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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씻고 밥 먹자"
[요한복음 21장 3-18절]
혹시 이런 경험 있으신가요?
아침에 눈을 떴는데 뭔가 평소와 다르게
깊게 잠을 잔 것 같은 상쾌함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밖이 이상하게 평소보다 더 밝아요.
그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불길한 예감이 천천히 대뇌의 전두엽을 스칩니다.
시계를 보니 ‘아뿔싸!’ 정말 깊게 잔 겁니다.
늦잠을 잤어요.
저도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새벽에 일어났는데 너무 기분이 좋은 겁니다.
그런데 밖에 해가 떴어요.
시계를 보니 새벽기도 5분 전이었습니다.
부랴부랴 준비를 해서 교회까지 뛰어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배를
잘 마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왜 그날 제 시간에 일어나지 못 했을까요?
정답은 제 핸드폰에 있었어요.
원래 알림을 맞춰놓고 그 소리에 깨는데
전날 베터리가 얼마 없어서 충전을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보니까 전원이 켜지지 않았습니다.
베터리가 0%였죠.
분명히 제 핸드폰엔 충전선이 연결 되어 있었는데
콘센트에 연결되어있지 않았던 겁니다.
핸드폰 충전도 선이 잘 꽂혀있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도 영적인 선이
잘 연결돼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위로부터 오는 힘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영적인 베터리가 방전된
한 사람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길 원합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찾아오신
사건 중 하나입니다.
이미 앞선 20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20장 31절에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마무리하면 깔끔하고 좋지 않습니까?
그런데 21장이 갑자기 등장합니다.
마치 편지에서 추신(p.s)을 붙이는 것처럼,
책의 부록처럼
오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도대체 왜 요한은 이 사건을 넣었을까요?
혹자는 뜬금없이 베드로가
고기 잡으러 갈릴리 바다에 간 걸 보며
할 일이 없어서 그리로 갔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제가 베드로가 아니기 때문에
100% 그의 마음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흐름에 따르면 21장은
새로운 시작을 위해 꼭 필요한 이야기였습니다.
먼저 베드로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2절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등장합니다.
베드로, 도마(디두모), 나다니엘(바돌로매),
세베대의 아들들(야고보, 요한),
또 다른 제자 둘(신원미상).
이들은 모두 예수님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리더가
십자가에서 죽자 동력을 잃고 맙니다.
그래서 간 곳이 디베랴 호수,
즉 갈릴리 호수였습니다.
베드로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자고 합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베드로가 돈이 떨어져서
어업활동을 하러 간 것이라고 합니다.
그게 중요하진 않습니다.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으러 갈 때
다른 제자들도 함께 갔습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아마 베드로는 생각했겠죠.
‘어, 이상하네. 오랜만에 해서 그런가?’
아침 해가 환하게 얼굴을 비출 때
저 멀리서 누군가가 말합니다.
“고기는 좀 잡히더냐?”
“없습니다. 하나도 없어요.”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그러면 잡을 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물을 던졌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물고기가 그물 속으로 빨려들 듯이
들어오는 겁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을 알아본
제자 요한이 외칩니다.
“주님이시다!”
그 소리를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께 뛰어갑니다.
성경에 오십 칸 쯤 된다고 나왔는데
실제 거리는 약 100미터 정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베드로가 왜 뛰어갔을까요?
그는 예수님께 죄송한 마음이 컸어요.
예수님께서 잡히시는 날 밤에
따뜻한 불 가에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어떤 사람이 와서 물어요.
“당신 저기 있는 예수와 함께 있던 자 맞죠?”
“아... 아니오. 저는 저 사람을 모르오.”
그렇게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러자 곧장 닭이 울었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였습니다.
베드로는 절대 예수님을 떠나지 않을 거라고,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했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상황과 환경이 자신을 짓누르자
어리석을 행동을 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했던
그 순간을 기억하십니까?
그땐 세상 어떤 것보다
예수님 한 분이면 만족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주는 위협과
삶이 주는 무게 때문에 그 고백을
잃어버리진 않았나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직장이라 믿고
회사를 다니는데 자꾸 세상의 유혹에
넘어지진 않습니까?
열심히 산다고 살아왔는데 생각처럼
삶이 녹록하지 않아요.
그래서 예배도 한 번, 두 번 빠지게 되고,
그렇게 좋아서 했던 헌신과 봉사도 못합니다.
내가 잘 나갈 땐 하나님 은혜라고 여겼는데,
질병으로 인해 브레이크가 걸리자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지는 것.
그게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이라면 어떠셨겠습니까?
정말 믿고 사랑했는데
자기를 세 번이나 부인하다뇨.
저라면 가만두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내가 모를 줄 알았지? 다 들었어.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니?
실망이다. 실망이야!”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찾아오셨어요.
그리고 그에게 따뜻한 아침식사를 차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차려주신 밥상엔 특징이 있었어요.
숯불 위에 생선이 있었고 떡도 있었어요.
떡은 무엇인가요?
불과 며칠 전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하며 떡 떼시던 때가
생각났을 겁니다.
생선 역시 오병이어의 기적이
떠오르게 만드는 음식이죠.
마지막으로 숯불은 어떤가요?
베드로에게 불은 자신의 죄를 떠오르게 했죠.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세요.
우리 함께 15-1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21:15-17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여기에 베드로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라고 답하죠.
왜 세 번이나 같은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건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그날 갈릴리 바다에서 베드로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모습도 보았죠.
그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베드로의 잘못을 질책하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오히려 넘어진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사명을 회복시키시는 ‘사랑의 주님’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우리는 너무 쉽게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진 않나요?
실제로 우리의 삶은 예수님과
전혀 관계없이 사는데도 말입니다.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침에 눈을 뜨면
스마트폰부터 확인한다고 해요.
지난밤에 온 연락이나 뉴스, SNS 등을
확인하는 거죠.
저는 이게 나쁜 거라고 말하진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걸 확인하는 시간 동안
예수님은 잊고 있진 않나요?
사랑하면 상대가 하루종일 생각납니다.
아침에도 가장 먼저 연락하고,
밥 먹으면서도 연락해요.
길을 가다가도 전화하고, 영상통화도 하죠.
그렇게 밤늦게까지 연락하고도
또 아침에 생각나서 톡 보냅니다.
“일어났어?”
이게 진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명을 잃었다는 것은
사랑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우리에게
더 이상 벅찬 감격으로 다가오지 않으십니까?
교회를 다니는 것이 행복한 일이 아닌
부담으로 느껴지시나요?
우리는 다시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랑을 회복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더 분명해집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에 불이 붙어야 합니다.
그래야 불을 전달하는 사명자로 살아갈 수 있어요.
사명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 때
우리는 진정한 사명을 이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화)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안에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 전하는 너는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냐?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냐?’
주님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하긴 하는데,
뭔가 모를 부족함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는 과정 가운데 여호사밧 왕에 대한
말씀을 읽다가 무릎을 탁 쳤습니다.
역대하 20장 32-33절입니다.
역대하 20:32-33
32 여호사밧이 그의 아버지 아사의 길로 행하여
돌이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33 산당만은 철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마음을 정하여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여호사밧 왕은 아버지 아사가 했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삶을 살았습니다.
의로운 길을 걸었죠.
그런데 그에게 한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산당을 철거하지 않은 것입니다.
산당은 이방 신을 섬기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이방 신도 섬겼다는 말입니다.
그로 인해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오지 못하는
불행한 결과를 맞게 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지금 내 안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산당이 있진 않은가?’
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던 중에
저의 남아있는 산당들을 발견했습니다.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
칭찬을 기대하며 사역했던 것,
사랑을 베풀기보단 받으려고만 했던 모습들이
제 안에 남아있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함요셉’ 스스로가 남은 ‘산당’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사람의 기쁨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그 분을 위해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지 말아야 하고,
찾아오는 부정적인 감정마저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내려놓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스로를 연민 속에 가두어 놓고
‘그래 너 많이 힘들지.
너의 힘든 마음은 누구도 몰라줘’라며
하나님의 창조물로서의 고귀한 가치마저
볼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합시다.
그것이 진짜 주님을 사랑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 사람의 기쁨이 아닌
주님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는
귀한 성도 되시길 축복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 ‘대면’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대면은 우리의 약함을 그대로 보게 되는
순간입니다.
사실 대면하기까지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대면 이후에 찾아오는
회복의 은혜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강함으로 바꾸실 것이며
당신의 크신 사랑 안에서 우리를 회복시키십니다.
베드로는 이미 지칠대로 지쳤습니다.
사명은 무슨 사명이냐며
다시 먹고 살아갈 길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그가 쓰러졌던 상황을 가지고 오십니다.
베드로는 가장 부끄러운 순간을
대면하게 된 것이죠.
그는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다시 양을 맡기십니다.
‘나 같은 게 어떻게 해.’라며
좌절하고 있던 베드로에게
“너라면 충분해.”라고 위로하십니다.
더 이상 안 될 것 같다고 느끼는 그 때,
예수님께서는 능력의 오른손을 펴셔서
자신의 못자국을 보여주십니다.
‘내가 다 이루었단다.
넌 그저 사랑하기만 하면 돼.’
라고 말씀하시죠.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이 우리를 좌절의
깊은 수렁으로 끌고 가려고 해도 속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주님의 손을 붙잡고 다시 일어서십시오.
하나님은 80세 갈렙도 쓰셨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불타오르면 멈추지 않고 전진하게 됩니다.
나이가 많고 적음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소년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불탔습니다.
그래서 골리앗이라는 거대한 장수 앞에서도
떨지 않고 맞서 싸웠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자 모든 게 두려워 텐트에 숨어버렸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 아니었나요?
그도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작은 고기잡이 배에 자신을 구겨 넣은 거죠.
우리도 인생을 살다가 그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잘 되던 사업이 한순간에 망했을 때,
잘 나가던 인생이 갑자기 꼬여버릴 때,
이 길로만 가면 탄탄대로라고 여겼던 인생길에서
낭떠러지를 만났을 때.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직접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를 회복시켜주십니다.
작은 배에 갇혀 있지 말라고 하십니다.
네가 가야 할 곳은 넓은 땅,
온 유대와 사마리와 땅 끝이라고 말씀하시죠.
우리도 동일 합니다.
좌절의 자리에 머물지 마십시오.
언제까지 옛날 영광에 취해 있으실 겁니까?
내가 받은 상처와 아픔 때문에 황금보다 귀한
'지금'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낭비할 겁니까?
저는 그랬습니다.
상처를 곱씹으며 신세 한탄만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이제야 깨닫습니다.
저를 아프게 했던 상처도 결국은
저의 성장을 위한 빗방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한 시인의 고백처럼
비에 젖지 않고 크는 꽃은 없습니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꽃도 없습니다.
흔들리고 젖어본 꽃봉우리만이
가장 향기로운 그들만의
꽃향기를 풍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나를 아프게 했던 그 시간,
그 사람,
그 사건이
나를 더 향기롭게 만드는 겁니다.
다시 일어나세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세요.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지 마십시오.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사명을
허락하셨습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어릴 적 밖에서 놀다가 들어오면 엄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손 씻고 밥먹자.“
제가 바깥에서 뭘하고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으셨어요.
아들이 건강하게 집에 온 건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셨기 때문이죠.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이 마귀가 주는
정죄감에 쉽게 흔들립니다.
'넌 안돼. 넌 자격 없어.
너 같은 게 기독교인이라고?
네 꼴을 봐. 네가 지금 뭘했는지 알어?
넌 죄인이야! 돌아갈 수 없어.’
저도 이 거짓말에 자주 휩싸였던 것 같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나’라는 존재가
깊은 땅속으로 곤두박질치기도 했다.
급격한 우울감으로 삶의 소망을
잃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아무도 내겐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럴 땐 정말이지
다 때려치우고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어릴 적 엄마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손 씻고 밥 먹자.“
손을 씻고 오면
작은 상 위에 보슬보슬 김이 올라간 갓 지은 밥과
따뜻한 국이 있었죠.
소박하지만 사랑이 담긴 엄마 밥을 먹으며,
저는 다시 제가 있어야 할 곳에 있음을 느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 품도 이와 같다.
우리 주님은 죄로 얼룩진 우리를 보시며
"꼴이 그게 뭐니?"라고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내 아들 예수의 피로 손 씻고 와. 그리고 같이 밥 먹자“
오늘도 주님이 차려놓으신 은혜의 식탁으로 나아오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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