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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의 재판(마 27:11-26)
사도신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을‘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한 마디로 본디오 빌라도라는 사람 책임 하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면 빌라도라는 사람은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예수님께 고난을 가한 장본인으로 이 빌라도를 거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그래 왔고, 앞으로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그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빌라도는 억울한 측면이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은 당시 대제사장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사람은 가룟 유다였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고난의 실제 원흉입니다. 빌라도는 다만 금요일 새벽에 밀려든 군중들의 압력 때문에 십자가형에 사인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몇 차례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노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신 모든 책임을 자기 혼자 진다는 것이 억울해 보이는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했을까요? 간단합니다. 그가 책임자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룟 유다가 배반을 했어도 그가 최종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아무리 대제사장과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 처형을 결정했어도 그가 허락하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아무리 백성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데모를 한다고 해도 그가 예수님을 내어주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은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께서 죄인이라고 최종 판결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대한 결정적 책임을 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판결한 빌라도의 재판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1. 영원한 재판장이 재판을 받아야 할 자에게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지금 예수님께서 당시 유대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총독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시려고 피고의 자리에 서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총독은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로마 황제를 대신해서 식민지인 유대지역을 통치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치,경제,사법, 그리고 종교에 이르기까지 절대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법적 측면을 보면, 빌라도는 사법의 최종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의 사법권은 산헤드린 공회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산헤드린 공회의 사법적 결정을 얼마든지 뒤바꿀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산헤드린 공회의 재판 결과 사형이 정될 경우 반드시 이 사건은 총독 빌라도가 최종 재판을 통해 확정을 해야만 사형이 집행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일차 재판을 통해 예수님의 사형 결정을 내린 후에 총독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해 달라고 청했고, 빌라도는 최종 재판을 위해 예수님을 재판정에 세운 것입니다. 이제 총독인 빌라도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예수님을 재판하고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재판을 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재판관이요 예수님은 죄인으로 세상 법정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사실 어처구니가 없는 장면입니다. 재판하는 이와 재판받는 이가 뒤바뀐 것입니다. 행 10:42-43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 사도가 고넬료의 집에서 설교하며 전한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재판장으로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재판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역사가 끝나는 날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재판정에 세워놓고 재판을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 25:31 이하를 보면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예수님께서 장차 있을 일에 대해서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심판주로 오셔서 모든 사람들을 그 보좌 위에 앉으셔서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본디오 빌라도는 장차 영원한 재판장이시요 심판주이신 예수님을 피고석에 세워놓고 재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차 그분에게 재판을 받아야할 자가 그분을 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사성어 가운데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둑이 도리어 매를 든다’는 말입니다. 처벌 받아야 할 자가 도리어 처벌하겠다고 매를 든 꼴입니다. 이 고사성어를 사용해서 우리가 흔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지금 본디오 빌라도가 저지르고 있는 이 상황이 바로 “적반하장도 유분수지”라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장차 당신의 재판정에 죄인으로 서야할 저 빌라도에게 피고로서 재판을 받고 계신 것입니다.
장차 재림하셔서 심판주로 보좌에 앉으셔서 심판받아 멸망을 선고 받게 될 저 빌라도에게 십자가 처형을 선고받고 계신 것입니다. 그야말로 적반하장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재판장이시면서 죄인으로 재판을 받으시는 수모를 겪으셨습니다. 이것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당하신 고난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영원한 재판장이심에도 불구하고 피고인이 되어 재판을 받아주신 것입니다. 그 수모와 그 억울함을 다 견뎌주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죄를 다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마 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우리의 무거운 짐과 우리의 모든 연약한 것을 대신 짊어지시고 그 모든 수모와 억울함을 다 견뎌 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으면 그 은혜가 임하고 그 구원을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2. 죄 없으신 분이 불의한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자기에게 이송되었을 당시에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종교 문제로 쉽게 처리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재판하기 시작할 때에야 이것이 단순하지 않은 문제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여러 자료들을 조사해 보면 본래 빌라도는 그리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 못 되었습니다. 잔인하고 감정적이며 굉장히 탐욕적인 관리였습니다. 그가 잘못을 저질러서 결국은 로마로 되돌아가는 기록도 찾아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존경받지 못하고 잔인했던 빌라도였지만, 예수님을 재판하는 과정에서는 예수님에게서 어떤 죄나 사형 선고를 내릴 만한 혐의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정말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한 적이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 대제사장의 법정에서 했던 것과 같이 아주 간결하고 분명하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말하였도다. 네가 말한 그대로다.“
빌라도는 또 묻습니다. "이렇게 많은 증거가 있는데 너는 이 증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예수님은 거짓 증거에 대해 침묵하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재판하면서 그분이 혐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그는 예수님이 두려워하지 않고 초연하게 법정에 서 있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예수님에게서 보통 사람과는 전혀 다른 어떤 모습을 느낀 것입니다.
특별히 19절에 보면 재미있는 기록이 나옵니다.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자료들을 조사해 보면 빌라도의 부인은 신실한 크리스천이다고 합니다. 빌라도의 부인이 꿈에 아주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판하는 중에 있는 남편에게 사람을 보내서 "내가 꿈에 무척 고생을 했다. 저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니 상관하지 말고 당신은 손떼라"는 말을 남편에게 전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혐의없다는 사실이 빌라도의 부인의 꿈에까지 나타났다는 점입니다. 재판이 진행되어 청중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지를 때 빌라도는 이렇게 반응합니다.
23절.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여론 재판을 했을 때 빌라도는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했느냐?"고 질문합니다. 그는 본의 아니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면서 너무 괴로워서 자기의 손을 물로 씻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 사람의 피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24절.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자기의 양심과 법 지식으로 볼 때 예수님을 사형에 내줄 만한 근거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인류가 다 일어나서 고발하고 고소해도 예수님에게서는 죄를 찾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 자신이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2:22에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큰 죄든 작은 죄든 누구든지 죄가 있다면 그는 그 죄값을 받아야 합니다. 죄값은 사망입니다. 소크라테스와 공자, 석가와 같이 인류의 성자로 존경받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구원자가 아닌 줄 아십니까? 그들이 선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죽어야 할 죄값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흠도 티도 없으시며, 죄가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요 18-19장을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하는 장면이 자세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첫번째로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고 나와서 고발한 유대인들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18:38)“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그래서 빌라도는 타협안으로 유월절 전례를 따라 바라바라는 흉악범과 예수님 중 하나를 택하면 그를 놓아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는 당연히 저들이 예수님을 놓아달라고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자 죄 없는 예수님을 방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두 번째로 빌라도가 예수님을 끌고 가서 예수님을 채찍질했습니다. 군인들로 하여금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희롱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고발한 유대인들에게 채찍질 당한 예수님을 끌고 나와 보여주면서 또 말했습니다. (요19:4)“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그냥 채찍질 정도로 예수님을 방면하려 한 것입니다.
그러자 저들이 소리쳤습니다. (요19:6)“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빌라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19:6)“그렇다면 너희들이 직접 예수를 끌고 가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 이번에는 저들이 빌라도에게 자기들의 법으로는 예수님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소리쳤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다시 예수님을 심층 심문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빌라도는 예수님께 죄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석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번에는 저들이 빌라도를 협박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을 놓아주면 황제에게 반역하는 것이라고 협박했습니다. 자기를 왕이라고 하는 자를 풀어준다면 황제에게 반역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풀어준다면 자기들이 황제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빌라도의 죄를 고발하겠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심문을 해 봐도 예수님은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풀어주면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웠습니다. 저들이 자기를 황제에게 직접 고발할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저들의 원대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이 재판 과정이 무엇을 말해주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죄 없는 분으로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십자가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이토록 불의한 재판 과정을 지켜보시면서 한 마디 말씀이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무죄를 항변하지 않으셨습니다. 불의한 재판 과정에 대해 한 마디 문제 제기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억울함을 다 참으셨습니다. 그 모든 불의를 다 견뎌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 취급을 당하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의인이 흉악무도한 죄인으로 그 참담한 꼴을 다 당하셨습니다. 이 또한 예수님께는 감당하시기 힘든 고난이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바로 우리 때문입니다. 이사야 53:6,7절에서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우리가 죄인으로 당해야 할 그 참담한 꼴을 주님께서 대신 담당해 주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형을 받으셨습니다.
본문 26절을 보면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빌라도가 최종 재판을 끝냈다는 것입니다. 결과는 예수님을 사형집행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극악무도한 죄인들이나 당하는 십자가 처형을 받게 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처형은 인간이 고안한 처형 방법 가운데 가장 잔인한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원래 페르시아 지역에서 자행되던 처형 방법인데 로마가 식민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받아들여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로마시민들은 사형수라 할지라도 이 십자가 처형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식민지의 노예나 반역자들에게만 이 십자가 처형을 강행했습니다. 이 십자가 처형이 잔인한 것은 우선 처형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재판으로 형 집행이 결정되면 먼저 심한 매질을 당합니다. 그리고는 처형 장소까지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이 때 길거리에 사람들이 모여들이 죄인을 모욕하고 저주합니다.
처형 달릴 곳에 도착하면 발가벗기게 됩니다. 간단히 가릴 곳만 가린 채 십자가 위에 높이 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위에는 이 사람의 죄명이 붙어있습니다. 처형 당시 모여든 군중들이 침을 뱉고 돌을 던지고 모욕을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있는 동안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계속 저주를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 끔찍한 수치와 모욕으로 정신이 황폐화되고 결국 스스로도 자신을 저주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인격말살 처형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위해 수치와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당할 수치와 모욕을 대신 다 당해 주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십자가형이 잔인한 것은 육체적 고통이 극심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심한 채찍질을 당하게 됩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로마 군인들이 사용했던 채찍은 가죽을 꼬아서 만들었고 안에는 쇠구슬을 박아 넣었고 밖에는 양 뼛조각을 붙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채찍 하나는 이런 가죽 끈 39가닥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채찍을 한 번 내려치면 살가죽이 찢어지고 살점이 뜯어져서 피가 흐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십자가 처형의 선고를 받으신 직후 로마 군인들에게 끌려가 모진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지난 밤 꼬박새우며 이리저리 끌려다니시며 심문을 받으셨고, 아무 것도 드시지 못한 상태에서 끔찍한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이미 그 몸은 기진맥진하신 상태에서 견디기 힘든 육체적 고통을 겪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다는 것은 양손과 발이 못 박힌 채 공중에 내달리는 것을 말합니다. 체중 때문에 몸이 아래로 쳐집니다. 그 때 양손바닥은 찢어서 피가 흐르고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보다 횡경막이 눌려서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온 몸은 산소부족으로 경련이 일어나서 견딜 수가 없게 됩니다. 숨을 쉬기 위해 발로 몸을 치켜세우면 숨은 쉴 수 있게 되지만, 이 때 더 큰 고통이 발에 집중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고통을 무려 6시간을 견디셨습니다. 온 몸으로 이 모든 고통을 다 겪으시다가 죽음을 맞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원하시면 얼마든지 이 고통을 벗어날 수 있으셨습니다. 가해자들을 물리치실 수도 있으시고 빌라도를 간단히 제압하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모진 고통을 다 당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끔찍한 고통을 다 당하셨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사 53:5-6에서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당하신 것은 저와 여러분 때문입니다. 우리가 당할 고통을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당할 저주를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아니 성령의 도우심으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십자가를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죄하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그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하고 십자가의 복음을 바르게 믿고 바르게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