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熱河日記)》로 유명한 연암(燕岩) 박지원은
민(閔)씨 성을 가진 기이한 노인 이야기를 남겼다.
그에 따르면 민옹(閔翁)은 첨사(僉使) 벼슬을 한 뒤에 시골집에서 살았는데
어릴 적부터 매우 총명하고 말을 잘했다고 한다.
그는 성격이 매우 특이하여 옛사람들의 기이한 절개나 거룩한 행적을 흠앙(欽仰)하였다.
그는 고사(故事)를 음미할 때마다 의기에 북받쳐 흥분하기가 예사였으며,
한숨짓고 눈물을 흘리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일곱 살이 되자,
“항탁(項槖)은 이 나이에 남의 스승이 되었다”고 벽에 써 붙였다.
그러더니 열두 살에는 다시,
“감라(甘羅)는 이 나이에 장수가 되었다”라고 써 붙였으며,
열세 살이 되자 다시,
“외황아(外黃兒)는 이 나이에 유세(遊說) 하였다”라고 썼고,
열여덟 살에는,
“곽거병(藿去病)은 이 나이에 기련(祈連)에 싸우러 나갔다”라고 썼으며,
스물네 살에는,
“항적(項籍)은 이 나이에 오강(烏江)을 건넜다”라고 썼다.
그렇지만 막상 자신은 마흔 살이 되도록 큰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그 대신,
“맹자(孟子)는 이 나이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라고 써 붙이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이런 식으로 해가 바뀔 적마다 벽에 여러 글이 들어차 온통 먹빛이 되었지만 그는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일흔 살이 되었을 때의 새해 아침에 그의 아내가 물었다.
“영감, 올해는 왜 까마귀를 그리지 않으시우?”
그러자 민옹은 기쁜 표정을 지으며,
“당신이 빨리 먹이나 갈아주소” 하더니,
“범증(范曾)은 이 나이에 기이한 꾀를 좋아하였다”라고 쓰는 것이었다.
그의 아내가 벌컥 화를 내며,
“꾀가 아무리 기이하기로서니 장차 어느 때에 쓰려고 그러우?” 하고 물었다.
그러자 민옹은 태연하게 웃으며 대꾸하는 것이었다.
“옛날 여상(呂尙)은 여든 살에 장수가 되어 매처럼 드날렸다우.
지금 나는 여상에 비한다면 오히려 아우뻘 밖에 안 되는걸.”
~ ~
그때 박지원은 열여덟 살 소년으로 병에 시달리던 중 민옹을 알게 되었다.
민옹이 물었다.
“너는 무슨 병이 걸렸느냐? 머리를 앓는 거냐?”
“아닙니다.”
“그럼 배앓이를 하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슨 병을 앓고 있는 거냐?”
“밥이 잘 넘어가질 않습니다. 밤에 잠도 안 오고요.”
민옹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치하하였다.
박지원이 무엇을 치하하는지 묻자 민옹이 말하였다.
“너는 집안이 가난한데 다행히 음식을 싫어한다니 그렇다면 살림살이가 여유가 있지 않겠느냐?
또 졸음이 없다니 낮밤을 겸해서 살게 되어 나이를 곱절로 누리는 게 아니냐?
살림살이가 늘고 나이를 곱절로 누린즉 그야말로 수(壽)와 부(富)를 함께 누리는 것이 아니겠느냐?”
~ ~
어느 날 여러 사람이 민옹과 자리를 함께 했는데 민옹의 말재간을 당하는 사람이 없었다.
민옹은 손님들에게 농도 붙이고 높은 목소리로 꾸짖기도 하였다.
한 손님이 민옹에게 물었다.
“그럼 영감님은 귀신도 보았겠구려.”
“그럼 봤구말구.”
“그럼 귀신은 어디 있수?”
민옹은 등경 뒤에 앉은 사람을 가리키며,
“귀신이 저기 있지 않소?” 하였다.
그 손님이 성을 내며 민옹에게 따졌다. 그러자 민옹이 설명했다.
“대체로 밝으면 사람이요 어두우면 귀신인데, 당신은 지금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을 살피며
얼굴을 숨긴 채로 사람들을 엿보니 귀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럴 수 있소?”
이에 모두 웃었다. 손님이 또 묻기를,
“그럼 신선도 보았겠구려.”
“보았구말구.”
“그럼 신선은 어디 있습니까?”
“신선이라는 게 별게 아니라오. 살림이 가난한 이가 곧 신선이지.
부자들은 늘 속세를 그리워하는데 가난한 이는 속세를 싫어하는 법인즉,
속세를 싫어하는 사람이 신선이 아니고 무엇이우?”
~ ~
어느 손님이 민옹에게 물었다.
“영감님은 두려운 게 뭡니까?”
민옹은 별안간 소리를 높여 대답하는 것이었다.
“가장 두려운 것으로 나 자신보다 더한 것은 없다우.
사람의 오른쪽 눈은 용이요, 왼쪽 눈은 범이라우.
혀 밑에는 도끼를 간직했고, 꼬부라진 팔은 활처럼 생기지 않았소?
내 마음을 잘 가지면 어린아이처럼 착하겠지만 까딱 잘못하면 오랑캐가 될 수 있으니,
잘 삼가지 못하면 장차 스스로 물고, 끊고, 망칠 수가 있는 법이오.
그러므로 옛 성인의 말씀 가운데 ‘자기의 사욕을 이겨 예(禮)로 돌아간다’고도 하고,
‘사심을 버리고 참된 마음을 갖는다’고도 하였으니 그들도 일찍이 두려움이 없었던 게 아니라우.”
-《리더의 아침을 여는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