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과 양복>
1875년 <강화도 침략>의 구실이었다 !
우원식 의장님께서
금번 국회 개원식에
여야가 모두 <한복>을 입고 등청하자는 아름다운 제안을 했다.
이에 <국민의힘>은 <검은 양복>을 입겠다고 반발하는데,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한복과 양복>은 일제의 강화도 침략의 구실이었다.
1873년 2월 일본정부는
<쓰시마> 번주가 가지고 있던 조선과의 외교권을 일방적으로 폐지하고, <동래 왜관>의 명칭도 조선과는 상의도 없이 독단으로 <대일본국 공관>이라고 바꾸자, 조선은 가차 없이 일본과의 국교를 단절시켜 버린다.
안달이 난 일본은 연일 수교하자며 졸랐으나 조선이 콧방귀도 뀌지 않자, 메이지유신의 3걸인 사이고다카모리(西郷隆盛,1828∼1877,원수・육군대장)와 그의 똘만이인 이타가키다이스케(板垣退助)등이 <조선정벌론>을 주장하는데,
오히려 사이고다카모리가 실각을 당하게 되고, 이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할복하고 죽는다.
조선에서는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황제의 친정(親政)이 시작되며,
고종황제의 적극적인 주장으로
1875년 3월 12일 일본과의 재수교가 이뤄지게 되는데,
<동래 왜관>의 책임자였던 모리야마시게루(森山茂,1842∼1919)가
갑자기 <재수교 협상 조인식>에 양국이 양복(연미복)을 입자고 주장하자,
조선은 너희들 복장은 너희들이 알아서 하고, 조선은 <조선 복장>을 입겠다고 주장한다.
같은 해 4월 15일 모리야마시게루는 부관을 도쿄에 보내
<함포 외교>가 유효한 수단임을 보고하고,
그에 대한 준비를 요청하면서,
같은 해 5월 15일 그는 조선 측이 시간을 끈다며 서류를 가지고 온 조선 관리를 <동래 왜관>에 억류한 후,
“조선이 일본의 제안대로 <양복>을 입지 않는 것은
일본에 대한 <내정 간섭>”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조선의 <동래부사>는 조선의 국체를 손상시키는 행위라고 반박한다.
이에 같은 달 21일 고종황제는 어전회의에서
<조선 복장>으로 하는 것을 재확인하자,
모리야마시게루는 일본정부의 명을 받고, 부랴부랴 도쿄로 되돌아가서도,
계속해서 <양복>을 입고 조인식을 열자며 시간을 끌다가,
“조선이 <양복>을 입지 않아 협상이 결렬됐다”면서,
그것을 구실로,
같은 해 9월 20일∼22일 운요마루(雲揚丸)를 동원하여 강화도를 침략하게 되는데,
그 이유가 <양복>이었다.
2025.8.31. <왜구인명사전> 중에서, @-광주의 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