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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라를 죽인 여인 야엘
삿 4:17-24
17 시스라가 걸어서 도망하여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으니 이는 하솔 왕 야빈과 겐 사람 헤벨의 집 사이에는 화평이 있음이라
18 야엘이 나가 시스라를 영접하며 그에게 말하되 나의 주여 들어오소서 내게로 들어오시고 두려워하지 마소서 하매 그가 그 장막에 들어가니 야엘이 이불로 그를 덮으니라
19 시스라가 그에게 말하되 청하노니 내게 물을 조금 마시게 하라 내가 목이 마르다 하매 우유 부대를 열어 그에게 마시게 하고 그를 덮으니
20 그가 또 이르되 장막 문에 섰다가 만일 사람이 와서 네게 묻기를 여기 어떤 사람이 있느냐 하거든 너는 없다 하라 하고
21 그가 깊이 잠드니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가지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의 관자놀이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그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22 바락이 시스라를 추격할 때에 야엘이 나가서 그를 맞아 그에게 이르되 오라 네가 찾는 그 사람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매 바락이 그에게 들어가 보니 시스라가 엎드러져 죽었고 말뚝이 그의 관자놀이에 박혔더라
23 이와 같이 이 날에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하게 하신지라
24 이스라엘 자손의 손이 가나안 왕 야빈을 점점 더 눌러서 마침내 가나안 왕 야빈을 진멸하였더라
삿 4:17-24 / [죽음을 맞이한 시스라] 재빨리 도망 친 시스라는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으로 뛰어 들어갔다. 시스라가 겐 사람인 헤벨 가문이 살고 있던 지역으로 도망 친 것은 헤벨 가문이 하솔왕 야빈과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18) 야엘은 시스라가 도망 쳐 왔다는 말을 듣고 시스라를 맞이하려고 밖으로 나갔다. 야엘이 그를 맞이하면서 `어르신네, 어서 오십시오. 잘 오셨습니다. 누추하지만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아무 염려하지 마세요' 하고 위로하자 시스라는 그의 장막으로 들어갔다. 야엘은 무서워 떨고 있는 그를 ㄱ) 이불로 덮어 주었다. (ㄱ. `휘장 뒤에 숨겨 주었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19) `마실 물 좀 주시오. 무척 목이 마르오' 하고 시스라가 청하였다. 야엘은 젖을 넣어 두는 가죽부대를 열어 그의 목을 축이게 하고는 다시 이불을 덮어 주었다. 20) 그러자 시스라가 장막 앞에 서서 밖을 살펴보다가 `어떤 사람이 와서 여기에 싸움터에서 도망쳐 온 사람이 혹시 있느냐고 묻거든 여기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고 대답해 주시오' 라고 말하고는 너무나 피곤에 지친 나머지 깊이 잠들었다. 21) 헤벨의 아내 야엘은 `때는 이때다!' 싶어 장막을 고정시켜 두었던 말뚝을 하나 뽑아 들고 망치를 가지고 와서는 깊이 잠들어 있는 시스라에게 살금살금 다가가서 뽑아 든 그 말뚝을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대고 망치로 힘껏 내리쳤다. 얼마나 힘껏 내리쳤던지 그 말뚝이 시스라의 머리를 꿰뚫고 땅바닥에 박히고 말았다. 시스라는 너무 지쳐 있었기 때문에 아무 소리도 못내고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22) 이때 바락이 시스라를 뒤쫓아와 야엘이 살고 있는 장막까지 이르렀다. 야엘이 나가 그를 맞으며 `어서 오십시오, 장군님. 장군님께서 찾고 있는 사람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일러주었다. 바락이 야엘을 따라 그녀의 장막 안으로 들어가 보니 시스라가 관자놀이에 말뚝이 박힌 채 죽어 있지 않은가! 23)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서 가나안 왕 야빈을 쓰러뜨리셨다. 24) 그 뒤 이스라엘 사람들은 힘을 합쳐 더욱더 가나안 왕 야빈을 내리눌러 결국에는 그 가나안 왕 야빈과 그를 따르는 세력들을 완전히 쓸어 버렸다.
시스라는 드보라의 예언대로 여인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9).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야빈을 몰아내게 하셔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구원자가 누구인지를 나타내십니다.
시스라를 죽인 야엘(17-21) 도주로 지친 시스라는 헤벨의 아내 야엘의 집에 몸을 숨깁니다. 하솔 왕 야빈과 헤벨 사이에는 화친관계가 있었기에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야엘도 시스라를 극진히 환대해 주고, 그가 쉬면서 기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제공해 줍니다. 시스라는 모든 경계심을 놓고 편안하게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야엘이 갑작기 돌변합니다. 야엘은 시스라가 잠든 것을 확인한 후 나무 망치와 장막의 말뚝을 이용해 시스라의 머리를 박아 죽입니다. 야엘의 이런 모습은 처음부터 이렇게 하기로 계획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야엘이 왜 화친관계에 있던 야빈의 부하를 죽였는지 어떤 설명도 없습니다. 야엘의 행동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미리 말씀하셨던 일이 일어난 것은 분명합니다. 드보라의 바락에게 전해준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4:9)
진멸한 야빈(22-24) 야엘은 시스라를 추격하던 바락을 만나 장막 안으로 안내합니다. 바락은 장막 안에 비참하게 죽어 있는 시스라의 모습을 보면서 적잖이 당황했을 것입니다. 특별한 상황을 경험하면,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떠오르거나 자신의 부족했던 모습을 알게 됩니다. 충격적인 상황을 보면서 바락에게 두 가지 사실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드보라를 통해 예언한 상황이라는 것과 그리고 이 일은 바락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온전한 믿음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에 생겼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시스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시작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왕 야빈을 점차 몰아내고 진멸시킵니다. 성경은 이 모든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진 일인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굴복하게 하신지라”(23)
적용 지난 날의 후회는 돌이킬 수 없는 일로 끝났지만, 새로운 마음은 미래를 위한 중요한 변화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교훈을 받은 경험이 있습니까?
야고보는 인내를 믿음의 시련에서 만들어진다고 했습니다. 누워있는 나무는 열매를 낼 수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수많은 태풍 속에서도 굳건히 서 있는 나무에서 열매가 열립니다. 시련을 두려워하거나 피하기보다 이겨내야 합니다. 삶에서 예고 없이 닥쳐오는 갖가지 시련들이 기쁨으로 갈 수 있는 이유는 ‘인내’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시련을 넘긴 자는 더 큰 시련도 이길 수 있으며 더더욱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시련은 더 높고 넓은 곳으로 가는 데 다리가 되며 버틸 수 있는 에너지입니다. 인내는 천국으로 가는 에너지입니다.
< 설 교 >
전쟁과 같은 삶이 평온함으로
삿 4장 17~24절, 5:24-27 / 해운대교회
서론>
사사기에는 많은 영웅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이 아직 왕이 없을 때 평소에는 재판관으로서 송사를 담당하고 있다가도 유사시 전쟁이 터지면, 이스라엘 민족을 적으로부터 구출하는 구원자가 바로 사사들이었습니다. 사사기에서 만나는 사사들은 모두 12명이며 1명을 제외하고 모두 남자들이었습니다. 그 1명은 바로 드보라입니다. 그녀는 사사이면서 동시에 선지자의 역할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야엘의 이야기는 드보라 사사의 이야기 속에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여인이 사사이며 선지자라는 사실은 매우 이례적이며, 한편으로는 낯설게 느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사도 선지자도 한 나라의 장군이나 병사도 아닌, 더구나 남자도 아닌 여인이 적장을 죽인 것은 그 당시에도 그랬지만, 현대에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영웅으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를 영웅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야엘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분도 있습니다. 야엘은 영웅이 아니라 부도덕한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야엘이 적장 시스라를 죽인 것은 교활한 행동이었으며, 시스라를 대접한 것을 두고, 예를 들면 자기 장막에 들이는 것, 이불을 덮어준 것, 우유 부대를 열어서 먹인 행위를 두고 성적 행위를 묘사한 것으로 보는 자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과연 이러한 시각이나 해석이 사사기를 기록한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것인지 우리는 되물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기자를 통해서 겐 족속 헤벨의 아내 야엘이 이스라엘을 구한 영웅이라는 것과 그녀의 부도덕한 행위를 말하려고 사사 드보라의 이야기에 포함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사기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자손들의 삶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입니다. 그 말씀이 삿 17장 6절, 21장 25절, 다른 한 곳에는 사사기의 맨 마지막 장 끝절에 기록돼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이스라엘이 왕정 시대가 아니라 사사 시대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 같지만, 이스라엘의 진짜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성경 기자의 말은, 그들이 왕 되신 하나님을 버렸음을, 그들이 왕 되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아니하고 가나안의 거짓된 신들을 따랐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사 드보라의 이야기의 시작도,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라고 한 것입니다. 이 악은 3장 7절에 보시면,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여호와를 왕으로 삼지 아니하고 그의 법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가나안 신들을 왕으로 삼고 그에게 속한 백성이 되었음을 말씀한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사사기 4장 2절은 하나님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 즉 이스라엘 자손을 파셨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민족이 이스라엘 자손인데, 자기 왕을 버리고 가나안 신을 왕으로 삼았으니, 당연히 그 가나안 신을 왕으로 삼는 백성에게 속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순환이 언제까지 계속됩니까? 사사 시대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 역사에서 반복됩니다.
이러한 배경 가운데 사사 드보라의 이야기 속에 있는 야엘의 활약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야엘의 행위, 즉 시스라를 암살한 행위를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화평을 깬 것은 가나안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17절).
이스라엘 자손이 사사 에훗이 구원자로 있을 때 80년 동안 평온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평온도 사사 에훗이 죽은 후 다시 깨져서 가나안 왕 야빈은 20년 동안을 심히 학대했다고 했습니다. 아마 그들은 가나안 왕 야빈에게 학대를 당하는 것은, 자신들은 가나안에 비해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비교가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자신들은 부족간에 동맹을 맺었지만, 가나안은 강력한 왕정 체제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3절에 보시면, 가나안의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하였으므로”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가나안 족속에게는 청동기보다 앞선 철기 문화의 산물인 철병거가 있었습니다. 이는 세계 역사를 바꾼 10대 무기에 해당할 만큼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철로 만들었다기보다 나무로 틀을 만들고 그 위를 철로 씌운 형태로 쉬운 말로 전차라고 불렀습니다.
본래 말은 사람을 밟는 습관이 없으나 훈련을 통해 사람을 짓밟을 수 있게 되었고 주로 보병끼리 싸우는 고대의 전투에서 말을 끄는 철병거가 적진을 뚫고 사람을 짓밟으면서 돌파한다는 것은 실로 두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 철병거를 두려워하여 20년 동안 그들을 공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적어도 랏비돗의 아내 사사 드보라가 등장하기 전까지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었습니다.
여기 4장 3절은 “그들이 심히 학대를 당하였더라”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드보라의 노래를 보면, 어떻게 그들이 가나안 왕으로부터 학대당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5장 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길의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 그래서 7절은 “이스라엘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쳤으니 나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그쳤도다.” (아멘).
이 말씀은 야엘이 활동하던 시기에 이스라엘의 길들이 사용되기 어려워졌고, 그 길을 사용하던 대상들과 행인들이 길을 돌아서 가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군대가 이스라엘을 통하는 길, 특히 사사 드보라를 중심으로 전쟁에 참여한 지파들이 위치한 길들을 차단하거나 그 길을 통과하는 대상과 행인들에게 많은 통행료를 착취했습니다. 그래서 사사 드보라가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와 전쟁을 하게 된 것은 가나안 군대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무역로가 억압받음으로 생존을 위협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화평이 깨지고 전쟁에 이르게 된 원인은, 그보다는 어디에 있다는 것입니까? 5장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무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그때 전쟁이 성문에 이르렀으나” 아멘. 드보라의 이 노래가 보여주듯이 화평이 깨진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새 신 가나안의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왕으로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4장 17절을 보시면,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의 신들과 화평할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과 화평해야 함에도 그들은 새 신을 따라서 그들 스스로 화평을 깼지만, 야엘은 그 반대로 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본문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시스라가 걸어서 도망하여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으니 이는 하솔 왕 야빈과 겐 사람 헤벨의 집 사이에는 화평이 있음이라. (아멘).
가나안의 하솔 왕 야빈과 야엘의 남편 헤벨간에는 화평이 있었다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특히 11절을 보시면, 야엘의 남편 헤벨은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원래 모세의 장인 호밥은 이스라엘과 화평한 관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와 화평한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헤벨은 이스라엘과 원수지간인 가나안 왕 야빈과의 화평한 관계에 있었을까요?
그것은 지리적, 경제적, 정치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헤벨의 가족이 가나안 왕 야빈이 통치하는 하솔에서 가까운 게데스 지역에 장막을 치게 되었으므로 자신들의 생업과 관련되어 정치적, 지리적, 경제적 이유로 하솔에 있는 가나안 왕 야빈과 화평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리적으로는 이스라엘과 가나안 사이에 위치한 경계선상에 있는 족속이었기 때문에 헤벨은 겐 족속이면서 겐 사람들이 거주하는 아랏 남방으로부터 떠나서 북쪽 게데스 지역에서 있는 경계인들이었고,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에서 떨어져 있지만 또 멀지 않아 시스라가 오게 되는 경계에 위치한 족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정치적, 지리적, 경제적 이유로 인해 하솔 가나안 왕 야빈과 화평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헤벨의 아내 야엘은 그것을 깨버립니다. 겐 족속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가나안과의 화평을 깨버립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가나안 신들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야엘은 가나안의 왕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를 돕지 아니하고 그의 생명을 끊어 버립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자손을 돕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것은 곧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야엘의 행위는 가나안을 대적한 것이며, 곧 가나안의 바알과 아세라 신을 배반하는 행위입니다.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정작, 거짓 된 신들과의 화평을 끊어내야 하는 이스라엘 자손은 끊어내지 못했지만, 이방 여인 야엘은 그것을 끊어내었습니다. 대신에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택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알아야 합니다. 세상과 그 세상을 잠깐 지배하고 있는 사탄의 문화와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과 화평을 누리고자 한다면, 하나님과의 화평을 스스로 깨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 가져다주는 것으로 평안을 누리는 자는 결국 세상을 좋아하고 불의한 세상과도 타협하게 되며, 결국 이 세상 신을 섬기게 돼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더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누려야 할 평안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도 간음했고, 가나안의 사탄문화로 간음했습니다. 신약성경 야보고서 4장 4절은 이러한 영적으로, 육적으로 간음한 자들에 대해 경고합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아멘). 여러분이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할 때, 세상과 화평하고자 할 때 그로 인해 영적 간음을 범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서의 삶을 벗어 버릴 때 세상과는 화평할지 모르지만, 세상과 벗이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과는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과 화평을 여러분 스스로 깨버렸기 때문에 더는 하나님이 주시는 화평을 누리지 못하고, 결국 전쟁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는 것이 전쟁터가 되는 것입니다. 가족 간에 화평을 누리지 못하고, 건강도, 직장도 모두가 다 전쟁터가 돼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남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삶이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회복하는 길은, 내 삶이 치유되는 길은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으므로 20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그렇게 부르짖은 결과 하나님께서 누구를 보내주십니까? 사사 드보라를 보내서 이스라엘 자손의 구원자로 세우셨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과 화평하면, 어떤 대적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18~21절). 야엘이 가나안 왕의 군대장관을 두려워했다면, 그와 화평을 깨지 않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야엘이 시스라를 어떻게 하기 전까지는 그녀의 행동을 보면, 철 병거 900대를 가진 전차군단 군대장관 시스라를 두려워했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극진히 그를 환대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므깃도 전쟁에서 대패하고 겨우 목숨만 건진 시스라가 지쳐서 피난처로 삼은 곳이 겐 족속 헤벨의 장막이기 때문입니다. 18절 말씀을 보시면, 야엘은 적극적으로 시스라를 영접합니다. 그에게 자신에게 들어오라고, 들어오시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 후에 야엘은 그를 이불로 덮어 주고 숨겨줍니다. 시스라가 그녀에게 물 좀달라고 청 할 때 마실 물 보다는 영양가가 있는 우유를 대접합니다.
그런 다음 다시 그를 이불로 덮어 줍니다. 시스라는 그녀의 극진한 환대에 안심하고 야엘이 자신의 편임을 의심하지 않고, 자기 부하 다루듯이, 보초를 서게 합니다. 만약, 사람이 와서 야엘에게 시스라의 은신처를 묻거든 여기 없다고 대답해 주라고 합니다. 이러한 시스라에 대한 야엘의 행위는 그 당시 환대 관습에 비추어 볼 때,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야엘의 남편 헤벨과 가나안 왕과는 교류가 있었고, 둘 사이에는 서로 동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스라가 도망하다가 우연히 도착한 것이 아니라 도움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왔다면, 야엘의 환대는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기를 믿고 깊이 잠이 든 시스라를 야엘은 관자놀이에 대고 장막을 땅에 고정하는 장막 말뚝으로 방망이로 쳐서 그의 관자놀이를 꿰뚫어 죽여 버립니다.
순간, 야엘의 이러한 돌변한 태도에 대해서 그녀를 비난하는 성경해석가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신의를 저버린 행위이며 교활한 행위라고 말입니다. 또한 환대도 좋지만, 남편 있는 여인이 남편 외의 남성을 자기 장막으로 끌어 들이는 행위를 보고, 오해를 하는 분도 있습니다. 시스라에게 내 주여 들어오라고, 두 번씩이나 그리고 이불을 덮어 주고 우유 부대로 돼 있으나 이전 한글개역은 젖부대로 번역돼서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의를 저버린 교활하고 비열한 행위가 아닙니다. 야엘이 시스라를 암살할 때는 전시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전쟁의 상황에서는 이런 것을 속임수라고 하지 않고 전술이라고 평가합니다. 야엘은 연약한 여인입니다. 연약한 자가 강자를 이기는 것은 덫을 놓는 전술입니다. 그녀는 덫을 놓아서 시스라를 죽인 것뿐입니다. 이런 방법은 사사 드보라 이전의 에훗 사사도 사용했던 방법입니다.
그는 왼손잡이로서 장애가 있는 사사였습니다. 에훗은 모압왕 에글론에게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속이고 그를 은밀한 방으로 데려간 뒤 거기서 숨겨온 칼로 죽이고 조용히 나옵니다. 그 외에도 여리고의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살려 주기 위해 동족인 여리고 군사들을 속였습니다. 미갈은 다윗을 살려 주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인 사울을 속였고 다윗도 생명을 구하기 위해 가드왕 아기스를 속이고 정신병자처럼 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이들의 행동에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려운 중에도 지혜롭게 이스라엘을 도운 것을 칭찬합니다. 이것은 군사적으로 상당히 훌륭한 전술이지 속임수가 아닙니다. 그리고 시스라를 자신의 장막으로 영접한 행위는 ”들어오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반드시 성적인 초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시스라를 자신의 장막으로 돌이키는 것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담요와 우유는 시스라를 안심시키고 깊은 잠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한 요소들이었습니다. 담요는 따뜻함과 안전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고, 우유는 배고픔을 해결하고 잠들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데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야엘의 행위를 두고서 신의를 저버린 교활한 여자라거나 시스라를 성적으로 유혹해서 암살한 여자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보다도 사사도 아니고 군대 훈련도 받지 못한 한 남편의 아내요, 연약한 여인이 당시 강대국인 가나안 왕의 군대 장관을 대담하게도 장막 말뚝으로 관자놀이에 박아서 죽일 수 있었느냐? 라는 것에 의문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용감하고 칭찬받아 마땅한 행위며 영웅이 되기에 충분한 여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만약, 시스라를 암살하려는 행위가 실패로 돌아간다면, 자신은 물론, 남편과 겐 족속 전체가 살육당할 수도 있음에도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화평하면, 어떤 대적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스라엘이 왜 가나안 왕 야빈을 두려워해서 20년 동안 학대를 심하게 당해서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과 압박과 상실감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까? 가나안의 900대의 전차부대가 무서워서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과 화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과 화평하면 어떻게 될까요? 가나안 왕의 군대장관 시스라도 두렵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그것을 야엘이 증명해 보여준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나 공동체는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고 싸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엘이 마치 룻기에 나오는 모압 여인 룻처럼 하나님의 날개 아래 품으로 들어와서 다윗의 조상 곧 메시아의 조상 보아스를 통해 보호받았듯이, 자신의 동족과 동맹관계에 있는 가나안과 화평을 깨뜨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선택한 야엘에게 하나님은 그와 싸워주시고 승리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대담하게도 여인의 몸으로, 시스라가 지쳐서 잠들어 있을 때, 장막 말뚝으로 그의 관자놀이를 박아서 죽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승리는 비단, 야엘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야엘이 시스라를 암살하기 전에 사사요 여선지자인 드보라와 군대 장군 바락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와 철 병거 900대를 가진 전차부태 가나안과의 전쟁에서도 주어졌습니다. 누가 보기에도 이스라엘은 불리했습니다. 그들이 가진 보병의 숫자나 무기로 보아서 900 마리가 끄는 철로 무장된 전차부대를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 누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누가 보기에도 이 싸움은 이스라엘과 그 대적 가나안 왕과의 싸움인데, 하나님은 이 싸움은 나의 전쟁, 나의 싸움이라고 하십니다. 삿 5장 23절,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주민들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니라.“ (아멘)
이렇게 본다면, 적장 시스라를 죽인 야엘은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야엘을 여호와의 전쟁에 사용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싸우시는 전재의 양상은,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이방 신화처럼,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형상으로 나타나시어서 적들과 싸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삿 5장 4절, 5절 말씀과 20절, 21절 말씀에 그 답이 있습니다. 먼저 4절, 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 “여러분 이것은 출애굽 때를 연상합니다.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니 저 시내 산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도다.
이제 20절, 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 기손 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 이 기손 강은 옛 강이라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 아멘 결국 하나님께서 기손강에 폭우를 부으셔서 그 강의 범람으로 시스라 군대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손강을 범람시켜서 시스라의 군대를 혼란시켰을 때 바락이 이끄는 군대가 다볼 산에서 기손강으로 내려가 어려움에 빠진 시스라가 이끄는 군대를 섬멸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사사 드보라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때, 그들은 철 병거 900대가 이끄는 전차부대도 겁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겐 족속의 헤벨의 아내 이방 여인 야엘을 통해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성경은 5장 24절에 보시면, 그녀를,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들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있는 여인들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 라고 합니다.
그것은 그녀가 여호와께 즐거이 헌신했고 여호와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드보라가 사는 날 동안 다시 40년 동안의 평온이 유지 되다가 그녀가 죽은 후에는 또 다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악을 범합니다. 이러한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그들은 또 다시 미디안의 손에 팔리고 그들을 두려워해서 심지어 백주 대낮에도 기드온 같은 큰 용사는 타작 마당에서 타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포도주 틀에서 타작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사기의 말씀을 통해서 이러한 악순환을 끊어내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평하면, 모든 것이 다 풀일 텐데 왜 계속해서 세상과 화평을 누리려 하고, 이 세상 신이 이끄는 사탄의 문화에 매혹되어서 정신을 못 차리는지,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고 말씀과 멀어지고 교회와 멀어지면, 결국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악을 행할 텐데, 왜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지, 왜 자신들이 이 땅에서 주인이 아니라 종처럼 살아가는지, 왜 자신들이 이 세상 나라와 사람들을 두려워하는지, 이 세상 물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을 두려워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사가 살아 있을 때는 괜찮다가 사사가 죽으면 또다시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고 있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악순환을 끊어내야 합니다. 사사가 우리를 이끌어 주어야만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목회자나 교회 지도자가 아닌 나 자신의 신앙으로, 하나님을 즐겁게 헌신하고 사랑하는 자가 되어서 이 악순환을 끊어내시기를 바랍니다. 다시는 종으로 살지 마시고 억압과 굶주림과 경제적 압박 가운데 살지 마시고, 여러분의 삶이, 가정이, 직장이 전쟁터가 아니라 사는 날 동안 평온한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약한 자를 통하여
삿 4장 17~24절 / 서윤발목사
1. 자유를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들
이솝우화중에 왕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던 개구리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개구리의 이야기는 인간의 이야기를 우화로 표현한 것입니다.
평화로울 때 인간은 그 평화의 가치를 잘 알지 못하고 자유로울 때 그 자유의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주어진 자유를 잘 활용하지도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무엇인가에 얽메여야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도 그런 경향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사사시대라는 때가 있었는데 이 시대는 좀 특이한 시대였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은 가나안땅이라는 풍요한 장소에서 수 백 만의 인구가 모여 하나의 국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국가는 있지만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세금을 걷어 가는 관리들도 없었습니다.
다만 사사라는 사람이 지방마다 있었는데 이 사사라는 사람들은 관료가 아닙니다.
우리나라 성경에서는 선비 사자에 스승 사를 붙여서 그저 율법을 알고 백성을 가리키는 사람이다. 뭐 그런 뜻으로 말을 만들었는데 그러나 영어성경에서는 재판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실제로 사사들이란 것은 재판관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평소 때는 백성들을 위해서 재판도 해 주고 전쟁이 일어나면 특별한 어떤 한 사사가 전쟁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사란 것이 어떤 계급이 직위가 아니니까 백성들로 봐서는 이보다 편한 제도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이라는 새로운 땅에서 살면서 아주 자유롭고 평화롭게, 그리고 풍요하게 살라고 그렇게 만들어 주신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풍요하고 평안한 사사시대의 특징이 무엇이었는가?
사사기 16장을 보면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유를 주시고 평안을 주시니까 그 주어진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방종하면서 살았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4장 1절도 보면 "에훗의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그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2. 방종하며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유와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방종하고 타락하니까 하나님은 이 백성들을 그대로 버려 두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벌을 주셨는데 전쟁의 고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주변에 있던 여러 민속들 중에 한 민족이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습니다.
성경을 보니까 야빈왕과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가 군대를 이끌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야빈이 이끄는 군데는 철병거만 900승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철병거. 요즘은 다 쇠로 만든 무기들 뿐이다. 장갑차, 탱크...
그런데 이 당시에는 철로 만든 무기가 별로 없었다.
이 당시 년도는 대략 기원전 1300년경 정도입니다.
이 때는 역사적으로 모든 나라가 다 청동기 문화에서 철기문화로 넘어가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니 왠만한 나라에서는 무기라고 해 봐야 돌칼, 나무 칼, 짐승의 뼈로 만든 칼, 그리고 청동으로 만든 칼.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청동이라는 것은 구하기가 어려워서 아무나 가지지 못했고 철제보다 약합니다.
그래서 철로 만든 칼 한 자루를 가지고 있어도 그건 대단한 일인데 이렇게 철로 만든 전차를 900대나 가지고 있었다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볼 때는 어마 어마한 일입니다.
반면에 이 당시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군사는 약 4만명 정도 되지만 제대로 훈련받은 사람도 없고, 그저 방탕하고 나태하게 살다가 이런 일을 만났으니 제대로 싸울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야빈왕에게 굴복해서 이 때부터 무려 20년간이나 학대를 받으면서 생활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온 지는 한 백 몇 십 년 정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년 전에 이스라엘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100년 전에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것도 430년간이나 대를 이어 가면서 노예로 살았습니다.
고대 애굽에서 노예라는 것은 사람도 아닙니다.
날마다 매를 맞고, 죽으라고 노역을 하고, 아무런 권리도 없고, 짐승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 생활할 때 얼마나 비참한 사람들이었습니까?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그 능력으로 구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을 이제 가나안이라고 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꿈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신분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과거에는 노예로, 천민으로, 소망이 없는 인생으로 그렇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이제는 꿈의 땅에서 자유를 누리고 평안한 복락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그렇게 은혜를 주시고 새 삶을 주셨을 때 이스라엘은 감격했습니다. 기쁨이 넘쳐났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기쁨도 잊혀지고 감격도 식어집니다.
그저 편안한 환경 속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났고 방종했습니다. 그리고 그랬더니 이스라엘은 이 좋은 땅 가나안에서 옛날에 100년 전에 애굽에서 종살이했던 것처럼 또 종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땅을 가졌어도 하나님을 떠나고 나니까 그 땅은 축복의 땅이 아니고 고통의 땅이 됐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날 때 아무리 좋은 환경, 아무리 풍부한 생활이 있다 할지라도 그 자리는 고통의 자리로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지금 환경이 열악하고 풍부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 안에 거하고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의 은혜 안에 사는 사람은 그 자리가 곧 기쁨의 자리고 축복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아무리 험하고 바쁜 세상을 살더라도 하나님을 잊지 맙시다.
그 말씀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사모하며 삽시다.
하나님 없이 수 많은 재물을 모은다 할지라도 그게 무슨 소용있습니까?
엄청난 권력을 쥔다할지라도 그게 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령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우리인생은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EX) 성경을 보면 어떤 귀신들린 자의 비유가 나타나는데
한 날 어떤 사람에게 들렸던 귀신이 그 사람에게서 나가가지고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면서 쉬기를 구하였지만 찾지 못해서 자기가 옛날에 머물렀던 사람에게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그 사람이 깨끗해져 있는데 성경을 보면 "비고 소제되고 수리 되었"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수리는 되었는데 여전히 비어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귀신이 자기 친구들을 데리고 함께 그 집에 들어가서 이 사람의 상태가 예전 보다 더 나쁘게 되었다 하는 그런 비유가 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언제나 무엇인가로 채워지게 마련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선한 것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결국은 악한 것들이 찾아와서 채우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으로 채워야겠습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믿음으로 채워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령으로 채워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채워지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으로 채워지면 지금 어려운 환경도 복락의 땅이 될 수 있습니다.
3. 뒤로 물러서는 자 영광을 얻지 못한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전진하는 사람이 약속을 얻을 수 있고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중에 하나님께 다시 돌아와서 기도합니다. 부르짖었습니다.
우리가 범죄했으니까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도와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부르짖으니까, 하나님께서는 또 그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들어 주셨습니다. 응답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응답해 주셨습니까?
이번에는 바락이라는 한 사람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자 사사 드보라가 바락을 불러가지고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일만명을 거느리고 다볼산으로 가라" 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다 책임져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기쁜 약속입니까?
그런데 바락이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도 겁이 났습니다.
야빈이 누군데...철병거가 900승인데...왜 하필 내가 나서야 하는데...그것도 일 만 명만 데리고...
그러면서 감히 나서지를 못했습니다.
거절도 못하고 나서지도 못하고 그러다가 결국은 드보라에게 가서 그런 말을 합니다.
'당신이 함께 가면 내가 따라는 가겠지만 나 혼자서는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은 드보라가 뭐라고 그럽니까? 내가 반드시 같이 가 주겠지만 "네가 이제 가는 일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그랬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
그러면 너는 이 전쟁이 승리하는 것은 보겠지만 너 개인적으로는 영광을 얻을 수 없다는 그 말입니다. 그리고는 드보라가 전쟁에 참여했는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셨는데 24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민족을 진멸했다고 했습니다. 완전히 승리를 거뒀다는 겁니다.
여 사사 한 사람이 믿음으로 나서니까 그 강하다던 가나안 민족의 군대가 힘을 쓰지 못하고망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함께 전투에 참여했던 바락은 어떻습니까?
이렇게 큰 승리를 거뒀다면 당연히 전쟁을 이끄는 지휘관으로서 적장을 죽여야 했는데 적장을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드보라의 말 대로 아무런 영광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적장인 시스라를 죽인 사람은 누굽니까?
야엘이라고 하는 한 이름없는 여인이었습니다.
적군의 군대장관 시스라가 병거를 버리고 도망하는데 보니까 야엘의 장막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평소에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믿고 그 집에 들어가 잠이 들었는데 이 야엘이라는 여인이 말뚝을 뽑아서 시스라에게 박아버렸다 했습니다.
철병거 900승을 이끌고 천하무적이라고 자부하던 시스라가 이름없는 한 여인의 손에 죽어버렸습니다. 철병거 900승이 아니라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연약한 여인의 손에도 죽을 수 있는 겁니다.
여인이 시스라를 죽였다면 바락인들 죽일 수 없겠습니까?
그러나 바락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약속의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분명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니까 비록 그 민족이 이기기는 했지만 그 전쟁으로 인하여 개인적인 영광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민족은 성공했으나 개인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능력이 있어야 된다. 힘이 있어야 된다, 가진 것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할 수 있다면 능력도 키우고, 힘도 키워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공하기 위해서 먼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을 갖출 때 때로는 부족하고 모자라도 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보고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어렴풋한 믿음 가지고 늘 뒤로 물러서는 사람은 실컷 싸우고도 영광은 빼앗겨 버립니다.
히10:38---▶"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 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셨다.
결 론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고난을 당해서 하나님께 나아오는 그런 삶이 되지 말고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셨을 때 그것이 소중한 줄 알고 잘 지키는 사람, 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분명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고자 하실 때 '주님 제가 그렇게 한 번 해 보겠습니다' 다짐하며 자원하여 나서는 사람이 되기 원한다. 그래서 이 현실 가운데서도 여전히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도 체험하고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더 성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사 드보라
삿 4:17-24 / 우인택 목사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대패하여 간신히 목숨만 건져 헤벨의 집으로 도망친 시스라가 드보라의 예언대로(9절) 헤벨의 아내 야엘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사실과 가나안 왕 야빈이 결국 파멸을 맞게 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이 보여 주듯이 가나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의 구원은 드보라와 야엘이라는 연약한 두 여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이 인간의 능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졌음을 확증합니다.
1. 먼저 17절 함께 읽습니다.
“시스라가 걸어서 도망하여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으니 이는 하솔 왕 야빈과 겐 사람 헤벨의 집 사이에는 화평이 있음이라”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가나안의 군대장관 시스라는 홀로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으로 피신합니다.
그가 이곳으로 도망친 것은 평소 헤벨이 가나안 왕 야빈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오늘 본문은 설명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압제 아래에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아마도 겐 사람 헤벨은 힘이 없고 학대받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가깝게 지내는 것보다는 하솔 왕 야빈과 가깝게 지내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하고 의도적으로 그들과 교류를 나눈 듯 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가나안의 군대가 전쟁을 벌이는 중에 가나안 군대의 장관이 자기의 집으로 도피해 왔기에 지금의 이 상황은 헤벨의 아내 야엘로서는 매우 난처한 입장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사람과 신앙이 서로 충돌함으로써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어 밤을 뒤척여 본 적은 없습니까?
만일 여러분에게 이러한 상황이 닥쳤다면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교류를 나누던 이웃사람이 교회를 대적할 때 여러분들은 어느 편에 서실 것 같습니까?
그런데 이 점에 있어서 성경의 가르침은 매우 단호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37-38).
또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0:29,30).
여러분,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자신의 모든 것까지 포기해야만 하는 결단이 요구될 때까지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때가 왔을 때 단호하게 하나님을 따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18-21절은 헤벨의 아내 야엘이 어떻게 가나안의 군대장관인 시스라를 죽였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약성경의 가르침은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역행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서의 가르침은 악한 자들을 멸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수 있도록 선민의 가계를 지키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선민들은 그들의 신앙과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 어찌하든지 대적들을 무력으로 물리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통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악인을 멸하시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죽으시는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들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심으로 그들을 믿음의 삶으로 초청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믿는 우리들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을 멸망시킴으로써 우리의 유익을 구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해서는 안 됩니니다.
여러분, 우리를 대적하던 이웃을 우리 편으로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복음을 전하면 그 또한 우리들과 같이 이타적인 삶을 살게 되므로 우리에게 피해를 입힐 수가 없게 됩니다.
오히려 우리를 돕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시면 그 이후의 모든 일은 바락을 승리의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성령충만, 복음의 증인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 좋은 편을 선택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또 한가지 우리가 본문에서 유의해서 보아야 하는 것은 구백 대나 되는 철 병거와 수많은 정규군을 지휘하던 한 국가의 군대장관이 이름 없고 연약한 여인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마음만 먹는다면 열두 군단이나 되는 천사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지키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마 26:53).
용맹스러운 용사들을 발굴하셔서 그들을 훈련시키고 준비시키심으로 이스라엘을 지키실 수도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육체적인 힘이 가장 연약한 여인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야엘’이라는 한 여인과 함께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성취하셨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능력을 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가진 능력의 크고 작음은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오직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여러분들의 믿음은 어떠하십니까?
하나님께서 관심을 두시고 바라보실 수 있는 믿음입니까?
오늘, 스스로의 믿음을 돌아보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을 소유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과 같이 세상과 하나님을 선택해야 할 때가 왔을 때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저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대적들이 우리를 삼키려 할 때 그들과 똑같이 칼과 창으로 대적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본받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저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권능을 부어주셔서 참된 복음의 일꾼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택하심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에 의해서임을 잊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