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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과 진정으로"에 대해 검색해보다가 어떤 분의 블로그에 있는 글을 발견했는데,
헬라어 원문을 풀어서 설명을 하시는데, 그동안 제가 익숙해 있던 설교 말씀과 상당히 달라서 여쭙니다.
출처는 http://blog.daum.net/lwman/14135411 인데,
일단 양무리마을 안에서 검색해본 결과 "성령과 진리안에서"라는 해석이 바른 해석인것 같은데,
이분의 나머지 글도 개혁주의 신학에 비추어 볼때 바른 해석과 적용인지 궁금합니다. (특히 마지막 부분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다”(요4:24) - 어떻게 예배한다는 것인가?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하
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 라는 주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예배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는 본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요한복음 4장의 몇
구절들을 들 수 있습니다. 이 구절들은 많은 교회의 주보 예배순서에 적혀 있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자주 이
구절을 인용하여 “예배는 이렇게 드려야 하는거야”라는 식으로 말하기 위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어떻게 예배한다는 뜻입니까? 실제로 이 말을 많이
쓰고는 있지만, 이 말의 의미를 알고 사용하고 있습니까? 이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막
연하게 많은 사람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것을 “소위 영적으로(신령과), 그리고 정성을 다하여(진정으로)” 드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글성경이 그렇게 보이도록 번역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지금 과연 이 본문 속에서 우리에게 “너희는 예배 드릴 때 영적으로(사실 이 영적인 예배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서 예배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문제는 사실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 원문만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불행히도 이 땅에 원어를 한 번 들춰보지도 않고
설교하는 사람들이 많아 모를 뿐이지, 내용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우리네 교회 행태의 중요한 부분을
반성할 수 있는 요소도 들어 있습니다.
원
문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라는 말은 “엔 프뉴마티 카이 알레떼이아”입니다. ‘엔’은 영어의 ‘in’ 에 해당하는 전치사이고,
‘프뉴마티’ 와 ‘알레떼이아’는 각각 ‘성령’ 과 ‘진리’ 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 두 단어는 출현빈도가 낮은 단어가 아닙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이 나오는 단어입니다. 헬라어에서 ‘영’, ‘성령’ 등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단어가 ‘프뉴마’입니다. 단어 자체에
대한 상세한 뜻을 주해하지 않더라도, 그냥 단순하게 말해도 이 단어는 ‘성령’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알레떼이아’ 역시 자주
등장하는 단어로서 보편적으로 성경에서 ‘진리’라고 할 때 거의 ‘알레떼이아’를 씁니다. 두 단어 모두 신학교에서 헬라어를 처음
배울 때 배우는, 즉 초급단어들입니다. 여기에는 복잡한 무언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잘 살리면서, 그리고 전치사까지 살리면서 번역을 하면 이 말은 “성령과 진리 안에서” 가 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배할 때 “성령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표현 안에 소위 말하는 “영적으로” 예
배를 드린다는 개념이 있습니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 ‘신령과’라는 말을 어떤 신비적인
느낌으로 이해하는 듯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신령과’를 이해했을 때, 그 사람의 예배는 무언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체험을 찾으려는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성경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 단지 “성령 안에서”라고 말씀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예배는 어떤 공중에 떠다니는, 혹은 마음 속에서 영적인 어떤 기운이 흘러나오게 되는 그런 종류의 예배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성경에서 성령 안에 있다는 말은 이런 신비적 체험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표현 안에 “진심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개념 역시 있습니까? 한글 번역의 “진정으로” 라는 말은 오역입니다. 이 말씀은 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방금 말씀드린 대로 이 단어는 “진리 안에서”라는 의미이지, “진심으로”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이해 역시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기존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다”라고 말할 때는 주로, “예배의 태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기를 원하신다”고 하면, 무언가 좀 더 영적인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그리고 무언가 더 진심어린 태도로 예배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단어들의 본래 의미는
“예배의 태도”와 관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배의 속성”, “예배의 본질”과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성
령과 진리라는 말은 한 전치사 아래 묶어져 있기 때문에 두 단어는 같은 것을 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용례와 성경
전체의 어법에 의하면 “진리”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그리고 요한의 용례에서 '진리'는 '그림자',
'모형'의 반댓말입니다). 글이 복잡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본 글에서는 “성령 안에서”라는 표현에만 주목해서 글을 전개해
보도록 합시다("진리 안에서" 부분은 다음에 다룰 기회가 있으면 해 보겠습니다).
“성
령 안에서” 예배한다는 말은 사실 이해하기 굉장히 어려운 표현입니다. “성령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가 매우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실 “성령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그리고 한 번도 하나님께서 “자! 이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이다”라고 보여주신 적이 없기 때문에, 즉 모델이 없기 때문에 무엇이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인지 잘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앞에서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신령한 예배’를 상상하는 사람들은 어떤 신비적 체험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이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에 관하여 두 가지 정도 중요한 유추를 해낼 수가 있습니다.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의미를 명확히 경계 지을 수 있는 중요한 유추입니다.
첫
째로, 우리는 이 말씀이 씌어져 있는 방식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23절과 24절에서 두 번 연이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24절 곧 우리가 이 글에서 제목으로 삼은 절에서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의 예배를 이렇게
정의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예배하는 자가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할 근거를 어디에서 두셨는고 하면,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사실”에 두었습니다.
헬라어 단어로도 두 단어는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프뉴마 호 떼오스), “성령 안에서 예배한다”(엔
프뉴마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 안에서 예배해야 하는 이유를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사실”에 두었습니다. 즉, 이 말씀은 “하나님이 영이시니까 너희도 영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 의미는 대단히 명확해 집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사실은 “육체가 아니시다”,
“인생이 아니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 안에서 놓고 보면, 하나님께서 영이시므로 너희도 “영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본성적으로 좇는 육체적 방편들로는 예배드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너희는 성령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내용은 무언가 신비적인 차원에서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인간이 원하는, 인간이 좋아하는, 인간의 방편을 가지고 드리는 예배와 달라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칼빈 역시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하기 때문에 이 부분을 주해하면서 이런 식으로 썼습니다.
“인
간은 육신이기 때문에 인간이 그의 성품에 맞는 것에 탐닉하는 것은 놀라울 것이 없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피상적인 의식으로 가득찬 것을 여러 가지 발상해 낸다. 우리는 물이 불과 상종하지 않는 것처럼 육신과 도저히 통할 수 없는
하나님과 상대하고 있음을 우선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에 관심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너무나
상이하기 때문에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주님께서 싫어하시고 지루해 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 마음의 방탕함을
억제하는 데 족할 것이다” (칼빈 주석 중, 요한복음)
칼빈은 이 요한복음의 구절을 “로마 가톨릭 예배와 완전히 상충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가톨릭의 예배야말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적인 예배라기보다, “사람들이 원하는”, “육체가 원하는 것으로 가득찬”
눈에 보이는 것을 만족케하는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로마 교회는 이 말씀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나쁜 예입니다.
그
렇다면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이 말씀이 적용되지 않습니까? 제가 생각하기로는 오히려 중세의 교회보다 지금의 교회들이 이것에 더욱 더
대담하게 나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 없는 예배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대담하게 도입합니다. 그리고 그 도입이라는 것이
대부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꼬?”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흥미를 가질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지루해하지 않을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유익해하는 예배가 될지.....온톤 이것에 관심이 쏠려 끊임없이 예배에
새로운 것들을 장착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정확하게 “성령 안에서” 혹은 “하나님이 영이시므로 영적으로 드리는” 예배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선배들은 이 사실을 잘 이해했기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1장 “종교적 예배와 안식일”에 정확하게 이 사실에 대해 정립해 두었습니다.
“.....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합당한 방법은 그 자신이 친히 제정하셨고, 그 자신의 계시된 뜻에 의해서 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떤
가견적인 구상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상상이나 고안 또는 사탄의 지시에 따르거나 성경에 규정되어 있지 않은 다른 방법을 따라서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가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21장 1항)
웨
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우리가 예배를 위해 “무언가를 고안해 내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오로지
“성경에 규정된”,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예배의 앞부분에 함부로
찬양집회를 끼워 넣고, 설교 앞에 꽁트나 스킷 드라마를 끼워 넣고, 연말에는 예배를 촛불을 켜놓고 온갖 잡다한 예식을 하는 행사로
만들거나, 심지어는 예배 시간과 간증시간을 구분하지 못하고, 예배시간에 패션쇼를 하기도 하고, 예배시간에 사람들의 장이 되어
서로 인사를 하거나, 특송이라는 명목 하에 노래자랑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사람들을 위한 순서들”을 끼워 넣은
것입니다. 왜 이런 일들을 행하기 전에 적어도 대부분 교회들의 신조로 되어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조항 한번 뒤적여 보지
않았을까요? 왜 성경이 예배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규정하고 있는지 검토 한번 해보지 않았을까요? 철저하게 현금의 한국교회들은 단지
“실용적”입니다. 효과가 있으면 무엇이라도 합니다.
그러면 끝으로, 성령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에 관하여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봅시다. “성령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성령이 그 속에 계신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점에 주목해 봅시다. 즉 불신자는 예배가 불가능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려면 반드시 성령 안에서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예배라는 것이 “신자에게만” 가능한 것임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그
런데, 오늘날 우리들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예배 안에 불신자가 많을수록 더 좋아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중 누구든지, 교회의 예배에
불신자를 데리고 와서 함께 예배드리려고 할 때, 교회로부터 제제를 받는 교회에 다니는 분이 계십니까? 오히려 쌍수를 들어
환영합니다. 예배는 어디로 갔습니까? 불신자가 함부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들어오는 것은 주님의 이 말씀을 침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에 관하여 전혀 아무런 선이해가 없습니다.
실제로 제가 교회에 대해 배우기 위해서 독립개신교단에 속한 교회의 예배에 참석했을 때 이런 권면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저는 예배를 집례하는 분으로부터 이런 제제를 받았습니다.
“손님으로 오신 분들은 본 교회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극히 조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런 대우를 처음 받아본 저는 몹시 놀랐지만, 곧 이들이 예배에 대해 철저하게 이해하고 있고 실제로 그렇게 시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이 교회 뿐 아니라, 유럽과 아메리카, 호주의 개혁교회들은 이 내용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단지
한국교회들과 세계의 현재 대중화된 추세가 그것을 잊어버렸을 뿐입니다.
통
상적으로 우리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것의 중요성을 생각하기보다, 새로운 사람을 데리고 오는 것을 더 중하게
여깁니다. 교회의 분위기를 가만히 보십시오. 오늘날 대다수의 교회들(소위 부흥한다는 교회들은 더 그렇습니다)은 온통 관심이 어디에
쏠려 있습니까? 얼굴이 낯선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면 모든 촉각이 그리로 곤두섭니다. 하나님께 예배해야 할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어떤 새 사람이 들어와 교인수를 늘려줄지에만 목을 매는 것입니다.
그
러다보니 예배 안에 불신자가 들어오는 것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는 것은 아예 개념조차 없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신자들을 아무런 제제 없이 그 테두리 안으로 들어오게 한 예는 거의 없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신자인 사람과 아닌 사람에 대한 선이 매우 엄격했고, 정확한 신앙고백을 거치지 않으면 신자의 테두리 안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현
재의 우리는 아무런 규제가 없는 가운데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에서 주님의 명령을 매 주일마다 어기고 있습니다. 수많은
“성령 없는 사람들”이 예배 시간에 함께 몰려와 “주님의 몸이 아닌데도 같은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예배하는 듯이” 앉아 있는
것입니다.
모
두 다 그렇게 하고 있는 상황에서 현실적인 대안은 필요할 것입니다. 전도 받은 사람들은 예배외의 전도집회 등에서 따로 모여 신자가
될지 여부를 결정케 하거나, 아니면 예배 안에 들어올지라도 예배당 안에 손님석이나 관람석을 만들면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예배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예배의 중요성은 성도된 자들이 지키려 할 때에만 지켜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예배의 중요성보다는 교회에 새사람이 오는 것만을 더 중시하는 풍조에서는 예배의 정체성 자체가 고수될 수
없습니다. 실로 예배드리는 자리 안에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사람들”이 끼어있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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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입니다
저의마음이 뜨거워 지는군요
우리가 하나님께 참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도 참예배를 정확히 모르고 예배를 드릴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신령과진정으로(성령과 진리로)예배를 드리는것을 올바로 배우고 알아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글쓰신분이 지적하신것처럼 지금은 온통 사람들에게 집중되어져있는 예배가 너무나 많이 행하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예수안에서 성령안에서 드려져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산 예배라고 확신합니다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우리의 현실을볼때에 과연 어떻게 해야하나........글쎄요.....
사람을보면 차별하는것같아 이상할것같고 .....
하나님측에서 보면은 이방식이 올바른방식 같기도 하고 .... 아~힘드네요
워낙 이런식으로 관행처럼 예배가 드려져서 무었이 옳고 그런지......
제가 볼 때에는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은 어느 부분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성령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성령이 그 속에 계신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점에 주목해 봅시다. 즉 불신자는 예배가 불가능합니다!
와
“손님으로 오신 분들은 본 교회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극히 조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두 문장 부분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이 부분이 좀 문제의 소지가 있기는 하겠습니다.
고넬료의 경우 성령의 내주 전에도 그는 경건생활을 주님은 인정하시고 그의 기도를 듣고 계셨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불신자의 상태라면 모를까.
회심의 과정에 있는 구도자들까지 적용하는 것은 자칫 논란의 소지가 생길 것이라 생각됩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로빈슨코로소님.
저도 "불신자는 예배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기에 "불신자가 함부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들어오는 것은 주님의 이 말씀을 침해하는 것입니다"라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다만,
"전도 받은 사람들은 예배외의 전도집회 등에서 따로 모여 신자가 될지 여부를 결정케 하거나,
아니면 예배 안에 들어올지라도 예배당 안에 손님석이나 관람석을 만들면 될 것입니다."라고 적용하는 문제에서 조금 갸우뚱 했습니다.
옳은 말씀인것 같기는 한데, 현실적으로 적용하는 과정에서 말씀하신데로 논란이 생길수 있을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