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편 1절-4절: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저가 스스로 자긍하기를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그 입의 말은 죄악과 궤휼이라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저는 그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불선한 길에 서고 악을 싫어하지 아니하는도다.
1절-2절: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저가 스스로 자긍하기를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성경에 보면 전도를 해서 배나 더 지옥자식으로 만들어 놓는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다. 주님의 눈으로 볼 때는 전도를 해서 배나 더 지옥자식으로 만들어 놓는 것인데, 전도를 하는 자신들의 입장에서 보면 전도를 해서 배나 더 지옥자식으로 만든 것으로 보이지를 않으니 하나님 앞에 죄인 줄을 전혀 의식을 하지 못하고 있는 거다.
‘죄다. 아니다’ 하는 것은 도덕성에 속하는 거다. 즉 인격을 가진 인간에게 속한 거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신적인 도덕성적인 면에 죄가 없어야 하는데 그 면에 죄가 되어 있으면서, 하나님과 단절이 되어 있으면서 종교적인 어떤 행동이나 남을 도와주는 등의 선행을 하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 바로 한 것으로 아는 자가 많다. 이렇게 되니 마치 완전 범죄를 한 것처럼 되는 거다. 신약에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이것을 지적해 주시는데도 이들은 자신들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자기들이 종교적 윤리 도덕적으로 죄를 안 지었으니까 죄가 없다고 장담을 하더라.
영적인 면의 범죄는 눈으로 드러나지 않은 범죄이기 때문에 일반사람은 이 면의 죄를 전혀 모른다. 그리고 세상 외식주의로 흘러가는 기독교 종교인들도 이 면의 죄를 모른다. 사람의 속 중심이 아닌 외모 외형 활동을 가지고 판단을 하는 외식주의 신앙은 하나님 앞에 범죄인데도 이게 범죄인 줄을 모른다. 믿는 우리는 영적인 면에서 사람이 어떻게 하면 죽고, 어떻게 하면 사는 건지 알아야 하는데, 영적인 면을 전혀 의식을 못하는 교회 인도자가 수없이 많다.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있으니 마치 완전 범죄처럼 된 거다.
일반세상은 완전 범죄를 위해서 증거물을 없앤다. 증거물을 없애기 위해서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 죄를 알고 있는 사람을 다 죽여 버리는 일도 있다. 이렇게 해서 아무도 모르는 게 하면 이걸 완전 범죄라고 한다. 그러나 그 죄를 자기도 알고 있고 하나님도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영적인 차원에서의 완전 범죄를 알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세상과 세상 것을 가르치고 주장하고 자랑을 해도 이것이 범죄인 줄을 모르고 있다. 그러나 이건 하나님 앞에 범죄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전도를 해서 가르치는 것이 배나 더 지옥자식으로 만들어 놓고 있구나’ 이렇게 지적을 했는데도 성경을 들고 세상을 가르치는 것이 사람을 배나 더 지옥자식으로 만들어 놓는 것임을 모른 채, 이것이 마귀의 말인 줄을 모른 채 계속 그렇게 가르치고 있고, 누가 그것을 죄라고 지적을 하면 지적해 주는 사람을 죽이려고 달려든다.
3절: ‘그 입의 말은 죄악과 궤휼이라.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그 입의 말은 죄악과 궤휼이라.’ 한 마디로 나오는 말이 모두가 거짓말이라는 것인데, 성경에서 말하는 거짓말이란 성경은 참의 말씀이요 영원히 가는 말씀인데 성경을 들고 이걸 뒤집어서 세상 것을 가르치고 주장을 하고 자랑을 하는 것이 거짓말이다. 왜냐? 세상 것은 영원히 가지 않고 불에 다 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히 가는 것이라야 참말이다. 신령천국에서 자기가 효력을 볼 수 있는 것이 참이다.
성경은 영원히 가는 것을 가르치는데, 마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먹으라고 한 생명과가 아닌 선악과를 먹으라고 한 것처럼 영원히 가는 성경말씀을 둘러엎어서 세상에서 부자 되라고 하고, 마귀가 아담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했듯이 세상을 많이 가지면 하나님처럼 대우를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거짓말이다. 오늘날 교회가 예배당을 크게 짓고, 교인이 많고, 돈이 많이 나오면 그 교회 목사님을 하나님처럼 대우하지 않느냐?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죽고 심판 받고 망했는데도 오늘날 거짓 종들이 그걸 또 따먹으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느냐?
‘그 입의 말은 죄악과 궤휼이라.’ ‘궤휼’이란 일반적인 뜻으로 교묘하고 간사스러움, 또는 교묘한 속임수인데, 신앙 면으로는 성경을 들고 세상을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이건 영적으로 사람을 넘어뜨리는 간사스런 짓이다. 그러면 가령 예를 들어서 하와가 선악과가 아닌 생명과를 따서 아담에게 주니까 아담이 안 먹으려고 해서 하와가 아양을 떨면서 한 번만 먹어보라고 했다면 이건 간사냐, 간사가 아니냐? 이런 간사에는 넘어가는 게 복이냐, 안 넘어가는 게 복이냐? 넘어가는 게 복이다. 그러니 이건 간사가 아니다.
이게 이해가 잘 안 된다면 다른 예로, 엄마가 아픈 아기에게 약을 먹이려고 하는데 이 아기가 약이 쓰다고 안 먹겠다고 버티니까 엄마가 약 숫가락 앞쪽에 설탕가루를 묻히고 ‘얘야, 이거 맛있는 사탕이다. 빨리 먹어라’ 한다면 이게 간사냐, 간사가 아니냐? 이건 간사가 아니다.
영적으로 사람을 넘어뜨리는 속임수가 궤휼인데,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넘어뜨린 마귀의 수법이 궤휼이다. 또한 예수님을 죽인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의 수법이 궤휼이다. 그리고 마지막 시대의 거짓 종들의 가르침의 수법이 궤휼이다. 한 마디로 성경을 들고 하나님 앞에서 세상을 주장하는 것은 교만이요, 세상을 주장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넘어뜨리는 것은 간사한 거다. 이걸 궤휼이라고 한다.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지혜’란 죽음 저 너머 영원 궁극적인 미래의 실상을 알고,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어떻게 살아야 장차 그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자로 나타나게 되는지를 알아서 현실에서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에서도 일반적인 지혜가 있는데, 길을 다 포장하기 전에 그리로 지나가는 하수도도 만들고, 전화선도 깔고, 수도도 깔고 해야 하겠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길을 다 포장한 후에 다시 파헤쳐서 이런 저런 공사를 한다면 이게 지혜냐?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지혜가 없다면 현실에서 이뤄나갈 수 있는 구원이 없는 거다. 지혜와 선행이 그쳤다고 하는 것은 아침 점심 저녁에 밥만 먹고 똥만 쌌다 뿐이지 깨닫는 것도 없고 만들어지는 것도 없는 삶을 산다는 말인데, 부모가 이렇게 산다면 그 다음 자식들이 어떻게 되겠느냐? 지혜로운 자식이 나오겠느냐? 부모들이 바로 살면 자식들이 그걸 보고 듣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구나’ 이게 나오는 거다.
지혜란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닮게 해 주는 모든 행위인데, 지혜가 없으면 선행을 한다고 해도 ‘나는 이런 좋은 사람입니다’ 하는 것을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종교적인 행위로 하게 된다. 사람이 참 지혜가 없으면 혹 일반적인 선행을 할 수 있을지라도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성품을 입을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니면 전부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만드는 거다.
교회의 가르침이 사람을 하나님의 성품을 입게 하는 교훈이 아니라면, 영원 궁극적인 그 세계에서 영광으로 나타나는 교훈이 아니라면 전부는 거짓 교훈이요, 결국은 범죄로 나타나게 되는 거다. 예를 들면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 하는 이 말이 맞느냐, 틀리느냐? 맞다. 그런데 자기가 믿는다고 하는 그 예수라는 분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건지? 그 분이 나에게 뭘 해 주려고 하는 건지? 내가 그 분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믿는다고 하는 것은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정신과 정신이 통하는 인격적 수수관계가 되어야 믿는 거다. 그 분의 속마음 정신을 모르고 어떻게 그 분을 믿느냐? 그러니까 교회의 교훈은 단순히 존재적으로 예수라는 분을 믿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성도가 하나님과 인격적 수수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가르치고 인도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많이 알면 알수록 믿음이 커지는 거고, 이 믿음이 커지면 구원도 그만큼 커진다. 영능의 실력이 커진다. 누림이 커진다. 영광이 커진다.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 하는 말 속에는 이 좋은 게 다 들어있는 거다. 그런데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었다고 하면서도 ‘지옥에서 천국’ 이것만 알고 그 분과 인격적 관계성이 없다면 이 사람은 그 분을 진정으로 믿는다고 할 수 없는 거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예수님의 속을 알아야 한다. 예수의 정신을 알아야 한다. 인격자이신 하나님에게는 인간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귀맛 눈맛 코맛이 다 있는 거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리본질을 모르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마련이고, 또 하나님의 것으로 닮지 못했다면 전부는 심판감이다.
4절: ‘저는 그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불선한 길에 서고 악을 싫어하지 아니하는도다.’ 세상 사람들은 잠을 자면서도 오만 궁리를 한다. ‘어떻게 하면 돈 바구니를 키워볼까? 어떻게 하면 성공 출세를 하나? 무슨 사업을 해야 성공을 할 것인가?’ 이런 궁리를 한다. 그러면 교회 인도자들, 목사님들은 어떤 궁리를 할까? 거짓 종들은 ‘어떻게 하면 사람을 많이 끌어 모을까? 어떻게 하면 세계 일류 부흥강사가 될까? 어떻게 하면 교인들을 도망을 안 가게 할까?’ 이런 궁리를 하면서 인간의 수단 방법을 동원하는 거다. ‘어떻게 하면 교인들을 바로 가르쳐서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할까?’ 하는 궁리를 하는 목사가 있다면 이 목사는 참 종이다.
그러면 목사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궁리하면서 ‘이래볼까, 저래볼까?’ 한다면 이것이 하나님 앞에 선이냐, 악이냐? 안 믿는 사람은 세상목적으로 사는 게 당연한 거겠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목적이 예수 덕으로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함이라면 이 사람은 거짓 성도다. 거짓 교인이다.
‘스스로 불선한 길에 서고 악을 싫어하지 아니하는도다.’ ‘불선한 길’이란 생명 길, 좁은 길, 말씀의 길이 선한 길인데 이 길로 가지 않고 육적으로, 비진리로, 세상 길로 나가는 걸 말한다. 악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은 악을 좋아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나가면서도 예수이름으로 그렇게 하기 때문에 이걸 악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며 날뛰는 거다.
구약성경에 보면 바벨론 왕이 ‘내 힘으로 이 나라를 부흥 발전시켰다’ 라고 하니까 그만 하늘로부터 정신을 팽 돌게 하는 심판이 내려졌는데, 심판은 왜 내리는 거냐?
1. 바벨론 왕이 제 힘으로 바벨론을 크게 건설했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말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바벨론을 부흥 발전 건설을 했다고 했다면 바벨론이 멸망을 안 당하고 왕도 심판을 안 당하느냐? 2. 교회 인도자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바벨론을 부흥 발전을 시켰다면 멸망시키지 않느냐? 3. 바벨론 간판을 빼고 예수간판을 달았다면 멸망시키지 않는 것이냐? 그러니까 바벨론 간판을 달면 하나님께서 그것이 꼴 보기 싫다고 멸망을 시키는 거냐? 속은 그대로인데 간판만 바꿔 달면 멸망을 시키지 않느냐?
4. 이리라도 양의 가죽을 둘러쓰고 있으면 심판을 안 당하느냐? 5. 자기 힘으로 건설을 했어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했다고만 하면 통과가 될 것인데 바보처럼 자기 이름으로 했다고 하면 망하는 거냐? 어느 게 맞느냐? 다섯 가지가 다 맞느냐, 다섯 가지가 다 틀린 거냐? 그 중에 한 가지만 옳은 거냐?
우리가 다윗의 기도를 보고 있는데, 다윗이 하는 이 기도가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르냐, 비슷하냐? 내가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면 고쳐라. 다윗의 기도는 개인적인 기도가 아니라 성령에 감화된 기도로서, 그 속에 우리의 구원도리가 들어있는 것이니 내가 다윗의 정신 사상으로 고쳐야 나의 구원이 이뤄지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