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좋은 전시를 결정하는 다섯 가지 요소
좋은 영화란 무엇일까?
연기력이 좋은 유명 배우가 주연을 맡은 영화가 좋은 영화일까?
아무리 연기력이 훌륭한 배우여도 허술한 시나리오와 연출력이 부족한 감독을 만나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없고, 반대로 뛰어난 연출력을 가진 감독과 매력적인 시나리오도 연기력이 떨어지는 배우들에 의해 그 가치가 절하당하는 경우가 있다.
전시 역시 마찬가지다.
훌륭한 대가의 작품도 큐레이터가 성의 없이 기획하여 선보인다면 작품의 감동이 반감될 수 있으며, 탁월한 능력을 가진 큐레이터가 기획을 해도 수준 이하의 작품들도 구성된다면 실망을 안겨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좋은 전시란 무엇일까?
분명이 질문에 절대적인 기준은 없을 것이다.
다만 미술계 종사자이자 애호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개인적인 기준은 존재한다.
이를 쉽게 공유하기 위해, 작품, 기획, 공간, 운영, 가격의 다섯 가지 항목으로 나눠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작품'은 좋은 전시를 결정짓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우리가 미술관에 방문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이기에, 작품의 질이 보장된 전시는 당연히 좋은 전시가 될 확률이 높다.
다만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라고 무조건 작품의 질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유화, 수채화, 판화, 드로잉, 조각, 미디어 등 재료나 제작 방식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기도 한다.
또한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도 더 유명한 대표작이 있고 상대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실패작 또한 존재할 수 있기에 작가의 이름이나 유명한 세가 작품의 질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같은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이라도 아비뇽의 여인들(유화)과 젊은 여인 두 가지 인상(석판화), 큰 새와 검은 얼굴(도예)은 각각의 미학적*사학적* 경제적 가치가 천차만별이다.
따라서 단순히 작가의 이름뿐 아니라 어떤 작품이 전시되느냐는 좋은 전시를 결정짓는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1907년 젊은 날의 피카소가 선보인 아비뇽의 여인들은 파격적인 화풍으로 역사 속에 입체파라고 지칭하는 미술 사조가 탄생하는 기틀이 된 작품이며 피카소 인생 최고의 마스터피스 중 하나로 손 꼽힌다.
이 작품은 20세기 미술의 새로운 도화선이 되어 추상의 길을 열어나가는 시작점이 되었다는 극찬을 받으면서 가격을 책정할 수 없을 정도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반면 젊은 여인 두 가지 인상과 큰 새와 검은 얼굴은 살아생전 회화 1900여 점, 조각 1,200여 점, 도자기 2300여 점, 스케치 4,700여 점과 판화 3만여 점을 포함, 4만여 점에 이르는 작품을 남긴 피카소가 장년기에 제작한 판화와 도예
작품으로 피카소의 팬이라면 소장하고 감상할 가치가 있겠지만, 아비뇽의 여인들을 포함한 그의 대표적인 회화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그 미학적*사학적*경제적 가치는 낮을 수밖에 없다.
'기획'은 좋은 작품이 좋은 전시로서 완성될 수 있게 만드는 핵심 요소이다. 전시에서 선보일 수십 혹은 수백여 점의 작품을 크기, 재료, 색감, 제작 시기, 미학적 가치 등을 고려해 어떤 순서로, 어떤 높이에 붙일지 등을 하나하나 고려해야 하며, 어떤 색의 벽에 어떤 조명으로 선보일지까지 모두 기획해야 한다.
쉽게는 작품을 미술사적인 순서 혹은 작가의 연대기에 맞춰 배열할 수 있을 것이고,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해 대표작이 돋보이게 동선을 구성할 수도 있으며, 주요 관람객의 연령이나 성별 등 기획자의 목표나 의도에 따라 전시장의 공간 구성과 인테리어 또한 전혀 다르게 만들 수 있다.
이러한 결정 하나하나가 관람객의 감상 경험과 직결되는만큼 좋은 전시가 완성되는 데 있어 기획은 작품의 질만큼이나 절대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좋은 전시가 완성될 수 있도록 작품과 기획이 지니고 있는 잠재력을 극대화 해주는 요소가 '공간'이다.
대극장에서 오페라를 감상하는 것과 소극장에서 뮤지컬을 보는 것, 거리에서 버스킹을 참여하는 것에는 각각의 특성과 장단점이 존재할 것이다.
압도적인 음향을 경험케 하기 위해선 대극장의 울림이 필요하고, 긴밀한 몰입에는 소극장이, 자유로운 참여와 변주에는 버스킹이 필요하듯 미술 작품도 그 특성과 기획 방향에 따라 대형미술관, 소규모 갤러리, 대안공간, 거리 등 서로 다른 공간이 필요하다.
이는 마치 유화는 캔버스에 잘 어울리고, 수채화는 종이와 궁합이 좋으며, 조각은 청동, 대리석, 흙 등 또 다른 재료와 매칭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주로 미술사적 혹은 미학적으로 인정받는 대가의 대규모 전시가 이뤄지고, 갤러리나 대안공간에서는 현재 주목해 봐야 할 동시대의 작가 전시가 많으며, 거리에서는 이러한 시스템에 도전하는 진보적인 예술 실험이 펼쳐지곤 한다.
작품, 기획, 공간이라는 좋은 전시의 기본 요소들이 잘 준비되었다면, 그 가치가 온전히 빛날 수 있도록 조연의 역할을 하는 것이 '운영'이다.
운영은 관람객이 전시의 정보를 알고 방문하게끔 이끄는 마케팅부터, 작품과 관람객이 안전 관리 및 도슨트 안내까지 전시가 유지될 수 있도록 보조하는 모든 서비스를 말한다.
좋은 전시가 구성되었어도 홍보에 실패로 그 존재를 관람객이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으며, 안내 및 안전 관련 서비스의 부족으로 잘 감상한 전시에 대해 나쁜 인상을 갖게 될 수도 있다.
마치 전반적으로 좋았던 전시도 불친절하거나 성의 없는 직원에 의해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듯한 관람 경험을 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반대로 책임을 다한 전문적으로 운영되는 전시의 경우, 작품과 기획, 공간의 질이 좀 떨어져도 운영이 이런 미비한 점들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기에 운영 또한 좋은 전시 구성이 있어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다.
마지막으로 '가격'이다.
누구나 합리적인 소비를 하길 원하는만큼 전시 규모와 질에 따라 합리적으로 입장료가 책정되어야만 전시에 대한 만족도는 높아진다.
비단 전시 티켓뿐만 아니라, 도슨트, 오디오 가이드, 기념품 등 부수적인 서비스의 가격이 관람객 입장에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게 책정되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취향과 성격, 안목, 지식 수준에 따라 관람객 각각이 전시를 감상한 후 받는 느낌은 전혀 다를 수 있어서 누군가에겐 너무 좋았던 전시가 다른 누군가에겐 최악의 전시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좋은 전시를 결정하는 다섯 가지 요소는 불변의 법칙이 아닌, 유동적인 기준으로 참고하길 바란다.
미술관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김찬용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