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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옥사(己丑獄事)- 기축년 정여립 (鄭汝立)의 옥사(獄事)
기축년 정여립 (鄭汝立)의 옥사(獄事) 인용한 기축록 중에 동인 기축록(東人己丑錄)은 청점(靑點)으로 표시하고, 서인 기축록(西人己丑錄)은 홍점(紅點)으로 표시하였다. -연려실기술-
1. 기축년 10월 2일 황해 감사 한준(韓準)의 비밀장계(秘密狀啓)가 들어왔다. 이날 밤에 삼정승ㆍ육승지ㆍ의금부 당상관들을 급히 들어오게 하고, 다시 숙직에 들어온 총관ㆍ옥당 상하번(番)들도 모두 입시하도록 명하였는데, 검열 이진길(李震吉)만은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임금이 비밀장계를 내려서 보이니, 그것은 안악(安岳) 군수 이축(李軸)ㆍ재령(載寧)군수 박충간(朴忠侃)ㆍ신천(信川) 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이 역적 사건을 고변(告變)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수찬을 지낸 전주에 사는 정여립(鄭汝立)이 모반하여 괴수가 되었는데, 그 일당인 안악에 사는 조구(趙球)가 밀고한 것이었다. 즉시 의금부 도사를 황해도와 전라도에 나누어 보내고 이진길을 의금부에 가두게 하였다. 진길은 곧 여립의 생질이었다. 《시정록》 《일월록》 《조야기문》 《계갑일록》
2. 여립의 아버지 희증(希曾)은 대대로 전주 남문 밖에서 살아왔다. 처음 여립을 잉태할 때에 꿈에 정중부(鄭仲夫)가 나타났고, 날 때에도 또 같은 꿈을 꾸었다. 친구들이 와서 축하하였으나 그는 기뻐하는 빛이 없었다. 나이 7, 8세에 여러 아이들과 놀면서 까치새끼를 잡아 주둥이로부터 발까지 뼈를 부러뜨리고 살을 찢었다. 희증이 그것을 보고, “누가 이렇게 못된 짓을 했느냐.”고 물으니 한 여종이 먼저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희증이 노하여 여립을 크게 꾸짖었더니, 그날 밤에 종 아이의 부모는 방아 찧으러 나가고 아이 혼자 자고 있는 것을 여립이 들어가서 칼로 배를 갈라 죽였다.그 부모가 돌아와서 보니 자리에 피가 가득하고 아이는 죽어 있었다. 발을 구르면서 통곡하니 이웃 사람들이 저자같이 모여들었다. 그때 여립이 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다가 나오면서, “내가 한 짓이니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하고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았다. 듣는 이가 해괴하게 여기고 혹은 말하기를, “악장군(惡將軍)이 났다.”고 하였다. 그뒤에 여립의 나이 15, 6세가 되었을 때에 그 아버지 희증이 현감이 되었는데 여립이 따라 가서 한 고을 일을 전부 제 마음대로 처단하니, 아전들은 여립의 말만을 따르게 되었고 희증은 혀만 찰 따름이었다.금구(金溝)에서 장가 들어 그곳에서 살았고 과거에 급제하였다.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서 글 읽기에 힘쓰니, 이름이 전라도 일대에 높이 나서 죽도(竹島) 선생이라고 일컫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성질이 흉악하여 형제가 5, 6명이나 되어도 다 서로 용납하지 못하고 안팎의 친척들이 원수가 되지 아니한 이가 없었다. 이웃에 사족(士族)의 청상과부가 있었는데 재산이 많고 재가할 뜻이 없었다. 여립이 그 과부가 집안에 강도를 붙여 두었다고 관청에 무고하여 그 집 노비를 잡아 가두게 하고 밤에 가서 강간하여 마침내 첩으로 삼았다. 《혼정록(混定錄)》
3. 여립이 기백이 굉장하고 말솜씨가 좋아서 입을 열기만 하면 그 말이 옳고 그른 것은 불문하고 좌석에 있는 이들이 칭찬하고 탄복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사마광(司馬光)이 위(魏) 나라로 정통을 삼아 기년(紀年)한 것은 참으로 직필(直筆)이다. 천하는 공물(公物)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리요. 요(堯)ㆍ순(舜)ㆍ우(禹)가 임금의 자리를 서로 전하였으니 성인이 아닌가.” 하였다. 또 말하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기 아니한다고 한 것은 왕촉(王蠋)이 죽을 때에 일시적으로 한 말이고 성현의 통론은 아니다. 유하혜(柳下惠)는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는가.” 하였으니, 그는 성인의 화(和)한 자가 아닌가. 맹자(孟子)가 제(齊) 나라ㆍ양(梁) 나라 같은 제후들에게 천자가 될 수 있는 왕도(王道)정치를 권하였으니, 성인의 다음[亞聖]이 아닌가.” 하였다. 그의 제자 조유직(趙惟直)ㆍ신여성(辛汝成) 등이, “선생의 이런한 의논은 고금의 유현(儒賢)들이 아직까지 말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하였다. 《일월록》 《조야기문》 《혼정록》
4. 과거에 여립이 여러 번 임금의 꾸지람을 받고 전라도로 돌아갔다. 조정에서 그를 좋은 벼슬자리에 쓰기를 매양 제청하였으나 임금은 끝내 듣지 아니하였다. 여립은 처음부터 발호의 뜻이 있었는데 억누름을 심히 당하자 모반할 계획이 더욱 짙어졌다. 학문을 강론한다고 칭탁하고 무뢰한을 불러 모으는데 무사ㆍ승려들이 그 중에 섞여 있었다. 또 황해도의 습속이 완악하여 전일에 임꺽정(林巨正)의 난도 있었으므로 그곳에 가서 일을 꾸미려고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가 되려고 해 보았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안악(安岳) 사람 변숭복(邊崇福)ㆍ박연령(朴延齡)과 해주 사람 지함두(池涵斗)들과 비밀히 사귀어 결탁하였다.
5. 여립은 비밀이 자못 누설되는 것을 알고 드디어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은밀히 부서를 정하여 이해 겨울을 기하여서 서(황해도)ㆍ남(전라도) 지방에서 일제히 군사를 일으켜 바로 서울을 범하려고 하였다. 황해도 구월산 중들도 서로 호응하는 자가 있었다. 중 의암(義巖)이 그 내용을 탐지하여 재령 군수 박충간(朴忠侃)에게 밀고하였으나, 충간은 사실의 진위를 의심하고 주저하여 감히 나서지 못하였다. 안악 교생(校生) 조구(趙球)가 정여립의 제자라 칭하고 도당을 많이 모아 술을 마시고, 하는 행동이 대단히 수상하여 안악 군수 이축(李軸)이 잡아 가지고 물으니, 조구는 숨길 수 없음을 알고서 역적 모의한 내용을 다 일러 바쳤다. 이축은 편지로 박충간을 불러서 상의한 결과, 신천 군수 한응인(韓應寅)은 명사(名士)이니 조정에서도 그 사람 말이면 믿을 것이라 하고, 두 사람이 조구를 신천에 보내서 한군수와 연명으로 고변서를 감사 한준(韓準)에게 보고하여 비밀장계를 올려 고변한 것이다.
6. 여립이 잡술에 널리 통하여 장차 나라에 변이 일어나게 될 것을 미리 알고, 기회를 타서 난을 일으키려고 전주ㆍ금구ㆍ태인(泰仁) 등 이웃 고을의 여러 무사들과 공ㆍ사(公私)의 노비 등 계급의 상하를 통하여 계(契)를 조직하고, 계 이름을 대동계(大同契)라고 하여 매월 15일이 되면 그들이 전부 여립의 집에 모여서 활쏘기를 연습하면서, “육예(六藝)는 폐할 수 없다.” 하였다.
술과 고기는 제 집에서 준비하고 여러 고을에 편지를 보내어 각종 물자를 청구하였다. 정해년에 왜변이 일어날 때에 전부 부윤 남언경(南彦經)이 여립에게 청하여 일을 의논하였더니, 여립의 호령이 한 번 내리자 많은 군사가 일시에 다 모여서 감히 뒤에 서는 자가 없었다. 여립이 각 군 부서를 나누어 각각 영장(領將)을 정하니 이들이 다 대동계의 절친한 무사들이었다. 왜적이 물러가고 군사를 해산할 때에 여립이 여러 영장들에게 명하기를, “너희들은 뒷날에 또 어떤 일이 있거든 각기 소속 군사를 거느리고 일시에 모이라.” 하고 군부(軍簿) 한 벌을 여립이 가지고 돌아갔다. 《혼정록》
7. 적신(賊臣)정여립은 널리 배우고 많이 기억하여 경전(經傳)을 통달하였으며 의논이 과격하며 드높아 바람처럼 발하였다. 이이(李珥)가 그 재간을 기특하게 여겨 연접하고 소개하여 드디어 청현직에 올려서 이름이 높아졌더니, 이이가 죽은 뒤에 여립은 도리어 그를 뜯으므로 임금이 미워하였다. 여립은 벼슬을 버리고 전주에 돌아가 나라에서 여러 번 불러도 나가지 않고, 향곡(鄕曲)에서 세력을 피워 가만히 역적을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자살하였다. 《부계기문》
8. 여립이 지함두(池涵斗)와 중 의연(義衍)ㆍ도잠(道潛)ㆍ설청(雪淸) 등과 함께 황해도에 가서 구월산(九月山) 등 여러 산을 구경하고 돌아오다가, 충청도에 들러 계룡산(鷄龍山)을 구경하고 어느 폐암(廢庵 중없는 절)에서 시 한 수를 지어 벽에 붙였는데,
남쪽 나라 두루 다녔더니 / 客行南國遍
계룡산에서 눈이 처음 밝도다 / 鷄岳眼初明
뛰는 말이 채찍에 놀란 형세요 / 躍馬驚鞭勢
고개 돌린 용이 조산(祖山)을 돌아보는 형국이니 / 回龍顧祖形
아름다운 기운이 모였고 / 蔥蔥佳氣合
상서로운 구름이 나도다 / 藹藹瑞雲生
무ㆍ기(戊己) 양년에 좋은 운수가 열릴 것이니 / 戊己開亨運
태평 세월을 이룩하기 무엇이 어려우리요 / 何難致太平
하였다.
전날에, “목자는 망하고[木子(李)亡] 전읍은 흥한다.[奠邑(鄭)興]”는 동요가 떠돌아 다녔는데 여립이 이것을 옥판(玉板)에 새겨서 중 의연(義衍)을 시켜 지리산 석굴 속에 감추어 두게 한 후, 뒤에 산 구경 갔다가 우연히 이것을 얻은 것처럼 꾸몄다. 그때에 변숭복ㆍ박연령 등이 한 자리에서 이것을 보고 여립을 시대 운기에 맞추어 난 사람이라고 하였다. 또 동요가 떠돌기를, “뽕나무에 말갈기[馬鬣]가 나면 그 집 주인은 왕이 된다.”고 하였다. 여립이 의연(義衍)과 더불어 자기집 후원에서 뽕나무 껍질을 갈라서 말갈기를 박아 놓았더니, 오랜 뒤에 뽕나무 껍질이 굳어져 버렸다. 여립은 이웃 사람을 불러서 보이고 이런 말을 입 밖에 내지 말라고 하면서 그것을 깍아 없애버렸더니, 이 소문이 민간에 멀리 퍼졌다. 《일월록》ㆍ《조야기문》ㆍ《혼정록》
9. 이보다 수 십년 전에 천안(天安) 땅에 길삼봉(吉三峯)이란 종이 있었는데, 용맹이 뛰어나 화적(火賊)질을 하였다. 관군이 잡으려 할 때마다 번번이 탈주하여 그 이름이 나라 안에 퍼지게 되었다. 여립이 지함두를 시켜서 황해도 지방에 말을 퍼뜨리기를, “길삼봉ㆍ길삼산(吉三山) 형제는 신병(神兵)을 거느리고 지리산에 들어가기도 하고 계룡산에 들어가기도 한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정팔룡(鄭八龍)이라는 신기로운 용맹 있는 사람이 곧 임금이 될 것인데 머지 않아 군사를 일으킬 것이다” 하였으니 팔룡(八龍)은 곧 여립의 어릴 때 이름인데, 이 실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딴 사람이 있는 줄로 의심하였다. 그래서 황해도에서는 이 말이 널리 퍼져서, “호남 전주 지방에서 성인(聖人)이 일어나서 만 백성을 건져 이로부터 나라가 태평하리라.”고 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은 이것을 듣고 현혹되어 쑥덕거렸다.
10. 여립의 아들 옥남(玉男)은, 날 때부터 얼굴이 준수하고 눈동자가 두 개씩이요, 두 어깨에 사마귀가 일월(日月) 형상으로 박혀 있었다. 여립이 역적 도모할 마음이 생긴 것은 대개 옥남이를 믿은 까닭이라 한다. 뒤에 옥남이가 잡혀 와서 공술하기를, “길삼봉은 힘이 세어서 반석을 손으로 쳐서 쪼갠다.” 하였다.그 당시에 문사랑(問事郞)(국청(鞫廳)에서 죄인의 공술을 직접 받는 임시 책임자)이던 이항복(李恒福)이 이 말을 한문으로 빨리 받아 쓰지 못하니, 옥남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소반같은 큰 돌을 주먹으로 때리니, 곧 깨어졌다고 쓰지 않는가? [如盤大石拳叩叩破]” 하였다. 《일월록》ㆍ《조야기문》ㆍ《혼정록》ㆍ《난중잡록(亂中雜錄)》에는 지함두가 대답하기를, “내가 주먹으로 반석을 치니, 돌이 번개같이 사방으로 흩어졌으므로 도당 중에 장수가 되었다.”고 하였다.
11. 지함두의 본명은 경함(景涵)이니, 서울 사람이다. 젊을 때 가까운 친척과 간통한 사실이 발각되어 이름을 고치고 도망쳐 다녔다. 글을 조금 알아서 스스로 처사(處士)라 하였다. 일찍이 여립의 편지를 가지고 지방 수령들을 찾아 다녔는데, 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순천(順天)에 와서 환선정(喚仙亭)에서 군사를 사열할 때에 함두가 명함을 드리고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함두는 누런 큰 갓을 쓰고 도사(道士)의 옷차림으로 나귀를 타고 그 앞을 지나가니, 병졸들이 잡아다가 뜰 앞에 꿇어 앉혔다. 함두는 곧 여립의 편지를 이광에게 드리니, 이광이 읍하고 맞아 올려서 속세를 떠난 높은 도사로 대접하였다. 함두는 곧 시를 한 수 지어 올렸는데,
해동(海東)의 궁벽한 데 살아 僻居海東
경전(經傳)을 겨우 통하였다 經傳纔通
어찌 알았으리요 那知今日
오늘날 영감에게 범할 줄을 犯我相公
이라고 하였다. 이광이 이것을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함두는 일찍 장흥(長興) 문희개(文希凱)의 집 벽에다가 시를 지어 쓰기를,
궁할 때에 콩죽 한 그릇도 광무제(光武帝)가 기억했거늘 / 窘中豆粥光猶記
하물며 오늘 아침 술 한 병이랴 / 何況今朝酒一壺
하였다. 함두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그 사람 손으로 성명ㆍ거주ㆍ연령ㆍ본관 등을 책자에 쓰게 하고 그 책 이름을 《불망록(不忘錄)》이라 하였다. 《일월록》
12. 의연(義衍)은 운봉(雲峰) 고을 평민의 아들인데, 스스로 중국 요동(遼東)사람이라 하면서 각 지방의 여러 산으로 두루 다니며 말하기를, “내가 요동 있을 때에 동쪽 나라에 왕기(王氣)가 있음을 바라보고 한양에 이르니, 왕기는 전라도에 있고, 전라도에 오니 그 기운이 전주 남문 밖에 있다.” 하였다. 《일월록》
13. 전주(全州) 사는 이정란(李廷鸞)은 여립과 선대부터 교분이 있고 이웃에서 살았으나 홀로 여립을 극력 배척하였다. 또 태인(泰仁)에 사는 김대립은 여립의 처족인데 일찍이 시냇가에 조그만 정자를 지었더니, 여립이 그 정자와 마주 바라 보이는 곳에 서원(書院)을 짓자 대립이 곧 정자를 헐어버렸다. 다른 사람이 그 이유를 물으니 대립이 말하기를, “그 사람과 가까운 거리에서는 서로 사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또 영암(靈岩) 사는 백광훈(白光勳)은 그 아들 진남(振南)을 데리고 서울에 와서 살았는데, 여립이 진남의 영특하고 준수함을 보고 자기 집에 머물러 글 배우기를 청하였더니, 광훈이 길이 멀다고 사양하였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으니 광훈이 말하기를, “스승과 제자를 가리는데는 그 처음에 잘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혼정록》
13. 김대립의 조카 중에 송간(宋侃 무인(武人))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여립이 만나기를 여러 번 청하므로 송간이 여립을 보고, 또 여립이 함두(涵斗)ㆍ숭복(崇福)ㆍ연령(延齡)과 그 외에 승려 4, 5명이 여립의 집에서 내외(內外)를 통하여 밤낮으로 같이 지내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고 돌아와서 은밀히 대립에게 말하기를, “나는 아저씨가 정자 허는 것을 너무 과한 일로 알았더니, 오늘에 이르러 처음으로 아저씨의 격식에 미치치 못함을 알았다.” 하였다.
14. 고부(古阜) 사는 한경(韓憬)이 여립의 밑에서 글을 배웠는데 9월에 여립의 집에 가보니, 여립은 학문 가르치는 데는 뜻이 없고 잡류들만이 출입하는 것을 보고, 그의 행동에 의심이 나서 아무런 하직도 하지 않고 돌아와서, 식음을 전폐하며 문 밖에 나가지 않고 그 아우 척(惕)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머지 않아 큰 사변이 날 것이다” 하였다.
15. 이때에 이산해(李山海)ㆍ정언신(鄭彦信) 등이 정승 자리에 있었고, 이발(李潑)과 백유양(白惟讓) 등이 조정의 의논을 주장하여, 여립을 비호하는 편이 되어서 여립을 고변한 것을 이이(李珥)의 제자들이 한 짓이라고 하였다. 정언신이 어전에서 하늘을 쳐다보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정여립이 어찌 역적이 될 수 있을까.” 하였으며, 또 국청(鞫廳)에 나아가서도 큰 소리로 말하기를, “정대보(鄭大甫 여립(汝立)의 자(字))가 어찌 역적이 될 수 있나. 고변한 자를 반드시 잡아 죽여야 한다.” 하였다. 또 이길(李洁)은 여립이 도망간 것은 옛날에 장검(張儉)의 망명(亡命)에 비하였다. 〈송강년보(松江年譜)〉
16. 이때에 송한필(宋翰弼)이 황해도에 가서 성명을 고치고 스스로 조(趙)생원이라고 하였다. 밤낮으로 동인(東人)을 원망하여 원한이 골수에 사무쳤다. 또 정여립이란 자는 전주 사람인데, 넓게 배우고 들은 것이 많아서 성현의 글을 읽지 않은 것이 없고 우계(牛溪)와 율곡(栗谷)문하에 출입하였다. 두 사람이 함께 추천하여 홍문관 수찬에 올랐다가, 서인들이 세력을 잃게 되자 다시 동인에게 붙으니, 이발(李潑)이 받아들였다. 이발은 남평(南平) 사람인데 이때부터 여립과 서로 친하게 되었다. 여립의 사람됨이 심술이 바르지 못하고 어리석고 기운이 과하여 이이(李珥)를 공격하는 데는 못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서인(西人)들은 그를 극히 미워하였고, 비록 동인들 중에서도 역시 후폐가 있을 줄 알고, 혹은 이발에게 절교할 것을 권하기도 하였으나 이발은 인재가 아깝다 하여 듣지 아니하였다.
한필의 무리들이 황해도 땅에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꾀어서 말하기를, “전주에 성인이 났으니 즉 정수찬(鄭修撰)이다. 길삼봉(吉三峯)과 서로 친하게 왕래하는데, 삼봉은 하루 3백리 길을 걸으며 지혜와 용맹이 비할 데 없으니, 역시 신인이다. 너희들이 만일 가서 볼 것 같으면 벼슬이 스스로 올 것이다.” 하였다. 교생(校生) 변숭복ㆍ박연령 등 몇 사람이 그 말을 믿고서 여립을 가보니, 여립도 그들을 후하게 대우하여 보냈다.그때에 박충간(朴忠侃)은 재령 군수였고, 이축(李軸)은 안악 군수였고, 한응인(韓應寅)은 신천 군수였는데, 충간이 안악에 달려가서 이축에게 말하기를, “여립의 역적 음모가 이미 드러났으니 속히 도모해야겠다.” 하였으나, 이축은 마음이 옹졸하여 심히 어렵게 여겼다. 또 신천에 가보니 응인은 밝은 사람이므로 그 기미를 알고 술을 마시며 거짓 취하는 체 하니 충간이 입을 열지 못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두어 차례 한 뒤에 충간은 드디어 이축을 협박하고 응인을 공갈하여 감사에게 보고하여 장계(壯啓)를 올리니, 조정과 민간이 경동하였다. 임금이 대신을 모아 이르기를, “내가 여립의 위인을 아나 어찌 역적에까지 이르겠는가.” 하니, 좌의정 정언신이 약간 냉소하며 아뢰기를,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이까. 그러나 잡아다 국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고, 비록 서인들이라도 다 말 하기를. “여립이 마음씨는 부정할망정 어찌 반역할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때에 역적 모의에 참가했다는 백성 두어 사람을 한준(韓準)이 잡아 큰 칼을 씌워서 서울로 압송해 보냈는데 임금이 직접 국문을 하니, 모두 빌어먹는 곤궁한 백성들이었다. 임금이 웃으며 이르기를, “여립이 비록 반역을 도모하였으나 어찌 이런 무리와 공모하겠는가” 하고, 그들에게 묻기를, “너희들이 반역을 하였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반역하는 것은 모르나 반국(叛國)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반국은 무슨 뜻이냐.” 하니, 대답하기를, “먹고 입는 것이 넉넉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 사건이 실상이 없으므로 곧 놓아 보내려고 여립이 잡혀 오기만 기다렸다. 여립은 진안(鎭安)군 죽도(竹島) 별장에 도망쳤다가 제 손으로 목을 찔러 죽었으며 변숭복은 여립의 시체 옆에서 역시 목을 찔러 죽었다. 《동소만록(桐巢漫錄)》에는, “여립이 진안군 죽도 절에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宣傳官)이 현감과 같이 두들겨 죽이고는 자살했다고 아뢰었다.” 고 쓰여 있다.
17. 큰 변고가 일어나니, 서인들이 가뻐 날뛰고 동인들은 기운을 잃었다. 이것은 앞서 임금이 서인을 싫어하여 이산해(李山海)를 이조 판서 자리에서 10년 동안이나 두는 사이에 서인들은 모두 한산(閑散)한 자리에 있게 되어 기색이 쓸쓸하더니, 여립의 역변이 일어나 후에는 갓을 털고 나서서 서로 축하하였으며 동인들은 스스로 물러나고, 서인은 그 자리에서 올라서 거리낌 없이 사사로운 원한을 보복하였다. 《괘일록》
18. 10월 2일에 임금이 편전에 나와 여러 신하에게 묻기를, “여립은 어떤 사람인가.” 하니, 영의정 유전(柳㙉)과 좌의정 이산해(李山海)는 대답하기를, “그 위인을 잘 알 수 없습니다.” 하였고, 우의정 정언신(鄭彦信)은 아뢰기를, “신은 오직 그가 글 읽은 사람인 줄로만 알았고, 그 밖에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손으로 황해 감사의 장계를 상(床) 아래로 던지면서, “글 읽는 사람의 소행이 이 모양인가.” 하고, 승지로 하여금 장계를 읽게 하니 여립의 흉악한 음모가 낭자하게 나왔다. 모두들 목을 움츠리고 등골에 땀이 흘렀다. 대신들은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나누어 보내서 체포하기를 청하였고, 유전은 토포사(討捕使)를 나누어 보내서 비상사태를 대비하라고 청하였더니, 임금은 그 말에 따랐다.
19. 변숭복의 일명은 범(氾)이니, 용맹이 뛰어났다. 조구(趙球)가 고변하였다는 말을 듣고, 숭복은 안악으로부터 금구(金溝)까지 먼 길을 3일 반만에 달려가서 여립에게 사실을 보고하였다. 여립은 그날 밤으로 도망쳤다. 그 이튿날 금부도사가 달려와 덮쳤으나 잡지 못하였으므로, 온 서울이 뒤집혔다.
20. 7일에 금부도사 유담(柳湛)이 장계를 올렸는데, 전주에 이르러 군사를 풀어 정여립을 포위하였으나, 여립은 기미를 알고 몸을 빼어 도주하였다고 한다. 《기축록》 《시정록》
21. 8일에 황해도 죄인들을 잡아 왔으므로 궁전의 뜰에서 국문하게 하니, 영의정 유전ㆍ좌의정 이산해ㆍ우의정 정언신ㆍ판의금부사 김귀영(金貴榮) 등이 같이 국문하였다.
22. 9일에 양사가 아뢰어 이진길(李震吉)을 사관(史官) 자리에서 쫓아내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23. 11일에 판돈녕 정철(鄭澈)이 고양(高陽)으로부터 들어와 숙배한 후 비밀히 차자(箚子)를 올렸으니, 그 내용은 속히 역적을 체포하고 경성(京城)을 계엄하라는 것이었다. 임금이 답하기를, “경의 충절을 더욱 알 수 있다. 의논하여 처리하리라.” 하였다.
23. 14일에 독포어사(督捕御史) 정윤우(丁允祐)ㆍ이대해(李大海)ㆍ정숙남(鄭叔南) 등을 삼남에 보내었다.
24. 15일에 황해도 죄인 이기(李箕) 등을 정여립과 공모하였다 하여 자복을 받고 사형을 집행하였다.
25. 17일에 안악 수군(水軍) 황언륜(黃彦倫)ㆍ방의신(方義臣) 등이 자복하였으므로 사형을 집행하였다.
26. 17일에 선전관 이용준(李用濬)ㆍ내관(內官) 김양보(金良輔)가 전주에 달려가니, 그때 여립은 금구 별장에 있다가 일이 발각되어, 밤중에 그 아들 옥남과 일당인 안악 사는 변범(邊氾)과 박연령의 아들 춘룡(春龍) 등을 데리고 진안 죽도로 도망가서 숨었다. 진안 현감 민인백(閔仁伯)이 관군을 거느리고 가서 둘러싸서, 여립의 무리가 바위 사이에 둘러앉아 있는 것을 보고, 인백이 여립을 생포하고자 왕명을 전한 후, 관군들로 하여금 너무 적에게 가까이 달려들지 않게 하였다. 여립이 먼저 칼을 들어 변범을 치니 곧 죽었다.또 옥남과 춘룡을 쳤으나 죽지 않고 땅에 쓰러졌다. 여립은 칼자루를 땅에 꽂아 놓고 스스로 칼날에 목을 대고 황소 울음같은 소리를 하면서 곧 죽었다. 관군은 두 시체와 옥남ㆍ춘룡을 잡아 왔다. 《해동야언》
27. 19일에 옥남과 춘룡을 임금이 친히 국문하니, 모두 다 자복하였다. 그때 옥남의 나이 열 일곱 살이었는데, 임금이 묻기를, “너의 집에 왕래하던 사람은 누구였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모주(謀主)는 길삼봉이고, 고부(古阜)에 사는 한경(韓憬), 태인(泰仁)에 사는 송간(宋侃), 남원(南原)에 사는 조유직(趙惟直)ㆍ신여성(辛汝成), 황해도에 사는 김세겸(金世謙)ㆍ박연령(朴延齡)ㆍ이기(李箕)ㆍ이광수(李光秀)ㆍ박익(朴杙)ㆍ박문장(朴文長)ㆍ변숭복(邊崇福) 등 10여 명이 항상 찾아 왔으며, 지함두(池涵斗)와 중 의연(義衍)은 어디서부터 왔는지 알지 못하나 함두는 항상 집안에 있었고, 중 의연은 밤낮으로 같이 거처했으며, 연령은 서울 소식을 탐정하려고 황해도에 갔다고 하였다. 모두 체포되어 자복하고 죽었으며 송간ㆍ조유직ㆍ신여성은 불복하고 죽었다. 《해동야언》
28. 변숭복이 전주에 있을 때는 변범(邊氾)이라 하였고 동래(東萊) 있을 때는 백일승(白日昇)이라 하였다.
29. 27일에 여립과 범의 시체를 저자에서 사지를 찢었는데 백관에게 명하여 둘러서서 보게 하였다. 이진길(李震吉)은 끝내 볼복하다가 매에 죽었으니 그가 여립에게 보낸 편지 중에, “지금 임금의 혼암한 것이 날로 심하다.”는 말이 있었으므로, “역적률로 처단하라.” 하였다. 《일월록》 《조야기문》
30. 역적들의 문서 중에 정여립이 하늘에 제사하는 제문이 일곱장이나 나왔는데, 임금의 죄악을 말함이 극히 흉하고 참혹하였다. 국청(鞫廳)에서도 차마 사실대로 아뢰지 못하고 다만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라고 아뢰었더니, 임금이 크게 진노하여 평소에 여립을 칭찬한 사람은 다 죄를 받게 하였다. 《노서집(魯西集)》
31. 이전에 여립이 이이를 배반하고 시론에 아부하여 번복하는 태도를 서인들이 항상 분통하게 여기던 차에, 이때 여립이 역적이 되자 서인들은 기뻐 날뛰지 않은 이가 없었다. 갑신년 이후로부터 서인들은 동인의 공격을 받아 벼슬 자리에 서지 못한지 무릇 5, 6년이라 울분이 쌓여 있었던 나머지, 무식하고 귀역(鬼蜮)같은 무리들이 이때를 당하여 서로 손뼉을 치면서 크게 기뻐하며 역적이 동인에서 나왔다 하였다.그 후로부터 동인들은 다시 일어설 길이 없었고, 서인들은 여립으로써 동인을 빠뜨리는 함정을 삼아서 공공연히 떠들기를, 누구는 누구의 일족이요, 아무는 아무의 친구라 하여 역적과 친분이 두터운 자만이 스스로 반드시 죽임을 당할 줄 아는 것이 아니라, 비록 역적의 면목을 알지 못하는 자라 할지라도 동인의 명목이 붙은 자에게는 조사(朝士)나 유생을 막론하고 다 의구심을 품어서 비참한 기상이 차마 보고 들을 수 없었다. 마침 이때에 양천회(梁千會)가 서울에 올라와서 제일 먼저 소(疏)를 올렸다. 혼정록(混定錄)
32. 권정례(權停禮)로 하례(賀禮)를 받고, 종묘에 고하여 사면령을 반포하고 백관의 품계를 올려 주었다.
33. 교서에, “《춘추》에 ‘무장지의(無將之義)’를 밝혔으니, 나라의 법이 극히 엄하고, 한(漢) 나라에서 부도(不道)의 죄를 중하게 하였으니, 죄인이 이에 잡혔다. 이에 고래를 무찌름에 당하여 마땅히 뇌성하며 비내리듯 하는 은혜를 내릴 것이다. 내가 덕이 적고 어두운 자질로서 어렵고 큰 왕업(王業)을 지켜 오기 20년 동안에, 항상 깊은 연못과 험한 골짜기에 다다른 듯 조심하여 만백성을 교화시키려 하였는데, 역적의 괴수가 진신(搢紳) 가운데서 나올 줄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적신(賊臣) 정여립은 어미를 잡아 먹는 올빼미보다 더 악하고, 독사(毒蛇)보다 더 독할 뿐더러, 시서(詩書)를 밑천으로 하였으니, 왕망(王莽)이 세상을 속였던 것과 같고, 참서(讖書)를 만들어 남을 속여서 감히 한산동(韓山童 원(元) 나라 말기에 요술로 백성을 꾀어 큰 반란을 일으켰다.)의 음모를 꾀하였다. 알처럼 덮어 길러 준 은혜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도적을 불러 모으는 계교를 꾸몄으니, 변범(邊氾)ㆍ박문장(朴文長)ㆍ박연령(朴延齡)ㆍ김세겸(金世謙)ㆍ이광수(李光秀)ㆍ이기(李箕)ㆍ박응봉(朴應逢)ㆍ방의신(方義信)ㆍ황언륜(黃彦倫) 등과 서로 어두운 밤에 모여서 음모한 것이 이미 해포나 되었다. 중과 결탁하여 요괴한 일을 하였으며, 옥함(玉函)을 만들어 여러 사람들을 현혹하게 하였고, 도성에 흉한 무리들을 벌여 놓아 무기고를 불사르려 하였으며, 술사(術士)를 산중에 보내어 단군의 옛터에 소굴을 만들려 하였다. 뿐만 아니라 임금의 명을 위조하여 감사와 병사(兵使)ㆍ수사(水使)를 없애려 하였고, 병부(兵符)를 나누어서 서울을 치고 한강의 창고를 취하려 하였으니, 간악한 계책이 더욱 깊어가서 화란(禍亂)의 기틀이 거의 발동될 뻔하였다. 병조의 장을 죽이려 하였으니 어떠한 일을 하려는 것이었으며, 창을 휘둘러 대궐을 범하려 하였으니 일이 장차 어찌 될 것이었던가. 시종하던 신하로서 뭇 역적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의관한 선비로서 미친 개의 마음을 품었다.
난신(亂臣)과 역적이 일찍이 없었으리오마는,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없었을 것이다. 이에 만 백성이 다 미워하니 누구나 베어 죽일 수 있다. 비록 역적 범엽(范曄)에게 미처 형(刑)을 주지는 못하였으나, 이미 역적 왕돈(王敦)의 송장을 꿇어 앉혀 참형을 집행하였으니, 여립 등을 능지처참(陵遲處斬)하노라. 아, 하늘의 그물[天綱]이 새지 아니하여 이미 용서할 수 없는 형을 시행하였으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다 같이 기뻐하리라. 이에 새로이 예식을 시행하노라.” 하였다. 대제학 이양원(李陽元)이 지었다.
34. 10월 28일에 영의정 유전(柳㙉)이 죽으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대신이 죽으니 놀람과 슬픔을 이길 수 없다. 역적을 국문하며 국사를 위해 애쓴 바가 많았는데 이제 그를 잃음으로써 나의 팔ㆍ다리를 잃었으니 마음 아픔을 이길 수 없구나.” 하였다. 《기축록》 《일월록》
35. 11월 2일 생원 양천회(梁千會)가 올린 소(疏)의 대략에, “신의 집이 호남에 있으므로 역적의 정상을 소상히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일찍이 스스로 글 읽은 자들에게 붙었으므로, 이발(李潑)의 형제가 남방에 왕래함으로써 서로 결탁되었습니다. 그때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명망이 두터웠으므로 이발과 이길도 그들을 존경하고 여립을 추천하여 그 문하에 출입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이가 죽자 여립은 제일 먼저 배반하고 이발 등과 더불어 충성있고 어진 사람을 모함할 계책을 하였습니다. 이에 역적 여립이 그와 같이 흉악하게 된 원인을 찾아 보면, 역시 조정의 중요한 자리에 있는 신하들과 서로 통함으로써, 여립이 몸은 비록 지방에 멀리 있으나 조정의 권세를 잡고 세력이 불꽃처럼 뜨거워, 거리끼는 바가 없이 제 뜻대로 다할 수 있었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에 음으로는 권세 잡은 신하를 권하여 추쇄(推刷)하자는 의논을 주장함으로써, 나라 안을 떠들썩하게 하고 다시 절친한 전관(銓官)에게 부탁하여 자신이 황해 도사(黃海都事)가 되어 일을 일으킬 계획을 꾸미려 하였으나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또 봉사신(奉使臣)에게 부탁하여 부윤과 판관 등을 일시에 파면시킴으로써 지방관이 비게 하고 그 틈을 타서 난을 일으키려 하였습니다.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다 그 술책에 떨어져 그의 비위만 맞추다가 이 역적 사건의 고발을 듣고도 처음에는 역적을 옹호하고 구하려고만 하여, 혹 말하기를, ‘이이(李珥)의 제자가 일을 내려고 무고(誣告)한 것이다.’ 하기도 하며, 혹은 말하기를, ‘여립의 위인은 충성이 태양을 꿰뚫을 만하다.’고도 하며, 오히려 고변한 한준(韓準)을 그르다고까지 하였습니다.
조정의 의논이 이러하였으므로 의금부 도사 유담(柳湛) 등도 행동을 늦추어서 죄인 잡는데 치밀하지 못하였으며, 태학생들도 소를 올려 역적을 구원하려 하였습니다. 또한 추국하는 관원들도 문초를 부실하게 하여 의논이 자자하였으니, 억수(億守)의 역적모의한 진술에도, ‘서울에 있는 사람으로 여립과 서로 절친히 왕래한 자는 나만이 아니다.’고 하니, 위관(委官) 정언신(鄭彦信)은 자기와 관계된 단서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며, 빨리 혹독한 매질을 하게 하여 자세히 캐서 묻지도 아니하고 덮어 넘기려고만 하였습니다. 지금까지도 역적과 생사를 같이하기로 맹세하였던 이발ㆍ이길ㆍ백유양과, 종족간으로 친밀한 정언신ㆍ정언지(鄭彦智)같은 자들이 정부에 참례하여 경연에 출입하면서 평일과 같이 의기양양하고 있습니다. 지금 역적의 문생과 친구들은 가두어 두었으나, 오직 조정에 있는 사람들은 가만히 두고 하나도 묻는 바가 없으니, 이는 나라의 법이 소원하여 천한 자에게만 법이 시행되고 귀하고 가까운 자에게는 쓰이지 아니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였다. 또 “조헌(趙憲)이 여러 번 소장을 올려서 귀하고 가까운 지위에 있는 자에 대하여 심각히 말하였으니, 그 본마음은 실로 나라를 사랑하는 충성에서 나온 것인데도 도리어 죄를 받고 먼 곳에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역적 무리의 마음을 쾌하게 하여서 나라의 기맥을 심히 손상하고 사기를 꺾었으니, 마땅히 속히 조헌을 돌아오게 하여 그 충성된 말을 포상하소서” 하였다. 이에 임금이 답하기를, “양천회의 상소가 너무 늦었구나.” 하여, 매우 가상히 여겼다. 《혼정록》
36. 저으기 생각건대, 만약 역적 사건이 드러나기 전에 이 소장을 올렸다면 그 공적이 조헌과 서로 견줄 만한 것이나, 마침 옥사가 크게 벌어져서 여러 연루자들이 두려워 떠는 때에 문득 교묘히 중상하여 비밀을 고발하는 말을 발하고, 스스로 역적의 실정을 전부터 자세히 알고 있었다 하였으니, 이는 군자가 할 바가 아닐 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도 큰 실책인 것이다. 하늘이 사림(士林)에 큰 화를 내리려고 하여 이런 괴이한 귀신같은 무리를 내고, 따라서 번복하는 해를 가져다 주었던가. 《일월록》
37. 우의정 정언신이 소장을 올려 스스로 변명하고 위관(委官)을 사퇴하면서, “신은 역적과 처음부터 길이 다르고 나이도 같지 않으며, 또 서울과 지방에 멀리 떨어져 살아서 서로 왕래하는 교분이 없음은 나라 사람이 다 아는 바입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답하기를, “유생(儒生 양천회(梁千會))의 말을 어찌 교계할 것이냐.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38. 이조 판서 이양원(李陽元)이 소장을 올려 사직하였는데 여립을 황해 도사로 추천할 때에 양원이 전관(銓官)이었다. 소장의 대략에 말하기를, “신은 여립과 평생에 면목을 대해 본 일이 없습니다. 다만 중요하지 않은 보통 관직이므로 여립을 전례에 따라 추천했을 뿐입니다.” 하였더니 임금이 답하기를, “경은 그렇지 아니하고, 양천회의 소에 한 말이 억측임을 내가 이미 알고 있으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39. 4일에 예조 정랑 백유함(白惟咸)이 소를 올리기를, “신이 죄가 쌓여 은혜를 저버렸으므로 시골에 물러와 있었으나, 나라에 역변이 있다 하오니 감히 편히 있을 수 없어 정신을 수습하여 다시 서울로 들어 왔습니다.” 하고, 이어서, “추국하는 관원이 문초를 소홀히 하였고 대간은 그것을 보고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김우옹ㆍ이발ㆍ이길의 무리는 역적과 서로 사귀어 편당이 되어 비호하였고, 좌랑 김빙(金憑)이 전주에 살면서 역적과 서로 친밀한 사이로서 조정 공석에서 역적을 구원하려고 하니, 인심이 해괴하고 분하게 여기고 있습니다.전하의 형세가 외로워지고 사특한 의논이 횡행하면, 비록 역적의 괴수는 죽었다 할지라도 남은 근심이 다 없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답하기를, “너는 참으로 백경(白卿 백인걸(白仁傑))의 아들이라 할 만하고, 백경은 과연 참다운 후사가 있다. 너의 아버지는 늙어도 임금을 잊지 아니하여 나의 좌우를 떠나지 않았는데, 너는 젊은 사람으로서 감히 시골로 물러가 있으니, 이것이 곧 네가 아버지를 따르지 못하는 점이다. 이와 같이 나라가 위태할 때를 당하였으니, 지금부터는 가지 말라. 내가 장차 너를 쓸 터이며 그들(김우옹ㆍ이발)의 정상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였다. 《기축록》 《서정록》 《일월록》
40. 백유함은, 백인걸의 아들이며, 종형 백유양(白惟讓)과 논의가 같지 아니하였다. 그 해에 유양이 세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는데, 이때 유함은 의기양양할 뿐 유양을 구해주기 위하여 한마디의 말도 아니하였다. 그 뒤에 유함이 여러해 동안 옥에 갇혔다가 마침내는 변방으로 귀양가게 되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늘이 무심하지 않다.” 하였다. 《부계기문》
41. 전교에, “적변(賊變)이 일어난 날부터 우상(右相)의 하는 바가 매우 마땅하지 않았으나, 내가 어찌 창졸간에 대신에게 말이나 기색에 나타내겠는가. 처음부터 나도 추국이 너무 소루한 것을 의심하고 있었던 터이며 양천회(梁千會)의 소도 너무 늦은 것인데, 도리어 우상으로서 지금에야 소를 올려 변명한다는 것은 심히 온당하지 아니하다. 여립과 서찰을 통한 일이 없다고까지 했는데, 나는 눈이 없는 줄로 아는가.” 하고, 봉한 편지를 승정원에 내려 보내며 이르기를, “이것은 모두 어떤 사람의 서찰이란 말이냐.그 글에 ‘시원치 않은 세상 일을 말하자니, 지리하고 또 가소롭다.’는 따위의 말이 있는데, 이러고도 오히려 여립과 친하지도 않고 서찰도 통한 일이 없다고 하면서 허다한 말을 꾸며댄단 말인가. 몸이 대신으로 있으면서 감히 면대하여 속이니 분통함을 이길 수 없다. 내가 벌써 이 편지를 발(發)하지 않은 것은 몰랐기 때문이 아니고 염려되는 것이 많아서 그랬던 것이다. 따라서 생각이 못 미쳐서 하지 아니한 것이겠는냐. 20년이나 대신을 대우해 온 나의 뜻이 이로써 다 상실되었으니, 더욱 마음이 아프다. 승정원은 이 글을 보고서 한 벌 등서하고 도로 들여 보내라.” 하였다.
42. 일찍이 언신이 선전관 이용준(李用濬)에게 몰래 부탁하여 여립의 문서를 수색할 때 자기 형제가 보낸 서찰은 모두 없애라고 하였으나, 이용준은 무인(武人)이어서 글자를 잘 알아보지 못하므로 다만 정언신이라고 성명을 바로 쓴 것만을 제거하고, 약칭으로 종로신(宗老信)이라든가, 또는 족로신(族老信 종로신(宗老信)과 같은 말이다.)이라고 써 보낸 편지는 버리지 아니하였다. 《노서집(魯西集)》
43. 7일에 양사가 아뢰기를, “이조 참판 정언지와 김우옹ㆍ백유양 등은 역적과 친족으로, 혹은 친구로, 혹은 혼인관계로 모두 서로 두터운 교분이 있으니, 그들은 조정의 벼슬자리에 그냥 둘 수 없습니다. 따라서 파직시키기를 청합니다. 우의정 정언신도 일찍이 역적과 종족간으로 교분이 두터워서 여러 차례 서신을 통한 사실이 있을 뿐만 아니라, 몸이 정승자리에 있으면서 천일(天日)이 내려다 보는 밑에서 감히 역적과 통신한 일이 없다고 거짓말로 임금을 속임으로써 자신의 죄를 감추려는 것이 밝게 드러났으니, 청컨대 즉시 몰아내소서.” 하였고, 승정원에서는 이발(李潑)의 형제까지 처벌한 것을 아뢰었는데 모두 아뢴 대로 하였다.
44. 8일에 정철을 우의정에 임명하여 위관 정언신(鄭彦信)의 대임 을 시켰으며, 이조 참판 정언지(鄭彦智)의 대임 에는 성혼을 임명하고, 최황은 대사헌에, 백유함은 헌납에 임명하였다.
45. 11일에 백유함(白惟咸)이 양사를 탄핵하여 갈아 치웠다.
46. 김우옹(金宇顒)을 특명으로 회령(會寧)에 귀양보내고 전교하기를, “우옹은 여립과 극히 친밀하여 결탁하고서 조정의 일을 서로 의논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내가 무심 중에 한 말도 다 엿들었을 뿐만 아니라 나의 마음을 억측하여 여립과 몰래 통하였으니, 그 정상이 마치 쥐새끼와 같다. 나도 그가 번복하는 소인인 줄은 알았으나, 그 정상이 이에 이를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다. 함경도 육진(六鎭) 지방으로 정배하라.” 하였다.
47. 그때 우옹이 여립과 친하므로 회령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그 형 우굉(宇宏) 전 대사관 이 아우가 떠나는 길에 와서 손을 잡고 통곡하니, 우옹은 태연한 안색으로 천천히 말하기를, “형님이 지나치게 슬퍼하시면 내 마음이 편하지 못합니다.” 하고 곧 길을 떠났다. 철령(鐵嶺)에 이르러 마침 귀양이 풀려 북방에서 돌아오는 조헌(趙憲)과 서로 만났는데, 조헌이 묻기를, “숙부(肅夫 김우옹(金宇顒)의 자)는 이에 이르러 뉘우치는 마음이 없는가.” 하자 우옹은 웃으며 답하기를, “공론(公論)은 뒷세상에 가서 정해질 것이다. 어찌 한 때의 형벌을 겁낼 것인가.” 하였다. 《괘일록》
48. 그때에 역적 괴수 정여립는 자살했고, 또 소위 길삼봉(吉三峯)이란 자는 아직 잡지 못하였었다. 비록 다른 여러 역적들을 많이 끌어 넣었으나 그 장본인(張本人 정여립 길삼봉)을 이미 잃어버려 문서(文書)에 의해서 죄준 것이 많았다. 《일월록》
49. 12일에 정언신(鄭彦信)ㆍ정언지(鄭彦智)ㆍ홍종록(洪宗祿)ㆍ정창연(鄭昌衍)ㆍ이발(李潑)ㆍ이길(李洁)ㆍ백유양(白惟讓) 등을 임금이 친히 국문 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여립의 조카 정집(鄭緝)의 공초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정철이 아뢰기를,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역적과 사귀어 친하게 된 것은, 정의상으로 좋게 지내다 보니 그 악한 것을 알지 못한 데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세상에 어찌 여립같은 자가 또 있겠습니까.” 하였다. 《시정록》
50. 정집의 공초에, “정언신 등이 역모에 같이 참여하여 장차 내응하려 하였다.” 하였으므로, 언신 등을 모두 잡아서 친히 국문하였다.
51. 정언신은 중도부처하게 하고, 언지는 강계(江界)로, 종록은 구성(龜城)으로 이발은 종성(鍾城)으로, 이길은 희천(熙川)으로, 백유양은 부령(富寧)으로 각각 멀리 귀양보내고, 정창연(鄭昌衍)은 석방되었다. 《일월록》
52. 언지는 대간의 아룀으로 멀리 귀양가게 되었다.
53. 이때에 대간들은 언신이 임금을 속였다고 논하니, 성혼(成渾)이 당국자(當局者)에게 편지를 보내서 말하기를, “대신의 한마디 말이 사실과 어긋났다 하여, 문득 중한 형벌을 주면 왕도정치에 손상이 될 것이다. 옛날 송 나라 조정에서는 일찍이 한 사람의 대신도 죽인 일이 없었으니, 그 인후함은 가히 본받을 만하다.” 하여, 드디어 언신에 대한 대간의 의논이 그치게 되었다. 〈우계시장(牛溪諡狀)〉
54. 일찍이 이길(李洁)이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이 되어, 8월 그믐께 처자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오다가 금구(金溝)를 거칠 때 여립이 종정원(鍾鼎院)에 나와서 전송하였다. 술을 반 쯤 마시더니, 여립이 소반에 술로 글자를 써서 장차 반역할 뜻을 표시하였다. 이길이 이것을 보자, 실색하고 놀라더니 일어서서 급히 서울로 향했다. 공주 수릿재[車峴]에 이르니 여립이 보낸 사람이 무기를 가지고 도중에서 지키고 있었다. 일설에는 활을 차고 추격하는 자가 십여 명 있었다고도 한다. 이길이 마침 서울 가는 무사(武士)임순(林恂)과 그 조카 지(地)와 준(埈)의 형제와 동행하게 되었고, 그 외에도 하인들이 많아서 여립이 보낸 자들이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이길은 곧 편지를 종에게 부쳐서 고향에 있는 그 형 이발에게 빨리 떠나오기를 재촉하였다. 서로 고변(告變)할 것을 의논하고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조구(趙球)가 고변한 것이 이틀만에야 알려졌다. 이발은 편지를 본 그 날로 길을 떠나 삼례역(參禮驛)에 이르러서 조구가 여립의 역모를 고변했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달려와 보니 옥사가 만연되어 드디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부계기문》 《계갑록(癸甲錄)》
55. 이발이 종성으로 귀양 가는 길에 안민학(安敏學)을 만나서 말하기를, “돌아가서 계함(季涵 정철의 자)에게 말을 전하라. 계함은 나를 저버리지 아니하였는데 나는 계함을 저버림이 많았으니, 내가 장차 지하에 가서 무슨 면목으로 서로 대할꼬.” 하고, 실성통곡하였다.
56. 12월 3일에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행 호군 홍여순(洪汝諄)은 성질이 음험ㆍ간교하고 방자하여, 거리낌없이 질투하고 모함하는 것이 그의 성품입니다. 따라서 가는 곳마다 형벌을 남용하여 사람을 죽이니, 관리로서 탐하고 포악한 행동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정언신을 중도부처하라는 전지에서도 제 마음대로 글자를 보태고 빼고 할 정도이니, 그 심정은 헤아릴 만합니다. 청컨대, 파직하여 다시 벼슬에 오르지 못하게 하소서. 또한 행 호군 정윤복(丁胤福)과 전 교리 송언신(宋言愼)은 역적과 교분이 두텁고, 전 좌랑 김홍휘(金弘徽)는 역적의 생질 이진길을 극력으로 추천하였으며, 전 현감 한준겸(韓逡謙)ㆍ전 좌랑 박승종(朴承宗)ㆍ전 저작(著作) 정경세(鄭經世) 등은 이진길을 사국(史局)에 들어오게 한 사람들인데도 옥사가 끝나기도 전에 문득 다시 벼슬자리에 쓰라는 명을 내렸사오니, 청컨대 명을 도로 철회하소서.” 하였다. 이에 임금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시행하되, 홍여순의 일은 들어 줄 수 없다.” 하였다.
57. 헌납 백유함이 홍여순을 탄핵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음은 여순의 여동생이 궁중에 들어가 후궁으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월록》
58. 4일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수원 부사 홍가신(洪可臣)은 역적과 평소부터 교분이 두터워서 이발 형제와 함께 서로 여립을 칭찬하였으니, 파직시키고, 승문원 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 윤경립(尹敬立)은 평소에 이름도 없는 사람인데 사관(史官) 천(薦)에 참여되었으니, 빼어 버리소서.” 하니, 임금이,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59. 양사가 합동으로 아뢰기를, “급제(及第) 정언신은 처음 역변이 나서 어전에 면대할 때에 이미 역적을 비호하는 뜻을 보였고, 국문에 참여하여서도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역적의 죄상을 현란시키려는 자취가 있어, 고발한 자를 잡아 다스리라는 말까지 하며 옥사를 늦추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먼 곳으로 귀양보내소서. 또 급제 임국로(任國老)는 국문에 참여하여 언신에게 붙어서 역적을 비호한 형적이 많을 뿐더러, 이 옥사가 이처럼 소루하게 된 것도 역시 이 사람 때문이니 즉시 성문 밖으로 추방하소서.” 하였더니 임금이,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언신은 남해로 귀양갔다. ○ 어떤 책에는 이 조목이 양사합계가 아닌 것으로 기록되었다.
60. 7일에 이조에서 조헌을 전적(典籍)에 추천하여 올렸더니, 전교하기를, “가벼이 벼슬자리에 앉힐 수 없다.” 하였다.
61. 8일에 예조 판서 유성룡(柳成龍)이, 자기의 이름이 백유양(白惟讓)의 초사(招辭)에 들어 있었다 하여 다른 책에는, “그 이름이 대간의 소에 올랐다.” 고 되어 있다. 소를 올려 스스로 발명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적의 초사가 경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나는 이미 경이 금옥같이 아름다운 선비로서 그 마음은 백일(白日)이 알고 있으리란 것을 알고 있는 지가 오래다.” 하였다.
62. 전교하기를, “고(故) 집의 이경중(李敬中)은 이조 낭관으로 있으면서 당시 역적(여립)의 이름이 높았으나 그는 역적의 못된 것을 알고 힘껏 배제하여 좋은 벼슬 길을 통해 주지 아니하다가, 마침내는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니, 그가 남보다 앞서 역적을 알아본 충성은 옛사람에 못하지 아니하다. 따라서 그에게 판서 벼슬을 증직하고 아름다운 시호를 주라.” 하였다.
63. 임금이 경연에 들어온 신하들에게 묻기를, “여립의 악한 역모를 한 사람도 안 자가 없었는가.” 하니, 유성룡이 대답하기를, “일찍이 이경중은 여립을 전랑(銓郞)의 망(望)에 올리려 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때에 대간은 도리어 경중을 탄핵까지 했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은 이경중에게 특별히 증직(贈職)하라는 명을 내리고, 그 당시 이경중을 탄핵한 대간이었던 정인홍(鄭仁弘)ㆍ박광옥(朴光玉)의 벼슬을 삭탈하였다. 《일월록》
64. 이후부터 인홍과 유성룡의 사이에 틈이 나게 되었다.
65. 10일에 우상 이산해(李山海)에게 전교하기를, “역적이 진신(搢紳) 중에서 나게 되었으니, 이것은 큰 변 중에도 큰 불행이다. 언관으로서 역적과 친교가 있거나 결탁한 사람들을 논핵하는 것은 진실로 옳은 일이라 하겠으나 근래의 기상은 너무 번져나갈 징조가 있는 것 같은데, 이것은 내가 좋아하는 바가 아니다. 혹 역적과 범연히 서로 알고 지냈을 경우도 있을 것이니 이런 일은 사람마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만약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평소에 자기와 언론과 주장이 다르던 사람을 모두 지적하여 배척한다면 그 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이런 일이 있거든 경이 힘써 못하게 하고, 듣지 않는 자가 있으면 나와 면대하고 직접 아뢰어 진정시킬 방도를 주선하라.” 하였다.
66. 지평 황혁(黃赫)이 피혐(避嫌)하여 아뢰는 글에, “전하께서 우상 (이산해(李山海))에게 내리신 전교에는 인심을 진정하려 하시는 뜻이 지극합니다. 지금 창졸간에 역적이 일어났는데 이는 소위 명사(名士)라고 하는 자들이 평소에 역적과 결탁하고 그들을 칭찬함으로써 기세를 도와 마침내는 이런 변이 일어나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국법을 따라 그 죄가 정하여져 있는 것이므로 언관(言官)들이 듣는 바를 들어서 차례대로 탄핵하면 너무 번져나갈 것이니, 신들도 역시 그것을 근심하는 바입니다. 하물며 4, 5년 내로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여 당국자의 배척이 날을 더할수록 더 심각하여 스승이나 친구 또는 혼인 관계에 있는 자는 모두 중상을 받고 분해하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한 지가 오래입니다. 지금 새로운 정치를 펴는 시초를 당하여 누가 감히 평일에 언론이 달랐다고 하여 이 시기를 타서 남을 해치고 스스로 전일 소인들의 망하던 행동을 되풀이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이에 탐욕스럽고 또 포학하여 심히 못된 사람이 있다면 부득불 죄에 따라 탄핵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므로 신이 그런 것을 아뢰려 하였더니, 대사헌 최황(崔滉)의 대답이 불손하며 여러 동료들을 낭리(郞吏)와 같이 대접합니다.” 하였다.이에 대사헌 최황과 장령 윤섬(尹暹)ㆍ심희수(沈喜壽)ㆍ지평 신집(申鏶) 등이 모두 피혐하였으니, 이것은 황혁(黃赫)이 홍여순(洪汝諄)을 탄박하려 하는 것을 최황이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황혁의 벼슬을 갈게 하고 최황의 피혐하여 올린 글에 답하기를, “혁의 말은 두어 줄에 지나지 않으나 그 심사가 이미 드러 났으니 내가 어찌 그를 갈아내지 않으리요.” 하였다. 《시정록》
67. 12월 12일에 낙안 향교(樂安鄕校) 유생 선홍복(宣弘福)의 초사(招辭)에서 이발ㆍ이길ㆍ백유양등을 끌어대었다. 또 말하기를, “이진길이 유덕수(柳德粹) 선산 부사(善山府使)에게서 참서(讖書)를 얻었다.” 고 하였으므로 이발ㆍ이길ㆍ백유양을 다시 잡아다가 매질하여 죽이고, 이진길과 유덕수도 역시 곤장을 맞아 죽었다. 《기축록》 《괘일록》
68. 선홍복이 형을 받을 때에 말하기를, “내 죄는 마땅히 죽어야 옳은 것이다. 조영선(趙永宣)의 말을 듣고 죄없는 사람을 모함하였으니, 부끄럽고 한스리워 어찌하랴.” 하였으니, 그것은 대개 정철이 몰래 의원 조영선을 시켜서 홍복을 사주한 것이었다. 《괘일록》
69. 이때에 옥사가 크게 확대되어 김제 군수 이언길(李彦吉)ㆍ선산부사 유덕수(柳德粹)ㆍ참봉 윤기신(尹起莘)ㆍ참봉 유종지(柳宗智) 등은 모두 곤장을 맞아 죽었고, 홍가신(洪可臣)ㆍ이위빈(李渭濱)ㆍ허당(許鏜)ㆍ박의(朴宜)ㆍ강복성(康復誠)ㆍ김창일(金昌一) 등 수십 명은 벼슬을 삭탈당하고 금고되었으며, 김영일(金榮一)은 두 차례나 형을 받고 사직당하였으며, 성균관과 사학(四學) 유생으로서 조금 이름 있는 자는 모두 금고되었다. 《괘일록》
70. 일찍이 이발이 종성으로 귀양갈 때에는 임금이, “역적의 협박으로 부득이 따라간 자들은 그 죄를 다스릴 것이 없다.”고 말하였으나 그 후 참소하는 말이 끝이 없어 화가 하늘을 찌르는 불꽃같았으니, 마침내 이발ㆍ이급(李汲)형제는 곤장을 맞아 죽었고, 이길(李洁)은 희천으로 귀양갔다가 뒤에 잡혀와서 역시 죽었다. 《괘일록》
71. 앞서 이발과 이정란(李廷鸞)이 같은 옥에 갇혀 있었는데 이발이 정란에게 말하기를, “사람 알기가 어렵다고 하나 여립 같은 역적은 쉽게 알아 볼 수 있었을 것인데도 나는 홀로 알지 못하였으니, 내 눈을 빼어 마땅할 것이며, 죽어도 오히려 죄가 남겠지만 자네는 이미 여립과 원수가 되었으니, 죽을 리가 없을 것이다.” 하더니, 과연 정란은 놓여 나오고 이발은 북도로 귀양갔다가 이때에 이르러 또 선홍복의 초사(招辭)로 다시 잡혀 서울로 돌아왔다. 이발이 옥에 있으면서 같이 갇혀 있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조헌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하였으니, 이것은 조헌이 일찍이 이발에게 경계하기를, “여립과 절교하지 않으면 장차 큰 화를 입을 것이다.” 하였기 때문이다. 이발은 자기옷 앞섶에 혈서로 쓰기를, “망녕되이 역적과 사귀었다가 화가 늙은 어머니에게 미쳤다. 남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니 땅이 검고 하늘이 푸르도다.” 하였다. 《계갑록》
72. 백유양(白惟讓)이 여립(汝立)에게 보낸 편지에, 임금에게 대하여 부도(不道)한 말이 많이 쓰여져 있었는데 임금이 그 중 가장 심한 것만 골라내어서 국청(鞫廳)에 내려 보냈다. 그 편지에, “이 사람(임금)이 시기심이 많고 모질며 고집이 세다.” 하였고, 또 “이 사람은 조금도 임금의 도량이 없다.” 하였으므로 임금은 백유양을 역적으로 처단하라고 명하였으나 정철이 아뢰기를, “경악(經幄)에서 여립같은 역적 하나가 난 것만도 큰 변고인데, 백유양이 비록 못되었으나 어찌 다시 여립같은 역적이야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대신이 권력을 제 마음대로 한다고 말하였다.
73. 14일에 전라도 유생 정암수(丁巖壽) 등이 구언(求言)하는 명을 받들어 상소하여, 이산해(李山海)와 정언신 등이 전후에 국정을 그르치고 역적을 옹호하였음을 극언하였고, 또 한효순(韓孝純)ㆍ이정직(李廷直)ㆍ정개청(鄭介淸)ㆍ유종지(柳宗智)ㆍ유영립(柳永立)ㆍ유성룡(柳成龍)ㆍ이양원(李陽元)ㆍ윤의중(尹毅中)ㆍ윤탁연(尹卓然)ㆍ김응남(金應南)ㆍ송언신(宋言愼)ㆍ남언경(南彦經)ㆍ이언길(李彦吉)ㆍ조대중(曺大中)ㆍ이홍로(李弘老)ㆍ이순인(李純仁)ㆍ유몽정(柳蒙井)ㆍ김홍휘(金弘徽) 등의 죄를 말하였으며, 전 현감 나사침(羅士忱)이 그 아들 덕명(德明)ㆍ덕준(德峻)ㆍ덕윤(德潤) 등과 같이 여립을 구원하려고 하여 오히려 역적을 고발한 자를 무고하였다고 한 것과, 과거보러 시험장에 들어가서 글을 대신 지어주고 여립과 귀속말을 했다는 것과, 또 덕명은 그 종제 덕현(德顯)ㆍ덕헌(德憲) 등과 많은 선비들에게 소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말하고, 또 정인홍(鄭仁弘)이 여립과 사이가 심히 좋아서 한몸같이 합하였다고 하고, 또 계미년에 삼사(三司)가 두어 현인(賢人 이이, 성혼)을 공박할 때에 그 중 사헌부의 한 사람이 전하의 몸이 편하지 못한 기색을 보고서, ‘공격하던 것을 정지하자.’고 발론하니, 홍여순(洪汝諄)이 말하기를, ‘이런 때를 당하였으니 사직이 더욱 중한 것이라. 했으니, 여순의 임금을 모르는 부도한 죄로 온 나라 사람들이 이를 갈고 있다.’고 조리가 없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 놓았다. 이것을 보고 임금이 크게 노하여 이산해와 유성룡을 불러서 위안하고 정암수 등 열 사람 박천정(朴天挺)ㆍ박대붕(朴大鵬)ㆍ임윤성(任尹聖)ㆍ김승서(金承緖)ㆍ양산룡(梁山龍)ㆍ이경남(李慶男)ㆍ김응회(金應會)ㆍ유사경(柳思敬)ㆍ유영(柳渶) 등 을 잡아서 옥에 가두게 하였다. 이어 임금이 이르기를, “너희들이 그렇게 자세히 알았으면 어찌 일찍이 와서 고변하지 못하였느냐.” 하였다.
74. 전교하기를, “역변이 생긴 기회를 타서 감히 사람을 모함하려 하여 엉터리 없는 술책으로 말을 날조하고 죄를 얽어서 간사하게 속이는 소를 올림으로써 어진 정승과 이름 높은 고관들을 모두 지정하여 배척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그 속셈이 장차 나라를 비우려 함이었던가. 이것은 반드시 간특한 자가 뒤에서 시킨 것이 분명히 틀림없다. 잡아서 국문하여 죄를 정하라.” 하였다.
75. 그때에 말이 나기를, “정여립의 집 문서를 수색할 때에 익산 군수 김영남(金穎男)과 왕명을 받들고 간 무인들이 당시 재상의 뜻을 받들어 그들의 필적은 가려 내어 불살라 버리고, 또 일부러 역적 잡기를 늦추어서 역적이 도망갈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하였으므로, 정암수 등이 소를 올렸던 것이다.
76. 대간들이 여러 차례 아뢰어 정암수 등을 구하려 하였으나 듣지 아니하니, 성균관과 사학 유생 최기남(崔起南) 등이 정암수 등을 구원하려 상소하기를, “이 사람들의 의논은 실로 역적을 성토하려는 대의(大義)에서 나왔으면서도 지나치고 망녕되어 맞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조금 형적이 있을 뿐인 일을 지나치게 억측하여 말한 것도 있고, 믿기 어려운 일임에도 반드시 그렇다고 지적한 것도 있고, 사리로서 그럴 수 없는 것과 서울에서는 듣지도 못한 말이 열에 하나 둘은 있으나, 종이에 가득찬 말이 어찌 다 실지가 아니라 하리까마는 오직 실상이 아닌 말이 이와 같이 있으므로 실상이 있는 말도 함께 실상이 아닌 것으로 되어 버렸습니다.지금 호남 유생의 상소는 실로 전하께서 구언(求言)하여 말하라 하므로 올렸던 것인데, 이미 말을 하게 하고 뒤따라 죄를 준다면 이것은 곧 꼬여서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일에 이목(李穆)은 성종대왕에게, ‘대신을 삶아 죽이라.’고 청한 일이 있고, 서엄(徐崦)은 명종대왕에게, ‘아첨한 신하를 죽이라.’고 청한 일이 있으나, 그들에게 죄주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지금 정암수의 말은 그 정직하고 절실함이 비록 위의 두 신하에게 따르지 못한다 할지라도 전하의 포용하시는 도량으로써 선왕을 본받지 못하십니까. 대개 사람이 비록 망녕되다 해도 조금이라도 사기(士氣)가 있으면 임금은 이것을 꺾지 말아야 하는 것이니, 이는 한 사람이 지나친 선비를 꺾고 보면 잇따라서 중정(中正)한 선비마저 꺾여지는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착한 임금은 말한 것이 비록 지나쳤다 할지라도 그 뜻이 국가를 근심함에 있으면 죄주지 않을 것입니다. 한 번 지나친 말한 것을 죄주면 반드시 충성스럽고 실상이 있는 자까지도 같이 혼돈되어 말하는 길이 막혀지고 말 것입니다.” 하였더니, 임금은 좋은 말로 답하고 그대로 좇았다.
77. 15일에 조헌이 귀양에서 풀려 돌아오다가 소를 울렸고, 또 호남 유생 양산숙(梁山璹)ㆍ김광운(金光運) 등도 소를 올려서 당시 재상들을 배척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 사람들이 소를 올려 조정의 신하를 모두 배척하고 홀로 우상 정철 이하 두어 사람만을 칭찬하여 스스로는 바른 말을 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도리어 저들의 정상을 들어내었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간악한 귀역같은 조헌이 아직도 두려움 없이 조정을 경멸하니 반드시 마천령(摩天嶺)을 두 번 다시 넘보려 하는 것인가. 이따위 사람을 나에게 묻지도 않고 벼슬자리에 다시 쓰려고 급급히 서두른 이조 판서 홍성민(洪聖民)을 갈아내라.” 하였다.
78. 조헌이 늘 말하기를, “여립은 반드시 역적이 될 것이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람들이 묻기를, “어떻게 그것을 미리 알았는가.” 하니, 조헌이 답하기를, “여립이 일찍이 어전에 있을 때 자못 좋지 못한 말과 기색이 있었으므로, 임금께서 이르시기를, ‘여립은 패기가 많아서 옆에 가까이 있게 하는 데는 맞지 않는다.’ 하시면서 한참 동안 이윽히 보셨으나, 여립은 별로 두려워 하는 기색도 없더니, 물러 나와서 섬돌을 다 내려온 후에 눈을 부릅뜨고 뒤를 돌아다 보았으니, 이것이 역적이 아니고 무엇이냐.” 하였다. 《일월록》
79. 임금이 조헌을 미워하여 이르기를, “조헌이 전후에 걸쳐 올린 소(疏)는 모두 송익필(宋翼弼) 형제의 사주에 따른 것이다.” 하여, 형조에 명하여 잡아 가두게 하고 송익필이 남의 종의 신분으로 주인을 배반하고 도망친 죄를 추궁하게 하였다. 《일월록》 《시정록》
80. 16일에 좌상 이산해(李山海)가 대죄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것은 간인들이 사주하여 은연중 나의 마음을 시험하고 조정을 비우려는 술책임을 알기에 어렵지 않다. 따라서 나는 반드시 사주한 그 사람을 잡아내려 한다. 다만 그 말은 문제삼을 것도 없으므로 이미 경에게 직접 말하였는데도 이와 같이 아뢰는 것은 나를 곤란하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에 산해는 다시 글을 올렸더니, 임금이 답하기를, “어제 나는 경이 먼저 나갔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놀랍고 아팠다. 그 뒤 소가 들어온 것을 보니, 나주(羅州)에 사는 간적(奸賊) 몇명이 은연중 조정을 배척하였는데 더욱 그 실상이 경에게 있었으니 나는 통분함을 이길 수 없었다. 경은 충성스럽고 삼가고 너그럽고 후하여 만석을 싣는 배처럼 도량이 넓어서 옛날 대신의 풍도가 있고, 유성룡(柳成龍)은 학문이 순정(純正)하고 국사에 마음을 다하여 바라보기만 해도 공경할 마음이 생긴다.또 재주와 지혜가 초월하여 실로 속된 선비는 그 만분의 일에도 따라갈 수 없으니, 나는 이 두 사람이 나라의 주석(柱石)이 되고 사림(士林)의 영수임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내가 평소에 가장 중하게 의지하는 바인데도 지금 간인들이 국가에 변이 생긴 기회를 타서 기필코 경들 두 사람을 몰아내려 하여 나를 어린애처럼 보아 손아귀에 넣고 회롱하려 하였으니 나는 통분함을 이길 수 없다. 반드시 그 뒤에서 사주한 간인을 찾아내어 마음을 시원하게 하려 하노니, 차라리 지나친 행동이 있을지언정 다른 것은 돌아 볼 겨를이 없다.” 고 하였다.
81. 특별히 유성룡을 이조 판서에 임명하고 권극례(權克禮)를 예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82. 오희길(吳希吉)을 참봉으로 삼고 정운룡(鄭雲龍)을 왕자 사부(王子師傅)로 삼았다.
83. 이전에 고창(高敞)사람 오희길이 정여립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희길은 여립이 이이와 성혼을 헐뜯고 배척한다는 말을 듣고 여립의 간특한 것을 열거하여 긴 편지를 써서 보내고 관계를 끊어 버렸었다. 역변이 생긴 뒤에 임금이 여립의 집에서 가져온 문서 중에서 그 편지를 보았었는데, 전라 감사가 여립의 문도를 잡아서 가둔 명부에 오희길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곧 특명으로 석방하게 하고 이르기를, “이 사람은 반드시 기특한 선비일 것이니 내가 벼슬을 주려 한다.” 하고 의정부에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다.또 임금이 이르기를, “정해년간에 간당들이 이이(李珥)와 성혼을 배척할 때 조정의 신하들 중에는 한 사람도 이이와 성혼을 구하고 여립을 배척하는 자가 없었는데도 희길은 이런 때에 능히 여립에게 글을 보내어 그 심술을 공격하였으니, 실로 가상한 일이라 포상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참봉을 제수 하였다.
84. 장성(長城)에 사는 진사 정운룡은 그 고을에서 행실이 착하며 이름이 있었다. 장성 현감 이계(李)가 선비들을 가르치려고 학교를 세우고 운룡을 청하여 스승으로 삼았다. 하루는 여립이 이계에게 편지로 자기 집에서 쓸 제수(祭需)물자를 요구하고, 또 다른 여러 고을에도 두루 이와 같이 요구하였다. 이에 이계가 말하기를, “나는 이 사람과 단 하루도 사귀어 본 일이 없는 터인데 어찌 편지로 물품 수량까지 정해서 요구하는 것인가.마치 상관이 하관에게 호령하듯이 하였다.” 하고, 회답도 하지 않고, 그 편지를 운룡에게 보이니, 운룡이 말하기를, “이발(李潑)의 형제가 이 사람이 학문이 넉넉하다고 칭찬하므로 한두 번 만난 적이 있는데 근간에 들으니 그가 집을 다스리고 처사함에 있어 흉하고 간사한 것이 많다고 하더니, 지금 이 편지로 더욱 잘 알겠다. 이런 사람을 끊어버리지 아니하면 뒤에 반드시 큰 화가 있을 것이다.” 하고, 즉시 이발에게까지 아울러 교분을 끊어버렸던 것이다. 이때에 와서 임금이 그 절교 편지를 보고 포장(褒獎)하는 말을 내리고, 특별히 왕자 사부(王子師傅)를 제수하였다.
85. 이때 삼사(三司)가 역적들의 공초에 관련된 사람들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다. 성균관 유생 이춘영(李春英) 등도 소를 올리자고 강력히 주장하자 오윤겸(吳允謙)이 말하기를, “죄인을 국문하는 옥사는 유생의 알 일이 못 된다. 반드시 소를 올리려면, 마땅히 ‘교화를 밝혀서 난신적자(亂臣賊子)로 하여금 난(亂)의 두려움을 알게 하도록 하라.’는 뜻을 상소문의 주제로 삼아야 한다.” 하였으므로 상소문 중에 역적들의 공초에 관련된 사람의 이름은 하나도 열거하지 않았더니, 삭자들이 체통을 얻는 것이라 하였다. 〈추탄년보(楸灘年譜) 〉
86. 경인년 2월에 박충간(朴忠侃)을 형조 참판으로 삼고, 이축(李)을 공조 참판으로 삼고, 한응인(韓應寅)을 호조 참판으로 삼고, 역적을 밀고한 이유(李綏)ㆍ강응기(姜應箕)는 당상관에 올리고, 조구(趙球)는 정(正 벼슬이름인데, 예를 들면 사복시 정(司僕寺正)ㆍ장악원(掌樂院)등과 같은 것)에 임명하고 민인백(閔仁伯)은 예조 참의를 삼았다. 이들을 모두 녹훈(錄勳)하도록 하니, 박충간이 국청에 참례한 여러 신하들도 모두 같이 녹훈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그대로 좇아 평난공신(平難功臣)으로 박충간 등 22명을 녹했더니, 양사(兩司)에서는 그 수가 너무 과하다고 논하였다. 《기축록》 《일월록》
87. 경인년 2월에 박충간ㆍ이축을 비롯하여 국청에서 추국한 여러 신하들까지 평난공신(平難功臣) 훈(勳)에 녹(錄)하도록 명하니 양사에서는 그 수가 너무 과하다고 논하였는데, 지평 윤형(尹泂)이 아뢰기를, “선조(先朝 명종(明宗)) 때에 녹훈하였던 것도 10년 뒤에 고친 일이 있었으니, 처음에 바르게 하여 고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겠습니까.” 하였다. 《시정록》 ○ 공신록(功臣錄)에는, “경인년 8월에 녹훈했다.”고 하였다.
88. 2월 18일에 영중추 부사 노수신(盧守愼)을 파직시키고 전교하기를, “노수신이 갑신년 겨울에 정승으로 있으면서 명을 받들어 어진 인재를 천거할 때에 간적의 무리들인 김우옹ㆍ이발ㆍ백유양ㆍ정여립 등을 추천하였으니, 그때 추천한 기록을 보면 털끝이 절로 쭈뼛하다.고금을 통해서 어찌 이런 대신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무릇 수령들이 법을 범하는 경우에도 그 사람을 천거한 자를 죄 주도록 되어 있은데 노수신이 간적들을 추천한 일이 심히 중대한 일인데도 지금 대간들이 귀를 틀어막은 듯 모른 척하고 있으므로 공론이 없는 것이다. 이(노수신) 정승은 내가 가장 우대해 오던 터이나 나라의 흥망에 관계되는 일이니, 그대로 덮어둘 수는 없다. 조정에서 공론에 따라서 잘 처리하라.” 하였다.
89. 좌의정 정철과 우의정 심수경(沈守慶)이 답하여, “지금 전교를 보고 노수신의 일에 대하여 놀랍고 황송함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노수신이 좋은 대우와 일찍이 없었던 은혜와 사랑을 입으면서 마땅히 왕실에 마음을 다하고 나라를 위해서 어진 사람을 천거해야 할 터인데도 오히려 그가 추천한 사람에는 대략 역적의 당이 많았습니다. 그때 사특한 의논이 횡행하여 역적의 기세를 돋우어 줄 때에 수신은 한 마디로도 그들을 금하고 억제하지 아니하고 한결같이 그 무리들의 농간하는 대로 맡겨두고 도리어 그들을 천거하였으니, 그 죄는 면 할 수 없습니다.또 역변이 일어난 뒤에도 오히려 대죄하지 아니하고 오직 시원하지 않은 두어 마디 말로 범연히 아뢰고 물러갔으니, 심히 늙고 정신없다 하겠으나 다만 사람을 잘못 본 것에 불과하며, 이것은 그 당시 간적들이 횡행하는 기세에 압제되어 그렇게 된 것이고, 또한 4대의 임금을 모셔온 중신으로서 이미 노환이 심하여 지금은 창증(脹症)으로 명맥이 실오라기와 같이 되었사오니, 전하께서는 구신(舊臣)을 시종여일하게 우대하시는 뜻으로 널리 용서하소서.” 하니, 임금은 답하기를, “알았노라.” 하였다. 《야언별집》
90. 대사헌 홍성민(洪聖民)과 대사간 이산보(李山甫)가 합동으로 아뢰기를, “노수신이 어진 사람을 천거하라는 명을 받고 역적들을 천거하였으니, 그 당시에는 비록 역모한 것이 모두 나타나지 않았으나 그 역적의 음흉하고 간사한 것은 아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노수신이 그런 자들을 천거하였으므로 역적의 범람한 마음을 돋구어주기에 이르렀습니다.한마디 말로도 그 싹을 꺾으려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들을 밀어 주었으며, 역변이 드러난 뒤에도 사람을 잘못 천거한 허물에 대하여 조금도 책임지지 아니하고 다만 조용히 처치하소서 하는 말만 하였으니, 노수신의 관작을 삭탈하소서.” 하였더니, 답하기를, “파직하라.” 하였다. 야언에는, “세 번이나 잇달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하였다. 《시정록》
91 이전에 노수신이 역변을 듣고 대궐에 들어가서 차자를 두어 줄 올리기를, “역변이 사림에서 일어났으니 중간의 헛말을 조용히 탄핵하여 다스려 죄인을 잡으소서.” 하였다. 성혼이 그것을 보고 말하기를, “글자마다 사(邪)를 띠었다.” 하였다. 대간에서 수신의 관작을 삭탈하라는 탄핵이 들어가니, 수신은 동대문 밖에 나가서 대죄하였다. 정철이 사람을 보내서 묻기를, “대감이 전에 역적을 천거하였는데, 지금은 어떠신지요.” 하니, 수신이 답하기를, “사람마다 소견이 각각 다 있는 것이다.” 하였다. 《괘일록》
92. 정철이 위관에서 해면되고 심수경(沈守慶)이 정승으로서 위관을 맡았었다.
93. 처음에 양사가 종계개정(宗系改正)의 일로 임금에게 존호(尊號) 올리기를 청하였으나 백유함(白惟咸)만이 불가하다고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존호를 올렸다.
94. 전 충청 감사 이로(李輅)가 선비를 많이 모아가지고 글을 짓게 하였는데, 부(賦)의 제목을 ‘화염곤강(火炎崑崗)’이라고 내었더니 어떤 선비는 이 글제가 수상한 뜻을 포함하였다고 의심하여 글을 짓지 않았다. 사헌부에서는, “이 화염곤강 넉 자는 애초에 낼 수 있는 제목이 아닙니다. 따라서 역적의 옥사를 다스린 데 대하여 은연히 불평의 뜻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오니, 파직시키기를 청합니다. 강원 감사 김응남(金應南)은 이길(李洁)과 혼인하였고 또 그 (이길(李洁)) 집안의 딸 중에서 첩을 데려왔으니 벼슬을 갈으소서.” 하였다. 《일월록》
95.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참봉 윤기신(尹起莘)은 호남과 영남지방에 두루 다니면서 역적들과 사귀어 결탁하였으니 관직을 삭탈하소서.” 하여, 기신을 잡아 가두고 매질하여 죽였다. 일월록
96. 윤기신은 이발 형제와 도의(道義)의 벗으로서 고문을 열두 번이나 받았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림이 없었다. 《괘일록》
97. 기신이 옥에 있을 때 그 가족들이 뇌물을 써서 석방되게 하려 하였더니, 기신이 말하기를, “구차히 사는 것은 죽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혼정록》
98. 3월에 전라 도사 조대중(曺大中)은 역적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고 행소(行素 상복을 입었거나 부고를 받은 뒤에 주육(酒肉)을 먹지 않는 것)하였다 하여 대간들의 탄핵을 받고 잡혀서 국문당할 때 곤장을 맞아 죽었다. 13일의 일이다.
99. 그때 대중은 담양 객사에 있으면서 마침 기제(忌祭)날을 당하였으므로 행소한 것이었다. 《괘일록》
100. 과거에 대중이 전라 도사로서 보성(寶城)에 순시하러 갔다가 역변이 났다는 말을 듣자 데리고 갔던 관기(官妓) 부안(扶安)의 관비(官婢) 를 돌려 보내면서 서로 울고 작별하였는데 세상에서는 이를 보고 역적을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고들 말하였다.사간원에서 이것을 탄핵하려 하니 황신(黃愼)이 말하기를, “사실의 진위도 살펴보지 아니하고 미리 탄핵부터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다. 만약 조대중이 착한 선비라면 반드시 전에 그릇되게 역적과 사귀었던 것을 뉘우쳐 깨달았을 것이고, 그 사람이 간악한 사람이라면 역적과 친했던 형적이 들어날 것을 두려워할 것이니, 역적을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전혀 사리에 닿지않는 일이다.” 하여, 다른 사람들도 드디어 의논을 중지하였는데, 황신이 갈린 뒤에 대간이 다시 탄핵하여 죽이고 말았다. 안방준(安邦俊)이 기록한 것.
101. 일찍이 담양 부사 김여물(金汝岉)이 적당(賊黨)을 잡기 위하여 여러 고을에 두루 다니다가 화순(和順)에 이르러 대중을 그의 집으로 방문하였다. 그때 마침 여립이 자살하였다는 기별이 오자 대중이 말하기를, “국적이 이미 죽었으니 오늘은 한잔 마셔도 좋을 것이다.” 하여 여물은 종일토록 술을 마시고 크게 취하여 헤어졌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대중이 공초(供招)에 여물을 끌어다가 증거로 삼으려 하자, 여물은 마침 의주 목사가 되어 곧 부임하려 하던 참인데도 대중의 원통함을 밝혀 주려고 의금부 문밖으로 오래도록 기다렸지만 국청에서 종시 불러들여 묻지 아니하였고 드디어는 대중에게 형벌을 가하였다. 《혼정록》
102. 4월 1일에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여립이 역심을 품은 것이 하루아침이나 하루저녁 일이 아닌데도, 일찍이 이조에서는 여립을 김제군수와 황해 도사를 시키려 하여 그 원하는 바를 들어주려고 하였습니다. 만일 그대로 하였더라면 역변이 불측한 지경에 이를 뻔하였으니 그때 이조의 당상과 낭청을 파직하소서.” 하였더니, 임금은, “너무 요란스럽게 굴지 말라.” 하고 듣지 않았다. 대개 이산해(李山海)가 여립을 김제(金堤)에 보내려 하였고, 이양원(李陽元)이 황해 도사에 보내려 하였는데, 이들의 탄핵을 주장한 사람은 정언ㆍ황신이었다. 《시정록》
103. 이산해가 사직하려고 소를 올리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간곡히 위안하였다.
104. 5월에 전라 감사 홍여순(洪汝諄)이 나주 향소(鄕所)에서 장계를 올려 보고하기를, “정개청(鄭介淸)이 유생 조봉서(趙鳳瑞) 개청의 문인 와 같이 여립의 집터 보는 데 갔었다고 하므로 정개청을 나주 옥에 가두었습니다.” 하였다. 얼마 뒤에 대간이, 개청이 역적과 친하게 지낸 것과 또 절의를 배척하였다는 두 가지 이유로 개청을 잡아다가 국문하였다. 《기축록》
104. 일찍이 정암수(丁巖壽)의 상소가 들어온 후에 개청의 문도인 배명(裵蓂) 등이 소를 올려 그 스승의 원통함을 호소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개청이 여립과 산에 가서 놀았다는 말이 도내(道內)에 퍼졌으므로 홍여순이 그 말의 진위를 나주 좌수 유발(柳潑)과 향교 당장 신팽년(辛彭年)에게 물었더니, 모두 맞는 말이라 하였다. 《혼정록》
105. 정개청이 진술한 말의 대략에, “임오년에 나무 목사가 신의 헛된 이름을 잘못 듣고 그 고을 훈도에 천거하여 두 번이나 임명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의 천성이 뻣뻣하고 옹졸하므로 때를 따라 변통하지 못하였습니다. 《소학(小學)》과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 같은 책을 가지고 부지런히 가르치고 매일 유건과 의복을 정제하고 읍양진퇴(揖讓進退)하는 법을 가르칠 때, 혹 게으른 자가 있으면 매를 쳐서 벌을 주었더니, 그 중에 이렇게 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는 자가 신을 원수같이 미워하였습니다. 교생(校生) 홍천경(洪千璟)같은 자는 신에게 면박하여 욕설을 하기도 하였습니다.신이 스스로 생각하니 성의(誠意)가 사람들을 감복시키기에 부족하였고 사람들도 같이 착한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곧 그만두고 돌아왔다가 그 뒤에 또 이 고을 서원(書院) 원장이 되었더니, 신에게 원망을 품은 자 한두 사람이 이 고을 목사에게 고하지도 않고 마음대로 신의 원장자리를 삭탈하고 마침내는 반드시 신을 죽이려 하여 역변이 일어난 후부터는 여러 가지로 모함하고 날조하여 그 여파가 이르지 않은 바가 없었습니다. 정암수(丁巖壽)의 소에는 신이 저술한 〈동한절의(東漢節義)〉와 〈진송청담(晋宋淸談)〉의 한 구절을 지적하여 절의를 배척하였다고 지적하고, 또 신이 윤원형(尹元衡)과 심통원(沈通源)의 집에 몸을 의탁하였다는 등의 형적도 없는 말을 만들어 내어 통문을 돌렸습니다. 이것으로도 오히려 죽이기에 부족할까 하여 지금에 와서는 또 신이 조봉서(趙鳳瑞)와 더불어 여립의 집터를 보는 데 갔었다 함으로써 임의로 죄목 보태기를 세 번이나 하였으니, 신을 반드시 죽이려 하는 그들의 음모는 분명하여 가리울 수 없습니다.신이 비록 여립과 더불어 같은 도내에 살았으나 한 번도 얼굴조차 본 일이 없었습니다. 을유년에 교정랑(校正郞)이 되어서 처음 보았고 공청(公廳)에서 같이 교정하기 겨우 십여 일인데 어찌 그 동안에 친밀할 수 있겠습니까. 또 집터 보려고 내왕한 것이 사실이라면 역당에서는 아직까지 어찌 한 사람도 진술한 말에 이 말을 고하지 않았겠습니까. 나주 향소(羅州鄕所)와 향교 유사(有司) 등을 대질시켜 말의 출처를 엄하게 캐내어 저의 원통하고 억울함을 씻어 주소서.” 하였다.
106. 임금은 개청이 여립에게 보낸 편지를 국청에 내려 보내며 이르기를, “개청의 편지에 여립이 ‘도(道)를 보는 바가 고명한 것은 당세에 오직 존형 한 사람 뿐이다.’ 하였으니, 그 도란 것이 어떤 도인가.” 하고, 또 문신(文臣)에게 명하여 개청이 지은 〈배절의 논(排節義論)〉을 조목별로 공격 변파하여 각 고을에 게시하여 알리게 하였다. 《일월록》
107. 개청이 옥중에서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역적 여립에 대하여 당시에는 비록 지혜있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장차 역적이 되리라고 미리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하물며 신같이 어둡고 용렬한 것이야 어찌 그가 흉악한 역심을 품고 있는 줄 알았겠습니까. 무릇 서찰에 쓰는 말은 친밀할수록 그 말이 번거롭고 공경하는 뜻이 없으며 서로 사이가 소원할수록 그 말이 공경과 칭찬을 더하는 것입니다.따라서 신이 역적에게 보낸 편지에 그의 간악함을 알지 못하고 지나치게 칭도한 것은 그 죄가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나, 그와 서로 친밀하지 않은 것은 그 편지 사연에 들어났으며, 또 편지가 다만 두 번에 그친 것을 보아도 결탁하고 왕래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절의는 사람의 마음에 근본이 되는 고유한 것이며, 기강을 부지하는 기둥인데 신이 비록 무식하나 어찌 절의가 세상교화에 관계됨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따라서 신이 전일에 지은 것(배절의론(排節義論))은 주자(朱子)가 논한 것을 읽고 느낀 바가 있어 동한(東漢) 시대의 절의의 폐해를 밝힌 것 뿐입니다. 대개 절의라는 것은 의리에 밝아서 이해의 사욕에 가리워지지 않는 것이므로 평소에 절의를 몸소 실행하면 족히 임금으로서는 밝아질 것이며, 신하로서는 정직하여짐으로써 화의 근본을 없애고 간특한 싹을 꺾어 버릴 수 있으며, 불행히도 환난을 만날 때에는 이해를 돌아보지 않고 절의에 죽을 것입니다.옛날 동한의 선비들의 마음에 대의가 뿌리박아 사생에 구애됨이 없이 변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이라 하겠으나, 본전(本傳)을 상고하고 주자의 뜻을 연구하여 보면, 그들이 스스로의 직분을 닦지 아니하고 의리에 힘쓰지 아니하며 조정을 더럽게 알고 천하를 내려다 보며 항상 인물을 비판하고 조정 비방하기를 다투어 하며, 또한 그것을 숭상하였으므로 높은 자리에 있는 공경(公卿)까지도 모두 그들의 비평을 두려워하여 신을 끌고 그들을 찾아 문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곧 학생이 국가의 권력을 잡았던 것입니다. 국가의 권력을 신하가 잡고 있어도 오히려 나라를 망치거늘 하물며 학생이 잡고 있는데 어찌 오래도록 그 나라를 보전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은 저으기 주자의 뜻을 취하여 생각하기를, 한갖 절의의 이름만 알고 실상을 모른다면 그 폐단이 교만하고 허탄한 데 이르러 마침내는 사사로운 이해에 빠지게 되어 정치는 바른 길로 가지 못하고 벼슬자리에는 인재를 얻지 못하여, 깊이 살펴야 할 곳에 거조를 잘못함으로써 소인들로 하여금 그 틈을 타게 하여 마침내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기(梁冀)가 질제(質帝)를 시해할 때에 이고(李固 후한(後漢)때의 어진 재상으로 권간(權奸)인 양기(梁冀)에게 모함당하여 죽었다.)가 정승으로 있으면서도 양기를 성토하여 죽이지 못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의 명령으로 절제를 받고 꾹 참았으며, 정권에 뿌리박고 있는 환관들을 두무(竇武)가 죽이려고 꾀하다가 그 선후와 경중의 순서를 잃어서 마침내는 사류(士類)가 섬멸당하고 나라도 따라서 망하는 화가 일어났으니, 이것은 모두가 절의의 실상에 힘쓰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반드시 학문이 《대학》에서 말한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이르러서 격물치지(格物致知)하여 절의의 근본을 알고 성의정심(誠意正心)하여 절의의 실지를 행하게 되면 인도(人道)가 바로 잡히고 기강이 서게 되어 비록 절의에 죽으려 하여도 스스로 절의에 죽을 만한 환난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전일에 신이 논한 바 절의청담(節義淸談)은 그 의논이 비록 분명하지는 못하나 그 실은 절의의 근본을 배양함에 있었던 것인데, 도리어 절의를 배척하였다고 하니, 이는 신의 본심이 아니며, 따라서 원통함을 안고 있을 뿐 발명할 데가 없습니다.” 하였다.
108. 정철이 일찍이 정개청은 불칙한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절의를 배척하였다는 죄목으로 개청을 국문할 때 개청이, “이것은 주자(朱子)의 말이요.” 하자, 정철은 소리를 버럭 지르며, “주자 주자하는데, 네가 주자를 어찌 아느냐. 주자도 그 스승에게 배은망덕한 일이 있었던가.” 하니, 개청은 머리를 수그리고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그뒤에 정철이 개청의 말을 할 때면 반드시, “개청은 반역하지 않은 여립이요, 여립은 반역한 개청이다.” 하였다. 《혼정록》
109. 개청의 편지에, “일찍부터 마음을 다해 덕의(德義)를 흠모하며 그리워하였다.” 는 구절이 있었는데, 정철이 이를 보고 아뢰기를, “이 서찰을 보면 개청이 역적과 결탁한 것이 정히 헛말이 아니며, 또 그가 지은 〈배절의론(排節義論)〉이라는 것은 세상을 의혹시키고 현란하게 하였습니다. 개청이 절의를 배척하였다면 반드시 절의와 배치되는 일을 좋아했을 것이니, ‘절의와 배치되는 일’은 어떤 일이겠습니까.” 하였다. 《기축록》
110. 위관이 아뢰기를, “개청이 한결같이 여립의 터를 보러 갔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원통하다고 하면서 정여능(鄭汝能) 등과 한 자리에서 대질하기를 원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었다는 〈배절의설(排節義說)〉은 후진들을 현혹하여 그로써 미치는 화가 홍수(洪水)나 맹수의 해보다도 더할 것이니, 형벌을 가하여 자백받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이에 한 차례 고문을 하고 또 형을 더하기를 청하니, “그만하고 법에 따라 처리하라.” 하였다. 처음에는 평안도 위원(渭原)으로 배소(配所)를 정했다가, 위관이 다시 아뢰어 경원(慶源) 아산보(牙山堡)로 배소를 정하고 6월에 그곳에 귀양가서 7월에 죽었다. 《기축록》
111. 그때 개청에 대한 말이 다시 적승(賊僧) 성희(性熙)의 진술에 나와서 잡아오라는 명이 있었으나 개청은 그때 이미 배소에서 죽은 뒤였다. 《혼정록》
112. 5월에 보성(寶城)에 사는 김용남(金用男)ㆍ김산중(金山重) 등이 고부 군수 정염(丁焰)과 같이 의논하여 조정에 고발하기를, “나주 사람 임지(林地)와 송광사(松廣寺) 중 성희(性熙)가 길삼봉(吉三峰)과 더불어 송광사 삼일암(三日庵)에 머무르면서 군사를 일으킬 모의를 했는데, 임지는 싸울 때 쓸 말을 사려고 순천(順天)에 있는 처가로 갔다.” 고 하여, 임지의 일족 전부와 송광사 중 혜희(惠熙)ㆍ희성(希性)ㆍ심회(心懷)ㆍ심정(心淨) 등 30여 명과 절 곁에 사는 백성 20여 명을 잡아 가두었다. 이에 국청에서 아뢰기를, “송광사는 보성에서 60리요, 순천에서는 80리이며 고부는 3일을 가야 되는 곳입니다.조정에서 지금 길삼봉을 잡으려고 찾는 중인데 김용남 등이 길삼봉의 사실을 알았다면 어찌하여 60리에 있는 보성이나 80리 밖에 안되는 순천에 와서 고발하지 아니하고 3일이나 걸리는 고부까지 가서 고발하였겠습니까. 또한 고부 군수 정염의 첩은 김용남과 김산중의 여동생이니 그들의 정상을 분명히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정염은 이 옥사가 성립되지 않으면 자기가 도리어 무고죄에 걸릴 것을 염려하여 그 고을에서 면포를 많이 싣고 서울로 와서 금부 옥졸에게 뇌물로 주고 그들을 시켜 성희에게 거짓으로 자복하기를 꾀었으나, 성희는 나주에 있는 여러 임씨를 끌어넣지 아니하고 자기만이 여립과 공모했다고 하였으므로 잡혀온 여러 임씨는 다 놓여 나갔는데, 임지만이 한 차례 형을 받은 후 북도로 귀양갔다. 《혼정록》
113. 5월에 중 성희의 문서 중에 밀기(密記)가 있었다. 임금이 묻기를, “이것을 네가 어떻게 얻었느냐.” 하니, 성희가 진술하기를, “어느 해에 여립의 집에서 베껴다가 감추어 두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묻기를, “그때 여립이 제 혼자 있더냐.” 하니, 성희는, “좌중에 손님이 두 사람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이름을 잊었고 한 사람은 전에 곡성 현감을 지낸 정개청이었습니다.” 하였으므로 개청을 배소에서 도로 잡아 오라는 명을 내리었다.
<청점 홍점>
114. 16일 나주 사람 양형(梁泂)ㆍ양천경(梁千頃) 등이 소를 올려서 정언신이 역적을 옹호한 죄상을 논하였더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언신이 역변 고발한 자를 죽이자는 말을 공석에서 발설하였다 하니, 해괴하고 놀라움이 이보다 더 할 수 없다. 또 조정에서는 말 한마디도 없었는데 지금 유생들이 소에 의하여 처음 듣게 되니, 이것도 역시 괴이한 일이다.언신이 대신으로서 감히 함부로 속였고, 그 형 언지(彦智)도 이것을 본받았으니, 이 두 사람의 마음에는 이미 임금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놀라움을 이길 수 없다.” 하였다. 국청에서 회답하여 아뢰기를, “언신의 이 말은 퍼진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전하께 아뢰지 못한 것은 신의 죄가 큽니다. 이미 드러났으므로 문초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곧 다른 대신을 불러서 죄를 의논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시정록》에는 6월 19일 자로 되어 있다.
<청점>
115. 위관이 회답하여 아뢰기를, “양형(梁泂) 등의 소가 시골 궁벽한 곳에서 나왔으므로 전해 들은 말이 사실이 아닌 말이 없지 않습니다. 옥남이 입과 귀를 데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말 중의 한 가지 입니다. 그러나 정언신이 ‘역변 고발자 10여 명만 죽였으면.’ 하였다는 말은 일찍이 서울 안에 퍼져서 신도 역시 그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과연 그 말과 같다면 이것은 옥사를 뒤집어 엎는 수단이니, 그 죄상을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이 한 조목에 대하여 청컨대 국청에 참여한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물은 후에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기축록》
116. 강해(姜海)가 또 소를 올려, “정언신이 귀양갈 때 최영경(崔永慶)의 문도들이 날마다 정언신의 집에 와서 위문은 하지 않고 도리어 치하하였다 하니,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용주집》 <홍점>
117. 16일 국문에 참가했던 대신과 금부 당상을 불러서 언신이 한 말을 물으니, 김귀영(金貴榮)은 아뢰기를, “신은 왼쪽 귀가 어두워 큰 소리가 아니면 들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고, 이준(李準)은, “앉았던 자리가 조금 멀어서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고, 유홍(愉泓)과 홍성민(洪聖民)은, “그때 언신이 말하기를, ‘이것은 근거없는 말이다. 만약 다스리지 아니하면 장차 모두 시끄러워질 것이니, 이런 말을 낸 사람 10여 명만 죽이면 뜬 말이 스스로 그칠 것이다.’ 하므로 신들이 힘써 그 말을 반박하였습니다.” 하였으며, 이산해는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않았다.
118. 17일 임금이 사람을 시켜 이산해에게 가서 물었더니 산해가 아뢰기를, “시일이 오래 지나서 분명히 기억되지 않으나 처음에 역변을 고발하는 감사 장계가 자세하지 못하므로 다시 자세히 알아 보아 사유를 갖추어 급히 아뢰려고 회답하여 아뢸 때에 언신의 그런 말이 아마 나왔던 것 같습니다.” 하였다. 《기축록》
<홍점 청점>
119. 19일에 대사헌 홍성민이 아뢰기를, “당시의 일로서 놀랍고 통탄할 만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중간에서 양단(兩端)을 잡고 있는 사람이 많아서 신이 비록 추관(推官)이 되었어도 간혹 발언을 하면 사람들이 다 미운 눈초리로 보니, 신은 유홍과 더불어 서로 돌아보며 혀를 찼습니다. 언신이 발언할 때에 실로 대항하였고 이산해도 그 불가함을 말하고 신을 돌아보며, ‘내 소견도 판윤(判尹)과 같다.’ 하였으나, 언신이 재삼 말하니, 이산해도 조금 굽혀져서 말하기를, ‘다시 생각해 보니 솔직하게 말한다면 우상의 말도 옳다.’고 하였습니다. 조금 뒤에 언신이 황해 감사를 신문하자고 하였으나 신이 그 불가함을 말하였고 좌중에서도 역시 불가함을 말하는 자가 있어서 그 일은 그만두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산해가 아뢰기를, ‘분명히 기억할 수 없다.’ 한 것은 아마 산해가 큰 병을 치룬 나머지 정신이 없어 잊어버려서 그랬을 것이지만 그러나 괴이하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늘과 해가 내려다 보고 귀신이 옆에 지키고 있는데 임금을 속이고 어찌 살겠습니까. 신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역적을 추국할 때에 아뢰지 못하였고, 또 역적을 처단할 때에도 아뢰지 못하였으니, 그 죄는 같습니다. 청컨대 법대로 형을 받겠습니다. ……” 하였다.
이에 임금이 답하기를, “경이 이미 친히 봤으면 어찌 그 즉시 말하지 아니하고 지금 유생의 소가 나온 뒤에 허다한 말을 늘여 놓는가. 매우 이치에 맞지 않는다. 사람의 말이 이러기도 하고 저러기도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데 어찌 한 사람(홍성민)의 말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산해)에게 책임을 전가하겠는가.이미 관직을 사퇴하였으니 그대로 하라.” 하고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홍성민이 아뢴 말 중에 임금을 속였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이 누구를 두고 한 말인지 의논하여 아뢰라.” 하니, 회답하여 아뢰기를, “그 문세(文勢)로 본다면 그 말이 이산해를 가리키는 것 같으나, ‘그 죄는 오직 같다.’는 말로 본다면 스스로를 책임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성민을 불러서 물으니, “제 허물을 스스로 책한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시정록》
120. 정언 황신(黃愼)이 피혐하고 아뢰기를, “정언신의 사특한 의논이 나와서 일의 기미가 위태함이 급박하였을 때에 진실로 홍성민과 유홍이 대항하여 힘써 배척하지 않았더라면 나라 일이 마침내 어찌 되었을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가령 홍성민의 말이 과연 꼭 합당하지 못한 것이 있다 할지라도 오히려 다른 여러 사람이 요리조리 양쪽 편을 잡고 있었던 것보다는 옳지 않겠습니까. 지금 엄하신 꾸지람이 양쪽 편을 잡았던 사람들에게는 내리지 아니하고 도리어 홍성민에게 내리게 되니, 아부하여 형세를 관망하는 자가 이로 인하여 뜻을 얻게 됨으로써 충성되고 곧은 말이 전하께 들리는 길이 막힐까 신은 두려워합니다.그때 언신이 말한 것은 한 자리에 있던 이는 모두 들었는데, 이산해만은 홀로, ‘기억이 가물하다.’ 하니, 이것이 비록 귀가 먹었다고 핑계하는 자(김귀영(金貴榮))와는 다르나, 이미 바른 말이 아닙니다. 또 글을 올려 스스로 변명하여 전후의 말을 다르게 하니, 대신으로서 임금에게 고하는 것이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임금이 진노하여 즉시 대간을 갈았다.
121. 21일에 특히 홍성민을 경상 감사에 명하고, 황신을 고산 현감에 임명하여 보냈다. 《기축록》 《일월록》
122. 좌상 정철이 아뢰기를, “정언신이 역변을 고발한 자를 베자고 한 것은 신이 친히 보지는 못하였으나, 세상에 널리 퍼진 지 오래여서 익히 듣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입을 다물고 아뢰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신의 관직을 파면하소서.” 하였더니, 임금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시정록》
홍점
123. 영상 이산해가 사직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좋은 말로 만류하기를, “경이 어찌 갑자기 이렇게 사퇴하려 하는가. 여러 사람들이 온갖 방법으로 경을 도모하려는 것을 내가 이미 알고 있노라. 비록 만 사람이 공격한다 해도 믿을 수 없다. 아, 경이 가고 보면 다른 정승인들 또한 그대로 있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이것은 좋은 일이 아니니, 경이 사퇴하지 말고 속히 출사하면 모든 일이 다 좋아질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사람들이 후회할 일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시정록》
124. 죽은 전라 도사 조대중(曺大中)에게 극형을 가하였다.
125. 우상 심수경(沈守慶)이 물러나고 정철이 도로 위관(委官)이 되었으니, 일찍이 조대중이 죽을 때에 시를 지어 국청(鞫廳)에 보였는데,
지하에 가서 만약 비간(比干)을 따라 간다면 / 地下若從比干去
외로운 혼이 혹은 이때라고도 했다. 웃음을 머금고 슬퍼하지 않을 것이네 / 孤魂(一作此時)含笑不須悲
하였던 바, 판의금부사 최황(崔滉)이 이것을 임금에게 아뢰려 하자 위관 심수경이 말하기를, “죄인이 죽을 때 정신없이 말한 것을 아뢸 필요가 있는가.”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최황이 마침내 임금에게 알리니, 임금이 수경을 보고 그 연유를 물었다. 이에 수경이 대답하기를, “죄인이 사정을 진술한 말 이외에는 수리한 예가 없사온데, 하물며 죽을 때를 당하여 정신없이 지은 시를 어찌 아뢸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더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특명으로 조대중의 처첩과 자녀와 동생ㆍ조카 등을 잡아 오게 하고, 대중은 역적으로 논하여 육시를 하게 하였다. 수경은 이 일로 하여 세 번 사직하여 갈리게 되었던 것이다. 《혼정록》
126.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조대중은 이발과 백유양을 종이 상전 섬기듯 하며 항상 말하기를, ‘이이와 성혼은 죽여야 한다.’ 하였고, 역적 여립과 친밀하여 역적이 자살하자 대중은 눈물을 흘리고 소식(素食)을 하였다는 말이 공론에 퍼졌으니, 대중을 역적으로 논하는 것은 아까울 것이 없으나, 전후에 처단 받은 여러 역적에 비하면 조금 차별이 없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님이 이르기를, “조대중의 패역(悖逆)한 죄상은 그 시(詩)와 눈물을 흘리고 소식을 한 것으로, 이미 스스로 자복하였으니, 다시 의논할 것이 없다. 역적을 옹호한 데 대해서는 법률이 있으니, 법에 따라 시행하라.” 하였다.
127. 그때에 조대중의 처첩에 대하여 압슬형(壓膝形)을 시행하려 하니, 위관과 금부 당상이 아뢰기를, “스스로 역적질한 것과 역적을 옹호한 것과는 그 죄에 경중에 있을 것이고, 따라서 지금 대중에게 역적을 옹호한 죄로 논하면서 그 처첩까지 국문하는 것은 형법을 집행하는 대체에 있어서 지극하지 못한 점이 있을 듯합니다.” 하고 두 번이나 아뢰었더니, 비로소 허락하며, “여인은 국문하지 말고, 그 외에는 신문하라.” 하였다.
128. 담양에 사는 생원 채지목(蔡之穆)이 광양 훈도로 있으면서 그 고을 교생들과 공모하기를, “영암에 사는 전 현감 김국주(金國柱)는 이길(李洁)과 서로 절친하여 은밀히 무기를 역적에게 주어 도와 주었다고 죄명을 씌우면 국주는 역적이 될 것이고 우리들은 상을 탈 것이다.” 하고 드디어 새 현감 한덕수(韓德修)에게 밀고하고, 첩지를 위조해서 죄상을 열거하여 상소하였다. 이에 국주는 그때에 이산(理山) 부사로 있다가 잡혀서 국문을 받고 죽었다. 그 뒤에 광양 아전들을 국문하니, 김국주가 무고당한 것이 드러나서 지목 등 10여 명은 반좌율(反坐律)을 적용하여 모두 죽였다.
청점
129. 이전에 이발이 이미 죽자, 그 늙은 어머니와 어린 아들도 잡아다가 국문하니 어머니 윤씨는 나이 82세이고 아들은 8세였는데 모두 엄형을 받고 죽었다.이발의 모친은 죽을 때에 분연히 말하기를, “형법이 너무 지나치다.” 하였고, 발의 아들은 말하기를, “평일에 아버지가 나를 가르치기를, ‘집에 들어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충성하라.’ 하였을 뿐, 역적의 일은 들은 바 없습니다.” 하였더니, 임금은, “이런 말이 어찌 놈의 자식의 입에서 나올 말이냐.” 하고 아울러 때려 죽였다. 홍절(洪梲) 홍가신(洪可臣)의 아들 과 김명룡 김응남(金應南)의 아들 도 모두 압슬형을 가하였으며, 그 문생들과 노복들에게도 모두 엄형을 가하였으나 한 사람도 자복한 자는 없었다. 《일월록》 《기축록》
130. 이급(李汲)과 이발의 아들은 큰 아이가 11세요, 작은 아이는 5세였는데도 모두 죽였고, 이발의 모친은 압사형(壓沙刑)을 받았으니, 을사사화(乙巳士禍) 때에도 이러한 일은 없었으며, 옥졸들도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괘일록(掛一錄)》
131. 5월 24일에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양형(梁泂)이 올린 소에 적혀 있는 사람 중에, 태인에 사는 방대진(房大進)과 방대수(房大遂)를 잡아오라고 나장(羅將)을 보내었습니다. 나장들이 그 고을에 가서 물으니, 거기에는 원래 방(房)씨 성을 가진 사람이 없어서 적발할 길이 없으므로 은진 현감 조강(趙綱)에게 물어서 처치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132. 25일 사헌부에서 시무(時務)에 관한 일로 차자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가상히 여긴다. 다만 차자에서 말한 내가 배척하는 대간은 시기를 타서 함부로 당파를 지어 사람을 모함하는 자들이다.” 하였다.
133.26일에 전교하기를, “이발 등은 처음에 정집(鄭緝)이 진술한 말에 나왔고 다음에는 선홍복(宣弘福)이 진술한 말에 나왔고, 또 다음에는 사이(四伊)가 진술한 말에 나왔으니, 역적 모의에 참여한 것은 그 사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물며 평일에 역적과 결탁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일을 해온 것은 조그마한 아이들도 아는 바요, 여립과 왕래한 서찰은 친밀하기가 마치 부자ㆍ형제보다 더하니, 이런 자를 처단하지 아니하고 어떤 사람을 처단할 것인가.《춘추》의 대의(大義)로 역적을 치는 데는 역적의 몸이 살았거나 죽었거나 가릴 것 없고, 옛날 것이나 지금 것을 가릴 것이 없는 것인데, 이미 이발의 죄상이 드러나서 증거가 모두 나타났으니, 마땅히 법에 의하여 처단해야 할 것이다. 의논하여 아뢰라. 그리고 역적 정언신에게 무기를 나누어 보내 주었다는 것은 가령 그 말이 정말 맞다고 해도 웃음거리도 되지 않는 일이다. 언신이 들으면 자복하지 않을 것이다. 긴 화살 한 벌로 무엇을 한단 말인가. 하물며 양형(梁泂)의 소에는 거짓말이 백 가지인데 이것은 물을 것도 없으니, 이것으로 고문하지 말라.다만 조강(趙綱)은 역적이 김효원(金孝元)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말하나, 무릇 역적이 제 자제를 위하여 입학시키려고 하였다면, 그 당시에는 거의 친한 친구로서 정부 요로에 있는 자가 많았는데, 하필 영흥(永興)에 가 있는 김효원에게 부탁하였다는 것은 이치에 당치 않다. 이와 같이 인심이 험악한 시기를 당해서 의외로 헤아릴 수 없는 일이 일어날까 염려되니, 다음에는 옥사를 일으킬 수 없다. 대저 당당한 국가에서 시골 유생의 소를 보고 국문을 하고 형벌을 주는 것은 사체에도 크게 손상이 될 뿐 아니라 후폐가 많을 것이니 그냥 두는 것이 낫다. 따라서 조강은 고문하지 말고 놓아 보낼 것이며, 방대진(房大進)은 논하지 말라.” 하였다. 《기축록》
청점
134. 27일 영상 이산해가 병을 요양하고 정부에 나오니, 전교하기를, “의금부에서 정언신의 죄에 대한 품청(稟請)이 들어 왔으나 경이 없었으므로 상의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언신의 전후 죄상은 매우 놀란 만하나 이제 시골에서 올라온 유생의 상소에 의하여 죄를 더 준다는 것은 사체(事體)에 미안한 일일뿐 아니라 후폐가 염려된다. 언신은 이미 외딴섬에 귀양가 있으며 죽을 나이가 다 되어 얼마 안가서 죽을 것이니, 한 늙은이에 지나지 아니한다. 따라서 하필 죄를 더할 것이 있겠는가. 내 생각에는 그만 그대로 두고 논하지 아니하는게 낫겠다.” 하였다.
청점
135. 28일에 이발등의 일로 수의(收議)할 때 이산해는, “신의 어리석은 소견은 의금부에서 회답하여 아뢴 것과 다름이 없는데, 죄상이 이와 같으니, 가벼이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하였고, 심수경(沈守慶)은 의논하기를, “죄인이 불복한 채 죽었는데 뒤에 적의 입에서 증거가 나왔다고 해서 역모에 동참했다고 단정한다면 국가에서 형법을 집행하는 대체에 지극하지 못한 점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고, 김귀영은, “죄목이 전파되어 알려진 것으로는 다만 여립과 친밀하였다는 것 뿐이고, 별로 역모에 참여하였다는 단서는 없습니다.” 하였다.
136. 전교하기를, “정언신의 일은 의금부에서 일전에 결재를 청하기에 논하지 말라고 의금부에 말하였고, 이발 등의 역적을 모의한 죄상은 분명하게 가릴 수 없다. 따라서 이런 것을 치죄하지 않는다면 국법이 폐해지고 기강이 무너지는 것이다. 의금부에 명하여 다시 의논하여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137. 29일에 이조 판서 유성룡을 우의정에 올리고, 최황(崔滉)을 이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138. 위관들이 아뢰기를, “이발의 죄가 분명하게 드러난 지 이미 오래 되었고, 그것을 베어 성토한다는 지극히 엄하신 대의가 위에서 내리니, 어리석은 신 등은 다시 덧붙일 것이 없으므로 앞서 하문하신 것을 받들어 약간의 소견을 말하고 다른 대신에게 수의하도록 하였더니, 그들의 의논도 역시, ‘가벼이 결정할 수 없고 조정에 널리 수의하여 적절하게 처리하자.’고 합니다.” 하였더니, 답하기를, “만약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내가 소소한 형정(刑政)에 대해서도 오히려 신중히 하였는데, 하물며 이미 죽은 흉한 놈에게 내가 어찌 반드시 죄를 더 주려 하겠는가. 다만 역적을 치죄하는 것은 천하의 대의이니, 만약 그 수의한 대신들의 말과 같다면 백년 뒤에 성인(聖人)의 붓이 앞 시대의 역적에게 도끼를 내리지 않았을 것이며, 왕돈(王敦)이 죽은 뒤에 궤참(跪斬)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청점
139. 6월 1일에 2품 이상에게 수의하니 대개가, “당초에 이미 자복하지 않고 죽었는데 그 뒤의 증거로 죄를 만들어 중한 형벌을 가한다는 것은 온당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140. 최영경(崔永慶)의 관직을 삭탈하라는 사간원의 계사가 들어왔다. 상세한 것은 6월 2일 조에 있다.
141. 20일 밤 대궐 문이 닫힌 뒤에 위관들이 비밀히 아뢰는 것을 금부 도사가 문틈으로 들여다 보았는데, 그 내용은, “정언신이 역적과 체결하고 임금을 속였으니, 이는 국가를 저버리고 임금을 능멸하는 것입니다. 또한 최영경과 정언신은 역적의 심복이 되어 역모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밤이 사경에 이르러 금부 도사 이배달(李培達)이 정언신을 잡으러 갔다가 7월 5일에야 잡아 왔는데, 그 날은 천제(天祭)가 있어 재계하는 날이므로 삼성추국(三省推鞫)을 하지 못하였다.8일에 위관들이 아뢰기를, “정언신을 추국하는 사체는 보통 죄인과 같을 수 없습니다. 일찍이 대신을 지낸 사람을 삼성추국에 붙인 것은 증거할 만한 전례가 없으므로 다른 대신이 같이 참여하여 신문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대신들에게 명하기를,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심수경이 의논하기를, “대신 추국이 비록 의거할 만한 예가 없다 할지라도 추국하지 않을 수 없사오며, 다른 죄인과 다를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였고, 이산해는 의논하기를, “이미 대신이 명을 받아서 신문하는 것이라면 비록 다른 관원이 같이 참여하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하였고, 유성룡은 의논하기를, “전에 없던 일을 처음으로 시행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의금부에 명하여, “대신을 추국한 전례를 상고하여 올리라.” 하니, 의금부에서 회답하여 아뢰기를, “본부에서는 추국한 전례가 없었고, 전에 강순(康純)이 남이(南怡)의 공초에 의하여 친국(親鞫)을 받았으나 이것은 삼성추국은 아니었으며, 이 밖에는 상고할 문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청점
142. 15일에 장령 장운익(張雲翼)과 지평 백유함(白惟咸)이 아뢰기를, “대사간 심충겸(沈忠謙)과 사간 오억령(吳億齡)의 피혐한 말을 삼가 보니, 정언신이 임금을 기만하고 역적과 체결한 죄만을 말하였을 뿐이고, 정언신이 역적을 고발한 자를 죽이자고 한 말에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미 드러난 죄에 대해서는 법을 따라 결정할 것이며, 지금에는 처리할 도리가 없다 하였으니, 실로 그 말의 뜻을 알지 못 하겠습니다. 역모를 고발한 자를 죽이자고 한 것이 어찌 국문할 만큼 중대하고 긴요한 것이 못되겠습니까.만약 이미 드러난 죄에 대하여서만 법을 결정하는 것이라면, 언신의 죄상이 이미 남해로 귀양보내기 전에 밝게 드러났으니, 그때에 그 죄악에 대한 처단을 내릴 것이었는데, 하필 비밀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려서 대신과 삼사(三司)에 보이고 다시 그를 잡아오게 하였습니까. 또 이미 잡아 왔으면 어찌 국문도 하지 아니하고, 죄부터 먼저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심충겸(沈忠謙) 등은 비록 자기들이 피혐으로 인책 사퇴한다고는 하나, 긴요한 말을 빼버리고 큰 죄를 풀어 주는 폐단이 없지 아니합니다.” 하였다. 대사헌 이제민(李齊民)과 장령 신잡(申磼)은 의논이 같지 않다 하여 피혐하여 사퇴하자, 체직을 명하였다.
143. 17일에 전교하기를, “정언신을 궁궐의 뜰에서 추국하라.” 하였다.
144. 18일에 정언신이 하소연한 말을 아뢰니, 처음에 사약을 내리라는 명을 내렸다가, 여러 대신들이 회답하여 아뢰기를,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대신을 죽인 일이 없습니다. ……” 하니, 전교하기를, “그대로 가두어 두고 조용히 처리하리라.” 하였다.
145. 정언신이 옥중에 있으면서 정철이 다시 나와 일을 본다는 말을 듣고 손을 들어 빌면서 말하기를, “좌상이 나왔으니 우리들은 모두 살았다.” 하였다. 정철이 언신을 구원해 주려고 아뢰려 할 때에, 영상은 아무말 없이 일어나 휴게소로 들어가고 우상도 역시 좌상에게 미루었다. 이에 정철이 드디어 계초(啓草)를 만들어 영상에게 의논하니, 영상은 보기만 하고 옳다 그르다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정철이 들어가 아뢰려 할 때에 승전색(承傳色)이 나오니, 영상이 비로소 나와서 놀라며, “이게 어떤 아룀이냐.” 하고 좌우를 돌아본 뒤에 아뢰는 글을 전하니, 사람들이 모두 괴상이 여겨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석실어록(石室語錄)》
청점
146. 19일에 양사에서 정언신을 대궐 뜰에서 국문하기를 청하여 여러 번 아뢰었던 바, 20일에 비로소 허락이 내려 그날 밤 사경에 한 번 형벌하고, 22일에 갑산으로 귀양보내라고 명하였으나, 양사가 함께 아뢰어서 다시 국문하기를 청하니, 8월 9일에 이르러 임금이 답하기를, “어찌하여 이렇듯 강경히 고집하는가. 언신의 위인이 배우지 못하고 무식하여 스스로 큰 죄에 빠지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역당의 진술에 의하면, ‘먼저 정언신과 신립(申砬)을 죽인 후에 군사를 일으킨다.’ 하였으니, 이것만으로도 언신의 죄는 마땅히 용서할 만한 것이다.지금 만약 다시 국문하다가 혹 매를 못이겨 죽게 되면 반드시 대궐 뜰에서 대신을 때려 죽였다는 말이 날 것이고 또는 위와 아래에서 서로 미루는 사이에 혹 병으로 죽게 되면 대신이 옥에서 병사하였다는 말이 날 것이니, 이런 것은 모두 좋지 못한 일이다. 따라서 경들이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할 것인가.” 하니, 양사에서 아뢰기를 정지하고 언신이 삼경이 되어서 옥문에서 나왔다.
147. 전교하기를, “유몽정(柳夢井)은 역적에게 깊이 인정을 받았으니, 그 결탁한 죄상은 덮어 넘길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벼슬만을 삭탈하면 한가로이 고향에 높이 누워서 화조월석(花朝月夕)에 늙은이들과 즐겁게 놀게 될 것이니, 형법의 실책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을 것이다.” 하니, 위관들은 유몽정을 잡아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일월록》
148. 5월에 유몽정을 잡아들이라는 명이 내리고, 6월 13일에 유몽정을 문초한 문서를 올리니, 전교하기를, “옛날 제갈량(諸葛亮)이 나라를 다스릴 때에, 죄를 자복하여 실정을 바로 말하는 자는 죄가 무거워도 놓아주고 거짓을 보태어서 간교하게 말하는 자는 죄가 비록 가벼워도 반드시 죽였다. 따라서 지금 몽정이 역적과 더불어 결탁한 것은 귀머거리도 모두 들어 아는 것이고, 또한 역적과의 서찰 중에 그 사실이 밝게 나타났는데도 감히 그런 일이 만무하다고 진술하여 함부로 속임으로써 조정을 업신여기고 희롱하니, 극히 괘씸한 일이다. 다만 앞으로 더 신문할 일이 있으니, 죄인 유몽정에게 우선 형을 더 하지 말라.” 하였다. 《기축록》 《일월록》
149. 몽정은 그대로 옥에 있는 지 20여 일만에 다시 형벌을 받고 마침내 죽었다. 《유호갑진록(柳滸甲辰錄)》
150. 몽정의 아들 호(滸)는, 임진년 난리에 소모사 종사관(召募使從事官) 홍기상(洪麒祥)과 더불어 안성(安城)ㆍ전주(全州)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서 의주까지 갔었으므로 특별히 군자감 참봉(軍資監參奉)을 시켰는데, 유호가 소를 올려서 사직하며 그 아버지의 벼슬을 회복하여 달라고 청하고, 갑진년에 다시 상소하여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청하였더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청점
151. 경인년 2월에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전 사축(前司畜) 최영경(崔永慶)은 역적과 매우 친밀한데, 정언신의 서찰 중에서 나오는 최효원(崔孝元)이란 자 역시 이 사람을 가르킴이니, 이것으로서도 역모에 참여하여 서로 친하게 지내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관직을 삭탈하기를 청합니다.” 하고 세 번이나 아뢰었지만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일월록》
청점
152. 6월 2일에 정언 이흡(李洽)이 아뢰기를, “최영경이 역적과 가장 친하였으므로 관직을 삭탈하기를 청하였더니, 답하기를, ‘최영경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역적과 결탁하였다는 것은 드러난 사실이 없어 증거될 일이 없으므로 그대로 두어도 불가할 것이 없으니 벼슬을 삭탈할 것까지 없다.’ 하였으나 뒤에 이르러 허락하였습니다.” 하였다. 《기축록》
153. 6월에 강해(姜海) 뒤에 현(涀)이라고 고쳤다.ㆍ양천경(梁千頃) 등이 조응기(趙應麒)에게, “길삼봉은 곧 최영경이다.” 고 말하니, 응기는 그 말을 전라감사 홍여순(洪汝諄)에게 보고 하였다. 여순이 비밀히 장계하기를, “길삼봉은 곧 최영경입니다…….” 하고, 한편으로는 경상 병사 양사형(梁士瑩)에게 공문을 보냈더니, 양사형은 경상 도사 허흔(許昕)과 감사 김수(金睟) 등의 말에 의하여 먼저 영경을 잡아 놓았다. 국청에서 청하여 홍여순에게 캐어물으니 여순은 제원 찰방(濟源察訪) 조응기를 끌어대고, 응기는 김극관(金克寬)을 끌어대고 극관은 강해ㆍ양천경을 끌어댔다. 《노서집(魯西集)》
154. 진주 품관(品官) 정홍조(鄭弘祚)는 판관 홍정서(洪廷瑞)를 말하였고 정서는 밀양 교수 강경희(康景禧)를 말하였고, 경희는 감사 김수(金睟)를 말하였고 김수는 도사 허흔을 말하였고, 허흔은 양사형을 말하였다. 《괘일록》
155. 8월에 최영경을 잡아다가 국문하니, 영경이 진술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은 어릴 때 부친을 잃고 가난하고 병이 있어 농사 지을 밭이 없었으므로 성중에 있는 선인(先人)의 허물어진 집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계유년에 헛된 이름이 나서 외람되이 6품 벼슬을 받았으나, 분수를 헤아려 보니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진주로 내려와서 20년이나 문을 닫고 숨어 지내다가 지금 불행히도 간악한 자의 모함을 받게 되었습니다.신의 성품이 어리석고 완고하여 시속에 영합하지 못하므로 세상의 미움을 받은 지가 오래였고, 지금 간당들이 신을 가리켜 역적과 사귀었다 하고 또 삼봉이라고 하나, 신은 역적과 아는 사이도 아닐뿐더러 사귄 일도 없는 것은 나라 사람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정축년에 아들이 죽어서 서울에 올라왔더니, 역적이 이발을 따라 보러 왔었으나, 그때 신은 울고 있던 중이어서 다만 낯을 한 번 보았을 뿐이고, 그들은 총총히 조상만 하고 갔었습니다.신이 만약 이렇게 바로 아뢰지 않으면 다른 사람은 이런 일이 있었던 것도 모를 것입니다. 어찌 감히 일신의 생사 때문에 임금을 속이겠습니까. 또한 신이 만약 역적과 서로 사귀었다면 역적의 문서 중에 어찌 서찰 한 장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조상하러 왔을 때 그 위인을 보니, 교활함이 너무 심하므로 신이 일찍이 안민학(安敏學)과 이발에게 충고하기를, ‘정여립과 너무 친하게 말라.’ 하였습니다.
또 만장동(萬場洞)이란 말은 평생에 들은 일조차 없습니다. 나이 60이 넘도록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춘 사람이 5, 6일이나 걸리는 먼 길에 어찌 역적과 상종할 수 있었겠습니까. 정언신의 서간 중에 최효원(崔孝元)이라고 한 것과 윤기신의 서간 중에 최장(崔丈)이라고 한 것에 대하여는 그 서찰 중에 한 말을 알 수 없으나, 반드시 헛되고 잡된 무리들이 저희들끼리 말한 것이요, 옳든 그르든 신과는 관계도 없는 것입니다.하물며 삼봉(三峯)이라는 말은 더욱 무리한 것이니, 무릇 사람의 별호는 반드시 평생의 공부에 관한 것이거나 혹은 사는 곳의 산천 이름을 따서 짓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이 사는 곳은 축축하고 습기 많은 못가인데, 어찌 이런 호(號)를 할 수 있었겠으며 또한 삼봉이라는 것이 간신(奸臣)정도전(鄭道傳)의 별호인데, 신이 어찌 그것을 본받음으로써 스스로 더럽히겠습니까. 간당의 무리들이 신의 죄를 조작하고 얽어서 거리에 방을 붙이고 혹은 모함하는 소를 올려, 마침내는 사람을 사주하여 무고하여 반드시 죽이려고 하니, 하찮은 이 몸이 어떻게 스스로 밝힐 수 있겠습니까. 믿는 것은 오직 임금뿐입니다.” 하였다.
156. 영경이 공초하기를, “아무 해 이후부터는 역적과 서로 통한 일이 없다.” 하므로, 임금은 역적이 영경에게 보낸 편지 두어 장을 내리면서, “이것이 아무 해 이후에 서찰인데 어찌 속이느냐.” 하니, 영경이 아뢰기를, “노병으로 혼미하여 처음에는 생각이 잘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은 실상 인편도 없어서 답장 한 일은 없습니다.” 하니, 정철이 아뢰기를, “노인이 혹 잊기도 하려니와 만약 역적의 문서 중에 그의 답서가 없으면 거짓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여, 영경은 드디어 형을 면하게 되었다. 《일월록》 《노서집》
청점
157. 임금이 또 시(詩) 한 수를 국청에 내려 보내면서 이르기를, “영경의 상자 속에 이런 시가 있는데 스스로 지은 것인가. 그 시 끝 구에
우계(牛溪 성혼의 호)에서의 하룻밤에 호랑이한테서 바람이 나고 / 牛溪一夜風生虎
오얏나무 뿌리는 머리 기른 중에게 흔들리네 / 仙李根搖有髮僧
하였는데, 이것이 무슨 시인가.” 하였다. 《부계기문》
청점
158. 영경이 진술하기를, “신은 본래 글씨를 잘 못쓰거니와, 지금 이 시를 보건대 글씨체가 어떤 사람의 것이며, 어느 때에 이 시를 보았었는지 아득하여 기억나지 않습니다. 또한 신은 평생에 시를 모르고, 또 시에 관한 것을 즐기지도 아니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이 지은 것이겠습니까. 역변이 일어난 뒤로 사람들이 모두 문서를 없애며, 또 역적의 당에 최삼봉이란 자가 있다는 풍설을 들은 지 이미 두어 달이 되었으나, 신은 범한 것이 없으므로 마음이 담담하여 문서를 불사르지 아니하고 안심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신이 아는 사람으로는 오직 이로(李魯)가 시에 능하여 다른 사람의 시를 말하기를 좋아하므로 혹 이 사람이 어디서 듣고 전하여 보낸 것이나 아닌가 하였었는데, 지금 그 글씨를 보니 이로가 쓴 것도 아닙니다. 역적과 서찰을 통한 일에 대하여서는, 신이 처음 진술할 때에는 전혀 기억이 없으므로 아울러 아뢰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역적이 이발과 같이 와서 신을 본 일은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인데도 오히려 숨기지 아니했는데, 어찌 이 한 장의 서찰을 꺼려서 스스로 임금을 속이는 죄를 범하겠습니까.
조정의 일을 탐지하였다는 죄목을 물으신 데 대해서는 신이 조정의 일을 탐지하려 했던 것이 아니옵고, 평상시의 말이 능히 남의 비위에 맞도록 순하지 못하여 미움을 받아 왔으므로, 항상 구설이 많은 것을 근심하여 다만 신을 미워하는 말썽들을 알고자 하였던 것 뿐입니다. 계미년에 이이(李珥)가 논박을 당하였을 때 어떤 자는 그것이 신이 한 짓이라고 하며, 신이 그때에 세 번이나 서울에 왔었다고까지 말하여 평생에 헛되게 비방을 받은 일이 적지 않으므로, 세상사람이 나를 비방하는 말을 알고자 하였습니다.또한 지금 신은 자식을 잃은 지 14년에 음식을 전폐하고 술로만 날을 보내며, 조석으로 죽기를 기다리는 중인데 어찌 조정의 일을 알고자 하였겠습니까. 신이 들으니 금년에 서울 안에는 여러 가지 헛된 소리가 전파되어 안민학의 무리가 반드시 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하므로, 신은 그 말을 상세히 듣고자 했던 것입니다.
또 남의 죄를 풀어 나오게 하도록 청탁하였다는 말은 기묘년간에 한 고을에 사는 선비들이 세력 부리는 토호(土豪)로 몰려서 불측한 죄에 빠졌는데, 실은 이들은 모두가 겨울에는 솜옷 한벌로, 여름에는 삼베옷 한벌로 지내는 자들로서, 결코 토호가 아닌데도 사람에게 미움을 받아 그 지경에 빠졌으므로 신이 이들을 위하여 서찰을 통하였던 것입니다.또 아우의 벼슬을 구하여 얻었다는 것은 신이 형제가 궁하여 선조의 제사조차 받들지 못할 지경이므로 아우를 이웃 고을 수령이라도 되게 함으로써 제사를 끊지 않으려 하였던 것이니, 이것은 만 번 죽어도 속죄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입부(立夫)는 정언신의 자이며, 소재(蘇齋)는 노수신의 호입니다. 신이 이 사람들과는 다만 서로 알 따름인데, 어찌 감히 이들로 신의 소굴을 삼았겠습니까.” 하였다.
159. 30일에 최영경이 진술한 문서를 올렸더니, 전교하기를, “최영경과 김영일(金榮一) 등을 석방하라.” 하였다.
160. 그날 승정원 이흡(李洽)ㆍ이상길(李尙吉)ㆍ구성(具宬) 에서 아뢰기를, “최영경은 속이고 괴이하며 음흉하고 사특한 사람으로, 평소부터 정여립ㆍ이발ㆍ이길ㆍ정언신형제들과 결탁하고 윤기신(尹超莘)ㆍ김영일(金榮一)의 무리를 심복으로 삼고서, 조정의 동정과 정사의 득실을 서로 통하여 간여하지 않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역변이 나기 전에 여립이 멀리 지경을 넘어 영경의 집까지 찾아가서 서로 친밀히 결탁한 일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인데도 영경은 잡혀와서 감히 진술하기를, ‘일찍이 여립과는 알지도 못했다.’ 하였고, 또 ‘서찰도 통한 적이 없다.’ 하였으나, 미처 없애지 못한 역적의 편지 한 장으로 역적과 친한 자취를 능히 다 감추지 못하였으니, 비로소 하늘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물며 그 아우도 사사로이 몰래 시국에 대한 일을 연락한 죄로 마침내는 곤장을 맞아 죽었고, 윤기신도 방금 같은 죄로 형을 받고 있는데 영경만을 갑자기 석방하게 되었으니, 청컨대 다시 국문하여 법에 의해 죄를 정하고 김영일은 먼 곳으로 귀양 보내소서.” 승지 중에서 구성(具宬)이 먼저 주장하였다. 하니, 답하기를, “영경을 다시 국문할 것 없고, 영일도 먼 곳에 귀양 보낼 것 없다.” 하였다.
161. 일설에는, “영경이 ‘역적을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므로 임금이 그를 정직하지 않다고 여기니, 정철이 신문하기를 청하였는데, 이에 임금은, ‘처사(處士)에게 형을 더할 수 없다.’ 하고 석방했다.” 하였다. 《부계기문》
161. 그때 정철이 아뢰기를, “영경의 일은 조금도 단서가 없을 뿐더러 신이 평소에 풍모와 절조를 숭상하였습니다. 영경은 효도와 우애로 이름이 나서 영남 선비들의 공론이 극히 추존하고 복종하는 터이니, 역모에 참여했을 까닭이 없습니다.” 하였던 바, 임금이 이르기를, “나도 그가 저의 아우에게 보낸 서한을 보고 과연 우애가 있는 사람으로 여겼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영경이 지었다는 시는 저도 전에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것은 전에 어떤 자가 서울 종루에 익명으로 써 붙였던 시이니, 영경이 지은 것이 아님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것은 분명히 영경의 시다. 그러나 우선 형은 멈추라.” 하고 조금 뒤에는, “놓아 보내라.” 하였다.전교하기를, “영경이 스스로 처사라 하며 몸을 산림에 묻고 있으면서도 권세있는 자들과 연락하여 멀리 앉아서 조정의 권력을 잡고, 그 아우가 글을 모르는 자인데도 백성을 다스리는 수령자리를 구해 시키려 하였고, 또 조보(朝報)를 구해 보려고 몹시 힘썼다 하니, 처사가 과연 이러할 수 있겠는가. 하늘 그물이 넓어서 제가 도망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이에 사간원에서 다시 국문하기를 청하였고 사헌부에서는 멀리 귀양보내기를 청하였다. 《일월록》 《노서집》. 승정원과 사간원에는 구성(具宬)ㆍ이상길(李尙吉)이며, 사헌부에는 집의 송상현(宋象賢)ㆍ장령 장운익(張雲翼)이 주계에 참여하였다.
162. 유홍(柳泓)ㆍ황정욱(黃廷彧)ㆍ구사맹(具思孟)ㆍ홍성민(洪聖民)ㆍ남언경(南彦經)은 정철과 세력을 의지하는 사이요, 백유함(白惟咸)ㆍ구성(具宬)ㆍ장운익(張雲翼)ㆍ황혁(黃赫)ㆍ이흡(李洽)ㆍ유홍진(柳洪辰)은 정철의 주구 노릇을 하는 자이고, 성격(成格)ㆍ이춘영(李春英)ㆍ송익필(宋翼弼)ㆍ송한필(宋翰弼)은 정철의 심복이다.우계와 율곡 두 분은 사림의 영수로서 학자들이 스승으로 삼아서 유학(儒學)을 일으키는 데 자못 공이 있으나, 다만 자기와 친한 이에게만 너무 편벽하였기 때문에 정철에게 미혹을 당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정철을 옹호하여 주니, 정철도 그것을 믿고서 조금도 꺼려하거나 두려워함이 없게 되어 최처사를 죽이기에 이르러도 한마디의 말도 아니하였다. 《괘일록》
163. 9월 9일에 사간원의 아룀에 답하기를, “최영경이 지경을 넘어서 역적과 상종했다는 말은 어디서 나온 말인가. 말의 근거를 자세히 아뢰라.” 하였다.
164. 10일에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역적이 영경에게 보낸 서찰에, ‘두류산(頭流山)에서의 약속’이라는 말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평소에 친밀했던 것이 의심할 바 없고, 역적이 영경을 와서 보았다는 것은 판관 홍정서(洪廷瑞)가 도사 허흔(許昕)에게 말한 것입니다.” 하니, 즉시 명하여, 홍정서와 허흔과 최영경을 잡아 가두었다. 영경이 진술하기를, “신에게 생기는 화의 단서는 지나간 병인ㆍ정묘년간입니다. 그때 이이가 출세하자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말하기를, ‘옛날 어진 사람이 다시 나왔다.’ 하고 좋아하였으나, 신은 홀로, ‘그렇지 않다.’고 웃었더니, 그 뒤에 혹자가 신을 가르켜 선견지명이 있다고 하여 이 때문에 이이의 신에게 대한 분노가 극도에 이르렀습니다.이에 그 친구들이나 문생들 중에 청류(淸類 동인을 가르킴)에 용납되지 못하는 자들이 신을 원망하여 거짓 비방의 말을 만들어서 거리마다 방을 붙였고, 마침내는 서울과 지방에서 말을 합쳐서 형적도 없는 것을 꾸며냄이 이 지경으로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역변이 나자 집집마다 서찰을 다 불에 던져 태웠으나, 신은 삼봉(三峯)에 대한 말을 들은 지가 3, 4삭(朔)이 지났으나 마음이 담담하므로 무릇 잡문서(雜文書)도 불에 태우지 아니하였습니다.” 하였고, 허흔의 진술에는, “경상 감사 김수(金晬)에게서 들었다.” 하므로, 즉시 승정원에 명하여 김수를 불러다가 물었더니, 김수는, “진주 훈도 강경희(康景禧)에게 들었다.” 하였고,경희는, “홍정서에게서 들었다.” 하고, 정서는, “정홍조(鄭弘祚)에게서 들었다.” 했다. 정서와 홍조에게는 한 차례의 형을 내린 뒤에 놓아 보냈고 영경은 옥에서 죽었다. 《기축록》
165.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의금부가 죄인 단속을 엄히 하지 못하고, 최영경이 옥중에서 스스로 자살하도록 두었으니, 의금부 담당 낭청을 파면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166. 의금부 도사 강종윤(康宗允)이 죄인 보살피기를 조심히 하지 못했다 하여 국청에서 아뢰어 파면시켰다.
167. 정홍조(鄭弘祚)가 잡혀 들어오던 날 영경이 즉시 죽었으므로, 사람들이 그가 겁나서 죽었는가 하고 의심하였다. 《석실어록(石室語錄》
168. 일설에는 “영경이 진술하기를, ‘진주 판관 홍정서는 관리로서 인심을 잃은 일이 많았으므로 신은 그 위인을 비루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자가 여러 번 와서 보기를 청했으나 보지 않았더니, 정서가 형적도 없는 말을 만들어서 퍼뜨렸습니다. 신이 병으로 문 밖에 나다니지 않은 지 오래였는데 7백리 밖의 여립과 어떻게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하였다.국청에서 정서를 잡아오기를 청하니 정서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하여 감관(監官) 정홍조에게 말하기를, ‘이 말은 여립에게 들었는데 여립은 너한테 들은 것이라 하니 숨기거나 기피하지 말라.’ 하니, 홍조가 크게 놀라면서,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 꿈에도 듣지 못한 말을 가지고 어찌 나한테까지 미치게 하려고 드는가.’ 하였다. 이에 정서가 말하기를, ‘내가 여립에게서 들은 말은 너한테서 들은 것과 다름이 없으니, 너는 나하고 화되는 일이나 복되는 일이나 같이 해가면 부귀를 같이 누릴 것이다.’ 하였으나, 국문 받을 때에 홍조는 말하기를, ‘저의 집은 영경의 집과 60리나 떨어져 있으니, 비록 이런 일이 있었다 한들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최영경은 문을 닫고 나오지 아니하여 이웃에서도 그 동정을 모르거늘, 하물며 먼 곳에 있는 사람이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홍조는 두 차례의 형을 받고 풀려 나왔다. 정서는 반좌율(反坐律)에 걸릴 것을 알고 영경에게 독주를 먹여 즉사하게 하고 정서는 죽음을 면했다.” 하였다. 《괘일록》
169. 영경이 옥에서 병이 들자 위관(委官)이 의원을 보내서 진찰하게 하였더니, 영경은 팔을 천천히 오그리면서, “이 병은 위관의 힘으로 다스리지 못한다.” 하고 치료를 거부하였다. 그때 임금이 영경의 병이 위독함을 듣고 형을 맡아 보던 낭관을 파면하라고 명하였다. 일찍이 영경은 비록 오랫동안 옥에 있었으나 항상 단정히 꿇어 앉아 기대는 일이 없었는데, 하루는 기색이 평일처럼 양양하더니 밥을 먹고난 후에 갑자기 신기(神氣)가 나빠져서, 같이 갇혀 있던 박사길(朴士吉)의 무릎을 베고 누으니, 곁에 있던 사람들도 다 놀랐다.이에 가족이 와서 병세를 시험하려고 글씨를 한 자 써 달라고 하니, 《괘일록》에는, “제자들이 와서 앞으로 처리할 일을 말해 달라고 청하였다.”고 쓰여 있다. 영경이 조용히 일어나 정(正)자를 크게 썼는데 글자 획이 비뚤어졌다. 사길이 돌아보면서, “공은 이 자를 아는가.” 하고 조금 있다가 죽었는데, 그날은 9월 8일이었다. 〈수우행장(守愚行狀)〉
170. 일찍이 적당이 모두 말하기를, “역적 모의할 때에 길삼봉이 상장군이 되고 정팔룡과 정여립은 그 다음이 된다.” 하였으므로 나라에서는 삼봉이 있는 곳을 찾았던 바, 각 도에서 삼봉이라고 하여 잡아 보낸 사람이 전후에 걸쳐 여럿이었는데, 그때 적당인 이기(李箕)와 이광수(李光秀) 등이 말하기를, “전주 길삼봉의 집에 갔더니 삼봉은 나이 60세쯤 되고 낯은 쇠빛이고 살이 쪘더라.” 하였으며, 혹은 말하기를, “삼봉은 나이가 30세인데 키가 크고 낯이 여위었다.” 하기도 하며, 또 혹은 말하기를, “삼봉은 나이 50세쯤 되고 수염은 길어서 허리에까지 내려오며 낯은 희고 길다.” 했다.그 후에 김세겸(金世謙)이 말하기를, “삼봉은 상장군이 아니요 역적의 졸병인데, 진주에 살며 나이는 30세쯤 되고 하루에 3백리 길을 걷는다.” 하였고, 또 한 적당은 말하기를, “삼봉은 본래 나주(羅州) 사족(士族)이다.” 하였고, 최후에 박문장(朴文長)이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삼봉의 성은 길가(吉哥)가 아니고, 진주 사는 사노(私奴)로서 최삼봉이다.” 하였다. 얼마 뒤에 외지에 뜬 소문이 분분하여 혹 말하기를, “삼봉은 진주(晋州)에 사는데 나이 60세이고, 낯은 쇠 같으며 수척하고, 수염은 길어서 배에 내려가고 키가 크다.” 하고 또는 말하기를, “삼봉은 곧 최영경이다.” 하였다.
또 어떤 자는 말하기를, “1년 전에 어떤 선비가 전주(全州) 만장동(萬場洞)을 지나다가 보니 적당 만여 명이 모여서 활을 쏘고 있는데, 영경이 수석에 앉고 여립은 다음에 앉아 있더라.” 하였다. 이항복이 이 말을 듣고 괴이하게 여기고 의심하여 말하기를, “여러 적의 진술이 각각 서로 같지 아니하고, 나이 늙고 젊음과 얼굴과 몸의 비대하고 야윈 것이 모두 판이하게 다르나, 지금 여러 적들의 공초 중에서 영경의 말과 비슷한 몇 가지 말을 맞추어, 이로써 한 놈이 공초하는 대로 그것이 곧 최영경이라 하니, 이것은 외간에서 덮어놓고 낭설로 전하는 것이 아니다.반드시 국청에서 다루는 옥사의 곡절을 밝게 아는 자가 교묘히 기틀과 함정을 만들어 영경을 몰아넣어서 삼봉으로 만들려고 먼저 낭설을 퍼뜨려서 사람들의 귀에 익게 한 것이다.” 하였다.
영경이 옥에 갇힌 후부터 이항복이 문랑(問郞)이 되고 정철이 위관이 되었다. 하루는 정철이 국청 뒷칸에서 잠깐 쉬다가 항복을 불러 영경의 옥사를 물으니, 항복이 말하기를, “이 옥사가 시작된 지 이미 해가 지났는데도 어디 한 사람이나마 영경을 지목하여 삼봉이라고 한 자가 있었는가. 지금 무단히 길에서 들은 말로 처사를 잡아 가두었다가 불행히 죽게 되면 반드시 공론이 있을 것이니, 그때에 가서 대감이 그 책임을 피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정철이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내가 평소에 영경과 비록 의논은 서로 같지 아니하였으나 어찌 해칠 마음이야 있었겠소. 이 말은 전라도에서 와전된 데서 나왔으니, 내게 무슨 상관이 있겠소.” 하니, 항복이 말하기를, “영경을 대감이 모함했다는 것이 아니라 근거 없는 말인줄 알면서도 그대로 보고 구하지 않으니, 어찌 그것이 위관의 사체(事體)라 하겠소. 역적의 명목으로 옥에 가득찬 죄수를 위관이 감히 하나하나 억울함을 씻어줄 수는 없으나, 영경으로 말하면 죄수 중에도 가장 명목을 붙일 수 없는 처지일 뿐만 아니라, 또 이 사람은 효도하고 우애하는 행실이 있는 처사(處士)인데 어찌 구원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정철이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힘을 다하여 구원해 보리라.” 하였다.
재국(再鞫)하던 날 영경은 시국에 대한 것을 대략 진술하고 또 성우계(成牛溪)와 의논이 다른 연유를 언급하였다. 국문이 끝난 후 정철은 국청 뒷칸에서 항복을 불러보고 발칵 성을 내며, “군은 영경의 지금 공초를 보라. 이게 무슨 말인가. 자네가 좋아하는 최공은 매우 좋지 못한 사람이네.” 하니, 항복이 웃으며, “내가 영경과 더불어 평생에 안 일이 없으니, ‘자네가 좋아하는 최공’이란 말은 당치 않습니다. 대감의 기분이 좋지 못한 것은 영경이 말한 시국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하니, 철은 “그렇다.” 하였다.이에 항복이 또 말하기를, “그러면 대감은 최영경을 도무지 모르시는 것이오. 영경이 시속 사람과 다른 것은 그 논의가 같지 않은 데 있는 것이고 이것은 재국(再鞫)하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엄한 국문 때문에 요행으로 죄를 면할 것을 바라서 전일에 가졌던 자기의 소견을 다 상실하고 억지로 아첨의 말을 한다면 이것을 어찌 참[眞] 최영경이라 할 수 있겠소.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은 논할 것 없고 다만 영경이 삼봉인가 아닌가를 따질 뿐이며 논의가 같고 다른 것이야 옥사와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하니, 정철이 흔연히 말하기를, “공의 말이 정히 옳다. 내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었다.” 하였다.
뒤에 또 말하기를, “내가 이미 영경을 구해 낼 묘책을 얻어서, 차차(箚子)도 초하여 놓았거니와, 또 만약 형벌로 문초하라는 명이 내린다면 유성룡(柳成龍)과 약속하고 연명으로 구원하면 일은 될 것 같다.” 하였다. 이에 항복이 묻기를, “유정승과 과연 이런 약속이 있었습니까.” 하니, 정철이 답하기를, “금석같이 굳게 약속이 되었다.” 하였다. 그 후에 항복이 공적인 일로 성룡의 집에 갔다가 영경의 원통함을 극력으로 말하니, 성룡은 다만 두어 말로 답할 뿐이었다. 항복이 또, “대신으로서 구해주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성룡은, “내 같은 자가 어찌 감히 구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항복이 누누히 극진하게 말하니 성룡이 말하기를, “사인(舍人)은 이와 같이 너무 강개하지 말라. 세상 인심이 심히 험하니 부디 말을 삼가야 한다.” 하였다. 항복이 말하기를, “나는 영경과 한 번 만나본 교분도 없는데 누가 감히 의심하겠습니까.” 하니, 성룡이 말하기를, “세상은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다. 일이 번져 가면 어찌 벗어날 수 있겠는가. 천금같은 몸을 천만 소중히 하라.” 하였다. 《백사집(白沙集)》 《기축기사(己丑記事)》
171. 허미수(許眉叟) 목(穆)이 지은 〈최수우유사(崔守愚遺事)〉에 이르기를, “《백사유고(白沙遺稿)》에 《기축록》이 있는데, 수우 선생의 원통한 사적이 자세히 실려 있다. 뒤에 그 자손들이 집권자의 말을 듣고 감추니 가짜 《기축록》이 세상에 떠돌았다. 생각건대 이런 글은 보통 문자가 아닌데 어찌하여 강릉판(江陵版)에는 빠지고 진주(晋州)에 와서 추간(追刊)하게 되었을까.이 때문에 일부(一部) 사람의 의심을 면하지 못한다. 그런데 계곡(谿谷 장유(張維)의 호)ㆍ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의 호)ㆍ연양(延陽 이시백(李時白)의 봉호(封號))등 여러 사람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아닌데도 어찌 한 사람 정송강만을 위하여 그들의 스승 이항복(李恒福)이 하지 아니한 글을 저술하여 스승을 저버렸던가.” 하였다. 《노서집》
172 선산 사람 김종유(金宗儒)는 성혼의 제자였다. 영경이 잡혔을 때, 영경의 제자들이 종유를 성혼에게 보내서 영경의 죄를 풀어 나오게 해주기를 빌었더니, 성혼은 잠잠히 생각하다가 한참만에 말하기를, “그 사람은 성질이 너무 편벽되고 또 삼봉이라고 호를 하였다.” 하니, 종유가 나와서 혀를 차면서, “수우(守愚)가 죽는구나.” 하였다. 대개 이 옥사는 정정승 철이 주장하였으므로 영경의 제자들이 성혼을 허물하였던 것이다. 《괘일록》
173. 사족(士族)이사렴(李士濂)은 영경의 5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영경에게 수학했던 자이다. 영경이 죽자 그는 영경의 시체를 거두는 데 지성을 다하였다.《괘일록》
174. 정철이 일찍이 국청에서 영경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저 놈이 내 목을 이렇게 찍으려 한다.” 하면서 손으로 자기 목을 치는 형용을 하고 크게 웃으니, 유성룡이 말하기를, “이곳은 농담할 장소가 아니오.” 했다. 이에 정철이, “사람들이 다 이현(而見 유성룡의 자)은 근신(謹愼)한 군자이고 계함(季涵 정철의 자)은 허망(許妄)한 군자라 하는데 근신한 것과 허망한 것은 같지 아니하나 군자임에는 한 가지요.” 하고, 이산해를 돌아 보면서, “나의 이말은 농담이 아니오. 뒷날 나더러 영경을 얽어서 죽였다고 할 때의 구실을 삼으려는 것이오.” 하니, 성룡은 미소를 지었고, 산해는 아무말 없이 묵묵히 앉아 있었다. 《혼정록》
175. 영경의 문서 중에서 이황종(李黃鍾)의 서찰이 나왔는데, 그 내용에 당시의 일을 극히 비방하고 심지어는 역적의 사건을 역모가 아니고 사림(士林)의 ‘사화’라고 까지 했으므로, 옥사가 더욱 중해져서 드디어는 이황종을 잡아다가 고문하여 죽이기에 이르렀다. 《백사집》 《일월록》
176. 영경의 아우 여경(餘慶)은 음관(蔭官)으로 서울에 있었는데 언문으로 조정의 시비를 논하여 영경에게 보낸 편지가 있었다. 임금이 보고 미워하여 단 한 번의 혹독한 형벌을 받고 죽었다. 《일월록》. 《괘일록》에는, “신녕 현감(新寧縣監) 최여경이다.” 했다. ○《석실어록》에는, “음관은 선공감역(繕工監役)을 말한다”고 했다.
177. 10월에 이발 형제의 일을 처리하기 위하여 대신과 의금부 당상을 불러서 의논하여 아뢰라고 명하였다. 그날 2품 이상의 관원이 모여서 비밀히 의논하여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발과 이길ㆍ이급 등을 법에 의하여 죄를 정할 것은 의심할 것도 없거니와 여러 의논도 이와 같으니, 마땅히 의논에 따라 가산(家産)을 몰수하라. 이같이 하지 않으면 역적을 다스리는 법을 엄하게 준수하지 못하는 것이 되니, 이발ㆍ이길ㆍ이급의 3형제와 백유양(白惟讓)ㆍ조대중(曺大中)을 아울러 적몰하라.” 하였다.
178. 그때 장령 장운익(張雲翼)이 아뢰기를, “동인들이 항상 서인이 척리(戚里)와 결탁한다고 배척하였는데, 지금 그들이 역적과 결탁한 죄는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 청컨대 3족(三族)을 베는 법을 쓰소서.” 하였다. 이에 임금이, “장령의 말이 옳다.” 하니, 수찬 허성(許筬)이 아뢰기를, “사람을 법으로만 다스릴 수도 있겠지만 어찌 성조(聖朝)에서야 진(秦) 나라에서 쓰던 가혹한 법을 쓸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으므로 그 의논이 중지되었으나, 참혹한 형벌을 쓰게 되기는 장운익에게서 비롯되었다. 《괘일록》
179. 이황종(李黃鍾)이 지성으로 영경을 섬기더니, 영경이 잡혀간 뒤에는 밤마다 목욕하고 영경이 놓여 나오기를 하늘에 기도하였다. 그가 누런 종이에 쓴 서간이 영경의 문서에서 나왔는데, 그것은 수년 전에 조보(朝報)를 보낼 때 같이 보냈던 것으로서, 그 속에 쓰였기를, “김자앙(金子昻 김수(金晬)의 자(字))이 부제학이 되고 홍시가(洪時可 성민(聖民))가 경상 감사가 되었으니, 세상 일은 다 알 수 있는 것이오.” 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정철에게 미움을 받아서 마침내 죽었다. 《괘일록》
180. 이언길(李彦吉)이 김제 군수로 있을 때, 환상곡(還上穀) 10여 석을 여립에게 주었고, 진안 현감 민인백(閔仁伯)은 언길에서 보고하고서 100여 석의 곡식을 여립에게 주었는데, 이 때문에 모두 죽음을 당했다. 《괘일록》
181. 신식(申湜)의 이름이 여립의 문생록(門生錄)에 있었으므로 잡혀와서 진술하기를, “일찍이 역적과 한 번도 서찰을 통한 적이 없습니다.” 하였더니, 임금이 ‘식(湜)’이라고 이름만이 쓰인 서찰을 한 장 보이니, 신식이 아뢰기를, “그것은 남도에 사는 정식(鄭湜)이란 사람의 것일 것입니다.” 하므로 임금은 또 신식이 상중(喪中)의 여립에게 상례(喪禮)를 문의한 편지로서 성명이 다 구비된 것을 한 장 보이고 형벌을 한 차례 가하였다. 《일월록》
182. 김상헌(金尙憲)이 심양(瀋陽)에 있을 때 신식의 아들 득연(得淵)과 같이 있었는데, 득연이 힘써 말하기를, “정송강(鄭松江)이 부친과 서로 사이 좋게 지내자고 했으나 부친이 답을 안하였더니, 그 때문에 죄를 얽어 씌웠다.” 하였으니, 심히 가소로운 일이다. 《석실어록》
183. 한백겸(韓百謙)은 이진길(李震吉)의 시체를 거두어 주고, 김빙(金憑)은 역적의 시체를 찢을 때에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대간의 탄핵으로 각기 한 번씩 형을 받았다. 김빙은 곤장을 맞아 죽었다. ○ 한백겸은 민순(閔純)에게 수업하여 벼슬이 호조 참의에 이르렀다.《괘일록》
184. 좌랑 김빙은 여립과 사이가 좋지 않아 틈이 있었다. 바람병으로 현기가 있을 뿐만 아니라 차가운 날 바람을 쐬면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여립의 시체를 찢을 때 백관이 둘러서서 보게 되었는데, 그는 여립과 좋은 사이가 아니었는데도 마침 날이 차서 눈물이 흘러 나오므로 수건으로 자주 닦았다. 김빙과 전부터 사이가 나쁘던 백유함(白惟咸)이 이를 보고 말하기를, “김빙이 여립의 죽은 것을 보고 슬퍼서 울었다.”고 죄를 얽어서 죽었다. 이로부터 조정이나 민간에서 유함을 흘겨 보았다. 《부계기문》
185. 이때 이발과 백유양(白惟讓)ㆍ정언신 등이 적당의 진술에서 나왔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대간의 아룀과 죄인의 집에 있던 서찰에서 나왔지만, 김빙의 죽음만은 더욱 원통한 것이었다. 《혼정록》
186. 일찍이 정철이 역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고양(高陽)에서 서울로 올라왔을 때, 이귀(李貴)가 신경진(辛慶晋)과 같이 정철에게 가서, “옥사를 공평히 하여 인심을 진정시키시오.” 하며 간절히 말하고, “돌아간 스승(율곡)이 평일에 대감을 소중히 아끼셨는데, 오늘날 사류(士類)의 기대를 저버리는 행동이 있다면 반드시 그 누(累)가 돌아간 스승에게 미칠 것입니다.” 하니, 정철이 답하기를, “군들의 말이 옳다. 내가 마땅히 힘을 다해 보리라.” 하였다.얼마 뒤에 정철이 정언신을 대신하여 우상이 되었는데, 그때는 이미 옥사가 죄없는 사람에게까지 널리 번져가는 형편이어서, 정철이 진정시키지 못하고 낭패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두어 달 동안 이귀가 가보지 않았더니, 한번은 정철이 노상에서 이귀를 만나자 서리(書吏)를 보내서 꼭 만나기를 청하였다. 이에 이귀는 성문준(成文濬)과 같이 가서 시국의 일을 말하면서, “대감이 우리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여 이에 이르렀으니 후회한들 어찌하겠습니까. 오직 돌아간 스승에게 누가 미칠 것이 한스럽습니다.” 하니, 정철도 이귀의 말을 옳다고 하였으나 이미 어찌할 수 없었다. 《연평일기(延平日記》
청점
187. 임인년 7월 조강(朝講)에서 병조 판서 신잡(申磼)이 아뢰기를, “매양 아뢰려 하였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역적의 옥사 때에 정철이 비밀히 아뢰기를, ‘적의 말이 호남의 길목을 막고 해서(海西 황해도)의 어귀를 끊은 후에 영남으로부터 의병이 일어나면 나라는 위태할 것이라 합니다.’ 하니, 《괘일록》에, “영남의 대적(大賊)은 최영경을 가르킨다.” 하였다. 전하께서 작은 종이에 글을 써서 답하기를, ‘이 말을 들은 자는 반드시 이 모의에 참여하였을 것이다.누가 이것을 고변했느냐. 즉시 알아서 아뢰라.’ 하므로, 신이 문사랑(問事郞)으로서 봉서를 가지고 정철의 앞에 가서 떼어보니, 《괘일록》에는, “정철이 백유함과 술을 마시다가 놀라서 술잔을 떨어뜨렸다.” 하였다. 정철이 매우 민망스러워 하며 대답할 바를 모르다가 말하기를, ‘이런 말은 사람마다 다 할 수 있는 말이다. 자네도 역시 들었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나는 들은 바 없다.’ 하였더니, 정철이 말하기를, ‘이 말은 기효증(奇孝曾)과 이선경(李善慶)이 말하므로 나도 들었다.’ 하였습니다.신은, ‘이런 중대한 일은 대감이 궐내에 들어가서 비밀히 아뢰지 않을 수 없다.’ 했더니, 정철이, ‘글로 아뢸 때에 이르러서는 기효증ㆍ이선경의 이름은 쓰지 않고 이항복의 이름을 써서 바쳤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항복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정철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지금 내 이름을 써 넣어서 바쳤다 하니, 민망한 일이다.” 하였다. 《은대일록(銀臺日錄》
188.《괘일록》에는, “정철이 말하기를 ‘충의위(忠義衛)로 있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고변이 들어왔으므로 곧 잡아다가 두 차례나 형을 가했더니, 죽었다.’ 하였는데, 충의위는 즉 정철의 첩인 의녀(醫女) 선복(善卜)의 정부이다.” 하였다.
[주D-001]사마광(司馬光)이 …… 직필(直筆)이다 : 기년(紀年)은 정통(正統)인 황제의 연호를 기원(紀元)으로 하여 기산한 햇수를 말하는 것이다. 한(漢) 나라가 망한 뒤에 삼국(위ㆍ오ㆍ촉한)이 정립(鼎立)하였는데, 중원(中原)을 차지하고 한 나라를 정복한 것은 위(魏) 나라이나, 한 나라의 종족(宗族)은 촉한의 유비(劉備)인지라, 위와 촉한의 두 나라 중 어느 나라가 정통국가(正統國家)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어 왔다.《통감》을 지은 사마광은 「위」를 정통으로 삼아서 황초년호(黃初年號)를 기년으로 하였고, 그 뒤의 주자(朱子)는 유비를 정통이라 하여 《강목(綱目)》을 지으면서 「촉한」의 연호를 기년으로 삼았다. 여기서 정여립의 말은 조조(曹操)의 부자(父子)가 진정한 제왕이며, 역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주D-002]왕촉(王蠋) : 제(齊) 나라의 충신인데, “충신 불사 이군(忠臣不事二君), 열녀 불경 이부(烈女不更二夫)”라는 말을 남기고, 연(燕) 나라에 항복하지 않고 목매어 죽었다.
[주D-003]유하혜(柳下惠)는 …… 아닌가 : 공자(孔子)와 같은 시대의 현인(賢人)인 유하혜(柳下惠)를 공자가 백이(伯夷)와 비교하여, “백이는 성인(聖人)의 청(淸)한 자요, 유하혜는 성인의 화(和)한 자이다.” 하였으므로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주D-004]육예(六藝) : 육경(六經)을 말하는 것이 원칙인데, 《주례(周禮)》에는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를 육예라 하였다.
[주D-005]궁할 때에 …… 기억했거늘 : 광무제가 임금이 되기 전에 적병에게 쫓겨 곤란을 당할 때에 풍이(馮異)가 두죽(豆粥) 한 그릇을 얻어 올렸다. 그 뒤 임금이 되어 장수들의 공을 말할 때에 광무제가 풍이에게, “호타하(滹沱河)의 보리밥과 무루정(蕪蔞亭)의 콩죽을 내가 어찌 잊으랴.” 하였다 한다.
[주D-006]권정례(權停禮) : 조정(朝廷)의 식전(式典)에 임금이 나오지 아니하였을 때 임시특례(臨時特例)로 허위(虛位)된 채 식전을 거행하는 것을 말하다.
[주D-007]진신(振紳) : 진신(振紳)은 홀(笏)을 꽂고 큰 띠를 드리운 사람들을 말하는 것으로 벼슬아치를 말한다.
[주D-008]번복하는 해 : 여기의 ‘번복’은 그 뒤 3년 만인 신묘년에 동인(東人)들이 다시 일어나 정철(鄭澈) 일당을 귀양보낸 것을 말한다. 그것은 신묘년에 양천회(梁千會)가 올린 소가 좋지 못하여 동인이 서인을 공격할 구실을 주었기 때문이다.
[주D-009]종로신(宗老信) : 편지할 때, 친숙한 처지에는 성(姓)을 쓰지 않고 이름만 쓰는 일이 있는데, 여기서는 정언신(鄭彦信)이 정여립(鄭汝立)에게 한 편지에 ‘종친(宗親)의 늙은이 언신’이라는 뜻으로 종노신(宗老信)이라 하였다.
[주D-010]전랑(銓郞)의 망(望) : 전랑은 이조의 낭관(郞官)이며, 망(望)은 오늘날의 후보와 같은 것이다. 당시에 특히 이조나 홍문관 같은 곳에서는 그 부내(部內)의 추천으로 망을 정하여 임금에게 결재를 구하였다.
[주D-011]역적의 …… 없다 : 《서경》에 있는 말로서, 죄를 다스릴 때 그 괴수만 죽이고 협박에 못이겨 따른 종범(從犯)은 다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D-012]사직이 …… 것이라 : 《맹자》에, “민(民)이 중하고 사직(社稷)이 다음이요, 사직이 중하고 임금이 다음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국가를 위해서는 임금을 처치하여도 좋다는 것이다.
[주D-013]선조(先朝 명종(明宗)) …… 고친 일 : 을사사화 때의 위사훈(衛社勳)을 선조(宣祖) 때에 삭제한 것을 말한다.
[주D-014]읍양진퇴(揖讓進退) : 선비들이 예절을 익힐 때에 읍(揖)하고 나아가며[進] 사양(辭讓)하고 물러가는[退] 것이니, 예를 들면 향음주례(鄕飮酒禮)ㆍ상읍례(相揖禮)와 같은 것이다.
[주D-015]동한절의(東漢節義) : 동한시대에는 선비들의 기풍이 절조와 의리를 숭상하여 맑은 이름을 주장하고 탁한 조정을 비방하는 것을 일삼았다가 간악한 환관(宦官)들에게 모함을 당하여 동한당고(東漢黨錮)의 화(禍)가 일어났다.
[주D-016]진송청담(晋宋淸談) : 진(晋)ㆍ유(劉)ㆍ송(宋) 나라 시대의 노장학파(老壯學派)들은 물론 선비들 사이에 ‘청담’이라 하여 세속을 초월한 맑고 고상한 이론만을 논하는 풍조(風潮)가 성행하여 세상의 실무(實務)를 등한히 하였으므로 마침내 외래 민족의 침임을 받아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주D-017]질제(質帝) : 후한(後漢)때의 어린 임금인데 조회때 양기(梁冀)를 보고, “그대는 발호(跋扈)한 장군(將軍)이로다.” 하여, 양기에게 시해를 당하였다.
[주D-018]두무(竇武) : 후한(後漢) 때 두태후(竇太后)의 아버지인데, 간악한 환관들을 죽이려 하다가 도리어 환관에게 해를 당하였다.
[주D-019]밀기(密記) : 비밀참서(秘密讖書)인데 이 참서에 정여립이 임금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던 것이다.
[주D-020]비간(比干) : 은(殷) 나라 때의 충신인데, 주왕(紂王)에게 바른 말로 간하였더니 주왕이, “내가 들으니 성인(聖人)의 심장에는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 하는데 그것을 보겠다.” 하고, 배를 갈라 죽였다.
[주D-021]반좌율(反坐律) : 지금의 무고죄(誣告罪)와 비슷한데, 무고죄와 다른 점은 무고한 사실과 같은 벌을 받는 것이다. 남을 죽을 죄로 무고하였으면 죽이고, 귀양보낼 죄로 무고하였으면 귀양보내는 것이다.
[주D-022]성인의 …… 것이며 : 공자의 ‘춘추필법(春秋筆法)’에 “앞 시대의 착한 사람을 한마디 말로 표창한 것은 그 사람에게 곤룡포(袞龍袍)보다도 영광스러운 일이며, 악한 사람에 대하여 한 마디 하는 말은 도끼보다 무섭다.” 고 하였다.
[주D-023]왕돈(王敦) : 진(晋) 나라의 반역자인데 그의 군사가 성공하지 못하고 패하자, 병이 들어 죽었는데 장사까지 지낸 뒤에 진 나라 조정에서 그의 송장을 파내어 목을 베었다.
[주D-024]하늘의 그물 : 《노자》에 “하늘의 그물이 넓어서 성긴 듯하면서도 빠뜨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죄를 짓고는 형벌의 그물을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주D-001]사마광(司馬光)이 …… 직필(直筆)이다 : 기년(紀年)은 정통(正統)인 황제의 연호를 기원(紀元)으로 하여 기산한 햇수를 말하는 것이다. 한(漢) 나라가 망한 뒤에 삼국(위ㆍ오ㆍ촉한)이 정립(鼎立)하였는데, 중원(中原)을 차지하고 한 나라를 정복한 것은 위(魏) 나라이나, 한 나라의 종족(宗族)은 촉한의 유비(劉備)인지라, 위와 촉한의 두 나라 중 어느 나라가 정통국가(正統國家)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어 왔다.《통감》을 지은 사마광은 「위」를 정통으로 삼아서 황초년호(黃初年號)를 기년으로 하였고, 그 뒤의 주자(朱子)는 유비를 정통이라 하여 《강목(綱目)》을 지으면서 「촉한」의 연호를 기년으로 삼았다. 여기서 정여립의 말은 조조(曹操)의 부자(父子)가 진정한 제왕이며, 역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주D-002]왕촉(王蠋) : 제(齊) 나라의 충신인데, “충신 불사 이군(忠臣不事二君), 열녀 불경 이부(烈女不更二夫)”라는 말을 남기고, 연(燕) 나라에 항복하지 않고 목매어 죽었다.
[주D-003]유하혜(柳下惠)는 …… 아닌가 : 공자(孔子)와 같은 시대의 현인(賢人)인 유하혜(柳下惠)를 공자가 백이(伯夷)와 비교하여, “백이는 성인(聖人)의 청(淸)한 자요, 유하혜는 성인의 화(和)한 자이다.” 하였으므로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주D-004]육예(六藝) : 육경(六經)을 말하는 것이 원칙인데, 《주례(周禮)》에는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를 육예라 하였다.
[주D-005]궁할 때에 …… 기억했거늘 : 광무제가 임금이 되기 전에 적병에게 쫓겨 곤란을 당할 때에 풍이(馮異)가 두죽(豆粥) 한 그릇을 얻어 올렸다. 그 뒤 임금이 되어 장수들의 공을 말할 때에 광무제가 풍이에게, “호타하(滹沱河)의 보리밥과 무루정(蕪蔞亭)의 콩죽을 내가 어찌 잊으랴.” 하였다 한다.
[주D-006]권정례(權停禮) : 조정(朝廷)의 식전(式典)에 임금이 나오지 아니하였을 때 임시특례(臨時特例)로 허위(虛位)된 채 식전을 거행하는 것을 말하다.
[주D-007]진신(振紳) : 진신(振紳)은 홀(笏)을 꽂고 큰 띠를 드리운 사람들을 말하는 것으로 벼슬아치를 말한다.
[주D-008]번복하는 해 : 여기의 ‘번복’은 그 뒤 3년 만인 신묘년에 동인(東人)들이 다시 일어나 정철(鄭澈) 일당을 귀양보낸 것을 말한다. 그것은 신묘년에 양천회(梁千會)가 올린 소가 좋지 못하여 동인이 서인을 공격할 구실을 주었기 때문이다.
[주D-009]종로신(宗老信) : 편지할 때, 친숙한 처지에는 성(姓)을 쓰지 않고 이름만 쓰는 일이 있는데, 여기서는 정언신(鄭彦信)이 정여립(鄭汝立)에게 한 편지에 ‘종친(宗親)의 늙은이 언신’이라는 뜻으로 종노신(宗老信)이라 하였다.
[주D-010]전랑(銓郞)의 망(望) : 전랑은 이조의 낭관(郞官)이며, 망(望)은 오늘날의 후보와 같은 것이다. 당시에 특히 이조나 홍문관 같은 곳에서는 그 부내(部內)의 추천으로 망을 정하여 임금에게 결재를 구하였다.
[주D-011]역적의 …… 없다 : 《서경》에 있는 말로서, 죄를 다스릴 때 그 괴수만 죽이고 협박에 못이겨 따른 종범(從犯)은 다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D-012]사직이 …… 것이라 : 《맹자》에, “민(民)이 중하고 사직(社稷)이 다음이요, 사직이 중하고 임금이 다음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국가를 위해서는 임금을 처치하여도 좋다는 것이다.
[주D-013]선조(先朝 명종(明宗)) …… 고친 일 : 을사사화 때의 위사훈(衛社勳)을 선조(宣祖) 때에 삭제한 것을 말한다.
[주D-014]읍양진퇴(揖讓進退) : 선비들이 예절을 익힐 때에 읍(揖)하고 나아가며[進] 사양(辭讓)하고 물러가는[退] 것이니, 예를 들면 향음주례(鄕飮酒禮)ㆍ상읍례(相揖禮)와 같은 것이다.
[주D-015]동한절의(東漢節義) : 동한시대에는 선비들의 기풍이 절조와 의리를 숭상하여 맑은 이름을 주장하고 탁한 조정을 비방하는 것을 일삼았다가 간악한 환관(宦官)들에게 모함을 당하여 동한당고(東漢黨錮)의 화(禍)가 일어났다.
[주D-016]진송청담(晋宋淸談) : 진(晋)ㆍ유(劉)ㆍ송(宋) 나라 시대의 노장학파(老壯學派)들은 물론 선비들 사이에 ‘청담’이라 하여 세속을 초월한 맑고 고상한 이론만을 논하는 풍조(風潮)가 성행하여 세상의 실무(實務)를 등한히 하였으므로 마침내 외래 민족의 침임을 받아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주D-017]질제(質帝) : 후한(後漢)때의 어린 임금인데 조회때 양기(梁冀)를 보고, “그대는 발호(跋扈)한 장군(將軍)이로다.” 하여, 양기에게 시해를 당하였다.
[주D-018]두무(竇武) : 후한(後漢) 때 두태후(竇太后)의 아버지인데, 간악한 환관들을 죽이려 하다가 도리어 환관에게 해를 당하였다.
[주D-019]밀기(密記) : 비밀참서(秘密讖書)인데 이 참서에 정여립이 임금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던 것이다.
[주D-020]비간(比干) : 은(殷) 나라 때의 충신인데, 주왕(紂王)에게 바른 말로 간하였더니 주왕이, “내가 들으니 성인(聖人)의 심장에는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 하는데 그것을 보겠다.” 하고, 배를 갈라 죽였다.
[주D-021]반좌율(反坐律) : 지금의 무고죄(誣告罪)와 비슷한데, 무고죄와 다른 점은 무고한 사실과 같은 벌을 받는 것이다. 남을 죽을 죄로 무고하였으면 죽이고, 귀양보낼 죄로 무고하였으면 귀양보내는 것이다.
[주D-022]성인의 …… 것이며 : 공자의 ‘춘추필법(春秋筆法)’에 “앞 시대의 착한 사람을 한마디 말로 표창한 것은 그 사람에게 곤룡포(袞龍袍)보다도 영광스러운 일이며, 악한 사람에 대하여 한 마디 하는 말은 도끼보다 무섭다.” 고 하였다.
[주D-023]왕돈(王敦) : 진(晋) 나라의 반역자인데 그의 군사가 성공하지 못하고 패하자, 병이 들어 죽었는데 장사까지 지낸 뒤에 진 나라 조정에서 그의 송장을 파내어 목을 베었다.
[주D-024]하늘의 그물 : 《노자》에 “하늘의 그물이 넓어서 성긴 듯하면서도 빠뜨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죄를 짓고는 형벌의 그물을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