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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건 구성이 아니다. 즉 불성은 머리로 아무리 계산하고 따지고 체계화하고 조직하고 이해하고 해가지고 불쌍을 쌈박하게 이해했다. 100% 틀린 겁니다. 완벽하게 틀린 거죠? 그니까 불성에 대한 전문가가 반지 불쌍에 대한 엄청난 논문을 막 수백 수백 수천 편을 썼다 해도 그 사람은 불쌍을 깨달았다고 할 수는 없어요. 깨달을 확률은 점점 더 희박해지죠. 왜 머리도 너무 정교하게 정리해 놓게 되면 모드로 이해하는 거는 전혀 물성이 아니니까 그래서 불쌍은 항상 한 것도 아니고 무사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불성은 끊어짐이 없어 부디다고 한다. 그런데 또 불성은 끊어짐이 없다라고 했어요. 끊어지고 이어지는 뭔가가 아니다. 그래서 불성은 그래서 불이법이라고 한다. 불성은 불성은 우선 방편으로는 또한 하나라고도 얘기해요. 불성을 포함해서는 일진법개 일체법이고 불법이다. 이런 얘기가 있거든요. 불법을 바로 뭐 여례고 진열이다. 이런 표현이 있어요. 일치법이 진여고 여례고 불법이에요. 그리고 도가 바로 법계다. 허공계다. 이런 표현이 있단 말이에요. 이 3개가 온 우주 허공계가 그대로 법계다. 그런 차원에서 하엄경에서는 이 세상을 이 세상이 불성의 진실을 일진법계라고 표현을 해요. 일진법계 오로지 하나의 진실한 법계뿐이다. 그냥 일진법계뿐이다. 이 세상은 온통 일진법계뿐이다. 일진법계가 바로 화음경에서 말하는 마음의 마음 일체 USIM주 할 때 그 마음 이 마음이 모든 걸 지웠다. 마음에서 모든 게 나왔다. 마음이 바로 모든 것이다. 그게 바로 일진법 모든 게 다 낱낱이 다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이게 다 하나의 마음이다. 바다 위에 파도가 다 다른 것 같지만 하나의 파도 파도이듯이 또한 그 파도가 모두가 그대로 바다이듯이. 테마 건물 너 나 이 사람 저 사람 다 다르잖아요? 분별을 따라하면 다 다른데 그냥 오로지 하나의 법뿐이다. 우리가 지금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부처님 경전이라든지 선호록 같은 걸 보면 부처님은 뭘 하든지 버블 얘기를 해요. 농부가 농사짓는 얘기 하는데 나도 농사짓고 있다. 이랬단 말이야. 나는 뭐 법의 씨앗을 뿌리고 뭐 어쩌고 하면서 이 법으로 다 돌려서 농사 얘기를 한단 말이에요. 즉 중생들에게는 농사 따로 있고 상업 따로 있고 뭐 이 돈 버는 거 저희 따로 있고 따로 있는데 이 법의 입장에서 보면 전부 다 하나일이에요. 하나에 농사짓는 일이 법의 일이란 말이에요. 부처님이 하고 있는 일이 농사짓는 일이 다 하나의 법밖에 없으니까 선생님들이 뜬금없이 얘기 저기하다가 저 들어오리가 어디로 날라갔는데? 날라갔습니다. 어디갔냐 날라갔습니다. 코를 bit고 날라갔다고만 해봐라. 그 드루리를 드로리를 보는 게 아니라 법으로 돌린단 말이야. 모든 게 돌리고 싶어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전부가 한 법이니까 오로지 한 번밖에 없으니까 스승의 제자가 부엌에서 소규제라고 있는 걸 보고는 지나가다가 뭐하냐 물어요? 근데 그 제자가 자기 깨달음이 확고한 제자다 보니까 뭐하냐? 그러면 세간에 분별로 대답하면 뭐하냐 물어보면 설거지합니다. 이래야 되는데. 뭐하냐? 소를 키웁니다 소를 켠다라는 건 소가 깨달음을 의미의 불성을 의미해요. 소를 본다 소를 확인했다. 그 소를 킵니다. 이것은 내가 깨달음을 얻었고 그 이후부터 지금 오후 보임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 소리죠? 그러니까 모든 것을 그렇게 법으로 돌린단 말이에요. 법으로 법 하나로 왜 그럴까요? 그게 뭐 아 저 스님은 그 글루타분하게 저거밖에 몰라. 그래서 그런게 아니라 하나 알아서 하나라서 모든 세간의 일이 전부 다 법의 일이라서 그래서 하나 다 일찍 벗겠다라는 표현도 쓰고 법학에서는 일불 쓴 오로지 하나의 부처밖에 없다. 이런 표현도 쓴단 말이죠? 그러나 이게 전통적인 입장은 아니에요. 그냥 일불 쓴 일진밖에 하나 일심 하나다라는 말도 쓸 수 있는데 이거는 불이법이라는 말보다는 좀 더 허물이 있는 말이에요. 불이법 이만은 둘이 아니다. 이 말이잖아요. 둘이 아니다라는 말은 그럼 둘이 아니면 하나겠지? 이렇게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둘이 아니다라는 말은 그냥 둘이 아니다는 얘기지. 그렇다고 하나다라고 하는 얘기도 아니거든요. 둘이 아니다라는 말이죠. 근데 하나 다 잃어버리면 어때요? 어 그 하나 집착한단 말이야 사람들이. 그 하나의 법에 또 집착하는 게 생긴단 말이에요? 그래서 사실은 하나다라고 이렇게 하면 하나를 내세우는 거잖아요. 근데 불교는 하나 다 해서 이걸 내세우는 방식보다는 그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긴 것도 아니다. 짧은 것도 아니다. 선도 아니다. 악도 아니다 있는 것도 아니다 없는 것도 아니다. 불속을 향상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 담배를 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식으로 아니다. 아니다라고 한단 말이에요. 분별은 이거 아니면 저거다라고 해주는 걸 좋아하거든요. 분별이 원하는 건 이거다 해주는 걸 원하는데 불교에서는 아니다 아니다 하는 걸 통해서. 이거다라고 내가 딱 머물러서 집착할만한 그 가능성을 딱 차단해버리는 거죠. 그럼 그냥 꽉 막혀버리는 거예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데 근데 생각으론 답을 낼 수 없다는데 뭘 할 수 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이 불교 공부는 아무것도 안 하는 공부예요. 아무것도 안 하는 게 가장 공부 잘하는 사람이에요. 그냥 본문만 들을 뿐이지 본문 들을 때도 본문 듣고 이해하고 기억해서 막 받아적고 줄치고 이게 좋은 공부가 아니라 그냥 멍하니 듣기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불교 공부를 제대로 하는 사람들은 이 선 공부를 제대로 하는 분들은 아마 다들 그렇게 들으실 거라고 생각을 해요. 제가 육조 장경을 공부하고 있어요. 근데 이게 세간적으로 공부하면 이거 어찌 보면 3개월이면 공부 다 할 수 있어요. 근데 이제 제가 이거 6개월 동안 해요. 그러면 이제 어떤 사람들은 이럴 수 있죠? 아 스님 좀 빨리빨리 좀 끝내주고 다른 것도 하고 다른 것도 하고 다른 것도 해 주세요. 그 세간 공부해. 그거거든 이것도 책 한 권 떼고 저것도 책 한 권 떼고 저것도 책 한 권 떼고 책 빼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자기 마음을 확인하는 공부지. 이 책 대는 공부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무슨 책을 해도 상관이 없어요? 이 책에는 사실 관심이 없으니까 겸손을 보든 건강경을 보든 첫 시경을 보든 환경을 보든 법 환경을 보든 어록을 보든 상관이 없어요. 그리고 이제 3 가지 공부에서는 어떤 게 있냐면 스님 저는 이미 불교단 나왔어요. 스님 저는 반야생경 공부했어요. 저는 금강경 공부했어요. 했으니까 이제 안 한다는 얘기죠. 그죠 시공군 그렇게 하는 공부 아닙니다. 금강장 공부를 했어요. 그래서 공부가 됐습니까? 됐으면 또 모르겠지만 이 문자 공부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금강경에는 관심이 없어요. 금강경을 통해 자기 마음을 확인하는 게 중요한 것이지. 그러니까 금강경을 두 번 세 번 4번 다시 본 다음에 상관이 없단 말이야. 이 공부는. 그렇게 공부하는 거예요? 그런 자세로 공부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은 제가 뭐 굳이 육조장경을 하지만 여기 뭐 하루 이틀 나와서 공부하시는데 굳이 안 사셔도 됩니다라고 하는 얘기가 이거 사가지고 막 이렇게 보고 막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막 그거 굳이 그렇지 않아도 돼요. 근데 영상 나오는데 무슨 처음 1편부터 내가 끝편까지 다 봐야지? 이것도 뭐 나쁘진 않으나 중간중간 봐도 상관없다. 이 공부는 다 그냥 같은 얘기를 이렇게 표현했다가 저렇게도 표현했다가 하는 거죠. 그러니 어찌보면 세간의 기준으로 보면요. 제가 이제 더 이상 솔보할 게 없는 거예요. 다 했으니까 다 똑같은 얘기밖에 더 해요. 제가 뭐 새로운 얘기 하는 거 있습니까? 하나도 없어요. 맨날 똑같은 얘기만 해요. 근데 듣는 사람들은 맨날 또 든단 말이에요. 왜 듣겠어요. 똑같은 얘기인데 다 아는 얘긴데 이미 들은 얘긴데 방문을 공부하는 것 같으면 그 안에서 그렇게 안 하죠. 이미 한 번 뗐는데 땡 교과서는 뭐하러 또 봐요. 다 다른 교과서 봐야지. 근데 이게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냥 혼자 떠들기 뭐하니까 그냥 주제를 하나 갖다 놓은 것뿐이지. 그래서 이게 내가 2세간에 공부하듯이 공부하면 안 된다. 세간 공부하듯이 뭐 책 떼듯이 이렇게 공부할 필요가 전혀 없는 공부고 특히나 내가 할 공부가 없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속편한 공부예요. 진짜 이게 제일 중세에 대한 공부면서 제일 에너지 낭비 없는 공포에요. 그냥 널면 놀며 하면 되니까 다들 이제 공부하는 사람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좀 좋은 이어폰을 사서 이어폰도 제가 안 좋은 이어폰을 사서 끼워보니까 귀가 좀 안 좋아지더라고요. 참 좋은 이어폰을 사든지 그냥 많은 분들이 늘 그러세요. 집에만 있으면 공부도 집중도 안되고, 운동도 안되는데 야 손님 스님 법문 들으면서 제 좋은 점들이 제가 아마 못 깨달았어도 좋은 점이 많습니다. 그래서 뭐냐? 그랬더니 손님이 때때로 이 공부 얘기 아닌 것 같은 얘기도 한 번씩. 삶은 어떻게 사는지 얘기도 한번씩 해주는 것도 좋고, 또 하나? 더 좋은 게 이게 뭐 딴 거 할 필요가 없는 공분이고, 딴 데는 앉아 가지고 연구하든 도쿄가든 아니면 무릎 아파 죽겠는데 딱 장기 합장해가지고 하니까 막 이게 막 부정도 생기고 피도 안 통하고 앉아 가지고, 좌상에서 1시간 2시간 있어야 되니까 막 힘들고 그랬는데 아 이거는 내가 혼자서 조용히 산에 가서 벗는 듯 산에 산길을 걸으면서 벗는 느낌이 제일 집중이 잘 된다. 그러니까 고요히 길을 걸으면서 산길을 걸으면서 고요히 홀로 벗문 들으면서 공부할 수 있는 게 너무 좋다. 그러니까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이제는. 매일같이 하루에 한 번씩 이틀에 한 번씩 일주일에 몇 번씩이라도 산에 산길을 걷는 게 아주 습관이 돼 놓으니까 운동도 되고 몸도 건강해지고 벗문도 듣고 그러다 보니까 봄 여름 가을 겨울 매 순간 지금 산에 가보세요 이 봄에 꽃이 확 폈다가 지면서 연한 연초록의 잎이 돋아날 때 저도 산에 낮 시간에 가는 것도 좋지만 오후에 오히려 한 서너 시 돼서 올라가요. 선호시대에서 올라가면 요즘 같으면 한 7시쯤 돼야 해가 떨어지거든요. 그러면 4시 돼서 올라가도 한 6시 한 두 시간에 올라가거든요. 그러면 1 3시쯤 올라간다고 하면 5시 오른 한 2시간 올라가면 1시간 그 위에서 나오고 앉아있다가 또 1시간에 이렇게 내려온단 말이죠 그러면 그 5시부터 6시까지 해가 떨어지기 직전. 그때가 산색의 가장 아름다울 때입니다.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고 낙조의 그 아주 붉은빛이 푸릇푸릇한 연한 초록의 잎들을 반짝반짝 만들어주는 그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요. 길을 걷고 이제 내려오는 순간도 그 아주 사선으로 오는 그 밝은 빛이 너무 아름다워요. 또 제가 요즘에 부산에 있다 보니까 부산은요 뭐 예를 들면 장산이나 무슨 뭐 황령산이나 이런 곳은요? 여기 3개 이렇게 아름다운 산이 있겠나? 또 이런 풍경이 있을까 싶어요. 다 정상에 올라가면요. 뭐 광안 대교에서부터 해운대에서부터 부산 전체가 전시내 전체가 막 다 내려다보일대가 쫙 바다가 그냥 쫙 펼쳐져 있습니다. 너무너무 아름답습니다. 일요일날 이렇게 오는 분도 계시던데 1시 반에서 3시 목표 끝나면 장사하는 올라오고 계시는 참 정말 좋습니다. 본문 들으면서 올라가면 좋단 말이죠. 그럼 운동되죠. 마음 공부되죠. 운동되죠 얼마 좋습니까? 그러니까 이 공부가 이렇게 행복한 공부예요. 진짜 행복한 마음공부예요. 말 그대로 행복한 마음 공부 그러면서 스트레스 안 받는 내면의 꼭 막힘은 있지만, 머리를 싸매고 하는 공부가 아니잖아요. 뭐 시험 잘 볼 필요도 없고 머리 싸매고 하는 공부가 아니니까 다른 차원의 공부해요. 그 정신적으로 막히는 공부지 머리를 뭐 머리를 가지고 하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이 불성은 이 불성을 그려서 부리라고 합니다. 불성은 불의가 불성이에요. 돌이면 불쌍이 아니에요. 여러분과 저가 지금 둘로 돌이잖아요. 그죠 이 둘이라는 말은 딱 2개라는 얘기가 아니라 둘 34578 수백 수천만 가지로 나뉘어져 있다는 소리예요. 나뉘어져 있는 것은 불성이 아니다. 이 소리예요. 그럼 여러분들이 불성을 확인하고 싶잖아요. 그럼 어떻게 물성을 확인해야 되느냐? 여기서 힌트를 알아채야 된다. 어떻게 힌트를 알아채느냐 아 나뉘어져 있는 건 물성이 아니구나. 아 그러면 이 몸 저 몸 나뉘어져 있으니까 이 몸은 구성이 아니겠네. 근데 그렇다고 해서 불성이 아니다라고 정리하면 그건 또 아니에요. 아닌 것도 아니고 긴 것도 아니거든요. 아니 이렇게 나뉘어져 있는 것들은 불성이 아니구나. 내가 생각하는 거 생각도 이 생각 저 생각 나누어져 있잖아요. 감정 이 감정 저 감정 나뉘어져 있죠. 그럼 불쌍한 게 아니에요. 의지 이 생각처럼 이 의지 저 의지가 다를 수 있잖아요. 어제 의지 언어로 의식이 다를 수 있잖아요. 음식 분별심 맨날 바뀌잖아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거든요. 거긴 진실이 없다는 거 불성이라는 말은 뭐겠어요? 진실이다. 진정한 나다. 오른쪽에 우리가 의지할 만한 참된 진리다. 이 소리잖아요. 법이란 설이거든요. 나의 본래 마음이라는 소리거든요. 진정한 나아가 바로 불성이라는 소리거든요. 그러면 아 이 몸은 니 몸 내 몸은 아니니까 이 몸은 내가 아니구나. 확실하잖아요. 몸은 내가 아니잖아요. 분별되니까 30년 전 뭔가 이 몸이 다르잖아요. 분별되니까 내 몸이 아니에요. 아, 이 몸은 내가 아니구나. 생각 생각 내가 아니구나. 이 생각 저 생각 둘로 나뉘니까 생각 내가 아니고 생각의 내용은 내가 아니구나. 느낌 이 느낌 저 느낌 아니니까 둘 세 서로 나뉘니까 불이법이 아니니까 느낌도 내가 아니구나. 의지도 내가 아니고 의지도 내가 아니구나. 진정한 나 진정한 불성 진정한 진리가 아니구나. 이게 반야신경에서 말하는 조견 오온계공 도일체 고액 아니에요. 5원 이 5가지가 난 줄 알고 살았는데 이게 내가 아니다는 사실을 비춰보았더니 이건 불이법이 아니니까 비춰 보았더니 일체 교통강에서 벗어나는 일이 벌어진단 말이죠. 이 5 가지는 내가 아니에요. 여기서 나를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여기에 있다. 작용을 통해 드러난다. 이거죠? 작용을 통해 드러난다. 제가 이렇게 말을 할 때 이 말을 통해 드러난다. 이 법은 불이법이 말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생각한다. 생각은 법이 아닌데 생각이 법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이유는 뭐냐면 생각 일어나는 걸 통해서 법이 확인되고 있단 말이에요. 생각 일어난다라는 그 작용을 통해서 법이 확인되고 있다. 고런걸 통해서 소리를 듣는 것을 통해서 법이 늘 확인되고 있다. 여기서 확인되는 게 무엇이냐? 근데 그것이 둘이라면 그건 아니다. 근데 가만히 보세요? 이 말을 둘이면 아니다 했어요. 그러면 내가 어 불쌍을 봤다. 그럼 그건 불성일까요? 본 데가 있고 본 곳이 있잖아요. 그럼 둘이 아닌 둘이잖아요. 그럼 불쌍이 아니죠? 그죠 아 그러면 아 내가 이렇게 볼 수 있는 건 불성이 아니구나. 그러니까 불성은 모양이 없고 크기가 없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거죠. 색깔도 없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죠. 그렇게 나뉠 수 있는 것은 불성이 아니다. 이 소리 저 소리가 분별되면 그것도 불성이 아니다. 그러면 둘이 아니라 그랬어요. 내가 저 소리를 듣는 것도 불쌍이 아니에요. 어떤 소리를 들어도 불성의 소리를 들을 수 없어요. 불성을 냄새 맡거나 맛보거나 감촉을 느낄 수 없어요. 갑자기 느꼈다 하면은 그건 돌리니까 느낀 내가 있고 느끼는 것이 있으니까 시트 하나 드릴게요. 어떤 사람은 혹은 여러분들 중에도 어떤 사람이 누구나 그래요? 누구나 제가 이제 그 비유를 만들죠. 산에 올라갔다가 아침 새벽부터 산에 올라갔다가 산 정상에 딱 도착했는데 아침 해가 막 떠오르고 있다. 그래서 그 모퉁이를 털어서 거기 딱 올라섰는데 장엄한 아름다움의 풍경이 눈앞에 쫙 펼쳐지고 있을 때 생각이 딱 멎었다. 그거를 말해서 우리가 문화일체 뭐 이런 식의 표현을 하죠 그죠? 뭐라 뭐 무하지경 이런 식으로 그죠? 내가 사라진 지경이라고 옛사람들도 그 깨달은 사람들이 아닐 텐데 무하지경이라는 말을 썼단 말이에요. 내가 사라지는 것 같은 경험이다 경계다. 이런 식의 표현을 썼단 말이에요 힘듭니다. 즉 그 순간에 그 순간에 그 순간에는 내가 저 했던 것을 본 것이 아닌 거예요. 버는 나와 보이는 해가 둘로 나뉘지 않은 순간이란 말이죠 그 순간. 굳이 말로 표현한다면 그냥 범 그 자체만 있는 것이지. 내가 저것을 본다가 아니라 그냥 봄이라는 경험 자격 그 자체 그 하나 크게 분리법의 경험입니다. 쉽게 말한다면 그리고 돌로 쪼개지지 않는 그런 어떤 순간들을 힐끗힐끗 누구나 경험하고 살아요. 누구나 자기 자기가 고쳐니까 자기 그 순간을 경험할 수밖에 없죠. 그럼 이것을 명확하게 그거다라고 얘기하면 안 되지만 힌트라고 말씀을 드린 것이 또 다른 힌트를 또 얘기를 해본다면 와칭이라는 책인가 하여간 그런 게 있습니다. 이 뭐 축구 선수가 헬레인가 펠레가 그날 따라 몇 득점을 하면서 막 날라다니는 경기가 있었는데 경기 끝나고 인터뷰를 하는데 오늘은 정말 여태까지 축구 경기하면서 체험해보* 못한 경기였다. 어느 경기는 어느 경기를 하는데 나는 내가 축구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완전히 축구장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가지고 뒤에도 눈이 눈이 달린 것처럼 축구장 전체가 통으로 하나로 보이면서 내 몸이 지 혼자 알아서 막 달리는데 하나도 피곤한 게 없었다. 힘든 게 없었다. 이런 상태였으면 하루 종일 뛰어도 전혀 피곤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런 식의 그 순간과 완전히 하나되는 순간을 그날 완전히 엄청난 실력을 발휘했던 날이었다. 그러거든 또 그 뭐죠? 이케 카레에서 카레에서 1등 했던 사람이 그 1등으로 치고 나가면서 1등 했던 사람이 인터뷰할 때도 비슷한 인터뷰를 하거든요. 완전히 그 차와 나와 이 땅과 이 모두가 아니 하나 되는 것 같은 그 상황에서 나도 모르게 그냥 막 치고 나가지더라. 그런 경험들이 있단 말이에요? 사람들은 자마다 자신의 어떤 막 몰입할 때 내가 사라지는 이런 체험 경험들 한단 말이죠? 그것을 비추어 본다면 즉 보세요. 우리는 내가 저것을 경험하는 것만 할 수 있나요?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거죠. 그죠 꼭 내가 있고 저것이 있어야만 경험하는 게 아닐 수도 있죠. 아닐 수도 있는 가능성 아니에요. 좀 전에 얘기했던 그것이 그죠. 하나로 통으로 경험되는 아 그런 가능성이 있을 수 있구나. 그죠 부처님도 안근이 색경을 촉해가지고 안식이 일어나는 거 큰 다 허망한 거다. 다 소멸시켜야 될 거다. 이랬어요. 그런데 안 근이 색 경을 접촉. 해서 안식이 일어난단 말이에요. 눈으로 이걸 보고 아 이거 컵이구나. 예쁘구나. 이런 인식이 일어난단 말이에요. 눈이 이걸 보는 걸 안 근이 색형을 촉해서 안식이 일어났다는 식으로 표현을 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아 그러니까 이 여기 보는 눈이 있네. 이건 내 눈이지 하는 허망한 착각이 안 입혀라. 그래요 입처는 허망한 망상이란 소리예요. 이걸 보고 보는 내가 있지라고 망상을 일으키는 걸 아닙쳐라. 그러고 저기 바깥의 대상이 있지라고 생각하는 착각을. 왜 입처라 그래요? 6 가지 왜 입처 3개라는 입처다. 그래서 12년 기에서 입처를 육입처로 소멸해야 된다. 그랬거든요. 그러면 눈을 없애버려야 된다는 얘기가 아니라 눈을 나라고 여기는 허망한 망상이 사라져야 된다. 바깥에 있는 경계가 바깥에 있는 나와 다른 것이다라는 험한 경계라는 이런 이 바깥에 있는 다른 것이다라는 착각 둘로 나뉘는 것이다라는 착각 망상 그걸 소멸시켜야 된다는 얘기죠. 그리고 이 사이에서 일어나는 접촉 이 사이에 일어나서는 의식 그 의식은 또 다르다. 의식이 따로 객관계 따로 주관계 따로 이렇게 3개를 자꾸 쪼개는 것은 그런 것은 진실이 아니다 하는 거죠? 아까도 다 돌아가세요. 여기서 이것을 둘로 나누어 놓고 보다가 문득 문화일치가 되어서 예를 든다면 예를 든 거예요. 이런 비유를 들기가 좀 조심스러운 이유는 이렇게 비유를 들면 아 무라일체가 견성이구나. 이렇게 또 착각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비유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럴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가 한번 보자는 거죠. 아, 그러네. 그러고 보니까 난 내가 저것을 본다라고만 그것만이 보는 거라고 나는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렇지 않을 수 있는 봄의 경험이 있었구나. 꿈도 마찬가지잖아요. 꿈에서 내가 그 꿈을 본 건가요? 그 꿈속에서는 꿈의 주인공이 저쪽 내가 저걸 봤다라고 생각하고 내가 저 사람 소리를 들었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꿈 깨고 나면 꿈 전체가 나잖아요. 그래서 꿈 전체가 통으로 본 거잖아요. 이것저것 이것 저것이 나 너가 아니었잖아요. 전부 다 나였잖아요. 빌딩 산하대지 자연 만물까지 꿈속에 등장하는 모든 곳이 전부 다 내 마음이 이렇게 드러난 것뿐이잖아요. 바다에서 파도치듯이 내 마음이 그냥 이렇게 모양으로 드러난 것뿐이잖아요. 상으로 모양으로 드러난 것 뿐이거든요. 모양 전체가 통으로 하나라는 말이죠. 보는 경험이 둘로 나뉘어서 보이지 않아요. 통으로 전체가 보는 것이. 듣는 것도 마찬가지지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분명히 있단 말이죠. 그니까 아 그런 봄에 체험이 있구나. 그런 가능성 이 변성의 가능성이 요즘 사람들이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이해할 수 없는 건데 이해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가까운 범주로 설명을 해 본다면 이런 식의 비유를 들어볼 수 있을 거라는 얘기죠. 이런 식으로 통으로 하나가 되는 불이법의 체형 보는 자리에서 이 맥락 내가 저것을 보다가 저것을 보는 건 다 아니잖아 다르잖아요. 사람마다 다 다르게 보죠. 그죠 사람마다 어떤 사람은 좋게 보고 어떤 사람은 나쁘게 봐요 그 사람을? 저를 어떤 사람은 막 천하의 외도라고 볼 수도 있겠죠. 타종 교인들이라든지 뭐 이런 사람들 또 아주 꼴보기 싫다라고 볼 수도 있겠죠. 또 어떤 사람은 너무 좋아 좋게 볼 수도 있겠죠? 그렇게 저에 대한 분별은 다 달라요. 그죠 그럼 저에 대해서 분별하는 건 제가 아니에요 지실하지 않아요. 근데 저를 보면서 다르지 않을 하나가 있단 말이에요. 분별의 내용을 따라가면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 그건 진실하지 않아요. 근데 분별의 내용을 쫓아가지 않고 쾌감 반주에서 돌이켜서 본다라는 이 사실만을 표현해 본다면. 폰타란 이 사실 하나는 다르지 않잖아요. 분별하기 이전짜리 이전에는 소리를 이 소리를 듣고 특정한 소리를 듣고 이 사람 저 사람 그 소리를 해석하는 건 다르지만 이 소리야. 저 소리야. 이거 듣기 좋아 저건 듣기 싫어라고 해석할 수는 있겠지만 그거는 분별이잖아요. 사람마다 다르니까 그건 진실하지 않죠. 근데 우리는 진실하지 않은 거에만 목매고 살죠. 아니 어떤 사람은 천억 그러니까 뭐 1억이 큰 돈인데 어떤 사람은 1억 별거 아닌 돈일 수도 있어요. 예를 들면 그런데 그 돈에 못 맨단 말이에요. 그럼 가치가 없는 건데 이거는? 사람이 가치를 부여하는 것뿐인데 요거 허망한 거죠. 그거는 가치가 그냥 사람이 부여하는 것뿐이니까 근데 우리는 그리고 부여된 모양 대상에만 지금까지 쫓아다녔단 말이에요. 내가 남들이 어떻게 보일까 다 달라요. 돈이 많고 적은 파 달라요. 사람에 따라 많고 적다라는 기준 다 달라요. 잘났다 못 났다 다 달라요 능력 있다. 능력 없다. 다 달라요. 근데 그 다 다른 걸 가지고 내가 세우는 난 이 정도 돼야지 하고 정해놓고 그걸 가려고 막 이렇게 노력하고 애쓰고 그게 안 되면 괴로워하고. 이게 됐어도 다른 사람은 기증이 다르면 나는 여기서 으쓱하면서 잘난 척하고 산을 살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못났다고 느낄 수도 있어요. 기준이 다르니까 어 보수 진보 하듯이 진보에서 최고 올라가서도 보수에서 봤을 때는 이상한 사람이 올 수도 있죠. 예를 들면 기준이 다르니까 기준이 다르니까 그러니까 이제 기준이 다르니까 진실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것은 아무리 그걸 얻어도 근데 우리는 평생 그 모양만 쫓아가서 그 모양을 화려하게 만들고 아름답게 만드는 거 그거에만 관심 갖고 사니까 괴롭단 말이에요. 그 모양의 세계는 진실하지 않으니까 모양의 세계는 허물이 항상 있어요. 오염이 돼 있어요. 고양이에게는 항상 분별되는 세계이기 때문에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고 늘 괴로움의 가능성을 안고 있습니다. 늘 괴로운 세계에요. 근데 모양 따라가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에게 있단 말이에요. 모양 따라가지 않고도 그 모양을 다 쓰면서도 분별을 다 쓰면서도 분별이 아 허망하구나. 지실대지 못하구나 공하구나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단 말이죠. 가나라가 된다고 해서 무리법을 체험한다고 해서 내가 야 하나니까 니 남편의 내남편이랑 똑같은 남편이네. 이러지 않는단 말이에요. 이 집이나 저 집이나 다 내 집이네. 이러지 않는단 말이에요. 마음에서 근원에서 하나구나라는 게 겉으로는 분별 다 한단 말이에요. 분별 다 하되 분별에 끌려다니지 않는 거고 분별에 노예가 되지 않는 거고 분별에 휘둘리지 않는 것뿐이지 얼마나 잘 웃겠어. 얼마나 자유롭겠어요? 근데 내가 지금까지는 그 경기 끌려다니며 살았다 보니까 이 참된 성품의 이거를 잃으면서 상품이라고 이름을 한 거지. 뭐 성품이 따로 있겠어요?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는 걸 이름에 그냥 성품이라고 이름을 쓸 뿐이지. 그런데 이게 또 완전히 없다고는 할 수 없는 게 이게 다 아니까 이렇게 봐서 알고 들어서 알고 우리가 순수의식이다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이렇게 봐서 알고 들어서 알고 경문 각지에서 아는 이게 있으니까 완전히 없다고 할 수 없어요. 완전 죽었다고 할 수 없단 말이에요. 이게 살아있단 말이에요. 이렇게 번역을 통해서 듣는 걸 통해서 살아있고. 너를 이렇게 움직이고 있잖아요. 근데 내 움직이고 있는 이 모든 것에 생각이 자꾸 중계방송을 해요. 처음부터 끝까지 내 인생을 중계 방송을 해요. 이건 자리에서 잘못했어요. 이건 더 하지 그랬니? 이거는 못 했니 막 중계방송을 하는데 그 중계방송하는 속삭임만 없으면 분별만 없으면 이대로 앉아 여러분 스님 저는 죽음병 걸려서 내일 모레 죽을 건데 어떻게 이대로 안전합니까? 내일 모레 죽을 사람도 이대로 안전해요. 죽어야지 안전한 거예요. 계속 살아있는 거 안전한거 아니에요. 죽는 게 아름다운 거예요. 병드는 게 아름다운 거고 절망하는게 아름다운 거예요. 부처님은 절망하지 않고 죽지 않고 늙지 않았을까요? 늙고 명절 죽고 온갖 고통 다 당하셨어요. 부처님도 모함도 당하고 그러나 그대로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태풍이 몰아치고 폭풍이 몰아쳐서 나무가 뽑혀도 그대로 완전해요. 범데서 꽃이 피도 완전하고 여름에 우거져도 안전하고 가을에 단풍 줘도 안전하고 단풍이 다 떨어졌을 때도 안전해요. 일연성 풀들이 피어났을 때도 땅으로 돌아갔을 때도 그거 자체가 아름다운 거예요.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먹고 사슴을 잡아먹고 사는데 호랑이는 나쁜 놈이고 사슴은 좋은 걸까요? 그 잡아먹히는 토끼도 아름다운 일이고 잡아먹는 호랑이도 아름다운 일이에요. 아름답다고 말할 수도 없죠. 그냥 그럴 뿐이에요. 그냥 아무 분열이 없어요. 그냥 그냥 그럴 뿐인 거예요. 근데 우리가 생각을 개입시키면 호랑이는 천에 죽일 놈이다.
지 한끼 먹기 위해서
왜 평생 얼마나 많은 생명을 죽였느냐?
그 자기 생각 아니에요.
노자가 천지는 불이 나다
천지는 인자하지 않다.
천지는 그냥 그럴 뿐이에요.
법은 진실은 그냥 그럴 뿐이에요.
그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귀하고 천한 게 없어요.
세상에는 고귀하고 삿된 게 따로 없습니다.
고귀하고 삿된 게 따로 없어요.
선악이 따로 없습니다.
법이 자리에서는
그런다고 해서 막 살지 않아요.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다 윤리 도덕적이지
분별 다 할 줄 아니까?
그리고 지금 이대로 부처라니까요.
근데 속삭임만 없으면!
나는 지금 돈이 없는데요.
돈 없는 그대로 부처라니까요.
돈 없어서 괴롭다는 건 자기 생각이잖아요.
생각 일으킬 때만 문제가 되잖아요
난 아파서 그쵸 아니다. 아파도 붙여요. 모든 상황이 그대로 부처를 드러내고 있다. 그대로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대로 이대로가 진실이 있다 그니까 추구할 바가 있습니까? 추구하려는 생각에 우리를 괴롭히게 해요. 추구하려는 생각이 있으면 바로 추구 성공과 실패가 있어요. 추구한 게 성공했느냐 못했느냐? 그러니까 성공 못 하면 괴롭고 성공하면은 행복하겠죠. 행복에 있는 곳에 불행이 있어요. 행복도 없으면 불행도 없어요. 성공에 있는 것에 실패가 있어요. 아예 성공도 안 만들어놓은 실패도 없어요. 애착하는 거에 증오하는 것도 있어요. 내 척하지 않았으면 증오도 없어요. 그 양 2개는 2개 간의 하나거든요. 근데 주구심을 만들어 놓지 않으면 추구할 게 없으면 끝난 거 아니에요. 여기서 제대로 붙여란 말이죠. 근데 물론 이렇다고 해서 이 얘기를 듣고 머리도 딱 이해하고 나서 아 오케이 나 이해 다 했어. 나 이제부터 아무것도 안 하겠다. 그러고 살면 본인이 그러고 사는데 행복하다 하면 상관없어요. 괜찮다 상관없어요. 그게 깨달음이에요. 근데 그러고 사는데 자기가 자꾸 불편하거든요. 사고 힘들고 우리도 알겠는데 이 소화가 안 되니까 자꾸 이 삶이 괴롭단 말이죠? 자꾸 끌려간단 말이죠? 그러니까 공부를 계속 하는 거예요. 그러나 뭐 공부를 많이 했든 적게 했든 같은 자리에 같은 자리에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그러니 사실은 이게 믿음의 종교라고 하잖아요. 신해행쟁하잖아요. 먼저 믿고 그럼 이해하고 잘 이해하고 그리고 바로 행하고 그래서 완전히 정득한다. 바르게 믿기만 해도 그냥 야 내가 진짜 붙였구나. 딱 끝나버릴 수 있어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믿음이 신성취 믿음이 완전히 성취되었다. 야 신심있다. 신심이 깊은 사람이 왔다. 그 선생님들 깜짝 놀란단 말이죠? 믿음 신심이 깊다라는 것은 곧 깨달았다는 소리거든요. 신식명 그게 진정한 믿음이에요. 아니, 내가 지금 이대로 붙여구나. 내가 분별망상을 쫓아가지 않으면 그냥 이렇게 붙여구나. 완전히 믿어보세요. 붙여지지 바르게 또 이렇게 법문을 듣고 법을 들어서 바른 직연을 갖추어서 아 이 몸이 난 줄 알았는데 아 온 우주밖에 허공성이 이대로가 전부가 나구나. 바르게 이해하게 됐을 때 그랬을 때 가벼워진단 말이죠? 문득 순간에 어떤 저랑 같은 순간이 오죠? 그게 뭐 어떻게 올지는 다 서로 좀 다를 수 있겠지만 그냥 알파카에 모두르만 막 이해하면 뭐든 이해되는데 어 거기서 끝난단 말이에요. 괴로움이 끝나지 않는단 말이죠. 그래서 아 이런 이제 법에 대한 공부를 꾸준히 하고 힘든 것도 아니니까 그렇다고 세상 공부하는 것도 아니니까 세상 일은 세상 일대로 하고 시간 날 때 운동 삼아 취미 삼아 공부하면 되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더라도 마음이 점점 더 알아서 간절해져요. 알아서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본 중 최대한 일본이 이 공부가 돼요. 그 억지로 하려고 해서 안 돼요. 억지로 내가 말씀해라. 억지로 이 공부를 1번으로 해라. 그 강요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왜 여러분한테 그걸 굳이 강요하겠습니까? 강요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억지로 여러분도 억지로 그걸 그렇게 만들려고 애쓸 필요 없어요. 저절로 돼요. 저절로 모르게 지금 여기 앉아 계신 분 몇 분 안 계시지만 여러분들이. 그 목요일 날 수요일 날 10시를 기달려서 시간을 맞춰놓고 있다가 이것도 비법이 비슷하다. 이거 복사를 복사하겠다가 딱 붙여놔야지 될 수 있다대요. 뭐 그런 거까지 연구해 가면서 여기를 직접 와서 들어야지 하고 생각할 정도면 얼마나 정성이에요. 정성 그 말은 뭐겠어요? 내가 그만큼 간절하다는 말이거든요. 간절하면 그렇게 행동이 돼버려요. 그냥 내가 하고 싶고 하고 싶지 않은 게 상관없어요. 그냥 이렇게 가는 게 내가 더 편한 일이라 뭐 가는 게 되게 스트레스 받는 일이 아닌 거예요. 내가 가는 게 좋은 일이니까 저절로 가게 되듯이. 저절로 된다. 이 공부는 저절로 무의자연으로 저절로 되는 공부예요. 그러면서 이제 조금 조금씩 내가 만약에 그렇다고 또 이건 100 프로 무이니까 난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다. 이렇게만 또 하면 안 된다. 저절로만 된다라고 해도 또 극단이잖아요. 내가 열심히 할 필요가 없다. 이래도 또 이것도 극단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저절로 된다고 얘기했다가 그다 마음을 내라고도 또 얘기했다가 어디에 딱 안주하지 못하게 한단 말이에요? 분별이 안 주하지 못하게 그러면서 이게 이게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도 모르고 왜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모르는 게 진짜 공부예요. 야산 공부 이만큼 되는 거 같애 저만큼 공부 된 거 같애 이거는 자기가 이렇게 분별하는 거지? 생각하는 거지? 공부된 게 아니에요. 깨닫기 직전까지 모를 뿐이에요. 깜깜할 뿐 오류 깨닫기 직전에는 더 깜깜하다고 하죠. 그러니까 이건 진도가 나가지 않는 공부예요. 이거는 딱 돈오가 되기 전까지는 진도가 나가지 않는 공부다. 근데 나는 한 발도 못 된 것 같다. 그러나 이제 분별의 기준에서는 사실은 진도가 많이 나가고 있어요 그래서 나중에라도 여러분들이 누군가에게 법을 설해주거나 할 때 또 그 그것들을 다 공부가 되고 기회가 돼요 또
그래서요 또한 선도 있고 불선도 있지만 불성은 선하지도 않고 선하지 않은 것도 아니니 이를 일러 불이라고 한다. 세상에 선도 있고 불손도 있잖아요. 여기서도 선근 얘기했듯이 선도 있고 선하지 않은 것도 있는데 불성은 선도 아니고 선하지 않은 것도 아니에요. 불성은 물론 선이라고 말할 수도 있어요. 근데 이거는 여기는 선악이 붙을 자리가 없어요. 선악은 자기 생각 속에만 있어요. 진실이라는 선악이 없습니다 고구려 없어요. 맞고 틀림이 없고 나쁜 놈 착한 놈이 없어요. 다 똑같은 바다 위에 파도일 뿐이지 여러분이 착한 일 많이 했다고 법에서 뭐 혜택을 받고 나쁜 짓을 많이 했다고 법에서 차별되고 그러지 않습니다. 이 법은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아요. 세관상에서의 분별심은 착한 일 하면 인간법은 착한 일 하면 착한 결과를 가져오고 나쁜 일 하면 나쁜 결과를 가져오도록 해요. 그거는 세상법이에요. 세상 인간법이 인간법 이 법은 인과법이 아니라 비인비과예요. 비인비 법에서는 아무 차별이 없어요. 얼마나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뇌가 나쁜 짓을 했어도 이 법에서는 차별받지 않는다니까요. 나쁜 짓을 하면 세관 이상 차별받지만 벌도 받지만 복도 없어서 내가 가난해질 수도 있겠지만 법에서는 차별받지 않아요. 딱 하나 이 세상에서 이런 게 있어요. 법 말고 전부 다 재간법이기 때문에 공부 열심히 하면 공부 잘하죠. 복 많이 지면 복 받죠. 노력하면 부자되죠. 인과대로 이루어져요. 대부분은 그런데 이 법에 공고만은 이 법 공부가 딱 한 요거 하나만 천하의 악인도 깨닫고. 천의 바보도 깨닫고 남녀도 상관없고 공부 많이 하고 적게 하고도 상관없고 아 완전 평등이다. 왜냐 100 프로 자기가 이미 다 가지고 늘 쓰고 있고 늘 이 속에 있으니까 이것이니까 그 어떤 이 법에서는 우리는 한치 차별도 없어요. 여러분과 제가 공부 안 한 사람과 공부한 사람이 남녀가 출제가가 아무런 차별이 없어요. 완전히 평등해요. 법의 법에서는 얼마나 참 놀라운 겁니까? 나쁜 짓했다 상관없어요. 참외 하라고 시키지만 저래서 나쁜 짓 하셨으면 참외하세요 하고 시키긴 하지만 이 법의 자리에서는 나쁜 짓 했다고 해서 깨닫지 못하는 건 아니다. 물론 참회하고 나면 훨씬 빨리 깨닫죠. 왜 나쁜 짓하고 나면 그 찜찜함 나쁜 짓 했다라는 그 그 죄의식 그것 때문에 공부에 걸림이 돼요. 완전 비어지지가 않아요. 걸림이 돼요. 그러니까 대우를 지키라고 하는 거예요. 착하게 살아야 깨달을 확률이 높아지는 거예요. 그런 측면에서는 마음에 걸리는 게 많아지면 공부하기 쉽지 않죠. 그런 면에서 계율을 시키는 거지 계율이 절대기 때문에 지키는 거 아니에요. 계율은 개차법이거든요. 열 수 있고 닫을 수 있다. 지킬 줄도 알아야 되는데 깰줄도 말줄도 알아야 된다고 하거든요. 불교 계율이 제일 특이해요. 전 세계 종교 가운데 종교는 다 개요를 얘기하잖아요. 율법을 얘기를 하잖아요. 근데 불교 같은 계율은 없어요. 불교는 반드시 지켜라 아니에요. 반드시 지켜라 해놓고 법문할 때 보세요. 계율을 지켜라 해놓고 그러니까 저에 와서 숙애는 아무나 다 해도 돼요. 어김어쩌지 않은 두려움 없이 아무나 다 와서 소개받아도 돼요. 불교계율은 왜냐하면 이거 안 지키면 절대 안 돼가 아니거든요. 불교는. 지키겠습니다. 해놓고 나서 마지막에 그런데 이거는 지킬 줄 알아야 하고 범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얘기한단 말이에요. 계열도 절대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절대 지리라고 해서 여기 집착하면 이거는 참된 법이 아니다라는 얘기를 하는 거거든요. 아 그러니 참 이 공부가 얼마나 정말 걸림 없고 자유로운 그 말 그대로 출세 간에 정말 통쾌한 어떤 확연무성한 이런 공부란 말이죠?
범부는 우원과 18개를 둘로 나누어 보*만 지혜로운 그 자성이 둘이 없음을 밝게 본다. 둘이 없는 자성이 곧 불성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범부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오온 오온을 둘로 나누어 본다. 18개를 둘로 나누어 본다. 이렇게 5개로 나누어 보고 18개 18개로 나눠보는 거 이걸 다 둘로 나눈다. 이렇게 표현한 거예요. 그냥 오온이 다 따로따로 있는지를 나누어 본단 말이죠? 색소상 인식이 따로따로 눈 깊고 혐오 뜻 색상은 미처 법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이식 하기가 다 16개로 따로따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혜로운 그 자성이 둘이 없음을 밝게 본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 버는 인식 봄 이게 통 23이 아니란 말이야. 하나가 일어나고 있단 말이야. 하나가 꿈속에서 보고 듣지만 크게 다 하나같이 하나하나가 해서 그냥 벌어지는 것이듯이 그치로는 그 자성을 Gerone는 그 자성을 자성이 두려웠음을 밝혀본다. 두려움 없는 자성이고 불성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둘이 없는 것 이것만이 진정한 자성이다. 그러니까 이 둘이 없다라는 이 말이 아 참 곱씹고 곱씹으면 뭐 곱씹을 것도 없지만 참 놀라운 말이에요. 그리고 이게 하나의 화두죠 화두 야 이게 둘이 없을 수 있나? 이게 어떻게 세상이 있고 내가 있고 너와 이거 내가 있고 옴이 있고 마음이 있고 남과 있고 여유가 있고 잘난 게 있고 못난 게 있고 선이 있고 악이 있는데 어찌 둘이 없을 수 있지? 여기서 막힌단 말이에요. 왜 생각을 하면 일단 둘이거든요. 생각과 생각의 대상 왜 그럴까?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의 내용과 생각이 둘로 나뉜단 말이에요. 그 뒤에 어떻게 둘이 알 수 있지? 이거 이제 화두처럼 들고 있다 보면 문득 회심한단 말이에요. 돌이켜서 묻는 그놈을 돌이켜 깨달음이 뭡니까 질문이고 답이 다른 말이 있죠. 깨달으면 이 공부는 질문이고 답이에요. 깨달음이 뭡니까 해서 깨달음이 뭔지를 찾으려고 답을 찾으려고 바깥으로 여기저기서 답을 구하려고 막 답을 찾고 찾고 찾다가 어 깨달음이 뭡니까 이거네. 깨달음이 뭡니까 이게 깨달음이네. 그 질문이 그대로 답이었네. 이걸 확인하는 거거든요. 구리법이 뭡니까 불이법이 뭘까 하고 둘로 찾는 동안은 저기 답이 있고 여기 질문자가 여기 있어야 되잖아요. 근데 어 질문이 있고 거기에 대한 답이 있으면 둘이잖아 궁금해하는 내가 여기 꼭 궁금해하는 답이 있으면 그건 둘이잖아 아 그럼 불이법이 뭡니까 이거란 얘긴데 그래 하나잖아요. 둘이 아니잖아요. 브리핑이 뭡니까 하는 이걸 해야 되잖아요. 뭐가 이게 브레이크 뭡니까 하고 있느냐? 브리핑이 뭡니까까지 할 것도 없이 불 A할 때 이 불 여기서 딱 돌이켜야 된단 말이죠? 둘이 아니게 그니까 계속 바깥을 찾아나서다가 찾아나서지 않고 딱 돌이켜서 언뜻 궁금해 하여튼 자기를 확인하는 것이다. 뭐 또 그 뭐야? 하여튼 밖으로 찾아나서든 자기를 이 궁금해하는 궁금해하는 이것이 뭐다. 이 자료를 확인하는 것 그러나 보이즈 디지즈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알 수 있으면 아는 나와 아는 것이 둘로 나뉘잖아요. 그러니까 아쉬운 것도 아니다. 대상에서 할 수 없다. 대상이 아니다. 이거는 암이라고 하니까 뭐 내가 아는 거 이런 게 아니다. 자기가 자기를 아는 거지. 자기가 자기를 확인하는 것이지. 근데 법이 법을 확인하는 의미예요. 그런 차원에서 의식이라는 표현을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이지만 써도 틀리고 안 써도 그렇지만 그니까 이 하나가 하나를 확인하는 이공만 있지. 내가 법을 깨닫는 데는 없습니다. 여기 내가 있으면 그건 그 법은 사라져요. 나와 법이 둘로 나뉘는데 어떻게 내가 법을 깨달을 수 있겠어요? 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고마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