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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케이한 전철을 이용하여
교토 남쪽 우지와 동복사,33간당 등을 다녀온다.
(1일 패스로 승차 가능한 역)
[파일:230]
어제 사온 톰소여 빵집 빵(매우 맛나다!)과 커피로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7시 반경 집사람과 숙소를 나온다.
여우신사(후시미 이나리 신사)를 다녀 온 적이 있다는 막내는
잠을 더 자고 나중에 동복사에서 만나기로 했다.
(가모강,날씨는 좋다..)
버스 1일 패스처럼 쉽게 생각하고
기요미즈 5조역으로 가서 패스를 사려하니 팔지않고
3조나 기온 4조역으로 가라해서..
(4조역에서는 9시 반부터 오픈)
지하철을 타고 3조역으로 가서 패스를 구입했는데
여권을 제시해야만 한다.
(3조역 사무실)
나중에 알아보니 1일 패스는 인터넷이나
간사이 공항/교토역의 여행자 센터,일부 호텔..
그리고 3조, 기온 4조역에서만
그것도 여행 온 외국인 이용자만 구입할 수 있다 한다.
(중지도가 종점인 기차를 타고)
(중서도에서 우지선으로 환승을 하고)
(종점인 우지까지 간다.)
(우지역 시간표)
우지는 헤이안 시대 귀족들의 휴양지였는데 일본 녹차의 본고장이다.
역 앞에는 우지강이 흐르고 우지교가 있다.
우지교는 일본 3대 옛날 다리 중 하나로 아스카시대에 처음 생겼고
우지강의 물살이 워낙 거세서 수많은 재건을 하였는데
지금의 다리는 1996년에 지어진 것이다.
가급적 전통 다리의 모습을 살려 콘크리트로 지었다고 한다.
(우지교)
우지교를 건너가면 무라사키 시키부의 좌상이 나온다.
헤이안 시대 후지와라 가문의 여류작가로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1001년도? )장편소설인 '겐지모노가타리'를 썼다 한다.
모노가타리란 지어낸 이야기란 뜻인데
겐지모노가타리는 전 54권으로 구성된 대서사시로,
(200자 원고지 5200매,가나로 기록)
전반부는 당시의 이상적인 남성이었던 히카루 겐지(光源氏)를 중심으로
그를 둘러싼 많은 여성들과의 다양한 사랑과 영화에 이르는 내용이 44권,
우지주조(宇治十帖)라고 불리는 후반부는
우지를 배경으로 겐지의 아들 가오루(薰)의 숙명적인 비극이
10권에 걸쳐 묘사되어 있다고 하는데
11세기 소설 이지만
등장인물들의 심리/동기 등 내면 묘사가 충실하고
당시 독자들이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속에 넣어서 사실성을 부여하는 등
그 형식과 내용이 근대,현대 소설 못지않다 하니 대단하다.
(맨 녹차 상품이라던데 이른 시간이라 한가..)
평등원은 겐지모노가타리에서 미소년 겐지의 원 모델이라는
미나모토 도루의 별장이었던 것을
우다덴노가 샀다가 그의 손자인 미나모토 시게노부를 거쳐
후지와라 미치나가의 것이 되었고
그의 사후, 아들 요리미치가 사찰로 고친 것이다.
지금은 봉황당과 관음당 정도가 남아 있지만
본래는 우지강변에 본당이 있었다고 하며
그 밖에도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남북조 시대의 싸움으로 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헤이안시대 말기에는 석가모니 사후 1500년이 도래하면서
세계가 멸망하고 모든 불법이 소멸한다는 말법신앙이 성행하였고
당시 세력가들은 공덕을 쌓아 극락에 가려는 생각에
자신의 별장이나 저택을 불교계에 희사하여 불사를 많이 하였다 하는데
평등원은 그 최고 결정체로...
12세기 일본에는 이런 동요가 나왔다고 한다.
"극락이 의심스러우면 우지의 어당을 찾아가보라
극락이 어떤 곳인가 궁금하면 우지의 어당을 가보아라"(유홍준)
(봉황당)
일본 10엔 주화에 나오는 봉황당은
아미타불이 머무는 극락 세계를 그대로 재현한 건물로
지붕에 봉황이 있어 봉황당이라 한다.
헤이안 시대 말기 정토신앙 계통의 사원들은
대부분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하는 아미타당이나 정토당을 중심으로
건물 앞에 아미타여래의 첫 글자인 아(阿)자를 형상화한 연못을 배치하여
극락세계와 번뇌가 존재하는 사바세계를 분리한다는데
평등원 역시 마찬가지..봉황당 앞에 아자못이란 연못이 있다.
('아'자 모양의 연못-아자못이라 한다.)
봉황당 내부에는 거대한 아미타 여래좌상이 있고
벽에는 52구의 운중공양보살상이 걸려 있다 하는데..
내부 수리중이라 입장이 불가.
박물관인 봉상관으로 들어간다.
(봉상관입구-내부는 사진 촬영 불가)
평등원 범종,
봉황상,
52구의 운중공양보살상과
봉황당 내부의 모습등이 전시되어 있지만
사진 촬영금지, 도찰 감시요원이 곳곳에 있다.
여러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는 다양한 표정의
운중 보살상이 장관이라 차마 그냥 나오질 못하고
설명서를 하나 달래서 가지고 나온다.
(뒤에서 보면 미랑이 달려있다.)
(평등원 동종)
출구쪽으로 가면 종루에 평등원 동종 복제품이 보인다.
전체적으로는 일본의 동종 풍이지만 비천상이 새겨진 것을 보아
한반도, 특히 신라와의 연관성이 많다고.
우지강변 산책로로 내려가니,
강 가운데 섬에 석탑이 보이는데..
13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13층이며
일본에서는 가장 높은 석탑이라 한다.(15m)
낚시로 죽은 물고기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어망과 어구를 묻고 세웠다고 하며
물살이 쎈 우지강의 범람으로 여러 번 쓰러졌다고 한다.
(안내소의무료녹차)
에어콘이 빵빵한
산책로 옆 우지 관광 안내소에서 쉬다가
바로 옆의 대봉암에서 다도체험을 해본다.
안내소에서 티켓을 사서(500엔) 제출하면
말차 다도체험을 할 수 있다.
말차는 멧돌로 갈은 녹차분말 차이다.
(대봉암)
다도체험은 홀이나 다다미 방에서 할 수 있는데
우리는 다다미 방으로..
(홀)
(다다미 방 가는 복도)
안내판을 보니 다도 중엔 사진 촬영을 금지한다 하여
중간에 사진 두장을 겨우 찍었다.
(달달한 떡을 먼저 먹어 녹차의 쓴 맛을 중화..)
손수건을 접고.. 다기를 닦고... 데운 물을 뜨고..
녹차를 풀기 까지 대략 15분 정도 걸리지만
찻잔을 받고 감사의 예를 드리고
찻잔을 시계방향으로 돌려서 마시고 원위치..는
의외로 짦아 1~2분이 채 안걸린다.
(우지강)
(아이스크림 자판기)
중서도 역으로 빽하여 후지미 이나리 신사로 가려하는데
빨간색 기차(급행)가 들어온다.
후지미 이나리 역에 정차를 하는 급행이라
우선 타고 봤는데....
둔한 눈에는 같은 빨간색으로 보였지만..
빨간색이 노란 빨강이 아니라 자주색 빨강인 기차라
후지미 이나리 역을 통과, 7조역에서 정차하여..
7조역에서 검정색 기차(보통)을 타고 3정거장 빽하여
후지미 이나리 신사로 간다.
(한 노선에 6가지 기차)
(후시미 이나리 역)
후시미 이나리신사는 전국
일본 이나리신사(3만개)의 총본산으로
신사 대신 후시미 이나리 대사라고 한다.
신라계 도래인인 하타(秦)의 씨족 신사로
뒷산인 이나리산을 신체(神體)로 삼은 이나리 신은
(일본 신화에는 등장하지 않으니)
하타씨와 같이 도래한 신인데
무로마치 시대부터 일본의 고대 곡물, 식물의 여신인
우카노미타마와 동일시되어 농업의 신사가 되었고
후일 오닌의 난후 재건되면서
상인들의 수호 신사로 바뀌었다 한다.
흔히 여우신사라고도 하며
많은 사람들이 여우신을 모시는 신사로 착각하는데,
여우는 신이 아니라 신의 사자다.
전설에 따르면 이나리산 인근에 늙은 흰 여우 부부가 살았는데
세상과 사람을 위해 일하고 싶어 했다고 한다.
결국 다섯마리의 새끼와 함께 이나리신을 찾았고
이에 이나리신이 감응해서 이들을 사자로 삼았다고 하며
헤이안 시대에 동사를 창건한 공해스님과 여우가 만난 후,
동사(東寺)가 이나리 대사의 신궁사가 되었다 한다.
(후시미 이나리 대사 안내도)
일반적으로 신사는
도리이-참도-신문(누문)-(외,내)배전-본전이 일직선상으로 있고
그 주위로 부속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참도)
일설에 의하면 외국인 관광객이 찾는 관광지중
1위 히로시마의 평화기념관 다음으로 2위,
교토에서는 1위라고 하던데 역시나 사람이 많다.
(누문)
신문(神門)이 2층이 있는 누문으로 되어 있는데
인왕문을 본따서 (인왕처럼)두사람의 수호 무사가 있다.
헤이안시대 귀족의 수호 임무를 맡은 무사상이다.
(수신이라고 부르는 무사 차림의 신상)
오닌의 난 후 재건될 때 여러 인물들의 후원이 있었는데
그중 유력인사로 후시미성을 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있었다.
누문도 히데요시가 만들어 준 것.
(외배전과 본전)
배전은 기도하는 곳이고 본전은 신체가 있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신사의 신체는
자연물, 신상(神像), 기타 거울 등 물건 크게 세 가지인데
그중 자연물 신체(산이나, 폭포, 바위,나무 등)을 모신 경우에는
본전이 없을 수도 있다 한다.
또한 과거에는
신이 건강한 남자에게도 내린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남자를 뽑는 과정이 바로 스모였고,
스모의 최종 우승자인 요코즈나가
금줄(신이 머물렀다는 증표)을 허리에 두르는 연유라 한다.
(볏집을 물고있는 여우)
(권전; 식년수리 때 잠시 신체를 옮겨 모시는 곳)
(신체산 이나리 산으로 올라가는 길)
이나리산은 교토 동쪽 히가시야마(東山) 봉우리중
가장 남쪽에 위치한 세 봉우리의 산으로
산 위에는 7개의 신사가 더 있고
이들 섭말사를 연결하는 도리이가 4km 정도 나열되어 있는데
이것이 유명한 센본(千本) 도리이이다.
말이 천개이지 실제로는 만개가 넘는다나?
(오궁)
산에 있는 일본사찰에는 본당과 떨어져 아주 깊숙한 곳에
오원(奥院;오쿠노인)이라는 기도처가 있는데
그것과 유사하게 오궁(奥宮)이 있다.
오궁을 지나선 본격적인 도리이길이 시작되는데
영화 '게이샤의 추억'에 나왔다 하여 그런지 발 디딜 틈이 없다.
막내와의 약속때문에 초입의 도리이 삼거리에서
사진을 찍고 그만 돌아 나온다.
(열쇄와 구슬을 물고 있다.)
(출출하니 신사 입구에서 간식 먹고 동복사역으로..)
(만수선사란 표석은 50년대 북송 직전 조선인들이 건립한 것)
동복사역 동쪽에는 만수사란 절이 있다.
동복사의의 탑두 사원인데.
일본으로 유학 온 한국 스님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조총련계 한국인들의 사찰이 되었다.
정문 입구로 쓰이고 있는 것은 무로마치시대에 건립되었는데
소유권이 동복사에 있어 정식명칭은 동복사 종루라고.
재일조선인들의 납골당과 경남 산청에서 모셔왔다는
조선시대 불상과 종이 있다 하나 출입금지이다.
역에서 막내를 만나
근처의 라멘집서 식사를 하고 동복사로 간다.
(동복사 경내 안내도)
동복사는 헤이안시대 후지와라가의 씨사인 법성사(法性寺) 자리에
가마쿠라시대 섭정이었던 쿠조 미치이에(역시 후지와라씨의 분파 일원)가
야심적으로 세운 절인데
불전에는 15미터가 넘는 거대한 석가여래상이 있을 정도였다 한다.
절 이름도 동복사(東福寺)로 하였는데
나라의 동대사(東大寺)와 흥복사(興福寺)를 합친 것만큼 크게 되라고
두 절에서 한글자씩 따왔다고 한다.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보물선에 있던
물품중 많은 부분이 바로 이 동복사로 가던 것이었다고.
오닌의 난과 메이지새대 폐불정책으로
동사,서사, 삼문만 남은 것을 재건했다 한다.
(북문을 들어가면)
(창고 같은 인왕문이 한켠에 있다.)
큰 절이였던 만큼 주위에 탑두사원이 많다.
(탑두사원의 여섯 지장상-동승 모습이다.)
영원원에는 소나무가 자라는 멋진 조경석이 있다 하는데
감히 들어가 볼 엄두를 못내고..
(와운교)
다른 교토의 절과 마찬가지로
동복사 역시 단풍철에 봐야 하는데
특히 이 와운교에서 바라보는 통천교의 모습이 절경으로
안내책자의 단골 메뉴라 한다.
(통천교와 방장)
(요러콤 찍었어야 하는데..)
(중문으로 들어가면)
(방장이 나온다.)
(통천교)
(방장과 법당)
방장과 개산당을 이어주는 통천교는 입장권을 사야하고
방장 역시 고리에서 입장권을 사야한다.
(고리 쪽으로 가면)
(8상 정원 안내판이 나온다.)
팔상 정원이란 부처님의 일생에서 8개의 모티브를 얻어
방장 동서남북 네군데에 정원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
(조경예술사 시게모리 미레이가 1939년에 완성한 것)
방장으로 들어간다.
(돌은 사선도 四仙島-봉래,방장,영주,곤량-을 의미)
(소용돌이 는 8해를 의미)
(오산五山..)
(남쪽 정원)
(방장)
(서쪽 정원, 우물 정자를 모티브로 정전-井田-을 표현)
(북서쪽에선)
(통천교가 보이는데 개산당쪽은 공사중인 듯)
(북쪽 정원,바둑판을 모티브로 한 시송)
서쪽정원이 정전, 북쪽정원은 시송,
둘을 합하여 '정전시송'의 모티브라 하는데
고재 중국에선 밭을 정(井)자로 등분했다하여
정자 모티브로 '정전(井田)'을 표현한 것이 서쪽 정원이라면
바둑판 모티브는 송나라를 표현한 것일까?
(북동쪽에도 작은 정원이 있고..)
(동쪽 정원-북두칠성을 표현)
봉래,방장,영주,곤량,8해,오산,정전시송,북두칠성을
8상이라 하였다고..
다시 남쪽 고리를 통해 방장을 나와서,
사찰 나머지, 그중 유명한 동사를 둘러본다.
사찰 구경은 지겹게 하였다는 아내와 막내에게
일본 고대의 유명한 측간(동사)를 보여준다 하고
꼬드겨 온 걸음이다.
(본당 ,불전)
(만수사서 옮겨 왔다는 석가여래 삼존)
(운룡도)
15m 대불이 있었다는 법당에는
기쓰산 민초(1352~1431)가 그린 높이 15m 대작 탱화
<대열반도>가 봄마다 공개된다고 한다.
남쪽의 삼문으로 간다.
(동복사 삼문은 교토 삼대 삼문에는 안들어가지만 국보이다.)
(사원지-思源池-엔 연꽃이 피었고)
(사원지와 피안교 뒤로 보이는..)
(멋진 삼문..)
교토 3대 삼문중, 지은원은 늦은 시간에 보았고
인화사는 공사중인 걸 보았고..남선사는 내일 가 볼 예정인데
여태 본 교토의 삼문중 가장 멋지고 품위가 있어 보였다.
(왜 3대 삼문에 안 들어 갔을꼬?)
(오사대명신 신사의 도라이)
오대명신은 이나리 신을 포함한 다섯신의 신사라고 한다.
아내,막내가 패스....나도 패스
(욕실과 안내판)
(동사-측간)
(강행군의 연속이라..)
(육바라문)
가마쿠라시대 호조 가문의 무사 지휘소,육바라원의
문을 옯겨온 것이라 한다.
(다시 월하문으로 가서)
(중문으로 나온다.)
아내와 막내는 무용품 전문점등...몇 군데 들려 본다 하여
저녁시간에 만나기로 하고 혼자 7조역으로 가서 33간당을 본다.
삼십삼간당은 고시라카 덴노가 상황(조우고)으로 있을 당시
다이라노 기요모리를 시켜 세운 불당으로 33간,길이가 120m인 건물이다.
(우리나라 이조시대 종묘가 117m)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헤이안시대 말기, 헤이지의 난 이후에
원을 폐지하고 고시라카 조우고를 유폐시킨 무사 출신 첫 태정 대신으로
육바라밀사를 씨사로 삼은 사람이다.)
본래 묘법원의 탑두사원인 연화왕원의 본당인데
헤이안시대 후기의 건축이었으나 준공후 얼마 안되 화재로 전소,
(본존의 두부와 28부중상,그리고 천수관음 일부만 건짐)
그 후 가마쿠라시대 초(우리나라 고려시대 후기)에 재건하였다 한다.
(33간당)
(정원이 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근처 국립박물관 자리에 방광사를 지으면서
이 벽과 대문을 만들었다는데 이 벽을 특별히 태합벽이라고 한다고.
정작 삼십삼간당의 남문은 담밖에 따로 있다.
(활쏘기 대회도 열렸다는 뒷정원)
실내에는 본존 천수관음상이 있고
그좌우에 등신대 500구의 협시 천수관음상이 서있어
이십팔부중과 풍신, 뇌신상을 더하여 1030구의 불상이 있다.
보살은 성불하기 직전의 분들을 일컫는 말로,
부처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성불을 미루고
보살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온 것으로도 해석되며,
관음보살의 경우 아미타여래의 화신으로
자비를 베풀어 중생을 구제하고,
미륵불이 올 때 까지 중생들을 돌본다고 한다.
그중 천수관음은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가지고
아귀도에 떨어진 중생들을 살피는 역할을 한다.
11개의 얼굴에 42개의 손을 지니고 있는데
합장한 두 손을 제외한 40개의 손이 각각 25계를 살피며
도합 천개의 세상을 살핀다고.
(본존과 주위의 천수관음상)
사진촬영 금지이니
안내판의 천수관음상 사진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피의천장'으로 유명한 양영원으로 간다.
(양영원 가는 길에 멀리)
(삼십삼간당 벽 옆에 원래의 남문이 보인다.)
(양영원)
양영원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인
요도도노가 자신의 생부와 생모를 위해 지은 절인데
도요토미가의 멸망 이후 화재로 전소되고
이에야스가 복구할 때
자신의 부하들의 핏자국이 담긴 마루를
양영원의 천정으로 만들었다 한다.
즉, 교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인기가 많은 도시였고
그가 살던 후시미성은 그의 사후 이에야스측이 접수했는데
세키히라 전투 직전
서군(도요토미가 지지세력)이 후시미성을 공격하였을 때
시간을 벌라는 자살임무를 맏은 동군(이에야스 세력)이
막판에 모두 활복을 하였다 한다.
그들의 핏자국이 남은 마루가 천정이 되었으니
요도도노가 세운 절이 도쿠가와 가문을 위한 절로 바뀐 것이다.
야영원 역시 유로 입장이니
혈의 천장은 인터넷서 본 사진으로 만족하고
문간에서 발을 돌려 나오다...
(혈의 천장;여사재-黎思齋-, 졸라재-拙懶齋-의 글에서 펌)
도랑위에 있는 변재천 사당을 보고는
이총과 도요쿠니 신사쪽으로 걸어간다.
(백사가 있는 변재천 사당.)
이총과 도요쿠니 신사는
도쿄 국립박불관 바로 뒷편에 있는데 1.5km정도 거리이다.
(국립박물관-방광사 터였다.)
(이총)
(까치네 집-민박집인가?)
이총 동쪽 길 건너편에는 도요쿠니 신사가 있다.
도요쿠니 신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1년후
그가 신으로 추앙 되며 생긴 거대한 신사였지만
오사카 성 전투후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한 다음 폐사가 됐다가
메이지시대에 덴노가 직접 명령을 내려
방광사(호코지)의 대불전이 있던 자리에 복원이 되었다.
(당문의 도요토미 가의 문장)
당문은 히데요시의 성이었던 후시미성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안내문을 보니 일본 3대 국보 당문중 하나라 하는데
대덕사는 다녀 왔지만 문을 닫아서 당문을 못 보았고
니시 혼간지는 내일 방문 예정이다.
(배전 뒤 본전)
(마패 모양의 부적? )
바로 옆에는 방광사(호코지)의 종각과 대종이 있다.
방광사는 히데요시가 나라의 동대사를 모방하여 크게 지은 절인데
완공후 1년뒤 지진으로 파괴되었고
(구전에 의하면 19m 대불이 지진으로 목이 부러지자 히데요시는
나라를 지키라고 세웠더니 자신의 몸도 지키지 못하냐며 화를 냈다고 함)
히데요시 사망 후 폐허가 되어 있던 것을 그의 아들 히데요리가 재건하지만..
방광사(호코지)의 종명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야스는 히데요리가 성장함에 따라 그를 견제하기 위해
도요토미가의 막강한 재력을 오닌의 난(교토 절의 90%가 파괴됨)후
교토의 사찰 복구에 사용하게 했다.
그리고 방광사를 재건하면서 만든 종의 문구(종명)를 가지고
트집을 잡은 것이 방광사(호코지)의 종명 사건이다.
(초라하게 남아 있는 방광사 본당과 종루)
(국가안강의 종)
(범종의 문구에 횐색 표시를 해놨다.)
종에는 국가안강(國家安康) 군신풍락(君臣豊樂)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에야스(家康)의 이름을 나누어 저주하고 도요토미(臣豊)는 축복한다' 고
억지로 트집 잡아 히데요리가 있던 오사카 성을 공략했는데 ...
의외로 성이 난공불락이라..여의치 않자,
성주위의 2개의 해자중 바깥 하나를 메꾸는 조건으로 평화 회담을 하였고
(히데요리의 어머니 요도도노가 전쟁을 싫어하여)
회담에 응하여 해자를 메꾸자 나머지 해자도 메꾸어 성을 점령, 히데요리는 자살하였고
그후 1년뒤 이예야스도 사망하였으니 한치 앞도 못보는 풍진속의 인간들..
권력과 인생사의 무상함을 떠올리며
가모대교로 가서 강을 건너 동지사 대학으로 간다.
(가모대교)
(좌측 가모강과 우측 타카노 강의 합수점)
(동지사 대학)
(윤동주 시비 -서시)
(윤동주를 추모하는 모임)
(정지용 시비-압천;가모강)
동지사 대학 바로 뒤에는 상국사가 있다.
상국사는 금각사의 주인공 아시카카 요시미츠가
춘옥선사에게 명하여 조선 건국시기에 지은 절인데,
금각사,은각사를 말사로 둔 교토 5산중 하나이다.
(몽청을 권청개산조로 삼아서 춘옥선사는 2대 주지가 됨)
좌대신(요시미츠의 벼슬)을 중국에서는 상국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하늘로부터 이어받았다는 뜻인 승천을 넣어서
정식이름이 '만년사 상국 승천 선사'라고 한다.
당시 상국사 승려들은 지식과 높은 교양의 인텔리로
명과 조선의 외교문서 작성하는 등 정치 활동 뿐 아니라
풍부한 문예 활동도 하여서 북산문화를 이끌어 냈는데,
북산 문화란 귀족과 무사, 선종의 문화를 혼합한 양식으로
대표적인 것이 나중에 요시미츠가 지은 북산전(금각사)이다.
세종이 하사한 대장경 판본 및 경전도 소장하다 소실하는 등
화마의 피해를 자주 입어 오다가 오닌의 난에서는 전 건물이 다 파괴되었고
그 후 또 화재로 법당을 제외한 대부분이 건물이 소실되어
19세기 초에 복원하였다 하니 법당외에는 오래된 건물이 없으나
승천각 미술관의 오래된 소장품이 유명하다.
(법당)
법당은 설법을 하는 곳인데 안에 불상이 있다.
창문을 막은 격자 철망에 조그마한 구멍을 만들어 놔서
안을 구경하게 해놨다.
(천개가 있는 수미단 뒤에는 삼존불이 있고)
(그 위 천장에는 반룡도가 있다.)
반룡도는 에도 가노파인 에이토구 미쓰노부의 최후의 대작이라 하는데
수미단 아래에서 손뼉을 치면 법당 전체로 울려나간다 하여
우는 용이란 별명이 있다고 한다.
철망의 조그만 구멍으로 핸폰을 집어 넣어 사진을 찍어보다가
옆에 기도하는 일본 부인 눈치가 보여 포기..
늦은 시간이지만 혹시나 하여
고리 옆 승천각 쪽으로 가보나 이미 문을 닫았다.
(고리)
(공음루- 종루)
승천각에는 말사인 금각사,은각사의 유물과
중국 명,원,송 대의 그림, 에도시대 다기등..
대장경을 구입하러 와서 구입해 간 조선 수묵화를 포함한
국보 5점등 여러 문화재가 있다 한다.
(3조대교)
발길을 돌려 아내와 막내가 있다는 교토 아트 센터 근처로 가니
골목에 기온 축제 중 순행이 끝난 야마보코가 서 있었다.
야마보코는 야마(山, 산)와 호코(鉾, 창)가 합쳐진 말로,
야마는 신화나 고사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의 인형을 태운 작은 가마,
호코는 창을 꽂아 화려하게 장식한 커다란 가마다.
‘고이(鯉)’는 ‘잉어’를 의미하는데,
거슬러 오르면 용이 된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용문폭포를 오르는
잉어의 자유분방하고 웅대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가마다.
전체 가마 가운데 물고기를 주제로 하는 것은 고이야마가 유일하다.
가마 안쪽에는 일본 왕실의 조상신이자 땅의 신인
스사노오노미고토를 모셨다.(이하 네이버 검색)
일본 전통극인 노(能) 요오쿄쿠(謠曲) 가운데
‘시카(志賀)’에 등장하는 인물 오토모노 구로누시(9세기 후반에 활동한 시인)가
부채질을 하며 시카의 벚꽃을 바라보는 모습의 인형이 올려진 가마다.
벚꽃 가지를 문 앞에 걸어두면 부정한 것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액막이 전설을 바탕으로 한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세 명의 신,
엔노교자, 히토고토, 가츠라기를 신체로 모시는 가마다.
이는 엔노교자가 히토고토를 이용해서 가츠라기산(나라 현 서북쪽의 산)과
오미네산( 나라 현 중심부의 산)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는 전설을 담고 있다.
‘간논(観音, 관음보살)’에서 유래한 이름이며, ‘기타(北)’는 북쪽을 뜻한다.
남쪽의 관음이라는 의미의 ‘미나미칸논야마(南観音山)’와 짝을 이루는데,
기타칸논야마는 남성을, 미나미칸논야마는 여성을 상징한다.
가마에 버드나무관음입상(恵心僧都源信)을 안치하고,
순행할 때는 버드나무 가지를 꽂고 이동한다.
호코와 야마가 세워진 부근의 오랜 전통을 지닌 가옥이나 점포에서는
대대로 보관해오던 병풍과 족자 등 골동품을 공개하기도 하고
특별히 제작한 부적이나 부채, 액운을 막아주는 장식품도 파는 모양이다.
(문이 열린 점포 안을 들어가 봤다.)
이동거리가 길어서 그런지 허기가 빨리 든다.
숙소 근처의 와규 부페로 가서...
이번 여행의 마지막 저녁이니 좀 무리를 해본다.
(지화자-chifaja 본점)
(신발장)
식사 시간은 두시간인데
나이에 따라 요금이 달라 60,70이 넘으면 깎아준다.
우리나라처럼 마구 집어다 먹는 것이 아니라
메뉴 보고 주문하면 가져다 주는 식이다.
생각보다 빨리 배가 부른 듯하고
두시간도 빨리 지나간듯 하여..
본전 생각에 냉면을 시켜봤으나..역시나 였고,
숙소옆 식당에서 아침 식사용 고등어 초밥을 사고
부페에서의 과음으로 혼절..교토 마지막 밤을 보낸다.
2019.07.20 토요일. 흐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