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픽업 해주느라고 왕복 4시간 운전한 것밖에 없는데 눈 알 통증이 심해 일정을 취소하고 일찍 잤습니다. 노안인가? 새벽에 왼 발 새끼부터 줄줄이 3개가 가려워서 빡빡 긁었더니 아프네요. 할 수 없이 일어나 무좀 약을 바르고 찬물을 댔어요. 잠이 올 리가 없지요. 무좀은 40년 동안 함께 살았으니 가족 같은 느낌도 있어요. 치질 수술 하면서 똥꼬 살점을 떼낼 때 시원 섭섭했고, 그 섭섭함 때문에 아직 까지 무좀을 달고 사는 걸까요? 이렇듯 세포들의'운동에의 의지'마저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움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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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 2개의 글을 쓰는 것이 목표이고 루틴입니다. 아비는 에예공이 일일 한 개가 루틴이 되길 염원하고 있습니다. 다들 아시는 것처럼 '무의식적 의식'에 의해 세상이 움직입니다. 맹목적 의지로서의 '생명 운동'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말입니다. 생명이 있는 만물은 저마다 '의지를 가지고 있고', 그 의지는 '인과 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운동하는 힘은 '힘에의 의지'이죠. 욕망은 결핍에서 오지만 결핍을 채우면 다시 새로운 것을 욕망 하기 때문에 욕망의 리사이클링은 계속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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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인생이 콩밥'이란 말이 생긴 것 같아요. 들뢰즈도 “신체란 형태화 된 인간의 총체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환원될 수 없는 다수의 힘들로 구성돼 있다”고 말했어요. 만물은 예외 없이 '힘에의 의지'를 가지고 '힘에의 의지'라는 위계의 복합성으로 이뤄집니다. 인생 사도 각자 살아보겠다고 난리 법석을 치다 보니 쉬운 인생이 없습니다. 오죽 했으면 '인생 자체가 고해'이니 태어나지 않은 게 축복이라고 했을까요? 고통의 근원이 '욕망'인데 욕망은 끝이 없고, 만족할 수 없으며, 항상 고통과 실망을 낳아요. 기대하니까 실망 한다고 하잖아요. 니미럴,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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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고통과 권태를 반복 하다가 죽는 거지요. 쇼펜하우어는 고통을 멈추려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인생을 방관하는 것이 행복에 가까운 삶이라고 주장합니다 만 말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게 말이 돼? 여기 까지면 괜찮은데 인간이 완전히 욕망을 버리고 살 수는 없다는 것도 인정하라네요. 결국 쇼펜하우어처럼 '버리라'라는 말은 결핍과 권태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탈하는 법을' 배우라는 뜻이 아닐까? 예수의 '자기 부정'과 붓다의 '고행'은 차이가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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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은 같은 의미로 보여요. 욕망(의지) 때문에 생긴 고통 문제의 해결책은 죽어야 끝납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서 시공간과 인과율에 제약을 받지 않는(무의지) 상태로 진입하는 것이(해탈/예술) 필요합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나니... 보라 새롭게 된 이 피조물 새롭게 하소서. 새롭게 하소서. 늘 새롭게 하소서. 바울은 내가 날마다 죽노라고 했어요. '종교적 명상'을 통해 해탈에 이룰 수 있다는 말이 믿어지시나요? '예술'은 모든 학문 위에 최고봉이라는 것 아닙니까?
"예술은 학문이 아닌 삶의 태도이며 실천적인 것이다"
Art is not a discipline, but an attitude of life and a practical thing.
2024.11.22.fri.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