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5일을 잊지 맙시다... 6·25 때 가장 먼저 달려온 스미스 중령에게 두 번 결례(缺禮)한 대한민국-
오산전 투서 전사한 줄 알고 25년 뒤 훈장, 2004년에는 별세소식도 몰라-
오산 죽미령에서 북한군 탱크를 조준하고 있는 스미스부대 장병들의 모습 및 1975년 훈장을 받기 위해 방한한 스미스 대대장
74년 전인 1950년 7월 5일. 미군은 6·25 남침을 일으킨 북한군을 상대로 첫 전투를 벌였다.
북한군 남침 사흘뒤인 6월28일 일본에서 비행기를 타고 수원공항에 내려 영등포 전선을 시찰한 맥아더 장군은 동경으로 돌아가자마자 일본에 주둔 중인 미군 24사단에 한국 출동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스미스 중령이 지휘하는 24사단 21 연대 1대대 병력을 중심의 540명의 ‘스미스 특별임무대원’들이 선발대로 출발했다. 스미스 대대원들은 부산항에 내려 기차를 타고 7월 2일 대전역에 도착한 뒤 경기도 오산시 외삼미동 600번지, 1번 국도가 지나가는 죽미령 고개에 진지를 구축한다.
부대를 지휘한 21연대 1 대대장 찰스 스미스 중령은 (Charles Bradford Smith, 1916~2004)은 미국 육사,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뒤, 2차 대전 때 하와이 진주만과 필리핀 과달카날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운 전공으로 각종 훈장을 받았고, 국방부에서도 근무한 엘리트 장교였다.
스미스 부대는 7월5일 아침, 수원을 출발해 1번 국도를 따라 남하하는 북한군 4사단과 마주친다. 33대의 탱크를 앞세운 보병행렬이 몇 km,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오후까지 치러진 전투에서 스미스 대대원 중 150명이 전사하고 26명이 실종됐다. 스미스 대대원들은 북한군 전차 6대를 파괴하고 42명을 사살했지만, 소련제 T34 탱크를 막을 무기가 제대로 없고 숫적 열세로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하지만 북한군 탱크가 스미스 대대 방어선을 1km 이상 돌파한 뒤 까지도 미군 장병들은 후퇴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우리가 ‘혈맹’이라고 부르는 한미동맹의 시작이 바로 이 죽미령고개 전투였다.
오산시 북쪽 외삼미동 1번국도옆 죽미령에는 ‘UN군 초전기념관’이 세워져 당시 스미스 부대원들의 활약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 있다.
경기도 오산과 바로 옆 평택이 한미동맹의 거점이자 최첨단 반도체산업의 거점도시로 도약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할 때 마다 전용기, ‘에어포스 원’이 착륙하는, 미 공군기지, 오산 AB(Air Base)라는 이름 때문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미군의 극동지역 최전방기지다.
서울 용산에 있던 주한미군사령부가 오산기지 바로 옆 평택으로 이사했고, 삼성전자는 200조 원 이상을 투자해 세계 최대, 최첨단 반도체공장을 건설 중이다. 한미동맹과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이 함께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스미스 중령이 한국 정부로부터 무공훈장 중 최고 등급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것은 무려 25년이나 지난 1975년이었다. 오산전투때 전사했다는 오보(誤報)가 있었는데, 한국정부가 이를 그대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스미스 중령은 1950년 11월 1일 신의주 남쪽 30km 지점까지 북진했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한 뒤 11월 10일 전출명령에 따라 미국으로 돌아갔다. 스미스 중령은 준장으로 진급한 뒤 67년 예편했다.
생존해 있는 그를 찾아낸 사람은 6·25 때 종군기자로 활약한 고(故) 지갑종 유엔한국참전국협회장(1927~2021, 11대 국회의원)이었다.
지갑종 전 회장은 생전(生前), “누군가의 오보로 스미스가 6·25 때 전사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1968년 오산전투 추도식 때 미군 중령이 ‘스미스 장군이 지금 애리조나에 살고 있다고 해서 수소문 끝에 애리조나주 피닉스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라고 회고했다.
지 전 회장은 2년 뒤 피닉스에서 스미스 장군을 만났다. “한국에서 무슨 훈장을 받았냐”라고 물었더니 “아무것도 받은 게 없다”라고 했다. 가방에 있던 태극기를 전해준 뒤 귀국해 정부에 태극무공훈장 수여를 건의했다. 스미스 장군은 6·25 전쟁 25주년이었던 1975년 7월 방한해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훈장을 받은 뒤 스미스장군은 지 회장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 훈장은 내 것이 아닙니다. 전사한 전우들의 것이요, 한 위생병의 것입니다.”
스미스 중령은 1950년 7월 5일 오후 2시 반쯤 후퇴 명령을 내렸는데 한 위생병이 손을 들더니 “나는 후퇴하지 않겠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곳에 부상자가 있어서 자신은 갈 수 없다는 이유였다. 스미스 장군은 “오늘 큰 훈장을 받고 나니 그 위생병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라고 말했다.
스미스 장군은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별세했다. 그가 오산전투 현장에서 전사한 줄 알고 25년이나 지나서 훈장을 수여했던 대한민국 정부는 6·25 때 가장 먼저 달려와 대한민국을 지켜준 ’ 은인(恩人)‘의 사망사실조차 몰랐다.
지갑종 전 회장이 2004년 6월 말에 오산 죽미령전투 기념행사 소식을 전하기 위해 미국의 스미스 장군 집으로 전화를 했는데, 부인으로부터 “남편이 한 달쯤 전인 5월 23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2003년 출범하자마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를 만들어 5·18 사망자 및 실종자 발굴과 6·25 때 국군에 의해 희생된 양민들의 실태를 파악하는데 혈안이 돼 있었지만, 정작 대한민국을 구한 은인의 사망 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은 6·25때 가장 먼저 달려와준 스미스 중령에게 두 번이나 실례(失禮)를 범한 것이다.
매년 7월 5일이면 경기도 오산 죽미령에 있는 유엔군 초전기념관에서는 스미스 부대원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는 기념식이 열린다. 과거 김문수 남경필 경기지사는 매년 이 기념식을 찾았지만, 이재명 지사 때부터는 발걸음을 하지 않고 있다.
작년 기념식 때 스미스부대 참전용사 유족들은 초전기념일인 7월 5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해 줄 것을 이권재 오산시장을 통해 국가보훈부에 요청했다. 두고 볼 일이다.
※錐 言
미국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다.
또한 미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역시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다.
일본의 36년 통치하에서 벗어난 것도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일본히로시마 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덕분이다.
원자폭탄 투하 전 7월 말 미국은 일본에게 항복을 명령했지만 거부하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항복을 받아낸 것이고 이때 미국의 도움으로 우리도 해방을 맞은 것이다.
해방은 우리 독립군이나 누군가가 거저 준 것이 아니고 미국 핵폭탄으로 얻어낸 것이기에 미국의 선물이다.
1945년부터 대한민국 이 건국된 1948 년까지 3년간 미국의 도움에다 이승만이 있었기에 남쪽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건국 2년도 안된 나라에 6,25 남침 전쟁이 났을 때도 미국군 병사 4만 명이 죽고 10만 명의 부상자 가 있었기에 남쪽을 지킬 수 있었다.
1953년 휴전 후 에도 구호물자 및 생필품을 지원해 줘 살아낼 수 있었고 박정희가 이룩한 경제대국이 된 것이다.
지금도 미군 28,000여 명 이 우리나라에 주둔하며 전쟁을 막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고맙고 감사해야 할 나라가 어디 있는가.
그런데 좌파 대통령 3명은 미국을 냉대하고 미군철수를 주장했다.
더욱 가관인 것은 김병주라는 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이란者의 배반이다.
육군 대장까지 한 者이 한미일 동맹을 말하면서 여당 국회의원들 보고 정신이 돌았다고 막말을 해댔다.
이재명당 대표에게 아부하려고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전직 四星장군이 할 말은 아니다.
7월 5일 내일은 스미스부대 가 6,25 전쟁에서 150여 명 이 전사한 날임을 기억하고 그들의 명복을 빌어 드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