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역시 사람은 늘그막을, 특히 말년을 봐야 안다.

[장외거사]

역시 사람은 늘그막을, 특히 말년을 봐야 안다
(서프라이즈 / 독설가 / 2008-7-25) 

여기, 한 사람이 자신의 젊은 날을 스스로 소개하고 요약한 글이 있다.

대학에 들어가서 정치학도로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공명심 컸던 저는 서울대 정치학회 학회장으로서 이념 교육에 전념했습니다. 학생운동을 하던 중 강제징집 되어 1981년에 입대했습니다.

제대 후, 노동자를 사랑하는 김문수의 마음과 열정에 감동받아 학생운동에 이어 노동운동에 투신했습니다. 부천 철탑공장, 주안공단 전선제조업체 경인공업, 구로공단의 대한광학 등에 위장 취업하여 노동자 정치 세력화를 위해 노동법 소모임 등을 만들어 교육했습니다. 해고된 노동자들과 함께 해고자 복직투쟁위원회도 만들었습니다.

노동현장에서 평생 반려자, 서명희를 만났습니다. 아내 역시 학생운동 출신으로 삼경복장에 위장 취업한 노동자였습니다. 신념도 의지도 강한 서명희와 1988년, 백기완 선생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김문수 지도위원장이 결성한 서울노동운동연합에서 조직원으로 활동, 5.3 직선제 개헌 당시 수배 중이던 김문수 위원장이 보안사로 잡혀가자, 중앙위원이 되어 서울노동운동연합을 이끌었습니다.

부평에서 사회과학서적 전문 서점 "한 권의 책" 운영. 노동운동단체협의회 홍보부장으로서 월간 "노동운동" 집필, 편집인으로 활동했습니다. 1989년, 민중당의 김문수 노동위원장과 함께 민중당 노동위원회의 기관지, "노동자의 길" 편집장 일을 했습니다.

당시 파격적인 편집으로 구독 부수를 한 달 만에 2배로 끌어올렸습니다. 그 후, 민중당 구로 갑 지구당에서 김문수 위원장을 모시고 사무국장으로 일하는 동안 구로지역 서민 생활 개선을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이하 생략)----

여기, 또 다른 사람의 젊은 시절부터 장년까지의 행적을 요약한 프로필이 있다.

1964년 중앙대학교 재학시절 한일회담 반대 투쟁을(6.3 항쟁) 주도하여 제적되었으며, 이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거치면서 30년간 5번 투옥되었다. 1989년 전민련 조국통일위원장을 거쳐 1990년 민중당 창당에 참여하여 사무총장이 되고 14대 총선에서 자신의 지역구인 서울 은평구에서 출마했으나 3위로 낙선했다.

<주요경력>
1971년  민주수호 청년협의회 회장
1979년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한국 위원회 사무국장
        한국 민주투쟁 국민위원회(민투, 지하조직) 위원장
1986년  민주 통일 민중운동연합(민통련) 민족통일위원장
1987년  서울 민주 통일 민중운동연합 의장
1988년  서울 민중연합 민족학교 의장
        자주민주통일국민회의 사무국장
1989년  서울 민족 민주 운동 협의회 상임의장
1989년  서울 민족 민주 운동연합(전민련) 조국통일위원장
        제1회 범민족대회 집행위원장
1991년  민중당 사무총장

---(이하 생략)----

누군지 짐작이 가는가?

앞의 것은 차명진이고 뒤의 것은 이재오다. 둘 다 한나라당이다.

차명진은 현재 한나라당 대변인이 되어, 어린 학생이 보면 글짓기 교육에 해가 될까 봐 보여주기 겁날 정도의 질 떨어지는 글들을 논평이랍시고 연일 쏟아내고 있다. 이재오는 다들 알다시피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의 1등 공신이며 대운하 전도사이다. 한나라당에서는 최고위원, 원내총무 등 고위직을 두루 거쳤다.

두 사람이 만약 저 위에 소개된 시기까지만 살고 요절하였다면, 광주나 모란 공원의 민주 열사 묘역에 묻혀 있을 것이며 매년 추모식에 수많은 사람이 모여 눈물 흘려주었을 법도 하다.

역시 후대에 더러운 이름이 남느냐 하는 여부는 그 사람의 말년의 모습으로 판가름난다.

최 명 교수가 쓴 삼국지 평전의 내용을 조금 소개한다.

삼국지를 여러 차례 읽은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관우는 결함이 많은 장수다. 공명심에 사로잡혀 있으며 오만하다. 쓸데없는 자존심이 너무 강하다. 전략과 작전의 실패로 패전도 했고, 조조에게 포로로 잡혀 있기도 했으며,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고 한때 호의를 베푼 조조를 동정하여, 조조를 죽이라는 군령을 어기고 조조를 눈앞에서 놓아주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그 오만하고 거만한 자존심으로 형주를 잃는 결정적 과오를 범했다. 그럼에도, 후대에 "군신(軍神)"으로 추앙받으며, "삼국지"하면 으레 떠오르는 멋있는 영웅으로는 항상 선두권을 다툰다.

왜일까?

말년이 구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권이 부귀영화를 약속하며 자신의 밑에서 장수로서 싸워줄 것을 적극 회유하였으나 관운장은 조금도 흔들림없이 손권을 저주하며 결연히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했다. 결함이 없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 의로웠기에 그 결함을 모두 만회하고 삼국지 최고의 영웅으로 남게 된 것이다.

차명진, 이재오.

본인들은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젊은 시절, 혈기는 넘치고 세상 물정은 잘 모르는 상태에서 날뛰었으나 연륜이 쌓이다 보니 안목이 현명해져서 젊은 날 외치던 것이 정답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라고 변명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젊어서 마르크스를 믿어보지 않은 사람은 바보요, 늙어서까지 마르크스를 믿는 사람은 더 바보라는 흔해빠진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설혹 그 말을 조금 수긍해 준다 해도, 젊은 날 품었던 결의와, 젊은 시절 목숨 걸고 함께 하던 동지들을 배반한 이후에 찾아간 곳이 하필이면 젊은 날 자신들을 짓밟던 세력이 일구어 놓은 부귀영화와 기득권이 가득한 곳이라는 점은 아름답지 못하다.

30년간 목숨 건 민주화 투사였던 김영삼이란 사람이 있다.

대선 후보 경선에서 김대중에 패한 직후라 앙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을 구명하는 데 먼저 앞장섰던 대인배스러움도, 3년간 가택연금 당하며 수모를 당했던 일도, 목숨 걸고 23일간 단식투쟁했던 일도 있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자신이 목숨 바쳐 싸우던 상대인 그 군사독재와 한순간에 야합하여 결국 대통령이 되었다. 누가 과거의 그 화려한(?) 투사로서의 행적을 알아주겠는가.

군사독재 시절 30년 투쟁 행위가 결국은 대통령병에 걸려 인기를 얻기 위해 수십년간 본심을 숨기고 연극을 했던 것이라는, 본인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는 평가를 받기에 알맞을 뿐이다.

김영삼이 노태우와 야합하지 않고 계속 야당에 남아 있었다면, 살인마 군사 독재와 추잡한 타협과 더러운 거래를 하지 않았더라면, 인권을 유린하던 그 세력에 빌붙어 권력을 구걸하지 않았더라면, 비록 대통령이 되지는 못하였을지 몰라도 지금쯤 재야 정치인의 거목으로 존경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서울시 동작구 상도동에 봉하마을에서 볼 수 있는 만큼의 인파가 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상도대"라는 영광스런 별명이 인구에 회자되며, 약수터에서 노구를 이끌고 뒤뚱대며 배드민턴 채를 연신 헛치는 장면이 담긴 동영상을 많은 시민들이 흐뭇한 눈길로 재생시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늘그막에 구차한 야합을 안 했더라면…

대통령 욕심 조금만 버리고 늦추어서 대통령 까짓 거 5년 늦게 된다 생각하고 김대중 씨에게 화통하게 대승적으로 양보했었더라면…

수백 년 의로운 이름을 남길 수 있었건만 그 모든 것을 5년짜리 대통령질 하는 것과 엿 바꿔먹어 버렸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차명진과 이재오.

젊은 시절 이런 제법 훌륭한 전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한나라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는지 아직까지 그들은 왜 그런 변절을 한 것인지 속시원히 소회를 밝힌 적이 없다. 변절이 되었든 구국의 결단이 되었든 아직까지 자신의 전향에 대해 솔직히 의견을 밝힌 바가 없다.

그토록 옥고를 치러 가면서까지 타도하고자 했던 대상인데, 나중에는 머리를 숙이고 그 세력의 중심부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이유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젊은 날을 짓밟던 세력이 저지르던 추악한 짓거리들을 이제는 그들과 같은 편이 되어 똑같이 앞장서서 저지르고 있는 작금의 행태에 대해 차명진과 이재오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싶을까.

"어제는 어제의 논리가 있고 오늘은 오늘의 논리가 있다" 김종필이 지껄이던 이 궤변을 답습할 것인가.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간 것이다" 김영삼이 내지르던 이 궁색한 핑계를 댈 것인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차명진의 결혼식 주례를 해주셨던 백기완 선생은 오늘날의 차명진을 보고 무어라 말씀하실까. 주례를 섰었다는 사실을 기억이나 하실까. 결혼식 날 신랑 신부와 함께 찍은 기념사진을 오랜만에 꺼내보시면서 흐뭇해하실까.

한 마디 요약 - 변절자는 추하다.

[참고]

사람을 보려거든 그 후반생을 보는 것으로 족하다.

聲妓，晩景從良，一世之臙花無碍。
성기,  만경종랑, 일세지연화무애.

貞婦，白頭失守，半生之淸苦俱非。
정부,  백두실수, 반생지정고구비.

語云，ꡔ看人只看後半截ꡕ，眞名言也。
어운,  간인지간후반절   진명언야

기생이라도 늘그막에 한 남편을 따르면 한세상의 연분이 꺼릴 게 없고,
수절하던 부인이더라도 백발이 된 후에 정절을 잃고 보면
한평생의 맑은 고절苦節의 보람이 없으리라.
속담에 "사람을 보려거든 후반생을 보라" 고 하였으니 참으로 명언일지로다.

- 채근담, 92장/사람을 보려거든 그 후반생을 보는 것으로 족하다 -

ⓒ 독설가

원문 보기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1&uid=147918

이글 퍼가기(클릭)

[개성만점]

이 사람들은 과거의 역경과 고난에 대한 보상을 이런 식으로 받으려 생각했을 겁니다... 마치 자기네를 뒷받침하는 역사의 화려함으로... 모든 지금의 행동들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을 겁니다... 난 저들을 거룩한 민주열사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민중의 피를 양식 삼아 자신의 야욕을 채우는 더러운 정치꾼일 뿐이죠...

[보라소]

어제 보았던 이외수 작가의 글을 다시 생각나게 하는 글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부패되는 음식이 있고 시간이 지나면 발효되는 음식이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면 부패되는 인간이 있고 시간이 지나면 발효되는 인간이 있다. 부패된 상태를 썩었다고 말하고 발효된 상태를 익었다고 말한다. 그대를 썩게 만드는 일도 그대의 선택에 달려 있고 그대를 익게 만드는 일도 그대의 선택에 달려 있다." 스스로 익어 가는 길을 선택하지 않고 썩는 길을 택한 그들이 애처롭습니다.

[그래 웃자]

살면서 나도 어찌 될지 장담 할 수는 없지만 나 떠난 후에 내 마음이 후회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또바기]

일개 "변절자"들에게 이렇게 많은 양의 장문을 하사 하여 평 하시는 은혜를 베풀었군요..(주간엔 쥐 요 야간엔 박쥐라)..호랑이는 굶어 죽을지언정 풀은 뜯지 않는 법이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