하자, 1895년 일본의 책략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때 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시해되어 일본 공사 미우라고로[三浦梧樓]가 본국으로 소환된 후 정권을 내놓고 은퇴하였다. 1907년(광무 11) 대원왕(大院王)에 추봉(追封)되었다.
무대는 아름다운 수를 놓은 백색망사로 된 다섯 개의 기둥이 대궐기둥노릇을 한다. 그 앞 양쪽에 고색창연한 반다지 장이 놓여있고, 중앙에 세자높이의 계단식 단이 마련되어 있다. 고종의 목에 붉은 색의 긴 피륙을 두르고 그 끝을 대원군이 부여잡은 모습으로 흥선군의 대리청정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조대비를 비롯해 명성황후, 그리고 대원군의 부인 민 씨의 궁중의상 및 평상복도 극과 조화를 이루고, 일인다역의 출연자의 복장과 소품도 당대와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천둥벽력의 효과음도 극적 분위기 상승과 주인공의 심정변화와 절묘하게 어울리도록 연출된다.
연극은 도입에 철종의 붕어를 알리는 외침과 조대비가 이하응의 아들을 임금으로 지목하고, 아들의 목에 두른 붉은 띠를 부여잡은 흥선군 이하응의 대원군으로서의 섭정이 시작된다. 당시 집권세력인 안동김문의 인물들이 대책을 강구하면서, 대원군의 왕실척족과 양반관료들의 부패를 척결하려는 정치적 행보가 연극에 펼쳐진다. 그러나 당시 일본, 중국, 러시아 같은 열강의 조선 침탈과 개혁요구에 대응하는 대원군의 정책이 마찰을 일으키게 되고, 이를 기화로 며느리인 명성황후는 남편 고종에게 친정을 할 것을 종용한다. 결국 섭정자리에서 물러난 대원군의 고뇌와 갈등이 극에 그려지고, 그를 혼신을 다해 돌보는 흥선군의 부인 민 씨의 모습이 감동으로 그려지고, 붉은 띠를 놓아버리고, 평상복 차림의 흥선군이 초심사라고 하는 어느 산의 최고봉에 자리 잡은 절에 올라, 흥선군은 청년시절의 자신의 모습과 조우한다. 초심..... 의미있는 단어와 함께 흥선군의 깨우침이 극에 연출되면서, 일본낭인들에 의한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이 발발한다. 그 결과 대원군으로 복귀한 흥선군이 고종의 목에 두른 붉은 띠를 다시 손에 잡지만, 조선의 운명은 이미 망국으로 향하고 있음을 그가 어쩌지는 못한다.
김학재, 김용선, 박기산, 김동석, 조원희, 최경희, 이윤상, 유학승, 권동렬, 민충석, 정의갑, 유지수, 강성용, 전광지, 임솔지 등 출연자 모두의 호연과 열연은 시종일관 관객의 시선을 극에 집중시키며, 바로 근세사 속에서 선대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부각시킨다.
예술감독 이영희, 사진 류재형, 협력연출 황호연, 작화 이승연·권순창, 무대미술·의상 최경희, 무대감독 이용수, 조명 이승호, 작곡 황종하, 음향오퍼 박재우, 진행 유선자, 조명오퍼 오민석, 피디 이준석, 디자인 이상직, 안무 최태선, 의상제작 예성·이수진, 음악오퍼 김세응, 소품 이진숙, 진행 최지원, 기획·홍보·마켗팅 WHO`극단 은행목 등 모두의 힘이 하나가 되어 극단 집현(대표 최경희)의 김태수 작, 이상의 연출의 <운현궁에 노을 지다>를 고수준 고품격의 걸작 연극으로 탄생시켰다.
5월 11일 박정기(朴精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