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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라와 바락의 노래 3
삿 5:24-31
24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들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있는 여인들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
25 시스라가 물을 구하매 우유를 주되 곧 엉긴 우유를 귀한 그릇에 담아 주었고
26 손으로 장막 말뚝을 잡으며 오른손에 일꾼들의 방망이를 들고 시스라를 쳐서 그의 머리를 뚫되 곧 그의 관자놀이를 꿰뚫었도다
27 그가 그의 발 앞에 꾸부러지며 엎드러지고 쓰러졌고 그의 발 앞에 꾸부러져 엎드러져서 그 꾸부러진 곳에 엎드러져 죽었도다
28 시스라의 어머니가 창문을 통하여 바라보며 창살을 통하여 부르짖기를 그의 병거가 어찌하여 더디 오는가 그의 병거들의 걸음이 어찌하여 늦어지는가 하매
29 그의 지혜로운 시녀들이 대답하였겠고 그도 스스로 대답하기를
30 그들이 어찌 노략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그것을 나누지 못하였으랴 사람마다 한두 처녀를 얻었으리로다 시스라는 채색 옷을 노략하였으리니 그것은 수 놓은 채색 옷이리로다 곧 양쪽에 수 놓은 채색 옷이리니 노략한 자의 목에 꾸미리로다 하였으리라
31 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하니라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
삿 5:24-31 / 여인 야엘이여, 겐 사람 헤벨의 아내여, 복을 받아라. 집안에 처박혀 지내는 다른 여인네들보다도 더 복을 받아라. 25) 적장 시스라가 물좀 달라고 애원하였을 때 우유를 물 대신 주고는 값비싼 그릇에 우유를 갖다주고는 26) 손으로 장막 말뚝을 뽑아들고 오른손으로 장인들이나 쓰곤 하는 망치를 거머쥐고 그 망치로 시스라의 머리통을 꿰뚫어 머리의 관자놀이 꿰뚫어 27) 시스라가 야엘의 발밑에서 꿈틀거리고 죽었다네. 그녀의 발아래에서 꿈틀거리고 죽어 갔다네. 바로 그 자리에서 옴쭉달싹도 못하고 죽어 엎드러졌다네. 28) 시스라의 어미는 말할 수 없이 걱정되어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겠지. 창살틈으로 소리도 쳤겠지. 어찌 그리도 더디냐? 날쌘 병거가 이리도 늦느냐? 바람같이 날랜 병거 바퀴가 이리도 애타게 더디 구르냐? 29) 그 어미의 몸종들 가운데서 그래도 지혜 있다는 것이 혼잣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겠지. 30) 그 날랜 군사들이 어찌 약탈한 것들을 하나도 챙기지 못하였으랴! 어찌 그 약탈물을 나누지 않았으랴! 용사하나에 여자하나씩 또는 둘씩, 시스라 제 몫으로는 값비싼 비단옷, 말할 수 없이 값진 비단옷 챙겼겠지. 우리 아낙들에게 나눠 줄 갖가지 아롱다롱 수놓은 구하기 힘든 목도리를 챙겼겠지. 31) 이렇듯 여호와여, 주님의 원수들은 거꾸러뜨리시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여 따르는 이들, 밝은 새 아침 동녘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힘차게 뻗어 나가게 하소서' 그 뒤 그 땅에는 40년 동안 평화가 깃들였다.
야엘은 겐 사람 헤벨의 아내입니다. 헤벨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자손입니다. 이방인으로 가사를 돌보는 주부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을 야엘이 해냈습니다.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24) 겐 족속이 이스라엘과 우호적이었지만, 야엘의 남편 헤벨은 가나안 야빈 왕과 화친을 맺었기에 가나안 왕들과 더욱 가까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을 적극적으로 도운 야엘의 행동은 메로스 거민들과 비교할 때 축복받아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야엘의 행위는 그의 가문이 가나안 족속과 맺은 화친 언약을 깨고 하나님께 헌신한 것입니다. “장막에…복을 받을 것이로다”라는 말씀은 장막에 사는 여인들 즉, 양을 치는 여인들 중에서 가장 많은 축복을 받으라는 의미입니다. 시스라는 야엘에게 물을 요구하였고, 야엘은 그에게 엉긴 우유 즉 요즘은 요구르트와 비슷한 그 당시 최고급 우유를 귀한 그릇에 담아 주었습니다.
손으로 장막 말뚝을 잡으며(25-31) 시스라는 잠들었고 야엘이 장막 말뚝을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박아 시스라는 죽었습니다. 이로서 시스라는 육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권력과 명예까지 모두 잃었습니다. 시스라의 어머니는 창문 밖을 바라보며, 그녀의 아들이 전투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들이 돌아오면 자신에게 주어질 전리품 채색옷같은 전리품을 상상하고 흥분했습니다. 자기에게 이익을 원한다면 다른 여인들이 강간과 죽임을 당해도 상관이 없다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그녀와 시녀들은 세상일에는 욕심이 많았지만, 의로움과 이웃 사랑에는 냉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지혜로운 시녀들”이라는 말은 그들의 생각이 지혜로워 보일 수 있지만, 결국 어리석다는 것을 꼬집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주의 원수들은 다 이와같이 망하게 하시고”라는 드보라의 간구는 시스라 군대가 형벌을 받아 망한 것같이 미래에도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의 대적들에게 형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라는 소원에서 태양은 신으로 숭배되거나, 왕을 신의 현현으로 여겨지는 고대 근동의 풍습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러나 드보라의 찬양에서 태양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역경을 이기고 거두는 승리의 의미입니다.
적용: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강퍅한 세상 통치자들의 계획에 의해 구속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을 축복하시며 사용하십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십니까? 세상 욕심에 몰두하십니까?
이 땅의 모든 생물은 인자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 분은 진리로 세우신 이 땅의 주인이시면서도 모든 피조물들에게 겸손하신 진실된 분이십니다. 자신을 높이시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높이시며 우리의 부족함을 채우시며 필요한 것을 묻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영육이 방황할 때 살피시고 아플 때는 치료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의 이러한 배려는 우리에게 에너지를 공급해 주십니다. 행복은 물질이나 명예, 권력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모셔야 합니다.
< 설 교 >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3
삿 5:23-31 / 우인택 목사
오늘 본문은 드보라와 바락의 승전가 마지막 단락입니다.
여기서는 가나안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을 돕지 않은 메로스에 대한 저주 선언과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를 죽인 야엘에 대한 축복 선언, 그리고 시스라의 죽음에 대한 조롱과 드보라의 마지막 기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먼저 23절에 하나님의 편에 서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임을 선언합니다.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주민들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
여호와의 사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메로스가 이스라엘을 도와 가나안 족속들을 치지 않았으므로 그 주민들을 저주하고 또 저주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메로스를 거듭하여 저주하는 것은 한편으로 볼 때 너무 가혹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메로스 주민은 이스라엘을 대적하지 않았고, 다만 이스라엘을 돕지 않는 중간적인 입장을 취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메로스 주민을 이토록 거듭거듭 저주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일들에는 반드시 사탄이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일들에는 반드시 하나님 편에 서든지 아니면 그 대적의 편에 서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회색지대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돕지 않았다는 것은 곧 사탄의 편에 서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성경은 열왕기상 18:21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것은 곧 바알을 따르는 것과 진배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1:23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회주의자들인 메로스 주민을 대적자로 여기시고 거듭되는 저주의 선언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메로스 주민들의 이러한 중도적인 입장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은 인정하지만 믿지는 않는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은 “모든 종교를 인정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중간적인 입장은 곧 기손 강 전투에서 이스라엘을 돕지 않았던 메로스 주민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대적하지 않는다고 해서 멸망의 저주를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더 안타까운 것은 우리 성도들 중에서도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런 사람들 역시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도 천국을 소유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책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7:21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제가 갈라디아서를 상고할 때 ‘믿음’의 또 다른 뜻은 ‘충성’이라고 말씀드렸듯이, 믿는다면서 충성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메르스 주민과 다름이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신앙의 중간지대는 없으며, 하나님 편이나 그 사탄의 편, 이 둘 중 하나에 속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편에 확실히 섬으로 사탄을 대적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기는 승리와 함께 천국을 소유하는 기쁨 또한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2. 이어지는 28-30절에 시스라의 어머니가 그의 시녀들과 함께 시스라가 승전하고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렸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각에 시스라는 연약한 한 여자의 손에 죽임을 당해 이스라엘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고 말았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이 잘되기를 소망하고 기도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그 자식이 악한 자라면 그러한 기대와 소망은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음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히 교훈합니다.
아무리 순수한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이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형통하게 되기를 소망하는 것이라면 그 소망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이 자녀를 위해 아무리 깊은 사랑으로 기도를 한다고 할지라도 그 당사자가 하는 일이 옳지 않을 때는 그 기도가 헛될 뿐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우리의 자녀가 바른 길에 서 있지 못할 때에 그를 위해 해야 할 기도는 그가 형통하기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그가 그 잘못된 길로부터 돌이켜 새 사람이 되기를 위한 기도여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그러한 기도를 통해 방탕한 자녀를 하나님의 선한 일꾼으로 변화시킨 일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오늘, 기도하실 때 자녀들이 진리위에 우뚝 선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다함께 31절 읽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하니라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
여기서 ‘이와 같이’라는 말은 가나안 왕 야빈의 패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드보라는 하나님의 백성을 이십년 간이나 압제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였던 가나안 왕 야빈이 결국에는 그 권세를 지키지 못하고 패망하였던 것처럼 하나님의 대적하는 모든 자들이 망하게 해 달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드보라의 노래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인은 결국 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였던 야빈이 한 순간 동안은 형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며 그 누구보다도 큰 권세와 영광을 누렸지만 결국은 패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비록 악인이 의인보다도 더 형통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자기의 죗값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하나님의 때가 꼭 우리의 현세에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적했던 악인들이 죽는 그 순간까지 얼마든지 행복하고 평안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할지라도 그 악인들은 결국 마지막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며, 그곳에서 영원한 지옥의 판결을 피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시 1:5-6).
여러분, 악인은 결국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의인과 함께 영광을 차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불의의 열매를 먹고 마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의롭고 선한 삶을 통해 악인들에게 믿음의 길을 보여주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여러분을 반드시 새벽 별과 같이 빛나게 하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편에 서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임을 분명하게 깨닫습니다. 믿음을 소유한 자로서 하나님께 충성하는 저희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악한 자녀의 형통을 위한 기도는 그 기도가 아무리 순수하고 절실하다 할지라도 결코 응답되지 않음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저희들 모두 자녀의 형통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이 악을 버리고 선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복과 저주
삿 5:23-31
인간의 욕심이란 삶의 구석구석에 자리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단지 우리들이 욕심이 욕심임을 의식하지 못하고 욕심에 이끌려서 자연스럽게 살아왔을 뿐이지 자신을 포기하지 못한 우리로서는 삶 자체가 이미 욕심이었으며, 욕심 안에서 허덕이고 욕심 안에서 힘들게 살아왔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눈으로 보고 듣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욕심이 발동하는 존재인가 봅니다. 그러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으니 믿음조차도 우리의 욕심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욕심을 포기하지 못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니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표현이 너무 지나쳤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바로 제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입니다.
제가 16줄의 이 글을 쓰기까지는 무려 3시간 20분이 걸렸습니다. 한 페이지를 쓰고 지워버리고, 또 한 페이지를 쓰고 다시 지워버리고, 다시 또 한 페이지 반을 쓰고 또 다시 지워버리기를 반복을 하면서 3시간 20분이 흘렀습니다. 왜 지워버렸느냐고요? 물론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입니다. 그러면서 이번주 주보는 포기할까를 거듭 생각을 하면서 많은 생각을 해봅니다. 힘들다고 느끼면서 왜 하는지, 과연 누구를 위해서 설교를 쓰고 있는 것인지, 말은 성도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혹시 나 자신을 위해서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많은 생각을 거듭하면서 결국 글에 매어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합니다. 설교를 포기하지 못한 채 설교를 쓰고 있으니 마음에 안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저는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고 설교를 쓰는 것이 아니라 저를 마음에 두고 설교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제 마음에 드는지 안드는지가 기준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설교에 대한 욕심인 것 같습니다.
멋있는 글, 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글, 복음을 전하는 목사다움을 나타낼 수 있는 글을 의식했던 것은 아닌지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멋있는 단어를 사용을 하고, 문장을 멋있게 만들어 낸다고 해도 그것으로 여러분에게 생명을 줄 수 없음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무익한 인간의 무익한 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설교를 통해서 복음을 남기고 그리스도를 남기고자 한 것이 아니라 멋있는 설교문을 남기고 빛나는 문장을 남기고자 하는 욕심이 담긴 것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글 역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 아닌지 조심스럽게 저를 살피게 됩니다.
이러한 제 자신을 살피면서 인간은 욕심에서 떠날 수 없는 존재임이 실감이 됩니다. 어떤 일을 하게 되면 아무리 그 시작은 선한 동기였다고 해도 결국은 자신의 만족으로 결론짓게 되는 것이 인간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설교를 통해서 자기 만족을 느끼고, 글을 통해서도 자기 만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인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과 은혜는 설교로 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다시금 자각하며 설교를 쓰게 됩니다. 감사한 것은 설교로 생명과 은혜를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설교를 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굳어진 것이 아니라 설교로 생명과 은혜를 줄 수 없음을 설교하자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무익한 자이기에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 제가 해야 할 말인 것 같습니다. 고급스러운 말을 할 필요도 없고 단지 무익한 자로서 알게 된 그리스도만을 말하는 것이 제가 여러분에게 할 일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 것에 대해서 참으로 감사함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무익한 자들입니다. 우리 중에 어느 분이 과연 하나님에 대해서 유익한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사사건건 자기 욕심을 발동하고 무엇을 해도 자신을 위해서 하게 되는 우리가 입으로 그리스도를 위한다는 말을 한다고 해서 과연 그리스도를 위한 자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리스도에게 도움이 되는 자로 살아가겠다는 발상 자체부터가 이미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경에서는 여호와를 돕는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23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거민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메로스라는 거민이 어떤 거민인가는 알 수 없습니다. 메로스 거민은 이 본문에서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메로스 거민이 어떤 거민이냐가 아니라 그들이 여호와로부터 왜 저주를 받았느냐 입니다.
여호와는 메로스를 저주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메로스 거민이 여호와를 돕지 아니했다는 것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돕지 않았다는 것은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는 말씀을 볼 때 이스라엘을 도와서 야빈의 군대를 치지 아니한 것을 의미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서는 메로스 거민이 여호와를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저주를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여호와를 돕는다는 것은 신자에게 있어서 아주 중대한 일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제가 말씀드린 것과는 반대가 됩니다. 저는 앞에서 말씀드리기를 인간은 무익한 존재이기 때문에 여호와를 도울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지금의 우리가 여호와를 도울 수 있는 존재가 못된다면 과거 그 누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지금의 우리나 메로스 거민이나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메로스 거민도 무익한 인간이기에 하나님께 도움이 안되는 존재임이 분명한데, 여호와는 그들이 여호와를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저주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본문을 대하면서 참으로 무익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 우리들이 과연 여호와를 도울 수 있는지, 그리고 여호와를 도울 수가 있다면 과연 어떤 것이 도움이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분명히 우리는 무익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어떤 일을 한다고 해도 결국 자신을 위해서 그 일을 하게 되는 것이 바로 욕심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실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도움이 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적인 차원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께 도움이 되는 것을 구제하고 헌금하고 봉사하는 차원으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저 14절부터 보면 드보라는 이스라엘의 각 지파를 언급하면서 야빈과의 전투에 참여한 지파와 그렇지 않은 지파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가령 14절에서 "에브라임에게서 나온 자는 아말렉에 뿌리 박힌 자요 그 다음에 베냐민은 너희 백성 중에 섞였으며 마길에게서는 다스리는 자들이 내려왔고 스불론에게서는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가 내려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마치 암호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알 수 없는 말 같지만 사실은 전투에 참여한 지파를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에게서 나온 자는 아말렉에 뿌리 박힌 자요'라는 구절은 에브라임 지파에서 이번 전투에 참여한 사람들은 아멜렉이 거주하던 땅에 정착한 사람들이었다는 뜻입니다. '베냐민은 너희 백성 중에 섞였으며'라는 말도 역시 베냐민 지파 중에서도 전투에 참여한 자들이 있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그리고 '마길에서는 다스리는 자들이 내려 왔고'라는 말도 역시 전투에 참여했다는 것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마길은 므낫세의 독자였습니다. 따라서 마길에서는 다스리는 자들이 내려 왔다는 것은 므낫세 지파에서도 군대의 지도자들이 전투에 참여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므낫세라고 말하지 않고 마길이라고 말하는 것은, 므낫세 지파는 반으로 나뉘어져서 요단의 동편과 서편에 거하게 되었기 때문에 므낫세라고 말하지 않고 요단 서편에 거하게 된 마길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므낫세라고 말하면 요단 동편과 서편을 모두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의 성경 이해를 위해서 간단하게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이렇게 전투에 참여한 지파가 있는가 하면 17절에서와 같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자기들의 편안함을 추구한 지파도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메로스 거민이 여호와를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을 저주하라고 하시는 것은 다만 메로스 거민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이스라엘 모두, 그리고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메로스 거민을 행한 저주가 아니라 누구든 여호와를 돕지 않은 자에 대한 저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신자로서 여호와를 도우며 산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여호와를 돕지 않으면 저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여호와를 돕는 것입니까? 본문의 내용대로 한다면 드보라와 바락이 야빈 왕을 칠 때 함께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근거는 24절부터 나오는 야엘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메로스 거민은 저주를 받지만 야엘은 다른 여인보다 더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25절부터 야엘이 시스라에게 우유를 대접하고 안심을 시킨 뒤에 말뚝을 박아서 죽인 것에 대해서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야엘이 공식적으로 군사로서 전투에 참여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야빈의 군대 장관인 시스라를 죽였다는 것은 이미 그 전쟁에 참여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이렇게 본문에서 나타난 복과 저주는 전투에 참여한 것과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구분이 됩니다. 전투에 참여한 것은 여호와를 도운 것으로 여겨져서 다른 사람보다 더 복을 누리게 되고, 참요하지 않은 사람은 여호와를 돕지 않은 것으로 인정돼서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익한 종으로서 여호와를 돕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본문에서 말하는 전투에 참여함이 복이고 참여하지 않음이 저주라는 말씀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의 말씀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보면 여호와는 단지 야빈 왕을 치기 위해서 강림하신 것이 아니라 용사를 치시려고 강림하셨음을 말씀드렸습니다(삿 5:13절). 용사를 치신다는 것은 여호와의 대적이 야빈에게 국한 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대적은 용사이지 야빈 한 개인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대적은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욕망에는 용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용사가 되고 싶고 용사로 살고 싶은 우리들의 욕망, 그것만으로도 우리 자신이 곧 여호와의 공격을 받아야 할 대적임이 증명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보지말고 바로 나 자신을 보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서 욕심을 찾아볼 수 없다면, 힘있는 존재가 되어서 타인을 굴복시키기를 원하는 욕망이 없는 존재라면, 진심으로 여러분 자신에게 있는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한분을 의지하고 살아간다면 여러분은 분명 여호와의 대적이 아닙니다. 그러나 반대라면 아무리 우리가 거부하고 부인한다고 해도 우린 틀림없이 여호와를 대적하는 원수들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의지한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내세워서 끝까지 여호와의 대적이 아님을 주장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에 대해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그 모습에서 결국 욕심만이 보여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포기하지 못하면 우린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믿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긴 제가 믿지 말라고 부추겨도 우린 이미 믿지 않는 자이기 때문에 그런 말도 의미가 없지만 말입니다. 제가 믿음을 포기하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은, 믿음을 자기 소유로 삼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믿으려고 할 때는 자신의 행함과 정성을 의식할 수밖에 없고 자신의 행함과 정성을 의식한 이상 그것은 이미 믿음을 자기 소유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우린 그저 받게 된 것이지 우리가 믿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린 다만 여호와를 대적하는 원수였을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용사를 치기 위해서 강림하셨고, 그리고 하나님이 치시는 용사가 곧 우리 자신을 의미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은 야빈을 치면서 하나님은 용사를 치신다는 것을 알아야 했고, 결국 이스라엘 자신이 하나님의 공격을 받아야 할 위치에 있음을 발견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야빈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고 자신을 공격하는 마음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전쟁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용사를 치시는 여호와의 전쟁에 참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 의미가 명확해집니다. 내가 나를 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함을 알게 된 자로서 세상을 힘으로 살고 자신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이 곧 여호와의 전쟁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용사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며 살아가십니까? 이것은 지난주에 물었던 질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용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필요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대해서는 그들은 용사였습니다. 자신들의 열정과 부지런함으로 얼마든지 믿음을 지킬 수 있고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힘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도 말로만이 아닌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고 사는 분들이라면 여러분은 그 무엇도 믿으면 안됩니다. 여러분의 기도도 헌금도 그 무엇도 의지하지 마십시오. 그 모든 것이 다 무익한 것으로 보여져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의 기도나 헌금이나 예배를 무익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에 대해서 반발이 된다면 그 이유는 기도 헌금 등의 행위를 여러분의 소유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행위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자신을 치는 것이 여호와의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고 여호와를 돕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돕는다고 해서 우리들의 행위로 하나님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무익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돕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야빈을 치는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을 돕는 일이 되는 것은 전쟁은 승리는 여호와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전쟁에 참여해서 열심히 싸워서 여호와를 도와주라는 것이 아니라 승리는 여호와로 되어진 것임을 노래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돕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무익한 자임을 노래하라는 것입니다. 승리는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한다고 해도 그것이 다른 지파에게 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여호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득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득이 되는 쪽으로 행동을 하는 것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게 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들의 득을 생각합니까 아니면 여호와의 일을 생각합니까? 여호와의 이름이 드러나지는 것보다는 내 이름이 드러나고 자랑되어지는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여호와의 전쟁에서 멀어지는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야엘이 복을 받은 것은 여호와의 일을 도왔기 때문입니다. 자기 남편이 야빈과 친분이 있다는 것도 무시한 채 단지 하나님만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복있는 자의 행동인 것입니다.
용사를 치신 하나님이 실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우리보다 낮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돕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이 살아가신 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가난해져라는 것이 아니라 낮은 자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편에 서서 힘을 가진 것, 위대한 용사된 것이 헛된 것임을 증거 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부터 전쟁이 일어나야 합니다. 힘을 선호하고 나의 이름이 세상에 기록되기를 꿈꾸는 욕심이 곧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죄악임을 깨닫고 내가 바로 주님을 대적하는 무익한 자임을 가슴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세상 모두가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외면한다고 해도 자신의 무익함을 발견한 성도는 그리스도에게서 자신의 참된 가치와 생명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전쟁은 힘으로 사는 자를 치는 것입니다. 그 전쟁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전쟁을 돕는 신자라면 여호와 편에 서서 힘을 치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힘을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을 미워하게 되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욕심이 어떤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욕심 안에서 참으로 무익한 우리들의 실체가 보여질 것입니다. 스스로의 무익함을 알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의로 여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낮아지신 그리스의 자리에서 세상의 헛됨과 영원한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돕는 자의 삶입니다.