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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얄라성 원문보기 글쓴이: 이봉원
나는 1994년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항일 독립운동에 관한 텔레비전 드라마, 다큐멘터리, 저서들을 집필/연출/제작하여 KBS를 통해 전국 방송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적지들을 찾기 위해 중국 대륙을 수 차례 답사하여, 임시정부 청사가 있던 사적지를 세 군데(항쩌우, 창사, 치쟝)를 처음 발견하였다. 또한 아무도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던 때에 독립운동가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생생한 증언을 녹화 촬영하고, 2011년 1월에는 10박 11일 일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 노정과 사적지들을 답사하는 국내 최초 순례단을 조직하여 이끌었다.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만열 선생은 내 책 <대한민국임시정부바로알기> 출판기념회에서, ‘드넓은 중국을 오랜 기간 드나들며 왜곡된 현장을 바로 잡고 나라가 하지 못한 곳을 발굴한 집념을 보여 줬다.’고 평가했고,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 선생은 ‘개인의 힘으로 국가기관의 실태조사 오류를 적나라하게 지적했는데, 이는 높이 살 만한 업적이다.’라며, 축사를 통해 치하해 주었다.
1. 중국 내 임시정부 사적지 답사와 최초 확인 경력
1차 답사 1994. 4. 5 - 4. 27. (23일 간)
북경→서안→중경→귀양→유주→광주→장사→남경→소주→항주→가흥→상해
■ 시안(西安), 광복군 제2지대 병영이 있던 자리 ‘두곡양참(杜曲糧站)’
최초 확인, 촬영 (1994. 4. 9.)
■ 창사(長沙), 임시정부 청사 ‘서원북리(西園北里) 8호’
최초 확인, 촬영 (1994. 4. 19.)
■ 항쩌우(杭州), 임시정부 판공실이 있던 건물 ‘청태제2여사(淸泰第二旅社)’
최초 확인, 촬영 (1994. 4. 24.)
2차 답사 1998. 10. 7. - 10. 17. (11일 간, 노광복군들과 함께)
북경→서주→고진→숙주→부양→임천→서안→중경→상해
■ 푸양(阜陽), 한국 광복군 제3지대 본부 주둔 마을 (三塔鎭 趙朋)
최초 확인, 촬영 (1998. 10. 11.)
3차 답사 1999. 3. 4. - 4. 15. (45일 간)
북경→서안→상해→가흥→해염→항주→남경→진강→구강→무한→장사→광주→오주→유주→귀양→준의→기강→중경→북경→대련
■ 시안(西安), 김구 주석이 해방 소식을 처음 들은 곳, ‘황루(黃樓)’
최초 확인, 촬영 (1999. 3. 9.)
■ 난징(南京), 총통부 관저 소접견실 (김구와 장졔스가 처음 회담한 곳)
최초 확인, 촬영 (1999. 3. 18.)
4차 답사 2007. 1. 17. - 1. 24. (8일 간, 언론사 취재진과 함께)
장사→중경→기강→상해→부양→무한→북경
■ 기강(綦江), 임시정부 청사가 있던 ‘임강가(臨江街) 43호’ 자리
현주소지 최초 확인 (2005. 9.) / 현장 촬영 (2007. 1. 19.)
■ 우한(武漢), 조선의용대 창설지, ‘대공중학(私立武昌大公中學)’ 자리
최초 확인, 촬영 (2007. 1. 22.)
5차 답사 2011. 1. 6. - 1. 16. (11일 간, 순례단을 이끌고)
상해→가흥→해염→항주→진강→남경→장사→광주→오주→유주→귀양→준의→기강→중경
[중국 내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사적지 다수 최초 확인]
ㅇ 항쩌우(杭州), 임시정부 판공실이 있던 건물 ‘청태제2여사(淸泰第二旅社)’
[현주소] 仁和路 22호 群英飯店
* 항주 임정의 첫 임시판공처 (1932. 5. - 1932. 10.)
* 1910년 新泰飯店으로 설립, 손문 숙박. 1933년 ‘청태제2여사’로
개명. 1967년 ‘군영반점’으로 다시 개명하여 현재에 이름.
■ 1994. 4. 24. 이봉원 발견, 촬영
사적지 설명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정부가 처음 수립된 1919년 4월부터 윤봉길 의사가 홍구공원 의거를 벌인 1932년 4월까지 13년 동안은 중국 상하이에 있었다. 그런데 윤 의사 의거로 큰 타격을 받은 일본 군경이 프랑스 조계지까지 들어와 마구잡이로 한인들을 잡아가는 바람에, 임시정부는 급히 항쩌우로 옮길 수밖에 없었고, 요인과 가족들 역시 항쩌우나 쟈싱(嘉興) 같은 인근 도시로 숨어들어야 했다.
국무위원 김철은 김구가 상하이를 탈출하기 사흘 전 항쩌우로 먼저 피신한 뒤, 청태제2여사(淸泰第二旅社) 32호실에 임시정부의 판공처를 개설했다. 한 세기 전에 지어진 목조 2층 건물로써, 지금은 군영여관(群英飯店)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화려한 식당을 갖춘 이 지방 최고의 여관이었다.
청태제2여사에 처음으로 임시 판공처를 설치했던 임시정부는 그 곳이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여관이어서 일본 정탐들에게 노출될 염려가 생기자, 반 년 뒤 판공처를 그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인 호변촌(長生路 湖邊忖)으로 옮겼다.
최초 확인 경위 : 1994년 4월, 최초 확인자 이봉원은 ‘淸泰第二旅社’가 중국 ‘杭州’시에 있다는 자료만 확보한 채, 무작정 항쩌우로 달려갔다. 그때까지 국내외 어떤 자료에도 정확한 주소(옛주소나 현주소 모두)가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에 독립기념관도 실체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고는 그 곳에 살고 있는 노인들을 막연히 찾아다니며, 62년 전에 이 도시에 있던 ‘청태제2여사’란 데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런 중에 도시 변두리 다리 밑에서 친구들과 장기를 두던 한 노인이 그 곳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반가움에 곧장, 지금은 ‘群英飯店’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현장으로 달려갔으나, 정작 그 곳 종업원들은 ‘청태제2여사’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몹시 허탈한 심경으로 발걸음을 돌려 막 그 곳을 나오려는 순간, 저녁 햇살이 현관에 있는 커다란 유리문짝을 비추는데, 거기에 옛 여관 이름인 ‘淸泰第二旅社’란 한자가 음각으로 새겨진 것이 어렴풋이 나타났다. 그때의 기분은 ‘아, 선열님들이 나를 이 곳으로 이끄셨고, 내게 여기라고 일러 주시는구나!’ 하는 것이었다. 소재와 현존 여부가 분명하지 않았던, 상하이 밖 첫 임시정부 판공처 사적지는 이렇게 세상에 처음 알려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뒤 국내 관계자들(독립기념관 연구원들)은 이봉원이 제공한 주소를 가지고 현지를 답사하고서도 증거가 확실치 않다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에 이봉원은 1999년 3월, 다시 현지를 방문하여, 1차 조사 때 (1994. 4.) 존재했던 현관 유리문이 뜯겨져 여관 창고에 보관돼 있음을 확인해 촬영을 했다. 그 창고에는 옛이름이 그대로 음각돼 있는 유리문 외에도 증거가 될 수 있는 물건(당시 객실에 걸었던 작은 거울)이 여러 개 남아 있었다.
현재 상황 : 이러한 내용을 기록영화(‘임시정부 27년 대륙 3만리’ 3부작)로 제작하여 1999년 광복절 특집으로 KBS에서 방송한 뒤, 현재 독립기념관 인터넷 자료집인 ‘국외독립운동사적지(http://oversea.i815.or.kr)’에서는 ‘仁和路 22호 群英飯店’이 ‘淸泰第二旅社’임을 인정하고 있고, 현재 그 곳은 중국 정부가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였으며, 객실 복도에는 김구 사진이 걸려 있고, 수많은 국내인이 현지를 답사하고 있다.
(군영여관 전경 1994. 4. 24.) (증거가 된 유리문) (최근 군영여관 전경)
(문화재 지정 표지석) (여관 내 복도)
ㅇ 난징(南京), 1933년 5월 김구와 장졔스가 회담한 방으로 추정되는 곳 ‘난징 총통부 관저 소접견실’
[현주소] 南京煦園 內 孫中山臨時大總統辦公室
* 장졔스 총사령관 기거 (1928년 ~ 1937년)
■ 1994. 4. 21. 이봉원 발견
■ 1999. 3. 18. 이봉원 촬영
사적지 설명 : 1932년 4월에 터진 홍구의거 직후 서양사람으로 위장하여 상하이를 탈출한 김구는, 인근의 호반도시 쟈싱(嘉興)으로 피신했다. 이 지역의 중국인 명망가가 그에게 은신처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33년 5월 김구는 중국 국민당정부 주석인 장졔스를 만나러 난징에 왔다. 이봉창 의거 때부터 김구 명성을 듣고 있었던 장졔스는 김구를 자신의 접견실에서 만나 배석자를 물리친 채 밀담을 나눴다. 먼저 김구가 특무공작에 사용할 자금을 요구하자, 장졔스는 한국청년들을 모아 무관 훈련부터 시킬 것을 권했다. 그리고 이듬해 봄 (1934. 3.),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洛陽) 분교에는 한국 청년들을 위한 특별반이 개설됐다.
최초 확인 경위 : 한때 장졔스도 사용했다는 4층 짜리 총통부 관저 건물은 이봉원이 찾아간 1999년 3월 당시에도 난징 시가 주요 기관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일반인은 출입할 수가 없었다. 5년 전 내부 진입에 한 번 실패했던 이봉원은 이 날도 거의 포기 상태에 있었는데, 마침 그 건물에서 나오는 한 남자를 발견, 무작정 그를 붙잡고, ‘나는 한국에서 온 역사 연구가인데 어떻게 저길 들어갈 수 없냐?’ 하고 통사정을 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그는 자신도 바로 옆 건물에서 근무하는 역사 연구원이라면서, 이봉원에게 그 건물에 대한 역사부터 설명해 줬다. 그런 뒤에 그는 자기 뒤를 자연스럽게 따라오라며 앞장을 섰다. 건물 3층에는 큰 방을 거쳐 들어갈 수 있는 작고 고풍스러운 접견실이 있었다. 그 곳이 장졔스가 사령관 시절 주로 썼던 소접견실이라고 했다. 이봉원은 아무도 없는 방에서 정신없이 몰래 촬영을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복도 쪽에서 쿵쿵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복도 쪽으로 난 소접견실 문이 활짝 열렸다. 이어 직원으로 보이는 남녀 세 명이 험악한 기세로 들어왔고, 이봉원은 연구원이 그들한테 뭐라고 얘기를 하는 사이에 얼른 밖으로 나가 줄행랑을 쳤다. 친절한 중국인 학자한테는 미안스런 일이었지만 내겐 그 귀중한 필름을 빼앗기는 불상사를 피하는 게 더욱 중요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상황 : 독립기념관 자료집에는 아직까지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다시 말해 조사도 확인도 하고 있지 않다.
(장졔스가 쓰던 건물) (3층, 장졔스의 소접견실 1999. 3. 18.)
ㅇ 우한(武漢), 조선의용대 창설지로 추정되는 곳, ‘대공중학(私立武昌大公中學)’ 자리
[현주소] 紫陽路 省總工會處 (옛주소, 黃土坡上街)
* “대공중학(1932년 - 1950년)에서 1938년에 혁명활동이 있었다.”
(1999. 3. 22. 현지 교육청에서 자료로 확인)
* 조선민족혁명당 산하 조선의용대 창설일 (1938. 10. 10.)
* 대공중학 터에 한때는 ‘무창31중학’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2002년
도시 재개발 사업으로 학교가 폐쇄됐음. (현지 교육청 자료)
* 김승곤 전 광복회장 증언 참고
■ 1999. 3. 22. 이봉원, 무창31중학 답사 촬영
■ 2007. 1. 22. 이봉원, 성총공회처 답사 최초 촬영
사적지 설명 : 1938년 가을, 우한에 있는 대공중학교에선 백여 명의 한인청년들이 모여, 항일 무장조직인 조선의용대(대장 김원봉)를 결성했다. 중국군사위원회의 승인과 지원을 받은 조선의용대는 이후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적후방으로 정치공작원들을 파견해서 교란작전을 벌이는 등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지금은 창설일(1938. 10. 10.)만이 적혀 있는 기념사진이 한 장 남아 있는데, 촬영 장소가 적혀 있지를 않다. 독립기념관 자료는 최근까지도 조선의용대 창설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린 ‘한구중화기독교청년회(YMCA)’ 건물 터를 창설 장소로 명기해 왔다.
최초 확인 경위 : 1999년 3월, 이봉원은 현지 교육청을 방문하여 관계 자료를 통해, ‘1938년 당시 무한에는 ‘대공중학’과 ‘대강중학’만 있었고, 국내 자료에 실려 있는 ‘대동중학’은 실재하지 않았으며, ‘대공중학(私立武昌大公中學)’에서 “1938년에 혁명활동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따라서 조선의용대 창설지(학교)는 ‘대공중학’일 가능성이 큰데, 이 학교는 1932년에 개교해 1950년까지 존속해서 현재는 실체가 없다. (* 일제 극비문서 '사상휘보' 161쪽에도 '大公中學'에서 조선인들의 혁명 활동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1999년 당시만 해도 대공중학이 있던 자리에는 ‘무창31중학교’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2007년 1월에 다시 갔을 때는 31중학도 없어졌고, 교육청의 자료에는, 대공중학 터가 신해혁명 발상지인 호북성총공회란 기록만이 남아 있었다. 아마도 31중학이 폐교되면서 그 일대가 재개발되었고, 이제 그 학교 자리에 호북성총공회가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상황 : 정부(독립기념관)는 2002년 ‘국외 항일운동 유적지 실태조사 보고서’를 통해, 1938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총대장 김원봉)가 중국 무한에 있던 ‘한구중화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창설됐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이봉원이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시정을 요구하자, 정부는 2007년 재조사를 통해, ‘대공중학교 또는 대동중학교’가 창설지(현주소, 무한시 무창구 자양로 234호 호북성총공회)이며, 기념식은 ‘YMCA’에서 거행했다고 일부 수정 발표했다.
(무한31중학 교문 1999. 3. 22.) (호북성총공회 정문 2007. 1. 22.)
ㅇ 창사(長沙), 임시정부 청사 ‘서원북리(西園北里) 8호’
[현주소] 北區 通泰街 西園北里 2號 湖南省交通規劃勘察設計院 西園居住小區
* 임시정부 청사 (1937. 11. ~ 1938. 7.)
* 당시 서원북리 5, 6, 7, 8호는 한 건물에 똑같은 집 네 채가 들 어 있는 2층 연립주택이었음.
(서원북리 6호가 청사로 쓰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애국지사 신순 호 님의 증언에 따르면 8호가 청사였다고 함. 그런데 6호나 8호 나 연립주택의 일부라서 각 호의 집 모양은 똑같음.)
* 청사로 썼던 연립주택은 1997년 철거되고, 그 자리에 현재 아파 트가 들어섬.
■ 1994. 4. 19. 이봉원, 청사 건물 발견 최초 촬영
사적지 설명 : 1937년 11월, 중일전쟁이 강남으로 확대되자, 중국정부는 난징을 떠나 쓰촨성 충칭으로 천도했다. 그렇게 되자 한국의 임시정부와 요인, 가족들도 피난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난징을 떠난 지 수일이 지나, 일행은 대륙 교통의 요지인 후베이성 우한에 도착했다. 그리고 며칠 뒤 임시정부와 광복진선 3당의 대가족은 세 집단으 로 나눠, 목적지 창사를 향해 우한을 출발했다. 이어 도착한 후난성의 성도 창사(長沙). 임시정부는 서원북리에 있는 한 신축 건물을 임시 판공처로 삼았다. 그러나 양자강을 따라 내륙으로 진군을 계속하는 일본군이 이듬해 7월 초 후난성의 경계선을 넘보기 시작하자, 1938년 7월 임시정부와 대가족은 중국 최남단의 도시 광쩌우를 향해 한여름 폭염 속에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최초 확인 경위 : 이봉원은 1994년 4월, 이 건물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건물이 남아 있었고, 주소도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연립주택은 3년 뒤 철거되어 현재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현재 상황 : 한동안 독립기념관 자료집에는 이 집 주소를 잘못 기재(서원북리 1번지와 2번지)한 채, 현재 건물 사진만 올려 놓고 있었는데, 이봉원의 꾸준한 이의 제기로 지금은 주소를 바로 잡았다. 그러나 이봉원이 촬영한 당시 건물 사진은 현지에 가서 주민들에게 보여 주면 이내 확인할 수가 있는데도 아직까지 현재의 아파트 사진만 올려 놓고 있다.
(당시 건물 1994. 4. 19.) (현재 건물 2011. 1. 10.)
ㅇ 시안(西安), 광복군 제2지대 병영이 있던 자리 ‘두곡양참(杜曲糧站)’
[현주소] 長安縣 杜曲鎭 杜曲糧站
* 1994년 3월, 현지 주민들의 증언으로 확인.
* 1998년 10월, 당시 현지에서 훈련을 받았던 노광복군들을 모시고
가서 재확인
* 2014. 5. 29. 현지에 중국정부가 '광복군 제2지대 표지석'을 세움.
■ 1994. 4. 19. 이봉원 발견, 촬영
사적지 설명 : 1944년 10월, 미국의 전략첩보기구 OSS 본부가 중국 쿤밍에 설치됐다. 이 즈음 남방에서 제해 제공권을 거의 상실한 일본이 본토 방어에 필수적인 전초 기지 확보를 위해 옥쇄전술로 나가자, 이에 연합군은 정규전 외에 첩보전을 강화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첩보전이야말로 한국광복군의 현실에서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OSS는 즉각 한국광복군을 한반도와 일본에 투입하여 유격작전을 수행하는 독수리작전을 수립했다. 이러한 한미합작 OSS훈련 계획은 양측 실무진들의 검토를 거친 뒤 임시정부에 보고됐고, 김구는 1945년 4월 3일 이를 승인했다. 중국의 장졔스도 이 특공 계획을 지지했다. 이에 따라 광복군 제2지대가 시안 두곡마을에 주둔하면서 한미합작특공훈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시안 시내에서 남동쪽으로 20킬로미터쯤 가면 두곡진(杜曲鎭)이란 마을이 나오고, 그 곳에 이 지역 쌀수매창고인 두곡양참(杜曲糧站)이 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예전에는 노야묘(老爺廟)라 불리는 관운장 사당이 있었는데, 이부가에서 옮겨온 광복군 제2지대는 이 사당을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OSS훈련을 위한 병영으로 사용했다.
최초 확인 경위 : 광복군 제2지대원이며 이범석 지대장의 부관으로 현지에서 OSS특공훈련을 받았던 김준엽 지사가 쓴 자서전 ‘장정’에서 관련 정보와 사진을 구해, 이봉원은 1994년 4월 현지를 방문했다. 그런데 광복군이 주둔했던 곳이라던 사진은 현지에서 찾아가 보니, 전혀 관련이 없는, 고찰 흥교사였다. 사찰 주지를 만나 면담을 했는데, 1945년에도 자신이 이 사찰에 있었는데 그때 한국사람이라곤 지나가다 들렀다는 두 남자를 본 기억밖에 없다고 했다. 그래서 허탈해진 마음에 흥교사를 나와 인근 마을들을 헤매며 주민들을 만났다. 마침, 한 마을 사랑방 같은 원두막에서 놀고 있는 너댓 명의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고, 그분들한테서 결정적인 증언을 들었다. “두곡 마을에 노야묘라 불리는 관운장 사당이 있었어요. 지금은 양곡 수매 창고가 들어섰는데, 당시 그 곳에는 한동안 2백 명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살았지요. 미국인도 있었지만 주로 조선의 젊은이들이었어요. 가끔은 조선인 여자들도 보였고요. 그런데 그들은 동네 주민하고는 일절 말을 나누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그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이봉원은 ‘두곡양참’이 광복군 병영이 있던 자리란 것을 즉각 알 수 있었고, 2008년 10월에는 당시 그 곳에서 훈련을 받았던 노광복군 몇 분을 모시고 가서 거듭 확인을 했다.
(1994년 4월 말 귀국한 뒤, 몇 년 지나서, 이봉원이 김준엽 지사를 다시 만나, 자서전에 올라 있는 사진은 어떻게 된 것이냐고 여쭸더니, 지사께선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자서전을 쓸 때 그 두곡마을을 다녀온 어느 분이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이며, 이 곳에서 특공훈련을 받지 않으셨냐고 묻는데, 하도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거렸지만 그런 것 같기도 해서 그 사진을 자서전 초판에 실었었어요. 그런데 최근 내가 직접 현지에 가서 보니 그 사진은 흥교사 사진이 맞더라고요. 우리가 있던 곳하곤 전혀 상관이 없는··· 허허허!”)
현재 상황 : 2014년 5월 29일, 현지에 중국정부가 '광복군 제2지대 표지석'을 세우고, 현지를 공원으로 조성했다.
(1945년 당시 병영) (1994. 4. 9. 촬영) (1998. 10. 14. 촬영)
(2014. 5. 29. 표지석 제막식 날)
ㅇ 시안(西安), 김구 주석이 해방 소식을 처음 들은 곳, ‘황루(黃樓)’
[현주소] 산시성(陜西省) 성정부 구내
* 당시 산시성 주석 쭈싸오쩌우(祝紹周)의 관저
* 현재 지방문화재로 일반인 접근 금지
■ 1999. 3. 9. 발견, 촬영
사적지 설명 : 1945년 8월 7일, 시안 제2지대 본부에선 한국광복군을 대표한 김구와 미군을 대표한 도노반 소장이 만나, 적 일본에 대해 한미 연합작전이 시작됐음을 선언했다. 다음 날 김구는 종남산에서 대원들의 시범 훈련을 참관했고, 10일 오후에는 시안 시내에 있는 성주석 공관에서 쭈싸오쩌우 장군이 베푸는 연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김구 일행은 일제 항복 소식(포츠담선언 수락)을 듣게 되고, 김구는 반갑지만도 않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왜냐 하면 이 날은 우리 광복군이 한반도 상공으로 출동하기 딱 이틀 전이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군이 연합군의 일원이 되어 일본군과 정식으로 전투를 벌일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이었는데 그것이 그만 매우 안타깝게도 무위로 돌아간 것이다.
(윤경빈 지사 증언 : “쭈 주석하고 우리 김구 선생님하고는 본시부터 잘 아는 사이였어요. 그쪽에서 대단히 환영을 하시고, 정말 오래간만에 만났다고 감회가 깊어서 서로 부둥켜안고 기뻐했어요, 처음엔. 그리고 만찬이 한참 진행되는데 전화가 왔다고 해서··· 전화 받으러 간 쭈 주석이 돌아오면서 하는 말이,‘아, 일본이 손들었다. 항복했다. 지금 내가 충칭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일본이 항복했다.’ 포츠담선언을 수락했다. 이거예요, 그때 얘기가···! 그런데 그 순간 김구 선생님께선 아주 섭섭한 표정이었어요. 그리고 만찬장을 나오시면서 눈물까지 흘리셨어요. ‘우리가 그래도 이 2차대전에서 피를 조금이라도 흘려서 우리 민족도 이 전후 처리에서 뭔가 요만한 권리라고 몸에 지녀야 하는데, 거기에 대한 희망을 상당히 걸었었는데, 아무것도··· 이젠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라고 하시면서 말예요.”)
최초 확인 경위 : 시안에 사는 지인(중국 희곡작가)을 통해 쭈싸오쩌우의 사진을 구하는 과정에서 나는 뜻밖에 황루가 당시 쭈 주석의 관저였음을 알았다. 그런데 이곳은 일반인이 방문할 수도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장소란 것을 알고, 고심 끝에 주중 한국대사관의 협조를 구하기로 했다. 마침내 1999년 4월 나는 한국대사관이 발행한 공문(촬영 협조 요청)을 지참할 수가 있었고, 그 힘으로 산시성 성정부 구내로 들어가 본관 건물 뒷마당에 있는 황루를 촬영할 수가 있었다. 건물 앞엔 두 명의 군인이 서 있었고, 건물 안은 커다란 기둥만 몇 개가 건물 외양과는 다르게 을씨년스럽게 서 있을 뿐 텅 비어 있었다. 지방 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황루는 평소에도 군인들이 경비를 서며 일반인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는 말을 안내자한테서 들었다. 바로 이곳에서 평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왜적과 싸웠던 백범 김구 선생께서 그토록 간절히 기다렸던 조국의 해방 소식을 듣고서도 너무나 큰 아쉬움에 눈물을 흘렸다는 생각을 하자, 나도 모르게 내 눈에서도 한 방울 눈물이 볼 위로 흘러내렸다.
현재 상황 : 독립기념관 자료집에는 시안에 소재하는 18곳의 사적지를 수록하고 있지만, 무슨 까닭인지 황루는 빠져 있다.
(산시성 성정부 구내에 있는 황루 1999. 3. 9.)
ㅇ 노광복군(일본군대 탈출 학병)들의 탈출 경로와 현장
- ‘서주, 고진, 숙주, 부양, 임천, 서안, 중경’
■ 1998. 10. 노광복군들과 함께 답사
사적지 설명 : 1944년 2월, 일본 육군 이등병의 군복을 입은 한국인 학병들은 중국 베이징에서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아홉 시간을 달려 쟝쑤성(江蘇省)의 쉬쩌우(徐州)시에 도착해 일본군부대에 배속됐다. 그리고 한 달 뒤부터 이들 중 상당수가 제각기 부대를 탈출해 광복군이 됐는데, 그들 중 일부는 푸양(阜陽)시 짜오펑 마을(三塔鎭 趙朋)에서 1943년 3월부터 주둔하고 있던 광복군 제3지대에 합류했다.
최초 확인 경위 : 1998년 10월, 조국 광복 때까지 중국 땅에서 일제와 싸웠던 노광복군 몇 분이 옛 전적지들을 찾아 나선 여정에 동행할 기회를 얻은 이봉원은, 10박 11일 동안 그분들 곁에서 증언을 듣고 현장을 취재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한국광복군 제3지대가 주둔했던 마을을 비롯하여 여러 곳이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 상황 : 독립기념관 자료집에 ‘미확인’으로 되어 있던 사적지(三塔鎭 趙朋)가 이봉원의 제언으로 독립기념관 연구원들의 재조사 과정을 거쳐 수정되었다.
(전적지들을 둘러보는 노광복군 일행 1998. 10. 11.)
(광복군 제1지대가 주둔했던 충칭시 남안 탄자석 현장 1998. 10. 15.)
(광복군 제3지대가 주둔했던 푸양시 삼탑진 짜오펑 마을 1998. 10. 11.)
ㅇ 기강(綦江), 임시정부 청사가 있던 ‘임강가(臨江街) 43호’ 자리
[현주소] 重慶市 綦江縣 古南鎭 沱灣 8호
* 애국지사 박영준, 신순호, 지복영과 유족 김자동의 증언 일치
■ 2005. 9. 이봉원, 현지 주소 최초 확인
■ 2007. 1. 19. 현지 촬영
사적지 설명 : 1937년 11월, 중일전쟁이 강남으로 확대되자, 중국 정부는 난징(南京)을 떠나 쓰촨성 충칭(重慶)으로 천도했다. 그렇게 되자 쟝쑤성의 쩐쟝(鎭江)과 난징에 흩어져 있던 임시정부의 요인과 가족들도 피난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창사, 광쩌우, 류쩌우를 거치는 유랑생활을 한 임시정부는 1939년 5월 마침내 충칭이 코앞에 닿아 있는 치쟝(綦江)현에 도착하여 이 지역 강변(臨江街)에 임시 판공처를 둔다. 그리고 1940년 9월 충칭으로 다시 옮겨갈 때까지 그 집에 1년 5개월쯤 머물렀다. 그런데 정부(독립기념관)는 이 곳(옛주소 임강가 43호)의 현재 주소가 ‘상승가(上升街) 27호’라면서, 지금은 도시재개발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엉뚱한 건물 사진과 함께, 자료집에 소개하고 있다.
최초 확인 경위 : 당시에 상승가 27호에서 20여 미터 떨어진 이웃집(상승가 107호)에 살았던 신순호 여사(애국지사, 당시 18세)는, 임시정부 청사는 주택가 속에 있는 상승가 27호가 아니라, 거기서 조금 떨어진 기강의 강변에 있었고, 1990년 5월에 부군인 박영준 선생(애국지사, 당시 25세 현지 거주)과 함께 현장을 방문하여 확인을 했다며, 강변 사진(*사진-1)을 이봉원에게 제공하고 증언했다. 또 지복영 여사(애국지사, 당시 21세)도 ‘그때 임시정부 어른들께선 길 아래 강가에 집 한 채를 얻어서 계셨다.’고 생전에 증언했고, 그것을 녹화한 테이프도 이봉원은 가지고 있다. 또 당시 청사 건물에 살았던 김자동 선생(당시 12세, 현재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은 2005년 8월에 백여 명의 답사단을 이끌고 현지로 가서, 기강의 강가에 있는 청사 터(*사진-2 아파트 자리)를 확인하고 돌아온 바가 있다. 김자동 선생은 아직도 임시정부 청사의 당시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이봉원은 2005년 9월 관련 사진들을 현지로 보내 그 곳 주민들의 사실 확인으로 그 곳의 현재 주소가 ‘고남진 타만 8호’임을 처음으로 밝혀 냈고, 2007년 1월에는 현지를 방문하여 그 지형이 여러 증언과 같음을 재확인(*사진-3)했다. 지금의 ‘타만’이란 지명도 임시정부가 그 곳에 자리잡은 뒤 ‘임강가’로 바뀌었다가, 그 뒤에 다시 ‘타만’으로 고쳐졌다는 것이 신순호 여사와 현지인들의 증언이다.
현재 상황 : 2007년 5월 국회 공청회에서 토론자로 나선 이봉원이 독립기념관 자료가 잘못되었다고 이의를 제기하자, 정부는 2007년 여름에 독립기념관 연구원들을 현지로 보내 재조사까지 벌이고도 그 해 12월에 발간한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 실태조사 보고서’에서 이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았다. 나중에 이봉원이 조사자의 한 사람과 직접 통화를 통해 확인한 바로는, 연구원들이 현지 지방정부 기록보관소에 가서 관련 자료가 있는지 조사했지만 소득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조사 보고서에 그와 같은 내용을 아예 싣지 않았다는 해명이다. 독립기념관은 당시에 현지에서 살았던 임시정부 요인 자녀들의 생생한 증언들보다 중국 현지 지방정부의 근거 없는 제보만 중요시한 채, 지금도 ‘상승가 27호’(지금은 재개발로 주소지 확인 불가. *사진-4)가 기강현의 임시정부 청사 터라고 자료집에 올려 놓고 있다.
(사진 1- 1990. 5. 박영준 촬영) (사진 2- 2005. 8. 답사단 촬영)
(사진 3- 2007. 1. 이봉원 촬영) (사진 4- 2007. 1. 이봉원 촬영)
2.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독립유공자와 관련 인사 38명 면담 녹화
나는 1997년부터 수년 간, 중국에서 항일 투쟁한 애국지사 수십 분을 개별 면담하고 귀한 증언을 녹화 촬영하였다. 그때까지는 이분들한테서 제대로 증언 녹취한 사람이나 기관이 없었는데, 이후에는 이분들 중에 상당수가 작고하거나 연로하여, 뒤늦게 녹취를 시도한 정부 기관에서도 제대로 증언을 기록할 수가 없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인사 영상 인터뷰 목록>
* 증언자 : 38명 (DVD 50장 수록)
인터뷰 대담 촬영 : 이봉원 (기록영화제작가)
인터뷰 시기 : 1997년 ~ 2000년
가) 애국지사 31명
박영준 지사 (1915. 11. 1. 만주 용정 ~ 2000. 3. 27.)
* 박찬익의 3남, 광복군 제3지대 부지대장,
독립유공자협회 회장
- 1997. 11. 7. 상도동 자택에서 녹화
- 1998. 9. 4. 분당 자택에서 녹화
DVD 1장 36분
신순호 지사 (1922. 1. 22. ~ 2009. 7. 30.)
* 임정 재무부 차장 신환의 딸, 광복군 총사령부
- 1997. 11. 7. 상도동 자택
- 1998. 9. 4. 분당 자택
- 2007. 9. 18. 분당 자택
DVD 1장 60분 * 사진 자료
지복영 지사 (1919. 5. 10. ~ 2007. 4. 18.)
* 지청천의 차녀, 광복군 총사령부
- 1997. 11. 7. 평촌 자택
- 1998. 9. 16. 평촌 자택
DVD 2장 각 52분, 40분
김유철 지사 (1909. 3. 21. ~ 2002. 10. 11.)
* 낙양군관학교 1년 수료, 중국군 소위,
광복군 총사령부, 임시정부 외무부 총무과장
- 1997. 11. 12. 광명 자택 (1/2)
- 1997. 12. 23. 광명 자택 (2/2)
DVD 2장 각 54분, 27분 * 2/2 앞 부분에 사진 자료
민영수 지사 (1921. 7. 25. 상해 ~ 2011. 12. 5.)
* 민필호 님의 장남, 광복군 제2지대
- 1997. 11. 15. 서울 자택
DVD 2장 각 44분, 39분 * 2/2에 사진 자료
김정숙 지사 (1917. 2. 16. ~ 2012. 7. 4.)
* 김붕준의 딸, 광복군 총사령부
- 1997. 11. 18. 서울 자택
DVD 2장 각 45분, 25분
이강훈 지사 (1903. 6. 13. ~ 2003. 11. 12.)
* 상해 황포탄 의거
광복회 회장
- 1997. 11. 19. 방배동 자택
DVD 1장 33분
김국주 지사 (1924. 8. 9. ~ )
* 광복군 징모제6분처, 광복군 제3지대
광복회 회장
-1997. 11. 21. 평촌 자택
DVD 1장 60분 * 3지대 사진 자료
장 철 지사 (1922. 10. 26. ~ 2008. 9. 23.)
* 한국청년전지공작대, 광복군 제2지대
광복회 회장
- 1997. 11. 22. 평촌 자택
DVD 1장 47분 * 2지대 사진 자료
엄기선 지사 (1929. 1. 21. 상해 ~ 2002. 12. 9.)
* 엄항섭의 장녀
광복진선청년공작대
- 1997. 11. 28. 대전 성산 성결교회
DVD 2장 각 55분, 43분 * 2/2에 사진 자료
윤경빈 지사 (1919. 1. 14. ~ )
* 한광반, 임정 경위대장, 광복군총사령 부관
광복회 회장
- 1997. 12. 1. 분당 자택
DVD 2장 각 59분, 51분 * 2/2에 사진 자료
김유길 지사 (1919. 2. 4. ~ )
* 한광반, 광복군 제2지대원
- 1997. 12. 5. 군포 자택
DVD 1장 60분 * 사진 자료
선우진 지사 (1921. 5. 1. 만주 ~ 2009. 5. 17.)
* 광복군 징모 제6분처, 임시정부 경위대
백범 비서
- 1997. 12. 10. 백범기념사업회 사무실
- 1998. 8. 10 백범기념사업회 사무실
DVD 4장 각 56분, 49분, 56분, 51분
오희옥 지사 (1926. 5. 7. 길림성 ~ )
* 낙양분교 교관 오광선의 차녀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한국독립당
- 1997. 12. 16. 대방동 자택
DVD 1장 27분 * 사진 자료
전리호 지사 (1922. 2. 26. ~ 2013. 10. 25.)
* 한광반, 광복군 제3지대
- 1997. 12. 31. 하남시 자택
DVD 1장 45분
한재갑 지사 (1921. 9. 23. ~ 2002. 5. 11.)
* 광복군 제1지대
- 1998. 1. 23. 서울 독산동 자택
DVD 1장 61분 * 사진 자료
조문기 지사 (1926. 7. 29. ~ 2008. 2. 5.)
* 부민관 폭탄 의거
- 1998. 2. 6. 수원 천천아파트
DVD 1장 53분
김우전 지사 (1922. 2. 12. ~ )
* 한광반, 광복군 제3지대
광복회 회장
-1998. 2. 17. 분당 자택
DVD 2장 각 53분, 28분 * 사진 자료
김영일 지사 (1925. 9. 1. ~ 2011. 2. 28.)
* 광복군 제3지대
광복회 회장
- 1998. 3. 10. 서울 광복군동지회 사무실
DVD 1장 30분
정일수 지사 (1924. 9. 10. ~ 2008. 3. 19.)
* 일본군대 탈출, 조선부흥의용대 조직
광복군 제1지대 제1구대 제2분대장(부위)
- 1998. 4. 15. 평촌
DVD 1장 61분 * 자료 사진
정영국 지사 (1910. 2. 3. ~ 2001. 7. 13.)
* 항일결사 반제동맹 조직, 한인애국단 단원
- 1998. 4. 16. 한신 신반포 아파트
DVD 1장 30분 * 자료 사진
김형석 지사 (1912. 4. 27. ~ 2009. 3. 29.)
* 중국중앙군 대위, 광복군 제1지대 파견 근무
대만정부 총통부 작전참모장
- 1998. 8. 26. 서울
DVD 1장 18분
박기벽 지사 (1915. 6. 24. ~ 1999. 6. 2)
* 미군 복무, NAPKO작전 참여
(미국 캘리포니아 Reedley市 거주)
- 1998. 8. 18. 서울 앰버서더 호텔에서
DVD 1장 17분 * 자료 사진
김준엽 지사 (1920. 8. 26. ~ 2011. 6. 7.)
*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 부관
고려대학교 총장
- 1998. 9. 23. 사회과학원 이사장실
DVD 2장 각 50분, 30분
김영록 지사 (1921. 9. 8. ~ 2004. 9. 12.)
* 한광반, 광복군 제1지대
- 1998. 11. 4. 분당 자택
DVD 1장 26분
백정갑 지사 (1919. 5. 22. ~ 2006. 1. 13.)
* 한광반, 임시정부 경위대
- 1998. 11. 4. 서울 창동 자택
DVD 1장 20분
석근영 지사 (1921. 11. 12. ~ 2015. 11. 7.)
* 한광반, 광복군 제2지대
- 1998. 11. 9. 독립유공자 사무실
DVD 1장 49분
인순창 지사 (1919. 4. 8. ~ 2010. 1. 23.)
* 중국군 군통국 (남의사) 요원, 광복군 제2지대
- 1998. 11. 28. 독립유공자 사무실
DVD 1장 33분
이윤장 지사 (1922. 5. 6. 중국 북경 ~ )
* 이광의 장남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수료,
광복군 제2지대
- 1999. 2. 12. 장위동 자택
DVD 1장 28분
김승곤 지사 (1915. 1. 7. ~ 2008. 2. 24.)
* 조선의열단 2기생, 조선의용대
광복군 제1지대 본부 구대장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비서
광복회 회장
- 1999. 2. 19. 종로 사무실
DVD 2장 각 61분, 52분
김영진 지사 (1927. 7. 10. ~ )
* 한광반, 광복군 제3지대
초모공작 중 피체, 난징 감옥 수감
한성수 대원 순국 증언
- 2000. 5. 25. 서울 반포 아들 집
DVD 1장 55분 * 자료 사진
나) 지사 가족 6명
조규은 여사 (1912. 11. 11 ~ 2004. 9. 9.)
* 조완구의 차녀
- 1997. 11. 28. 대전 유원 아파트
DVD 1장 40분 * 중간과 마지막에 사진 자료
최윤신 여사 (1917. 4. 7. ~ 2014. 2. 14.)
* 박은식의 며느리
- 1997. 12. 3. 방배동 자택
DVD 1장 45분 * 사진 자료
김정륙 선생 (1935. 3. 25. 남경 ~ )
* 김상덕의 아들
- 1997. 12. 5. 종로5가 효오기원
DVD 1장 53분 * 사진 자료
김자동 선생 (1928. 10. 17. 상해 ~ )
* 김의한, 정정화 지사의 아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
- 1997. 12. 11. 서울 신정동 자택
- 1997. 12. 16. 서울 대방동
DVD 1장 54분 * 사진 자료
옥인애 여사 (1920. 3. 24. 상해 ~ )
* 옥성빈(임시정부 초대총무)의 딸
- 1998. 3. 11. 서울 분당
DVD 1장 28분
이신길 여사 (1920. 9. 25. ~ )
* 상해 인성학교 졸업
민족혁명당원 김영재의 아내
- 2003. 10. 11. 수원 보훈복지타운
DVD 1장 58분 * 자료 사진
다) 그 밖에 1명
최태영 박사 (1900. 3. 28. ~ 2005. 11. 30.)
* 백범이 설립한 ‘장련 기독 광진학교’ 졸업생
2·8 독립 선언과 3·1 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름.
역사학자, 법학자, 서울대학교 초대 법대학장 역임
- 1999. 2. 10. 인천 자택에서
DVD 1장 63분
3. 관련 서적과 방송물 제작
[3-1] 장편소설 ‘국새 1, 2권’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재)
2006. 시대의창
개요 :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의 역사를 배경 삼아 팩션 형식으로 쓴 미스테리 장편소설이다. 등장인물 열 명이 임시정부 유적지들을 한 달 간 순례하는 가운데, 갖가지 사건이 벌어지고, 신종 친일파의 가면도 벗겨진다.
줄거리 :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 역사의 귀중한 자료가 든 열 개의 문헌 상자들이, 1953년 여름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분실돼,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존재가 오리무중 속에 분실 경위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런데, 2005년 2월 하순, 그때 문헌들과 함께 분실된 것으로 알려졌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새가 중국 베이징(北京) 류리창 골동상가에서 발견됐다는 소식이 한 언론에 보도되면서, 관련 학계와 언론사, 국민들은 경악과 충격에 휘말린다.
인터넷신문 시민기자인 정내리는 중국 땅에서 문제의 국새를 찾았다는 방송작가 이매송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한 여행사가 긴급히 마련한 ‘임시정부 27년 유적지 답사’ 프로그램에 참가한다.
여행사 사장과 조선족 현지 가이드를 합쳐 총 11명으로 짜진 1차 답사단은, 3월 15일부터 한 달 예정으로 중국 내 대륙 여행을 시작한다.
답사단은 임시정부 유적지와 그때 지사와 대가족이 떠돌았던 이동 행로를 그때와 같은 교통편을 이용해 되밟아가며 현지 답사를 하는데, 그런 과정에서, 저마다 사연과 비밀을 가지고 있는 일행은 갖가지 사건을 일으키게 되고, 그것이 다시 뒤엉키면서, 서로 오해하고 경계하게 된다.
특히 쩐쟝(鎭江)에서 만난 중국인 역술가한테서, 여행 중에 일행 속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할 것이란, 예언을 들은 뒤부터는 상호 불신이 더욱 커지고, 불안감과 두려움은 극에 달한다. 그런 가운데 마침내 그 예언은 현실이 되고, 일행은 중국 경찰의 수사를 받기에 이른다. 그러나 범행 단서를 찾는 데 실패한 경찰은 이들을 무혐의 처리하여 석방하고, 답사단은 여행 종착지인 시안(西安)에 도착한다.
답사 마지막 날, 어떤 계기로 사건의 원인과 범인이 차례로 밝혀지면서, 그간의 미스테리가 전부 풀리고, 특히 지금까지도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1938년 5월 창사 남목청에서 터진 김구 피격 사건의 배후가 드러난다.
정내리 기자는 이러한 일들을 모두 취재하여, 서울에 도착한 뒤 곧바로 인터넷신문을 통해 특종 보도한다. 그로써 사건은 일단락되는가 싶더니, 또 한 차례의 마지막 반전이 그를 놀래킨다.
본문에서 : “임시정부가 피난했던 길도 유적지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여러분도 이미 일정 부분 경험하셨으니 지금쯤은 다들 공감하시리라 믿습니다만, 배를 타고 산을 넘어야 하는 그 험난한 노정 자체야말로 피난지의 어떤 건물이나 장소 못지않은 역사의 현장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번 임시정부 유적지 답사 여행 속에 배 여행과 기차 여행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자동차 여행을 굳이 포함시킨 겁니다. 그때 대가족이 겪은 것에 비하면 기간도 짧고 고생도 훨씬 덜한 수월한 여정이지만, 그래도 주요 도시 몇 군데만 방문하는 유적지 답사 여행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값진 교훈과 감동을 우리는 가져갈 수 있습니다.”
[3-2] 교양서 ‘광복조국’ (한민족 항일 투쟁사 / 공저)
2009. 광복회
항일 독립운동의 역사를 바르게 알고,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을 통해 나라사랑의 가치를 심어 주고자 만든 책이다. 그림과 표를 활용하여 역사를 이해하는 데 시각적 효과를 제공한다.
(목차)
머리글_광복회장
나라사랑을 시작하며…
대한민국 독립운동 주요 연표
절명시_황현
제1장 독립운동의 초석, 의병
제2장 3ㆍ1 독립만세운동
1. 민족대표 33인의 기미독립선언
2. 탑골공원의 거룩한 함성
3. 아우내 장터의 만세소리
제3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1. 대한국민 대한민국
2. 임시정부의 문지기
3. 임시정부가 꿈꾼 나라
제4장 의열 투쟁 이야기
1. 김구와 한인애국단
2. 국내 의열 투쟁
3. 국외 의열 투쟁
제5장 독립군 부대의 무장 항쟁
1. 위대한 승리
2. 불굴의 투혼
3. 한중연합군
4. 의열단의 부활, 조선의용대
5. 최후의 독립군, 한국광복군
부록
1. 자존과 희생, 그 27년
2. ‘대한민국 임시정부’ 문답
[3-3] 교양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바로 알기’
2010. 정인출판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나라 밖 중국에서 27년 간 존재하고 분투했다는 사실은, 일본이 그 기간 동안 한국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 (책 속에서)
(차례)
1. 주요 사진
2. 추천사
- 광복회 회장 김영일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 김자동
3. 책 앞에 (지은이)
4.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연표
5. 알기 쉬운 ‘대한민국 임시정부’ 문답
6. 자존과 투쟁 27년 (다큐멘터리)
-부록-
7. 대한민국 임시정부 문헌과 국새 분실 전말기
8.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운동가 유언
9. 백범의 ‘나의 소원’
10. 중국 내 독립운동 유적지 실태 조사
11. [긴급 제언]
정부는 잘못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를 바로잡아라
ㅇ 본서는 임시정부의 거의 모든 것을 다루었다. 본서에 수록된 3백여 장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27년의 임시정부사, 아니 치열했던 독립운동사가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광복회 회장 김영일)
ㅇ 이 책은 역사교사와 학생 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해하고 항일투쟁사를 바르게 인식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 김자동)
ㅇ 저자는 드넓은 중국을 오랜 기간 드나들며 왜곡된 현장을 바로 잡고 나라가 하지 못한 곳을 발굴한 집념을 보여 줬다.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만열)
ㅇ 개인의 힘으로 국가기관의 실태조사 오류를 적나라하게 지적했는데, 이는 높이 살 만한 업적이다.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
ㅇ 한 세기 전 나라가 망했을 때, 누가 망한 나라를 되살리겠다고 어떻게 애를 썼으며, 그러기 위해 자신과 가족을 어떻게 희생했는지를 알리고 싶었다. (지은이 이봉원)
[3-4] TV 드라마 ‘김구 (16부작)’ 집필
(1995년 광복절 특집 KBS방송)
우리 민족의 영원한 사표인 백범 김구의 일대기를 극화하여 제작한 텔레비전 드라마로 광복 50년을 기념하여 한국방송공사가 전국 방송함.
[3-5] 기록영화 '임시정부 27년 대륙 3만리 (3부작)' 제작
(1999년 광복절 특집 KBS방송)
(제1편) 일어나라 동포여 (45분)
(제2편) 물에 뜬 망명정부 (46분)
(제3편) 그 날은 오고 (47분)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의 역사, 특히 임시정부를 쫓아 중국 대륙 3만 리를 전전했던 애국지사 대가족(171명)의 고달팠던 생활상을, 생존 관련자 40여 명의 생생한 증언과 함께 중국 현지 100여 곳을 추적 탐방하고, 그와 관련된 자료들을 통해, 당시의 실상과 그 의미를 더듬어 본, 제작 기간 6년의 기록영화 3부작.
기획 : 광복회, 한국독립유공자협회
후원 :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문화관광부
제작 : 얄라성 / 대본, 촬영, 연출 : 이봉원
[3-6] 기록영화 '독립운동의 땅, 러시아 연해주를 가다' 제작
(2000년 삼일절 특집 KBS방송)
한민족 독립운동이 국외에서 처음 시작된 지역이면서도 오랫동안 국민들한테 잊혀 있었던 곳, 러시아 연해주 지역을 애국지사 두 분과 함께 탐방하여 제작한 기록영화.
기획 : 광복회,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제작 : 얄라성 / 대본, 촬영, 연출 : 이봉원
4. 중국내 임시정부 27년 노정과 사적지 순례단, 첫 조직 인솔
* 2011년 1월 6일부터 1월 16일까지 중국 내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 전 노정과 사적지들을 10박 11일 여정으로 순례단 27명을 인솔하여 답사를 하였는데, 그 이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이후인 지금까지도 임시정부 전 노정을 이처럼 따라간 답사단은 없다.
* 순례단은 모든 이가 답사기를 한두 편씩 써서, 2012년 8월 “김구 따라잡기”란 제목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 노정 답사기’ (옹기장이 출판)를 전 단원 공저로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