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휼이부정(譎而不正)
교활하고 바르지 않다는 뜻으로, 의롭지 못한 행동을 이르는 말이다.
譎 : 속일 휼(言/12)
而 : 말 이을 이(而/0)
不 : 아닐 부(一/3)
正 : 바를 정(止/1)
출전 : 논어(論語) 헌문편(憲問篇)
이 성어는 논어(論語) 헌문편(憲問篇) 16장에서 공자가 진문공(晉文公)을 평한 말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第十六章)
子曰, 晉文公은 譎而不正하고 齊桓公은 正而不譎하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진나라 문공은 속이고 바르지 않으며, 제나라 환공은 바르고 속이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集註)
晉文公은 名重耳요 齊桓公은 名小白이라. 譎은 詭也라.
진문공은 이름이 중이(重耳)요, 제환공은 이름이 소백(小白)이다. 휼(譎)은 속이는 것이다.
二公은 皆諸侯盟主니 攘夷狄以尊周室者也라.
두 공(公)은 모두 제후의 맹주인데, 오랑캐를 물리치고 주나라 왕실을 높인 자들이다.
雖其以力假仁하여 心皆不正이나 然이나 桓公伐楚에 仗義執言하여 不由詭道하니 猶爲彼善於此요
비록 무력을 가지고 인을 가장하였으므로 마음이 모두 바르지 않았지만, 환공은 초나라를 칠 때에 의를 구실로 삼아 자신이 원하는 말을 집행함에 기만하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으니 오히려 환공이 문공보다 나은 것이다.
文公則伐衛以致楚하고 而陰謀以取勝하니 其譎甚矣라.
문공은 위(衛) 나라를 정벌할 때 초나라를 끌어들이고 음모로 승리를 취하였으니 그 속임이 심한 것이었다.
二君他事亦多類此라. 故로 夫子言此하여 以發其隱이시니라.
두 임금의 다른 일도 또한 이와 비슷한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공자께서 이것을 말씀하여 숨은 뜻을 밝히신 것이다.
춘추(春秋)로 본 제후 제환공(齊桓公)과 진문공(晉文公)의 정명론(正名論)
(목차)
Ⅰ. 序論
Ⅱ. 齊桓公과 晉文公의 상반된 正名
Ⅲ. 結論
춘추오패(春秋五覇)는 춘추시대의 다섯 패자를 말한다. 오패를 꼽는 시각이 때로는 일치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제(齊)나라의 환공(桓公), 진(晉)나라의 문공(文公), 송(宋)나라의 양공(襄公), 진(秦)나라의 목공(穆公), 초(楚)나라의 장왕(莊王)을 말한다.
그 중에 제환공과 진문공은 공자의 평가가 상반되었다. 이들은 각각 제나라와 진나라의 임금으로서 그 당시에 이들이 패자(覇者)이기는 하였으나 천자국의 천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이 제후들에게는 천자와 천자국(天子國)에 대한 존숭의 의무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정치가 존주(尊周)하였는지 또는 왕도를 행하였는지 패도를 행하였는지를 보고 왕패(王覇)의 구분을 해야 한다.
논자는 이러한 구분방식으로 정명론을 피력하고자 한다. 이에 본 소고는 논어(論語) 헌문(憲問)에서 공자가 제환공은 정이불휼(正而不譎)하고 진문공은 휼이부정(譎而不正)하다고 평가한 평가의 소이연(所以然)을 춘추(春秋)와 춘추좌전(春秋左傳)의 기사로써 그 연원을 밝히는 의미를 갖는다.
춘추시대의 제후 제환공과 제후 진문공의 정명(正名)에 대한 공자의 평가는 힘의 논리와 상반된다. 강대한 정도를 따진다면 제환공 보다는 진문공이 그 정치를 잘했다고 볼 수 있고, 그 강성함이 오래 지속되었다는 면에서도 역시 진문공의 공이 훨씬 컸다.
그러나 공자는 강대한 힘에 초점을 두어서 제후들을 평가하지 않았다. 제환공이 적의 신하인 관중을 중용한 점은 대단한 포용력을 갖춘 인물이라는 증명이 된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자소정치(慈小政治)와 존왕정치(尊王政治)를 하여서 상하의 조화를 이루어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된다.
반면에 진문공은 비록 계모에 의하여 환란을 겪고 망명생활을 하면서 정치의 역량을 키운 인물이며 진나라에 하늘이 내린 인물이라고 하나, 진문공이 제후가 된 과정에서 조카를 죽이고 나라를 얻었다는 면을 본다면 강대한 힘을 키운 공조차도 정명에 맞지 않았다는 것이 공자의 판단인 것이다.
두 제후에 대하여 공자는 정(正)과 부정(不正)만을 강조하여 언급하였으나 제후라는 자리는 천자와의 관계 속에서는 주역의 육효 가운데 六五와 九二의 자리에 있고, 신하나 약소국과의 관계 속에서는 九五와 六二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두 제후의 정명은 곧 중정론(中正論)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단지 정이부휼(正而不譎)과 휼이부정(譎而不正)은 불휼과 부정이 곧 정(正)과 휼(譎)을 대변하지 않으며, 이 두 제후를 비교한다면 제환공이 다소 정(正)하고 진문공이 다소 휼(譎)하며, 진문공에 비하여 제환공이 중정(中正)했다는 것이 아니고, 중정에 가까웠다고 보는 것이 옳다.
제환공과 진문공에 대한 공자의 평가는 결과만을 중시하고 과정을 소외시 하기도 하는 풍조 속에서 무조건적인 득세에 관심이 있는 현대인들에게 교육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Ⅰ. 序論
주(周)나라 평왕(平王)이 천도한 이후 주왕실의 통치력은 점점 약해졌다. 반대로 제후들의 힘은 점차 강대해졌다. 주왕실(周王室)은 강대해지는 제후들에 의해 힘을 쓰지 못했고 헌법 질서는 무너졌다. 무력이 많은 부분을 대변하는 시대였다. 그래서 춘추시대(春秋時代)를 패자(覇者)들의 시대라고도 한다.
춘추시대는 제후들 간의 패권 쟁탈의 시대였으며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제후들은 이민족의 침입을 몰아내고 왕실을 받들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때에 힘 있는 제후들 중에 어느 제후라도 마음만 먹으면 왕실을 멸망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었으나 아무도 나서지는 않았다. 득(得)보다 실(失)이 크기 때문이었다. 우선 다른 제후들로부터 大逆의 누명을 쓰게 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춘추오패(春秋五覇)는 춘추시대의 다섯 패제후를 말한다. 이를 꼽는 시각이 때로는 일치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제환공(齊桓公), 진문공(晉文公), 송양공(宋襄公), 진목공(秦穆公), 초장왕(楚莊王)을 말하며, 때로는 송양공과 진목공 대신에 오(吳)나라 합려(闔閭)와 월(越)나라 구천(句踐)을 들기도 하는데, 본 소고에서는 춘추오패 중에서 제나라의 환공과 진나라의 문공의 정명론만을 다루기로 한다. 그 밖의 송나라의 양공, 진나라의 목공, 초나라의 장왕 등은 제후의 신분으로서 과오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이 논문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제환공과 진문공은 각각 제나라와 진나라의 임금으로서 그 당시에 이들이 패자이기는 하였으나 천자국의 천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이 제후들에게는 천자와 천자국에 대한 존숭의 의무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정치에 대하여 존주(尊周)하였는지 또는 왕도를 행하였는지 패도를 행하였는지 하는 왕패(王覇)의 구분을 해야 한다. 논자는 이러한 구분방식으로 정명론을 피력하고자 한다.
한편 이들이 강대국의 제후로서 약소국에 대한 존중의 미덕이 있었는지 하는 면도 구분하여 보고 정명의 여부를 피력할 것이다. 이것은 논어(論語) 헌문(憲問)에서 공자가 제환공은 정이부휼(正而不譎)하고 진문공은 휼이부정(譎而不正)하다고 평가한 평가의 소이연을 춘추와 춘추좌전의 기사로써 그 연원을 밝히는 의미가 있다.
Ⅱ. 齊桓公과 晉文公의 상반된 正名
왕업을 이루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30년이 지난 뒤에야 인(仁)한 세상이 된다. 왕이 백성을 보전하여 왕도를 행하면 막을 사람이 없으며 정치는 백성을 교화한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효능이 바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왕도로 인하여 변화하는 풍속은 30년 뒤에 겨우 미친다는 것이다. 더욱이 왕도와 패도중에서 왕도를 실행한다면 그 왕도정치로 인하여 미치는 영향력은 매우 크다.
맹자(孟子)는 "힘으로써 인(仁)의 행위를 빌린 자는 패자이니, 패자는 반드시 큰 나라를 소유하여야 하고, 덕(德)으로써 인을 행한 자는 왕자(王者)이니 왕자는 큰 나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탕왕은 70리를 가지고 왕도를 실행하였고, 문왕은 100리를 가지고 왕도를 실행하였다"라고 하였다.
왕도와 패도는 그 실상을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 패도(覇道)는 토지와 군사의 힘으로써 세상을 구원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명분하에 거짓으로 仁을 칭탁해서 사사롭게 쓰는 것을 말한다. 패도를 하는 자는 반드시 큰 나라를 가져야만 사람을 제어하고 그 사업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만일 큰 나라가 없으면 힘이 적어서 仁을 구현할 수 없다고 여긴다. 반면에 왕도는 위정자가 수신을 통하여 몸과 마음을 닦고, 덕으로써 백성을 구원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 즉 仁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패도에 대하여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패는 삼왕의 죄인이고, 지금의 제후는 오패의 죄인이고, 지금의 대부는 지금의 제후의 죄인이다." 여기서 삼왕( 三王)은 하우(夏禹), 은탕(殷湯), 주문왕(周文王; 武王포함)을 말한다.
춘추시대에는 왕도가 행해지고 있지 않았다. 삼왕의 정치를 왕도로 규정한다면 오패의 정치는 천자의 명이 없이도 전쟁을 일삼았으므로 삼왕에 비해서 의(義)와 명분에 맞지 않은 정치를 하였으니 왕도라고 할 수 없다.
한편, 순자(荀子)는 왕제편(王制篇)에서 왕도와 패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왕자는 천하 사람들을 획득하고, 패자는 천하의 동맹국을 획득하고, 강자는 천하의 토지를 획득한다. 천하 사람들을 획득한 자는 제후를 신하로 삼고, 천하의 동맹국을 획득한자는 제후를 친구로 삼고, 천하의 토지를 획득한 자는 제후를 적으로 하게 된다. 제후를 신하로 삼은 자는 왕자가 되고, 제후를 친구로 삼은 자는 패자가 되고, 제후를 적으로 여긴 자는 위험하게 된다.
왕자의 仁은 천하에 높이 솟고, 義도 천하에 높이 솟고, 또한 위엄도 천하에 높이 솟아 있다. 仁이 천하에 솟아 있기 때문에 천하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보고 친근감을 느끼고, 義가 천하에 솟아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존경하고, 위엄이 천하에 솟아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결코 적대시하려 하지 않는다. 결국 적대하는 자가 없을 정도의 위엄으로 사람들을 순종시키는 정책을 보전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싸우지 않고도 승리를 거두고, 공격하지 않고서도 영토를 획득하고,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도 천하를 귀복(歸服)시킬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왕도를 분별하는 기준이다. 오직 왕도를 실천하는 것은 각자에게 달려있을 뿐이다. 왕도는 오래가고 그 영향력이 방대하다. 그러나 패도는 그 패권이 없어짐과 동시에 가치를 잃는다.
1세기를 사는 것이 인생인데 요순(堯舜)의 중도사상에 의한 영향력은 만세에 빛나지만, 걸주(桀紂)는 1세기를 살고도 미풍양속을 어지럽힌 대표가 되었다는 것이 이것을 말한다. 역시 제환공과 진문공도 요순에 비한 걸주처럼 극적인 차이를 보이지는 않으나, 제후국을 강성화 시킨 제후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면서 두 사람에게서는 상당한 차이점을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왕도정치의 실행은 물론 천자의 몫이나 당시 제후들에게 있어서는 천자를 대신하여 물리적으로 치천하(治天下)하는 명분이 있었다.
1. 제환공의 정이부휼(正而不譎)
인재는 국가의 보물이며 재산이다. 인재의 유무는 직접적으로 국가의 흥망성쇠와 관계가 있다. 혼란한 춘추전국시기에 각 제후국은 정치, 군사, 경제, 외교 등의 방면에 있어서 매우 경쟁적이었으며 그 중에 한가지는 인재등용에 대한 경쟁이었다. 인재의 가치는 날이 갈수록 더욱 중요해졌다.
어떤 인재를 중시하고 어떤 인재를 선발할 것인가에 대하여 사상가들이 많은 가치 있는 의견을 내었다. 각 제후국이 패권지위를 갖기 위하여 집정자들은 현명한 선비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제환공이 포숙아의 천거로 관중을 등용한 것은 적을 포용한 행위였다.
제환공은 신분이 미천한 관중을 상경(上卿)으로 임명하여 제나라를 40년 동안 다스려 패왕이 되었다. 제환공의 인재등용법은 상당히 파격적이었으며 야당과 여당,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인재의 재능 여부에 의한 등용이었다는 면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1) 제환공의 현재등용(賢才登用)
춘추시대에는 존왕양이(尊王攘夷)라는 기치를 내걸고 천자를 대신하여 제후들이 호령하였다. 춘추시대의 패자는 신분세습을 전제로 한 봉건질서 내에서 '존왕양이'를 외쳤다. 왕자에 비하여 패자는 후대에 왕자와 패자를 엄격히 분리하는 맹자의 왕패준별론(王覇峻別論)이 성행하면서 비하되기는 했으나 왕자에 버금하는 뛰어난 통치자를 의미했다.
춘추시대는 바로 이와 같은 패자들이 종횡으로 활약하던 시기이다. 약 3백 50년 동안 이 같은 패업을 이룬 사람으로는 대략 일곱 명 정도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사서(史書)에서는 이들 중 다섯 명만을 골라 대개 춘추오패라고 하는데 가장 먼저 패업을 이룬 사람은 제환공이었다. 그는 관중(管仲)이라는 불세출의 탁월한 인물의 도움으로 패제후가 되었다.
제환공의 패천하(覇天下)는 비록 주공이 이룩한 왕천하(王天下)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뛰어난 도덕성을 기반으로 하였고 질적인 면에서 왕천하와 하등의 차이가 없었다. 오직 양적인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제환공의 탁월한 보조자는 단연코 관중이다. 제환공과 관중이 애초부터 임금과 신하의 인연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인연의 시작은 장공(莊公) 9년 병신(丙申) BC.685 경문에 '9월 제인(齊人)이 자규(子糾)를 잡아 죽였다'라고 하는데에 있다. 이에 대한 춘추좌전 장공 9년 병신 BC.685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가을에 노(魯)나라 군대가 제(齊)나라 군대와 건시(乾時)에서 전투하다가 노나라 군대가 대패하였다. 노나라 장공은 융로(戎路)를 잃고서 다른 수레를 타고 돌아왔다. 진자(秦子)와 양자(梁子)가 장공의 기를 가지고 하도(下道; 사잇길)로 피해 제군을 유인 하였으므로 두 사람은 모두 제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포숙이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말하기를, "자규는 친족이니 노군(魯君)께서 그를 죽이고, 관중(管仲)과 소홀(召忽)은 원수이니 우리가 인수해서 속 시원히 원수를 갚겠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생두(生竇)에서 자규를 죽이니, 소홀은 자규를 위해 죽고 관중은 제나라의 포로가 되기를 요청하였다.
포숙이 그를 인수해 가다가 당부(堂阜)에 이르러 그의 결박을 풀어주었다. 포숙이 돌아가서 제환공에게 고하기를, "관이오(管夷吾)는 치국의 재능이 고혜(高傒; 제나라의 경 고경중高敬仲)보다 뛰어나니, 그를 승상으로 삼으소서"하니, 환공이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자규는 제환공의 서형이다.
윗글은 자규가 노나라에서 노장공의 원조를 받아 제환공과 제후가 되고자하여 전투를 하는 내용이다. 그 전투에서 제환공이 자규를 제거하고 자규의 부하인 관중을 포용한다. 결국 관중은 포숙아에 의하여 적장인 제환공을 모시게 되었고, 포숙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제환공을 패제후로 만들었다.
이러한 관계에 대하여 맹자는, "환공은 관중에게 배운 뒤에 그를 신하로 삼았기 때문에 고생하지 않고 패자가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제환공이 춘추시대 초기에 패제후가 되어서 존왕(尊王)을 하였으나 관중이 죽고 난 뒤 제나라는 또 다시 크게 부활하지 못하였다.
2) 제환공의 자소(慈小)정치와 존왕(尊王)정치
대국은 약소국의 문화를 인정하고 인도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데 이것을 자소(慈小)정치라고 한다. 제환공이 패제후로서 형(邢)나라를 도왔는데 그 내용은 춘추, 민공(閔公) 원년 경신(庚申) BC.661 경문에, '원년 봄 주왕 정월에 제인(齊人)이 형(邢)나라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였고, 이에 대하여 춘추좌전, 민공 원년 경신 BC.661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적인(狄人)이 형(邢)나라를 침공하자 관경중(管敬仲)이 제후에게 말하기를, "융적(戎狄)은 시랑(豺狼; 승냥이와 이리)과 같으니 만족할 줄 모르고, 제하(諸夏)는 서로 친근하니 버려서는 안 되며, 안일(安逸)은 독약과 같으니 연연해서는 안됩니다. 시경에 '어찌 돌아갈 생각이 없겠는가? 이 간서(簡書)가 두렵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간서에 실린 내용은 악인을 함께 미워하고 서로 구휼하자는 뜻이니, 형국을 구원하여 간서를 따르소서"라고 하였다.
제인(齊人)이 형국(邢國)을 구원하였다. 시경 소아(小雅) 출차편(出車篇)에 위의 내용이 있다.
나라에 위급한 일이 생기면 서로 돕는 것이 원칙이다. 6.25때 60여 개국의 우방국이 대한민국을 도운 일이 바로 이런 경우이다. 그 결과 대한민국이 현재는 도움을 반환해 주는 나라가 되어 자연재해나 전쟁으로 인하여 상처받은 나라를 다시 원조할 수가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았을 때 약소한 나라를 보조하는 일은 그들의 문화를 지키고 자존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
제환공은 관중의 도움으로 상생의 정치를 실천하였다. 또 존왕(尊王)과 존노사상(尊魯思想)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소정치(慈小政治)를 이행하였다. 민공 원년 경신 BC.661 경문에, '겨울에 제나라 중손(仲孫)이 왔다'라고 하였고, 이에 대한 춘추좌전, 민공 원년 경신 BC.661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겨울에 제나라 중손추(仲孫湫)가 노나라로 와서 난리를 살폈다. 경에 '중손'이라고 字를 기록한 것도 그를 아름답게 여긴 것이다.
중손이 제나라로 돌아가서 말하기를, "경부(敬父)를 제거하지 않으면 노나라의 난리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제환공이 "어찌하면 그를 제거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자, 중손이 "끊임없이 화난을 일으키면 장차 스스로 쓰러질 것이니, 임금님께서는 그때를 기다리소서"라고 대답하였다.
제환공이 "이 기회에 노나라를 취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자, 중손이 대답하기를 "불가능합니다. 노나라는 그래도 주례를 지키고 있으니, 주례(周禮)는 나라를 존립시키는 근간입니다. 신이 듣건대 '나라가 망할 때에는 (큰 나무와 마찬가지로) 근간이 먼저 쓰러진 뒤에 가지와 잎이 뒤따라 쓰러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노나라는 주례를 버리지 않고 있으니, 아직 움직일 때가 아닙니다. 그러니 임금님께서는 가까이하고 정권이 안정되어 국력이 견고한 나라를 의지하며, 정권 내부에 분열이 있는 나라를 이간시키고, 혼란한 나라를 패망시키는 것이 패왕의 그릇입니다"라고 하였다.
노나라는 주례(周禮)를 잡고 있으니 친할 만하다는 것이다. 즉 이는 (노나라에) 예의가 있음을 친하게 여긴 것이다. 관중이 제환공을 보좌하면서 예의를 존숭하는 노나라와 친밀한 관계를 맺을 것을 간하였다. 노나라를 이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더 나아가 성인과 현인을 모해하는 것도 무모한 일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비록 노나라에 대한 존중의 의미를 나타내지만 질적인 면에서 예(禮)와 의(義)가 살아있는 나라에 대한 존중이며 이것이 제나라의 입장에서는 곧 존왕정치(尊王政治)가 된다.
존왕정치의 근거는 초나라와의 전쟁에서도 나타나는데, 초나라를 치기 전에 채나라를 침공하고 이어서 초나라까지 토벌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그 다음해 인 춘추좌전, 희공(僖公) 3년 갑자(甲子) BC.657에 제나라가 채나라를 친 배경을 보면, 제후가 채희(蔡姬)와 유(囿)에서 뱃놀이를 할 때 채희가 제환공이 탄 배를 흔드니, 환공은 겁에 질려 얼굴빛이 변하여 그러지 말라고 금지하였으나 (채희는) 듣지 않았다. 환공이 노하여 그녀를 채나라로 돌려 보냈으나 부인의 관계를 단절하지는 않았는데, 채인(蔡人)은 그녀를 다른 곳으로 개가시켰다.
그 후 춘추, 희공 4년 을축(乙丑) BC.656 경문에, '4년 봄 주왕 정월에 公이 제후(齊侯), 송공(宋公), 진후(陳侯), 위후(衛侯), 정백(鄭伯), 허남(許男), 조백(曹伯)과 연합하여 채나라를 침공하였다. 채군(蔡軍)이 흩어져 도망하자, 드디어 초나라를 토벌하여 형(陘)에 주둔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춘추좌전, 희공 4년 을축 B.C.656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4년 봄에 제후가 제후의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채(蔡)나라를 침공하니 채사(蔡師)가 흩어져 도망하였다. 드디어 초(楚)나라를 토벌하니 초자(楚子)가 제후의 군중으로 사신을 보내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임금은 북해(北海)에 살고 과인은 남해(南海)에 살아 바람난 우마(牛馬)도 서로 미칠 수 없는 먼 거리이니, 임금께서 우리의 땅에 오실 줄은 생각지 못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오셨소?"
관중이 대답하였다. "옛날에 소강공(召康公)이 우리 선군(先君) 태공(太公)에게 명하기를, '5후와 9백을 그대가 실로 토벌하여 왕실을 보좌하라'고 하고서, 우리 선군에게 정벌할 수 있는 범위를 동(東)으로는 바다까지, 서(西)로는 황하(黃河)까지, 남(南)으로는 목릉(穆陵)까지, 북(北)으로는 무체(無棣)까지로 정해 주셨다. 그런데 초나라는 포모(包茅)를 바치지 않아 축주(縮酒)할 수가 없어 천왕의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니, 과인은 이것도 묻노라. 그리고 소왕이 남방을 순수하다가 돌아오지 못하셨으니 과인은 이것도 묻노라."
그러자 초나라 사자가, "공물을 바치지 않은 것은 우리 임금의 죄이니, 감히 바치지 않겠는가마는 소왕이 돌아가지 못한 것은 물가에 가서 물어 보라"라고 하였다.
제후의 군대가 전진하여 형(陘)에 주둔하였다.
이 전쟁에 대하여 제환공에 대한 평가는 일관되지 않는다. 여동래는 "(제환공이 관중과 함께 초를 정벌하는 싸움에서 초나라가) 그 공물 바치는 직분을 모르고 공손하지 않았기에 (제나라가 초나라를) 토벌하여 곧 그 병통을 거론하니, 초나라는 반드시 머리를 조아리고 죄를 알았으나, 제나라 군신이 과분한 계교로서 공물을 바치지 않은 죄는 부족하다고 여겨서, 드디어 멀리 소왕(昭王)이 '익사하여' 돌아오지 못한 일을 찾아내어 초나라의 죄를 키우고, 제환공과 관중이 초를 정벌하는 명분으로 삼아서 진실로 출병하였다고 지적하여 사사로운 의도로 채나라를 침략한 것을 숨기려 한 것이다"라고 비판하였다.
여동래는 제나라가 초를 정벌한 명분이 맞지 않았다고 보았고 제환공은 패자로서 대인의 덕을 갖추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여동래는 공자가 제환공에 대하여 정이부휼(正而不譎)이라고 한 평가에 대하여 긍정하지 않았다.
반면 주자(朱子)는 "환공은 초나라를 벌할 때 의(義)를 붙잡고 말을 함에 궤도(詭道)를 말미암지 않았으니 오직 이러한 점은 잘한 것이다"라고 공자의 평가에 대하여 부연설명을 하였다. 이것이 여동래와 주자의 견해차이다.
제환공의 행실은 거동이 광명하여 속이는 도(道)를 쓰지 않은 점이 많다. 초나라가 항복하지 않자 천자에게 제수(祭需)를 바치지 않은 점을 따져서 천자를 높이는 의(義)로써 책망하였고 초나라가 항복하자 소릉으로 군사를 물려서 초나라 사신을 예로써 대접하였으며, 규구에 모였을 때에 왕자의 큰 금법을 밝히고 수구(首丘)에서 맹세할 때에는 세자를 세우는 큰 법을 정하였으니, 이것이 바르고 속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환공은 당시 패제후로써 아직은 힘이 미약한 초나라의 정치적 과오를 지적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초나라가 포모(包茅)를 바치지 않아서 천왕께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한 것을 변척한 것은 패제후로써 명분있는 처사였다.
뿐만아니라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환공은 약소국인 형(邢)나라에 대하여 자애로써 응대하였고, 노나라에 예가 살아 있다는 전제하에 노나라를 존중하는 형식에 의한 존왕의 정치를 하였다. 그래서 공자는 제환공을 정이부휼(正而不譎)이라고 평가하였고 보는 것이 논자의 의견이다.
3) 제환공의 멸망
제환공이 춘추시대에 정치적인 오점이 적었다는 면에서는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제나라가 쇠퇴하는 원인을 분석해 본다면 첫째, 제환공이 禮를 익히지 못했다는 점이다. 둘째, 제환공이 패제후로서 규구의 회맹을 주도하는 모습이 장중함을 넘어서 사치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환공의 사치는 왕성한 세력의 극치를 드러냈다. 셋째, 민심이 이탈하는 기미를 읽어 반성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넷째, 好色함에 있어서 남달랐다는 점이다.
첫 번째 제환공이 헌첩의 예를 익히지 못했다는 기사가 춘추, 장공(莊公) 31년 무오(戊午) BC.663에 보인다. 경문에는 '6월 제후가 와서 산융(山戎) 토벌에서 얻은 첩(捷; 전리품)을 바쳤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춘추좌전, 장공 31년 무오 BC.663 의 기사에는, "31년 여름 6월에 제후가 (노나라에) 와서 산융 토벌에서 얻은 전리품을 바쳤으니, 예가 아니다. 제후가 사방의 이적을 토벌하여 전공이 있을 경우에 천왕에게 그 전리품을 바치면 천왕은 이 전리품으로 이적을 경계하지만, 중국의 제후끼리 전쟁했을 경우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제후는 부로(俘虜)를 서로 주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보았을 때 제환공이 헌첩의 예를 모른 것으로 드러났다.
두 번째 오점은 규구의 회맹에서 드러났다. 춘추좌전, 희공 9년 기사를 보면 제환공이 규구(葵丘)에서 여러 나라 제후들과 회합을 가졌는데, 천자가 재공(宰孔)을 보내서 환공에게 문왕과 무왕에게 제사지내고 그 제사 음식을 내렸다. 제환공은 예의에 맞게 그 음식을 받았다.
그런데 재공이 주(周)로 돌아가다가 이 회맹에 참여하러 오는 진헌공(晉獻公)을 만나서 제환공이 수덕(修德)에 힘쓰지 않고 정벌에 힘쓰니, 제환공의 회맹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다. 이에 진헌공은 회맹에 참여하지 않고 돌아갔다.
그러나 규구의 회맹에 대하여 맹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오패 가운데 환공이 강성하더니, 규구의 회맹에서 제후가 희생을 묶어 글을 싣고, 피를 찍어 입에 바르지 아니하고, 첫 번째 명하여 말하기를, '불효자를 버리며, 세운 아들을 바꾸지 말며, 첩으로 처를 삼지 말라'고 하고, 두 번째 명하여 말하기를, '어진 이를 높이며 재주 있는 이를 길러서 덕이 있는 이를 표창하라'고 하고, 세 번째 명하여 말하기를, '늙은이를 공경하며 어린이를 사랑하며 손님과 나그네를 잊지 말라'고 하고, 네 번째 명하여 말하기를, '선비는 대대로 벼슬하게 하지 말며, 벼슬 일을 겸직하지 말며, 선비를 취함에 반드시 합당하게 하며, 대부를 마음대로 죽이지 말라'고 하고, 다섯 번째 명하여 말하기를, 방비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 것이며, 곡식의 이동을 막지 말 것이며, 봉(封)하고서 고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우리 같이 맹서하는 사람들은 이미 맹서한 뒤에 우호적으로 지낼 것이다'라고 하였다.
규구지회(葵丘之會)의 회맹 내용은 천서의 순리를 따르고 존현하며, 경노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며, 관직의 균등한 배분과 높은 관리에 대한 존중의 의미가 있다. 또 정치 뿐 아니라 국방과 상업에 중점을 둔 내용이 있고 정직 등 도덕성을 강조한 내용도 있다.
그러나 여동래는 규구의 회맹에서 예식의 화려함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규구의 회맹에 이르러서는 위엄이 제후들에게 더해지고 명성이 사해에 떨쳐, 천자가 제사 음식을 보내 그 왕의 사신이 하림하였다. 깃발들을 빙 둘러 세우고 단과 계단을 높이 세우며, 장막을 치고 횃불을 뜰 앞에 걸어 유사가 약속 시기를 따져 점검하며, 여러 제후들이 줄지어 머리를 숙이고 자기 자리로 가며, 관을 쓴 경대부들이 가지런하여 장중한 분위기에 숨소리도 나지 않았다. (…)"
이것은 제후들의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규(圭)는 제후들의 신표로 쓰는 옥이며, 석(舃)은 가죽신이다. 제후는 붉은 가죽신을 신는다. 병규교석(騈圭交舃)은 여러 제후들이 신표를 모으고 발걸음을 서로 접촉하는 모습이다. 이것이 제환공의 퇴락하는 기미이다. 달이 차면 기운다는 법칙이 있는데 규구의 회맹이 이렇게 화려하고 장중하였으니 이는 제환공의 세력이 지나치게 왕성함을 증명하는 기사이다.
세 번째 제나라의 민심이 이탈하는 모습을 기사에서 보면, 춘추, 희공(僖公) 16년 정축(丁丑) BC.644 경문에, '겨울 12월 희공이 제후(齊侯), 송공(宋公), 진후(陳侯), 위후(衛侯), 정백(鄭伯), 허남(許男), 형후(邢侯), 조백(曹伯)과 淮에서 회합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춘추좌전, 희공 16년 정축 BC.644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12월에 회에서 회합하였으니, 이는 증(鄫)나라의 구원과 또 동방경략(東方經略)을 모의하기 위함이었다. 증나라를 위해 성을 쌓는데, 역부들이 노역의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어떤 자가 밤중에 언덕에 올라가 '제나라에 난리가 났다'고 고함치니, 축성을 완료하지 않고 돌아갔다 라고 하였다.
제환공이 제후들과 회합한 것이다. 환공이 북으로 산융을 벌하고 남으로 초를 벌하고 서쪽으로 규구에서 회합하더니 지금 또 동방을 경영하려고 한 것이다. 이 사건(제나라에 난리가 났다고 요란스러운 일)으로 인하여 부역이 파괴 되었고 명년에 제나라에는 과연 환란이 있었다. 부역자들이 일부러 요란을 떨어서 성을 쌓지 않으려는 민심을 보인 것이다. 민심이 떠나는 모습이 기미로 드러난 것이다. 이것이 제나라가 망하는 징조가 된다.
네 번째, 제환공은 호색하여 제가를 못하고 결국은 나랏일을 그르치는 결과를 초래하였는데 그 기사는 희공 17년 무인(戊寅) BC.643에 경(經)은 없고 전(傳)의 기록만 있다. 제후(제환공)의 부인이 셋이었는데, 왕희(王姬), 서영(徐嬴), 채희(蔡姬)는 모두 아들이 없었다.
제후는 호색하여 총애하는 여자가 많아, 부인처럼 총애하는 여자가 6명이었다. 장위희(長衛姬)는 무맹(武孟)을 낳고, 소위희(少衛姬)는 혜공(惠公)을 낳고, 정희(鄭姬)는 효공(孝公)을 낳고, 갈영(葛嬴)은 소공(昭公)을 낳고, 밀희(密姬)는 의공(懿公)을 낳고, 송화자(宋華子)는 공자 옹(雍)을 낳았다.
환공은 관중과 함께 송양공에게 효공을 태자로 세우도록 부탁하였다. 옹무(雍巫)는 위공희(衛恭姬)의 총애를 받았는데, 사인초(寺人貂)을 통해 환공에게 맛있는 음식을 올리고 환공의 총애까지 받았다. 환공은 무맹을 태자로 세울 것을 허락하였다.
관중이 죽자 다섯 공자는 모두 후사가 되기를 구하였다. 겨울 10월 을해일에 환공이 졸하니 역아(易牙)가 궁중으로 들어가서 시인초와 함께 내총의 도움으로 뭇 관리들을 죽이고 공자 무휴를 임금으로 세우니, 효공이 송나라로 도망하였다. 12월 을해일에 제후에게 부고하고 신사일 밤이 되어서야 빈(殯)하였다.
제환공은 지나치게 호색하였다. 이것으로 인하여 결국 집안과 나라가 망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다음해에 송양공이 제나라를 침벌하여 무휴(無虧)를 죽였으며 다시 효공을 왕위에 올려주었다. 제환공이 죽은 후에 제나라는 다시 그 권세를 흥기시키지는 못하였다.
제환공은 관중을 등용하여 쉽게 패제후가 되어 자소정치와 존왕정치를 잘하였다. 그래서 공자가 그를 '정이불휼'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세가 차면 기우는 것이 법칙이듯이, 제환공은 규구의 회맹에서 왕도정치라는 기치를 걸고 있었으나 행사장의 자리가 너무나도 사치하였고 이에 이미 민심이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제환공이 호색을 무분별하게 하는 등 중정(中正)을 끝까지 지키지 못한 잘못에 의한 결과였다.
2. 진문공(晉文公)의 휼이부정(譎而不正)
춘추좌전은 진문공이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를 피해 출국하여 여러 나라를 주유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표현하면서 진문공이 준비된 지도자임을 하나의 하자도 없이 기록하고 있다. 그러한 인물이기에 진문공은 좌우에서 보좌하는 신하가 많았다. 그래서 진나라를 패제후국이 되게 할 수 있었고 춘추좌전에서는 이것을 당연한 인과관계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공자는 논어 헌문편에서, "진문공은 속이고 바르지 않다"라고 하였다.
진문공이 행한 일은 행적이 불순하고 기만과 꾀로써 다른 나라와 다투는 경우가 많았다. 초나라가 송나라를 칠 때에 진나라는 조나라와 위나라를 쳐서 초나라가 이들을 구원할 군사를 보내게 하여 초나라가 스스로 송나라에서 물러 가도록하는 작전을 썼다. 이것도 속이고 바르지 않은 일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진문공을 단순하게 평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역사적 기사를 중심으로 그의 행적을 보고 공과를 심도있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1) 중이(重耳)의 출국 배경과 晉의 혼란기
진문공의 아버지 진헌공(晉獻公)이 여희(驪姬)를 총애하여 여희의 아들인 해제(奚齊)를 세우고 태자 중이와 이오(夷吾)와 여러 공자들을 변방으로 내보내는데 그 내용은 춘추좌전, 장공(莊公) 28년 을묘(乙卯) BC.666 경(經)에 없고 전(傳)만 있는 기사(記史)에 보인다.
진헌공이 가국(賈國)에서 아내를 맞이하였으나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진헌공은 제강(齊姜)과 간음하여 진목공(秦穆公)에게 시집간 딸과 태자 신생(申生)을 낳았고, 또 융(戎)에서 두 여자를 맞이하였는데, 그 중 대융 호희(大戎 狐姬)는 중이(重耳)를 낳았고, 소융자(小戎子)는 이오(夷吾)를 낳았다. 진나라가 여융(驪戎)을 토벌할 때 여융남(驪戎男)이 여희(驪姬)를 헌공에게 주었는데 여희는 해제를 낳고 여희의 동생은 탁자를 낳았다.
헌공이 여희를 총애하니, 여희는 제 자식을 태자로 세우고자 하여, 외폐량오(外嬖梁五)와 동관폐오(東關嬖五)에게 뇌물을 주고서 그들을 시켜 헌공에게 말하기를, "곡옥은 임금님의 종묘가 있는 곳이고, 포(蒲)와 굴(屈)읍은 임금님의 변방이니, 주관하는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종묘가 있는 고을에 주관하는 사람이 없으면 백성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백성이 그 정치를 업신여기게 되니 나라의 우환이 됩니다. 만약 태자에게 곡옥을 주관하게 하고, 중이와 이오에게 포와 굴을 주관하게 하신다면 백성들을 두렵게 하여 복종시키고 융적을 근심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임금님의 공적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라고 헌공에게 여희가 말하게 하였다.
여희는 또 두 사람에게 함께 가서 헌공에게, "융적의 광대한 땅이 진나라의 도시가 될 수 있으니, 진나라가 강토를 개척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하게 하였다. 그러자 진후는 기뻐하여 여름에 태자를 곡옥으로, 중이를 포성(蒲城)으로, 이오를 굴(屈)로, 여러 공자들을 모두 변방으로 보내어 거주하게 하고, 오직 여희와 그 동생의 아들만을 강(絳)에 남아 있게 하였다.
외폐량오와 동관폐오가 마침내 여희와 함께 여러 공자들을 참소하여 해제를 태자로 세우려고 하니, 진인(晉人)이 이를 이오우(二五耦)라고 하였다. 여희가 자신의 아들 해제를 태자로 세우려고 하였다. 이에 외폐양오와 동관폐오를 동원하였는데 이들은 진헌공의 정치를 어둡게 하였기 때문에 이오우(二五耦)라고 하였다. 이때 여희는 이오우에게 뇌물을 주어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으며 헌공에게 간하여 신생과 중이와 이오를 변방으로 내보내고 자신의 친자인 해제를 세자의 자리에 올려놓으려고 하였다.
10년 뒤 여희는 태자들을 계속 모략하였는데 그 내용은 춘추좌전, 희공 4년 을축 BC.656 경에 없고 전만 있는 기사에 보인다.
해제(奚齊)를 태자로 세우려고 할 때에 이미 중대부와 계획을 정하고서 여희가 태자(신생)에게 말하였다. "임금께서 꿈에 제강(齊姜)를 보셨다고 하니 태자는 속히 제사를 지내시오." 태자가 곡옥으로 가서 제사를 지내고서 헌공에게 조를 올리니, 이때 헌공은 사냥을 나가고 없었다.
여희가 그 음식을 궁중에 두었다가 6일 만에 헌공이 돌아오자 그 조(음식)에 독을 타서 올렸다. 헌공이 그 술을 땅에 뿌리니 땅이 끓어오르고, 그 고기를 개에게 주니 개가 죽고, 그 고기와 술을 소신(小臣)에게 주니 소신도 죽었다.
여희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 음모는 태자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태자가 신성으로 도망가니 헌공은 태자의 스승 두원관(杜原款)을 죽였다.
어떤 사람이 태자에게 말하기를, "태자께서 변명하시면 임금께서 반드시 죄의 유무를 구별하실 것입니다"라고 하자, 태자가 말하였다. "임금께서는 여희가 없으면 편히 거처하지 못하시고 배불리 잡수시지도 못하신다. 내가 무죄함을 밝힌다면 여희는 반드시 죄를 받게 될 것이다. 임금께서는 늙으셨으니 여희를 잃으면 반드시 즐거워하지 않으실 것이고 이렇게 되는 것을 나도 즐거워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태자는 도망가십시오." 태자가 말하였다. "임금께서 실로 나에게 죄가 없음을 살피시지 못하시니, 이런 죄명을 쓰고서 도망간다면 누가 나를 받아주겠는가?"라고 하였다.
12월 무신일(戊申日)에 태자가 신성(新城)에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여희가 드디어 "두 공자가 모두 이 음모를 알고 있었다"라고 헌공에게 참소하니, 중이는 포성(蒲城)으로 도망가고, 이오는 굴읍(屈邑)으로 도망갔다.
완악한 부모의 슬하에서 지낸다는 것은 매우 고단한 일이다. 신생이 여희의 계략에 말려서 결국 자살한 것은 매우 잘못된 판단이다. 살아서 집안과 정사를 바로 잡았어야 옳았다고 본다. 당시에 중이는 포성으로 도망가고, 이오는 굴읍으로 출분하여서 훗날을 도모하였기에 이들은 모두 임금이 되었다.
이 기사에 대하여 임요수는 "중대부는 리극(里克)이다. 헌공은 태자를 폐하고 싶었지만 리극을 꺼려 감히 폐하지 못하자, 리극은 '내가 중립을 지켜야 화를 면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계획을 함께한 것이다"라고 리극을 비난하였다. 리극이 중립을 지키겠다고 한 것은 여희의 계략을 눈감아 주겠다는 것이었으므로 동조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헌공이 당초에 신생을 사랑하였으나 시간이 흘러서 폐첩인 여희의 계략에 의하여 해제를 태자로 세우려고 하였기 때문에 여동래는 다음과 같이 헌공의 신생에 대한 사랑이 항상된 사랑이 아니라는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진(晉)이 그 태자 신생을 죽였다. 누가 죽였는가? 사위가 죽였다. 신생을 죽게 한 것은 실은 여희의 참소 때문인데, 사위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사위가 그 틈을 열었고, 여희는 그 틈을 탄 것이기 때문이다."
헌공이 처음에는 신생을 사사롭게 사랑하여 심지어는 환장(桓莊)의 일족(환숙과 장백으로 이때에 이들의 자손이 강대하여서 공실을 핍박할 지경이었다)을 모두 죽여 신생을 핍박할 위험을 제거하기까지 하였으니, 그를 사랑함이 역시 지극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여희를 총애하여 갑자기 그 사랑이 해제에게 옮겨 갔으니, 그가 해제를 위해 신생을 죽인 것이 바로 신생을 위해 환장의 일족을 죽인 그것이다.
그러니 전에 신생을 사랑하던 마음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신생에 대한 사랑이 해제에게 옮겨갈 수 있다면, 훗날 해제에 대한 사랑도 역시 다른 곳으로 옮겨 갈 수 있는 것이다. 진헌공이 애초에 태자 신생을 위하여 환숙과 장백의 무리들이 부강해지고 자손이 강성해지자 공실을 핍박할 지경이었기 때문에 제거하였다. 이 사건은 사위(士蔿)의 이간에 의하여 진행되었다.
그리고 진헌공은 여희와의 사이에서 해제를 낳은 후, 지극히 사랑했던 태자 신생을 미워하였으니 집안 단속을 방만하게 운영한 것이다. 그 틈을 타서 여희는 태자 신생을 내치고 자신의 친아들인 해제를 태자로 삼으려고 하였다. 여희의 모략에 의해서 결국은 중이가 출분하게 되며 그 사건의 배후에는 사위가 있었다.
다음은 사위의 모략에 관한 기사로 춘추좌전, 희공 5년 병인 BC.655 경에 없고 전만 있는 기사이다.
진후(晉侯)가 사자를 노나라에 보내와서 태자 신생을 죽인 일을 고하였다. 당초에 진후가 사위에게 두 공자를 위해 포와 굴에 성을 쌓게 하였는데, 사위가 신중히 쌓지 않고 흙 속에 섶을 넣으니, 이오가 이를 고소하였다.
헌공이 사람을 보내어 사위를 책망하니 사위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하였다. "신이 듣건대 상사가 없는데 슬퍼하면 근심스러운 일이 반드시 응대하고 전쟁이 없는데 성을 쌓으면 원수가 반드시 그곳을 보루로 삼는다고 하니, 구수의 보루를 무엇 때문에 신중히 쌓겠습니까. 관직이 있으면서 군명을 어기는 것은 불경(不敬)이고, 적의 보루를 견고하게 쌓는 것은 불충(不忠)이니 충성과 공경을 잃는다면 무엇으로 임금을 섬기겠습니까. 시경에 '덕으로 회유하면 국가가 안정되고 종자(宗子)가 견고한 성이 된다'라고 하였으니, 임금님께서는 덕을 닦으시고 종자의 위치를 견고히 하신다면 이만한 성이 다시 어디 있겠습니까. 3년 안에 군사를 쓰게 될 것이니 무엇 때문에 신중히 쌓겠습니까."
물러나와 다음과 같이 시를 읊었다. "여우 갖옷에 털이 난잡하여 한 나라에 公이 셋이니 내 누구를 오로지 믿고 따를까?"
난이 일어나자 헌공은 시인(侍人) 피(披)를 보내어 포를 치게 하였다. 중이는 "군부의 명은 대항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서 대중에게 "대항하는 자는 나의 원수이다"라고 선포하고는 담을 넘어 도주하니 시인(侍人) 피(披)가 도주하는 중이의 소맷자락을 잘랐다. 중이는 드디어 적(翟)나라로 출분(出奔)하였다.
사위는 진헌공에게 덕치만이 정권을 견고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근사하게 간하였으나 사위에게는 모사꾼의 재량만이 있을 뿐이었다. 모든 정사가 사위의 간사한 계획 속에서 도모되었던 것이다. 진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중이는 적나라로 출분하였고 진나라에는 혼란이 계속되었다.
2) 중이의 망명생활과 입국
중이(진문공)가 외국으로 출국한 이후에 진나라는 공자들과 신하들의 음모로 공자의 난이 계속되었다. 희공 9년 경오(庚午) BC.651 경문에 '甲子일에 진후 궤저가 졸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춘추좌전, 희공 9년 경오 BC.651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9월에 진헌공이 졸하자, 리극(里克)과 비정(丕鄭)이 문공(文公)을 받아들여 임금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세 공자(해제, 이오, 탁자)의 무리들이 난리를 일으켰다. (…) 겨울 10월에 리극이 차(次; 喪寢)에서 해제(奚齊)를 죽였다. (공자가) 경(經)에 "그 임금의 아들을 죽였다"라고 기록한 것은 아직 장전(葬前)이기 때문이다.
순식(荀息)이 죽으려고 하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공자 탁(公子卓)을 세우고서 그를 보좌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순식은 공자 탁을 임금으로 세우고서 헌공을 장사 지냈다. 11월에 리극이 조정에서 공자 탁을 죽이니 순식도 죽었다. 그 후 이오가 제나라와 진(秦)나라의 원조를 받아서 진헌공(晉獻公)의 뒤를 이었다.
이 과정에서 진극예(晉郤芮)가 이오로 하여금 진목공(秦穆公)에게 뇌물을 주어 진(晉)나라에 들어갈 것을 요청하였고, 제습붕(齊隰朋)이 군사를 거느리고 진(秦)나라 군사와 함께 혜공(이오)을 들이려고 하였다.
리극이 여희의 편에서 해제를 태자로 세우게끔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하더니 결국은 해제를 죽였다. 그러나 다음해에 리극도 살해된다. 리극에게 남을 무도하게 죽인자는 반드시 자신도 죽는다는 인과의 법칙이 성립되었다. 순식과 같은 충직한 신하를 죽인 것은 리극의 잘못이다. 게다가 해제와 탁자를 죽인 것도 잘못이다.
한 나라의 공자들이 정치에 불필요했다면 추방하는 것이 좋았을 것으로 본다. 이때 혜공이 진목공의 도움으로 인하여 임금이 되었는데 진목공이 뇌물을 좋아했다는 대목은 진목공의 일생일대의 치부로 여겨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편, 중이의 망명생활은 적(狄)에서 위(衛), 제(齊), 조(曹), 송(宋), 정(鄭), 초(楚), 진(秦)나라로 이어지는데 춘추좌전, 희공 23년 갑신(甲申) BC.637 의 기사에 집중되어 있다.
진(晉)나라 공자 중이가 화난(禍難)을 만났을 때 진인(晉人)이 포성(蒲城)을 공격하니, 포성 사람들이 싸우려고 하자 중이가 반대하며 "군부의 명에 의지해 살아갈 수 있는 녹을 받았고, 이로 인해 인민을 얻었는데 인민을 소유하였으므로 군부의 명에 저항한다면 이보다 큰 죄가 없으니, 나는 도망갈 것이다"라고 하고서 드디어 적(狄)으로 도망갔다. 이때 그를 시종한 사람은 호언(狐偃), 조쇠(趙衰), 전힐(顚頡), 위무자(魏武子), 사공계자(司空季子)였다.
적인(狄人)이 장구여(廧咎如)를 토벌하여 그의 두 딸 숙외와 계외를 포로로 잡아와서 공자(중이)에게 바치니, 공자는 계외(季隗)를 취하여 백조(伯儵)와 숙류(叔劉)를 낳고, 숙외를 조쇠의 아내로 주어 순을 낳게 하였다.
중이가 제나라로 가려 할 때에 계외에게 이르기를, "나를 25년 동안 기다렸다가 돌아오지 않거든 시집가라"라고 하였다. (계외가) 대답하기를, "내 나이 지금 25세인데 다시 25년이 지난 뒤에 시집간다면 관에 들어갈 때가 될 것이니, 공자(중이)를 기다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중이는 적에 머문지 12년 만에 적을 떠났다. 중이는 출분하여 처음 적나라에서 계외(季隗)를 만나 12년간을 머물렀다. 그러나 계외와 25년을 기다리라는 후일을 기약하고 떠났다.
중이가 위(衛)나라를 지날 때 위문공(衛文公)이 예(禮)를 갖추지 않으니 오록(五鹿)에서 나와 야인에게 음식을 구걸하였다. 야인이 그에게 흙덩이를 주니 공자(중이)가 노하여 채찍으로 치려 하자 자범(子犯)이 "하늘이 주신 것입니다"라고 하니, 중이는 머리를 조아리고 그 흙덩이를 받아 수레에 실었다.
위나라에서 야인이 준 흙덩이의 의미는 한편으로 보면 조롱이고 한편으로 보면 대의(大義)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범이 하늘의 뜻으로 받으라고 한 것은 흙을 국토이며 나라라는 의미로 해석하여 귀하게 생각한 것이다.
중이가 제(齊)나라에 이르니 제환공이 딸을 중이에게 아내로 주었고, 말 20승까지 주니, 공자는 제나라의 생활에 안주하였다. 그러자 그를 따르는 자들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여겨서 장차 떠날 것을 뽕나무 아래에서 모의 하였는데, 누에를 치는 시녀가 그 나무 위에 있다가 그 모의한 내용을 듣고 돌아와서 그 일을 강씨에게 말하였다.
강씨는 그 시녀를 죽였고 공자(중이)에게 "공자께서는 천하를 경영할 원대한 뜻이 있는데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을 내가 죽였습니다"라고 하니, 중이가 "그런 뜻이 없다"고 하였다. 강씨가 "떠나십시오. 아내를 사모하고 안일을 탐하는 것은 실로 공명을 무너뜨리는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자가 듣지 않으니 강씨는 자범과 상의하여 공자에게 술을 권해 취하게 한 뒤에 수레에 싣고 제나라를 떠나게 했다. 중이는 술이 깬 뒤에 크게 노하여 창을 들고 자범을 뒤쫓았다.
중이가 갖춘 덕을 강씨가 알아보았고 강씨는 중이에게 사사로운 남편의 역할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나라를 위해 대의를 실현하라고 보내주었으니, 부부지간의 사사로운 정이 나라를 위하는 공심보다 앞서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씨는 대의를 위하여 사사로운 정을 접었던 것이다.
조(曹)나라에 이르니 조공공(曹共公)은 중이의 갈비가 통뼈라는 말을 듣고 그의 알몸을 보고자 하여서 그가 목욕할 때에 가까이 다가가서 구경하였다. 이때 희부기(僖負羈)의 아내가 희부기에게 말하였다. "내가 진공자(晉公子)를 따르는 자들을 보았는데 모두 나라의 재상이 되기에 충분한 인재들이니 만약 공자가 저들을 승상으로 삼는다면 부자(夫子; 중이)는 반드시 진(晉)나라로 돌아갈 것이고, 진나라로 돌아간다면 반드시 제후의 패주가 될 것이고, 제후의 패주가 되어 무례한 나라를 정벌한다면 아마 曹나라를 맨 먼저 정벌할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어찌 일찍이 스스로 두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까?"
아내의 말을 들은 희부기는 한 소반의 음식을 보내면서 밥 속에 구슬을 넣었다. 그러나 공자(중이)는 그 밥만을 받고 구슬은 돌려주었다. 희부기의 아내가 알 수 있는 것을 조공공은 알지 못했고 오히려 경거망동을 하였다.
일개 필부에게도 수치스러운 일이라서 알몸을 보자고 하지 못하는 법인데 중이를 희롱한 조공공은 조나라에 대한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후에 조나라가 망한 이유는 중이가 조나라를 원한 관계로 삼았기 때문은 결코 아니었고 이렇듯 조나라가 스스로 비루했기 때문이었다.
송(宋)나라에 이르니 송양공이 그에게 말 20승을 보내 주었다.
다시 정(鄭)나라에 이르니 정문공 또한 예우하지 않았다. 숙첨(叔詹)이 간하여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하늘이 돕는 사람에게는 누구도 미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진공자에게는 사람들이 미칠 수 없는 세 가지 특이한 점이 있으니, 하늘이 그를 임금으로 세우려는 것이 아닌지요. 그러니 군께서는 그를 예우하소서. 남녀가 동성이면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손이 번창하지 않는 것이 상례(常禮)인데, 진공자는 희(姬)씨 소생인데도 지금에 이른 것이 그 첫 번째 특이한 점이고, 국외로 떠도는 환난을 만났는데도 하늘이 진나라를 안정시키지 않아 그(중이)를 도운 격이 된 것이 두 번째 특이한 점이고, 세 사람(따르는 자들)은 그 재능이 남의 윗사람이 되기에 충분한데도 그를 따르는 것이 세 번째 특이한 점입니다. 진나라와 정나라는 동등한 무리이니 진나라의 자제가 우리나라를 지날 때 진실로 예우하는 것이 마땅한데(將), 하물며 하늘이 돕는 사람을 예우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나 정문공은 끝내 듣지 않았다.
신라가 망한 이유 중의 하나가 진골과 성골을 두어 동류끼리 결혼하는 풍습을 가진 것이었다. 진(晉)나라와 정(鄭)나라는 모두 희성국(姬姓國)이다. 지금도 윤리적 측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후대를 위해서라도 동성결혼은 삼가야 할 사항이다. 숙첨은 중이가 동성사이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인물이었다는 점을 들어서 정문공에게 예우할 것을 간하였다.
그 후 진나라가 안정되지 않은 상황이 결국은 중이가 본국에 입국하게 되는 동기가 되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이 본인의 재능이 패제후다운 면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많은 인재들이 그의 주위에서 보좌하였고 이 점이 중이가 진문공이 된 이유이다. 한편, 이때에 숙첨이 중이를 예우하라고 간하였으나 조공공(曹共公)과 정문공(鄭文公)은 끝까지 중이를 예우하지 않았다.
초(楚)나라에 이르니 초자(楚子)가 주연을 베풀어 중이를 접대하며 말하기를, "공자가 만약 진나라로 돌아가게 된다면 무엇으로써 부곡(不穀; 나)에게 보답 하겠소?"라고 하니, 중이가 대답하기를 "자녀와 옥백(玉帛)이라면 임금께서 이미 소유하셨고, 우(羽), 모(毛), 치(齒), 혁(革)이라면 임금님의 땅에서 생산됩니다. 우리 진나라에 흘러온 것들은 임금님께서 쓰시고 남은 것들이니, 무엇으로써 보답하겠소?"라고 하였다.
초성왕이 "그렇다면 무엇으로 보답하겠는가?"라고 하니, 중이가 대답하기를 "만약 임금님의 덕분에 진나라로 돌아가게 된다면 진나라와 초나라가 군대를 거느리고서 중원에서 만났을 때 임금님을 위해 삼사(三舍)를 물러나겠습니다. 그래도 전쟁을 중지하자는 임금님의 명을 들을 수 없으면 왼손에는 채찍과 활을 잡고 오른쪽에는 활집과 화살통을 차고서 임금님과 한 판 겨루어 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초나라 영윤) 자옥(子玉)이 중이를 죽이라고 청하니, 초자(楚子)는 "진공자는 뜻이 광대하면서도 검소하고 문화인이고 예가 있으며, 그 종자들은 엄숙하면서도 너그럽고, 충성스러워 힘을 다해 그 임금을 섬기는데, 현재의 진후(晉侯)는 친근한 사람이 없고 내외가 모두 그를 미워한다. 내가 듣건대 희성 제후 중에서 당숙의 후손이 가장 뒤에 쇠망할 것이라고 하니, 아마도 진공자가 장차 진나라의 임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이 그를 일으키려 하는데 누가 그를 폐출할 수 있겠는가? 하늘의 뜻을 어기면 반드시 큰 재앙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서, 중이를 진나라로 보내 주었다.
자옥과 같은 초나라의 훌륭한 재상이 초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중이를 죽이자고 하였으나 초성왕이 상당히 성숙한 태도로 중이의 면모를 높이 평가하였고 신의로써 대하였다. 후에 중이가 진문공이 되어서 삼사를 물리겠다는 약속 또한 이행 하였으니 이는 춘추시대에 보기 드문 패제후 간의 신의의 이행이었다. 중이가 이렇듯 여러 나라를 방문한 것은 나중에 패제후가 되어서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인물이 된 학습의 과정이었고 중요한 여정이었다.
3) 진문공의 인격과 정치
정치와 비정치는 진문공의 공과(功過)를 말한다. 한 나라에 임금이 된 자는 반드시 좌우에서 재능 있는 신하가 보좌해야만 정치를 할 수 있다. 진문공이 패제후가 된 것은 자범과 같은 충신이 있고 그를 따르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진문공이 정치를 바르게 한 것이 춘추좌전, 희공 27년 무자(戊子) BC.633의 기사에 보인다.
진후(晉侯)가 처음 귀국했을 때부터 백성들을 교도하였는데, 교도한지 2년 만에 문공이 이들을 사용해 전쟁하려 하니, 자범이 말하였다. "백성들이 아직 도의를 몰라 그 생활을 불안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에 문공은 출병하여 양왕(襄王)의 위치를 안정시키고 환국하여 백성을 이롭게 하는 정치에 힘을 쓰니, 백성들이 생활을 편안히 여겼다. 문공이 다시 이들을 사용해 전쟁하려 하니 자범이 말하였다. "백성들이 아직 신의를 몰라 시행할 방법을 분명하게 알지 못합니다."
이에 문공은 원(原)을 쳐서 백성들에게 신의를 보이니, 물자를 교역하는 백성들이 많은 이익을 구하지 않고 약속한 말을 분명한 증거로 삼았다. 문공이 "이제 사용해도 되겠는가?"라고 하니 자범이 말하였다. "백성들이 아직 예를 몰라 공경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에 문공은 군사훈련을 대대적으로 거행하여 예를 보이고, 집질(執秩)를 설치하여 관작의 등급을 바로잡으니, 백성들이 상사의 명을 따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뒤에 이들을 사용하여 곡(穀)에 주둔한 초나라의 병사를 축출하고 송나라의 포위를 풀었다. 그리고 한 번 전쟁하여 패업을 이루었으니 이는 문공이 백성을 교도한 결과이다. 윗 문장의 집질은 벼슬 이름을 말한다.
진문공이 성복(城濮)의 전투에서 초나라를 패하고 무지한 백성들에게 문덕의 교화를 이루어 내어 패업을 달성한 것이다. 진문공이 처음 나라를 맡아서 정치를 함에 그 백성을 쓰는 일에 급급해 하지 않고 백성을 교화하는 일에 힘썼다는 것이 훌륭한 점이다. 그 교화의 내용은 백성들에게 禮를 포함하여 義를 가르친 것이다.
한편, 진문공의 사생활을 잠시 상고해 보고 인간성을 가늠해 본다면 그는 개과천선하고 부원복(不遠復)하는 자였으며 진목공의 신임을 얻은 자였다. 진백(秦伯; 진목공)이 중이에게 여자 다섯을 보내 주었는데 회영(懷嬴)이 그 속에 끼어 있었다.
하루는 회영이 주전자에 물을 담아 들고 중이의 손에 부어 세수하게 하였는데, 세수를 마치고는 젖은 손의 물을 회영에게 뿌리니, 회영이 화를 내며 말하였다. "진(秦)나라와 진(晉)나라는 대등한 나라인데 어째서 나를 비천하게 대하십니까?" 공자는 겁이 나서 상의를 벗고 스스로 죄수 모양을 하고서 사죄하였다.
후일에 진목공이 중이를 주연에 초대하였다. 자범(子犯)이 말하기를, "나는 말솜씨가 조쇠(趙衰)보다 못하니 조쇠를 데리고 가소서"라고 하였다. 연회 중에 공자가 '하수(河水)'를 읊으니 목공이 '육월(六月)'을 읊었다.
그러자 조쇠가 말하였다. "중이는 배사하소서." 공자(진문공)가 뜰 아래로 내려가 절하고서 머리를 조아리니 목공이 한 계단을 내려가 사양하였다. 조쇠가 "진군께서 천자를 보좌하는 일을 들어(稱) 중이에게 명하시니 중이가 감히 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고 말하였다.
대인은 개과천선함에 있어서 지체함이 없다. 이 사건은 후일에 진문공이 개과천선을 잘하였다고 평가되는 대목이다. 사소한 일이라도 잘못 되었음을 알면 즉시 사과하고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은 큰 인물의 소양인데 중이가 바로 그러하였다.
위의 진목공이 읊은 '六月'은 시경 소아의 편명이다. 이 시는 윤길보가 주선왕(周宣王)을 도와 정벌한 일을 찬양한 시인데 공자가 진(晉)나라로 돌아가 임금이 되면 반드시 왕국을 바로잡을 것이라고 비유하여 읊은 시이다.
옛날에는 예회(禮會)에 고시(古詩)를 이용해 자신의 뜻을 나타냈기 때문에 시를 읊어 단장(斷章)하였는데 온전한 시편의 이름을 칭한 것은 대체로 수장(首章)의 뜻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六月' 시의 수장에는 왕국을 바로 잡을 것을 말하였고 다음 장에는 천자를 도울 것을 말하였기 때문에 조쇠가 뭉뚱그려 말한 것이다.
진백(秦伯)이 다음해에 중이를 진나라의 임금으로 들여보냈다. 두예는 진백이 중이를 임금으로 들여보냈다고 했다. 진목공이 희공 9년에 혜공(이오)을 진나라로 들여보냈다가 이번에는 중이를 세운 것이다. 위의 희영에 관한 기사가 희공 22년 기사에 보이는데, 진(晉)의 태자 자어(子圉)가 진(秦)에 인질로 잡혀있었다.
자어는 당시 아내였던 영씨(嬴氏)에게 함께 도망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영씨는 자어에게 진나라 태자로서 우리나라에 잡혀와 치욕을 당하고 있으니, 돌아가고자 하는 것도 당연하나 자신의 나라 임금이 본인에게 자어를 모시게 한 것은 자어를 붙잡아 두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다.
만일 자어를 따라서 晉나라로 간다면 秦을 배신하는 일이니 따라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발설하지도 않았다. 이에 자어 혼자 晉나라를 도망쳐 돌아갔는데, 뒤에 영씨는 다시 진문공이 된 공자 중이의 아내가 되었다. 영씨는 바로 회영이다.
회영에 대하여 여동래는 "부모 자식은 한 몸이요, 부부도 한 몸이다. 저쪽에 피해를 당하면 이쪽에 상처를 입는 것이다. 의리로 따져서 자어를 온전히 돌보지 못하고서야 어찌 족히 자신의 몸인들 온전히 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회영이 처음에는 구차하게 모면 하고자 했다가, 끝에는 두 남편을 섬기는 치욕을 면하지 못한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회영의 처신은 진목공을 배신하지도 않았고 자어의 뜻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에 온 결과는 진문공이 秦나라의 후광으로 제후가 되었고, 자신은 다시 진문공의 처첩이 된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진문공은 계외(季隗) 영씨(嬴氏) 등 처첩에게 까지 신임을 받았으니 그의 가치(家治)의 수준을 높이 인정 할 수밖에 없다.
한편 진문공은 여식에 대한 교육이 잘 되었으며 그 여식의 역량이 보통사람과 달랐다는 내용이 춘추좌전, 희공 24년 을유(乙酉) BC.636 기사에 보인다. 적인(狄人)이 계외(季隗)를 진(晉)나라로 보내면서 그 두 아들의 거취를 물었다. 문공이 딸을 조쇠에게 아내로 주어 원동(原同), 병괄(屛括), 누영(樓嬰)을 낳았다.
조희(趙姬)가 조쇠에게 순과 그 어미를 맞아오기를 청하니 자여가 거절하였다. 조희가 말하기를, "새로 사랑하는 사람을 얻었다고 하여 사람을 잊는다면 어떻게 사람을 부릴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맞이해 오십시오"라고 하면서 굳이 청하니 조쇠는 허락하였다.
순과 그 어미가 온 뒤에 조희는 순이 재주가 있다고 여겨 문공에게 굳이 청하여 순을 적자로 삼고서 자기의 세 아들을 그의 하위에 있게 하고, 숙외를 내자로 삼고서 자기는 그의 하위가 되었다. 조희는 문공의 여식이다. 순(盾)은 적녀(狄女) 숙외가 낳은 아들이다.
문공의 딸 조희가 문공의 신하인 조쇠와 혼인을 하였다. 그런데 문공과 조쇠가 적나라에서 망명 생활 중에 적나라의 여인과 혼인한 사실이 있었고, 조쇠에게는 순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이제 세상이 바뀌고 상황이 바뀌어 문공과 조쇠가 진나라에서 권세를 잡은 상황에서 조희가 그 작은 나라에 있는 옛날의 부인을 받아들였고 그 아들을 적자로 인정한 것이다. 이것은 윗자리를 확보한 부인이 아래를 향하여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이 한계가 있을 법한데 조희의 역량은 춘추시대에 다른 여인들과 비교하면 그 역량이 달랐다.
조희는 정치적인 입지가 분명하였다. 남편과 친부의 권세만으로도 자신의 지위는 확실히 정해진 것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의 사욕을 멀리하고 부인의 순서와 적자와 차자의 천서를 존중하였으니, 다른 여인들과의 비교는 물론이고 사대부들과 비교하여도 모자람이 없었다. 인물은 하늘이 내린다고 하는데 진문공도 역시 그러하였다.
이에 대한 춘추좌전, 희공 28년 기축(己丑) BC.632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초자(楚子)가 신(申)땅으로 들어가 거주하면서 신숙(申叔)에게는 곡(穀)으로 떠나게 하고 자옥(子玉)에게는 송나라로 가게 하면서 말하였다. "진군(晉軍)을 추격하지 말라. 진후(晉侯)가 망명하여 국외에 19년 동안 있었고 끝내 晉나라를 얻었으니, 세상의 험하고 어려운 일들을 빠짐없이 경험하였고, 백성들의 진실과 거짓을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다가 하늘이 그에게 시간을 주어 또 그의 해악을 제거 하였으니, 하늘이 세운 사람을 어찌 사람의 힘으로 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진후가 어렵고 험난한 일을 모두 경험하였고 진실과 거짓을 모두 아는 유덕자이니, 더불어 대적할 자가 없었다. 진문공은 춘추시대에 하늘이 내린 자라는 것이다. 하늘이 그를 19년 동안 고난으로 단련시켜서 패제후로 키운 것이니 누가 그를 대적 할 수가 있겠는가? 초자(楚子)는 이미 이러한 실정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공자는 진문공을 譎而不正이라고 평가하였다. 물론 공자는 그 이유를 자세하게 언급하지는 않았다.
4) 晉나라의 周에 대한 미조견(未朝見)
진문공을 휼이부정(譎而不正)이라고 평가한 공자의 평가에 두예도 뜻을 같이 하였다. 28년 기축 BC.632 경문에 '천왕(天王)이 하양(河陽)에서 사냥하였다'라고 하였고 이에 대한 춘추좌전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이번 회합에 진후가 왕을 불러 제후를 거느리고 조견(朝見)하고, 또 왕에게 사냥하게 하였다. 이에 대해 중니(仲尼)는 "신하로서 임금을 부른 것은 교훈이 될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경(經)에 '천왕이 하양에서 사냥하였다'라고 기록하였으니, 이는 왕이 사냥할 땅이 아님을 말한 것이고, 또 진문공의 덕을 밝힌 것이다.
좌구명은 진문공을 시종일관 유덕자로 평가하며 기사를 쓰고 있다. 정태현 선생도 "진나라가 강대함에 스스로 만족하여 감히 周나라로 가서 조견하지 않았다(自嫌强大 不敢朝周)는 소(疏)에 의하면 진문공의 본심은 제후를 대대적으로 모아 함께 천자를 섬기는 것을 신하의 명분과 도의로 삼고자 한 것이고, 실로 천자의 자리를 엿보려는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이때 주나라 왕실이 이미 쇠퇴하여 천자의 힘이 미약하였으니, 갑자기 아홉 나라의 군대 수십만을 거느리고 경사로 가서 천자를 알현한다면 찬탈하려는 의도가 있을 것으로 오인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周나라로 가지 않고 왕이 오도록 불렀다는 뜻이다"라고 진문공의 잘못이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두예와 주신은 진문공을 비난하였다. 두예는 "진후는 제후를 크게 회합하여 천자를 존경해 섬기는 것을 명분과 의리로 삼고자 하였으나, 진나라가 강대함에 스스로 만족하여 감히 周나라로 가서 조견하지 않았고, 왕이 나와서 사냥하도록 설득하여 모든 제후들이 신하의 예를 다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모두 '휼이부정'한 일들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주신은 "晉은 제후국이고 周는 천자국이니 이는 신하로서 임금을 부른 것이요 천하에 교훈 삼아 보여줄 수 없는 일이다. 겨울사냥을 수(狩)라고 하니 대개 천자와 제후가 사냥을 하는 것은 자신의 나라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지금 하양은 晉나라의 소속이니 천왕이 사냥한 것은 그 자신의 땅을 벗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곧 진후가 왕을 부른 죄가 드러난 것이다"라고 하였다.
진문공이 제후로서 천왕을 부르는 일은 비례(非禮)이다. 춘추좌전에서 진문공의 덕을 명덕이라고 한 것은 진문공의 덕이 아름다운 덕으로 쓰인 글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논어에 진문공은 '휼이부정'이라고 하였다. 공자는 진문공과 제환공을 대비시켜서 제환공이 왕도에 가까운 정치를 했다고 평가했다.
이 평가는 첫째 진문공이 초(楚)와의 전쟁에서 계교를 사용하였다는 점 때문이다. 둘째 입국하는 과정에서 조카인 회공(懷公)이 역량이 부족하여 정국을 혼란한 상황으로 만들었지만 그러한 정국의 틈을 이용하여 제나라와 진나라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까지 입국하여 제후가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성현들도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으나 지금에 와서 상고해 보면 '휼이부정'하다고 평가를 받은 이유가 아마도 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주공이 어린 성왕을 보좌한 것과 비교하여 보면 알 수 있다.
진문공은 진헌공의 아들로서 '신생지난'에 출분하여 적(狄), 위(衛), 제(齊), 조(曹), 송(宋), 정(鄭), 초(楚), 진(秦)나라를 다니면서 망명생활을 하였다. 그 와중에도 진나라는 왕자들에 의하여 국정이 혼란하였다. 진문공의 망명생활 19년은 패제후가 되기 위한 학습의 여정이었다. 그는 패제후가 되어서 덕치를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나라가 강성해지자 주나라에 대한 조현의 예를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진문공에 대하여 '휼이부정'하다는 공자의 평가는 '휼(譎)'과 '부정(不正)'에 각각 이유가 있다. '휼'은 진문공이 초와의 전쟁에서 계략적이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그리고 '부정'은 당시에 진문공 자신을 따르는 현자들이 많았고 국제적으로도 정치적인 기반을 다졌다고는 하지만 정국이 혼란한 틈을 타서 조카인 회공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Ⅲ. 結論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 임금은 제후를 가리키며 그 제후가 왕도정치를 했는지 패도정치를 했는지 하는 문제는 본인에게 있어서 수신의 문제로 시작하여 평천하의 여부에 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중요하다. 더욱이 제후의 위치가 중요한 것은 위로는 周나라를 섬기고 아래로는 작은 나라와 조화를 이루며, 이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신하와 백성을 잘 관리해야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춘추시대의 제후 제환공과 제후 진문공의 정명(正名)에 대한 공자의 평가는 상반되었다. 강대한 정도를 따진다면 제환공 보다는 진문공이 그 정치를 잘했다고 볼 수 있고, 그 강성함이 오래 지속되었다는 면에서도 역시 진문공의 공이 훨씬 크다고 본다.
그러나 공자는 강대한 힘에 초점을 두어서 제후들을 평가하지 않았다. 제환공이 적의 신하인 관중을 중용한 점은 대단한 포용력을 갖춘 인물이라는 점을 증명하며, 그를 통하여 자소정치(慈小政治)와 존왕정치(尊王政治)를 하여서 상하의 조화를 이루어 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반면에 진문공은 비록 계모에 의하여 환란을 겪고 망명생활을 하면서 정치의 역량을 키운 인물이며 진나라에 하늘이 내린 인물이라고 하나, 그 인물이 제후가 된 과정이 조카를 죽이고 나라를 얻었다는 면을 든다면 강대한 힘을 키운 공조차도 정명에 맞지 않았다는 것이 공자의 판단인 것이다.
제후들이 득세하고 무력이 난무한 세상에서 공자는 진문공과 제환공을 대비하여 그 정명론을 간단하게 한마디로 제시하였다. 그래서 그 정명의 근거를 논자가 얄팍한 지혜로써 찾아본다는 것이 무리가 있었으나 작은 시도였다는 점에 의미를 두며, 이 제환공과 진문공의 명분론은 결과만을 중시하고 과정을 소외시하기도 하는 풍조 속에서 무조건적인 득세에 관심이 있는 현대인들에게 교육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또한 이 두 제후에 대하여 공자는 正과 不正을 강조하여 언급하였으나 그 속에 中과 不中의 의미를 함께 포함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후라는 자리는 천자와의 주종관계 상에서 볼 때 천자가 六五라면 제후는 九二로 볼 수 있다. 또 자국의 신하나 약소국과의 주종관계 상에서 본다면 제후가 九五가 되면 신하를 六二로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제후의 正名은 곧 中正論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에 진문공보다 제환공이 中正에 근사하게 접근하였다고 보아야 하며, 반드시 제환공이 中正하였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단지 正而不譎과 譎而不正은 불휼과 부정이 곧 正과 譎을 대변하지 않으며, 이 두 제후를 비교한다면 다소 正하고 譎하였지만, 진문공에 비하여 제환공이 중정했다는 것이 아니고 中正에 가까웠다고 인식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 譎(속일 휼)은 형성문자로 谲(휼)은 간자(簡字), 憰(휼), 矞(휼)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말씀 언(言;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矞(율, 휼)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譎(휼)은 ①속이다 ②기만(欺瞞)하다 ③어긋나다 ④변하다 ⑤굽다 ⑥넌지시 비추다 ⑦진기하다 ⑧속임수 ⑨햇무리(해의 둘레에 둥글게 나타나는 빛깔이 있는 테두리)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속일 기(欺), 속일 만(瞞), 속일 사(詐), 속일 궤(詭), 속일 무(誣), 속일 편(騙)이다. 용례로는 가슴 속에 품은 음휼한 마음을 휼부(譎腑), 간사하고 능청스러운 꾀로 남을 속이는 잔꾀를 휼계(譎計), 진기하고 괴이함을 휼괴(譎怪), 남을 속이는 꾀를 휼모(譎謀), 간사를 부려 남을 속임 또는 남을 속이려고 간사한 꾀를 부림을 휼사(譎詐), 둘러 말하여 간함을 휼간(譎諫), 속여 거짓말함 또는 기이한 물체를 휼궤(譎詭), 마음속이 컴컴하고 내흉스러움을 음휼(陰譎), 교묘하고 간사스러운 속임 또는 이상야릇한 속임을 궤휼(詭譎), 음흉하고 간휼함을 흉휼(兇譎), 간사스럽고 속임수가 많음을 회휼(回譎), 기묘하고 능청스럽게 남을 속임을 기휼(奇譎), 배반하여 속임을 배휼(背譎), 간사하고 음흉함을 간휼(奸譎), 간사한 꾀와 거짓이 많음을 교휼(狡譎), 교활하고 바르지 않다는 뜻으로 의롭지 못한 행동을 이르는 말을 휼이부정(譎而不正) 등에 쓰인다.
▶️ 而(말 이을 이, 능히 능)는 ❶상형문자로 턱 수염의 모양으로, 구레나룻 즉, 귀밑에서 턱까지 잇따라 난 수염을 말한다. 음(音)을 빌어 어조사로도 쓰인다. ❷상형문자로 而자는 '말을 잇다'나 '자네', '~로서'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而자의 갑골문을 보면 턱 아래에 길게 드리워진 수염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而자는 본래 '턱수염'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지금의 而자는 '자네'나 '그대'처럼 인칭대명사로 쓰이거나 '~로써'나 '~하면서'와 같은 접속사로 가차(假借)되어 있다. 하지만 而자가 부수 역할을 할 때는 여전히 '턱수염'과 관련된 의미를 전달한다. 그래서 而(이, 능)는 ①말을 잇다 ②같다 ③너, 자네, 그대 ④구레나룻(귀밑에서 턱까지 잇따라 난 수염) ⑤만약(萬若), 만일 ⑥뿐, 따름 ⑦그리고 ⑧~로서, ~에 ⑨~하면서 ⑩그러나, 그런데도, 그리고 ⓐ능(能)히(능) ⓑ재능(才能), 능력(能力)(능)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30세를 일컬는 말을 이립(而立), 이제 와서를 일컫는 말을 이금(而今), 지금부터를 일컫는 말을 이후(而後), 그러나 또는 그러고 나서를 이르는 말을 연이(然而), 이로부터 앞으로 차후라는 말을 이금이후(而今以後), 온화한 낯빛을 이르는 말을 이강지색(而康之色), 목이 말라야 비로소 샘을 판다는 뜻으로 미리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일이 지나간 뒤에는 아무리 서둘러 봐도 아무 소용이 없음 또는 자기가 급해야 서둘러서 일을 함을 이르는 말을 갈이천정(渴而穿井),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한 듯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아주 다른 것을 이르는 말을 사이비(似而非), 공경하되 가까이하지는 아니함 또는 겉으로는 공경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꺼리어 멀리함을 이르는 말을 경이원지(敬而遠之), 뾰족한 송곳 끝이 주머니를 뚫고 나온다는 뜻으로 뛰어나고 훌륭한 재능이 밖으로 드러남을 이르는 말을 영탈이출(穎脫而出), 서른 살이 되어 자립한다는 뜻으로 학문이나 견식이 일가를 이루어 도덕 상으로 흔들리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삼십이립(三十而立), 베개를 높이 하고 누웠다는 뜻으로 마음을 편안히 하고 잠잘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고침이와(高枕而臥), 형체를 초월한 영역에 관한 과학이라는 뜻으로 철학을 일컫는 말을 형이상학(形而上學), 성인의 덕이 커서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유능한 인재를 얻어 천하가 저절로 잘 다스려짐을 이르는 말을 무위이치(無爲而治) 등에 쓰인다.
▶️ 不(아닐 부, 아닐 불)은 ❶상형문자로 꽃의 씨방의 모양인데 씨방이란 암술 밑의 불룩한 곳으로 과실이 되는 부분으로 나중에 ~하지 않다, ~은 아니다 라는 말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 때문에 새가 날아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음을 본뜬 글자라고 설명하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不자는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不자는 땅속으로 뿌리를 내린 씨앗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아직 싹을 틔우지 못한 상태라는 의미에서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참고로 不자는 '부'나 '불' 두 가지 발음이 서로 혼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不(부/불)는 (1)한자로 된 말 위에 붙어 부정(否定)의 뜻을 나타내는 작용을 하는 말 (2)과거(科擧)를 볼 때 강경과(講經科)의 성적(成績)을 표시하는 등급의 하나. 순(純), 통(通), 약(略), 조(粗), 불(不)의 다섯 가지 등급(等級) 가운데 최하등(最下等)으로 불합격(不合格)을 뜻함 (3)활을 쏠 때 살 다섯 대에서 한 대도 맞히지 못한 성적(成績) 등의 뜻으로 ①아니다 ②아니하다 ③못하다 ④없다 ⑤말라 ⑥아니하냐 ⑦이르지 아니하다 ⑧크다 ⑨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 그리고 ⓐ아니다(불) ⓑ아니하다(불) ⓒ못하다(불) ⓓ없다(불) ⓔ말라(불) ⓕ아니하냐(불) ⓖ이르지 아니하다(불) ⓗ크다(불) ⓘ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불) ⓙ꽃받침, 꽃자루(불)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닐 부(否), 아닐 불(弗), 아닐 미(未), 아닐 비(非)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가(可), 옳을 시(是)이다. 용례로는 움직이지 않음을 부동(不動),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일정하지 않음을 부정(不定), 몸이 튼튼하지 못하거나 기운이 없음을 부실(不實), 덕이 부족함을 부덕(不德), 필요한 양이나 한계에 미치지 못하고 모자람을 부족(不足), 안심이 되지 않아 마음이 조마조마함을 불안(不安), 법이나 도리 따위에 어긋남을 불법(不法), 어떠한 수량을 표하는 말 위에 붙어서 많지 않다고 생각되는 그 수량에 지나지 못함을 가리키는 말을 불과(不過), 마음에 차지 않아 언짢음을 불만(不滿), 편리하지 않음을 불편(不便), 행복하지 못함을 불행(不幸), 옳지 않음 또는 정당하지 아니함을 부정(不正),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속까지 비치게 환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불투명(不透明), 할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것을 이르는 말을 불가능(不可能), 적절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부적절(不適切),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나 죽여 없애야 할 원수를 일컫는 말을 불구대천(不俱戴天), 묻지 않아도 옳고 그름을 가히 알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불문가지(不問可知), 사람의 생각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도 없다는 뜻으로 사람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오묘한 것을 이르는 말을 불가사의(不可思議), 생활이 바르지 못하고 썩을 대로 썩음을 일컫는 말을 부정부패(不正腐敗), 지위나 학식이나 나이 따위가 자기보다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함을 두고 이르는 말을 불치하문(不恥下問), 세상일에 미혹되지 않는 나이라는 뜻으로 마흔 살을 이르는 말을 불혹지년(不惑之年), 필요하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음을 일컫는 말을 불요불급(不要不急), 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는 뜻으로 어떤 난관도 꿋꿋이 견디어 나감을 이르는 말을 불요불굴(不撓不屈), 천 리 길도 멀다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먼길인데도 개의치 않고 열심히 달려감을 이르는 말을 불원천리(不遠千里) 등에 쓰인다.
▶️ 正(바를 정/정월 정)은 ❶회의문자로 하나(一)밖에 없는 길에서 잠시 멈추어서(止) 살핀다는 뜻을 합(合)하여 '바르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正자는 '바르다'나 '정당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正자에서 말하는 '바르다'라는 것은 '옳을 일'이라는 뜻이다. 正자는 止(발 지)자에 一(한 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갑골문에 나온 正자를 보면 止자 앞에 네모난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성(城)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 正자는 성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正자는 성을 정복하러 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데는 정당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正자는 자신들이 적을 정벌하러 가는 것은 정당하다는 의미에서 '바르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正(정)은 (1)옳은 길 올바른 일 (2)부(副)에 대하여 그 주됨을 보이는 말 (3)종(從)에 대하여 한 자리 높은 품계를 나타내는 말 품수(品數) 위에 붙어 종과 구별됨. 정1품(正一品)으로 부터 정9품(正九品)까지 있었음 (4)조선시대 때 상서원(尙瑞院), 사역원(司譯阮), 봉상시(奉常寺), 내의원(內醫院), 내자시(內資寺) 등의 으뜸 벼슬 품계는 정3품(正三品) 당하(堂下) (5)조선시대 때 세자의 중증손(衆曾孫), 대군의 중손(衆孫), 왕자군(王子君)의 중자(衆子) 등에게 주던 작호(爵號) 품계(品階)는 정3품(正三品) 당하(堂下)임 (6)고려 때 전농시(典農寺), 서운관(書雲觀), 사의서(司醫署), 내알사(內謁司), 사복시(司僕寺)의 으뜸 벼슬 품계(品階)는 정3품(正三品)에서 정4품(正四品)까지 (7)신라 때 상사서(賞賜署), 대도서(大道署)의 으뜸 벼슬 35대 경덕왕(景德王) 때 대정(大正)을 고친 이름으로 뒤에 다시 대정으로 고침 (8)정립(定立) (9)정수(正數) 플러스(Plus) 등의 뜻으로 ①바르다 ②정당하다, 바람직하다 ③올바르다, 정직하다 ④바로잡다 ⑤서로 같다 ⑥다스리다 ⑦결정하다 ⑧순일하다, 순수하다 ⑨자리에 오르다 ⑩말리다, 제지하다 ⑪정벌하다 ⑫관장(官長: 시골 백성이 고을 원을 높여 이르던 말) ⑬정실(正室), 본처(本妻) ⑭맏아들, 적장자(嫡長子) ⑮본(本), 정(正), 주(主)가 되는 것 ⑯정사(政事), 정치(政治) ⑰증거(證據), 증빙(證憑) ⑱상례(常例), 준칙(準則), 표준(標準) ⑲처음 ⑳정월(正月) ㉑과녁, 정곡(正鵠: 과녁의 한가운데가 되는 점) ㉒세금(稅金) ㉓노역(勞役), 부역(負役) ㉔네모 ㉕군대 편제(編制) 단위 ㉖바로, 막, 때마침 ㉗가운데 ㉘가령, 설혹, ~하더라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바를 광(匡), 바로잡을 독(董), 곧을 직(直), 바탕 질(質),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거짓 위(僞), 버금 부(副), 돌이킬 반(反), 간사할 간(奸), 간사할 사(邪), 그르칠 오(誤)이다. 용례로는 어떤 기준이나 사실에 잘못됨이나 어긋남이 없이 바르게 맞는 상태에 있는 것을 정확(正確),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성품이 바르고 곧음을 정직(正直), 바르고 옳음을 정당(正當),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를 정의(正義), 특별한 변동이 없이 제대로인 상태를 정상(正常), 올바른 길을 정도(正道), 꼭 마주 보이는 편을 정면(正面), 옳은 답이나 바른 답을 정답(正答), 일정한 격식이나 의식을 정식(正式), 본래의 형체를 정체(正體), 진짜이거나 온전한 물품을 정품(正品), 엄하고 바름을 엄정(嚴正), 옳지 않음이나 바르지 않음을 부정(不正), 공평하고 올바름을 공정(公正), 그릇된 것을 바로잡음을 시정(是正), 잘못된 점을 바로 잡아서 고침을 수정(修正), 알맞고 바름을 적정(適正), 거짓이 없이 참을 진정(眞正), 잘못을 고쳐서 바로 잡음을 정정(訂正), 잘못된 것을 바르게 고침을 개정(改正), 태도나 처지가 바르고 떳떳함을 일컫는 말을 정정당당(正正堂堂), 정대하고도 높고 밝다는 뜻으로 대현의 학덕을 형용하는 말을 정대고명(正大高明), 소나무는 정월에 대나무는 오월에 옮겨 심어야 잘 산다는 말을 정송오죽(正松五竹), 의지나 언동이 바르고 당당하며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함을 일컫는 말을 정정백백(正正白白), 옷매무시를 바로 하고 단정하게 앉음을 일컫는 말을 정금단좌(正襟端坐), 마음을 가다듬어 배워 익히는 데 힘씀을 일컫는 말을 정심공부(正心工夫), 마음을 바르게 하고 뜻을 정성스레 함 또는 허식이 없는 진심을 일컫는 말을 정심성의(正心誠意), 조리가 발라서 조금도 어지럽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정정방방(正正方方), 때마침 솟아오르는 태양이라는 뜻으로 기세가 더욱 강성해짐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정출지일(正出之日), 바른 길과 큰 원칙을 일컫는 말을 정경대원(正經大原), 마음씨가 올바르면 학식과 덕행이 높고 어진 사람을 일컫는 말을 정인군자(正人君子), 나의 뜻에 딱 들어맞음을 일컫는 말을 정합오의(正合吾意) 등에 쓰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