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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성시대* 차분한 20대들의 알흠다운 공간 원문보기 글쓴이: 이럴수럴수
출처 : 여성시대 이럴수럴수
한국사 공부 한번이라도 해본 여시라면
그 이름을 모를 수 없는 사람...
면암 최익현,,,
짧게 맛본 한국사의 달콤함을 못잊고
45회 한국사 달글에서 질척거리던 나는...
갑자기 오만떼만 사건에 안끼는 일이 없어서
여시들을 괴롭게 했던 최익현 선생이 궁금해졋고,,
결국 찾아보게 됏슴ㅎ
면암(勉菴) 최익현 (1833~1907)
-조선왕조 말(1883년)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남
-호는 14살이 되던 해 스승 이항로에게 받음('힘쓰는 사람' 이라는 뜻)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척양척왜(斥洋斥倭)’를 주장하며 ‘주리척사(主理斥邪)’의 사상을 행동으로 실천함
-그 유명한 도끼상소의 주인공
-이후로도 상소 많이 올리고, 의병활동도 열심히 하심...
약력은 짧게 간추려 이정도...(존나간추림)
한국사 달글에서는 위정척사파 아니고 위즈칼리파로 유명하셨음ㅎ
1. 최익현의 첫 상소
1868년 (36세,고종5년) 사헌부 장령으로 임명된 최익현은 <시폐(時弊) 4조>라는 상소를 올리게 됨. 상소의 주 내용은
-당백전 혁파
-토목공사 중지
최익현이 건의한 두가지가 모두 당시 섭정중이던 흥선대원군이 힘을 쏟던 경복궁 중건사업과 관련된 항목임.
무리한 경복궁 중건사업으로 인해 백성들이 많이 고통을 받고 있었음.
최익현은 이런 나라사업으로 인한 폐단과 취렴정치를 막고자 했으나..... 흥선대원군이 퇴짜놓음 ㅎ
그리고 이 일은 소소하게 논란이 되어 최익현을 귀양보내 문책해야 한다는 청까지 올라갔으나 귀양가지는 않음.
이 일로 최익현은 상소 올린지 약 8일만에 정4품 사헌부 장령에서 정3품 돈녕부 도정직을 제수받는데..
돈녕부라는 부서 이름이 생소한 것만 봐도..ㅠ 품계가 오른건 별 의미 없고 딴지 못걸게 징계내린거 같은 느낌이 빡오지....
(돈녕부는 왕친과 외척 일을 맡아보는 부서라고함... 그니까 걍... 일잘하는 애 아무것도 못하게 해버린거임ㅠ)
결국 최익현은 화나서
'신이 지은 죄가 중한데 지은 죄에 알맞는 처분을 요행으로 면하고 더 나아가 분수에 맞지 않는 벼슬을 얻는 것이 말이 안된다. 돈녕부의 관할이 되기엔 신의 가문이 너무 한미하다.'
라는........ 상소를 지어올리며 사직을 청함.
내가 사직서를 너무 간추린 감이 없잖아 있는데..뒷부분 내용이
'꿀발린 얘기만 듣고싶어하는 군주 치하의 나라가 퍽이나 잘돌아가겠다^^ 나 귀양보내라고 찌른 애 사간원이던데 나같이 불충한 뜻을 품은 죽어 마땅할 놈을 꼴랑 귀양보내는거 따위로 끝내자고 건의한 걔도 문제있는거같다^^ 드러워서 때려칠게'
대충 이랬음,,, ㅎ
이후에는 양주에 내려가 학문에 힘쓰다가 동부승지(승정원의 정3품직)에 임명됐는데 바로 사직서 올림ㅋㅋㅋㅋㅋㅋㅋㅋ
그 사직서 내용도 강도높은 세수탓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진지 오래이니 제발 백성들 먼저 돌보라는 거였음..
완전 대쪽같기로는 대나무 저리가라 수준,,
그런 최익현의 진심은 당시 친정을 고민하고 있던 고종의 성심을 감동시키는 것으로 모자라
이후 최익현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관원들로 하여금 줄줄이 사직소를 올리게하는 사태로까지 이어짐.
고종에 의해 호조 참판에 제수된 최익현은 며칠 안지나서 다시 한번 상소를 올려
만동묘와 서원을 철폐한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통박하면서 하야를 요구함.
결국 최익현의 상소 스노우볼이 구르고 굴러 대원군 하야와 고종 친정을 이끌어낸 것이라 할 수 있음..!
이때 상소문에 사용한 단어들(이륜두상 등)이 많은 이들로 하여금 빈축을 살만큼 과해서ㅠ
41세의 최익현은 결국 국문을 받고 제주도로 쫓겨났다가 약 1년 후 풀려남.
최익현은 이미 그때쯤 조정에서 완전 핫스타였는지 ㅎ 석방명령에 반대한다는 소가 꽤 많았음.
2. 두번째 상소
남들이 나한테 뭐라는지는 관심없고ㅠ자기만의 갈길을 꿋꿋이 가는 최익현...
그가 석방된 지 만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상소를 올릴 일이 또 생김;
운요호 사건 이후 1876년 일본과의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기 때문임 ㅠ
최익현은 도끼를 들고 궁궐 앞에 엎드려 위정척사론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음.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도끼상소....!!!!
이 상소로 인해 흑산도에 유배되었다가 3년 후에 풀려남 ㅠ
이때도 최익현의 방송(석방)소식을 듣자마자 득달같이 석방철회를 요구하는 상소가 쏟아졌으나 다 먹금당함ㅎ
이후에는 고향에서 학문에 정진하는 기간을 가졌음.
그리고 1894년 공조 판서(정2품)직에 제수됨.
3. 세번째 상소 ㅎ
이 쯤되면 운명인걸까...? 최익현이 관직에 복귀한 시점인 당시에 조정은 동학농민군과의 전쟁으로 정신이 없엇음.
그리고 6월 청과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왜놈들이 친일내각을꾸려 2차갑오개혁을 단행하자 할배는 이를 또 참지못하고,,
친일 개화파정권을 적으로 규정하는 상소를 올리며 개화정책의 전반을 폐지할 것과 개화파들의 처단을 요구했음.
1895년에는 우리 모두가 분노해야 마땅할 명성황후 시해사건,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이후 선포된 단발령 등으로 인해
포천군 내에서 양반들을 모아 국모의 원수를 갚고 단발령에 반대할 것을 꾀하다가 잡힘ㅠ
1896년 친일내각이 붕괴하며 그는 풀려났지만 권유된 관직을 사양하고 12가지 시무책을 올림.
그리고 후에는 건의한 열두가지 중에 하나라도 시행이 안되면 나라가 제 구실 못할거고 나도 관직 임해야할 이유가 없다면서
권하는 관직을 전~~~부 마다함.
고종실록 39권, 고종 36년 1월 4일 양력 2번째기사 / 최익현이 상소를 올려 사직할 것을 청하다
고종실록 44권, 고종 41년 9월 5일 양력 2번째기사 / 의정부 찬정 최익현이 벼슬을 사양하는 상소를 올리다
고종실록 44권, 고종 41년 9월 23일 양력 4번째기사 / 의정부 찬정 최익현이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다
고종실록 44권, 고종 41년 9월 30일 양력 2번째기사 / 의정부 찬정 최익현이 벼슬을 사양하는 상소를 올리다
고종실록 45권, 고종 42년 1월 14일 양력 2번째기사 / 의정부 찬정 최익현이 공법과 예법에 대한 상소를 올리고 사직을 청하다
99년부터 줄기차게 올라온 사직서,,
(이후로도 몇개 더있으나 안가져왔음ㅎ)
이런 최익현을 회유하기 위해서 고종도 무던히 애를 썼으나 최익현의 뜻은 매우 강경했음 ㅠ
"(...)지금 신은 나이가 벌써 칠순이 지난 데다가 온갖 병에까지 시달리게 되어 남은 날이 많지 못합니다. 폐하께서 신이 쓸모가 없다는 것을 모르시고 여러 차례에 걸쳐 불러다가 예의로 극진히 대해 주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신에게서 취할 점이 무엇이기에 이런 비상한 은총을 베푸는 것입니까? 신은 원래 학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시골에서 나서 자랐으므로 듣고 본 것이란 오직 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남긴 가르침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충성된 말을 폐하에게 올리기에 충분하다고 하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견해는 이미 무술년(1898)에 올린 상소에 모두 밝혔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신의 이번 걸음이 어찌 감히 의견이 받아들여지기를 바란 것이겠으며, 어찌 감히 고향으로 살아 돌아가기를 바라겠습니까? 지금 나라에 위태로운 형세가 당장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데 폐하께서 허심하게 받아들이려는 훌륭한 뜻을 갖고 계신다면 신은 감히 모두 말하고 숨기지 않을 것입니다."
-고종실록 45권, 고종 42년 1월 7일 양력 2번째기사 발췌
최익현은 고종에게 자신이 요구하는 다섯가지 내용이 담긴 차자를 올리며
'백성이 자기 살점을 씹으면서까지 외국 사람들의 앞잡이 짓을 하는 것은 관리들의 탐학으로 인해 그들이 본성을 잃은 탓'이라고 함. ㅜㅜ
그러나..최익현이 이렇게 열심히 나라가 나아갈 방향을 도모했음에도 불구하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우리나라는 그렇게 외교권을 강탈당함.
4. 마지막 상소
을사늑약 체결 이후 최익현은 스스로를 '죽지못한 신하'라 칭하며 통탄함을 울부짖는 상소를 올림.
상소의 내용을 간추리자면 박제순,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헌의 을사오적을 처단하고 망해가는 나라를 보존할 것을 청하는 내용이었음.
상소 말미에 덧붙인 내용으로 봐선 최익현은 이때 이미 노환과 지병으로 인해 몸상태가 말이 아니었던 것 같음...
이 상소와 함께 최익현은 1906년 해임되었다는 기록, 그리고 을사의병을 함께 일으켰던 이들과 같이 추포되었다는 기록을 끝으로 실록에서 모습을 감춤.
실록 외의 기록들에서는 1906년 최익현의 의병활동들을 엿볼 수 있음.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와 마주하고) 최익현은 “너희들이 왜군이라면 죽을 각오로 싸울 것이나 같은 동포끼리 서로 죽이는 것은 차마 할 수 없으니 물러가라.” 하였다. (...) 선생은 “여기가 내가 죽을 곳이니 모두들 돌아가라”고 명령하였다. 이리하여 살아남은 의병이 모두 해산하였으나 임병찬, 정낙언 등 21명은 끝까지 선생 곁에 남았다. 선생은 이들과 함께 순창 객사로 몸을 피하였다. 이때에 선생은 임병찬에게 명령하기를 “우리는 반드시 죽고 말 것이다. 서로 포개어 죽으면 누구의 시체인지 알 수 없으니 각자 이름을 써서 벽에 붙이고 이름 밑에 바른 자세로 앉으라.” 하고, 또 말하기를 “고인은 포위된 성(城) 안에 있으면서도 관을 쓰고 예를 행하여 조상을 뵈려고 하였으니, 지금 제군은 의관을 정제하라.”고 하자 사람들이 모두 행낭을 풀어서 도포를 꺼내 입고, 갓끈을 다시 매고 공수(拱手)하고 벽을 등지고 꿇어 앉았다. 곧이어 추격해 온 양대 지방진위대의 빗발치는 탄환에 21명 중 정낙언 등 9명이 전사하고 살아남은 12명은 체포 구금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민족문화추진회, <국역 면암집> 181~186
1906년 6월 11일 서울로 압송된 최익현 일행은 조선의 백성이면서 왜인의 재판에 의해 3년형을 받아 대마도의 엄원 위수영 경비대에 피금되었다. 피금된 상황에서 “왜놈이 주는 음식은 먹지 않겠다.”며 죽음을 무릅쓰고 단식으로 항거하여 조선의 자존심을 지켰다. 그리고 그해 10월 최익현은 적지인 대마도에서 노쇠하고 지친 몸에 병이 들어 회복되지 못하고 1906년 11월 17일 74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황제께 올리는 상소문도 다른 신하가 대신 읽어줄 만큼 몸상태가 안좋았는데..
저렇게 총칼들고 싸웠단게 너무... 대단하면서 눈물남,,
비록 최익현은 동학농민운동때는 민보군을 조직해 관군편에 서서 동학농민군과 싸웠지만
봉건주의 사회의 기득권으로 한평생 산 사람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인듯함.
문신이었던만큼 자기가 최고로 하는 가치가 거기 꽉 얽매여있었을거같음.
어쨌든 최익현이 농민들 수탈과 국권침탈을 막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단건 사실이니까...
을사의병도 외교권 박탈때문에 일으킨 의병인데...
결국은 임금의 군사들과는 싸울 수 없다고 (불충이니까) 자복하고 대마도로 압송되어서
고국 땅 못밟고 순국한거 내 눈물포인트.......ㅠㅠㅠㅠ
마지막으로... 내가 글 쓰게 된 계기가 된 캡쳐 놓고 갑니다..
글쓰다 지침....
문제시..... 수정안하고 걍 삭제....
첫댓글 고딩 때 역사쌤이 제일 존경하는 인물이셨음 ㅜ 진짜 노익장
친일파들 이완용같은 민족 반역자들 생기던 시기에, 임금님까지도 일본 눈치 보던 시기에 저렇게 꿋꿋하게 자기 뜻을 펼치던 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 ㅜ
대마도로 압송 될 때 적의 땅을 밟지 않겠다고 신발에 조선 땅 흙 넣고 가셨다면서… 진짜 기개가 대단하신 분…..
와..
눈물난다 ㅜㅜㅜㅜㅜㅜ
진짜 대쪽같은 분이시다ㅠㅠ
너무멋있으셔..
정말 대쪽 같고 멋진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