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서 1980년 5월21일 헬기 사격에 사살된 박금희양 증언 있었지만 유언비어 취급… 기총소사 최근 실체화 막내딸 진실찾던 부모 별세… 오빠 박씨 "軍 시인해야"
입력시간 : 2017. 02.06. 00:00
만인보는 고은(83) 시인이 1986년부터 2010년까지 30여 년에 걸쳐 완성한 시집이다. 시인은 1980년 민주화 운동에 가담해 '내란음모 및 계엄법 위반'으로 육군교도소 특별감방에 갇혀 있는 동안 '만인보'를 구상했다. 이를 현실로 옮겨 4001편에 달하는 시를 쓰고 엮었다.
1980년 5ㆍ18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이 37년만에 확인된 가운데 '금희의 죽음'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고은 시인은 '만인보'에 1980년 5월 계엄군의 총탄에 스러진 고(故) 박금희(당시 17세)양의 죽음을 절절하게 그려냈다. 특히 헬기 사격에 피를 쏟으며 죽어갔다고 묘사했다. 만인보에 나오는 '금희의 참변'은 진실일까.
5일 5ㆍ18민주유공자유족회 기록과 당시 사망자 자료에 따르면 박금희양은 지난 1980년 5월21일 오후 2시께 계엄군이 쏜 M16 총탄에 의해 하복부 관통상을 입고 즉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부상자들에게 도움이 주고자 광주기독병원을 찾아 헌혈을 하고 나서던 길이었다.
일부 기록에는 박양을 관통한 총알이 헬기에서 날아왔다고 적혀있다. 계엄군이 헬기에서 '조준 사격'을 했다거나 '총탄이 쏟아졌다'는 식이다. 고은 시인이 '만인보'에 쓴 시 '박금희'에도 "헬기에서 쏜/총 맞아/거리에 피 다 쏟아버렸다"고 적혔다.
헬기 사격은 시민들을 향한 집단발포가 '자위권 발동'이라는 신군부의 입장이 거짓이었음을 밝힐 결정적 증거다. 고(故) 조비오 신부 등 당시 현장에 있었던 시민들이 끊임없이 헬기 사격을 봤다고 증언했음에도 불구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전일빌딩 탄흔 감식을 통해 5ㆍ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공식화하면서 박양의 참변이 실체화 되고 있다.
박양의 셋째 오빠인 박선재(64)씨는 "헬기 사격에 대한 얘기는 숱하게 있어 왔지만 유언비어 취급받았다"며 "실체적 증거인 탄흔이 발견된 만큼 당시 목격자들의 진술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저로서도 사실이라는 확신이 든다"고 말했다.
박씨는 '그날'의 진실에 한 걸음 다가섰다는 위안보다 다시금 참혹하게 다가오는 박양의 죽음에 참담한 심정이라고 전했다. 그는 지난 80년 5월 이후 박양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고자 노구를 이끌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던 양친의 얘기도 꺼냈다.
어머니 문귀덕씨는 막내딸이 죽기 전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려고 이런 일이 생겼다'던 말을 결코 잊지 못했다. 아버지 박병민씨는 고은 시인이 '만인보'에 쓴 시 '박금희'를 메모해 두고 외우다시피 했다. 한 편의 시에 그날의 진실이 소상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은 시에는 80년 5월21일 박양이 아침부터 빨래를 개켜두고 헌혈을 하기 위해 기독병원을 찾아간 일, 헬기에서 쏜 총을 맞아 바닥에 쓰러진 순간, 관째로 청소차에 실려가 유족들도 모르게 망월동 묘지에 묻힌 통한 등이 여과 없이 적혔다.
그러나 박양의 양친은 결국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지난 2005년, 어머니는 지난 2012년 별세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 일가의 사연을 고은 시인은 '그 가족'이라는 시로 알리기도 했다. "나 하나 죽어/가족이 다/볏집 흙집 세들어 살아도/행복했던 가족/그 가족이 다 가슴속 갑오징어 먹물 찼다".
박선재 씨는 "막내 금희가 그렇게 죽고 나서 가족들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생전에 그것 때문에 데모도 많이 하고 유족회에 살다시피 했다"며 "전두환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장삼이사들이었다. 단지 내 자식이, 형제가 왜 죽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군 당국과 당시 관계자들이 진실을 밝히고 시인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정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