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삼의 세계사-20】
서양에서 인삼의 유효성분을 화학적으로 추출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일본은 한국을 강제병합하자마자 ‘의생규칙’을 제정해 조선의 전통적인 한의사들을 의사보다 격이 낮은 ‘의생’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총독부는 한약을 매우 가치 있는 자원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전쟁체제 아래에서는 그 자원을 활용하는 데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인삼의 생리활성성분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였다.
당시 소련은 대규모로 인삼을 재배하고 있었으며, 한국전쟁을 틈타 불법적으로 들여온 고려인삼의 종자를 이용해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어 독일에서도 유사한 연구들이 진행되었다.
1960년대 들어서 인삼의 성분 연구에 큰 발전이 이루어졌다.
인삼 사포닌 성분 중 진세노이드를 분리 정제하여 화학구조를 규명한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해안에 면한 온난한 산악을 제외하고 각지의 삼림 대부분에서 인삼이 산출되었다.
하지만 무분별한 채취와 삼림의 남벌로 인삼의 산출이 줄어들었다.
조선에서 야생삼의 멸종 조짐은 15세기 중엽 성종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해서 영조 시기에는 거의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야생삼은 한반도 북부의 깊은 산속에서만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한반도에서 인삼이 재배되기 시작한 시점은 멸종 위기가 닥치기 훨씬 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재배한 인삼을 지칭하는 家蔘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정조실록’의 정조 14년의 기록에서이다.
18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가삼 재배는 널리 보급되며 가삼을 재배하는 방법을 수록한 農書도 편찬되었다.
인삼 재배가 활성화되면서 인삼 공급 지역도 바뀌어갔다.
야생삼이 주를 이룰 당시는 평안도,함경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의 산간 지역 등이 인삼의 주요 공급 지역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재배가 본격화되면서 개성 일대가 인삼의 주산지로 부상하게 된다.
개성상인들은 1830년대 이후 인삼을 대량으로 경작하는 한편, 홍삼을 중국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설혜심의 저서 '인삼의 세계사'에서 인용하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