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던 비도 산에 걸려 돌아든 양지마을
양철 지붕 처마 끝에 밝은 햇살 찾아들면
낙동강 도요새처럼 긴 빨랫줄 물었지
숙명의 하늘 아래 번민하던 한낮 오후
음습한 몸을 가린 천형의 젖은 허물
두욱뚝, 거꾸로 물고 마당귀를 적셨지
해 질 녘 차곡차곡 걷어 보낸 옷가지 속
올 터진 실밥에 걸려 벌린 입 못 다물고
아그닥, 척박한 땅에 몸을 낮춘 순교자여
「경남시조」(2023, 40호)
화자는 ‘빨래집게’를 통해 생림 도요리 촌가에서 느낀 감회를 실감실정으로 노래하고 있다. 도요리 양지마을은 무척산 아래 자리 잡고 있는데 한센인 집단 정착마을이다. 김해에서도 최북단 생림면 낙동강 가에 있다.
그곳은 오던 비도 산에 걸려 돌아든 양지마을이다. 양철 지붕 처마 끝에 밝은 햇살 찾아들면 낙동강 도요새처럼 긴 빨랫줄 물었지, 에서 보듯 다 말 못할 아픔이 감지된다. 숙명의 하늘 아래 번민하던 한낮 오후 음습한 몸을 가린 천형의 젖은 허물이 두욱뚝, 거꾸로 물고 마당귀를 적시던 것을 눈여겨 바라본다. 한센은 실로 천형이라는 말로밖에 이야기 될 수 없는 병이다. 일찍이 시인 한하운이 노래하지 않았던가? ‘전라도 길’이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오랜만에 다시 읽어도 절박한 정황이 속을 후벼 판다. 다시 ‘빨래집게’를 보자. 해 질 녘 차곡차곡 걷어 보낸 옷가지 속 올 터진 실밥에 걸려 벌린 입 못 다물고 아그닥, 척박한 땅에 몸을 낮춘 순교자의 모습을 여실하게 그리고 있다. 흡사 빨래집게처럼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이 악물고 버티는 한 사람의 자화상을 본다. 참으로 처절한 쟁투가 아닐 수 없다. 이미지 체현을 휘해 두욱뚝과 아그닥, 이라는 시어를 적절히 배치한 점이 눈길을 끈다. 이런 노력은 자칫 단조롭기 쉬운 시조에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된다.
김덕현 시인은 단시조 ‘무척산, 천지폭포’에서 삼국유사를 소환하고 있다. 아유타국 떠나온 뒤 연못 하나 이고 섰다. 마알간 연당 위에 하늘 눈물 떨어진 날 철철철 야윈 틈서리 울음보가 터진 여인. 가락국기에 따르면 인도 아유타국 공주였던 허황옥이 이주하여 수로왕의 왕비가 되었다. 왕후를 닮은 무척산에는 천지 연못, 모은암 등 그에 대한 신화가 전해온다고 한다. 시인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과거의 재현을 통해 또 한 번 아련한 꿈을 꾸게 만든다. 참으로 아름다운 역사다.
이정환(시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