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4일 비워두기
하느님 나라를 예수님은 혼인 잔치에 비유하셨다. 신랑이 신부와 결합하여 하나가 되는 거처럼 하느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나와 하나가 되신다. 예수님이 신랑이라면 나는 신부에 비유된다. 내가 신부, 여자라는 설정이 좀 어색하고 마음에 잘 와닿지 않지만, 신랑이 신부를 반기듯이 하느님이 나를 그렇게 좋아해서 나와 하나가 되기를 원하신다. 당신의 외아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그렇게 되기를 원하신다.
그 기쁨을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이사 61,10)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이사 62,5) 솔직히 믿기 어렵지만, 있는 힘을 다해서 믿는다. 나도 내가 저주스러울 정도로 싫고 미울 때가 있는데 이런 나를 저렇게 좋아하신다니, 내가 누구를 좋아하는 것과 하느님이 나를 좋아하시는 건 그 차원이 다른 게 분명하다.
혼인 잔치에서 느끼는 정서는 무조건 기쁨이고 즐거움이다.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드는 거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게 그렇게 기쁘고 즐거운 거다. 그래서 예수님은 파스카 만찬, 우리나라 명절 식사를 미사 성찬례로 제정하셨을 거다. 그 당시 그보다 더 뜻깊고 크고 기쁜 식사는 없었으니 말이다. 물론 하느님 나라, 하느님과 함께 사는 건 그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겠지만, 이 세상에서는 그나마 비슷한 게 그거다. 외아들을 내어놓기까지 나를 사랑하신다니 믿을 수 없다.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해 믿는다. 믿게 해달라고 청한다.
하느님 사랑이 이렇게 크고 깊어 믿을 수 없으니까 사람들은 하느님보다 세상 안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나보다. 사업이 잘돼서 부자가 되고, 복권이 당첨되고, 자기 꿈을 이루고 등등. 하지만 통계수치가 말하듯 그런 부자는 정말 극소수고, 1등은 한 명이고, 로또 1등 당첨 확률은 평생 내가 번개를 한 번이라도 맞을 확률보다 약 533배 낮다고 한다. 그렇게 낮은 확률에 기대는 것보다 하느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걸 믿는 게 훨씬 낫다.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바리사이처럼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 비로소 구원받는다고 알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런 꾸중이나 벌도 없이 죄인을 그냥 용서하셨고 대가도 없이 병자를 낫게 하셨다. 사랑하면 다 이뻐 보이고 자기 것을 다 주고 싶고 모든 게 다 용서된다. 하느님 사랑이 그런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세상에는 없는 사랑이니 그저 믿을 뿐이다. 성체를 모실 때마다 그 사랑을 느껴서 짜릿하고 가슴 벅차면 좋을 거 같지만 하느님 사랑을 진짜로 느낀다면 아마 숨이 멎어 죽고 말 거다. 잠시 맛보는 것만으로도 온 삶을 봉헌하고 목숨을 내놓은 성인들이 이렇게 많으니 말이다. 하느님 사랑은 이 세상 것으로는 다 알 수 없고 느낄 수도 없는 것이니 그저 믿을 뿐이다.
예수님, 제 마음 안에 주님을 위한 공간을 마련합니다. 그곳은 늘 비워두겠습니다. 제가 비우는 그 즉시 주님이 다 차지하신다고 믿습니다. 아무리 좋은 친구 좋은 음악이라도 그 안으로는 들여놓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공간을 조금씩 더 넓혀가겠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모든 걸 잊어버립니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렇게 영원을 체험합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