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5.
계3:14-22
실제로 부요한 도시였던 라오디게아의 교회는 가난하고 가련하다고 칭하며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는 강한 책망을 받았다.
그들의 행위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않다는 이유였다.
‘적당한’ 이라는 단어가 주를 섬기는 성도의 바른 행위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주님을 세 가지 방법을 말씀하셨다.
첫째,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물질의 부요는 참 부요함이 아니기에 주님으로부터 ‘불로 연단한 금’을 사야만 한다. 그것으로만 부요할 수 있기 때문인데 불로 연단한 금 즉 정금이란 무엇일까?
욥처럼 고난을 통해 걸러질 것들-자기 의, 연민, 자기 생각, 자기 열심 등-을 거르라는 말씀일 수도 혹은 눈에 보이는 사라질 것에 대한 집착을 연단한 불에 넣어 거르라는 말씀인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주님께서 생명으로 값으로 지불하신 십자가 외에는 부요할 수 없다.
둘째,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해야 한다.
주님으로부터 흰옷을 사야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물질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옷이야말로 나의 수치를 가려줄 수 있는 유일한 흰옷이기에 주님을 영접하여 그의 안에 거하는 것이 흰옷을 입어 죄의 수치를 가리는 길이다.
셋째,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말씀하셨다.
눈을 떴다고 해서 다 보는 것은 아니다. 영적 소경된 자는 영의 세계를 볼 수 없기에 안약 되신 생명의 말씀으로 눈꺼풀에 덮인 세상의 정욕과 부정함 그리고 사랑 없음 등을 씻어 내어야 한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은 나를 혼자 버려두시며 혼자 일어서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함께’하시겠다 약속하신다.
영적으로 가난하고 가련하며 곤고한 자이지만 주님으로 부요한 자로 삼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며 나를 당신의 식사 자리에 초대하신다.
‘내가 네게 말하노니 내 음성과 세상의 소리를 구별하고 내 음성을 듣고 따라와서 좁은 문으로 들어와 나와 더불어 먹자.’
이 시간 주님이 내미신 손을 잡고 이 하루의 문을 열어보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