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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라와 바락의 노래 1
삿 5:1-12
1 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이르되
2 이스라엘의 영솔자들이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3 너희 왕들아 들으라 통치자들아 귀를 기울이라 나 곧 내가 여호와를 노래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4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
5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니 저 시내 산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였도다
6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길의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
7 이스라엘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쳤으니 나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그쳤도다
8 무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그 때에 전쟁이 성문에 이르렀으나 이스라엘의 사만 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였던가
9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10 흰 나귀를 탄 자들, 양탄자에 앉은 자들, 길에 행하는 자들아 전파할지어다
11 활 쏘는 자들의 소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물 긷는 곳에서도 여호와의 공의로우신 일을 전하라 이스라엘에서 마을 사람들을 위한 의로우신 일을 노래하라 그 때에 여호와의 백성이 성문에 내려갔도다
12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너는 노래할지어다 일어날지어다 바락이여 아비노암의 아들이여 네가 사로잡은 자를 끌고 갈지어다
삿 5:1-12 / [드보라의 승전가] 드보라는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던 날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과 함께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2) `이스라엘이 원수와 싸우기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겨레가 한 마음으로, 이 전쟁을 내 일로 생각하여 다른 일 모두 제쳐놓고 즐거운 마음으로 싸움터에 나갔다. 높이 높이 여호와를 드높이자. 3) 너희 왕들아! 너희 ㄴ) 지배자들아! 너희는 내 말 좀 들어 보아라. 나는 이처럼 노래하리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노래하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감사 노래 올리리라. (ㄴ. 군주) 4) 여호와 우리 주님, 주께서 세일 산악지대에서 나오실 때 주께서 푸른 땅 에돔 들녘에서 우리에게로 나아오실 때 땅의 지축이 뒤흔들리고 하늘조차 휘몰아쳐 구름이 비를 쏟았습니다. 5) 산이란 산마다 여호와 앞에서 흔들흔들거렸습니다. 저 시내산조차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6)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살던 시대에도 야엘이 살던 시대에도 큰 길로 다니는 사람 하나도 없었지. 인적이 드문 오솔길만 찾아다녀야 하였지. 7) 사람다운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어. 이스라엘 마을마을마다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지. 오! 드보라! 그대가 일어서기까지는 이스라엘의 어머니 그대가 일어서기까지는 8) 저마다 새로운 신들을 자기 신으로 모시다가 적군이 성문에 들이닥쳐 전쟁이 일어나도 이스라엘 4만 민병대 가운데에 방패 가진 사람 하나도 없었네. 창가진 사람 하나도 없었네. 나서서 싸우려고 무기 가진 자, 눈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었지. 9) 내 마음 이렇듯 기쁠 수 있을까? 이스라엘을 이끄는 민병대장들이여! 제 몸 돌보지 않고 겨레 이스라엘이 쓰러질까 염려스러워 있는 힘 다하여 싸움터로 뛰어나기는 용사들이여! 기뻐 어쩔 줄 모르는 이내 마음, 어찌하여 여호와를 드높이지 않으랴! 10) 흰 암나귀만 타고 다니는 자들아, 값비싼 돗자리만 깔고 사는 팔자 늘어진 자들아, 큰소리치며 대로를 활보하는 자들아! 너희는 한번 생각해 보아라. 11) 들어 보아라, 저 소리를 샘물가마다 목자들이 몰려들어 기뻐 소리 지르지 않느냐? 여호와께서 거두신 승리를 소리쳐 노래 부르지 않느냐? 이스라엘을 이끌고 거두신 그 놀라운 승전보에 뛸 듯이 기뻐하며 노래 부르지 않느냐? 이스라엘 마을마을마다 여호와를 섬기는 겨레가 기뻐 날뛰며 마을밖으로 뛰쳐 나오는구나. 12) 드보라여! 깨소서, 일어나소서. 일어나소서, 일어나소서. 어찌 우리가 소리쳐 기쁜 노래 부르지 않으리오. 바락이여! 떨치고 일어나소서. 아비노암의 아들이여, 어서 서둘러 그대가 사로잡은 포로들을 끌고 가소서.
드보라와 바락은 가나안 왕 야빈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기쁨에 넘쳐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위엄과 은총을 찬양합니다.
노래하여 이르되(1-3) 승리의 날에 드보라와 바락은 하나님을 함께 찬양합니다. 드보라와 바락이 부르는 여호와 승전가는 출애굽기 15장의 모세와 미리암의 노래와 더불어 구약 성경을 대표하는 ‘여호와 승리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에서 드보라와 바락은 가나안의 왕들과 통치자들에게 귀를 기울이라고 요구하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용사이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로다”라는 노래입니다.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미가 되기까지(4-12) 하나님은 가나안의 신들처럼 특정 영역만을 관할하는 지역신이 아니라, 온 우주의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통하여 자기의 뜻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는 이스라엘은 가나안 왕 야빈의 압제에 무려 20년 동안이나 시달렸습니다. 이스라엘과 가나안 왕 야빈과의 전투는 하나님의 주관하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과 구름이 물을 내리고, 산들도 진동하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왕 야빈의 압제를 받는 동안에는 큰 길이 비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공격당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녀서 사람들의 눈을 피했습니다. 농업과 교역과 촌락 생활까지 중단되었습니다. 이들의 손에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드보라는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일어나다”는 중대한 일을 위해 비장한 각오로 임하는 것을 말합니다(7). 즉 나라와 민족을 위한 어머니 같은 드보라의 사랑과 열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만 명 중에는 방패와 창과 같은 모든 무기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드보라와 바락이 거든 승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도자들과 군인들에게 더더욱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합니다. 이제 가나안 왕 야빈의 압제와 학대가 끝나고 산지나 은신처에 숨어 피난 생활을 했던 백성들이 생활의 중심지인 성문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끝으로 “포로를 끌고 가라”는 것은 단순한 승리를 넘어 완전한 승리를 뜻합니다(12).
적용: 이스라엘은 언약의 백성입니다. 이스라엘은 죄로 말미암아 많은 환난을 당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의 언약 까닭에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지체하지 않으시고 즉시 응답하셨습니다. 당신의 최고 무기는 무엇입니까?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영원하며 시련과 인내 그리고 기쁨을 나누는 관계입니다. 귀 있는 자는 하나님의 언약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우리 곁에 있는 기독교에는 아직 깨우치지 못한 도마의 신앙이 많습니다. 인내는 계속 훈련받아야 지켜질 수 있습니다. 믿음의 형제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계속될 것이 시련입니다. 기도와 성령의 힘으로 이기셔야 합니다. 비록 그동안 많은 시련들로 인하여 넘어졌을지라도 다시 일어나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성도는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지켜 행함으로 시련을 이긴 성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인내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 설 교 >
여호와를 찬송하라
삿 5장 1~18절 / 서명성목사
여호와를 찬송하라
가끔씩 2002년 월드컵 대회 때 한국국가 대표팀이 치른 게임들을 봅니다. 경기 자체도 박진감이 있지만 예선전을 거쳐, 16강전, 8강전을 치르면서 강팀들을 하나하나 물리칠 때마다 온 국민이 함께 모여 환호하는 모습이 대단합니다. 특히 이탈리아 팀과 16강전에서 싸울 때 1점 차로 지고 있다가 설기현 선수가 동점골을 터뜨리고 연장전에서 안정환 선수가 역전골을 터뜨렸을 때 그 장면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껑충껑충 뛰면서 눈물을 흘리고, 서로 껴안고,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보면서 비록 20년 전에 일어난 일이었을지라도 여전히 감동적입니다. 최근에 어떤 일로 인하여 너무 기뻐서 흥분되거나 환호성을 지른 적이 있습니까? 믿는 자들은 크게 기뻐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출애굽기 15장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이 추격하던 애굽의 군대가 홍해에 수장되는 것을 보면서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본문을 보니 드보라와 바락이 하나님께 찬송을 드립니다. 그들이 싸운 전쟁은 그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는데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극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지금 어떤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까? 힘에 부칩니까? 그만 두고 싶습니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인해 영적 싸움에서 이길 뿐 아니라 승리의 노래를 하나님께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가나안 왕 야빈의 압제에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그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이 드보라와 바락입니다. 드보라는 여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야빈의 압제에서 구원받을 소망을 전했고, 바락은 용사로서 드보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의 전쟁을 수행함으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드보라와 바락이 야빈과 전쟁에 앞장 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전쟁을 이끄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나안의 철 병거 900대를 무용지물로 만드셨습니다. 본문은 드보라와 바락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시스라가 이끄는 군대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기념하며 부른 노래입니다. 사사기 4장의 이야기체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강조되어 있는 반면에, 사사기 5장의 운문체는 그 출발부터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행적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하여 성취되어짐을 드보라의 승리 시는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홀로 승리를 누리지 않습니다. 함께 헌신하고 함께 구원의 감격을 노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이런 은혜를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되 서로를 격려하며 위로하며 주신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거둔 열매를 인해 드보라와 같이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찬양으로의 초대(1-3절)
드보라가 하나님의 역사를 찬양합니다. 그런데 5장은 여성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4장과는 조금 다르게 시작합니다. 1절에서 드보라와 바락이 함께 등장합니다. ‘노래하다’는 동사는 여성 단수형입니다. 그러므로 5장도 여전히 드보라를 핵심 인물로 여기며 그녀의 리더십을 강조합니다. 2절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의 헌신을 노래하고 여호와에 대한 찬송의 초대로 이어집니다. 여기 ‘찬송하라’로 번역된 동사 ‘바라크’는 영어로는 bless이지만, 우리말로 번역할 때는 상황에 따라 구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바라크’할 때는 ‘찬송하다’, ‘찬미하다’로 번역됩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바라크’할 때는 축복한다고 합니다. 자신이 누리는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바라크’할 때는 어떻게 번역합니까? ‘복을 주다’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상황에 상관없이 전부 ‘축복하다’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축복의 ‘축’자는 ‘빌 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신다고 하면 하나님이 누구에게 복을 주라고 빕니까? 개역성경을 보면 상황에 따라 ‘바라크’를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창 12:3).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27).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사람들을 초대한 드보라는 그 초대를 자신에게도 적용합니다. 1인칭 대명사를 두 번 사용합니다. ‘내가 노래하다’와 ‘내가 찬송하다’하면서 시인 자신이 이스라엘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드보라는 말 그대로 하나님이 베푸신 승리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오심(4-5절)
드보라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사람들을 초대하고 자신도 동참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출정 모습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당신의 백성을 도우시기 위해 세일과 에돔에서 오시는 여호와를 ‘신적 용사’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늘과 구름이 물을 내리고 산들과 시내 산이 진동하는 것은 하나님이 임하시는 징조였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이런 자연 현상은 그 자체로 신성하게 여겼지만, 성경은 그것을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드보라는 왜 세일과 에돔, 시내산을 언급합니까?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이후 세일과 에돔, 시내산을 지날 때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시내산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곳입니다. 그곳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 관계에 스스로를 속박하시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라 부르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신 장소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 백성입니다. 즉,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은 그분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사사 시대가 시작되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언약을 잊기 시작했습니다. 드보라는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지나 온 모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합니다. 찬양과 감사는 여호와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할 때 동반되는 행위입니다.
드보라의 등장(6-8절)
드보라는 이스라엘에 닥친 위기 속에서 절박했던 상황을 다양하게 묘사합니다. 삼갈의 날과 야엘의 날을 나란히 쓰고 있는 것은 드보라와 동시대의 사람들임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대로’는 팔레스타인 땅, 특히 이스르엘 계곡을 가로지르는 상인들의 경로를 가리킵니다. ‘대로가 비었다’는 표현은 대상 무역 상인들이 사라졌다는 의미로,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상황을 묘사합니다. 행인들은 가나안 사람들이나 노략하는 자들을 피하기 위해 오솔길로 다녀야 했습니다. ‘마을들이 그쳤다’는 표현은 살기 힘들어져 사람들이 적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자기 나라 땅에서 자기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고 불안에 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악을 범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습니다. 이런 상황은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어머니’라는 표현은 드보라가 온 이스라엘의 정신적,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로 인정받았음을 보여 줍니다. 이 표현은 ‘시스라의 어머니’(5:28)와 대조됩니다. 이스라엘을 압제했던 가나안의 군대 장관 시스라의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알지 못한 채 헛된 희망 속에서 아들을 기다렸던 반면, 압제를 당하던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어머니’드보라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8절은 드보라가 등장하기 전 이스라엘의 안타까운 상황을 다시 묘사합니다. 심지어 성문에 전쟁이 들이닥쳤는데도 이스라엘은 방패와 창을 들고 싸우려 하지 않을 만큼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구원자를 보내셔서 대적을 물리치시고 승리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의로운 일을 찬송하고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얻기까지 연합해 싸워야 합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요청(9-11절)
하나님은 악한 대적을 물리쳐 그분의 백성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신 것은 그분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방백들과 백성은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신 공의로운 일은 권력자뿐 아니라 평민까지 모든 사람이 찬송하기에 마땅합니다. 9절은 2절처럼 백성의 헌신을 칭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10절의 “흰 나귀를 탄 자들”과 “양탄자에 앉은 자들”은 귀족이나 지배 계층 “길에 행하는 자들”은 서민들을 의미합니다. 드보라는 하나님이 하신 의로운 일을 증언하도록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부릅니다. 활 쏘는 자들이나 물 긷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의로우신 업적을 말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은 악과 거짓을 물리치고 공의와 선을 완성하신 의로운 행동입니다. 이 구원을 얻은 자는 모두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의로운 행동(12-18절)
이 단락은 드보라를 향한 외침으로 시작합니다. 명령형이 반복된 “깰지어다 깰지어다”는 영적으로 깨어있도록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입니다. 드보라가 자신에게 ‘노래하라’로 말하면서 그 사건을 돌이켜보며 기뻐합니다. 드보라가 실제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직접적 구원자 역할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녀는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바락에게 ‘일어날지어다’라고 말하며, 가나안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의 현재 상황을 역전시키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단락의 주제는 하나님의 전쟁에 누가 참여했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얻기 위해 동참해야 했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는 자신들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참전했으나 에브라임과 베냐민 그리고 잇사갈 지파는 일부만 참여했습니다. ‘에브라임에서 나온 자들’은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라기보다 에브라임 지역에 사는 아말렉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베냐민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 중에 그렇게 유력한 지파는 아니었으나 싸움에 참여했습니다. 마길, 즉 므낫세 지파에는 다스리는 자들 몇 사람만이 참여했습니다. 스불론에게서는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들이 참여했습니다. 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 싸웠는데 그들은 강하고 담대했습니다. 바락도 잇사갈 사람들처럼 담대하여 골짜기로 달려 내려가 싸웠습니다. 르우벤과 길르앗은 요단 동편에 있어서 가나안이 아닌 모압과 암몬의 위협을 받았을 것입니다.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라는 표현은 르우벤이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단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전쟁에 참여하라는 부름을 받았을 때, 르우벤이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군나팔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니라 목자의 피리 부는 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꼭 싸움에 나가야 하나? 요단강을 건너 서편까지 굳이 가야 하나? 지금은 우리의 양을 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그 자리에 주저 않고 말았습니다. 자기도 무언가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다가 막상 일을 할 때에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슬그머니 뒤로 빠지는 모습을 보인 르우벤 지파는 더 이상 이스라엘 역사 속에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길르앗 사람들은 요단강 동편에 사는 것을 핑계로 오지 않았습니다. 단 지파는 배에 머물렀습니다. 다시 말하면 장사하느라 바빠서 이 귀한 싸움에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아셀 지파는 편안하게 사는 삶에 방해받지 않고자 자기들의 거처에 거하였습니다.
가나안 지파와의 싸움에 가장 전공을 세운 지파는 스불론과 납달리 사람들입니다. 스블론 사람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 납달리도 들의 높은 곳에서 스블론처럼 열심히 싸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인 싸움을 싸울 때 하나님의 능력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복을 누립니다. 그러면 싸움에 참여하지 않은 지파들은 편안한 삶을 누렸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르우벤 사람들은 길르앗 동편 땅에서 계속 전쟁을 치렀습니다. 단은 블레셋과 싸웠습니다. 므낫세는 미디안의 침공을 당했습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적인 전쟁,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때가 오히려 안전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게 됩니다. 여기에 보면 가나안과의 전쟁에 헌신적으로 참여한 지파들과 참석지 못한 지파들이 나뉩니다. 참석하지 않은 지파들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우리의 헌신의 정도에 따라 상급이 다릅니다. 그날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 자원하는 심령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하는 우리는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 하나님의 사역에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의 하나 됨을 강조하며, 그런 하나 됨을 통해 가나안을 정복했던 역사를 보여 주었습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은 이미 기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요단 강을 함께 건너 가나안 정복을 도왔으며, 모든 지파는 자신들의 기업을 레위 지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일부를 내어 줌으로써 하나 됨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에서는 지파들 사이의 갈등이 점점 심해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함께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로 연합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이 공동체 의식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온 모든 지파가 함께 싸우지는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싸움을 하나님이 이끄셨기 때문입니다. 사사 시대의 상황이 오늘날의 교회 상황과 비슷합니다. 교회에 여러 직분이 있습니다. 직분을 감당하도록 옆에서 권할 수는 있으나 본인이 자발적으로 원하지 않으면 그 섬김은 오래 가지 못하고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또한 리더가 앞장서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한 것처럼 모두가 자원하여 참여해야 합니다. 리더가 되었다고 우쭐해서도 안 되고 뒤에서 따라간다고 부끄러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로 참여하면 됩니다. 팔짱만 끼고 관망만 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하기 싫으니까 다른 사람이 일을 벌이는 것조차 싫어하고 그나마 하는 사람이 있으면 뒤에서 이랬느니 저랬느니 평가만 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부족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영적인 싸움을 할 때만이 존재가치가 있고 기쁨이 있고 하나님을 찬양할 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함께 기뻐하며 슬퍼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드보라는 하나님의 능력을 마음껏 소리 높여 찬양하면서 승리의 근원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했습니다. 드보라와 바락이 이스라엘에게 이김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할 때 그들과 함께 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찬송을 들으며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덩실덩실 춤을 추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들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던 시스라의 군대를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철병거를 볼 때마다 주눅이 들고 감히 대항할 용기조차 갖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드보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결연히 일어났을 때 시스라의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20년 동안 눌러왔던 열등감과 패배의식이 사라지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길 수 없던 싸움에서 이겼으니 그 기쁨이 더했습니다. 더구나 이 싸움에서 승리함으로 지긋지긋한 압제의 삶에 벗어나게 되었기에 그 기쁨이 배나 더했습니다. 신앙생활 한다고 모든 일이 형통하지는 않습니다. 때로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부족함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의 교만을 깨뜨리십니다. 믿음의 지경을 넓히십니다. 우리의 영적인 싸움은 쉼이 없습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기도하고 말씀생활 충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게 이김을 주십니다. 그들이 감격 속에 부르는 승리의 노래를 기뻐 들으십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도 여전히 살아 계셔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찬양하며 온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드보라는 단순히 하나님의 위대하심만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어떻게 역사 하셨는지 찬양을 통하여 재연하며 그때 가졌던 감격을 되새깁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추상적으로 하나님의 속성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역사 하신 것을 돌아보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사기를 통하여 이 아침에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도 한번 드보라와 바락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감격을 가져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삶 속에서 경험하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온몸으로 느껴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 정성을 쏟아 부었던 그 어떤 것들보다 주님을 알고 삶 속에 경험한 주님을 나누고 전하는 것이 가장 복된 것임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의지하여 순종하는 헌신자들에게 하나님은 문제를 극복하게 하시고 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을 경험하시면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주님이 하신 일을 담대하게 전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위기의 시대에 사사를 세우셨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궁극적인 사사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셨습니다. 그가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이 땅 가운데 함께 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일을 감당케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삶 전체를 맡기며 아름다운 헌신의 열매를 맺으며 드보라와 같이 감격의 찬송을 드리기 바랍니다.
우리가 헌신하면 하나님이 일하신다
삿 5장 1~9절 / 문기태목사
헌신과 배신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헌신 자도 나오고 배신자도 나왔습니다. 말씀을 귀 기울여 집중하여 들은 자는 자신을 드려 헌신 자가 되었고 주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들은 자는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앞둔 순간에 예수님을 먼저 생각한 마리아는 자신의 최고를 드려서 헌신하여 최고의 칭찬을 들었지만 예수님보다 돈만을 생각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돈 받고 팔아 넘겨 영원한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말씀을 듣고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 곧 바로 결단하고 주님께 헌신해야 합니다. 주님이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내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면 가만히 있지 말고 헌신 대 앞으로 나와 헌신의 결심을 기록하고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헌신의 결단이 없으면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아도 길가에 떨어진 씨앗처럼 사단이 받은 은혜를 빼앗아 가 버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에서는 큰 은혜를 받았는데 결단하지 않으므로 돌아서면 잊어 버립니다. 그래서 오래 믿어도 삶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매 주 결단하고 헌신하는 사람은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고 빠르게 성장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사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했을 대 이야기입니다. 가나안 땅을 점령했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고 가나안 부족들을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바알 신에게 제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악한 일을 일삼는 이스라엘을 가나안 왕 야빈에게 내주셨습니다. 그러자 가나안 왕은 강해져서 지휘관 시스라를 보내 이스라엘을 억압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심한 고통을 견디다 못해 깨닫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 사사 드보라를 일으켜 말씀하셨습니다. 드보라는 바락을 불러다가 하나님의 명령을 전했습니다. "너는 납달리 지파와 스불론 지파 만 명을 이끌고 다볼 산으로 가거라. 내가 시스라와 그의 군대를 너의 손에 넘겨 주겠다."
시스라는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철 병거 구백 대와 모든 백성을 이끌고 나옵니다. 사사 드보라와 바락은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 주신다는 약속을 믿고 백성들을 불러모아 전쟁터로 올라가 싸웁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싸우신다라는 말만 믿고 싸움터로 나아갑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오셔서 시스라의 군대를 혼란에 빠트립니다.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고 하늘에서는 큰 비가 쏟아집니다. 느닷없이 전쟁터가 진흙탕으로 변했습니다. 철 병거 구백 대의 바퀴가 진흙탕에 빠져 움직이지 못합니다. 철 병거를 의지하고 자신만만하던 가나안 군대는 당황하고 놀라서 철 병거와 무기를 버려두고 도망치기에 바쁩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가나안 사람들이 버린 무기를 주워 들고 도망가는 가나안 군사들을 추격하여 진멸하고 대승을 거둡니다.
사사기 5장은 드보라의 노래입니다.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고 돌아와 자신들의 업적을 자랑하며 자신의 공을 치사하기 보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작은 승리도 자랑하고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가 큰 데 드보라는 오직 하나님을 높이고 자신의 공은 감추고 있습니다.
동시에 방백들과 백성들의 헌신을 칭찬합니다. 방백들과 백성들은 즐거이 헌신하였습니다. 자원하여 헌신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의 헌신은 목숨을 바친 헌신이었습니다. 죽기를 무릅쓰고 말씀 앞에 순종하는 헌신이었습니다.
8절 '그들이 새 신들을 택하였을 때에, 성문에 전쟁이 들이닥쳤는데, 사만 명 이스라엘 군인 가운데 방패와 창을 가진 사람이 보였던가?'
전쟁을 하려고 싸움터에 나가는데 아무런 무기도 없이 나가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군인이라면 자신을 적의 무기로부터 지켜줄 방패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적과 맞서 싸울 창이나 칼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아예 무기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가서 싸우라고 명령하십니다. 철 병거가 구백 대나 있는, 그리고 숫자가 훨씬 많은 가나안 군대와 맨 몸으로 맞서 싸우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도 방패와 창 같은 무기를 갖지 못한 맨 몸이었으나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2절에 억지로 마지 못해 나간 것이 아니라 즐거이, 기꺼이 헌신하였다고 기록되었습니다. 9절은 백성 가운데서 자원하여 나선 용사라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않은 헌신을 하였습니다.
동족들 중에 안주하며 전쟁에 동참하지 않은 이들이 많았으나 스불론과 납달리 두 지파는 부르심에 순종하여 헌신하였습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는 가장 미약한 지파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순종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싸움터에 찾아 오십니다. 주님께서 출동하실 때에 땅은 흔들리고 하늘은 물을 쏟아냈습니다. 가나안의 맹장 시스라가 전혀 힘 한번 써보지 못하도록 꽁꽁 묶어 버렸습니다.
시스라는 철 병거 구백 대를 믿고 자신만만했습니다. 게다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사람들의 약탈이 무서워 큰 길로도 다니지 못했습니다. 뒷길로 숨어서 겨우 다녔습니다. 그러니 가나안 사람과 싸우려 할 때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더구나 유명한 시스라와 맞서는 전쟁터인데 얼마나 떨리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맨 몸으로 싸움터로 나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군대와 싸우기 전에 하나님께서 앞서 싸우십니다. 지진을 일으키셔서 온 산을 뒤 흔드시니 가나안 사람들이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가나안 군인들이 놀라서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너무 놀라서 싸울 마음이 다 사라졌습니다.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엄청난 양의 비가 갑자기 쏟아집니다. 순식간에 물바다가 되고 단단하던 땅이 진흙 구덩이로 변합니다. 진흙에 빠진 철 병거가 움직일 수도 없는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적장 시스라도 철 병거에서 내려서 뛰어 도망치기에 바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군대를 추격하며 그들이 버린 무기로 쉽게 무찌릅니다.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누가 싸웠습니까? 겉보기에는 이스라엘과 가나안이 싸운 전쟁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과 가나안이 싸운 전쟁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헌신하니까 하나님이 바라만 보시지 않고 친히 오셔서 이스라엘을 대신해 싸워 주십니다. 모든 면에서 불리한 이스라엘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헌신 요청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을 핑계로 주저합니다. 어떤 사람은 ‘헌신하고 싶지만 성경 지식이 부족해서’ 하고 주저합니다. 어떤 사람은 ‘헌신하고 싶지만 가진 재물이 별로 없어서’ 하고 주저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도 헌신하고는 싶지만 몸이 약해서’ 하고 망설입니다. 또는 능력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하며 자신이 없다고 포기합니다.
그러나 스불론과 납달리는 무기가 하나도 없이 맨 몸으로 전쟁에 헌신하였습니다. 그래서 더 큰 감동입니다.
오늘도 가난한 이들이 물질로 헌신하면 큰 감동이 됩니다. 연약한 이들이 몸으로 헌신하면 큰 감동을 줍니다. 시간이 없는 이들이 바쁜 중에 시간을 내어 헌신하면 뭉클한 감동이 됩니다. 믿음이 연조가 짧아서 서툰 것이 많음에도 헌신하면 감동을 주고 마음을 더 움직이게 합니다.
감동을 주지 못하는 헌신은 누구나 당연하게 여기고 지나갑니다. 그렇지만 감동 받을 일이 별로 없는 현대인에게 감동을 주면 마음이 활짝 열립니다. 감동을 받으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눈물이 솟아납니다. 행복해집니다.
여러분,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는 삶을 살기 바랍니다. 특히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 주기 바랍니다. 영혼을 구원하기를 원하면 VIP에게 감동을 안겨 주어야 합니다. 새 가족을 감동시키기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 장산 교회 가평세 간증을 들었습니다. 장산 교회에서 가평세 수료 식에 세례식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례 받는 사람에게 모든 교인이 전부 작은 선물을 주면서 축하를 하였답니다. 세례 받은 사람이 한 주간 동안 그 선물들을 뜯어 보며 성도들이 쓴 손 편지를 읽어보며 얼마나 감동을 많이 받았을까요?
우리도 이제부터 침례 받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자 전 교인이 작은 선물을 안겨주며 진심으로 축하를 하면 어떨까요?
헌신하는 사람을 보면서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데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감격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감동을 받으시게 하면 하나님이 가만히 계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대신 우리 대적과 하나님이 싸우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이 능력을 발휘하십니다. 우리가 처한 위기에서 하나님이 손을 내밀어 건져 주십니다. 우리를 온갖 위험으로부터 하나님이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이 즉각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을 일하시게 만드는 방법은 하나님께 믿음을 보이고 헌신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특히 헌신하기 어려운 중에 헌신하면 하나님도 감동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일하십니다.
여러분, 헌신할 기회가 주어질 때 주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헌신하라고 하실 때 곧 바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없다고, 돈이 없다고, 능력이 없다고, 잘 할 자신이 없다고, 아는 것이 없다고 핑계하지 말고, 없는 중에 헌신하면 하나님이 더욱 감동하시고 친히 일하신다는 것을 믿고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헌신하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면 불가능도 가능해집니다. 우리가 일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일하시게 하면 훨씬 큰 일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하나님이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목장에 친히 오셔서 크고 놀라운 일을 많이 행하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호와의 구원이 임할 때
삿 5장 1~31절 / 채규현목사
설교 : 지난 주일에는 4장에서 절망 중에 있을 때 그들을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오늘 5장에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4장에서 이야기하지 아니한 부분으로 드보라가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찬양하는 면이 나옵니다. 먼저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이 있기 전의 이스라엘의 상태에 대해서 먼저 함께 보겠습니다. 본문 6절~8절에서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잠깐 볼 수 있습니다. 6절에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행인들은 소로로 다녔도다” 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하는 데가 바로 북쪽입니다. 삼갈은 어딥니까? 3장 31절에 보면 “에훗의 후에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사사로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삼갈이 죽인 사람이 블레셋 사람들입니다. 이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남쪽에 있습니다. 남쪽에 삼갈이 사사로 있을 때에 북쪽은 그 삼갈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입니다. 거기에는 가나안 백성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땅에 외부 침입자들이 있습니다. 아람 족속, 암몬이나 모압 족속, 제일 아래에서 에돔 족속이 침입하지만, 외부 말고 그 가나안 땅 안에서 보면 북쪽에서는 주로 원래 그 땅 거민이었던 가나안 거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대적합니다. 남쪽에는 외부에서 온 블레셋 족속이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블레셋 족속이 지금의 가사지방-블레셋 지방, 필리스티아(Philistia) 지방에 살았습니다. 그들과의 전쟁이 계속에서 나중에 다윗왕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래서 남쪽은 블레셋과의 대적이고 북쪽은 가나안이나 외부의 세력과 대적합니다. 그 삼갈의 시대에(남쪽에서 삼갈이 사사로 있을 때에) 남쪽에서 블레셋과 모든 문제가 있을 때에 북쪽에서는 가나안 족속들과 문제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때에 “대로가 비었고 모든 사람들은 소로로 다녔더라”고 합니다. 대로로 가면 어떻게 됩니까? 거의 무정부 상태에요. 수많은 강도와 도둑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강포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힘 있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합니다.
이것을 피해서 일반 서민들은 소로로 다닙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삶의 핍절함과 괴로움을 대변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서울에 가면 종로길을 한번 가보십시오. 그 넓은 종로길 말고 바로 그 옆에 우리 교회 복도길같이 좁은 골목이 있는데 그 길 이름이 피맛골입니다. 종로와 같이 광화문에서부터 종로를 따라서 작은 피맛골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거기가 음식점 골목이 되어 있는데, 원래 조선시대에 평민들이 다니던 길이 바로 피맛골이에요. 피맛골이라는 말 자체가 말을 피한다-피마(避馬)입니다. 양반이나 유력한 사람들은 대로로 다니면서 말을 타고 다니고 가마타고 다닙니다. 그렇게 길이 넓음에도 불구하고 평민들은 거기를 못 다니고 피맛골로 다녀요. 거기로 다니면 좁으니까 얼마나 복잡하겠어요? 마치 그와 같은 면을 연상하시면 됩니다. 이스라엘 시대에 압제하는 사람들이 있고, 가나안 백성들이 대로로 다니면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포함을 행하니까 그들이 대로로 다니지 못하고 소로로 다니는 그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대적이 외부에서 쳐들어와도 그들을 구원할만한 리더가 없습니다. 7절에 보니까 “이스라엘에 관원이 그치고 그쳤더니…” 그들은 리더가 없습니다. 그들을 구원할 만한, 어떤 힘을 모을만한 사람이 없어요. 심지어는 그들에게는 무기도 없습니다. 8절 끝에 보십시오. “…이스라엘 사만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였던고” 방패와 창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도울 힘도 없이 괴로움을 당하는 그들의 삶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남쪽에서는 블레셋 사람들이 대적을 하고 있는 때에 북쪽에서는 원래 그 땅의 토착거민이었던 가나안 백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게 하던 바로 그 때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의 때가 꼭 안 좋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이 고통의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임하게 되는 것을 찬송합니다.
그것이 4절, 5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도 새어서 구름이 물을 내렸나이다” 세일과 에돔이라면 바로 사해바다 남쪽입니다. 거기서부터 하나님이 진행하신다는 거예요. 그 진행이 어떤 의미냐면 5절에 보니까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니…” 온 산이 진동한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저 시내산도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였도다” 그런데 이 뒷말은 조금 해석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는데, 그 여호와는 바로 시내산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역사하시던 하나님, 시내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십계명을 주십니다.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온갖 화염과 천둥과 이 산이 흔들리고 진동이 있었던 바로 그 장면, 그 장면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일, 에돔에서부터 올라오시더라, 구름을 몰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가나안 족속-시스라와 철병거 9백승을 대적해서 일어났을 때 그 백성들이 다 모여서 있던 곳이 밥그릇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 같은 가파른 데가 있는 다볼산에 다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서는 우는 사자처럼 수많은 말들의 소리와 철병거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내려오기만 해 봐라, 다 짓밟아버리겠다.” 그렇게 하고 있는 때입니다. 위에서는 “여기는 못 오지?” 하지만 마음은 얼마나 떨리겠어요? 그런데 남쪽에서부터 구름이 몰려옵니다. 천둥 번개가 칩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신 것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그 시내산에서 임하실 때 천둥, 번개와 구름으로 그들에게 임하신 그 능력의 하나님이 바로 그들에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갑자기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삶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언제 주님이 가장 확실하게 보입니까? 내 인생이 잘 되고, 내가 이 세상에서 성공가두를 달리고 있을 때에는 물론 하나님께 감사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크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C. 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기쁨 속에서는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우리의 양심 속에서는 말씀을 하시며, 고통 속에서는 소리를 치신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다.
” 우리가 보통 모든 인생길에서 아무 일도 없을 때에는 하나님이 옆에 계신 줄을 모릅니다. 하나님께 감사함에도 불구하고 잘 알지 못해요. 그러나 우리가 환난과 어려움 속에 있을 때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하나님을 간구하게 됩니다. 갈급하게 기다리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서도 인생길을 가다가 어려움이 닥칠 때,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때, 인생의 고통이 우리에게 닥칠 때, 하나님을 외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 때 하나님을 향해서 고개를 들고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큰 소리로 외쳐서 “내가 여기 있다!” 말씀하실 것을 들으실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다볼산 위에서 떨고 있다가 갑자기 “우르릉 쾅 쾅!” 구름이 몰려오면서 비가 쏟아지는데, 그리고 아래를 보고 있으니까 갑자기 그 무적과 같은 시스라의 철병거 9백승이 진흙탕에 빠져서 서로 빼려고 온갖 난리인 것입니다. 그때 바락의 전투명령이 내립니다. “내려가자!”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분이 어땠겠습니까? 전혀 물리칠 수 없었던 시스라의 군대들, 철병거 9백승이 아무쓸모없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막 비가 오는 그 순간에 그들도 알았을거에요. 비가 오면서 철병거가 못 움직이게 된다는 것을 그들도 알았을 겁니다. 그 빗소리, 그 천둥과 번개 치는 그 소리가 그들에게 어떻게 들렸겠습니까? 마치 서부 영화속에서 주인공이 인디언들에게 포위당하고 있고 가슴졸이면서 싸우고 있을 때 오로지 기다리고 있는 것은 뭐겠습니까? 기병대의 나팔소리입니다. 그 기병대의 나팔소리 같은 것이 그들에게는 “우르릉 쾅 쾅!” 천둥 번개치는 소리였습니다. 좀 더 한국식으로 이야기하면, 춘향전에서 “춘향아, 네가 수청을 들지 않겠느냐?” 하고 악한 사또에게 고문 당하고 있을 때 “암행어사 출두요!”하는 것입니다. 그 때 이방도 막 마루 밑으로 들어가고 모든 탐관오리들이 다 숨는 그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것도 풀리지 않고 절망중에 있는 모든 환경이 급전해서 바뀌는 그 순간에 그 손길은 누구에서부터 옵니까? 하나님께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길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삶을 지켜봐주시고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적당한 때, 알맞은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도 끝까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선을 행하십시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십시오. 갈라디아서 6장 9절에 보면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마지막에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그 면을 확실히 붙들고, 피곤하지 않게 끝까지 그 길을 간다면, 마침내 하나님의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그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는 주의 백성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구원하러 오실 때에, 물론 믿지 않는 자리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는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입니다. 마치 출애굽기 때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오직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이 싸우셔서 자기 백성들을 건져내십니다. 그런데 일단 자기 백성 된 사람들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을 구할 때, 그때는 하나님이 혼자 일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동참을 요구하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간구하고 무슨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구할 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혼자 하시는 일들이 거의 없습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기에 동참해서 싸우기 시작하는데, 드보라와 바락이 “이제 다 같이 우리가 이 가나안 백성을 대적해서 싸우자!”하고 전부 경문을 보내고 모을 때에 많은 부족들이 왔지만 안 온 부족들도 있다는 말입니다. 11절 후반부터 23절까지는 바로 그 두 가지 면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여기 보면 에브라임 지파, 베냐민 지파, 스불론, 잇사갈…, 계속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해서 순종해서 같이 싸우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나오지 않은 백성들이 나옵니다. 15절 후반부부터 보십시오. 르우벤은 어땠습니까? “르우벤 시냇가에 큰 결심이 있었도다 네가 양의 우리 가운데 앉아서 목자의 저(피리) 부는 소리를 들음은 어찜이뇨 르우벤 시냇가에서 마음에 크게 살핌이 있도다” 이들도 “우리가 같이 대적해서 하나님의 대적들과 싸우자!”하는 경문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르우벤은 모든 지도자들끼리 모여서 상의를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동참해서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그런데 거기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는 돌볼 양떼들이 많다. 이것들을 어떻게 하고 우리가 갈 수 있는가? 갈 수 없다.” 그래서 거기서 다같이 만장일치로 결의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르우벤은 안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길르앗은 “길르앗은 요단 저편에 거하거늘…” 그들은 가려고 생각해보니까 다른 지파들보다 자기들이 손해가 더 많아요. “아니, 저 사람들이야 스불론이나 납달리는 바로 옆 동네라 별로 경비도 안 들지만, 우리는 가려면 요단강을 건너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손해를 봐야 하는데 왜 우리가 가야 되는가?” 안 갑니다. 눈 앞에 거친 것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안 하려고 합니다. 단 지파는 어떻습니까? “단은 배에 머무름은 어찜이뇨…” 단 지파는 지금 배를 이용해서 많은 돈을 벌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하는 일이 지금 바빠요.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다 함께 모이자!” 할 때 안 합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하나님의 그 부르심에 응하지 않습니다. 결국 자기들을 구원하기 위한 싸움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이익 때문에요. 마치 예수님께서 말세에 대해서 이야기하실 때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나는 장가가야 되고, 나를 소를 사야 되고, 나는 밭에 가야 되고….” 온갖 우리의 삶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을 이유가 얼마든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일이 없어서 나옵니까? 바로 그 뒤에 스불론과 납달리를 보십시오. 18절입니다. “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하려고 할 때에 당장에는 많은 손해가 있습니다. 당장에는 여러분의 삶 속에 희생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고통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땀을 흘려야 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편히 쉬고 싶은 그 시간을 하나님께 드려서 수고해야 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를 생각해 보십시오.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여기 르우벤이나 길르앗이나 단 지파나 아셀 지파는 안 갔습니다. 전부 같이 모여서 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이 북쪽 지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볼산에 다 모였습니다. 다볼산에 모인 그들이 무슨 경험을 합니까? 처음에는 그들이 다볼산에 올라가서 덜덜 떨었겠죠? 하나님의 뜻대로 오긴 왔는데 밑에서 철병거 9백승이 우르렁거리고 있으니까 덜덜 떨었겠죠. ‘야, 이거 우리 잘못 왔나보다. 차라리 그냥 곱게 옛날처럼 소로로 다니면서 가늘고 길게 살걸. 왜 구태여 나와서 이런 일을 당하나?’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내리죠? 철병거 9백승이 완전히 물에 잠기고 진흙탕에 잠겼죠? 바락이 이제 전쟁을 선포합니다. “자, 이제 내려가자!” 여기는 1만명, 밑에는 많아야 2천명, 1대 5입니다. 아무리 싸움 잘 하는 적군이라 할지라도 5명이 붙어서 팔 하나씩 잡고 다리 잡고 머리잡고 흔들면 이기는 것 아닙니까? 그 전쟁은 쉽죠. 쉽기도 하고 제가 생각할 때에도 신나는 전쟁인 것 같아요. 하나님의 일은 처음에는 마치 내가 희생하면서 뭔가 하나님께 도움을 주는 것 같지만, 일단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면서 보면 신납니다. 재미있습니다. 맛이 있어요. 남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는 군대 이야기입니다. 군대 이야기를 시작하면 여자들은 옆에서 “또 한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들끼리 군대 이야기하기는 참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남자들 중에서도 군대 이야기하기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우리 교회에도 목사님들이 많이 있지만 다 군대 다녀온 것은 아닙니다.
방위도 있고 면제도 있어요.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은 거기서 신나게 이야기합니다. 안 갔다 온 사람들은 대면대면 합니다. 현역들이 재미있는 거예요. 한번 그 이후의 삶을 생각해 봅시다. 그 이스르엘 평지에서 가나안 백성들을 무찌른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아마 일생을 두고 그 이겼던 무용담을 서로 나눌 것입니다. “내가 그 때에는 그랬지~” 그 얘기 나올 것 아닙니까? 신나서 이야기할 거예요. 그 기분이 일생동안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전쟁에서 한 번 승리한 경험이 있다는 것, 하나님의 전쟁에 내가 동참해서 그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내가 이겼던 그 경험, 이것은 대단한 겁니다. 요즘에 TV광고에 보니까 이런 광고가 있어요.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데 1분이면 됩니다.” 그 광고 보셨어요? 남의 집에 신문 대신 던져주기 6초, 어르신과 함께 횡단보도 걸어가기 몇 초, 밤샘한 후배에게 커피 타주기 몇 초…, 다 합하니까 1분도 필요없어요. 그런데 그 1분을 투자한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상대편에게도 기쁨을 주었을 뿐만 아니고 그 일을 한 내가 더 기뻐져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게 뭔가 좋은 일, 착한 일, 선한 일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살릴 뿐만 아니고 내 생명을 살립니다. 훨씬 더 기분이 좋은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선교지를 다녀오신 분들, 사람이 바뀝니다. 우리가 돕는 교회에 한번 갔다 오신 분들은 기분이 달라집니다. 어느 사회복지단체에 갔다 오시면 또 달라집니다.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다시 하게 됩니다. 하면서 우리의 삶이 달라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동영상보기>얼마 전에 TV에서 한 고등학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지하철 역에서 어린 아이가 아장 아장 걷다가 갑자기 플랫홈 밑으로 떨어진 거예요. 전동차가 들어오고 있는데 떨어진 거예요. 엄마도 놀래고 모든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는데, 반대편이 있던 그 고등학생이 쏜살같이 뛰어 내려가서 그 아이를 잡아채서 도로 자기 편으로 확 도망갔습니다. 그새 전동차는 들어오구요. 그리고 반대편 플랫홈으로 올라가는데 주변사람들이 다 잡아주고 도와줘서 올라갔습니다. 그게 전부 지하철 CC TV에 잡혀서 TV에 방영됐어요. 갑자기 인터넷에서는 그 학생이 영웅이 됐습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시간이 흘러서 한 방송국에서 그 후로 어떤 일이 벌어졌나하고 그 학생을 찾아갔습니다. 원래 그 학생은 공부도 잘 못하고 그냥 보통이래요. 그렇다고 운동은 잘 했냐하면 운동도 그냥 보통이라고 합니다. 그저 아주 평범한 학생이에요. 그 전과 후도 특별히 달라진 게 없어요. 공부가 더 나아진 것도 아니고 운동을 잘 하게 된 것도 아니에요. 그냥 그렇습니다. 그런데 친구에게 달라진 게 뭐 없냐고 물어봤더니 친구가 하는 말이 옛날에는 그 학생이 소심하게 그냥 구석에서 조용히 있던 학생이었대요.
그런데 그 일 이후에 훨씬 더 밝아지고, 긍정적이 되고, 적극적이 되었답니다. 마지막에 그 학생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 학생이 하는 말이 슬프고 힘들 때, 어려움이 있을 때, 그 때 그 일을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 어린아이 하나를 구했던 그 일, 그때는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했었는데 그 일을 다시 생각하고 나서는 자기 마음에 다시 슬픔도 없어지고, 마음에 짐도 없어지고, 괴로움도 없어지고, 마음이 기뻐진다고 합니다. 인생을 보는 안목이 긍정적으로 바뀌고, 세상이 아름다워져 보이는 겁니다. 세상이 바뀌었습니까? 아닙니다. 그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에요. 하나님은 믿는 백성들에게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줄게.”이렇게 안 하십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실 때에는 동참하게 하십니다. “너도 같이 끼어서 일을 해라.” 동참하게 하시지만, 그 동참하는 일이 실패할 일이 절대로 아니에요. 다볼산에서 내려오는 백성들이 그들이 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겠습니까? 우리는 1만명, 저들은 2천명인데요. 이미 적들의 철병거는 하나님이 무력화시키셨는데요. 이길 수밖에 없는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고 온갖 악을 대적해서 싸울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을 주셔서 이길 수 있게끔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동참하게 하십니다. 그 일을 위해서, 그 싸움을 위해서 나의 작은 것, 나의 지금 하고 있는 것 중에서 포기할 일이 생깁니다. 금전적으로도 포기해야 되고, 희생하고 헌신해야 될 일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 희생과 헌신은 하나님 일에 동참한 뒤에 오게 되는 기쁨과 축복과 생명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하나님께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 순종해서 다른 사람에게 복음도 증거하고 도움도 줄 때에 그 사람만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명에 더욱 활력을 불어넣는 귀한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축복을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헌신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이 명령을 다 주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지 않은 르우벤 지파나 길르앗 지파, 단 지파, 아셀 지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했던 에브라임 지파와 스불론과 납달리가 있습니다. 그 두 부족의 나중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순종하며 헌신한 그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죠, 기분도 좋아지죠, 보람도 있죠, 내 삶의 의미를 비로소 다시 찾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불순종한 사람들은요? 이러한 모든 축복을 받지 못할뿐더러 그 삶은 계속해서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이 무의미한 삶처럼 느껴지게 되고 이 세상의 기쁨과 쾌락을 찾지만, 진정한 의미의 안식이나 만족이나 행복은 없습니다. 이 차이입니다. 바로 이런 면을 여기서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24절부터는 이제 그 시스라가 죽은 장면이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슬로우 비디오로 나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성경도 슬로우 비디오가 있다는 것 아십니까? 27절이 바로 그 슬로우 비디오 장면입니다. “그가 그의 발 앞에 꾸부러지며 엎드러지고 쓰러졌고 그의 발 앞에 꾸부러져 엎드러져서 그 꾸부러진 곳에 엎드러져 죽었도다” 같은 말이 계속 세 종류의 다른 말이 반복,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게 서부 영화에서 악당이 죽을 때의 슬로우 비디오입니다. 성경도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기서 두 사람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두 이방 여인이 비교되고 있습니다. 24절에 보니까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 그 야엘은 다른 여인보다 복되도다…”고 했습니다. 그 반대편에는 28절에 보니까 시스라의 어미가 나옵니다. 두 사람의 위치를 세상적으로 비교해보십시오. 겐 사람 헤벨의 아내인 야엘은 방랑자입니다. 유목민입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뜻에 순종하여서 하나님 뜻 한 가운데에서 시스라를 죽이죠? 여기서 보니까 어떻게 이렇게 했는지 모르겠는데, 머리 정수리에 못을 박았습니다. 이 야엘은 복을 받은 백성이라 하고, 반대편 시스라의 어미를 보십시오. 채색옷을 입었습니다. 왕궁 같은 곳에서 편안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가 자기 아들 시스라를 기다립니다. 이제 승리하고 노략물을 가져오고, 처녀들도 붙들어 올 것이라고 기다리지만, 이미 우리가 그 전쟁의 모든 결과를 알고 보면 어떻습니까? 불쌍한 여인입니다. 하나님의 뜻 반대에 있는 사람은, 비록 이 세상에서는 채색옷을 입고 있을지 모르지만, 비록 이 세상에서는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 인생은 금방 판결이 날 것이고 괴로움을 당하는 인생일 것이며 그 끝은 극과 극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면이 우리에게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앉은 모든 분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길로 가겠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합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구원 중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동참하라고 권하십니다.
그리고 동참하는 그 누구에게든지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시겠다는 약속도 주십니다.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모든 축복이 없습니다. 부디 여기 함께 모인 하나님의 백성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여기에 소망을 두고 동참합시다. 함께 순종합시다. 함께 뜻을 모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를 온전히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같이 동참할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기쁨과 만족과 하나님의 복을 풍성히 받는 주의 백성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도, 안하면 죽고 하면 산다
삿 5장 1~9절 / 이근수목사
성도님들이 기도해주셔서 18명의 성지순례단이 9월 30일 ~ 10월 9일 까지, 큰 은혜를 받고 무사히 귀국했습니다. 75세의 권사님들까지 전원이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2285m 시내산에 낙타를 타고 올라가 눈부신 일출을 보고 영광스러운 예배를 드렸습니다. 일부 외국인들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감격해 하며 참여해 함께 주 하나님을 찬양을 했습니다. 다음 금요일에 순례단 보고를 드리고 인터넷에 사진도 올리겠습니다.
1. 나 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주님
사람마다 자기를 사랑 합니다. 내 몸을 위하여 좋은 음식을 먹고, 보약을 먹고, 종합 비타민을 먹고, 씻어 주고, 닦아 주고, 꽃단장 하고, 얼굴을 아름답게 고치고, 좋은 옷 입고, 멋진 핸드백을 들고, 예쁜 구두를 신고, 향수를 뿌리고 다닙니다.
성공하기 위해 공부하고 열심히 일합니다. 그러나 공부에 실패하고, 사랑에 실패하고, 사업에 실패하면 절망하고, 심약한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습니다.
* 그러나 주님은 내가 실패해도 나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되 성공하고 승리하도록 사랑하십니다. 믿으십니까? 아멘
* 내가 절망하면 위로하시고, 낙심하면 격려하십니다.
병들어 아파하면 싸매 주시고 치료해 주십니다. 믿으십니까? 아멘
* 내가 죽으려 해도 죽지 못하게 하시고, 사랑으로 붙들어 주십니다.
우리 주님은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십니다. 이렇게 좋은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좋으신 하나님을 믿으시지요? 아멘
*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으시지요? 아멘.
* 주님과 함께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남자 배우 자살에 이어 여 배우가 자살을 하여 사람들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인기 탤런트가 사업에 실패하고, 사랑에 실패하여 악성 루머와 인터넷 악플에 상처를 받아 심약해 지고, 우울증에 빠져 세상을 비관하고 혼자 쓸쓸히 죽음을 택했습니다.
우울증 - 가족들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정신적인 병입니다. 각별한 관심과 사랑으로 치료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으로 소망을 가지게 해야 합니다. 주 안에서 재기하고 승리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자살하면 안 됩니다. 안됩니다. 가룟 유다가 돈 받고 예수님을 배신한 후 자살을 했습니다. 그는 어디로 갔습니까? 성경은 ‘제 곳으로 갔다’고 했습니다.[행1:25] 제 곳이 어딥니까?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살을 해서는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아멘? 아멘
본문 ; 드보라의 승전가에서 배우는 교훈
[삿4-5장]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의지하다가 또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며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삿4:1] 그래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팔아버리셨습니다.[삿4:2] 야빈 왕이 20년간 이스라엘을 심히 학대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힘들어 못살겠다고 살려달라고 울부짖었습니다.[3]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으시고 지도자로 드보라를 사사로 세우셨습니다. 이름의 뜻은 ‘벌’입니다. 벌 중에도 ‘여왕벌’입니다. 많은 일벌을 거느리는 여왕벌 입니다. 그녀는 남편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이스라엘 남자들 중에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적으로 깨어있고 말씀에 순종할 여인 드보라를 택하셨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 순종하였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복잡한 문제를 잘 풀어주었습니다.[삿4:5]
** 초대교회도 그리스도의 탄생, 공생애 사역, 부활의 현장 참여, 부활을 증거한 사람들은 모두 여성들이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영적으로 민감하게 깨어있는 여성도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이 여성도를 지도자로 부르실 때 순종하여 귀하기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사사로 순종한 드보라는 이스라엘 각 지파 남자들을 설득하여 군인을 뽑아 연합군을 만들자고 했습니다.
그녀는 군사령관으로 바락을 임명했습니다.[삿4:6] 바락이란 뜻은 ‘번개’입니다. 바락은 힘도 좋고 말을 잘 타고 빠른 용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사사 드보라에게 순종하였고, 적극 협력하였습니다. [삿4:6-7]
오늘의 교회 남자들도 영적으로 깨어있는 여성들의 말을 받고, 듣고, 협력해서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드보라는 광활한 곡창지대 이스르엘 평야를 되찾기 위해 다볼산과 기손 강 가에 진을 치고[6,7] 전쟁 요충지 갈멜산과 무깃도에서 전쟁을 하였습니다.[19] 이곳은 호남평야 같은 곡창지대 입니다. [사진] 물론 여 사사 드보라도 출정을 하였습니다. [8,9] 금번 성지 순례단도 광활한 이스르엘 평야, 갈멜산, 무깃도를 둘러보았습니다.
드보라가 바락에게 외쳤습니다. [삿4:14-24]
“일어나라, 오늘이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주신 날이다. 여호와께서 네 앞에 나가신다.” 이에 바락에 일만명을 이끌고 다볼산에서 내려가 용감하게 싸워 시스라 군대를 무찔렀습니다.[삿4:16] 적장 시스라가 도망을 치다가 목이 말라 헤벨의 집에 물을 마시러 들어갔다가 그의 부인 야엘에게 말뚝에 박혀 죽었습니다.[삿4:21] 가나안 왕 야빈도 죽었습니다.[삿4:23,24] 드보라와 야엘 - 두 여성의 활약이 매우 컸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나간 이스라엘 군대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비옥한 이스르엘 평야, 무깃도 성을 되찾고 40년간 평안하게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삿5:31] 여사사 드보라는 이스라엘을 40 년간을 잘 지도했습니다. [사진]
승전가[5:1-31]
그래서 그날 드보라 사사 와 바락 장군이 승전가를 불렀습니다. 여호와께서 원수를 쳐부수려고 강림하셔서 승리했다며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고[13]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즐거이 헌신하여 승리하였다고 칭찬하였습니다. [9] 그렀습니다. 하나님은 헌신자를 사용하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헌신자를 찾으십니다. 복음을 전할 헌신자를 찾으십니다. 우리 중에 복음의 헌신자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아멘
헌신한 자들[삿5: 14,18]
1. 스불론 지파[18] - 죽음을 무릎 쓰고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
사사의 전령이 도착했을 때 스불론 사람들은 뜨거운 태양아래서 밭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전령의 말을 듣자마자 즉시 일손을 놓고 ‘우리 모두 싸우러 갑시다. 더 이상 야빈의 괴롭힘을 받지 맙시다. 황금벌 이스르엘 평야, 곡창지대를 찾읍시다.’ 하며 낫과 괭이를 들고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스불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에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내 일 보다 하나님의 일을 먼저 하려는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오늘도 찾으십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마6:33]
2. 납달리 지파[18] -들의 높은 곳에서 그러하도다.
사사의 전령이 왔을 때 납달리 지파도 스불론 지파와 같이 높은 산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포도 종사를 한 것 같습니다. 전쟁에 참전하라는 말을 듣고 그들은 걱정을 하는 처자식들을 남겨두고 용맹스럽게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납달리 지파 사람들은 이스르엘 평야를 되찾아 농사를 짓기 위해 기꺼이 전쟁터로 나가 헌신했습니다.
우리도 납달리 지파 같이 주님의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3. 스블론[14]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가 내려왔도다.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는 군대 지도자를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궂은 일, 허드렛 일을 하겠다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오늘도 국가, 사회, 교회의 지도자들을 돕는 사람이 필요 합니다. 손 발이 되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식당 카페 서점 주차장, 기계실, 경비실, 청소로 봉사하는 성도들이 오늘의 스블론 지파입니다. 참으로 훌륭하고 감사합니다.
헌신하지 않은 자들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헌신하지 않고 전쟁에 불참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날로 먹은 자들도 있었습니다.
1. 단지파[17] - 배에 머물러 있었다.
단 지파는 배를 가지고 무역을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항구 저항구를 다니면서 무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령이 와서 참전하라고 할 때 저들은 배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야빈 왕과 그 백성들도 그들의 고객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단 사람들은 사업에 차질이 생길까봐 형제들이 피를 흘리며 싸우는데 돈 벌 생각에 빠져 전쟁터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 중에도 단 지파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돈 벌겠다며 하나님의 일, 영적인 일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우선순위는 언제나 자기 이익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시간을 드리고 봉사하고 헌금을 드리지 않습니다.
2. 아셀 지파[17] - 해변에 앉고 자기 시냇가에 거하도다.
사사의 전령이 도착했을 때 아셀 지파는 해변과 시냇가에서 물놀이를 하며 즐겁게 놀고 있었습니다. 전쟁?
우리는 지금 달콤한 휴식을 즐기고 있는데...
다른 지파 사람들이 나가서 전쟁하면 되지...
우리 한 지파 쯤이야 좀 빠지면 어때...
“아셀 지파 철학은 놀자입니다. 오늘도 놀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일 날 어린 자녀 데리고 놀러 다니는 교인이 있습니다. 잘못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망치는 것입니다.
3. 므낫세 지파-마길[14] - 명령하는 자들이 내려왔다.
므낫세 지파는 군대의 장교 직을 요구했습니다. 군대의 지휘관 자리를 요구했습니다.
오늘도 사람들이 진급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려면 실력과 능력이 있고 신실해야 합니다.
오늘의 교회에서도 직분만 원하는 자가 있습니다.
직분자의 의무와 책임은 하지 않으면서... 잘못이지요.
전도의 불길, 부흥의 불길
교회에 전도의 불길이 일어나야 교회 부흥이 일어납니다.
나의 베스트를 5사람 이상 찾아 정하고, 그들을 위해 넘치는 기도를 할 때, 전도의 불길과 부흥의 불길이 일어납니다.
죤 헤론[John W. Heron]선교사
1858년 6월 15일생 영국에서 출생해서 14 세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테네시 의과대학에서 개교 이래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여 교수로 내정된 청년 의사요 교수였습니다. 그는 앞길이 보장된 사람이었지만 낯선 조선 땅 선교사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1884년 4월, 26세에 해티 깁슨(Hattie)과 결혼했습니다. 헤론 부부는 신혼이었지만, 조선 선교를 위해 젊음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제일 먼저 조선에 도착하는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조선에 갑신정변이 일어나 선교 본부는 조선 입국을 연기하라고 명하여 일본에서 조선어를 배우며 기다리고 있는 중, 그들보다 후에 파송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1885년 4월 5일 헤론 보다 먼저 입국하였고, 그는 뒷 배를 타고 1885년 6월 21일에 27세에 입국하였습니다.
알렌은 의사요 미국 외교관이었기 때문에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죤 헤론은 알렌에 이어 광혜원 원장이 되었고 고종 임금의 시의(侍醫)로서 가선대부(嘉善大夫) 혜참판(惠參判)이 되었습니다. 헤론 선교사는 의지적인 사람이며 자기 책임을 다하는 의사로서 강한 희생정신과 사랑의 마음을 가진 따뜻한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해주면서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조선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무더운 여름 날 다른 선교사님들이 모두 피서를 떠난 후에도 혼자 병원에 남아 환자들을 돌보다 이질에 걸렸습니다. 설사와 혈변을 보며 투병하다 1890년 7월 26일 한국에 온 지 5년 만에 33세의 나이에 별세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죽자, 미 선교부는 고종황제에게 그를 묻을 땅을 요청했고, 고종은 성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땅을 주었는데 이곳에 첫 번째로 묻힌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이곳이 바로 합정동 ‘양화진 성지’ 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의사 헤론 선교사가 조선 사람의 영혼을 사랑해서 복음을 전해 구원받게 해주고, 육신의 병을 치료 해주기 위해 이 땅에서 목숨을 바쳤습니다. 우리는 그가 베푼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합니다. 그것은 불신자에게 전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령이 오늘 우리를 부르십니다.
전도하라. 전도하라, 나가서 전하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핑계대지 말고 전도합시다. 모두 전도합시다.
전도, 안하면 그 영혼이 죽고, 전도하면 삽니다.
낙심한 자에게 사랑의 복음을 전하세요.
그래서 소망을 주고 생명을 주세요.
우리 모두 전도의 불씨가 됩시다. 그래서 절망하는 사람을 구원하고, 교회 부흥의 불길을 일으키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다 같이 일어서서 - 합심해서 기도 합시다.
전도의 용기를 달라고 기도합시다. 사랑의 복음을 전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나의 베스트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여성이 깨어나는 교회
삿 5장 11~12절 / 이성희목사
오래 전 프랑스를 여행할 때에 그 곳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프랑스의 4대 인물’로 루이 14세, 나폴레옹, 잔 다르크, 드골을 꼽는답니다. 이 네 사람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프랑스를 대표할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네 사람의 공통점은 첫째, 싸움을 많이 하였습니다. 둘째, 싸움을 많이 하였기에 자연히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셋째는 독재자의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넷째, 국민을 위한 독재자입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네 인물 가운데 여성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상당히 좋은 일입니다.
잔 다르크는 근대 프랑스의 드보라입니다. 나라가 위태할 때에 몸을 버려 나라를 구한 위대한 여인입니다. 자기를 구한 사람은 가정을 구하고, 가정을 구한 사람은 나라를 구한다고 합니다. 자신을 구하는 것이 가장 소중한 일입니다. 여성 한 사람이 깨어나면 가정이 깨어납니다. 특히 여성이 깨어나면 남편이 깨어납니다. 그리고 자녀가 깨어나고, 교회가 깨어나고, 사회가 깨어납니다.
발자크는 “여자는 훌륭한 남편을 만드는 천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바꾸어 말하면 “여자는 남편을 무능하게 망치는 천재이다”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자가 하기에 따라 남편은 훌륭하게도 되고, 반대도 됩니다. 남편에게 있어서 아내는 절대적 존재입니다.
유엔이 발표한 여성 관련 주요 통계자료를 보면 이렇습니다. 지구상에 있는 주인 있는 땅 가운데 여성 소유는 1%입니다. 전 세계 기업 경영자 가운데 여성은 21%입니다. 유엔 회원국 194개 나라 가운데 여성이 지도자인 나라는 12개국입니다. 성인 문맹자 중 여성이 67%입니다. 영국 여자 아이의 기대 수명은 81세이며, 아프리카의 빈국 스와질란드의 여자 아이의 기대 수명은 39세입니다. 그런데 이 통계 자료에 너무 기죽지 마세요. 통계는 어디까지나 통계에 불과합니다. 전 세계 남성 100%는 여성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기업 경영자는 남성이지만 돈 쓰는 사람은 여성입니다. 여성이 국가 지도자인 나라는 적지만 가정 지도자의 대부분은 여성입니다. 이게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이근영의 ‘막시무스의 지구에서 인간으로 유쾌하게 사는 법’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자는 멍청하다. 여자보다 더 멍청한 남자를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인은 보통 여자보다 더 멍청하다. 보통 여자보다 더 많은 남자를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역사적으로 봐도 여자를 멍청하게 만든 것은 남자들입니다. 사람을 멍청하게 만드는 것은 멍청한 짓입니다.
성경에는 참 좋은 여인들이 많이 나옵니다. 요게벳, 한나, 나오미, 룻, 수넴여인, 수로보니게 여인 등은 좋은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특히 예수님 곁의 여인들은 슬기롭고 훌륭했습니다. 예수님 곁에서 물질로 도왔던 여 제자들이었습니다. 요안나, 수산나, 마리아 등이 이런 여인들입니다. 바울 곁의 여인들도 훌륭합니다. 브리스길라, 루디아, 뵈뵈, 드루베나, 드루보사, 율리아 등 바울 곁에는 더 많은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참 나쁜 여인도 많았습니다. 아합 왕의 부인이었으며 이방신을 들여와 섬겼던 이세벨이 나쁜 여인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의 명령을 거역했던 부인이었던 와스디가 나쁜 여인입니다. 고통당하는 남편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했던 욥의 아내가 나쁜 여인입니다. 세례요한의 목을 베게 했던 헤로디아가 나쁜 여인입니다. 남편과 공모하여 성령을 속였던 삽비라가 나쁜 여인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성경의 인물들은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이 교훈을 잘 받고 슬기로운 여인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신앙적 담대함으로 여성이 깨어나야 합니다.
사사기 5:11에는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날지어다”라고 합니다. 드보라가 깨어날 것을 노래합니다. 드보라가 일어나면 나라가 일어납니다. 드보라가 일어나야 나라가 희망이 있습니다. 한 여성이 깨어나면 나라가 다시 섭니다. 여성이 깨어야 나라가 된다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남성이 살아야 교회가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은 “어머니가 살아야 교회가 삽니다”. “여성이 살아야 나라가 삽니다”. 여성이 깨어나면 가정이 깨어나고, 교회가 깨어나고, 민족이 깨어납니다. 여성이 살아나면 환경도 살아납니다. 여성이 살아나면 건강도 살아납니다.
드보라는 사사기 4장에서 5장까지 나타난 여성입니다. 여호수아의 죽음에서 왕정 시작 까지 약 300년은 이스라엘의 혼란기였습니다. 이 와중에 사사라고 하는 12명의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나타납니다. 사사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범죄하여 고난당하고, 회개하여 구원을 얻고 평화를 얻는 순환이 연속되는 역사였습니다. 이 혼란기의 유일한 여성 사사가 드보라였습니다.
가나안왕 야빈이 20년 동안 이스라엘을 지배하였습니다. 그의 군대장관 시스라는 아주 포악한 장군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신음을 들으시고 드보라에게 바락과 함께 전쟁에 나가라고 하십니다. 바락은 드보라에게 “당신이 가면 내가 가겠다”고 합니다. 드보라의 치맛자락을 잡은 바락을 보세요. 그 때 드보라는 바락에게 “내가 같이 가지만 승리한 후에 당신의 이름은 날리지 못할 것입니다. 시스라는 여인의 손에 죽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전쟁이 한참일 때 가나안의 군대가 패주하게 시작합니다. 장군 시스라도 도망하였습니다. 어느 천막 곁을 지나다가 야엘이라는 여인을 만납니다. 시스라는 야엘에게 물을 얻어 마시고, “나를 찾거든 모른다고 하시오”라고 하고 천막 안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이 때 야엘이 시스라의 몸에 말뚝을 박아 죽였습니다. 야엘이 얼마나 세게 쳤든지 말뚝이 몸을 뚫고 땅에 박혔다고 합니다. 여자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세요. 죽다가 살아나는 해산도 여성들은 예사로 해요. 정말 여성들은 강하고 힘이 있습니다. 이런 여성의 힘이 신앙으로 뭉치면 담대함이 극치를 이룹니다.
에스더는 포로민의 후예로 바사의 아하수에로왕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이 때 유대인에게 위기를 맞이합니다. 하만이라는 사람이 그의 삼촌 모르드게를 죽이려고 궁중에 장대를 높이 세웠습니다. 그의 간계에 빠져 모르드게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왕이 부르기 전에는 왕비라도 왕에게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라고 하며 왕이 부르지도 않았지만 왕에게 나아갔습니다. 신앙적 담대함입니다.
가나안의 수로보니게 여인은 귀신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개에게 주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기분 나쁩니까? 자신을 개 취급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하면서 애원합니다. 개라도 좋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그 딸을 고쳐주십니다. 신앙적 담대함은 관용으로 나타납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 가에 손만 대어도 낫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혈루증은 불결한 병이었습니다. 혈루증 환자는 군중 속에 나타나지 못하는 것이 법입니다. 그런데 거기가 어디라고 감히 와서 옷에 손을 댑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고치십니다. 신앙적 담대함을 고침을 받습니다.
예수님께 와서 발에 향유를 부은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죄 많은 여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창녀라는 말입니다. 창녀는 밤의 얼굴입니다. 낮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의 집에 어딘데 거길 나타나서 예수님의 발에 불의하게 모은 돈으로 산 비싼 향유를 붓습니까? 신앙적 담대함은 구원함을 받습니다. 이 여인의 담대함은 회개로 생겨난 담대함입니다. 회개하면 담대함이 생깁니다. 회개하고 나면 겁날 것이 없습니다. 신앙의 담대성은 회개와 확신에서 생깁니다.
예수님 곁의 여인들을 보세요. 남자들이 다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여인들은 겁도 없이 와서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를 지킵니다. 또 여인들은 혼자 무덤을 찾아갑니다. 성경에 보면 당시에 무덤에는 귀신 들린 사람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섭지도 않았습니다. 도둑이 들면 남자들이 부인들 뒤에 숨어 있기도 합니다. 신앙적 사랑은 담대함을 줍니다. 사랑하면 담대해집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목숨까지 버릴 수 있습니다.
제가 아주 오래 전에 했던 “다시 오기만 해봐라” 얘기 기억하세요? 어느 집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부인이 도둑이 왔다고 남편을 깨웠습니다. 남편은 이불 속에서 무서워 나오지도 못하고 “이놈의 도둑놈, 들어오기만 해봐라”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했습니다. 그런데 들어옵니다. 다시 말합니다. “이놈의 도둑놈, 문을 열기만 해봐라”. 다시 물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이놈의 도둑놈, 장롱을 뒤지기만 해봐라”. 장롱을 뒤집니다. “이놈의 도둑놈, 나가기만 해봐라”. 그런데 다 훔치고 나갑니다. 그 때 일어나더니 큰 소리로 말합니다. “이놈의 도둑놈, 다시 오기만 해봐라.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 놓을 테다”. 남자들이 이래요. 이해하시고 힘을 주세요.
디모데는 참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아들 같은 동역자이었고, 교회의 좋은 일꾼이었습니다. 그는 어머니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에게 신앙을 이어받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디모데에게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졌다고 하였습니다.
최근의 보고에 의하면 실제로 외할머니의 힘이 크다고 합니다. 미국 뉴욕타임지 신문에 난 기사를 보면 좁게는 외할머니, 넓게는 여성 연장자가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할머니 연구가 활발하답니다. 외할머니와 사는 아이들의 영아사망률이 그렇지 않은 아이의 절반 수준이랍니다. 여성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말해줍니다.
영국에서 윌리엄 4세가 죽던 날 밤에 궁중의 한 처녀가 이튿날 왕으로 간택됩니다. 이 여인이 빅토리아 여왕입니다. 빅토리아는 64년 동안 영국을 통치했습니다. 영국에는 건축이나 의복 등에 ‘빅토리아 풍’이라는 말이 많을 정도로 그녀의 역할은 대단했습니다. 빅토리아는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무릎을 꿇고 성경을 쥐었습니다. “주여, 내가 왕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치를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인도의 한 왕자가 여왕을 알현하러 와서 물었습니다. “정치를 잘 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여왕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성경을 펴들고 “바로 이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적 담대함은 성경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의 사모님도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주목사님이 평양 남산 경찰서에 두 번째 구속되었을 때에 오정모 사모님은 담요 한 장을 가지고 가서 강단 밑에 깔아놓고 목사님이 출옥하실 때까지 철야기도와 금식기도를 계속하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사모님도 그랬습니다. 목사님께서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다고 옥에 갇혔습니다. 사모님께서는 그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도 오히려 “당신이 신사참배하고 나오면 내 남편이 아닙니다”라고 하셨답니다. 목사님이 순교하신 다음 목사님의 시체를 두고 자녀들을 데리고 사진을 찍어 놓으셨습니다. 담대한 신앙인에게 담대한 여인들이 있습니다.
“여자가 혼자 살면 구슬이 서 말이고, 남자가 혼자 살면 이가 서 말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성의 본성적 강인함, 담대함을 신앙으로 승화하여 주님을 섬기는데 사용하는 여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변치 않는 사랑으로 여성이 깨어나야 합니다.
마가복음 15:41에는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라고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 등은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가서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편안할 때, 군중에게 인정받을 때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궁지에 몰렸을 때에,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당할지도 모를 때에도 변치 않고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의 여인들 가운데 마르다 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특별했습니다. 두 여인이 다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마르다 때문에 마리아의 일이 돋보입니다. 마리아 때문에 마르다의 일이 가치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말씀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부엌일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이들의 사랑이 자신의 오라버니 나사로를 다시 살게 한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극진한 사랑이 예수님을 감동케 하였을 것입니다. 여성이 사랑으로 깨어나면 다른 사람을 살립니다. 남편을 살리고, 자녀를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나라를 살립니다.
반면에 여자가 한을 품으면 죽음이 닥칩니다. 무섭게 변합니다. 한 달 전에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느 60세 된 부인이 67세 된 전남편을 살해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결혼생활 37년 동안 부인을 무시하고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두 사람은 자녀 때문에 이혼 상태에서 동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신문을 보고 있는데 “정신병자가 신문을 보면 뭐하냐?” 하면서 주먹으로 머리를 때렸습니다. 이 부인이 순간적으로 옆에 있던 둔기로 남편의 머리를 쳐서 죽였습니다. 분노가 얼마나 쌓였으면 그랬겠습니까? 사랑은 살리지만 미움은 죽입니다. 사람이 미움을 가지고 분노를 품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릅니다.
잠언 31:30에는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사랑이 많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착한 아내는 칭찬을 받습니다. 가정에서 남편을 위하여, 자녀를 위하여 하는 수고와 사랑이 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나오면 힘이 들지 않습니다. 칭찬을 받습니다. 이런 부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 들은 얘기입니다. 어느 부인이 아들 하나 낳고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청상으로 아들을 키운다는 것이 힘이 들었지만 아들이 잘 되어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며느리가 볼 때는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가 아니라 남편과 아내의 관계 같았습니다. 아들 퇴근 시간이 되면 어머니가 세수하고 화장을 하고 아들을 기다립니다. 며느리 입장에서 보니 기가 막힙니다. 며느리의 자리가 그 집에서는 없는 것 같았습니다. 며느리가 아들을 낳아 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한 번은 아들이 시험을 쳤는데 100점을 받아왔습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손자의 100점짜리 시험지를 보이면서 “어머니, 아들이 100점 받았네요” 하면서 자랑을 했답니다. 그랬더니 시어머니가 “내 아들은 네 아들보다 공부 더 잘 했다” 그러더랍니다. 사랑하면 아무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며느리에 대한 사랑은 트이지 않을까요? 정말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친구처럼 며느리를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딸이 주는 돈은 서서 받고, 아들이 주는 돈은 앉아서 받고, 영감이 주는 돈은 누워서 받는다”는 말 아시지요? 사실은 더 편하고 좋아야 할 관계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입니다. 며느리에게 잘 하면 아들 여생이 편안합니다. 며느리 주는 돈은 뒹굴며 받아야 합니다. 꼭 이런 관계가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얼마 전에 ‘아줌마 영성’이란 글을 썼습니다. 오래 전 얘기로 아줌마와 조폭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떼로 몰려 다닌다”, “형님이라고 한다”, “문신을 한다. 조폭은 등에 하지만 아줌마는 눈썹에 한다”, “제 식구를 끔찍이 챙긴다”, “밤만 되면 무서워진다”, “칼을 잘 쓴다”. 제가 한번은 결혼 주례 하는데 신부가 퇴장할 때 후배들이 퇴장 길을 막고 “나는 아줌마다”를 세 번이나 외치게 합디다. 그 후배들 아줌마 무서운 줄 몰라서 그래요.
아줌마는 힘이 있습니다. 열정이 있습니다. 아줌마 특유의 강인함이 있습니다. 아줌마에게는 야성이 있습니다. 이런 아줌마의 특성을 영성적으로 다듬으면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여성의 심장이 강심장이기에 나쁘게 사용하면 무서움이 드러납니다. 좋게 사용해야 합니다. 미래는 여성 인력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교회의 여성인력을 똑똑하게 만들고, 아줌마를 힘 있게 만드는 것이 교회의 역할입니다. 여성인력을 복음적 인력으로 훈련하여 활용하는 것이 미래교회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교회의 미래는 아줌마에게 달려 있습니다. 아줌마의 영성은 미래교회의 핵심 영성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여성의 영성을 잘 개발해야 합니다. 여성 여러분이 스스로 이 일을 하셔야 우리 가정, 교회, 사회가 희망이 있습니다.
결 론
이태준의 ‘딸 삼 형제’에는 “여자가 뭔지 알기 전에 시집가고, 어머니가 뭔지 알기 전에 아기 낳고, 인생이 뭔지 알기 전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그렇데 철이 들기가 힘이 든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철든 여성은 여성의 역할을 증대합니다. 신앙적으로 철이 들어 우리의 삶의 현장을 개혁하는데 앞장 서는 여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여성 동역자들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나의 동역자 브리스가”, “내가 사랑하는 에베네도”, “많이 수고한 마리아”,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 “주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브두보사”,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성 여러분들에게 우리 주님이 붙여주실 말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이 좋은 수식어들이 다 붙여지기를 바랍니다. 더 좋은 수식어들을 다 얻기를 바랍니다.
여성 시대에 신앙적 담대성을 가지고, 변치 않는 사랑으로 좋은 이름을 얻고 칭찬 듣는 여성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