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조지 3세의 4남인 켄트공(公). 하노버왕가의 마지막 군주로서, 태어난 이듬해 아버지가 죽자 독일 출신의 어머니와 독일계 보모(保姆)의 손에서 엄하게 자랐다. 백부(伯父)인 윌리엄 4세가 죽자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하노버왕가에서는 여자의 상속권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노버왕가가 성립한 이후로 계속된 영국과 하노버의 동일군주 관계는 끝나고, 그녀는 영국 왕위만을 계승하였다.
즉위 당시의 총리 W.L.멜번이 어진 아버지와 같은 태도로 그녀를 지도해주고, 또 아버지가 생전에 휘그당과 가까웠던 관계도 있어서, 초기에는 자유당에 호의적이고 보수당 내각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1840년 사촌인 색스코버그 고터가(家)의 앨버트공(公)과 결혼하였다. 독일 출신인 공은 영국에서 백안시(白眼視)되고 그녀도 애정을 가지지 않았으나, 고결한 인격과 풍부한 교양으로써 여왕에게 좋은 조언자와 이해자가 되어, 공사(公事)와 가정생활에서 그녀를 두루 뒷받침하였다.
이기적인 데가 있던 그녀가 국민이 자랑하고 존경하는 여왕으로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은 공에게 힘입은 바가 컸으며, 그녀도 차차 공의 인품에 감화되어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1861년 공이 42세의 나이로 죽자 그녀는 비탄에 잠기어, 버킹엄 궁전에 틀어박힌 채 모든 국무(國務)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나 B.디즈레일리의 설득으로 차차 마음을 바로잡고 동시에 그가 거느리는 보수당에 동조하였으며, 1877년 그가 바치는 인도 여제(女帝)의 제관(帝冠)을 받았다. 9명의 자녀를 두었고 독일·러시아 등과 친척 관계를 맺었으며, 행복한 말년을 보낸 뒤 보어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도중, 64년간의 치세(治世)를 마쳤다. 여왕의 치세는 빅토리아시대로서 영국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자본주의의 선두 선진국이 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디즈레일리와 W.글래드스턴으로 대표되는 2대정당제(二大政黨制) 의회정치가 전형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외교면에서도 영광스런 고립을 지키면서 그 동향(動向)이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한 빛나는 시대에 살면서도 그녀는 ‘군림(君臨)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따랐다. 그리하여 강한 개성으로 강경하게 적극 외교를 밀고 나가는 H.J.파머스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보수주의로 기운 후반기에는 글래드스턴의 자유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본분을 지킬 뿐 자신의 의사를 강요하지 않음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영국 군주의 패턴을 확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