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성령 충만 회개물결 방방곡곡 확산-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가중되는 일제의 침탈과 함께 살을 에는 겨울바람이 매섭던 1907년1월. '한국의 예루살렘'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는 새해인사가 막 끝난 6일 밤부터 연례행사인 열흘간의 부흥사경회 가 이 해에도 어김없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해의 사경회는 시작 전부터 예년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이날 설교를 맡은 평양신학교 졸업반 39세의 길선주 장로의 얼굴은 위엄과 성 결로 불붙은 얼굴이었다.
"그는 눈이 멀어 나를 보지 못했을 터이나 나는 그의 앞에서 피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놓은 것으로만 생각되었다. 전에 경험하지 못한 죄에 대한 굉장한 두려움이 나를 엄습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두려워 예배당 밖으로 뛰쳐 나갔다. 그러나 곧 되돌아와서 '오 하나님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며 울부짖었다"
첫날밤 집회에 참석했던 정익호 장로의 후일 증언이다.(김양선 '한국기독교사 연구')
회개하는 교인들의 열기는 곧 초대교회 마가의 다락방에 몰아쳤던 성령의 불길 바로 그것 이었다. 이날 밤 집회는 초기 한국교회를 크게 부흥시킨 1907년 대부흥운동의 도화선이 된 다. 그리고 이러한 부흥운동의 맥락은 오늘날까지 한국교회의 한 특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길선주 설교 열기 불 댕겨
한국교회 초창기 선교사들은 당시 한국의 정치상황으로 인해 복음전도를 통한 내면적 신앙 의 전파보다 교육이나 의료사업 등 간접적 선교에 주력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에 따라 초기의 개종자들도 실존적 감화나 성령체험 같은 내면적 신앙보다는 현실 구원적이고 도덕 적인 의식으로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서양의 힘과 문명을 상징하는 교회는 민족구원과 독 립쟁취의 방편으로까지 인식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나 1900년 초 일제의 한국통치가 기정 사실화되어 감에 따라 기독교인들은 기존의 신 앙행태로는 그 실망과 좌절을 극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 그런 신앙행태를 고수하 는 것은 일제의 정치적 탄압에 의해 곧바로 교회의 말살로 직결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한국교회는 내외적으로 선교이래 최대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길선주 목사를 비롯한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몇몇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내면적 신앙을 강조 하며 일기 시작한 심령대부흥은 이런 위기 상황과 맞물려 현실로부터의 도피라기보다는 현 실적 자기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새로운 활로의 모색이었다. 적극적이며 신비 체험적인 한국인의 신앙정조와 일치된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결정적 전기를 이룩했고 이후 한국교회 의 신앙 형태적 성숙과 양적 팽창은 모두 부흥회를 통해 이뤄졌다.
1907년은 한국교회가 민족운동노선과 종교적인 운동노선으로 갈라지는 역사적 분기점으로 기록되고 있다. 사실 부흥운동의 기폭제는 1903년 원산에서 열린 감리교 기도회.
원산선교사들은 활동적인 중국 여선교사 화이트를 초빙, 창전교회에서 초교파연합모임을 가졌다. 기도회가 진행되는 가운데 캐나다 출신 하디선교사는 "3년 동안의 사역이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며 자신의 무능력을 고백하는 눈물의 기도를 했다. 동시에 그는 실패의 원인 이 백인 우월의식과 권위주의, 즉 자신의 신앙적인 허물에 있음을 털어놓았다. 그것은 사실 이었다.
이 고백은 그에게 뿐 아니라 모든 참석자에게 놀라운 성령의 임재를 체험케하는 계기가 되 었다. 모두 앞다투어 자기의 과오를 뉘우쳤고 집회는 눈물바다가 되었다. 이듬해 다시 열린 기도회에서도 롭선교사와 전계은 정춘수 등이 큰 감화를 받아 노방전도를 하며 성령임재를 선포했다. 불길은 꺼지지 않고 해를 넘겨 평양과 멀리 목포에까지 이르렀다. 이무렵 해외에 서도 영국 웨일스 지방과 인도에서 대규모 부흥운동이 일어나 국내의 열기를 더욱 고조시켰 다. 마침내 회개의 기도소리는 1907년 평양에서 절정에 이른다.
평양사경회는 블레어 등이 지도했지만 실제적인 주역은 길선주였다. 그는 고려말 유학자 야은 길재의 19대손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2세때 주위를 놀라게 한 한시를 지을 정도였 다. 한때 선도에 몰입하기도 했으나 친구의 권유로 마펫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리를 전해듣 고 이를 연구하던 중 자기 이름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된다. 마침내 28세 되던 해 가을 거듭남의 체험을 하게됐다. 이후 장로교 최초 7인 목사 중 1인이 되며 한국교회의 독 보적 지도자로 교회의 부흥 발전에 지대한 족적을 남겼다. 그의 교계 지위에 부응, 3·1운동 민족대표로도 나섰으며 개혁신앙의 비조로 기억되고 있다.
아무튼 첫날부터 성령에 사로잡힌 평양사경회는 집회가 계속될수록 더욱 고양되었다. 이미 부흥사로 이름을 떨치고 있던 길장로는 어느 오후 집회 때 설교를 마친 후 긴 끈으로 자기 허리를 묶었다. 한 청중에게 그 끈의 끝을 "꼭 붙들라"라고 말한 후 그는 강단 저쪽에 있는 매큔선교사를 향해 기를 쓰고 가려고 했다. 팽팽한 끈을 가리키며 "우리가 죄에 매여있는 형편이 이와 같다"고 외쳤다.
자기 정체성 확보 새 활로
끈이 끊어지는 순간 그는 내달려 그때까지 팔을 벌리고 있던 매큔을 얼싸 안았다. 그 순간 많은 사람들이 일어서더니 서로 죄를 회개하며 몸부림쳤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몸이요 한 지체"(고전 12:27)라는 블레어 선교사의 설교대로 그간의 반목과 갈등은 순식간에 화해와 사랑으로 승화했다. 사회적 신분과 체면도 아랑곳없이 통성 기도와 간증이 줄을 이었다. 아내를 구박한 일, 첩을 둔 일, 남을 속여 폭리를 취한 일, 도둑 질한 일, 처자 부모를 미워한 일, 거짓말한 일, 달걀 값을 속여 선교사 돈을 갈취한 일 뿐 아니라 강도 강간 살인죄까지 고백되었다.
각종 미제사건을 해결하려는 형사가 교회에 몰래 들어와 자백현장에서 교인을 체포해가기 도 했다. 오히려 기꺼이 연행되었다.
"마지막 집회가 끝나고도 7백여명이 기도를 하려고 남았다… 순간 길장로가 일어나 자신은 블레어 선교사를 극도로 미워했다며 바닥에 굴렀다 … 또 한 교인은 자신의 방탕함을 자복 했다. 그는 펑펑 눈물을 쏟으며 울었고 온 회중도 따라 울었다. 우리는 그 순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분명히 느꼈다"(길진경, '영계 길선주)
죄의 고백에만 그치지 않았다. 이웃에게 과거의 잘못을 비는 행동도 뒤따랐다. 금전적 물질 적 손해배상을 하고 뉘우침과 사과가 뒤따랐다. 또 운동의 물결은 숭실 광성 등 미션계 학 교 학생들을 통해 전도운동으로 전개되었고 특히 여자사경회에서 은혜를 받은 여성들은 자 신들의 가정을 숱하게 교회로 인도했다. 부흥열기는 한반도 전역을 휩쓸고 중국에까지 파급 돼 그곳에서 부흥회가 열리기도 했다.
한편 평양대부흥과 관련,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새벽기도의 시작이었다. 과거 선도수련을 할 때 길선주는 매일 새벽에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교인이 된 뒤에도 기도대상만 바뀌었을 뿐 형태는 계속되었다.
민족지도자 이탈 잇달아
부흥회를 앞두고도 길장로는 박치록 장로와 함께 새벽기도로 이를 준비했다. 새벽기도회는 한국교회의 토착적 신앙형태로 1907년 부흥운동을 통해 한국교회 전체로 확산되었다. 부흥 운동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긍정적인 면으로는 △한국 특유의 신앙양태 뿌리 내림 △교회 가정 사회에 도덕성을 기초로 한 새로운 인간관계 형성 △성령체험을 통한 일 체감 고양 △성경공부 기도회 강화로 교회 급성장 계기 마련 등이다. 특히 조선 봉건체제에 서 정치 경제적으로 억압받아 그만큼 배타의식이 강했던 평양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은 그 뜨 거운 열기가 비록 서울까지 널리 파급되지는 못했지만 나라 전역에 '하나되자'는 일치감을 확산시켜 정치로 풀 수 없는 지역감정이 해소될 가능성을 보여 줬으며 이후 교파연합운동 활성화 토대도 마련케 된다.
그러나 이 운동은 안창호 등이 비판했듯이 교회의 비정치화 몰역사성이라는 부정적 결과도 초래했다. 이후 한국교회는 적잖은 민족지도자급 신자들의 이탈현상을 감내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