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 당시 MBC 청룡에는 '용 삼총사'가 있었다. 김용달, 김용윤, 김용운이 그 주인공들이었다. 세 사람은 비슷한 이름과 나이, 엇비슷한 실력으로 팬들을 혼란(?)에 빠뜨리곤 했다.
김용달씨(48)는 현대에서 타격코치로, 김용윤씨(49·뒤에 김바위로 개명)는 SK 드림파크 사감으로 현재까지 그라운드 안팎에서 야구를 위해 뛰고 있다. 그렇다면 82년 포수부문 첫 골든글러브를 차지했던 김용운씨(49)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90년에 은퇴한 뒤 한때 대만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다는 그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어렵게 연락이 닿았을 때 그는 창원의 한 골프연습장에서 멋진 폼을 자랑하는 티칭 프로로 변신해 있었다.
◇방망이 대신 잡은 골프채
북창원IC에서 북면방향으로 빠져나오면 곧바로 눈에 들어오는 '천주산 골프랜드'. 그곳에서 관리직함 명함을 가진 김용운씨를 만났다.
그가 골프채를 잡은 것은 80년대 중반부터. 취미 삼아 시작한 골프가 이제는 직업이 돼버렸다. 야구계를 떠난 그가 티칭 프로로 변신한 것은 큰딸 정은씨(23) 때문이다.
대만 프로야구에서 감독생활을 하던 96년, 그는 당시 중학교를 졸업한 큰딸을 대만으로 불러들여 본격적으로 골프수업을 시켰다. 개인선생을 붙여주고 야구를 하지 않을 때는 딸과 함께 필드에 나갔다. 아버지의 남다른 취미가 딸을 골프의 길로 이끌었다.
대만에서 3년 생활을 마친 뒤 딸과 함께 귀국한 97년 초. '딸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아버지도 골프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는 여러 군데 골프연습장을 돌며 티칭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2002년 중반부터 지금의 천주산 골프랜드에서 일하고 있다.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10시 가까이까지 연습장을 지킨다. 초등학교 아이들부터 직장인들까지 일일이 폼을 교정해주는 선생님이다. 야구선수 김용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그는 옛일을 굳이 먼저 꺼내지 않는다.
연습장을 지키면서도 그의 온 정신은 서울에 있는 큰딸 정은씨에게 가 있다. LPGA 입성을 꿈꾸는 딸의 꿈이 바로 자신의 꿈이기 때문이다.
◇순탄치 않았던 아마추어시절
대전에서 태어난 그는 신흥초등~한밭중학교를 거쳐 야구장학생으로 전주상고에 진학했다. 1학년 때 키가 160㎝도 되지 않을 정도로 체격이 왜소했다. 멀리 유학간 학교에서는 보이지 않는 벽이 그를 괴롭혔다. 어느날 팀 동료와 주먹다짐을 한 끝에 학교를 뛰쳐나왔다. 몸도, 실력도 그리고 환경도 야구와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다.
막상 학교를 버렸지만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고향에 돌아와 봉제공장에 취직했다. 기술을 배워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함이었다.
공장에 들어가고 운동을 그만두자 이상하게 키가 훌쩍 커버렸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친구들의 추천으로 갓 팀을 창단한 서울 천호상업전수학교에 늦깎이 1학년으로 입학했다. 나이가 많아 제대로 경기에 나서지 못했던 3학년 시절, 갑자기 입대영장이 날아왔다. 돌파구가 없던 그때 그에게 빛이 돼 준 사람은 지금은 고인이 된 김계원 전 국가대표감독이었다.
김 전 감독은 군 입대를 미룰 수 있도록 실업팀이던 한국전력에 그를 입단시켰고 2년간 선수로 뛴 뒤 육군 경리단에 입대했다. 1년반 동안 전방에서 현역병으로 근무하고 다시 경리단 야구팀에서 방망이를 잡았다.
군 제대를 앞둔 무렵 하늘 같은 김 전 감독의 사망소식을 듣고 실의에 빠졌다. 그러나 스승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이어가며 79년 제대 후 다시 한전 유니폼을 입었다.
◇덤이라고 생각했던 프로생활
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자 바야흐로 MBC 청룡에 창단 멤버로 입단했다. 그때가 스물일곱이었다. "한전에서 있었다면 벌써 은퇴했을 나이였지만 운이 좋아 프로에 들어와 계속 야구를 할 수 있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그해 하기룡, 유종겸, 이길환 등 투수들과 호흡을 맞췄다. 현재 한화 감독으로 있는 유승안과 번갈아가며 포수 마스크를 썼고 당시 수비 능력만을 놓고 평가하던 골든글러브 부문에서 첫 수상자가 되는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80년 대통령배실업리그 수위타자(타율 0.378) 등 화려했던 아마추어경력과 첫 골든글러브의 영광은 세월과 함께 사그라졌다.
3년간의 MBC 생활 뒤 85년 3월 현재는 고인이 된 심재원과 맞트레이드 돼 롯데 유니폼을 입었다. 해가 갈수록 벤치를 지키는 횟수는 늘어만 갔다. 서른다섯이던 90년 19게임에만 출장하는 등 선수로서 한계를 넘어섰다고 생각한 그는 미련 없이 유니폼을 벗었다.
◇대만에서 꽃핀 지도자의 꿈
이듬해 3월 그동안 모았던 돈으로 부인에게 조그마한 옷 가게를 마련해준 뒤 홀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선진야구도 경험해보고 못해본 공부도 하고 싶어서였다. 1년만에 다시 돌아온 그에게 롯데는 스카우트직을 제의했고 성에 차지 않았던 그는 두말없이 거절했다.
92년 택시회사를 차려 사업가의 길로 들어섰다. 돈이 모이자 93년에는 마산·창원지역에 자신의 이름을 건 어린이야구 교실을 개설하기도 했다. 물론 그나마 모았던 돈을 다 까먹으며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방황하던 94년 초 우연히 대만 프로팀인 준궈 베어스의 배터리 코치직 제의를 받았다. 갑작스러운 대만행이었지만 그토록 그리던 지도자 생활이라 정말로 열과 성을 다했다. 만년 꼴찌 팀을 3위까지 끌어올렸다. 그 덕택에 이듬해 신농 불스로 재창단한 팀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하는 기쁨도 맛봤다. 3년 동안의 대만생활은 나날이 신나기만 했다. 골프 꿈나무로 커 가는 딸이 있어 그의 대만 생활은 더욱 뜻 깊었다.
◇인생의 지침이 된 야구
그에게 야구는 인생을 가르쳐 준 '선생'이었다. 어려운 집안 환경 탓에 고교시절 한때 야구를 접었고 다시 시작해서도 눈물 젖은 빵으로 배를 채우며 운동을 했다.
한전에서 뛰던 시절, 겨울이면 숙박비가 없어 남의 집 담벼락 밑에서 새우잠을 잔 날이 하루이틀이 아니었다. 차디찬 새벽 기운에 부르르 떨며 눈을 떴던 그에게 야구는 인생 그 자체였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만이 갖는 아픔과 성공의 기쁨을 그는 야구를 통해 얻었다.
야구에 대한 아쉬움이 있을 법한데 그에게 지금 남은 것은 후회보다는 감사함이다. '목표가 있으면 길은 보인다'는 교훈을 야구를 통해 얻었기 때문이다. 그는 딸이 LPGA에 입성하면 티칭프로 일을 그만둘 생각이다. 자신의 이름으로 조그마한 사업체를 운영할 꿈을 갖고 있다. 프로골퍼 김정은의 아버지 김용운이 아닌 자신만의 또 다른 인생을 걸어가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