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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라와 바락의 노래 2
삿 5:13-23
13 그 때에 남은 귀인과 백성이 내려왔고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용사를 치시려고 내려오셨도다
14 에브라임에게서 나온 자들은 아말렉에 뿌리 박힌 자들이요 베냐민은 백성들 중에서 너를 따르는 자들이요 마길에게서는 명령하는 자들이 내려왔고 스불론에게서는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들이 내려왔도다
15 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 하니 잇사갈과 같이 바락도 그의 뒤를 따라 골짜기로 달려 내려가니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
16 네가 양의 우리 가운데에 앉아서 목자의 피리 부는 소리를 들음은 어찌 됨이냐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
17 길르앗은 요단 강 저쪽에 거주하며 단은 배에 머무름이 어찌 됨이냐 아셀은 해변에 앉으며 자기 항만에 거주하도다
18 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 납달리도 들의 높은 곳에서 그러하도다
19 왕들이 와서 싸울 때에 가나안 왕들이 므깃도 물 가 다아낙에서 싸웠으나 은을 탈취하지 못하였도다
20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
21 기손 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 이 기손 강은 옛 강이라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
22 그 때에 군마가 빨리 달리니 말굽 소리가 땅을 울리도다
23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주민들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
삿 5:13-23 / 그때에 남아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지도자들을 따라나섰네. 여호와의 백성이 모두 다 용사가 되어 여호와 편에 서서 싸우러 나섰네. 14)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계곡으로 뛰어 내려가고 그 뒤를 따라나서는 이들은 베냐민 지파, 마길에서 군사령관들이 내려왔고 스불론에서 지휘봉을 거머쥔 이들이 내려왔네. 15) 잇사갈의 지휘관들이 드보라와 한편이 되었네. 그래, 잇사갈이 드보라편에 선 것처럼 바락도 드보라편에 섰지. 계곡을 향하여 폭풍처럼 내달렸던 이 전사들! 하나 르우벤 지파는 입씨름만 벌이고 있을뿐 싸우러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말았네. 16) 어찌하여 양떼 틈에 끼여 앉아 우물쭈물거리는가? 어찌하여 주저앉아 목동이 불어 대는 피리 소리에 취해만 있는가? 답답한 르우벤 지파는 입씨름만 벌이고 있을뿐 싸우러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춤거리고만 앉아 있지. 17) 길르앗 지파는 요단강 건너편에서 건너올 생각조차 못하고 단 지파 사람들은 남의 나라 배나 타고 다니며 장사나 하고 있지. 아셀 지파는 해안가에 자리잡고 눌러 앉아 움직일 생각일랑 아예 뒷전으로 밀어 두고 있을뿐 18) 하나 스불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는 혼신의 힘으로 목숨까지 내걸고 싸움터에서 싸웠다. 19) 왕들이 몰려들어 싸움을 벌이는구나. 가나안을 지배하는 여러 왕들이 므깃도 물가 다아낙에서 있는 힘 다하여 싸워 봤지만 생기는 것 아무것도 없는 허망한 싸움이었을뿐 20) 별들도 하늘에서 싸우는구나. 시시각각 자리를 옮겨 나가듯 하늘의 별들도 시스라에 대항하여 싸움을 벌였다. 21) 기손 시내가 흘러 넘쳐 저 무리를 휩쓸었다. 기손 시내에 큰물이 나서. 가자, 가서 저 원수를 향해 있는 힘 다하여 짓밟자. 22) 아, 군마가 질풍같이 내달려오는구나. 그 말발굽 소리에 온 땅이 흔들흔들. 23) 여호와의 심부름꾼이 이르시는 말씀. 메로스야, 저주받아라. 이 망할 것들아, 저주받아라. 여호와를 도우러 나오지도 않는구나. 여호와를 도우러 용사들과 함께 나오지도 않는구나.
드보라는 이스라엘을 곤경과 압제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한 후, 시스라와의 전투에서 하나님께 신실했던 사람들과 충성하지 않았던 지파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남은 귀인과 백성들이 내려왔고(13-18) 드보라와 바락이 이스라엘 군인들을 불러 모을 때 드보라의 지파인 에브라임과 마길의 베냐민 지파, 므낫세와 바락의 스불론과 잇사갈 지파가 충성하였고 죽음을 무릎쓰고 전쟁에 임했습니다. 그러나 그 외의 다른 지파들은 협력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야빈 왕에게 고통받았던 르우벤 지파는 목축업에 적합한 요단 동쪽 땅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전쟁에 아랑곳하지 않고 목초지에서 피리 소리를 들을 정도로 한가로운 생활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는 듯 했지만, 결국은 전쟁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갓 지파는 아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단 지파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욥바 항을 통하여 주변의 나라와 물물거래, 국제무역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아셀 지파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다볼 산과 기손 강에서 가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외면한 채 지중해에서 그들의 생업인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의 경제활동과 공동체를 지키는 일을 하나님의 부르심보다 중요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충성하는 지파의 모든 백성들에게 강림하셨고 이스라엘을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19-23) 왕들은 가나안 왕 야빈과 시스라가 연합하여 이스라엘에 쳐들어온 사실을 다시 말해줍니다. 므깃도 물가는 기손 강을 가리킵니다. 야빈과 시스라는 전투에서 패배하였기에 어떤 전리품도 가지지 못하고 완전히 패배하였습니다. “별들이 하늘에서 싸웠도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자연계를 간섭하시며 바람과 폭풍우를 동하여 시스라의 군대와 싸우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시스라의 군대는 폭풍우에 일어나 기손 강에서 몰살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항상 준비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신명기와 여호수아에서 “발바닥으로 밟는 모든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신 1:36; 11:24; 수 1:3). 이 말씀이 이루어진 승리였습니다. 한편 본 단락에서 메로스가 저주받은 것은 그 곳 주민들이 하나님의 일에 협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의무와 이웃 사랑에 대한 의무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적용: 당신의 이득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분의 약속에 충실하며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당신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축복은 육신이나 물질의 소욕일지라도 채우거나 즐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영원한 구원을 목적으로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으로 가는 길에 육신이 지치지 않도록 만나와 생수를 준비해 주십니다. 이러한 하늘에서 내린 만나와 바위에서 솟아난 생수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긍휼이 여기시기에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은 육신은 가족과 이웃에게 그 긍휼함을 베풀어야 합니다.
< 설 교 >
인생 승리의 3대 요인
이한규 목사 / 사사기 5장 14-23절
1. 최대한 협력하는 삶
하솔 왕 야빈의 군대장관인 시스라와의 싸움에는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스불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 외에 에브라임 지파, 베냐민 지파, 므낫세 지파도 참여했다(14절). 잇사갈 지파도 이스라엘의 해방 전쟁에 참여했다(15절). 그처럼 몇몇 지파가 최대한 협조했지만 방관했던 지파들도 있었다. 특히 르우벤 지파는 참전과 관련된 격렬한 토론 끝에 양의 우리에서 목자의 피리 소리가 들릴 정도로 평안하게 전원생활을 즐기고 결국 참전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15-16절).
길르앗에 거주하는 갓 지파와 배를 이용해 무역하던 단 지파와 해변 지역에 살던 아셀 지파도 참전하지 않았다(17절). 소중한 뜻을 세울 때 다 그 뜻에 동참하면 좋겠지만 그렇게 안 될 때도 많다. 그런 상황이 닥쳐도 상처나 충격을 받지 말고 뜻을 함께 한 사람끼리 최대한 협력하라. 동참하는 숫자가 적어도 실망하지 않고 자신만이라도 거룩한 비전에 최대한 협력하면 인생의 의미와 보람도 커지고 공동체에서의 영적인 축복 지분도 커질 것이다.
2. 최선을 다하는 삶
시스라와의 전쟁에서 스불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는 선봉에 서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다(18절). 그래서 가나안 동맹군들이 이스라엘 연합군과 므깃도 물가 다아낙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그 전쟁에서 이겨서 전리품을 취하기는커녕 오히려 패배했다(19절). 그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의 자세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도 도와주신다. 또한 하나님은 기손 강을 범람하게 해서 시스라의 철 병거와 군대가 오도 가도 못하게 함으로 이스라엘이 강력한 시스라의 군대를 격파할 수 있었다(21-22절).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는 성도에게 최선의 길을 열어주신다. 주어진 의무를 행하려는 자세도 없이 행운에만 의지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 기회를 최선을 다해 살리라.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워서 훈장을 많이 받은 사람이 고향에 돌아와서 매일 술로 보낸다면 복된 모습이 아니다. 싸움에서 적군을 다스릴 능력은 있었지만 자신을 다스릴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삶에서 어떤 시련이 있어도 힘을 잃지 않고 자기 사명을 따라 용기 있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복된 모습이다.
3. 어려울 때 돕는 삶
본문 23절에서 왜 메로스를 저주하라고 거듭 말했는가? 그들이 여호와를 돕지 않고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명을 따라 전쟁에 나가는 사람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지 말고 최선을 다해 협조하되 특히 어려움을 당했을 때 힘써 도와야 한다. 그러면 반드시 큰 축복과 보상이 있다.
주변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축복을 위한 거룩한 미끼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원하면 그를 돌보고 그의 이웃이 되어주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미끼를 덥석 붙잡으라. 고통당하는 자가 있으면 하나님이 주신 감동을 따라 남이 도움의 손길을 펴기 전에 내가 먼저 펴려고 하라. 그런 축복의 전주곡을 흘려보내고 다른 곳에서 축복의 길을 찾아 헤매지 말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우면 내가 그의 축복의 통로가 되면서 동시에 거꾸로 그가 나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신비한 역사가 펼쳐진다.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
사사기 5:20-24
지난 번에 우리는 바락이 드보라의 지도를 받으면서 믿음으로 행하여 마침내 철병거 900대를 거느리는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를 이기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시스라는 홀로 도망쳐서 겐 사람 헤벨의 아내의 장막으로 들어갔다가 헤벨의 아내 야엘의 손에 죽었습니다. 너무나 지쳐 있던 시스라는 따스한 우유를 마시고 깊게 잠이 들었는데 야엘이 밖에서 장막 말뚝을 뽑아와서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대고 방망이로 내리쳐 그 말뚝이 그의 관자놀이를 뚫고 땅에 박혔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 날에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하게 하셨습니다”(삿 4:23). 그렇게 하여 이스라엘은 20년의 학대를 벗어나 40년 동안 태평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사사기 5장은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감사하며 드보라가 노래를 지어 주께 올린 찬양입니다. 이때 드보라는 그 노래를 바락에게 주었고 바락은 모든 주의 백성이 이 노래를 부르게 하였습니다.
드보라의 노래의 특징은 지도자와 백성이 서로 호흡이 잘 맞았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가나안 왕 야빈과 그의 군대장관 시스라를 이기는데 있어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역사로 이겼지만, 이스라엘 공동체는 일사불란하게 영도자를 중심으로 움직였습니다.
드보라는 하나님과 교통했고, 바락은 드보라와 교통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의 영솔자들이 바락과 교통했습니다. 그리고 각 지파의 백성은 그들의 영솔자를 따랐습니다. 그렇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이 노래가 강조하며 드높인 내용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2절은 “이스라엘의 영솔자들이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고 노래를 시작합니다.
사사기 4장 10절을 보면, 바락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여선지자 드보라와 함께 전장으로 가게 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어서 매우 든든해합니다. 드보라와 함께 시스라가 있는 북방 게데스에 도착하자 바락은 곧바로 군사를 부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무섭고 강한 철병거 900대가 있는 시스라 군대와 싸우겠다며 스불론과 납달리에서 만 명이 모여들었습니다. 이 만 명은 그 당시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군사로 모인 자들은 바락을 믿고 모인 것이고, 바락은 드보라를, 그리고 드보라는 하나님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사실 그들 모두는 하나님을 믿고 그 전쟁에 참여하여 주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스라와 싸워 이긴 이스라엘 군사는 하나님께 철저하게 헌신된 가운데 주께서 세우신 지도자의 말을 따라 철저하게 순종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지금 이 표현은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 앞에 지은 노래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
2 그가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추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에 강림하셨고 그의 오른손에는 그들을 위해 번쩍이는 불이 있도다
3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의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
](신 33:1-3)
즉, 드보라는 하나님께서 모세가 시내 산에 있을 때에 율법을 주시기 위해 강림하신 것처럼, 이번에는 다볼산으로 하나님이 강림하셔서 원수 시스라와 그의 연합 군대를 멸망시키셨다고 노래합니다. 주께서 친히 다볼산에 임하시고 기손 강에 비를 내리심으로 믿음으로 순종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승리를 주신 것입니다. 이에 다볼산은 과거의 시내산처럼 진동했고, 하늘에서는 마치 노아의 홍수 때처럼 폭우가 내렸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때처럼 그 비로 주의 백성은 구원하셨고 주의 원수를 향해서는 엄중한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그 심판 때에 천사들이 동원되었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자연계를 물리적으로 다스리며 운행합니다. 이에 20절 이하에 하나님의 심판의 상황이 묘사 되어 있습니다.
20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
21 기손 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 이 기손 강은 옛 강이라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
삿 5:20-21 / “바락이 그의 병거들과 군대를 추격하여 하로셋학고임에 이르니 시스라의 온 군
나아가 그 날의 시스라 군대를 향한 완전한 승리로 인하여 하나님과 주의 백성을 대적하던 가나안 땅 전역의 연합 군사의 왕이던 야빈과 모든 주의 원수들이 다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서 40년의 태평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23 이와 같이 이 날에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하게 하신지라
24 이스라엘 자손의 손이 가나안 왕 야빈을 점점 더 눌러서 마침내 가나안 왕 야빈을 진멸하였더라
](삿 4:23-24)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사탄의 도구로 쓰이는 교회의 원수들을 향해 승리하려면 무엇보다 질서가 가장 중요합니다. 상위 질서가 죄를 요구하거나 자명한 주의 뜻을 거스르는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면 하위 질서는 반드시 상위 질서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겸손이고, 그것이 하나됨의 비결이며, 그것이 교회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하나님과 함께 어둠과 악과 마귀를 이기는 요인인 것입니다.
한편, 바락이 초기에 믿음으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때, 그는 그가 누릴 영광을 야엘이라는 평범한 여인에게 빼앗겼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를 쓰시고자 하실 때 발 뺌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이 막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 세상에 가장 약한 것을 사용하시더라도 자신의 일을 이루시고 그 영광을 그 약한 것에게 주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 누구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야, 나를 몰라 보다니!’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러한 교만한 자들 없이도 얼마든지 약한 자, 가난한 자, 천박한 자를 통해서 전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7-29
물론 바락은 초기에는 믿음으로 행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여선지자를 따라 믿음으로 행하였기 때문에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의 영웅에 그가 들어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늦게라도 정신 차리고 다시 믿음 가운데 순종한다면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를 보면 하나님 나라에 동참한 자와 그렇지 않는 자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한 자들은 한없는 영원한 영광을 누리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비참 가운데 버려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사기 5장은 믿음으로 나아가는 드보라와 바락을 따르는 무리를 열거하고 그리고 따르지 않는 무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갔을 때에도, 주의 나라의 일에 동참한 자들과 동참치 않은 자들이 기록될 것을 의미합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의 전쟁에 가장 먼저 참여한 일 만명의 무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여선지자이며 여사사인 드보라를 통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매우 복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반응은 철저한 믿음의 반응이었기 때문에 영원한 영광에 들어갔습니다.
6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7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셨느니라
(삿 4:6-7 /
그리고 바락은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철병거 900대를 가지고 있는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연합 대군을 이깁니다. 이들 만명은 죽음을 무릅쓰고 드보라와 바락에게 순종하였습니다.
“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 납달리도 들의 높은 곳에서 그러하도다”(삿 5:18).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순종을 보시고 천사들을 통해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폭우와 우뢰와 천둥을 내리셔서 시스라의 군대를 뒤엎으셨습니다. 그래서 일만명의 바락의 군대는 그들이 남겨 놓은 무기를 취하여 그들을 뒤쫓아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이들 스불론과 잇사갈 사람으로 구성된 만 명의 군사에 동참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에브라임, 베냐민, 마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뒤 늦게 전쟁에 동참했지만 동일한 승리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한편, 드보라의 시에는 하나님의 나라 전쟁에 동참하지 않은 무리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망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약삭빠른, 믿음 없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한 어리석은 지파로는 르우벤, 길르앗, 단, 아셀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불신하고 지도자 드보라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희생하기가 싫었으며, 적이 두려웠고, 하나님 나라의 승리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축복을 전혀 받지 못하는 가문과 후손들이 된 것입니다.
먼저 우리 주 하나님의 거룩한 싸움에 동참하지 않은 르우벤을 보면,
“네가 양의 우리 가운데에 앉아서 목자의 피리 부는 소리를 들음은 어찌 됨이냐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삿 5:16)라고 합니다. “큰 결심이 있었도다”는 큰 오역입니다. “끝까지 결심을 하지 않았다”라고 해야 바른 번역입니다.
아무튼 르우벤 지파는 전쟁 소식을 듣고도 평안한 목자의 생활에 안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지파들이 전쟁의 나팔 소리를 듣고 모두들 참전하여 생명을 걸고 싸우는데 편안히 피리를 불며 결말이 어떻게 될지 지켜 보았습니다. 즉, 20년 동안 이스라엘을 박해해 온 시스라의 900대의 병거가 지지 않고 이길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며, 바락의 군대와 싸울 때 어떻게 될지 단지 탁상 공론(卓上空論)만을 벌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사실 “양의 우리 가운데 앉아” 있었습니다. 이는 르우벤 지파가 많은 가축을 소유하고 있었고 그들의 사업은 날로 번창하였던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즉, 하나님이 이런 전쟁의 때에 함께 동참하여 힘이 될 수 있도록 물질적인 복을 주셨건만, 르우벤 지파는 주께서 주신 복을 하나님 나라의 승리와 확장에 기여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복은 무용가치가 되었습니다. 즉, 영원한 기업을 얻지 못한 복이 되었기에 이 땅에서 썩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 거룩한 전쟁에 동참하지 않은 지파는 길르앗이었습니다. 그들은 요단 강 동편에 거하던 므낫세 반 지파와 갓 지파, 그리고 르우벤 지파입니다. 그들은 요단 강을 건너오기만 하면 우리 주 하나님의 전쟁에 동참하여 거저 주시는 승리와 영원한 영광을 얻을 수 있었는데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단 지파 역시 배가 있었는데 전쟁에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배는 단 지파가 무역을 하며 장사를 풍성하게 하던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 배로 이 거룩한 전쟁에 물자를 대며 도움을 줄 수 있는 여력이 있었지만 돕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왜 있게 되었는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망각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왜 있습니까? 가나안 족속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그 땅에 세우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거룩한 전쟁을 믿음으로 치러 원수들을 물리쳐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싸움을 포기한 것입니다. 심지어 싸울 수 있는데도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단 지파가 그런 지파였습니다. 그들은 이기심과 불신앙에 젖어 거룩한 전쟁을 치를 영광스런 기회가 왔음에도 놓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새언약 시대의 우리의 싸움은 거룩의 싸움입니다. 즉, 죄와의 싸움입니다. 악령들과의 싸움입니다. 어둠의 세상에 속한 거듭나지 않는 자들과 빛과 진리로 싸우는 싸움입니다. 결코 내 안에 있는 죄와의 싸움을 게을리하지 않기 바랍니다.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 거룩한 전쟁에서 늘 승리하기 바랍니다.
한편, 아셀 지파는 해변에 앉으며 자기 항만에 거주했습니다. 그 지파는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에 연접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로 곁의 주의 백성이 위기 가운데 전쟁을 치름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들은 먹고 사는 문제에 연연하며 자기 안전을 위해 주의 나라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비겁함의 극치를 보였고 사랑 없음을 보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 없음과 충성 없음을 증거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드보라는 메로스를 저주합니다.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주민들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삿 5:23).
드보라가 승리를 얻은 후에 바락과 함께 부른 이 노래는 야엘을 축복하고 메로스를 저주하고 있습니다.
메로스는 기손 강 근처의 마을입니다. 즉, 그들은 전쟁이 벌어지는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전쟁은 정보가 가장 중요한데, 메로스 사람들은 시스라와 그의 연합 군대에 대한 많은 정보를 바락에게 건네 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의 성패가 직접적으로 자신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 어떤 이스라엘 지파보다도 가장 먼저 스불론과 납달리를 도와서 참여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로스 사람들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어떻게 그렇게 어리석고, 안일하고, 게으르고 악한지요! 어쩌면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900대의 철병거가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시스라를 도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즉, 가룟 유다와 같은 짓을 한 이스라엘 주민이 바로 메로스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적인 주의 교회 안에 있지만, 교회를 무너뜨리는데 가장 앞서는 자들! 그들이 바로 메로스입니다. 그들은 간첩과 같은 자들이고, 가룟 유다 같은 자들이고, 아간과 같은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저주가 선포됩니다. 이는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도와 적군을 무찌르는데 도움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메로스 사람들과는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적군의 장수 시스라를 죽인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있습니다. 그 여인은 주의 전쟁에게 가장 큰 공을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영원한 칭찬과 영광의 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 사역과 하나님 나라의 일에 동참한다는 뜻은 어려울 때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러한 고난에의 동참에는 함께 나누는 영광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영적 원칙입니다.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고난보다는 재미만 보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고난이 보이면 ‘날 살려라’하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이런 신자들은 우리 주님 다시 오실 때, 그분의 영원한 영광에 동참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편안한 환경 속에 거하는 것은 누구든지 합니다. 그러나 동참의 영광이 없습니다. 이 땅에 복음적인 참된 교회가 서기까지는 언제나 거룩한 전쟁을 치른 고난과 수고한 손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주를 바라며 수고한 모든 손길에 반드시 수천배로 갚으십니다. 주님 오실 때의 영광이라는 것은 이 땅에서 우리가 주를 위하여 수고하는 수고와 영원히 비례할 것입니다.
이 시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동참의 영광이란, 고난에 동참할 때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 교회를 통해 섬김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드보라의 노래를 보면, 마무리 부분에서 시스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주의 백성의 원수의 배후에는 뱀, 즉 사탄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이 세상 역사 가운데 왕이나 어떤 인물을 세워서 주의 백성을 노골적으로 박해하여 망하게 하고자 합니다. 그런 마귀의 조종을 받는 인물을 성경은 적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구약에도 주의 백성을 박해하는 적그리스도가 있었고, 신약에도 있었습니다. 신약에서는 이미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후기 때문에 주의 복음을 변조시켜서 구원을 얻지 못하도록 하는 진리 싸움 속에서 적그리스도가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역사 끝에 주의 재림 직전에 불법의 아들이라고 하는 한 인물이 등장할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모방한, 즉 사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인류 역사 가운데 나타난 어떤 짐승일 것입니다. 어떤 간교한 정치가이며 동시에 거짓 선지자를 거느리는 전 세계적인 어둠의 대표일 것입니다.
신기한 것은 이 거룩한 싸움을 19절을 보면 시스라를 중심으로 한 가나안 왕들과의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장소가 므깃도입니다. 놀랍게도 므깃도는 계시록에서 아마겟돈으로서 그곳에서 인류의 마지막 전쟁이 치러집니다. 그 전쟁은 마지막 적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든 열왕들이 모여있고, 그리고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별들인 천사들과 성도들이 치르는, 땅과 하늘에서 동시에 치르는 최종 전쟁입니다.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계 16:16).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구약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인류 역사 가운데 등장하는 적그리스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시스라와 가나안 왕 야빈도 그러한 적그리스도들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헤롯 왕도 그러하고, 요셉에 태어날 때 애굽의 바로 왕도 그러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드보라는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시스라의 멸망에 초점을 두고 승리의 찬양의 노래를 마칩니다. 마치 계시록이 마지막 적그리스도를 멸망시킴으로 성경 전체를 마무리하는 것과 같은 그런 분위기입니다.
그리고 그 귀한 찬양의 노래에 시스라의 멸망은 대단히 상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사 에훗 때에 모압 왕 에글론의 죽음 장면에서 배설물을 싸고 죽는 모습을 너무나 선명하고 노골적으로 묘사한 것처럼, 드보라는 시스라의 죽음과 그를 믿고 사랑했던 어머니의 비참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때 시스라의 어머니는 시스라에게 속했던 모든 자들의 비참과 절망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시스라를 믿고 따랐던 모든 가나안 군대는 완전하게 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의 소망도 절망으로 마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이러한 성경 전체의 큰 그림 가운데 24절부터 31절까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들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있는 여인들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삿 5:24)
시스라는 매우 약은 사람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여인의 장막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야엘은 겐 사람 헤벨의 아내로서 그 당시 여인의 장막에 있었습니다. 보통 한 남편 아래 여러 아내들이 있었고 그 아내들은 여인의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헤벨의 아내가 야엘 한 사람이었는지 여럿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남자는 여인의 장막에 들어갈 수 없었고 동침하고자 하면 여인의 장막에 있는 아내 중 하나가 남자의 장막으로 건너가야 했습니다. 그것이 야곱이 첫째 아내를 맞이할 때 라헬 대신에 레아가 야곱의 장막에 들어간 배경입니다.
즉, 남자가 여인의 장막에 들어가는 것은 그 당시 문화적으로 결코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도망자라고 하더라도 여인의 장막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스라는 어떻게든 살기 위해 뻔뻔하게 그의 나라와 동맹한 겐 사람 헤벨의 아내들이 있는 여인의 장막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때 마침 그가 들어간 여인의 장막은 야엘의 장막이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많은 잔꾀를 쓰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고자 하셨으니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은 “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삿 5:31)라고 노래하며 이 시를 마칩니다.
31절은 드보라를 대표로 하는 이 땅의 모든 신자들의 기도입니다. 여기서 원수는 하나님의 원수로서 마귀 및 그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오직 어둠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반드시 멸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들은 어둠이며, 하나님은 진리시고 그들은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거룩이시고 그들은 더러움이기 때문입니다.
즉, 드보라는 이스라엘의 대적이자 그리스도의 대적인 시스라를 망하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대적들을 그와 같이 처리하시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자들에 대해서는 해가 힘있게 돋음 같이 미래가 영광스럽게 되도록 축복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노래 이후에 드보라가 살아 있는 40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태평이 있었습니다. 주의 예언자가 있고 바른 통치자가 있을 때 하나님의 백성은 평안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시스라가 죽음을 당하는 장면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고, 시스라의 어머니가 그의 죽음을 알지 못한 채 허망한 기대를 하는 장면이 묘사돼 있습니다.
25 시스라가 물을 구하매 우유를 주되 곧 엉긴 우유를 귀한 그릇에 담아 주었고
26 손으로 장막 말뚝을 잡으며 오른손에 일꾼들의 방망이를 들고 시스라를 쳐서 그의 머리를 뚫되 곧 그의 관자놀이를 꿰뚫었도다
27 그가 그의 발 앞에 꾸부러지며 엎드러지고 쓰러졌고 그의 발 앞에 꾸부러져 엎드러져서 그 꾸부러진 곳에 엎드러져 죽었도다
시스라의 죽음은 우리가 지난 번에 사사기 4장을 강론하면서 충분히 다루었습니다. 그럼에도 드보라의 시는 그 승리의 장면을 다시 반복하여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드보라의 노래, 즉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대대로 노래한 이 노래의 끝은 시스라의 어머니와 시스라에게 가장 가깝게 속해 있던 자들의 허망한 소망을 노출합니다.
28 시스라의 어머니가 창문을 통하여 바라보며 창살을 통하여 부르짖기를 그의 병거가 어찌하여 더디 오는가 그의 병거들의 걸음이 어찌하여 늦어지는가 하매
29 그의 지혜로운 시녀들이 대답하였겠고 그도 스스로 대답하기를
30 그들이 어찌 노략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그것을 나누지 못하였으랴 사람마다 한두 처녀를 얻었으리로다 시스라는 채색 옷을 노략하였으리니 그것은 수 놓은 채색 옷이리로다 곧 양쪽에 수 놓은 채색 옷이리니 노략한 자의 목에 꾸미리로다 하였으리라
](삿 5:28-30)
시스라의 어머니는 자식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미 시스라와 그 군대가 도착했을 때가 되었는데 도착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계속 창문을 통하여 밖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창살을 통하여 신음하며 부르짖습니다. 걱정이 무한합니다.
“그의 병거가 어찌하여 더디 오는가? 그의 병거들의 걸음이 어찌하여 늦어지는가”
그 어머니는 큰 길에서 먼지가 일기를 원합니다. 항상 수십년 동안 보아온 것처럼 적의 해골들을 들고 돌아오는 시스라를 기다립니다. 한없이 많은 노략물을 선물로 들고 오던 너무나 반갑던 시스라와 그의 군사를 기다립니다. 승전가를 부르며 돌아오는 시스라와 군대를 기다립니다.
더 멀리 저 끝까지 눈을 집중하여 바라보고, 이미 올 시간이 너무나 지났기에 간장을 태우며 귀를 크게 하고 전차 소리와 말 발굽 소리를 듣고자 합니다. 이미 너무나 오래 간절히 기다려서 이제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무한한 두려움과 걱정이 가슴을 짓눌러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드보라는 영으로 그 어머니와 함께 하고 있는 시스라의 시녀들이 위로의 대답을 하는 것을 봅니다. 시녀의 대답을 들은 그 어머니는 스스로 그 대답을 뇌까리며 위안을 얻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너무 노략한 것이 많아서 늦는 것이겠지. 포로로 군사들마다 한 두 처녀를 데려오겠지. 지금 즈음 시스라는 가장 값비싼 채색 옷을 노략하고 호탕하게 웃고 있을 게다.’
이들의 소망은 이미 시스라와 그 군사들이 전부 완전하게 망한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의 소망입니다.
지금 드보라의 노래가 암시하고 있는 것은 시스라를 향한 그들의 소망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이미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시스라의 시녀들은 임시적으로 위로가 되는 말을 하더라도, 그 거짓 위로가 크면 클수록 실제 사실을 알게 될 때 비참은 더욱 클 것입니다. 실제 사실은 이미 시스라와 그의 군대는 살륙되었습니다. 특히 시스라는 야엘의 장막 안에서 그의 관자놀이에 장막 말뚝이 박혀서 땅에 꽂혀 있는 상태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 중 가장 연약한 자가 가나안 족속에 속한 자 중 가장 강한 장군을 장막 말뚝으로 쳐서 죽인 것입니다.
시스라에게 속한 자들은 그에게 속한 자들이 부귀와 영광을 누리게 되고 더 많은 몸 종들을 두고 떵떵거리며 살 것을 소망했습니다. 그리고 승리의 영광을 온 세상에 드러내며 계속 승리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개입과 심판으로 시스라와 그의 군대는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속한 모든 자들의 소망은 영원한 절망, 즉 죽은 소망이 되었습니다.
이 노래의 마지막 장면에서 드보라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입니까? 성경 전체에서 드보라의 이 시를 통해 주의 백성에게 무엇을 말하려는 것입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유일한 소망은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승리의 소망을 둘 경우, 그 소망은 헛된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우상을 의지하는 살아가는 이 땅의 사람들의 모든 소망은 반드시 죽은 소망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무엇보다 죽음을 지나면서 그 모든 우상의 소망들은 헛된 것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 외에 다른 길로 죽음 이후 형통을 기대하는 자들은 이미 시스라의 어머니와 같이 죽은 소망을 붙든 자들입니다. 그들은 죽으면 대충 평안한 곳으로 갈 것이라고 소망하지만, 그 소망은 시스라의 어머니의 소망처럼 명약관하 하게 죽은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하여 질 수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소망하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복음의 비결을 알지 못하면, 그들의 성화에 대한 소망은 죽은 소망입니다. 이는 시스라의 어머니가 이미 시스라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즉 지식이 없는 채 헛소망, 죽은 소망을 지나고 있었던 것처럼, 복음의 진리를 모르는 무지 때문에 그들의 성화에 대한 소망은 죽은 소망인 것입니다.
반면에 성경은 산 소망을 말합니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벧전 1:3-4)
즉,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그 영혼이 들어가 있는 자들은 산 소망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시스라의 어머니처럼 죽은 소망 가운데 있습니까? 아니면 산 소망 가운데 있습니까? 죽은 소망 가운데 있는 것은 무지며, 추측이며, 임의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산 소망은 영원한 것에 대한 확신이며 사실이며 영원한 목적을 향해 살아갑니다. 그러면 무엇이 사실입니까?
사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과 그 하나님이 부패한 인간이 주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2천년 전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십니다.
죽은 소망에 머문 사람들이 이 세상에 너무나 많이 보입니다. 돈 몇 푼 더 벌면서 부자 될 소망을 갖고 열심히 살지만 죽은 소망입니다. 어느날 죽음과 함께 시스라의 어머니처럼 될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기다리는 것처럼 삶 가운데 있던 모든 소망이 영원한 헛된 소망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도리어 무한한 절망과 두려움이 영원한 현실이 되는 것을 겪게 될 것입니다.
대다수의 교인들이 바른 지식이 없어서 죽은 소망을 붙들고 살고 있고, 구원의 지식이 없어서 죽은 소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릇된 편에 선 것은 이미 죽은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죄를 지어도 죄가 아프지 않은 사람은 참으로 죽은 소망을 갖고 사는 악인들입니다. 그들의 영원한 종국은 영원한 절망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른 지식은 오직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불쌍한 인류가 멸망하는 것을 막으시려고 성경을 주셨습니다. 죄악의 길에서 죽은 소망을 붙들지 말고 살아나라고 바른 진리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산 소망을 갖고 실제로 이 땅에서도 그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하면서 영원한 산 소망 가운데 살아가라고 부르셨습니다. 산 소망은 생명의 길입니다. 의의 길로 걷게 하는 소망입니다. 그 길에는 하늘의 영원한 행복이 이 땅에서 누려지는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산 소망을 살아가는 자의 실체는 부활 승천하셔서 실제로 만유의 왕으로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교통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실제로 내 안에 와 계셔서 그분과 교제가 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함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인하여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어 찬양과 감사와 평강과 하늘의 기쁨이 차고 넘칩니다. 무엇보다 산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자는 성령의 역사로 인해 죄의 세력을 이기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변화됩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주를 닮아가기에 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동일한 산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자들을 보며 동일한 현상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며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시간 묻습니다. 산 소망을 갖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량이 나의 죗값을 다 치르신 사건이라고 바르게 알고 있습니까? 살아계신 부활의 예수님을 실제로 나의 왕으로 모시고 그분의 지시에 따라 철저하게 살아갑니까? 이것이 산 소망의 삶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이 아니라면 그 삶은 죽은 소망의 삶입니다. 시스라처럼 이 땅에서 승리하며 사는 듯 하다가 어느 날 하나님의 심판으로 영원히 멸망하게 되는 삶입니다. 즉, 지옥으로 떨어지는 삶입니다. 그 때 죽은 소망을 갖고 살던 사람의 특징은 마귀를 닮아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과 더러움과 불의와 위선과 미움과 정욕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산 소망을 가진 자는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사랑의 교제를 실제로 성령 안에서 나누기 때문에 더욱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정직하며 순결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산 소망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죽은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 3:35-36)
그러나 산 소망을 가진 자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교회를 구성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 2:20-22)
더 늦기 전에 산 소망을 붙들기 바랍니다. 산 소망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붙들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과 함께 다 잃을 것입니다. 시스라가 될 것입니다. 시스라에게 속한 그의 어머니처럼 될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길은 분명한 죽은 소망의 길입니다. 그러나 거룩하고 의로운 새하늘과 새땅을 향한 길은 분명히 산 소망의 길입니다. 그 길 자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요 14:6-7)
베드로가 외칩니다.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행 4:11-12)
세상에 속한 건축자처럼 생명의 길을 버리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보내 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세주와 왕으로 모시고 산 소망을 갖고 남은 삶을 살겠습니까? 시스라의 길처럼 하나님과 원수 된 죄악의 길을 가겠습니까? 시스라의 어머니처럼 죽은 소망을 갖고 살겠습니까? 아니면 드보라처럼, 바락처럼, 그리고 믿음의 전쟁을 치른 아름다운 주의 자녀들처럼 여호와 하나님 편에 서겠습니까? 그리고 야엘처럼 그분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의의 길을 걷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죽은 소망에서 산 소망으로 옮기는 과정에 가장 중요한 사건은 회개와 죄 사함입니다. 이 시간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가 없이 사는 삶은 이기심과 정욕으로 사는 죄악된 삶 밖에 없습니다. 내 힘으로 죽은 소망을 갖고 살던 이 삶을 회개하고 이제 하나님이 보내주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나사렛 예수님과 더불어 성령 안에서 믿음으로 교제하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만나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주의 산 소망을 가진 나의 천국의 형제 자매들과 온 힘을 다해 주를 모시고 살아가기 바랍니다.
더 늦기 전에 이 밤에 우리 모두가 철저하게 산 소망의 삶으로 돌아오기 위해 우리 주 살아계신 우리의 영원한 왕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의 속량을 감사함으로 믿고 붙드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