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837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5 : 충청도 우리나라 3대 악성인 박연의 고향
양산팔경을 빚고 내려온 금강 줄기가 영동 땅을 떠나기 전 다시 한 번 둥그렇게 휘감는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상고당에 난계 박연의 사당이 있다. 조선 세종 때 음악 이론가로 크게 활약한 박연은 거문고의 왕산악, 가야금의 우륵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한 사람이다.
박연은 고당리에서 고려 우왕 4년(1378)에 태어나 조선 세조 4년(1458)에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34세가 되던 해에 집현전교리로 벼슬을 시작한 박연은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등을 거쳤다. 세종 즉위 후에는 관습도감제조에 임명되어 음악 분야에 전념, 국악의 기반을 닦았다. 그는 향악과 당악, 아악의 율조를 조사하고 악기 보법 및 악기 그림을 실은 악서를 편찬하였으며, 각종 아악기를 제작하였다. 그뿐 아니라 ‘조회악’이나 ‘회례아악’을 창제하고 ‘종묘악’을 정돈하는 등 국악 전반에 미친 업적이 지대하다. 또한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 올리는 종묘제례악을 바로잡는 등 국악 분야에서 중요한 일들을 해냈다. 그가 만든 종묘제례악은 조선 왕조가 무너진 지 오래인 오늘날에도 서울 종묘에서 엄숙하고 장엄하게 연주되고 있다.
박연의 초상영동군 심천면에는 난계 박연의 사당인 난계사가 있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이곳에서 난계예술제가 열린다.
특히 국산 경돌로 편경을 만든 것은 그의 큰 공으로 꼽힌다. 편경은 두께가 각각 다른 ‘ㄱ’자 모양의 경돌 열여섯 개를 아래위 두 단으로 매달아 두드리는 가락 타악기이며, 온도와 습도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으므로 다른 악기 조율의 기준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예종 11년(1116)에 송에서 편경을 들여와 썼고 공민왕 때와 조선 태종 때도 명에서 편경을 들여와 사용했는데, 세종 때 경기도 남양에서 경돌을 발견함으로써 국산 편경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공조참의, 중추원사를 거쳐 벼슬이 예문관대제학에까지 이르렀다.
수양대군이 단종의 측근 대신들을 없애고 실권을 잡은 계유정난 때 아들 계우마저 죽임을 당했으나 박연은 여러 가지 공을 세운 원로대신으로 인정받아 목숨만은 건진 채 파직되었다. 그 후 고향으로 내려온 박연은 그로부터 5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박연의 뜻은 고향에서마저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1972년 이곳에 난계사를 세우고 그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방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다. 그 후 해마다 가을이 되면 이곳에서 난계예술제를 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