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일행은 눈에 불을 켜고 카이제나크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쟁도시의 위험성을 고려해 따로 다니지 않고 함께 다니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카엘이 멈춰선 것이다. 의아해진 레인은 물었고, 카엘은 평소와는 달리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말하며 검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몹시 긴장된 어조였다. 옆을 돌아보니 유리카도 마찬가지로 몹시 긴장된 표정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움직이지 마."
그제야 일행은 뭔가 사태가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하고 제각기 힐트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아직도 이유를 몰랐기에 크리스티나는 긴장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죠, 카엘?"
카엘은 여전 정면만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루나(Luna)다."
순간 들려진 그 단어에 일행은 저마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루나. 안타리아 어와 시크로치아스 어와의 공통단어 중 하나인 달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달이라니? 지금은 낮인데. 하지만 이렇게 생각할만큼 일행은 멍청하지 않았고, 어떤 사람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런 이름은 흔하지 않았다. 어감이 좋은데도 이상히도 사람들은 저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크로치아스 인인 레인과 크리스티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유니온 역시 카엘의 말을 듣더니 움찔하며 크리스티나에게 설명했다.
"균형을 잡는 자. 쉬피드 나이트(Shepide Knight), 흑태자 칼 스타이너(Kal Styner)와 함께 전 차원계 최고의 검사 중 하나인 루나. 그러나 마법을 사용한다면 오히려 그녀가 더 강할지도 모르지. 또한 그녀의 그 능력은 전사(戰史)에도 기인해 그녀가 이기지 못한 전쟁이 없을 정도다.. 라고 알려져 있지. 한데 루나가 지금 나타났다고..?"
통칭 쉬피드 나이트 또는 균형을 잡는 자로 불리는 루나. 그녀는 말 그대로 균형을 잡는다. 크게 나누어 뫼비우스의 띠를 깨려 하는 쪽과 그대로 이으려는 쪽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이를테면 헬카이트와 카로라쪽인 헤르티아와 아크시온과 자비에르쪽이라 할 수 있는 로브리스, 그리고 나르시스와 베르자드를 받드는 에타이와 일크레드와 울페리온을 받드는 워르 제국의 균형을 맞춘다고도 할 수 있고, 심지어는 헬카이트와 에르지야스의 균형을 맞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녀의 검은 본체 상태의 헬카이트와도 동세, 혹은 그 이상을 이룰 정도며 과거 안타리아에 나타났던 대현자 에스겔(Esgel) ㅡ 신 이상의 마력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로 에스겔력을 만들기도 했던 그 노현자는 파괴의 유스타시아에게 살해당했다 ㅡ 과도 엇비슷할 정도의 마력또한 소지하고 있다. 검과 마나라는 측면에서 전 차원계 최강이라고 봐도 결코 부족하지 않은 실력을 지닌 그녀. 그러기에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것이겠지만.
균형을 잡는 것이고 뭐고 일단은 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약자가 강자의 균형을 잡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그거야 어찌됐든 지금 루나가 나타난 것은 엄밀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카엘은 힐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모두 준비. 저 푸른 머리의 여성이 루나다. 그녀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가지만, 어쨌든 전력을 다해 싸워라. 수를 세지. 3,2,1.. 제로!"
"차앗!"
먼저 나간 것은 유리카였다. 그녀는 날카롭게 외치며 루나를 향해 순식간에 바리사다와 월광검(月光劍)을 뽑아들며 섬광과도 같이 루나에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루나는 뜻밖의 기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눈을 살짝 가늘게 떴을 뿐, 전혀 당황하지 않고 빠르게 허리에서 긴 검을 뽑아 먼저 치고들어온 월광검을 받아쳤고, 어느 순간 바리사다 역시 튕겨지고 있었다. 유리카는 바짝 긴장하며 옆을 흘끗 보았다. 어느새 카엘 역시 공간멸도(空間滅刀)를 휘두르며 루나와 맞아싸우고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나는 전혀 밀리는 기색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가소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기도 했다. '너희 같은 것들이 감히 나에게 티끌만한 상처라도 입힐 수 있을 것 같은가?' 그런 오만한 표정.
진정으로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자만이 지을 수 있는, 절대자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다.
그리고 레인과 캐롯마저 가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형세는 나아질게 없었다. 무슨 생각인지 유니온은 크리스티나를 보호하며 나서지 않았다. 그리고 루나는 순간 모두의 검을 다 튕겨낸 다음 자세를 바꿨다.
'승부를 걸겠다는 말인가.'
카엘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저런 자세는 널리 알려진, 아니. 적어도 차원계의 최상층부에 위치하는 자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자세였다. 수백년 전부터 루나의 기술은 연구되어왔으며 진행자들의 데이터를 모은 카엘도 저 자세를 기록상이긴 하지만 어쨌든 알고 있었다.
루나의 검술은 사실 불규칙했다. 어떤 규칙을 갖고 있지 않은 그녀만의 검술, 어찌 보면 임기응변이라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검술이라 불릴 수 있는 이유는 불규칙해보이면서도 다르게 보면 동작 하나하나가 규칙성을 갖고있는 듯한 무수한 페인트와 날카로움을 갖고 있는 그녀의 검술. 문 크로슬리(Moon Crosslie).
어찌됐든 저렇게 자세를 바꾼다는 것은 이제 승부수를 띄우겠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진정으로 자신들을 상대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들은 1분도 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선수를 쳐야 한다!
그러나 카엘이 그것을 자각한 순간 이미 루나는 자신의 검, 윈터러(Winterer)를 다시금 뽑아들고 일행에게로 쇄도한 상태였다. 첫째 목표는 바로 유리카!
카가가가강!!
"큭!"
저절로 유리카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나왔다. 빨랐다. 그리고, 강했다. 엄청난 쾌검술(快劍術)을 사용하는 그녀조차도 따라가기 힘들 정도의 스피드. 란이라면 따라잡을 수 있을까.
그러나 유리카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록 란이라도 루나를 이기기는 힘들 것이다. 아니, 불가능할 것이다. 경험, 힘, 스피드, 테크닉, 검술, 무의 경지. 모든 것에서 루나는 란을 압도하고 있었다.
허나 지금 상황은 그것을 계속 생각하게 해줄만큼 안이한 상황이 아니었고. 그녀는 힘이 다할 때까지 월광검과 바리사다를 휘둘렀다. 그러나 윈터러는 교묘하게 월광검과 바리사다의 사이를 비집고 순식간에 검들을 날려버리며 손목, 다리, 배에 걸쳐 날카로이 유리카를 헤집어놓았다. 순간 루나의 입가에 짧은 조소가 스쳤다.
고작 이 정도 가지고 나한테 덤볐느냐!
두번째 목표는 캐롯이었다. 캐롯은 마음을 굳게 먹고 캐롯 블레이드를 휘둘러 루나의 공격을 막으려 했으나, 유리카도 막지 못한 쾌검을 그가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단 몇합도 제대로 나눠보지 못한채 캐롯 블레이드가 튕겨져나갔고, 윈터러는 그의 어깨를 거의 날려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 카엘!
"흡!"
카엘은 짧게 숨을 들이쉬며 윈터러를 받았다. 상상도 못할 정도의 충격이 공간멸도를 타고 그의 팔로 전해져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카엘은 공간멸도를 능숙히 컨트롤하며 윈터러의 공세를 흘리며 반격해나갔다. 역시 그래도 일행 중에서는 가장 나은 실력이었다. 그러나 불과 5초나 지났을까, 루나는 갑자기 공간멸도를 비스듬히 흘리며 순간 폭풍과도 같이 카엘을 몰아쳐갔다. 순간 변한 상대방의 페이스에 그는 당황했고, 루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카가강! 윈터러는 공간멸도를 튕기며 카엘에게 쏘아져나갔고, 카엘은 운좋게 그것을 방어할 수 있었다.
'후우, 후우.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이미 내 페이스를 완전히 읽어버린 건가?'
그러나 루나는 이 잠시의 틈도 놓치지 않았다. 윈터러로 더욱 날카로운 공격을 펼치며 카엘을 정신없이 수세로 몰아붙였다. 이제 그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단 몇초도 남지 않았다. 카엘은 결심했다. 공간멸도가 긴 호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카엘은 숨을 헐떡였다.
'내 최강의 기술인 공(空)을 공간멸도로 날렸음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다니.. 과연 놀라운 자군, 루나..'
마찬가지로 일행도 경악하고 있었다. 비록 겉으로는 잘 내비치지 않았지만.
'과연 루나, 역시 덤빈것 자체가 무모한 것인가?'
유리카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에서 땀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루나가 이곳에 온 것은 간단하다. 이곳에 그녀가 관심을 가질만한 존재, 즉 균형을 무너뜨릴만한 존재는 자신들과 카이제나크 외엔 없었다. 그러나, 이 둘 중 어느 쪽도 죽어서는 자신들에게 불리했다. 그래서 카엘도 같은 생각을 하고 루나에게 공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그리고 고운 푸른 머릿결이 허리까지 닿는 전 차원계 최고의 검사, 루나는 천천히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