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을 올리면서
삼국지 동이전 서(序) 첫머리를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서경(書經)에 ‘동쪽은 바다에 닿았고 서쪽은 사막에까지 이르렀다’하였으니, 구복(九服)의 제도(制度)
이내에 있는 것은 말할 수가 있으나,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황역(荒域) 밖은 여러 번의 통역을 거쳐야
이르게 되어, [한인(漢人)의] 발걸음이나 수레가 닿지 않기 때문에, 그 나라의 풍속이 중국과 다른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우(虞)나라로부터 주(周)대에 이르기까지 서융(西戎)은 백환(白環)을 바쳤고 동이(東夷)에서는 숙신(肅愼)의
조공이 있었으나, 모두 여러 해가 지나서야 도달하였으니 그 머나먼 거리가 이와 같다.』
위에 나와 있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황역(荒域)에 대해서는 그 아래에 다음과 같이 되어있다.
『공손연(公孫淵)의 부조삼대(父祖 三代)가 계속 요동(遼東)을 차지하자, 천자는 그 지방을 절역(絶域)으로
여겨 [공손씨(公孫氏)에게] 해외(海外)의 일로 위임시켰다.
그 결과 결국 동이(東夷)와의 관계가 단절되어 중국과 통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공손씨가 차지한 요동부터 황역으로서 황역밖인 고구려부터 부여쪽인 오늘날 만주쪽과 한반도 쪽의
사정은 여러번의 통역을 거쳐 그 뜻을 알 수 있었다는 사실, 그 나라의 풍속을 알수 없었다는 사실,
동이와의 거리는 여러해를 지나야 도착할 만큼 거리가 멀었다는 사실을 적어놓고 있다.
따라서, 동이전에 기록해놓은 것들은 여러번의 통역을 거치고, 동이의 풍속을 모르는 채 기록하고,
이미 여러 해를 지날 정도로 거리가 매우 먼 곳의 일을 기록하다보니 동이전의 기록은 사실과 다른 것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 미리 말하고 있다. 즉,
① 여러번의 통역을 거치기 때문에 통역의 오류가 발생하고,
② 풍속을 모르는 채 기록하였기 때문에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기록하여 기록의 부정확성이 발생하며,
③ 전달된 소식이 이미 여러 해를 지났기 때문에 시간상의 오류가 발생하고
④ 매우 먼 곳에서 전달된 소식이다 보니 사실의 왜곡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동이전을 비롯한 중국사서에 기록된 것을 마치 금과옥조 마냥, 무슨 절대적 진리인 양,
한자도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 자체인 양 떠드는 자들이 지금도 쌓여있다. 특히 역사학자들이라는 자들...
다시 말하지만 삼국지 동이전을 비롯한 소위 중국 정사라는 것에 거짓말과 틀린 기록, 특히 악의적으로 속인
기록도 버젓이 있다.
그러므로 단재선생께서
『중국 24사(史) 중 이른바 조선열전 혹 동이열전에 적힌 명사가 전해들은(傳聞-전문)대로 음역한 것도
있지만, 직접으로 당시 이두문의 본명을 그대로 가져다가 쓴 것도 적지 않으나, 수백년래로 고서(古書)
고증(考證)에 늙은 중국 문사(文士)들이 남의 역사에는 사정도 깜깜(격막)일 뿐더러 노력도 좀 아낀지라,
그리하여 모든 사실의 오류(誤: 틀림)나 문구의 와(訛: 그릇됨)도 발견한 이가 없거든, 하물며 저들(彼等-피등)
의 눈에 서투른 일반명사이랴.
그러므로 그 조선열전 등의 와(訛: 그릇됨-와전), 오(誤: 틀림-오류), 첩(疊: 겹침-중첩), 누(漏: 빠짐-누락)
가 또한 대단하여 신용하기 위험한 기록들 이다』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한마디로 중국사서에 있는 우리민족의 역사 즉, 조선전 동이열전류들은 신용하기 위험한 기록들,
믿기 어려운 기록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동이전 스스로 말한 바 이다.
바로 이러한 점을 단재선생께서 동이전을 대표적으로 지적하신 것이고 이를 교정하신 것이다.
역사학자란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
역사의 주인으로서 너희들이 기록한 우리역사 중에서 이것은 맞고 저것을 틀렸으며 바른 것이 이런 것이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
바로 이런 일을 하신 분이 단재선생이시고 바로 여기에 행동으로 보여 주셨다.
아직도 중국사서에 휘둘려서 뭐가 진짜인지 구별도 못하고 그저 중국인의 개가 되어 중국 사서를 지키느라고
중국 사서 그대로를 역사적 증거로 들이대는 무리들...
이런 자들이 아직도 정통 사학자라고 으시대고 날뛰는 우리 사학계의 현실을 볼때 단재 선생이 얼마나
학문적으로 앞선 분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사서의 진위도 못 가려 맹목적으로 매달리면서 거기서부터 역사를 출발하는 자들과 사서 자체를 분석하는
분의 수준 차이는 심하게 말해서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말할수 있다.
아직도 장님 수준으로 헤매고 있는 지금의 사학자들과 이미 벌써 약 백년전에 사서를 꿰뚫어 볼수 있는 실력을
가지신 단재 선생을 볼때 단재선생께서 학문적으로 얼마나 앞서 있는지 다시한번 깨닫게 되었다는 말이다.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 (단재 신채호)
차 례
1. 교정의 이유
2. 자구(字句)의 교정
1) 서문에 “窮追極遠踰烏丸骨都“라 하였는데...
2) 예전(濊傳)에 “有廉恥不請句麗言語法俗大扺與句麗同”라 하였는데,
3) 한전(韓傳)의 “臣智惑加優呼臣雲遣支”이니
4) 변진전의 “차읍(借邑)”이니
5) 변진전의 미오야마(彌烏邪馬)니
6) 한전의 사로(駟盧), 막로(莫盧)와 변진전의 마연(馬延)이니,
3. 기사의 교정
1) 辰韓(진한)을 秦人(진인)의 자손이라 함이니
2) 동부여를 예(濊)로 오(誤)함이니,
3) 낙랑(樂浪)을 뺌이니
4) 발기(拔奇), 즉 신대왕(新大王)의 제2자의 차서를 오(誤)하여 장자(長子)라 하며,
4. 결론
1. 교정의 이유
조선사 연구의 제목을 가지고 무슨 까닭(何故-하고)으로 중국 위진(魏晋)시대 사관(史官)이 지은 삼국지
동이열전 같은 것을 취하는가.
조선 옛 문헌(古文獻)이 너무 멸망하여 상고(上古)의 조선을 연구하자면 마치 바빌론고사를 연구하는 자가
헤로도투스의 희랍사를 참고하지 아니할 수 없음과 같이 중국 고사(古史)에 힘입은 것이 적지 아니하나,
다만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에 쓰인 조선열전은 중국 망명자로 조선의 한 구석(一隅-일우)을 훔쳐
거처한(도거-盜據) 위씨(衛氏: 위만) 일가(一家)가 한(漢)과 대항하던 간략한 기록이니(약기-略記)
조선열전이라느니보다 도리어 중국 떠돌이 도적(流賊- 유적)의 침략사라 함이 옳으며,
남북사, 수서, 당서 등의 동이열전은 비교적 상세히 갖추어져(상비-詳備)있으나 또한 각기 당시 중국에
관계된 일만 적었으니 이는 한족(漢族)의 대외 경쟁사(外競史-외경사)라 함이 옳거니와,
위진시대(魏晋: 위나라에서부터 진나라 시대)의 사관(史官)들은 그렇지 아니하여 단군왕검의 건국이 왕침
(王沈)의 위서(魏書)에 보이며,
조선왕 부(否), 조선왕 준(準) 등의 간략한 역사가 어환(魚豢)의 위략(魏略)에 보이며,
고대 열국(列國)의 국경 관제 풍속 등이 진수의 삼국지에 보이어,
중국과 관계되지 않은 옛 역사(古史-고사)까지도 간혹 기재하였다.
이는 고구려 동천왕 때에 위나라 장수(衛將-위장) 관구검이 환도(丸都: 고구려 서울)에 처들어와(入寇-입구하여) 주워간 서적과 전설이 있어 이를 근거로 기록한(據錄-거록한) 것이 있은 듯하니,
당시에는 비록 국치(國恥-국가의 치욕)이나 후세의 사적 재료는 이에서 더 진귀한 것이 없을 까닭이다.
위진(魏晉: 위나라와 진나라) 사관(史官)의 기록 가운데서 무슨 까닭으로 삼국지만 취하는가.
전술(前述)한 모든 사관의 기록에
왕침(王沈)의 위서(魏書)는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 아사달에 나라를 세웠다.(往在二千載有檀君王儉立國阿斯達)”의
수십자가 고려 승려 일연(여승 일연- 麗僧一然)의 삼국유사에 전하였을 뿐이며,
어환의 위략(魏略)은 배송지(裵松之)의 삼국지 주(註)에 인용한 4, 5조가 전하였을 뿐이요,
그 두 책(兩書-양서)의 전부가 다 없어졌으므로(缺亡: 결망하였으므로) 하릴없이 삼국지만을 취하게 됨이며,
선배 유학자(先儒: 선유)는 늘 삼국지 동이열전을 버리고(捨-사하고) 후한서의 것을 취하였으나,
이는 다만 후한이 삼국의 앞시대(前代: 전대)인 줄만 알고
후한서 저자 범엽이 삼국지 저자 진수보다 백여년 이후의 사람임을 생각지 아니함일뿐더러,
양 동이열전을 대조하면 후한서의 것이 명백히 삼국지의 베껴 쓴 기록(抄錄: 초록)이건만 이를 깨닫지 못함
이라.
그러므로 후한서를 버리고(捨-사하고) 삼국지를 취함이다.
무슨 까닭으로(何故-하고로) 이를 취하는 동시에 교정을 가하는가.
천 년 이전에는 인쇄(印版:인판)가 없어 모든 서적(一致書籍: 일치서적)이 모두 손으로 베껴 써서(초사-抄寫)
전하므로 전도(顚倒: 거꾸로 됨), 와오(訛誤: 틀림), 탈락(脫落), 증첩(增疊)된 자구(字句: 글자와 어구)가
허다하여 중국의 경사(經史: 경서와 사서)가 모두 고증하는 사람(考證家: 고증가)의 손을 거친(경한) 뒤에야
읽을 수 있게(可讀-가독하게) 되었는데,
조선열전 동이열전 같은 것은 저들(피등-彼等)이 고증(考證)에 힘을 쓰지(用力-용력하지)아니하였으며,
설혹 힘을 썼다(用力-용력)할지라도 자기들(自家-자가)의 눈에 서투른 인명, 풍속, 사정 등을 잘 모르므로
그 교정한 것이 더 착오된 것이 있으니 교정하지 아니할 수 없음이 하나요,
저들(피등-彼等)이 그 유전적 자존성으로 타국을 업신여겨 보고(藐視: 막시하여) 동(東)이라 칭한 것도 분통
터질 일이나(可痛-가통하나) 그러나 이는 사실에는 관계가 없거니와,
다만 고의로 속인 기록(誣錄-무록한 것)도 있으며,
혹 전해 들은(傳聞-전문) 것으로 인하여 틀리게 기록(오록-誤錄)한 것도 있어 교정하지 아니할 수 없음이
두 번째이니, 그러므로 저자의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이 있게 된 것이다.
--------------------------------------------------------------
< 해 설 >
1.
천 년 이전에는 인쇄가 없어 모든 서적이 모두 손으로 베껴 써서 전하므로 전도(顚倒: 뒤집힘),
와오(訛誤: 틀림), 탈락(脫落), 증첩(增疊)된 자구(字句)가 허다하여 중국의 경사(經史: 경서와 사서)가
모두 고증하는 사람의 손을 거친 뒤에야 읽는 것이 가능하게(可讀-가독하게) 되었다.
2.
조선열전, 동이열전 같은 것은 저들이 고증(考證)에 힘을 쓰지 아니하였으며, 설혹 힘을 썼다 할지라도
자기들의 눈에 서투른 인명, 풍속, 사정 등을 잘 모르므로 그 교정한 것이 더 착오된 것이 있다.
3,
저들이...고의로 속인 기록(誣錄-무록한 것)도 있으며, 혹 전해 들은(傳聞-전문) 것으로 인하여 틀리게 기록
(오록-誤錄)한 것도 있다.
즉, 중국정사라고 하는 것들도 손으로 베껴 써서 전한 것들이어서 틀린 글자가 허다하고,
우리역사인 조선열전, 동이열전 같은 것은 그나마 고증에 힘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증을 했다고 하더라도 잘 모르고 교정하여 교정한 것이 오히려 더 틀린 것이 있고,
중국인들이 고의로 속인 기록도 있고, 전해들은 것이기 때문에 틀리게 기록한 것도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중국 정사라는 것들이 고의로 또는 모르고 틀리게 쓴 우리역사가 허다하다는 말씀이다.
다시말해서 중국정사라는 것들도 사료로 쓸려며는 진위여부와 오류를 바로 잡고난 뒤에야 쓸 수 있다는
말씀이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소위 중국정사를 비롯한 중국 사료에 기록된 것들이 마치 전부 사실인 양, 한자도 틀림없는
역사적 진실 자체인 양,떠드는 자들이 대다수이며,
특히 소위 실증사학을 부르짓는 일제 식민지 사관의 개들, 소위 국사학자들의 짓이다.
도대체 자기들이 들이대는 사서의 기록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도 구분 못하는 자들이 무슨 객관적 역사를
들먹일수 있으며, 과학적 역사를 들먹일수 있다는 말인가?
오로지 왜놈들의 역사관에 맞추어 춤추는 꼭두각시들이 무슨 역사를 말할수 있다는 것인가?
----------------------------------------------------
2. 자구(字句)의 교정
이제 전도(거꾸로 뒤집힘), 와오(와전과 오류), 탈락, 증첩된 자구(字句)를 교정하리라.
1) 서문에 “窮追極遠踰烏丸骨都“라 하였는데...
: 서문에 “지극히 먼 지방까지 추격하니, 오환(烏丸)과 골도(骨都)를 넘었다.”라 하였는데
오환골도(烏丸骨都)는 오골환도(烏骨丸都)의 잘못이다(誤-오 이다).
오골과 환도는 다 성 이름(城名: 성명)이나,
오골성은 지금의 연산관(連山關) 일명 아골관(鴉骨關)이요,
환도성은 지금의 집안현 동선령(輯安縣洞仙嶺)이니,
오골과 환도의 위치 연혁은 조선사를 읽는 사람(者: 자)이 잘 아는(明知: 명지하는) 바이므로 이제 번거롭게
기록(煩錄-번록)하지 아니하거니와,
관구검의 환도성 침입은 본 열전에 상세하게 기록(詳記-상기)한 바,
오골은 곧 관구검이 유주(幽州)로부터 환도성에 침입하는 경로인즉
“오환 골도를 넘었다(踰烏丸骨都)”가 곧 “오골 환도를 넘었다(踰烏骨丸都)”의 잘못(誤-오)임이 명백하지
아니하냐.
대개 윗글(上文-상문)에 오환전(烏丸傳)이 있음으로 인하여 베껴 쓴 사람(抄寫者-초사자)가 오골의 골과
환도의 환을 바꾸어 오환골도(烏丸骨都)라 쓴 것이다.
2) 예전(濊傳)에 “有廉恥不請句麗言語法俗大扺與句麗同”라 하였는데,
: 예전(濊傳)에 “염치가 있어 고구려에게 청하지 않았다.
언어, 법, 풍속이 대체로 고구려와 같다(有廉恥不請句麗言語法俗大扺與句麗同)” 이라 하였는데,
위의 문자(文字)는 문리(文理)가 닿지 아니하므로 중국학자들까지도 이를 의심하여 모두 그 오자가 있음을
인정하고 동시에 건륭의 흠정삼국지 위지 권 20 고증에는 有廉恥不請(유염치불청: 염치가 있어 청하지 아니
하였다)의 請(청: 구걸하다)을
諳(암: 외우다, 알다)의 오자(誤字)라 하고 이를 아랫 글(下文-하문)에 붙여 읽어(屬讀-속독하여)
“고구려 언어를 알지 못하였다(不諳句麗言語-불청구려언어)”라 하였으나
윗글(上文-상문)에 “예는 고구려와 동종이다(濊與句麗同種)” 라고 하였는데,
본 열전에서 이른바 동종(同種)이란 동일 언어(同言語-동 언어)의 인민을 가리킴(指함)인즉
請(청)을 諳(암)으로 고쳐 “고구려 언어를 알지 못하였다(不諳句麗言語-불청구려언어)라 읽음(讀-독함)이
위 아래(上下-상하)의 글의 뜻(文意-문의)을 모순케 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예는 곧 동부여의 오류(誤-오)이니 (次節-차절: 다음절의 기사교정 참조)
동부여가 구려의 언어를 몰랐다 하면 갑의 사촌형제(從兄弟-종형제) 을이 갑의 언어를 모른다 함과 같으니,
흠정삼국지의 운운은 다만 억측 단정(억단)이 될 뿐이다.
후한서 예전(濊傳)에
“자신들이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 말하는데, 언어와 법령과 풍속이 대체로 비슷하다.
그 사람들의 성품은 우직하고 건실하며 욕심이 적어 남에게 구걸하지 않는다.(自謂與句驪同種 言語法俗大抵相同 其人性愿慤少嗜欲不請匄)”에 의거하여 보면,
不請句麗言語(불청구려언어)의 請(청)은 틀린 글자(誤字-오자)가 아니요 句(구)가 匄(개: 빌다)의 誤字(오자)
이며 麗(려)는 아래 글(下文-하문)의 句麗(구려)의 麗(려)로 말미암아 잘못 덧붙여진(誤增-오증이 된) 글자
(字-자)이니,
이를 개정하면 有廉恥不請匄 言語法俗與句麗同(유염치불청개 언어법속여구려동)이니
“염치가 있어 남에게 청하지-구걸하지 않는다(有廉恥不請匄)”가 1구요
“언어, 법, 풍속이 고구려와 같다(言語法俗與句麗同)”가 1구이다.
-------------------------------------------------------------
< 해 설 >
1) 오환골도(烏丸骨都)에 대해서...
이는 단재선생의 말씀대로 환(丸) 자와 골(骨) 자가 바뀐 것으로 오골(烏骨)과 환도(丸都) 즉 오골성과
환도성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깨끗하게 정리되는데
국사편찬 위원회에서 인터넷으로 제공하고 있는 중국정사 조선전을 보면
“오환(烏丸)은 오환(烏桓)이라고도 한다.(오환이 맞다)”
“골도(骨都)는 환도(丸都)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어 있다.
아직도 뭐가 무엇인지 몰라 틀리게 해설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이 구절은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 고구려의 수도인 환도에 침입한 기록인데
도착 지점인 환도성(丸都)에 대해서는
“골도(骨都)는 환도(丸都)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라는 근거도 없고 흐리멍텅한 해석을 해놓고,
경유지인 오골성(烏骨)에 대해서는 그대로 오환(烏丸)이라고 하여 그것은 오환(烏桓)이라고도 한다며 호도하고
오환(烏丸)이 맞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단재선생께서 왜 오골 환도인지 명백하게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그것은 본문을 보면 되고 나는 오환골도가
틀렸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오환골도가 왜 틀렸는가?
첫째,‘오환골도를 넘고 옥저를 거쳐’라는 문맥으로 보아 오환골도는 지명(地名)이 틀림없는데,
웬 난데없는 오환(烏丸)이라는 부족명칭을 쓰고 있으니 오환(烏丸)은 틀렸다는 것이고,
둘째, 유주자사 관구검은 유주(幽州)로부터 환도성에 침입 하였는데
관구검이 고구려에 침입할 당시 오환(烏丸)족은 그 경로에 있지도 않았으니 그것이 틀렸다는 것이다.
오환(烏丸)이 그 경로에 있지 않았다는 증거가 무엇이냐?
1) 관구검이 고구려에 침입한 것은 서기 244년(중국사서),혹은 246(삼국사기)년이다.
2) 그런데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에 의하면, 206년에 오환(烏丸)은 조조에 의해 괴멸당하였는데
그중 요동으로 달아난 자들은 모두 (조조 군이) 참수하였고,
유주 병주에 있던 오환 만여 부락은 중국으로 옮겨 거주하게 하였다.
따라서 206년 경에 이미 오환족의 거의 전부는 요동, 유주, 병주에 없었고
중국 안쪽에 있었다.(유주가 오늘날 북경지방이므로 북경지방 안쪽)
3) 또한,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에 의하면 237년 가을 관구검이 공손연의 요동을 치러 가는 도중에
우북평 오환선우 구루돈, 요서 오환 도독 솔중왕 호류 등 지난 날 원상(袁尙)을 뒤쫓아 요동(遼東)으로
달아난 자들이 무리 5천여 명을 이끌고 항복했다.
그 해 관구검은 공손연에게 패해 되돌아 갔다.
즉, 237년에 이미 우북평과 요서 등 요동 지방쪽에 잔존했던 오환족까지 모두 제거 되었다.
4) 그리고 238년 사마의가 공손연을 공격하여 죽임으로써 요동에서 공손씨까지 제거 되었다.
(공손연은 요동을 처음 차지한 공손도의 손자이다. 그리고 공손연은 요서, 요중, 요동을 차지하고 있었다.)
5) 그런 다음 244년, 혹은 246년 관구검이 고구려에 침략한 것이다.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하였을 때는 공손연이 차지하고 있었던 요서 요중 요동까지 평정함으로써
이미 지금의 북경지방인 유주에서부터 고구려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력이 제거 되었음으로 오환 또한 물론
없었다. 항복할 만한 오환족도 없었고 오환이 거주하는 곳도 아니기 때문이다.
6) 다시말해서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입할 때 유주(幽州)로부터 환도성에 이르는 경로에 오환이
없었다. 그러므로 오환을 넘었다는 것이 틀렸다는 말이다.
이렇게 오환과 골도를 넘었다는 말이 틀렸음이 명백한데도 국사편찬 위원회는 아직까지 그것을 모르고 있다.
그러니 아직까지 고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2) 예전(濊傳)에 있는“有廉恥不請句麗言語法俗大扺與句麗同” 구절에 대한 분석을 단재선생께서 매우
날카롭고 정확하게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논리전개가 정연하여 단재선생의 높은 학자적 능력을 알수있게 합니다.
지금은 단재선생께서 교정한 대로 바로 잡혀 “有廉恥不請句麗言語法俗大扺與句麗同”를
제1구는 염치가 있어 남에게 구걸하거나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有廉恥不請)로
제2구는 언어와 예절 및 풍속은 대체로 대체로 고구려와 같다(句麗言語法俗大扺與句麗同)로
번역하고 있습니다.(국사편찬 위원회, 중국정사 조선전),
그리고 아직도 언어 앞에 있는 句麗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그러나 言語法俗(언어법속)을 언어, 예절, 풍속이라고 해서 법을 예절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는 고구려와 ‘예’에 법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뚜렷한 근거도 없이 고구려와 예에는 법이 없었다는 태도입니다.
오히려 같은 예전(濊傳)에 팔조범금을 운운하는 것으로 보아 예에도 법이 있음을 알 수 있고,
삼국사기 미천왕 본기를 보면 물건을 훔치는 자에게 엄한 벌을 내리는 내용이 있으니
고구려에도 법이 명백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현 국사학계가 우리나라 고대 국가에는 법이 없다고 부정을 하고 있으니 또한번 일제 식민지사관에
물든 국사학계의 태도를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원본출처: 조선사연구초(인터넷 판 - 위키문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