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스런 추억 - 윤동주(尹東柱)
봄이 오든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차가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윤동주(尹東柱,1917∼1945)
시인. 아명은 해환(海煥). 북간도의 명동천에서 출생. 연희 전문을 졸업하고,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 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같은 해 가을 도시샤 대학 영문과로 전학하였다.
1937~1938년에 <카톨릭 소년>지에 [병아리] [무얼 먹고 사나] [거짓부리]등을 발표하였고,
연희 전문 재학 시절에는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 일보>학생란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에 발표하였다.
1943년 친우인 송몽규와 함께 귀국하다가 독립 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잡혀
일본 후코오카 형무소에서 복역 중에 옥사했다.
그는 일제 암흑기 저항 시인으로, 고고하고 준열한 민족적 서정시를 썼다.
사후에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발간 되었고,
그 밖의 작품으로 [서시] [십자가] [자화상] [참회록] [별 헤는 밤]등이 있다.
▲▲ ※추억의 사진 2매 : 서울역 & 전차
붉은 인동초
쌍떡잎식물 꼭두서니목 인동과의 덩굴식물로아메리카 원산
꽃이 인동초는 처음에는 흰색으로 피었다 노란색으로 변하지만,
붉은인동은 처음부터 붉은 색으로 5~월에핀다.
줄기는 연한 녹색 또는 옅은 붉은색을 띠며 털이 빽빽이 나고
덩굴성으로 다른 물체를 감으며 뻗어 자란다.
열매는 인동초는 검은색으로 익는데 붉은인동은 빨간색으로 익는다.
노지월동이 되고 덩굴성으로 자라는데 열매가 달리는 모습을 보기가 어려워요.
열매는 9~10월에 검게 익는다. 잎과 줄기는 이뇨제나 해독제로 사용한다.
꽃말 : 사랑의 인연, 헌신적 사랑
※윤동주(尹東柱)는일제강점기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특유의 감수성과 삶에 대한 고뇌, 독립에 대한 소망이 서려 있는 작품들로 인해
대한민국 문학사에 큰 기여를 한 문인이다. 사실상 김소월, 한용운 등과 함께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시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특히 그의 유고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서시는
지금도 자주 회자되는 데다 교과 과정에서도 배우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일반인들은 윤동주 하면 주로 시인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지만
상술했듯 윤동주는 엄연히 독립운동가였다.
직접적인 무장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저항시,
그리고 삶의 고뇌에 대한 시를 많이 썼고
결국 체포된 와중에도 2010년에 세상에 공개된 윤동주 재판 관련 문서를 살펴보면
놀라운 점이 많다. 그는 당시 악명 높았던 특고 앞에서도, 일제 재판관 앞에서도 당당했다.
내성적인 이미지의 시인은 사라지고 형사 앞에서도 조선 독립에 대한 열망과 대책을
열정적으로 토로하기를 마다하지 않은 독립투사의 이미지가 선명히 다가온다.
그의 판결문에는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구체적인 운동 방침을 논의했다는 사실도 적시돼 있다.
윤동주 본인은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일본 유학으로 인해
민족의 걸어가야 하는 길과 다른 길을 걷는 것 아닌가 싶은 자신의 행적을 반성하고
이에 대한 부끄러움[20]을 나타낸 것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정작 1930년대부터
일제의 강압과 회유책에 많은 문인들이 절필 혹은 변절하는 세태 속에
죽는 날까지 독립운동을 하다 죽었기 때문에 이육사와 더불어 민족시인으로 추앙받는다.
첫댓글
어쩌면 이렇게 그이름
"윤동주"
자손만대 이름을 남기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