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인민 항쟁특집호 전명선의 「방아쇠」와 1946년 대구 10월항쟁 (2)
돌아오는 10월1일 10월항쟁 78주기 위령제가 올려진다. 1946년 10월1일 대구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그 과정을 알아보면서 전명선의 「방아쇠」를 읽게 되었다. 그렇다면 「방아쇠」를 통해 10월항쟁의 모습을 알아보겠다는 것인가? 문학작품으로 쓰인 글을 실증적으로 사용하겠다는 방법론에 이의를 표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10월항쟁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를 얻기 힘든 상황에서 연구자로서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판단하였다. 이것은 10월항쟁이 일어난 해방공간은 당시의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서 「방아쇠」의 주인공 ‘현술’과 같이 평범한 노동자의 목소리를 듣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그 당시 인민은 문자나 기록 행위와 가까울 수 없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인민이 자신들의 생각을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드러내는 수기와 같은 글쓰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문학이야말로 어떤 형태의 기록에도 쉽게 포함될 수 없었던 수많은 인민의 모습을 살피기에 적합한 매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임화는 『문학』 인민항쟁특집호의 편집후기 말미에서 “소설은 직접 인민항쟁에 취재한 것으로 좋은 영향력을 갖은 작품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작품은 사양하기로 하였다.” 라고 말함으로써, 여기에 실린 작품은 실제 사건을 취재한 기록문학임을 밝혔다. 소설「방아쇠」를 읽어보면
게다가 호열자를 핑계 삼아, 시가지로 드나드는 길목을 똑 끊어, 양식 한 톨 출내할 수 없는 이런 세상으로 변하여 갔다
이 소설의 배경은 1946년은 풍년이 들어 평소 쌀 수급 상황이라면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미군정의 미곡 정책이 실책으로 인해 미곡 가가 높이 오르고 현금이 있어도 사기 어려웠다. 게다가 대구에는 호열자[콜레라]가 빠르게 퍼지면서 철도 등을 차단하면서 호남에서 사올 수 있었던 쌀조차 구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한 자료는 대구시보 1946년 7월 2일 자 신문에서 찾을 수 있다. 기사 제호는 ‘쌀을 다오, 교통을 해금하라, 수천시민부청에 쇄도’이다. 아래 기사 내용은 정영진이 ‘대구격동시대’ 제목으로 1945년부터 1946년 10월항쟁에 대한 뒷이야기까지를 매일신문에서 1989년 8월 8일부터 1990년 2월 28일까지 작성하였고 『폭풍의 10월』로 출간되었다. 아래 자료는 『폭풍의 10월』에서 기아 시위에 대한 내용이다.
7월 1일 아침 8시. 동운정 대구부청 앞 광장에는 1·2차 기민 데모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남녀노소 ‘수천 명’의 기아 군중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저마다 빈 쌀자루를 든 파리한 얼굴의 군중들은 ‘배고파 못 살겠소!’ ‘쌀을 주오!’ ‘길을 틔워라!’ 고 외쳐대었다. 종전의 데모 때와는 달리 ‘길을 틔어라!’는 외침이 나온 것은 두 가지 까닭을 담고 있었다.
첫째는 초여름부터 번지기 시작한 호열자로 이 무렵 대구 서만도 매일 수명씩 사망자가 생기자 보건당국이 호열자전염지역에의 접근을 막기 위해 교통을 차단 시켰다. 이 때문에 가뜩이나 품귀이던 뒷거래 양곡이 더욱 반입되지 않아 쌀값이 봄철의 기민 데모 때보다 무려 두 배인 말 당(소두) 1천 원 선 (보리쌀은 5백 원 선)에 육박했다. 둘째는 6월 24일부터 나흘간 계속되던 대구·경북지방의 폭우를 동반한 여름장마로 안동, 영천, 왜관, 고령, 청도 등지에서 대구로 이어지는 국도 및 지방도의 일부가 두절되어 하곡의 반입은 물론 전량 민들의 반양식인 여름 채소마저 귀했으므로 ‘빨리 길을 틔워’라는 절실한 외침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또한 소설 「방아쇠」에서는 총파업을 위해 모여 있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와이샤쓰바람에 제모를 쓴 수백 명의 직조공장 여직공들, 꾀죄죄한 철공소의 천여 명 직공들, 고무공장 여직공들, 흰 수건을 질끈 동이고 신작로가 뿌듯하게 뿌연 먼지를 이르키며 달려오는 구르마꾼 노동자들 우편국이다. 인쇄소다. 신문사다 .
그리고 이렇게 총파업에 참여하는 노동자의 호응이 높았던 이유는 9월 총파업 이전에 전매국의 파업 사건들이 있었다. 일자별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946년 3월 9일- 3월 28일 대구 전매국
3월 9일: 전주 전매국의 업무과장이 신임 국장으로 부임하였다. 신임 국장은 “지금 노조 분화를 방해하는 데는 정면으로 탄압하여서는 오히려 강화해줄 뿐이므로 사무원들을 매수하여 이 분회 내에서 싸움이 일어나도록 하면 자연히 소멸하고 만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대구 분회 노동자들은 신임 국장 축출과 부당 해고를 반개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3월 28일: 강제 해고를 반대하고 제조장 등 반동 간부 축축 따위를 요구하고 두 달 동안 투쟁하였다. 직장 대회를 열고 7개 요구 조건을 결정하고 요구 조건의 일부를 관철하였다.
1946년 8월 22일-8월 24일 대구 전매국
8월 22일: 교섭위원 2명을 뽑아 국장과 교섭하였던바 무시당하였다.
8월 23일: 직장대회를 개최하였다.
8월 24일: 단식 농성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47년 1월 28일 자 전국노동자신문에서 현옥순(10월항쟁에 참가한 제사공)의 10월항쟁 수기를 찾아볼 수 있다.
우리 섬유에서도 26일 철도와 같은 요구 조건을 내걸고 파업을 한 것입니다. 편창제사공장 동무들의 힘이 약해서 협화직물공장에 있는 동무들 4명이 27일 오후 7시경 되어 보통 키 한 길 반쯤 되는 높은 담을 뛰어 넘어가서 거기 있는 동무들의 힘을 올리게 하며 큰 힘을 자본가에게 나타냈습니다. (…) 나이로 보면 16세밖에 안 되는 어린 여동무들입니다. 이 어린 여동무들은 끝까지 싸워서 그 공장 내부를 튼튼하게 만들 때까지 싸워 보겠다는 마음으로 힘껏 일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어린 동무의 4인의 힘으로 5백 명의 종업원 동무들을 이끌고 나갔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3천 명의 섬유 공장 동무들은 머리에다가 수건을 불끈불끈 매고 씩씩하게 힘차게 스크럼을 짜고 노평 앞으로 나갔습니다. (…) 10월 1일에는 경관이 총을 가지고 와서 2열을 짜서 서 있는데 섬유에서 제일 먼저 경관 앞에 나가서 아지프로 agitation propaganda:선동을 목적으로 하는 선전
(agitation propaganda)를 하기를 ‘친애하는 경관 여러분들, (…) 어떤 이유로 왔습니까? 여기 있는 우리 노동자들 보호하러 왔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총으로 쏘려고 왔습니까? 총으로 쏘려고 왔거든 쏘시고, 보호하러 왔거든 우리와 같이 싸웁시다. 조선 동포라면 싸울 것입니다.’ (…) ‘배가 고파서 쌀을 다오, 못 먹고 살아서 돈을 다오 하는 것이 정당한 요구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으로 쏘려고 온 것은 어찌 조선 동포라고 보겠습니까?’ 이와 같이 어린 동무들이 경관 속으로 들어가서 아지프로를 하였습니다.
「방아쇠」에서 보면 총파업에 참여한 직종들의 인원을 기록한 자료가 있다. 1963년 『사상계』에 이목우가 작성한 대구 『10·1폭동』 사건 당시 취재 기사의 회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노평과 전평이 교섭단체로서 표면에 나선 이 무렵 30일 낮까지 알려진 대구 시내의 파업 인원 수는 다음과 같다.
◆철도, 1.200명 ◆단우직물 30 ◆동우직물 60 ◆대구견직 40 ◆우체국 460 ◆조선중공업 130 ◆동창산업 50 ◆일출제사 35 ◆대화직물 60 ◆편찬제사 300 ◆신흥제사 700 ◆남선타올 100 ◆한일막대소 메리야스
50 ◆협화직물 50 ◆군시제사 300 ◆대구시보 30 ◆영남일보 30 ◆대구인쇄 40 ◆남부철공 30 ◆비산동 일대 수공업 300 ◆동화직물 70 ◆경북직물 18 ◆건국철공 150 ◆신암철공 30 ◆경북신문12 ◆지방체신관계=경주 170 ◆포항 180 ◆안동 50 ◆합천 22 ◆상주 180 ◆안동 120명 등 파업의 이 범위는 당시 인구 40만 정도인 대구시로서는 심상치 않은 사태였다.
다음 내용은 『방아쇠』에서 파업에 참여하는 과정을 묘사한 내용이다.
먼저날의 실패를 거울삼어, 삼십 명 전직공과 한자리에 모이게 되였을 때에는, 두말없이 일을 멈추고라도 철도국과 같은 길을 걷자고, 의견이 일치되었든 것이다.
이제 시위에 참가하게 된 현술은 자리를 잡고 앉으려고 한다. “여러분 이리들 드러오시요, 이게 모도 여러분의 일입니다.” 이 현술이 말에 반기여 일반 시민들은 만세로 고함을 지르며 제각금 출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대열, 속으로 드러와 섞기였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리고 약속된 열두 시까지 해방의 노래를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우렁차게 불렀다.
소설 『방아쇠』에서 나오는 해방의 노래’는 작사는 임화하고, 작곡은 김순남이 하였다. 가사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조선의 대중들아 들어보아라 우렁차게 들려오는 해방의 날을
시위자가 울리는 말굽소리와 미래를 고하는 아우성 소리
노동자와 농민들은 힘을 다하여 놈들에게 빼앗겼던 토지와 공장
정의의 손으로 탈환하여라 제놈들의 힘이야 그 무엇이랴
조선의 운명이 그 총부리 때문에 이리저리 돼야 하는 것이냐? 학생들이 부르짖은 것은 우선 그 무장해제였다. 시민들의 환호성에 싸여 사나운 파도처럼 드리닥처 T서를 접수하든 그 순간! 그리하야 T서를 접수한 학생대는 그 여세로 정거장 앞 노동자와 시민의 거리로 풍우같이 달리여갔다. 몇만 명의 든든한 학생대를 마지한 정거장 거리에서는, 또 한 번 그들의 용감한 태도를 환영하는 우렁찬 아우성이 천지를 진동식혔다.
소설 『방아쇠』 마지막 부분의 외침이 여운을 남긴다.
"일본놈시대에는 맘대로 했지만, 지금은 민주주의요, 우리에게도 파업하고 시위할 자유가 있오." "배곱하 못살겠으니 식량을 주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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