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새벽에 글을 쓴다. 저녁 식사는 다섯 시 반, 잠자리에 드는 건 아홉 시, 한숨 푹 자고 나면 새벽 세 시 반이나 네 시쯤이 된다. 양치, 이브자리 정리, 일기 쓰기를 끝내고 더운물 두 잔 들고 서재에 들어간다. 성호 긋기로 기도한 다음 컴프터 자판을 펼친다. 전에 쓰다 둔 글을 꼼꼼히 살핀 다음 잇대어 쓰기 시작한다. 서너 문단 진도를 낼 때도 있지만 한 문단에 갇혀 이리 멍, 저리멍, 시간만 축낼 때도 있다. 아침 식사 후에는 배낭 메고 한 시간 걷기에 나선다. 눈비가 내려도 변함없이 걷기, 목적은 당연히 건강이다. 근래에는 그 목적이 '도랑 치고 가재 잡는다.' 격으로 덤이 하나 따라붙는다. 이름하여 '야외 수강' 이다. 울창한 숲속을 걷노라면 온몸에 청량감이 돌고 머릿속은 청명한 가을 하늘처럼 명징해진다. 이쯤에서 수강이 시작된다.
안갯속에 길을 잃고 갈팡질팡하던 문장들이 '앞으로 나란히,' 가지런해지고, 긴가민가하던 단어들이 샛별처럼 반짝이고, 딱딱한 한자어가 부드러운 고유어로 바뀌는가 하면, 무릎을 치고도 남을 비유가 둥실 떠오르기도 한다. 이때는 미적거리다가 간 건망증이라는 까마귀가 냉큼 물어 가버릴 수도 있으니까 퍼뜩 휴대폰을 꺼내야 한다. 한데, 이런 깨우침을 보내 주는 분은 과연 누구일까, 하느님이실까? 아니면 늙은 나를 궁휼히 여긴 숲의 요정일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새벽 말고는 글을 쓰지 않는다. 위장이 밥때가 되면 미리 위액을 분비해 소화를 돋듯이 정해진 시간에 글을 쓰면 뇌도 거기에 맞춰 따끈하게 예열하고 기다린다고 한다. 그 예열 덕분에 덕분에 이리저리 헤매지 않고 바로 진도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으면 그 기능이 사그라든다고 한다. 문우들끼리는 '보일러가 꺼졌다,' 라고 표현한다. 그걸 되살리려면 지난날 꺼진 연탄을 다시 피우기 위해 눈물 콧물을 흘리던 고생 이상 으로 각고의 노력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나는 빨리 쓰지 못한다. 검지로 콕콕 쪼는 독수리 타법이니 잘해야 일 분에 오륙십 타쯤일 것이다. 그래도 느긋하다. 빨리 달리면 길가 코스모스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급히 먹는 밥은 체한다지 않던가, 천천히 천천히 '느림의 미학'으로 글을 쓴다. 그러다 멋진 단어가 떠오르면 '와! 멋지다. 라고 환성을 내지른다. 누가 옆에 있으면 손바닥 얼얼하게 하이파이브도 했을 것이다. 글줄기가 콸콸 흐른다 싶으면 '야! 철수 잘한다,' 고 외치며 양 볼을 토닥여 주기도 한다. 한글 프로그램이 '챙'. 소리로 띄어쓰기를 바로잡아 주면 '땡큐! 100원', 빨간 밑줄로 맞춤법이나 비문을 찾아줄 때는 '브라보! 200원', 유트브 마니아처럼 거침없이 슈퍼챗을 날린다. 한 작품당 슈퍼챗 합계가 줄잡아도 이삼천 원 모두 합하면 수월찮은 금액일 터, 그걸 누구에게 줘야 하나 생각 중이다.
이렇듯 스스로 추켜세우며 유희하듯 글을 쓰다 보면 딸포쯤에 한 편의 작품이 와성된다. 뿌듯한 마음으로 다듬기에 들어간다. 먼저 제목이 글 전체를 품고 있는지를 살핀 후 본문을 톺아 보기 시작한다. 종결어미가 '~이다', '~다처럼 평서형으로 끝나 단조롭다 싶으면 그중 몇을 '~느냐 '~할까' 같은 의문형으로 바꿔 준다. 너무 세다 싶으면, '그럴지도 모른다'로 바꿔 준다. 문장이 느릿하여 매가리가 없을 때는 한의사가 경혈에 침놓듯 필요하다 싶은 곳에 콕. 쉼표를 찍어 탱글탱글 탄력을 넣어준다.
사나흘 동안의 퇴고가 끝나면 합평회에 올린다. 자기 글 앞에서는 누구든 청맹과니가 된다는 말이 있다. 눈을 부릅뜨고 찾아도 보이지 않던 잡티가 문우들 눈에는 어찌 그리도 잘 뛸까, 오래도록 인연을 이어와 막연한 사이들이지만 합평에 들어서면 인정사정없다. 서릿발이다. '예! 예! 알겠습니다.' 고분고분 조언을 받아들이면 마침내 글 한 편이 완성된다. 새벽에서 새벽으로 이어진 새벽의 대장정! 해냈다는 자시감에 활갯짓에다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거실로 나온다. (강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