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민출신의 독립운동가 - 연기우 의병대장
독립유공자 연기우(延基羽) 의병대장
연기우 의병대장은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은 연천의 대표적인 독립유공자이다. 그러나 그의 혁혁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학계나 지성계에서 한번도 인물조명작업을 한 적이 없었다. 이에 연천향토사연구소에서는 연기우 대장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 연구를 진행중인데 그 일부를 소개하여 공유하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연기우(延基羽) 의병대장은 연천에서 태어나 강화진위대 부교(현재의 중사)로 근무 중 1907년 8월 군대해산을 당하자 비분강개하여 부하를 이끌고 무장봉기를 감행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로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통한 내정간섭으로 나라를 유린하던 일제가 급기야 1907년 헤이그특사파견을 구실삼아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키는 지경에 이르자 전국적으로 의병항쟁의 불길이 들불처럼 번져 나간 것이다.
연기우 대장은 봉기 후 일제와 격렬한 전투를 벌이면서 강화도를 빠져나와 임진강유역과 연천 보개산을 근거지로 삼아 지구전을 펼쳐 나라가 망하는 1910년 이후까지도 항쟁을 이어갔다. 만 3년 이상을 산과 들에서 지내며 쓰러져 가는 조국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해 헌신한 것이다.
연기우 대장은 하룻밤 사이에 신서면 대광리에서 토산군까지 80 리를 행군하는 신출귀몰한 유격전술과 함께 지역 주민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지원에 힘입어 다른 의병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장기간의 의병전쟁을 지속할 수 있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 기사를 보면 연기우 대장이 지용을 겸비하여 헌병과 교전하여도 패하는 바가 없어 헌병들이 감히 범접치 못하고 민간에 폐를 끼치는 일이 없어 인민들의 동요가 없었다고 한다.
1909년 10월 일제는 소위 호남대토벌로 남부지방 의병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한 후 마지막 남은 의병의 근거지인 경기북부 지역의 임진강과 보개산 일대에 토벌대 병력을 집중하였다.
일제가 경기북부 의병을 무력화시킨 후에야 비로소 강제로 한일합병을 추진한 것을 볼 때 경기북부 의병전쟁이 차지하는 시대적 역할을 잘 알 수 있는데 그 의병전쟁의 중심에 연기우 대장이 우뚝 서 있는 것이다.
1907년 8월 군대 강제해산 이후 폭발적으로 일어난 무장봉기에서 한반도 중부지역의 상징적인 양대 구심점은 경기도의 허위(전 참판)와 강원도의 이인영(유학자)이었다.
해산군인 출신의 연기우 대장은 독자적으로 봉기하여 부대를 거느리고 허위부대와 연합함으로써 허위부대의 실질적인 전투력을 형성했다.
1908년 1월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한 13도 연합의병 1만 여명이 서울 진공작전을 펼칠 때 연기우는 2000여 허위부대의 선봉으로 동대문 밖 30 리 지점까지 진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연기우는 16인의 역사(力士)의 한 명으로 신문에 보도되어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후속부대가 제 때에 도착하지 못하여 중과부적으로 전투 중 부상을 입고 후퇴하고 말았다.
의병진영의 상징적 구심의 하나인 이인영이 서울 진공 도중 부친상을 이유로 회군하면서 13도 연합의병의 지휘권을 허위에게 넘겼는데 허위는 서울 탈환에 실패하고 다시 연천 일대로 병력을 후퇴시켜 항쟁을 계속하다 1908년 6월에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하고 만다.
이인영과 허위라는 걸출한 인물이 사라진 후 중부지방 의병진영은 연기우와 이은찬에 의해 재편 정비되었다.
이인영 부대는 13도 연합의병 결성의 산파역할을 수행한 이은찬이 이어받아 창의원수부로 개편했고, 허위부대의 실질적 전투력의 중심이었던 연기우는 동한창의존양군(東韓倡義尊攘軍)의 기치를 내걸고 의병부대의 전열을 재정비했다.
그 후 창의원수부의 이은찬이 1909년 3월에 체포되자 1907년 8월 봉기 이래 줄기차게 항쟁해 온 의병장 중 투쟁경력이나 지도력 면에서 연기우를 능가할 의병장을 찾기 힘들게 된다. 이때 연기우는 연합과 분진이라는 교묘한 유격전술을 구사하며 적을 치고 빠져 일제의 내부 보고문서에서 조차 그 전술적 뛰어남이 언급되고 있었다.
1910년 6월 당시 강원도 경찰부장 와다나베의 보고에 의하면 다른 의병들은 모두 무뢰한 오합지졸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연기우만이 군사교육을 제대로 받아 의병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이채를 띠고 지방민의 동정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였다.
장단 마전 삭령 연천 철원 포천 영평 토산 등 경기도와 강원도 황해도를 넘나들며 활동한 연기우 대장은 보통한장(普通韓裝)에 적색 나사모를 쓰고 권총과 검을 찼으며 부하들은 모젤총과 같은 양총으로 무장하고 다갈색의 양복을 입고 학생모를 쓰고 있었다 한다.
독립부대로는 많을 경우 300명 정도의 병력을 거느리고 전투를 전개했으며 무기를 제조하고 수리하는 청나라 사람들을 데리고 다녔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휘하 장수들에게 병력을 나누어주어 소규모 유격전을 전개토록 했다.
연기우 휘하 대표적인 의병장을 살펴보면 제갈윤신,신양주,김중운,이래원,최순근,정현선,연성칠,송병태,이주부,현학인,김시경,홍원유,홍천희,하상태 등이다.
불의에 습격한 후 신속하게 이동해야 하는 유격전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연기우는 낮에는 주로 정찰활동을 하고 심야에 공격활동을 했으며 경기도와 강원도 경계의 광덕산과 백운산 같은 험준한 산악에 산채를 지어 숙영지로 사용하였다.
연기우 대장은 전투 중 일제의 주구가 된 헌병보조원을 만나면 일단 싸우지 않고 간곡히 호소하여 의병에 투신하도록 하였으며, 삭령군 북면에 사는 한모 윤모가 의병이라 사칭하고 인민의 재산을 토색하자 둘 다 결박하여 강에 던져 버리기도 했다. 또한 의병전쟁을 수행하는 다른 의병장이 부당하게 군복이나 군량을 징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포박하라고 했는데 당시 언론에도 연기우 대장이 공평무사하고 규율이 엄정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연기우 대장의 진면목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 하겠다.
군자금을 징발할 때에도 대개 부호가이거나 면장, 이장 등이 거둔 세금이었기 때문에 일제 통감부의 징세 수입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이천(伊川)군 고미탄면의 경우 1909년 11월부터 1910년 4월까지 세금 전량을 연기우부대가 징발한 까닭에 한번도 세금을 내지 못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였다. 연기우부대가 민심을 얻고 군수금 보급에 차질이 없으며 전술에 능하니 일제는 연기우 대장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해도 서흥경찰서의 경우 연기우의 인상착의를 담은 수배지를 각 주재소에 돌려 체포에 혈안이었는데, 신장은 5척 4촌 가량으로 얼굴 왼쪽 관자놀이와 왼쪽 수갑(手匣)에서 관절까지 화상을 입었고 머리카락은 산발을 묶었고 수염은 상하 근소하다고 하였다.
구한말 애국지사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연기우는 방탄요갑(防彈腰甲)을 착용했는데, 소가죽 2필에다가 광두정(廣頭釘)을 빽빽하게 박았으며 길이는 6척 1촌 5분, 넓이는 1척 7촌이었다고 한다. 탄환을 맞은 흔적이 있으나 뚫지 못했다고 한다. 연기우 대장이 수많은 전투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것은 이 방탄요갑 덕분이 아닌가 한다.
연기우 대장은 1909년 당시 임진강 북쪽 장단 땅에서 대규모 의병부대를 지휘하던 김수민과 형제의 약(約)을 맺고 연합작전을 펼치기도 했는데, 김수민이 서울로 잠입하여 양총 60정을 구입해서 돌아와 연기우 대장에게 40정을 제공한 것을 볼 때 연기우가 형의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09년 이은찬과 김수민이 체포되어 순국한 후 경기북부 의병전쟁은 줄기차게 일제와 격전을 벌여 온 연기우 대장과 헌병보조원 노릇을 하다 1909년에 의병으로 전환한 강기동에 의해 주도되었다.
연기우 대장이 강기동과 함께 연합하여 대규모 부대작전을 수행하다가도 즉시 소규모 부대로 분진하여 유격전을 전개하는 통에 일제 토벌병력은 1910년 초 까지도 경기북부와 인근 강원도 황해도 지역을 군사적으로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1910년 2월에 들어서서 강제 한일합병의 최대 걸림돌이 되는 경기북부 의병을 전멸시키기 위해 일제가 총공세를 펼치자 더 이상 견뎌낼 수 없게 된 의병장들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이나 간도 쪽으로 장기 항전의 근거지를 옮기는 구상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는데, 황해도 지역의 가장 뛰어난 의병장으로 연기우 대장과 연합작전을 펼친 이진용은 북행에 성공하여 나라가 망한 후에도 두만강 지역 국경근처에서 무장독립항쟁을 계속 했다. 강기동 대장은 1911년 2월 북행 도중 원산에서 체포되어 순국한다.
1910년대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임시정부와 북경 독립혁명당 사건으로 총 11년의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 연병호의 기록에 의하면 포천전역(抱川戰役)에서 강기동 강원호의 부대가 연기우 대장의 계획을 듣지 않고 적에게 체포되어 법정과 임종 때까지 말하기를 “우리가 연기우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렇게 참패하였노라”하며 연기우는 “3일 천기(天氣)는 보는 사람이라 적을 맞아 패함이 없고 용병술이 신과 같아서 충국애민하는 지성이 참으로 놀라운데 우리 대한에 연기우같은 사람 셋만 있으면 나라를 찾을 수 있다”고 까지 칭찬하였다 한다.
연기우 대장이 군사적으로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당시 위급한 정세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
1910년 6월 21일 경기도 경찰부장의 보고에 의하면 연기우의 부하가 포천군 동촌면 화현리 이구대의 집을 습격하여 군용금을 강청하면서 말하기를 “ 일본정부는 무력으로 합방문제를 결행하려고 통감에 육군 대장을 임명하였다. 이번 가을에 우리 대장 연기우는 국가를 위해 몸을 바쳐 일본병은 물론 일본인을 국외로 내쫒고 합방을 방지하려 한다.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국가의 존망이 절박한 오늘 우리 동포는 속히 군자금을 거출하여 외국으로부터 예리한 병기를 구입 거사하여 합방을 막아야 한다. 너는 이 뜻을 알고 금 백 원을 즉시 제공하라......”
그러나 연기우 대장처럼 죽을 때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 나라를 지키려고 싸운 수많은 의병장들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1910년 8월 29일에 대한제국은 망하고 말았다.
정말 연기우 대장과 같은 인물이 셋만 있었어도 나라는 망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우 대장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그런데 연기우 대장이 잠시 근무한 강화에는 기념비까지 만들어져 있건만 정작 연천은 어떠한가? 기념비는 고사하고 연기우 대장이 연천의 인물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더욱 더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연기우 대장은 1910년 10월 이후의 행적이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는데, 당시 일제는 연기우 대장을 추적하기에 혈안이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이나 미국으로 망명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일제 내부 첩보보고가 여러 차례 있기도 했다. 이후 1914년 6월 강원도 인제에서 아버지와 함께 체포되었다는 매일신보 기사가 있는데 재판기록이나 처형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연기우 대장과 같은 거물을 일제가 살려두지 않을 텐데 의문이 가시지 않는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군인출신 평민의병장 연기우 대장과 관련하여 아직도 명확히 규명되지 않고 있는 두 가지 논란을 언급하고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첫째, 출생과 관련하여 삭령설(1962년 서훈 당시 기록), 연천설(1910년 당시 일제의 정보보고), 양주설(곡산연씨 족보)의 세가지가 있다.
둘째, 사망 관련해서는 1910 년 설(한국독립사에 근거), 1914 년설(매일신보 기사), 1920 년 설(3.1운동 목격자 증언)이 있다.
향토사연구소는 연기우 의병대장을 연천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부각시키기 위해 이러한 논란이 반드시 규명돼야 될 문제로 인식하고 조사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많은 성원을 부탁드린다.
첫댓글 수고많으십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곡산 연가인데 처음 들었씀니다 감ㅅ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