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일만성철용 | 날짜 : 09-05-14 05:14 조회 : 2084 |
| | | 가사(歌辭)의 고향 담양 기행 Photo 에세이
보성 차밭/ 조정래 문학관 '한국수필작가회'의 문학기행 따라 보성의 차밭과 조정래문학관을 둘러보다가 일행과 떨어져서 광주로 향하였다. 벼르기만 하던 가사의 고장 담양(潭陽)에 가서 송강 정철 선생의 문향을 만나가 위해서다. 가는 길에 보성 출신의 서재필공원과 천봉산(天鳳山 609m) 대원사(大原寺)를 보고 간다. 대원사에서 특별히 볼 것은 티베트박물관이었다. 광주에서 담양으로 송강 정철의 유적지를 찾아가는 길은 광주버스터미널 앞에서 타는 게 좋다. 환벽당, 식영정, 소쇄원: 시내버스 28번/송강정: 무등산경기장 앞을 지나는 26번/ 면앙정: 담양 교통 시내버스 322번 .*. 송강의 행복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가. 무엇보다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송강에 대하여 연구하다 보니 송강 정철의 일생에는 역경도 많았지만 행복한 사람이었다. 명문 가문에서 태어난 것이 첫째요, 다음이 훌륭한 스승과 문우(文友)들과 교유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 그 둘째이다. 정철은 중종 31년에 서울 장의동에서 영일 정씨 가문 돈녕부 판관 정유침의 4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두 누님은 당대 여인들의 가장 큰 선망의 대상이었던 왕비로 간택 되어 입궁하였다. 인종의 귀인(貴人)인 큰 누님과 계림군 유(桂林君 瑠)의 부인인 작은 누님으로 인연하여 정철은 어려서부터 궁중에 자유롭게 출입하게 되어, 같은 나이 또래였던 경원대군(慶源大君: 명종)과 놀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정철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는 10살 때에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인연하여 집안이 풍비박산(風飛雹散) 되었을 무렵이었다. 매형 계림군이 을사사화에 연유되어 죽임을 당하자, 그 처가인 정철의 집안도 이와 연루되어 큰형은 곤장을 맞고 경흥으로 귀양 가던 도중 그 장독으로 죽었고, 정철은 아버지 따라 5년간이나 관북 지방 곳곳으로 귀양 다니다가 16세 나이가 되서야 귀양에서 풀려났다. 아버지는 그 후 벼슬길을 멀리하고 할아버지 묘소가 있는 전남 창평(昌平)로 내려가 살게 되었다. 정철의 창평으로의 이주는 새옹지마(塞翁之馬)요, 고진감래(苦盡甘來)가 되는 일이었다. 거기서 오늘날 국문학의 태두(泰斗)가 되게 한 스승을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창평에서 임억령에게 시를, 송순, 김인후, 기대승에게 학문을 배우는 것도 그러 하였지만, 성산(星山) 앞을 흐르는 죽계천의 아름다운 고장에서 이이, 성혼, 송익필 같은 유학자와 공부하거나 교유하게 된 것이 또한 그러하였다. 송강(松江)이란 그의 아호도 담양군 봉산면 그 성산 앞을 흐르는 죽계천(竹溪川)의 다른 이름인 송강(松江)에서 따온 호였다. 환벽당과 / 조대 거기서 17세 나던 해에 문화 유씨 강항(强項)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온다. -김윤재가 환벽당(環碧堂)에서 낮잠을 자다가 조대(釣臺) 앞 물에서 용 한 마리가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급히 조대로 내려 가 보니 준수한 소년이 미역을 감고 있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외손녀를 그 소년에게 시집보냈는데 그 소년이 바로 정철이었다.
환벽당(環碧堂)은 나주목사를 지낸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가 세운 정자로 푸르름(碧)을 사방으로 둘렀다(環) 하여 지은 이름이다. 그 아래 조대(釣臺) 앞에 성산별곡을 비명으로 한 시비가 서 있다. 그 강이 죽림천[송강]이요, 그 하류를 막은 곳이 지금은 광주시민의 식수원이 된 광주호(光州湖)다.
*. 식영정(息影亭, 전남기념물 제1호) 이야기 환벽당에서 다리를 건너면 '가사문학관'이 있고 거기서 얼마 안 되는 거리에 광주호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식영정이 있다.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이 식영정에 비최여서 창해상전(滄海桑田)이 슬카장 뒤눕도록 가디록 새 비츨 내여 그믈뉘를 모른다 정철 식영정은 조선 명종 때 김성원이 그의 장인 임억령(林億齡)을 위해 지어준 정자인데 직역으로는 그림자도 쉰다는 뜻이지만, '숲에서는 그림자가 없다.'는 뜻이라니, 그 숲이 자연이라면 그림자는 속세의 번뇌일 것이니 그 이름만 보고도 선인들의 자연을 보는 마음이 부럽기 그지없다. 부용동 / 서하당 식영정을 오르다 보니 그 아래 부용당(芙容堂)과 함께 서하당(捿霞堂) 정자가 있어 시대를 넘어 김성원이 노닐던 그 모습을 아련히 떠오르게 한다. 이 식영정을 지은 서하당 김성원은 정철보다 11살 위지만 환벽당에서 동문수학하던 사이였다. 이 고장에는 '식영정 4선(息影亭四仙)'이란 말이 있다. 사선(四仙)이란 석천 임억령,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 제보 고경명을 말한다. 이 네 사람이 한 사람 20수씩 한시 80수의 '식영정 이십영(息影亭二十詠)'을 지었는데 이것이 송강의 성산별곡의 바탕이 되었다. 그 글이 다음에 가보려는 가사문학관에 전시 되어 있었다. 옛날 식영정 앞길은 오솔길로 소를 몰고 피리 부는 소년들이 지나 다니던 길이라는데 지금은 지방도로가 되어 옛 운치를 앗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인가. 가사문학관 연못 앞에는 금빛 소를 탄 피리 부는 소년의 동상이 있다. 담양에 내려와서 당대에 가장 고명하신 스승들과 후일 가단을 빛낸 문우들과 어울려 지내던 정철은 10년이 되는 26세에 진사시에 1등,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서 어렸을 때 함께 놀던 명종 가까이서 벼슬살이를 하게 되었으니 정철의 출세가도가 탄탄대였음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송강은 45세가 되던 해에 외직 강원도 관찰사로 제수 되었다. 당시 벼슬길에 있는 관리들은 외직(外職)에 나가는 것을 꺼려하여서, 외직의 관리의 품계를 조상까지 소급해 주기 때문에 송강은 기꺼이 부임길에 올라서 그 유명한 가사 '관동별곡'과 강원도 백성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쓴 연시조 '훈민가(訓民歌)' 16수를 남기게 되었다.
* 송강 정철의 시조 조선 3대 시조작가로 송강 정철(107수), 노계 박인로(68수), 윤선도(75수)를 든다. 그중 송강이 제일 많은 시조를 썼다. 그의 시조는 훈민가처럼 교훈적인 것이나 음풍농월도 있지만 장진주사와 같은 호탕한 술 노래가 그 중 많다.
南山뫼 어디쯤 高學士 草堂 지어 꽃 두고 달 두고 바위 두고 물 두나니 술조차 둔 양하여 날을 오라 하거니 정철 술을 마시면 주사(酒邪)가 심하여서 어느 술좌석에서는 동인(東人) 재상의 얼굴에 술을 끼얹는가 하면, 만년 57세 되던 해에는 강화에서 술로 인하여 객사하기까지 한다. 같은 나이로 함께 과거 급제 길에 올랐던 율곡 이이가 창평으로 내려가는 송강에게 간곡히 절주를 부탁한 것이나, 나라님으로부터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고 논척 받을 지경이었다. 그 주색(酒色) 중 색(色)에 대한 이야기로는 정철과 강계의 기녀 진옥(眞玉)과의 화답 시조가 있어 송강의 호연지기의 낭만을 보여 준다.
玉이 玉이라커늘 燔玉만 여겼더니 *번옥: 인공으로 만든 옥 이제야 보아하니 眞玉일시 적실하다 내게 살 송곳 있으니 뚫어 볼가 하노라 정철(鄭澈)
鐵이 鐵이커날 섭鐵만 여겼더 섭鐵: 순수하지 못한 쇠 이제야 보아하니 正鐵일시 분명하다 내게 골풀무 있더니 녹여 볼까 하노라 진옥(眞玉)
*. 가사문학관 이야기 가사란 한 마디로 시조의 중장을 산문처럼 길게 쓴 3, 4, 3 ,4조의 1행 4음보를 기본 율격으로 하는 운문이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종장 형식 3, 5, 4, 3을 지키는 정격가사(正格歌辭)이다가 임란 후에는 종장 첫구 등을 안 지키는 변격가사(變格歌辭) 형식이 된다. 가사의 시초를 고려 말 나옹화상(懶翁和尙)의 서왕가(西往歌)로도 보지만 성종 때 불우헌 정극인(丁克仁)이 쓴 상춘곡(賞春曲)을 효시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초기의 가사 내용은 강호생활이나 명승지의 유람, 유배 또는 유교적인 이념 등을 주요 내용으로 삼았는데 당시 송순, 정철 등은 면앙정가, 성산별곡, 관동병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으로 사대부가사의 절정을 구가한 작가들이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철의 3대 유적지 송강정, 식영정과 환벽당을 둘러 본 후 성산을 등산할 수도 있다. 제1코스(4,662m/2시간) 한국가사문학관- 1.2km-장원봉- 1,6km-해남터갈림길-1,5km-작은재갈림길-한국가사문학관/소쇄원주차장) 제2코스(9,998m)/ 4시간) 한국가사문학관-1.2km-장원봉-1,6km-해남터갈림길-3.4km-헬기장- 유둔재 식영정에서 환벽당 쪽으로 내려서니 거기가 '가사문학관'이었다. 조선 중기에 한문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에 국문으로 시를 제작한 것이 시조요, 가사였다. 그중 이서의 낙지가,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으로 가사문학이 만발한 곳이 담양이요 그래서 담양은 가사문학의 산실이요 고향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이에 뜻있는 보성인들이 가사문학관을 짓기로 하고 1995년부터 시작하여 2000년 10월에 완공하기까지 6년 간 5,017평에 총사업비 83억을 들여 가사문학관을 탄생시킨 것이다. 가사문학관에는 송순의 면앙집과 정철의 송강집 및 친필 유묵 등 가사와 관계된 귀중한 유물을 보관하여 전시 하고 있다. 가사는 조선 성종 조 정극인의 상춘곡으로부터 시작된 국문학 장르지만, 시조는 그보다 더 오래 전 고려 말 우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가사는 개화기 가사를 끝으로 없어진 잘르지만, 시조는 700년 동안이나 면면히 이어져 현대시조로 계승된 한국 유일의 고유한 정형시다. 그러한 시조도 개인의 시조문학관 외에는 시조문학관이 없는데, 가사문학관을 이 담양에 이렇게 세웠다는 것은 경하하기에 앞서 시조시인의 한 사람으로 부끄럽고 부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거듭 축하의 말씀을 드린다.
*. 송강정(松江亭, 전남기념물1호) 이야기 승용차 없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선인들의 유적지를 답사하고 다닌다는 일에는 애로가 많았다. 가사문학관에서 송강정까지는 제법 먼 길로 택시 편이 아니면 가기 어려운 곳이고 그 비용도 만만치 않아 고심하다가 거기서 이런 나를 도와주겠다는 고마운 광주 인심을 만났다. 최일기란 분으로 정년퇴직한 교장 선생님 내외분이셨다. 송강정은 가사문학관에서도 승용차로 이삼십 분 거리에 있었다. 정철이 동인의 탄핵으로 대사헌에서 물러나 50세에 하향하여 죽록정(竹綠亭)이란 초막을 짓고 4년 동안 살던 곳이다. 이곳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의 산실이다. 그래서 정자 옆에 '송강 정철 선생 비'에는 비명으로 사미인곡이 음각되어 있었다. 여기서 전후미인곡의 '미인'은 나라님이요, 이 작품에서의 임을 그리는 정은 우국충정을 상징하는 연군지정(戀君之情)이다. 서포(西浦) 김만중은 그의 문집 서포만필에서 '我東方之離騷 左海眞文章只此三篇(아동방지이소 좌해진문장지차삼편)'이라고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극찬하면서 그중에서도 속미인곡이 으뜸이라 하였다. 이때 창평의 생활은 송강에게는 실의의 시절이었는데 ,오히려 명작을 낳게 하였으니 역경을 기회로 승화시키는 것도 문인의 길임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주차장에 차를 내 놓고 돌길 층계를 따라 오르니 옛이름대로 '竹林亭'이란 현판이 측면에 보이더니 정면을 보니 '松江亭'이란 현판이 있다. 임란 때 훼손 된 것을 그후 후손들이 1770년에 증축하면서 조상의 아호를 따서 '松江亭'이라 명명한 것이다.
*. 면앙정(전남기념물 제6호) 이야기 十年을 經營하여 草廬三間을 지으니 나 한 칸 달 한 칸 청풍 한 칸 맡겨두고 江山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면앙정 송순
면앙정은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 망정마을 뒷산에 있는 정자다. 중종 28년에 면앙정 송순이 41세에 지었다는 정자이지만 임란 때 파괴된 것을 후손들이 효종 때 중건한 건물이다. 기대승이 쓴 '면앙정기'에 이런 말이 있다 한다. 송순이 32세 되던 해에 이곳에 정자를 지으려고 면앙정터를 샀더니 이 터를 판 곽씨라는 이가 축하를 하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한다. "제가 꿈을 꾸었더니, 금과 옥으로 만든 어대를 두른 선비들이 모여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이근배 저 '시가 있는 국토기행' 참고 그래서였을까. 이 정자에 출입하던 인물로는 당대에 유명한 임제, 김인후, 고경명. 임억령 이황, 양산보 등이었다. 송순은 성격이 너그럽고, 음률에 밝아 가야금을 잘 타는 호기를 아는 재상이었다. 그는 성수침, 이황 등과 교우하면서 정철, 임제, 고경명, 기대승, 김인후 같은 제자를 문하에 둔 행복한 스승이기도 했다. 면앙정 선생의 과거급제 60년을 기리는 회방연(回榜宴)에서 정철, 김인후, 기대승, 임제, 고경명 등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스승 송순을 가마 남여(藍輿)에 태우고 스승을 축하해 드릴 때, 송순은 얼마나 행복하였을까? 이를 이근배 시조시인은 이렇게 감탄해 한다. "아아, 이 나라 어느 시인이 이렇듯 위대한 시인들의 머리 위에 앉을 수 있으랴. 구름같이 모여든 강호의 선비들이 눈부시게 바라볼 뿐이었다. 선조 15년 90수를 다하고 송순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생애를 마친다. 정철은 제문에서 '조정에 나아가 60년 큰 길을 걸으시면서 크게 너머지지 않은 이는 상공(相公)을 볼 뿐입니다.'고 그의 인품과 덕망을 흠모하였다." 별러오던 우리들의 시조시인의 대선배들의 유적 탐사를 마치려니 시흥이 도도한데, 이를 면앙정 송순이 대신하였으니 이를 시조로 의역하여 보면서 나의 남도의 탐사를 마치련다. <img src="http://cfile214.uf.daum.net/image/200E8E0E4A09D68411005F"width=310 high=200 align="right"> 굽어보고 우러러보니 하늘과 땅인데 그 가운 데 면앙정에서 호연지기와 더불어 풍월에 명아주지팡이 짚고 산천에 읍하는 나의 한 평생 ilman 시조 역 ****이 글은 '시조춘추' 여름 호에 연재할 미 발표 작품이오 6월 전에는 무단 전재를 금합니다. 지은이 ilm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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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식 | 09-05-14 07:08 | | 이만큼 담양의 가사문학 요람을 상세하고도 정겹게 풀어써 준 글이 없을듯 합니다. 일만 선생님의 가사문학 시조문학 사랑과 열정, 발로 뛴 노고를 한눈에 본듯 하여 고개가 숙여집니다. 좋은 글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
| | 이덕영 | 09-05-14 10:43 | | 진옥과 정철의 수작이 사랑인가요, 살 송곳은 무엇이고 골풀무는 무엇이던가요. 선비의 성희롱이 볼만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을 보는듯 합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
| | 최복희 | 09-05-14 10:46 | | 이번 여행에서 일만 선생님은 큰 수확을 거두셨군요. 저희들과 끝까지 함께 하시지 않고 혼자서 힘들여 다녀오신 여행의 발자취 잘 구경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 |
| | 임재문 | 09-05-14 11:23 | | 일만 성철용 선생님 제가 광주교도소 근무할때 담양 직원집에 초대되어 가기도 하고 그랬었는데 이렇게 깊은 의미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이제 담양에 가면 그 진면목을 자세하게 보아야 하겠다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점점 더 제 고향이 가까워갑니다. 일만 성철용 선생님의 글이, 제고향은 해남군 계곡면 당산리이거든요 이번에 흑석산 철쭉제를 4.25. 했답니다. 고맙습니다. | |
| | 정희승 | 09-05-14 19:27 | | 좋은 자료를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짧은 글 속에 백 권의 책이 있는 것 같습니다. 평소 시조에 대해 정심한 연구가 있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라 여겨집니다. 성산 주변 관련 인물들이 꽤 복잡한데 일목요연하게 요약해 주셔서 한눈에 들어옵니다. 아무튼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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