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년 왕위에 오른 의자왕은 즉위한 이듬해 어머니가 죽자 동생인 교기와 여동생 4명 등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하는, 전격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자세한 내막은 전하지 않지만 태자 책봉이 늦었던 원인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거나 그 원인이 되었던 인물들을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해 국내를 순무하며 죄수의 정상을 기록하여 죽을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용서해주는 등 민심을 수습하기도 했다.
그렇게 내부의 권력 기반을 다진 뒤, 외부적으로는 연이은 승전고를 울리며 자신의 역량을 과시했다. 그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해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고, 바로 다음달 윤충을 보내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인 대야성을 공격해 성을 함락시키는 등 신라를 큰 곤경에 빠뜨렸다.
그런데 문제는 대야성의 성주 품석이 김춘추의 사위이고, 이 싸움의 와중에서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가 죽었다는 데 있었다. 딸의 사망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기둥에 기대서서 종일토록 눈을 깜빡이지 않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지 못할 정도로 슬퍼했다. 그러고는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멸하지 못하랴.”며 벽제 멸망에 온 힘을 쏟기로 결심했다고 전한다. 그 뒤 김춘추는 고구려, 왜, 그리고 당나라를 직접 방문하며 목숨을 건 외교전을 벌인 끝에 결국 당나라와 군사연합을 맺는 데 성공한다. 비록 당이 김춘추의 설득에 신라와 군사 연합을 맺었지만, 이전까지 백제와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의자왕은 집권 초기 외교에도 탁월한 수완을 보였다. 즉위한 해부터 5년 동안 계속해서 당나라에 조공을 하며 관계를 다졌고, 왜와도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고구려와도 힘을 합쳐 신라를 군사적으로 압박했다.
재위 3년인 643년에는 고구려와 화친하여 신라의 당항성을 공격했다. 당항성은 신라와 당나라의 해로를 연결해주는 요충지였다. 당항성이 공격 당하자 신라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했고, 그것을 안 의자왕은 곧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관계가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등 국제관계에 민첩하게 대응했다. 645년에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신라의 군사를 징벌한다는 말을 듣고 그 틈을 타 신라의 일곱 성을 공격해 빼앗았으며, 655년에는 고구려∙말갈과 함께 신라의 30여 개 성을 쳐부수는 등 군사적인 능력도 탁월했다. 의자왕 집권 전반기 백제와 신라는 곳곳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전쟁의 주도권은 분명 백제에게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