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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8-14
축복의 땅을 분양 받은 사람들 / 김덕복 목사
어느 신학교에서 성경시험을 치렀는데 다음과 같은 문제가 출제가 되었답니다.“하나님의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정복하고 그 땅을 분배받은 이스라엘의 지파는 모두 몇 지파입니까?”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신학생들의 답이 무려 3/2 이상이나 틀렸다고 합니다. 대부분 학생들이 이스라엘은 12지파니까 당연히 12지파가 약속의 가나안땅을 분배받았다. 이렇게 추리해서 답을 썼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읽어보시면은 이스라엘은 12지파지만 약속의 땅을 분배받았던 지파는 9지파 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면 2지파 반은 어디의 땅을 분배받았는가 하면 요단강 동편의 땅, 그러니까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에 들어오기 이전에 요단강 동편에 있는 아모리 왕 시혼과 비산왕 옥의 땅을 분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이 성경을 보면은 우리로 하여금 약간 헷갈리게 하는 그런 내용들이 있는데 9지파 반이 요단강 서편에 있는 땅을 분배받았고 2지파 반이 요단강 동편에 있는 땅을 분배받았는데 그러면은 12지파가 딱 맞아떨어집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여호수아서 13장 14절 말씀과 33절 말씀을 보면은 레위 지파는 땅을 분배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은 한 지파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나 가지고 12지파가 땅을 분배받은 것이 되는 것입니까? 땅을 12지파가 분배받았고 레위지파는 땅을 분배받지 못했으면 그러면은 이스라엘 지파가 13지파가 되는 것이 되어집니다. 그런데 여기 이제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잘못하면 착각을 일으키기 쉬운 부분이 나옵니다. 여러분 7절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13장 7절을 보시면은“너는 이 땅을 아홉지파와 므나세 반 지파에게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라 하셨더라”
그러니까 9지파 반 그 9지파 반의 사람들이 가나안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모세가 살아 있을 때 루우벤 지파, 갓지파, 므나세 반 지파 이 두 지파 반이 요단강 동편의 땅을 분배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레위 지파는 땅 분배에서 제외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을 보면은 이스라엘을 12지파로 지칭 할 떄는 두 가지 원칙에 준해서 지칭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새로 주신 이름이 이스라엘인데 이스라엘에게는 12아들이 있었고 그 12아들의 이름을 따라서 무슨지파, 무슨지파 이렇게 지칭이 되어졌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모세에 의해서 12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인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요셉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므낫세라는 아들이 있었고 하나는 에브라임이라는 아들이었습니다. 이 두 아들에게는 각각 기업을 줄 때 따로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레위 지파를 제외하고 요셉의 아들 두 사람을 한 지파로 치지 않고 두지파로 인정해 주고 그들에게 땅을 분배함으로 말미암아서 일반적으로 땅을 분배하고 그 후대에 와서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로 할 때는 이 기업과 관련해서는 이 므낫세 지파와 에브라임지파가 두 지파로 인정됨으로 말미암아 레위 지파를 제외한 열두지파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 혹시 여러분들 착각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의 지파 다른 지파보다 하나님으로부터 기업지를 두 몫을 받은 그런 셈이 된다고 보면 되는 것입니다.
자 오늘 여러분 보시는 이 여호수아 13장을 크게 3등분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 1절부터 7절 사이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아홉지파 반에게 그러니까 약속의 땅 가나안을 나누어주는 장면과 그리고 8절에서 14절까지는 바로 이 두지파 반, 물론 15절부터도 계속해서 이 두지파 반에 대해서 나누어주는 구체적인 땅 분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그리고 마지막 절을 보면은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땅을 기업으로 주지 않은 그런 내용으로 13장이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우리 먼저 이 13장 1절 기록을 보면서 아직도 이스라엘에게는 정복하지 못한 미 정복지가 많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미 정복지의 분배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은 아직도 이스라엘이 정복해서 취해야 될 땅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서 11장을 한번 봅시다. 11장을 보면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11장 23절에 이렇게 기록을 했습니다.“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인간이 보는 관점과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은 다른 것입니다. 인간이 보는 관점에서는“그래도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 우리가 다 했다, 다 이루었다.”하는데 하나님은 아직도 정복해야 될 땅이 많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나이가 많아 늙었다 그랬습니다. 여기에서 나이가 많아 늙었다는 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 적인 표현으로 봤을 때는 임종에 가까운 그런 노쇠하고 연로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음 장인 14장을 보면은 갈렙이라는 사람이 자기 나이를 85세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봤을 때에 여호수아의 나이는 얼마였나 하면은 학자들이 약 여호수아는 100세정도 안팎이었을 것이라고 이렇게 추측을 합니다.
그러니까 그 기력이 쇠할만하고 정말 일선에서 직접 전투에 나가서 싸움을 할 수 없을 그런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여호수아는 7년 가까이 치르던 전쟁을 종결짓고 이제 땅 분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이스라엘 지경에는 하나님께서 정복하라고 하셨던 땅의 남은 것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여기에 기록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을 정복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들이 앞으로 더 노력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이방인들로부터 쟁취하고 정복해야만 될 사명이 그들에게 주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을 오늘 이 본문 말씀을 펼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직도 탈환하지 못했던, 정복하지 못했던 땅을 나누어주면서 저 건너는 너희 땅, 저기는 너희 땅, 이 땅은 너희 땅, 이 땅은 어느 어느 지파 땅 이렇게 나누어주면서“이 땅을 정복하라.”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오늘 이 말씀이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가 하는 것을 여러분이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통해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인생을 통해서 그 사람에게 준 축복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축복을 다 헤아리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뜻을 가지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축복을 우리가 성취하고 달성한 축복도 있고 아직도 성취하지 못하고 달성하지 못한 축복들도 있음을 알아야 될 줄 믿습니다.
그들이 7년 동안 열심히 싸우고 노력했지만 그들이 생각할 때는 이쯤 하면 됐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얻을 땅의 남은 것이 많다. 그 땅까지도 분배하고 그 땅을 너희들이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명령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은 그들의 선배들이요, 그 신앙의 선조들인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의 할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것을 그들의 아들, 그들의 손자들이 이루어야 될 과업이 그들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때떄로 우리는 좋은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고도 내 당대에 영적인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해서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다 잃어버리는, 영적인 축복을 다 잃어 버리고 빼앗겨 버리는 그런 잘못을 저지를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결론적으로 미리 말씀을 드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얻을 땅의 남은 것을 분배를 하고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 나누어 주셨는데 수백 년이 지나는 동안 이스라엘은 그 땅을 정복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 만큼 조상에 대해서 숭배하고 경외심이 강한 민족은 세계에서 드뭅니다.
조상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 나중에 죽어서 조상 뵐 면목이 없다. 이런 주장들을 참 많이들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영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부모들 우리의 선조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그런 어떤 귀한 유업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당하고 실행했어야만 되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그것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뜻이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그 생을 펼쳐 나가면서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 주셨던 약속의 땅이 있는 것처럼 우리에겐 약속의 기업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가 열심히 하나님 앞에 살고 열심히 노력하고 힘을 다해서 정복할 때 그 약속의 땅이 온전히 하나님의 축복으로 나의 것이 될 수도 있고 그 약속이 축복이 나의 것으로 돌아오지 않고 계속해서 이방인들의 수중에 그대로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너희들 이제 약속의 땅에 들어왔으니 알아서 살아라.”이렇게 하지 않으시고 여기는 어느 지파의 땅 저기는 어느 지파의 땅, 그러니까“너희들은 사명을 다해서 그 땅을 정복하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 후손들에게 온 신앙적인 전통을 물려주어야 되고 영적인 사명감을 북돋아 주어야 됩니다.
내 당대보다는 내 다음세대가 더 하나님을 뜨겁게 섬기고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 수 있는 후손들이 될 수 있도록 영적인 유산을 물려주어야 되고 영적인 과업을 그들에게 안겨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부모들이 오늘날 얼마나 많은 실패를 하고 있습니까?
세상적인 것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애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면서도 우리 자녀들이 신앙적으로 바로 살아야 되고 신앙적으로 귀한 것을 본받아야 되는 그 일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나 소흘히 하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으로 패배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땅을 정복하고 그리고 다스리라.”그랬습니다.
임마누엘 칸트라는 유명한 근대 철학자는 아마 세계 철학사 속에서 칸트만큼 우뚝 선 철학자는 없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태어났던 고향을 떠나본 일이 없이 조그만한 한 대학 도시에서 살다가 갔습니다. 그러나 철학을 하는 사람들이라면은 칸트는 세계철학의 한 저수지다 그러니까 과거 칸트 이전의 모든 철학 사상을 칸트라는 철학사상의 저수지에 담았다가 그리고 다시 재분배 해 주었던 근세 철학에 사실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칸트는 말입니다, 고향을 떠나지 않고 조그만한 마을에서 그것도 대학 교수 자격도 못 얻고 시간강사로 한평생을 보내며 살았던 사람이지만은 그런 그의 마음속에 세계와 우주를 품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가 어느 곳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 자신들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온 세계를 향해서 가슴을 열고 그것을 품고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그런 역할들을 우리 자신들이 감당해 나가야 되리라 생각이 듭니다.
우리 인간은 끝없이 펼쳐진 정복되지 않은 세계를 향해서 나가야 될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믿는 사람들은 불신자들에게, 이방인들에게 모든 하나님의 기업지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로 그냥 적당하게 살아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가나안 정복을 이루어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되리라 생각이 듭니다.
2. 요단 동편을 기업으로 받은 지파들
다음 7절을 보시면은 아홉지파 사람들과 므나세 반지파 사람들이 요단강 동편의 땅이 아닌 요단강 서편의 가나안땅을 이제 기업지로 분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8절부터는 요단강 동편의 땅을 분배받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거기 등장을 합니다.
이 이야기는 오래 전에 민수기 32장의 사건에 기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에 들어오기 위해서 그들은 시나이 반도를 헤매고 다니다가 이제 북상해서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땅에 들어와야 되는데 그들이 들어오는 길목에는 바로 아모리 왕 시혼이 다스리는 나라와 비산 왕 옥이 다스리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길을 비켜주지 않고 그들 앞을 가로막게 되었습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 명을 받아서 이 두 왕을 쳐부수고 이 요단강 동편 땅을 정복을 하게 됩니다. 이때 소위 말하는 르우벤 지파의 자손들과 갓 지파의 자손들이 모세에게 나와서“우리들은 다른 지파에 비해 가축들이 많기 때문에 이 좋은 목초지를 우리에게 주십시오. 우리는 여기에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이집트의 종살이를 할 때 나일강 삼각지의 목초지에서 살면서 가축을 많이 기르고 또 우리는 가축이 많기 때문에 이 가축들을 다 끌고 요단강을 건너가기가 어려우니까 우리는 이쯤에서 그냥 흩어져서 여기에서 살겠습니다.”하고 요청을 합니다. 그때 모세는 분노를 터뜨리면서 너희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냐 다른 형제들이 지금 요단강 서편에 싸우러 나갔는데 너희들은 여기 눌러 앉을 작정을 하고 다른 지파의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낙심시킬 수가 있느냐하고 책망을 합니다. 그때 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모세에게 이렇게 조건을 내 겁니다.
우리가 이곳에 머무르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다만 우리는 가축이 많기 때문에 여기에 목초지가 참 풍부하고 또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서 성읍을 건축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우리가 여기에서 그냥 눌러 살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다른 지파들과 같이 요단강을 건너가서 우리가 무장을 하고 그들 앞에 선두에 서서 요단강 서편에 땅을 정복하는 일에 앞장서겠다.
그리고 세 번째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들이 그 땅을 완전히 분배받을 때까지 고향 땅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들과 함께 머물겠다는 조건을 제시했을 떄 모세는 조건부로 이 두지파 반에 대해서 요단강 동편 땅을 차지하도록 허락을 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제사장 엘르아살과 또 자기의 대를 이어나갈 지도자 여호수아를 불러놓고 이것을 확정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그 무렵에 여호수아가 이 두지파 사람들에게 너희는 여기에서 머물지 말고 너희는 다른 형제들보다 먼저 요단강을 건너가서 다른 형제를 도우라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지파 사람들보다 먼저 기업을 받았으니까 너희들은 솔선 수범해서 그들을 앞서 나가서 싸우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제 세월이 흘렀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난 뒤에 보니까 이들은 모세에게 했던 약속, 여호수아에게 갱신했던 그 약속을 그대로 성실하게 지켰었다는 겁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바로 약속을 성실히 지키는 사람으로 살아야 됩니다. 믿는 사람들은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됩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온갖 달콤한 말을 다하고 자기 목적을 달성했을 떄는 다른 사람들은 어떤 어려움이 있든지 외면해 버리는 그런 사람은 결단코 우리 그리스도 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이 두지파 반의 사람들은 한때 집단이기주의에 사로잡혀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했고 낙심하게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책망을 듣고 이들은 깨닫고 자기들 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이기심을 버리고 먼저 무장을 하고 그들의 앞에서 싸웠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땅을 분배받기 전에는 그들의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요단강 서편에 있는 땅을 기업으로 받지 않았습니다.
이 세 가지 약속을 그들은 그대로 다 준행했던 것을 우리는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약속의 땅을, 소위 말해서 요단강 서편의 땅은 받지 못했지만 요단강 동편의 땅을 먼저 기업지로 받았던 자들입니다. 먼저 받은 사람들,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축복을 먼저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 축복은 우리의 공로에 의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거저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받은 것만 생각하고 그것만 움켜잡고 하나님의 뜻을 감당하지 않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시작은 좋은데 끝이 나쁜 사람들이 참 많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시작은 좀 미약하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도 마무리가 좋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시작보다 끝이 더 좋아야 됩니다. 물론 과정도 좋고 끝도 좋아야 됩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에서 보여주는 두지파 반의 사람들은 시작은 부끄러운 모습으로 시작을 했지만은 마무리는 그런 대로 약속을 지키고 그들의 책임을 잘 감당해서 그들이 앞서 나가서 다른 지파를 도왔던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바로 이들과 같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3. 레위 지파가 받은 기업
이런 말이 나옵니다.“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심 같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기업이 되심이었더라.”
그 다음 14절 말씀“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기업으로 준 것이 없었으니 이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 기업이 됨이니 그에게 이르신 말씀과 같음이었더라.”
이것은 무슨 말씀이냐 하면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 레위의 후손들을 가르쳐서 레위 지파라고 합니다.
물론 모세와 아론도 바로 이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레위 지파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일 하나님의 성소를 돌보는 일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했던 한 지파였습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일을 하지 않고 종교적인 직무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다른 지파와 구분을 하시고 그들의 생계를 위해서 땅을 별도로 분배하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와 그리고 예물들을 가지고 그들이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특별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오늘 여기에 보시면은“하나님께서 바로 그들의 기업이 되셨다.”그래 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책임져 주신다는 말이고, 14절에서“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 기업이 됨이니”이 말은 화제물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리기 위해서 가지고 나오는 제물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드리기 위해서 가지고 나오는 모든 제물을 예를 들어 송아지, 숫소, 염소, 비둘기, 양 이런 것을 가지고 나오면 그것의 전부를 다 불태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일부를 떼어내서 불을 태우고 그 나머지는 레위인들이 나누어서 그것을 가지고 생활을 하도록 조취를 취하셨습니다. 그래서 레위인들은 길삼도 하지 않고 목축도 하지 않고 농사도 짓지 않고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예물을 가지고 생활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명하시고 그들에게 기업을 분배하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만약 레위인들이 목축업도 하고 농사도 짓고 모든 일을 다한다면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해야 될 가장 중요한 일을 소흘히 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이스라엘이 타락하고 범죄했을떄 레위인들이 자기 직업을 내 팽개치고, 자기 본업을 내 팽개치고 다른 업에 종사했던 그런 기록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세워져 있을 때는 레위인들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십일조와 그리고 재물들을 가지고 그들은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다른 직업을 가지지 않고 주의 일에만 전념하는 교역자들의 생활이 어쩌면 레위인의 그 모습과 아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교회에서 목사들이나 또 교회 교역자들은 일반적인 직업을 갖지 않도록 하는 그런 원칙을 아직도 지켜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목사나 교회 교역자들 이 결코 옛날의 레위인이나 또 옛날의 제사장과 똑같은 직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될 줄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바로 소위 성경에 마틴 루터가 독일에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부르짖은 한 중요한 사상이 있는데 그것이“만인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다 제사장입니다.
히브리서에 있는 내용을 보면은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 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장막이 제거되어지고 휘장이 제거되고 우리는 다 함께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바로 나갈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고 그랬습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는 하나님과 직통관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조를 나누어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수종을 들게 했습니다. 대제사장만 1년에 한번씩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외에 어떤 사람도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직접 상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원리를 보면은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을 여셨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제사장과 같다는 것이 마틴 루터가 새로운 신학 사상을 성경을 통해서 주장을 했고 오늘날 개신 교회들 대부분 기독교회들이 이 만인 제사장론에 대해서 수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와 여러분은 다 함께 목사만 제사장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제사장으로써의 직분을 가졌다는 것을 여러분이 기억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에 제사장들은 기업을 받지 못했습니다.
땅을 분배받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땅이 있는 사람도 있고, 땅이 한 평도 없는 사람도 아마 있을 줄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부모로부터 받은 유산들,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기업, 분깃 그것이 어떤 지파는 좀더 크고 어떤 지파는 좀 더 작고, 어떤 지파는 산악지대에 있고 어떤 지파는 평지였고 서로서로 다 차이가 납니다.
그러나 레위지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선 레위지파에겐 아무것도 주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레위 지파가 하나님 앞에“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하나님 섭섭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니까 우리 지파에게는 제일 요지의 땅을 우리에게 주셔야지 왜 우리에게 아무것도 안주십니까?”얼마든지 항의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레위 지파 사람들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업이 없고 분깃이 없고 부모의 유산이 없다는 것이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저주도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레위인이 아무것도 받지 못한 것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내가 너희들을 책임진다.”하는 보증 수표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너희들이 나의 일을 한다면은 내가 너희를 전적으로 책임진다. 너희 지파를 책임진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요 하나님의 또다른 축복인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로부터 많은 유산을 받아서 편안하게 사는 것도 하나의 축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더 열심히 살고 더 열심히 노력하고 인생의 깊은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면은 그것이 부모로부터 많은 유산을 받은 것 보다도 더 큰 축복임을 여러분들이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정말 여러분들 누구누구는 유산을 얼마 받았는데, 누구는 얼마 받았는데 그렇게 하면서 여러분 속쓰리고 안타까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세속적인 유산에 크고 적음.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확실한 영적인 유산이 있음을 우리 자신들은 꼭 기억을 해야 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만큼 자식들에게 뭘 많이 물려줄려고 하는 그런 집착을 가진 민족은 아마 세계에 별로 없을 겁니다.
서양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번 재산을 사회로 환원시키던지 아니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교회나 성당에 아니면 자선단체에 그대로 다 기부를 합니다. 자식들에게는 재산을 잘 안 물려줄려고 합니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우리 한국 기독교계에서도 후손들에게 유산 물려주지 않기 운동을 기독교가 중심으로 하고 있는데 뭐 유산 물려주지 않기 운동하는 사람들이 지금 막 형무소에 잡혀가고 왔다 갔다 하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참 뭔가 잘못됐다 하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얼마 전 어느 잡지를 보니까 황금족에 대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오렌지족이 압구정동을 중심으로 해서 있었지만 요즘은 서울 강남을 휩쓸고 다니는 황금족들이 있는데 이 황금족들은 졸부들의 일파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의 하루는 낮에는 골프장에서 어슬렁어슬렁하다가 밤이 되면은 고급 룸살롱이나 술집에 가서 밤을 보내고 또 늦잠 자고 다시 모여가지고 고급 외제 승용차를 타고 무리를 지어서 돌아다니고 돈을 주체하지 못해서 하루에 그 사람들이 쓰는 돈이 천 만원 단위를 쓴답니다. 술집에 가서 가방을 딱 열면은 수표도 안가지고 다니고 현찰만 한 가방씩 담고 가서 그대로 뿌린답니다. 그게 어디 인간이 할 짓입니까? 완전히 정신나간 미치광이들이 하는 짓이지.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참 부럽다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는데 여러분 마음속에 참 부럽다 하는 생각이 든다면은 여러분 신앙이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내 손이 수고한 대로 수고의 댓가를 가지고 먹고살라고 합니다. 수고의 댓가, 내가 이마에 땀을 흘리고 내 손이 수고한 댓가를 가지고 먹고사는 사람이 가장 복 되고 복 받은 사람이라고 그랬습니다. 땀 흘리지 않고 손이 수고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먹고사는 사람, 그 사람은 복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또 다른 축복을 헤아릴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레위 지파는 예배를 위해서 부름을 받았고 성소를 위해서 부름을 받았고 하나님을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바로 이 레위 지파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내 두 손에 가진 것 하나도 없고 집문서도 없고 땅문서도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주신 이 축복으로 말미암아 자부심을 가지고 긍지를 가지고 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이 13장 말씀을 다시 한번 요약을 해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생각할 때는 다 정복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직도 정복하지 못한 땅이 많이 남았다고 했습니다. 그 남은 땅에 대해서 내가 감당해야 될 사명이 무엇이고, 내가 짊어져야 될 짐은 무엇이고, 내가 정복해야될 대상이 무엇이고, 내가 이루어야 될 대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그 다음 두 지파 반이 받았던 요단 동편의 땅들 이것은 다른 형제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받기 전에 이미 받은 땅입니다. 이 두 지파 반은 하나님의 축복을 먼저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받은 축복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됩니다.
내가 이미 받은 축복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 받는 축복을 부러워하고 그것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이 빼앗긴다면 우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축복조차도 누릴 자격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 내가 이미 누리고 있는 것, 내가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 이것이 소중함을 확인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은 작고 다른 사람 손에 있는 것은 커 보이는 사람은 우리 기독교인의 참 온전한 대열에 서기가 힘드시리라 생각이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이미 내가 받은 것에 대해서 만족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아무 분깃도 받지 못했던 레위 지파 사람들, 그들은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내가 바로 너희들의 기업지요 너희들의 분깃이라는 그 말씀 의지하고 그들은 감사하고 그들에게 맡겨진 직분을 묵묵하게 수행을 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기억하면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신 그 축복을 아주 보잘 것 없이 보이는 작은 것 하나까지도 다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